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소원 예화
한국의 수도는 서울, 일본의 수도는 도쿄, 중국은 베이징, 미국은 워싱턴입니다. 한 아이가 어느 날 학교를 갔다 오더니 자기 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합니다. 엄마가 왜 그런가 하고 내용을 들어보니 “미국의 수도가 뉴욕이 되게 해달라!” 입니다. 엄마가 이유를 물었더니 아이의 대답이 학교 지리 시험을 쳤는데 미국 수도를 뉴욕으로 잘못 썼답니다. 이 문제만 맞으면 100점인데 95점이랍니다. 그래서 매달릴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수도를 하루 아침에 바꾸어 달라고 기도했답니다. 아이의 기도 방향은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께 부르짖는 태도만큼은 배울 만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배경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내게 부르짖으라!”고 명령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콜“을 명하시는 부분입니다. 예레미야서는 52장 중 오늘 말씀은 위로의 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1절부터 봅니다.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세우시다.”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란 별칭이 있습니다. 남자는 태어나 세 번 웁니다. 태어 나자 마자 한 번,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한 번, 나라가 망했을 때 한 번입니다. 맞는 말인가요? 남자들은 50이 넘으면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 저하로 드라마를 보면서도 웁니다. 운다는 것은 약하다는 방증입니다. 예레미야는 12지파 중 가장 약한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고향은 아나돗입니다. 아나돗은 다윗 왕 때 아비아달 제사장이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했다가 유배당한 지역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레미야는 몰락한 집안입니다. 지역도 별로 알아주지 않는 곳입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은 약관 20세에 부릅니다. 처음에 예레미야는 강하게 거절합니다. “자기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말주변도 없다.”합니다.(렘1장) 하나님이 “그래 그럼 커서 보자!”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예레미야를 설득하고 이적을 보여주면서까지 세웁니다. 그리고 일생을 함께였을 때 예레미야는 열방의 선지자로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씁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람을 대리자로 창조였습니다. 하나님 혼자 다 북치고 장구 치고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길가의 돌멩이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한 트럭은 만드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을 세워 쓰십니다. 정치도 사람을 잘 세워야 합니다. 오늘날 지도자도 예레미야같이 눈물과 진심이 있는 지도자가 세워졌으면 합니다. 눈물이 많다는 것은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많다는 뜻도 됩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배경
본문 1절로 돌아갑니다. 본문은 예레미야의 말년의 때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안 좋습니다.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혔습니다. 시위대 뜰은 궁중 감옥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포위된 상황입니다. 당시 왕은 시드기야 입니다. 본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임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 32장에 임합니다. 하나님은 시드기야에게 둘러싼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라 합니다. 예레미야는 가감없이 그대로 전합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예레미야를 옥에 가둡니다. 현재 예레미야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안팎으로 적들만 있습니다. 2중 투옥된 상태입니다. 완전한 고립입니다. 한 줄기 빛도 없는 캄캄한 동굴에 갇힌 상황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말씀은 감옥이란 한계를 뚫고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주었습니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50“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란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길이 되고 빛이 되고 위로가 되고 우리 영혼을 살립니다.
전쟁영화에 보면 군인들이 고립된 경우 있습니다. 사방이 다 적이고 부대원 몇 명이 참호 속에 있다는 상상을 해보십시오. 이때 유일한 희망은 통신입니다. 무전기가 고장 나지 않았으면 현재 상황을 바깥에 알릴 수 있습니다. 지원군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안되면 공중 폭격이라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전기와 같은 역할을 한 셈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
그러면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2절에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 자신을 소개합니다. 여호와란 이름을 3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영원토록 영존하시는 자존 자란 뜻입니다. 본문에서 원어를 보면 “일을 행하는자 =오사흐” “그것을 짓는자-요제르”는 그 의미가 창세기 1장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본문은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로 보면 됩니다. 유에서 무를 창조해 내시는 분, 시간과 공간과 우주와 인간의 역사를 시작하신 분,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온 우주의 역사를 마감하실 권한을 가진 분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합니다.
이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무엇을 약속합니까? 예레미야가 알지 못하는, 예측 불가능하고,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다른 번역은 “나는 네가 모르는 큰 비밀을 가르쳐주리라.”입니다.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제가 비밀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하지 않습니다. 비밀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관계가 비밀을 들려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입니다.
이렇게 크고 은밀한 일을 보려면 전제 조건이 무엇입니까? 감옥 탈출계획인가요? 인맥을 풀 가동 해서 변호인단을 꾸리고 무죄 입증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부르 짖다를 국어사전에 찾아 보면“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크게 소리를 내다.”입니다. “절규(絶叫)하다." “살려 달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다.”입니다. 흙탕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사람이 물 밖 사람을 보고 “저 죄송합니만 저 좀 살려주시겠습니까?”하지 않습니다. “살려주세요! 사람살려! 도와주세요!”합니다. 본문 부르짖다는 원어로 “카라”입니다. 이는 단순히 큰소리만 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중대한 사안을 호소하거나 선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을 때 반드시 응답합니다. 우리에게는 귀가 두 개 입이 한 개 있습니다. 듣기를 2배 더 하고 말은 더 적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남의 말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이어서 남에게 관심 두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반대입니다. 나의 어떤 부르짖음도 다 듣고 응답합니다.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
기도 응답하면 신앙위인 죠지뮬러 입니다. 죠지뮬러는 5만번 응답 받았습니다. 응답 받은 일화를 소개합니다. 죠지뮬러는 5명의 친구가 구원받도록 기도합니다. 기도 시작 1년 6개월 만에 첫 번친구가 믿었고, 5년 만에 두 번째 친구가 믿었고, 12년 만에 세 번째 친구가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2명이 응답이 없었습니다. 평생이 다 지나가도 없었답니다. 그런데 병석에 눕기 전에 마지막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를 듣고 4번째 친구가 드디어 회심합니다. 결국 마지막 5번째 친구는 회심을 보지 못하고 소 천합니다. 그런데 이 5번째 친구가 장례식장에 참가했답니다. 죠지뮬러 친구가 평생 자기를 위해 기도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장례식장에서 5번째 친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기도하는 우리 마음은 항상 조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가장 적당한 때요 가장 알맞은 때입니다.
부르짖으라
본문에 부르짖으라는 영어로 “Call to me"입니다. 우리 다급할 때 전화하는 콜센터가 119입니다. 왜 하필 119냐하면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생긴 자동식 전화 번호가 112였다가 119로 바뀐 것을 우리 나라가 1935년부터 그대로 썼다고 합니다. 미국은 911입니다. 홍콩은 999랍니다. 프랑스는 18이고, 호주는 000이랍니다. 119는 모두 화재, 구조, 구급 신고를 받는 곳입니다. 장난 전화가 많기도 하답니다. 2년 6개월 정도 낸 통계를 보니 1,500건입니다. 장난 전화 베스트 10입니다. ”첫째 119에 전화해 남자친구에게 전화 한 통화만 해달라는 부탁이랍니다. 두 번째 병원비 10만 원만 보태 달라입니다. 세 번째 BTS 같은 연애인 바꿔주세요. 네 번째가 대리운전 기사가 빨리 안 온다는 전화이고, 다섯 번째가 외출하려는데 큰 개가 문 앞에 있어서 쫓아 달라는 전화입니다. 여섯째가 택시가 안 잡혀요. 일곱째가 바퀴벌레 잡아주세요. 여덟째가 은행 텔레뱅킹이 안 돼요." 등이랍니다. 장난 전화하면 안 되겠습니다. 소방청 통계를 보면 한 해에 콜 받아서 출동하는 횟수가 838,194회입니다. 1일 콜 출동은 2,296이고, 시간당 호출 수는 96회라고 합니다. 왜 제가 119를 예로 드는가하면 우리도 자주 하나님께 콜 하자는 뜻에서입니다. 장난 전화 말고 진심이 담긴 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루살렘 성에 갇힌 백성들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침에 눈 뜨기가 싫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성에 칼 들고 쳐들어 가려고 토성을 매일 조금씩 쌓았습니다. 매일 매일 올라가는 높이만큼 불안과 두려움이 커졌습니다. 우리의 상황도 유사합니다. 코로나19 많은 사람이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내가 현재 처한 상황이 가장 힘들다고 느낍니다. 아침에 출근하시는 분들이 뽀로로 노래처럼 ”출근이 제일 좋아!”하면서 나가지는 않습니다. 학생들도 “등교가 제일 좋아!” 하면서 나가지는 않습니다. 억지로 죽지 못해 나갑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비책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콜 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기도의 대상
누구에게 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콜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에게 콜합니다. 주변 강대국인 애굽에 콜합니다. 또 자기들끼리 상황을 타개하려고 시도하다가 망합니다. 그 말씀이 4,5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참호와 칼을 대항하여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로 이 성을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본문에 무리들이 자기 집을 헐고 심지어 왕궁까지 헐어서 대항해서 싸우려는 말씀은 좀 이상합니다. 상식적으로는 전투에서 집과 성은 더 튼튼하게 쌓습니다. 허물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의 고립 작전 때문에 왕과 백성들이 집과 성을 허물고 도망친 일을 말합니다. 참호는 구덩이 참(塹) 도랑 호(壕)자를 씁니다. 바벨론 군사들이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토성을 쌓았습니다. 예루살렘은 마치 구덩이 참호 속에 가둔 모양세입니다. 바벨론은 1년 반 고립시킵니다. 결국은 식량이 떨어져 견디다 못한 시드기야 왕이 야밤을 틈타 성을 허물고 도망을 칩니다. 그러다 여리고 평지에서 붙잡힙니다.(렘39:4-5) 그는 눈이 뽑혀서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 포로로 끌려갑니다. (렘39:6) 그의 나이는 21세입니다.
회복약속
6-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본문은 "그러나" 로 시작하며 대전환을 합니다. 이스라엘이 처참하게 멸망했지만 “하나님이 70년 후에는 다시 회복시키겠다.”고 합니다. “처음과 같이, 처음처럼 다시 세우겠다.” 고합니다. '치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루카'는 원래 상처 부위에 돋아나는 새 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치 피부에 새살이 돋듯이 치유하시겠다합니다. 그렇게 해서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나타내주시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평화와 참된 안전을 마음껏 누리게 해주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70년 후에 고레스 왕을 세우십니다. 고레스왕은 바벨론과 메대를 물리치고 페르샤라는 세로운 제국을 세웁니다. 그리고 종교관용 정책을 써서 이스라엘을 고국으로 돌려 보냅니다.
본문 8절 입니다.“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본문에는 죄악이 두 번 쓰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두 단어가 다릅니다. 정하게 되었다는 앞은 죄악(iniauity)으로 번역했고 뒤에 사해졌다는 죄악은 죄(Sin)로 번역합니다. 앞의 죄악은 원어로 “아본”인데 “굽히다, 꼬이다. 뒤틀리다”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뒤에 죄는 “케트”로 “길을 잃다, 표적을 놓치다. 길을 잘못들어 서다.”에서 유래합니다. 앞의 죄악은 복수고 뒤의 죄는 단수입니다. 단수 죄는 원죄를 말하고 복수 죄악은 죄의 열매입니다. 쉽게 말하면 죄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아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표적을 빗나간 상태를 말합니다. 죄악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저질러지는 모든 종류의 꼬이고 구부러진 죄의 행위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서 죄(Sin)가 사해졌고 죄악에서 깨끗하게 됩니다. 우리 일상 생활 속에서 짓게되는 죄악은 일생을 통하여 회개하고 정함을 받아야 하는 과정이 남습니다..
바로 이 죄와 죄악들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근본 원인입니다. 죄와 죄악 때문에 두렵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죄가 용서되었고 죄악에서 깨끗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 안에서 죄책감, 정죄감에 시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벌 받을까 무서워 사람들 눈치 보면서 신앙생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교회 나오고, 벌 받을까 봐 헌금하고, 벌 받을까 봐 봉사하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정함과 사함을 주신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는 , 콜을 수시로 해야겠습니다. 다른 곳에 콜하면 안됩니다. 119에 장난전화하듯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구조요청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가 감히 상상도 못 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목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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