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경 본문은 서기관과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설교를 하셨는지 본문을 통하여 배우길 원합니다.
초등학생 예화
아버지와 초등학생 아들이 함께 설교를 들었습니다. 교인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답니다. 감동의 눈물은 아니고 설교가 철학, 어려운 신학 용어를 써 어렵고 지루하여 하품을 많이 한 탓입니다. 예상했듯이 이런 예화는 어린 아들이 다른 반응을 보이죠. 아들은 졸지도 않고 똘망똘망 설교자를 주시합니다.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설교에 잘 집중할 수 있지?” 아들은 대답합니다. “저는 목사님을 보지 않고 뒤에 십자가를 봤어요. 십자가와 산수 시간에 배웠던 더하기 기호가 겹치며 예수님을 믿는 일은 더하기와 같음을 알았어요”라고 했답니다. 아버지는 설교보다 아들에게 더 교훈을 받았답니다.
게티스버그 연설 일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며 인용 횟수가 많은 연설은 미국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Gettysburg) 연설입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통치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이 문장이 나온 배경이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어느 작은 시골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목사님 설교에 유사한 문장이 나왔답니다. 링컨은 바로 메모를 했답니다. 메모지가 없어 낡은 편지 봉투에 기록합니다. 그리고 마차를 타고 오며 연설문을 작성했답니다. 게티즈버그는 남북 전쟁 때 5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난 전쟁터입니다. 여기에 국립묘지를 세웠고 링컨이 초대받아 연설합니다. 링컨은 당시 정치적인 열세였는데 설교로 인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시골 교회 무명 목사님 설교가 역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본문은 예수님 설교입니다. 마 7장 28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예수님 설교를 들은 제자와 무리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단순한 놀람이 아니고 깜짝 놀랐습니다. 패닉상태에 빠졌습니다.
패닉의 유리
패닉이란 말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합니다. 판이라는 목축의 신인데 모습이 괴이합니다. 하체는 소 모양이고 상반신만 인간입니다. 판이 우렁찬 목소리를 내면 사람들은 공포에 빠집니다. 패닉은 여기에서 합니다.
산상수훈
예수님의 설교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입니다. 산상수훈(山上垂訓) 부르고 보화와 같은 말씀이라 하여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을 몰라도 산상수훈은 압니다. 중등학교 도덕책에도 나왔습니다. 인도의 간디도 죽는 날까지 열심히 읽었던 부분이 산상수훈입니다. 여기서 비폭력 무저항 운동 정신이 나왔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고 1년 반 지났을 때 합니다. AD31년 경입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밤새워 기도합니다. 기도 후에 무리 중심역사에서 열두 제자 중심으로 전환합니다.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이들을 제일 앞자리에 앉힙니다. 뒤에는 몰려든 무리를 앉히고 한 설교입니다.
설교 장소는 산상이라 하여 높은 산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낮은 언덕 수준입니다. 갈릴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바위에 걸터앉아 말씀을 전합니다. 말씀 전하는 모습은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와는 정반대입니다. 구약의 계명은 시내 산에서 받습니다. 2,000m 정상입니다. 백성들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우레와 번개와 구름과 큰 나팔 소리와 불꽃, 지진 가운데서 율법을 받습니다. (출 19장 16-25)
그런데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반대입니다. 누구나 다 잘 볼 수 있고 잘 들리는 장소입니다. 아이들도 예수님 가까이 가 만질 수도 있는 분위기입니다. 율법과 은혜, 모세와 예수님의 사역 성격이 대비되는 장면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천국이란 단어를 많이 씁니다. 5번입니다. (마5:3,10, 19, 20, 7:21) 사역을 시작할 때 첫 메시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입니다. (마3:2) 천국은 영어로 Kingdom of heaven입니다. 하늘 왕국으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와서 힘으로 세운 왕국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의 천국은 로마 압제자들을 물리치고 유대인이 중심이 된 왕국이 아닙니다. 마음에 이루어지는 영적 왕국입니다. 그 왕국의 백성은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또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핍박받는 자여야 합니다.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도 돌려대는 자, 이자는 생각지도 않고 돈을 빌려주는 자, 남의 눈의 티보다는 자기 눈 들보를 먼저 빼려는 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에게 실망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상수훈에 천국 백성이 가져야 할 가치관은 세상 가치관과 반대입니다.
예수님 설교에 대한 무리의 반응
본문 강의 주제는 산상수훈 내용이 아니고 설교 방식과 무리의 반응입니다. 본문 29절에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은 권위 있는 자와 같았고 서기관들과 달랐습니다. 말씀이 역설적입니다. 당시 최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들이 공회 의원이고 바리새인이고 율법사들이며 최고 지도층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나사렛 시골 출신이며 무명의 청년에 불과합니다.
좋은 설교의 7가지 조건
로버트 루이스 데브니란 사람이 좋은 설교의 요건을 7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충실성입니다. 성경 본문에만 충실해야 합니다. 강단에서 개인의 신념, 철학을 설교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는 통일성입니다. 설교를 들은 10명 중 적어도 8명은 주제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설교주제가 일관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설교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교훈성입니다. 인간은 이성적입니다. 이성을 살찌우는 설교를 위하여 영양분이 풍부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역동성입니다. 마치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는 운동선수처럼 간결하고 짜임새가 있어야 합니다. 여섯 번째는 영향력입니다. 머리와 가슴을 때리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짜임새입니다. 구성의 앞뒤가 잘 들어맞게 통일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이 일곱 가지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백합화와 까마귀를 비유한 염려에 대한 설교는 일관성 있게 결론을 향해 달려갑니다.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고, 현세가 아니라 내세에 관심을 두도록 일관되게 설교합니다.
표현도 진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두괄식을 좋아합니다. 먼저 결론을 말씀하고 그다음에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복잡한 613개의 율법 조문과 수천 가지 실행 규정 열거할 필요 없이 핵심을 찌르는 설교를 합니다.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구제, 금식 등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설파합니다. 주옥같은 비유를 들어 말합니다. 성도를 빛과 소금에 비유합니다.
바리새인의 설교
서기관들은 긴 예복을 입고 다니고 항상 옆구리에는 두루마리를 끼고 있었습니다. (눅20:46) 수백 미터 떨어져서도 서기관인지 아닌지 다 알았습니다. 당시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으니 구약성경은 파피루스에 손으로 일일이 써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일점일획도 잘 못 쓰면 안 되니까 똑똑한 사람들이 서기관들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이들은 율법을 정리하고 해석도 합니다. 그래서 율법사라 합니다. 이들은 율법 613개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613개 중 248개는 하라는 명령이고 365개는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서기관들의 설교를 상상하면 무엇 무엇을 하라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 많았을 듯합니다. 이들 앞에 백성들은 어떤 마음으로 나왔겠습니까?. 마치 회초리를 맞으러 나온 아이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놀랄 이유가 없었습니다.
설교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
다음은 저의 일천한 경험을 공유합니다. 저는 남 앞에 나서기를 부담스러워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일명 꿔다 놓은 보리 짝 형입니다. 걸을 때도 앞서가지 않고 남들 뒤에 따라가는 것이 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강의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저는 꿔다놓은 보리 짝 형이어서 강단에 섰다가 횡설수설하다 내려오거나 떨려 머리가 백지장처럼 될까 봐 원고를 작성하여 강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고를 작성의 좋은 점은 기록으로 남으니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성경강의는 글이 아니라 말이니 옆에 사람을 앉혀 놓고 말해주듯이 구어체로 원고를 작성합니다.
컵에 물을 꼭 들고 올라옵니다. 물을 준비해 주는 분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계기가 있습니다. 체육관에서 2,300여명이 앞에서 어떤 내용을 설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2,300 명이 주는 눈길이 아주 무서웠습니다. 긴장한 상태로 말을 하니 시작한 지 채 5분이 안 되어 입속이 다 말라버렸습니다. 입속이 마르니 혀가 입안 천정에 붙었다 아래에 붙었다 하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30분이었는데 10분도 안 되어 급히 마무리하고 내려온 일이 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꼭 물을 챙기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저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물을 꼭 챙겨서 낭패를 겪지 않길 바랍니다.
강단에 설 때는 욕심을 버리는 일이 제일 어렵습니다. 욕심 때문에 실패한 경험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여름 캠프 때 특강 강사를 부탁받은 일이 있습니다. 장소는 폐교된 시골 초등학교입니다. 제목은 창조과학관련 특강입니다. 제가 물리학 관련 학과 출신으로 전공 분야여서 의욕 백배, 사기충천했습니다. PPT를 50페이지 이상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강의 시작 하고 PPT 4컷이 넘어가면서 참석자의 반이 졸기 시작했습니다. 눈물도 고이셨습니다. 물론 하품을 많이 하여 고인 눈물입니다. 믿었던 장로 분께서 가장 먼저 눈을 감으셨습니다. 강의시간이 캠프 시작하고 둘째 날 점심 먹고 난 직후였습니다. 청중은 오랜만에 한적 한 시골 초등학교 캠프에 왔습니다. 잠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또 서로 간에 이야기 꽃피우느라 밤을 새운 분도 있었습니다. 또 몸보신한다고 점심메뉴에 탕도 준비하여 배불리 먹었습니다. 에어컨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천근만근 눈꺼풀이 10만 톤으로 내리 누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PPT 10컷 이후부터는 무성영화를 틀듯이 급하게 넘기면서 끝낸 적이 있습니다.
이 일 이후 욕심을 줄이는 방법을 고민하다 강의 원고의 장수를 철저하게 제한하였습니다. 수요일 강단 강의는 A4지 4장입니다. 일요일 강단은 5장입니다. 일요일에 너무 빨리 끝나도 점심 준비하는 성도님들의 항의가 있었습니다. 한글워드의 좌우여백은 30mm, 상하여백 15mm, 글씨 포인트는 10포인트, 문장 간격은 160%로 합니다.
사람의 인지능력은 20분까지 최고조에 달했다가 점점 떨어져 40분이면 바닥을 칩니다. 위와 같이 원고 장수를 제한하면 30-40분 사이에 강의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또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날려버려서 욕심을 부려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성경 텍스트도 길면 처음부터 마음이 힘듭니다. 10구절을 넘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청중들이 처한 환경과 대상의 수준을 미리 파악하여 준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와 타지 교회 청년연합 캠프에서 강의할 일 이 있었습니다. 장소는 농촌 마을 한 가정 집 방에 모였습니다. 한여름에 넓은 마당에서 삼겹살 파티를 했습니다. 예상 밖으로 방이 매우 좁았습니다. 시골집이니 에어컨이 없었고 몹시 더웠습니다. 모두 연신 부채질을 했습니다. 또 청년들이 당일 처음 만났습니다. 서로 잘 몰라 분위기가 서로 서먹서먹했습니다. 모기기가 많아 모기향을 피워 연기가 방안에 자욱했습니다. 마치 신병 훈련 때 가스 실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일 날은 전국 단위 축제 첫날입니다. 축제 첫날 저녁은 불꽃놀이를 합니다. 강의 도중에 폭죽이 터졌습니다. 폭죽이 터지자 시민들의 ‘와’ 하는 함성까지 방안에 들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고 강의 분량을 40분 분량으로 준비했습니다. 강의하는데 큰 곤혹을 치렀습니다. 환경을 예상하고 상황에 맞게 가벼운 분량으로 준비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어린 주일 학생들 앞에 설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인과 상황은 또 달랐습니다. 학생들은 강의를 듣다가 본인이 의문이 생기면 곧바로 손을 들어 질문을 합니다. 손 안 들고도 수시로 질문하기도 합니다. 청중의 수준에 맞게 준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전달하는 방법도 신경 써야 합니다. 목소리도 너무 저음으로 깔아도 안 되고 높아도 안 됩니다. 솔 톤이 가장 좋습니다. 말할 때는 될 수 있으면 부사나 형용사를 강조하면 안 된답니다. “비가 많이 내려서 큰 흙탕물이 내려갑니다.”란 문장을 전할 때 “많이~와 큰~”을 강조하면 본인은 감동이 되지만, 내용 전달력이 떨어집니다. 문장은 의미 덩어리로 될 수 있으면 명사를 강조합니다.
전달을 방해하는 요소 중에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는 음성이나 제스처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오른 손을 너무 자주 사용합니다. 적절한 제스처는 전달을 돕지만 불필요한 제스처는 전달을 방해합니다.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말도 있습니다. “에~ 그~ 저~ 에또 ~저또~ 참~ 그참~” 이런 말을 반복하면 전달력이 떨어집니다. 복장도 중요합니다. 최대한 정중한 복장, 밝은 표정으로 올라와야 합니다. 이빨에 고춧가루가 낀 것을 모르고 올라왔다면 성도들은 그 고춧가루에 신경이 쓰여 내용을 제대로 경청하기 어렵습니다. 10돈 황금 목걸이를 걸고 강단에 섰다면 반짝이는 목걸이가 신경 쓰여서 내용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습니다.
시선 처리도 중요합니다. 좌우 가운데 골고루 시선을 던져서 청중과 교감해야 합니다. 강단에 서기 전에 과식하거나 청량음료 예를 들면 콜라, 사이다를 마시면 절대 안 됩니다. 강의 도중 탄산가스가 계속 올라와 커억 커억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강의 제목을 정하는 것도 신경 써야 합니다. 제목을 들었을 때 청중의 흥미를 끌면서 본문과 잘 어울리는 제목을 고민하여야 합니다. 전문가들은 문장형식으로 길어도 안 되고 짧아도 안되고 두 단어를 조합한 제목이 좋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입니다. 자동차를 고치려면 리프팅 기계로 머리 위로 들어 올려놓고 천천히 살펴봅니다. 이처럼 내가 성경본문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본문 아래에서 내용 파악을 철저히 하고 오랜 묵상 시간을 통하여 나에게만 주시는 말씀의 샘물을 길어 올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날은 본문을 읽고 묵상하기가 힘들게하는 시대입니다. 영상시대에 영상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강독도 중요합니다. 대학에 독어독문학과, 영어영문학과에서는 작품 강독 과목이 필수입니다. 옛날 고전 작품을 읽으며 저자의 뜻 의도를 찾아내는 작업 많이 합니다. 성경에 대하여도 이런 방식으로 강독하는 자세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졌지만, 그 권위 위에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백성들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했습니다. 당시 백성들이 금방 알아들을 용어, 비유를 들어 진리를 설명했습니다.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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