도입
초등학생들의 장래 꿈 순위를 보면 시대상을 압니다. 2020년 교육부에서 초등학생에게 장래 꿈을 물었습니다. 1위 운동선수, 2위 의사, 3위 교사, 4위 유투버bj, 5위 프로게이머, 6위 경찰관, 7위 요리사, 8위 가수, 9위 웹툰작가, 10위 제과 제빵사입니다. 요즈음 운동선수 잘나갑니다. 은퇴하면 TV로 진출합니다. TV 운동 프로그램이 대세입니다. 축구, 농구, 골프, 탁구, 씨름, 야구다 합니다. 국세청자료에 유투버 상위1%인 27명의 수입이 합하여 181억입니다. 1명당 평균 7억입니다. 프로게이머는 평생 게임만하면서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요리사, 제과 제빵사는 평생 맛있는 것만 먹을 수 있으니 학생들이 써 낼 만합니다. 저희 때는 대통령, 장군이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쓴 저자는 바울이고 본명은 사울입니다. 구약의 사울은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입니다. 초대 왕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건국의 아버지입니다. 사울 이름의 뜻은 큰 자입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개명합니다. 바울 곧 작 은자입니다. 그에게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로마서의 중요성
로마서는 유명한 서신서입니다. 성경을 보석에 비유한다면 로마서는 다이아몬드입니다. 편지 글이라 기보다는 한편의 논문입니다. 로마서가 서신서 중에 첫 번째로 나옵니다. 연대 순이어서 가 아닙니다. 중요도 때문입니다. 먼저 쓰인 바울 서신은 갈라디아 전후서 입니다. 많은 위인들이 로마서로 거듭났습니다. 참회록 저자 어거스틴,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천로역정 저자 존 번연, 감리교 창시지 존 웨슬레가 있습니다.
바울의 겸손
바울 이름은 작은 형제 란 뜻이라고 했는데 에베소서3:8절을 보면 자신을 더 낮춥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 문법적인 오류입니다. 가장 작은데 그보다 더 작은 거는 없습니다. 그만큼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겸손 해 졌습니다. 바울이 사울일 때는 겸손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주 잘나갔던 사람입니다. 당시 가장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입학하려면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전국적으로 일 년에 2-3명밖에 뽑지 않았습니다. 자격조건이 13살 때까지 모세오경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암송해야 합니다. 모세오경 총 몇 절인지 알아보니 5,849개절입니다. 우리는 한 절도 외우기 어렵습니다. 돌아서면 잊어버린다고 하는데 저는 돌아서기도 전에 까먹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젊어서 산헤드린 의원에 오릅니다. 종교적인 열심도 커서 예수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발본색원하는 일을 합니다. 공문 보내고 외국원정 색출작전도 나갔습니다.(행9:2) 스테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찬성표 던졌고 돌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맡아 주기도 합니다.(행7:58) 옷을 맡았다는 의미는 돌 잘 던지라고 대신 들어 준 게 아니고 증인의 개념으로 맡았답니다.
사도바울의 구원과 선교사역
이런 그가 회심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빛 가운데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멉니다. 비늘이 씌워져 3일 동안 못 봅니다.(행9:18) 눈에 비늘이 씌었음은 그의 삶과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말합니다. 우리 ‘저사람 뭔가 씌여서 저런다.’는 표현 씁니다. 바울 도 눈에 뭔가 잘못 씌어서 예수님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그가 사회적으로는 잘나갔는 지 모르지만 마음은 마치 맨발로 가시뭉치를 차는 듯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고 눈에 비늘이 벗겨집니다.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뜹니다. 그리고 개명을 합니다. 사울 이름일로 때는 위로, 꼭대기로, 더 높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자기를 채찍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는 아래로, 밑바닥으로, 더 낮고 낮은 곳을 지향하는 삶으로 바뀝니다. 그런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거듭나자마자 선교역사에 투입되지 않았습니다. 고향 다소에 가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로 초빙하기까지 11년을 은거합니다. 이때 구약성경 연구를 많이 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후 7년 동안 3차례에 걸쳐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제3차 전도여행이 끝나고 예루살렘에 잠시 들렀다 로마에 갔다 땅 끝까지 가 사명을 완성합니다. 그런데 길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먼저 편지를 씁니다. AD58년경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자 로마 시민권도 가졌습니다. 두 문화의 배경을 다 경험해 복음을 전하는데 유리합니다. 바리새인으로 율법아래 고통받는 자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교리를 정립합니다. 헬라 문화에 정통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쓰신 하나님을 통해 한 가지 생각 해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타고난 재능과 배경도 쓰십니다. ‘복음 역사에 재능, 능력, 총명함, 학문적인 수련이 뭐가 필요해’ 이런 태도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모세, 이사야, 다윗, 사도요한 모두 잠재해 있던 재능들이 쓰인 사람들입니다. 이 하나님에게 왈가왈부하면 월권입니다. 하나님은 타고난 천성, 개성 무시하 않습니다. 성경 66권도 저자에 따라 문체가 다릅니다. 작자 미상은 문체로 저자를 추정합니다. 복음역사의 감독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배우입니다. 천성적인 재능을 무가치하고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시험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로마교회의 상태
로마서의 1차 수신자는 로마에 사는 신자입니다. 로마하면 해가지지 않는 제국입니다. 로마시에만 80만살았습니다. 로마는 겉은 화려했지만 영적으로 부패한 도시입니다. 신전이 4개 이상 있었습니다. 윤리와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합니다. 로마시가 크니 교회도 컸을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반대입니다. 미미한 수준입니다. 건물도 없었고 몇 몇 가정교회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여기 출신입니다. 로마서16장에 신자들 이름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누구네 집의 사람들이란 표현은 그 집의 노예입니다. 로마교회는 초대교회 박해 때 흩어진 소수의 무리가 이룬 교회입니다. 자발적으로 생긴 교회입니다. 그러니 교리적으로 약합니다. 로마 신자는 거대한 골리앗 앞에 소년 다윗 같은 형국입니다. 바울이 이런 로마 성도들을 생각할 때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로마서1장11절에 무어라 합니까?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견고하게 하려는 소원이 강합니다. 구원받으면 끝이 아닙니다. 거듭 나자 마자 사단의 공격 대상입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가 노리는 먹이는 막 태어난 새끼들입니다. 따끈따끈한 먹이감으로 봅니다. 영적으로 막 거듭난 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견고케 하는 사역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종 바울
바울이 쓴 첫 소절이 무엇입니까? 1절을 참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입니다. 구약에 기름 부어 세운 3부류는 왕, 선지자, 제사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속에 3개직분을 가진 자 의미가 담겼습니다. 현재 사도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친 상태입니다. 펜을 들었을 때 쓸 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다. 다양한 자기경험, 간증들이 주마등 같이 스쳤습니다. 자랑도 하고 싶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경험 쓰기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 주제는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특정종교에는 특정 인물이 있습니다. 불교에는 석가모니, 이슬람은 마호멧, 유교는 공자입니다. 그런데 사람 자체를 중요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남긴 교훈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의 주제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로마서만 예수와 그리스도 용어가 103번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종, 사도, 택정함을 받은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바울은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정체성이 명확합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리어 왕에 1막4장 대사입니다. “아아!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 있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느냐!” 이 대사는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 왕의 탄식입니다. 우리가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으면 방황합니다. 그리스천으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가져야합니다. 교회에 왔을 때만 정체성이 있고 나가면 사라지면 안됩니다. 어디가든 가져야 합니다. 신앙이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하면 안되겠습니다.
그러면 의미를 알아봅니다. 첫째 종입니다. 종은 노예입니다. 매인 사람입니다. 우리는 매이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TV 프로 “나는 자연인이다.”를 좋아합니다. 이 시청률이 처음엔 폭망 할 줄 알았답니다. 그러나 3퍼센트에서 7퍼센트대로 꾸준히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이 프로를 보며 대리 만족을 합니다.
말다툼하다 이런 말합니다. “너 말이 맞으면 내가 니 아들이다.” 남의 아들 되는 것도 기분 나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를 종, 노예로 대 로마서 첫 문장에 적습니다. 당시는 로마 군대가 정복 전쟁을 하고 돌아올 때 퍼레이드를 합니다. 행렬 맨 뒤에 족쇄 채워서 끌려가는 사람들이 노예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님께 족쇄 채워진 자로 소개합니다.
왜 종으로 소개했냐 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아닐 때 사단의 노예였습니다. 이 때 가시 뭉치를 맨발로 차는 듯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여기서 해방됩니다. 예수님께 매이면 매일수록 세상 속에서는 자유롭습니다. 우리 ‘사랑의 포로, 사랑의 노예’ 란 말 씁니다. 부부사이에서 서로 깊이 사랑하면 서로 노예가 됩니다. 부부가 서로 매이면 매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매이지 않아 자유롭습니다. 다른 사람이 눈에 안 들어옵니다. 서로에게 안 매이니까 한 눈 팝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묶이면 묶일수록 세상에 부, 명예, 권력, 욕심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노예를 좀 더 생각해봅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주인이 노예 시장에서 팔려갈 위기에 있던 우리를 돈 주고 샀습니다. 이 돈을 속전이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팔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 돈을 치르셨죠? 목숨으로 값을 치루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값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상전입니다. 예수님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죽으라면 죽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도로서의 바울
두 번째는 사도입니다. 뜻은 “보내심을 받은 자” 입니다. 사도는 하나님 대리자로서 권위를 받고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입니다. 제자와 또 다른 의미입니다. 마태복음10장2절에 12제자들만을 사도로 칭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12명 뿐 아니라 70명도 있었고 120명도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27권 정할 때 사도가 쓴 서신서 여야 한다는 조건도 들어갔습니다.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했어야 하고 부활, 승천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9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또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 받았습니다. 사도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도 행합니다. 영적인 은사를 나누어 주었고, 교리를 정립했고, 진리 안에 사람들을 견고케 합니다. 교회의 질서도 세우고 감독과 장로들을 지명도 합니다. 우리는 바울을 따라서 예수님의 종으로 자신을 소개해도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면 곤란합니다. 사도의 직무를 받은 사람은 12제자와 바울까지 만 봅니다. 사도의 은사도 1세기 몇몇 성도 정도에서 그친 것으로 봅니다. 바울이 또 서신서 첫 절에 자신을 사도라고 한 것은 로마서 서신이 그만큼 권위가 있다는 반증입니다.
택정함을 입은 바울
세 번째는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다.' 입니다. 택정함의 뜻은 '따로 떼어놓다, 별도로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택정함 받았다는 것은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리새인도 구별된 자란 뜻입니다.
바리새인은 셀프 분리 자입니다. 바리새인은 길갈 때 사람들이 오면 멀리 돌아갔답니다. 죄인들과 스쳐서 자기의 거룩한 옷자락이 더럽혀질까 봐 그랬습니다. 여인이 앞에 오면 눈감고 가다가 전봇대에 부딪혀 이마가 깨졌답니다. 그러면 그 깨진 이마를 자랑스러워했답니다. 택정함을 받았다 하면서 이렇게 자기를 분리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발 딛고 사는 사람들로서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 이러면서 목을 꼿꼿이 세우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이 택정하셨다는 뜻은 우리의 구원도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함이라는 뜻입니다. 언제부터 택정했는지 그 시점을 알면 은혜가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어머니 태에 자신가 생기기 전부터 구별하였다 합니다.(렘1:4) 엡1:4절을 보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합니다. 시편139편16절도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습니다. 우리는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마음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개인적으로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부분이지만 그만큼 우리의 구원은 위대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
끝으로 살펴볼 말씀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구원의 소식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고 복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말 기쁘냐고 묻고 싶습니다. 정말 매일 뛸 듯이 기쁩니까? 항상 기쁩니까? 복음이란 말을 너무 많이 듣고 친숙 해져 이제는 무덤덤하지는 않은 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율법과 대척점에 있는 개념입니다. 율법은 죄를 튀어나오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죄가 있는 곳에 무서운 형벌만이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 하면 늘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 벅찬 표현이 로마서1장16절에 나옵니다.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부끄러워하지 않는 다는 표현이 반어법을 써서 절대적인 감격을 표현한 문구랍니다. 감격스러워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이사야35장6절은 복음을 들은 사람을 “저는 자가 사슴같이 펄쩍 펄쩍 뛴다고”합니다. 눅2:18,20에는 들에 있었던 목자들이 이 복음 소식을 듣고 놀라고 영광 돌리고 찬송했습니다. 지상 최대의 기쁨, 세계 최대의 기쁨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나는 영 기쁘지 않아! 심각 해!”이러면 곤란합니다. 교회는 축제 분위기여야 합니다. 잔치 분위기여야 합니다.
기쁘지 않은 이유를 영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죄의 깊이를 제대로 몰랐을 때입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고, 지금도 얼마나 큰 죄인이고 거기서 건져준 은혜가 얼마나 큰가 절실하지 않으면 기쁨이 반감됩니다. 또 죄 때문에 수 천도, 수만도 되는 지옥 불 못에서, 금광석도 엿가락처럼 녹여 없애는 뜨거움 속에 영원을 보낼 자였는데 구원해 주신 은혜를 묵상해보면 기쁩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 그 자체입니다. 그냥 선언이고 선포입니다. 복음에는 율법적인 요소, 도덕적 윤리적인 행위의 개념 없습니다.
성경참고구절
로마서1: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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