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와 집에 있는 탕자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본문의 비유를 돌탕과 집탕이라고 합니다. 돌탕은 돌아온 탕자의 줄임말입니다. 집탕은 집안에 있는 탕자의 줄임말입니다. 오늘은 집탕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교제하겠습니다. 바클레이라는 학자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지구가 망하고 성경이 다 없어져도 누가복음 15장 한 장만 남아도 기독교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다합니다. 그만큼 본문 비유는 복음의 핵심으로 평가합니다. 성경의 심장이라고 할 만큼 예수님의 훌륭한 비유 말씀입니다.
착한 아이 증후군
이해를 돕기 위해 심리학 용어 2가지만 소개합니다. 착한아이 증후군이라고 들어 보셨죠? 영어로는 good boy syndrome입니다. 부모의 명을 절대 거역하면 안 되고 착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내면을 억압하다가 생긴 병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 내면에 잡재한 폭력성이 폭발하면서 문제가 커집니다. 또 하나는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일본에 나쓰메 마코토라는 교수가 최초로 말했습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하며 항상 스마일하고 웃는 모습만 보여 주어야하는 서비스 직종의 사람들이 받는 고통을 말하는 용어입니다. 자신의 속마음 상태와 상관없이 가짜 표정을 하고 속으로 슬픔과 분노를 감출 때 병이 됩니다. 마음의 불균형이 병이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삼상16:7) 내 입술의 모든 말과 마음에 묵상이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19:14) 야고보서는 이런 자들을 두 마음을 품었다라고 합니다.(아고보서4:8) 오늘 본문의 1차 수신자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입니다.(눅15:1,2) 이들은 우리가 잘 알듯이 겉만 율법으로 번지르르하게 치장하고 속은 다른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까지 혹평합니다.(마23:27) 오늘 본문의 맏아들도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눅15장11절부터는 돌탕에 관한 비유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비록 몸은 집을 나가 아버지와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은 늘 아버지께 있었습니다. 반면 집에 있는 탕자는 몸은 아버지와 가까이 있었지만 마음은 집 밖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진정한 탕자일까요? 본문은 “돌탕환영축제”가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축제를 즐기지 못합니다. 욕심과 시기심으로 집 밖에서 겉 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한 맏아들
맏아들이 이렇게 겉도는 이유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려면 성경을 탐구해야합니다. 성경은 많이 두껍습니다. 그래서 읽다가 베게 대용으로도 씁니다. 너무 오래 베고 있으면 얼굴에 자국이 찍히기도 합니다. 성경은 구약39권 신약 27권 총 66권입니다. 꼭 66권이 왜 필요했을까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성경의 장은1,189장입니다. 절은 31,173절입니다. 단어 356만 6,490 단어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길고 두꺼워야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길을 알려 줍니다. 구원만으로 끝이라면 길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까지 보여줍니다. 새 하늘 새 땅까지입니다. 이 나라에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로만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역사와 시간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청사진으로 보여우어야 하고 역사를 이루어 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어야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신 분이어서 몇 장만으로는 소개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긴 성경이 필요합니다. 성경 66권도 추리고 추려서 고르고 골라서 주신 셈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사랑하고 탐독하여 하나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합당하게 살아야합니다.
돌아온 동생을 시기하는 첫째 아들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풍류와 춤추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풍류는 영어로 Music입니다. 원어의 의미는 합주곡, 악기를 말합니다. 본문의 아버지는 부자입니다. 그래서 돌아온 둘째를 위해 “돌탕환영축제”를 통 크게 열었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 시향도 불렀을지 모릅니다. 당시 방탄소년단급 연예인 초빙했을 수도 있습니다. 춤도 곁들인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춤은 막춤이 아니고 음악에 맞추어 둥글게 원을 그리는 춤을 추었다 합니다.
본문 32절에 보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표현이 있는데요. 즐거워하고(유프라이노)는 호화롭게 하다란 뜻입니다. 또 기뻐하다(카이로)는 메시아를 만났을 때 크게 기뻐했다할 때 같은 단어가 쓰입니다. 이 잔치는 한마디로 천국잔치로 세상 시름 다 잊게하여 참 안식과 평안이 있는 축제입니다.
본문에서 맏아들은 집안 축제가 있으면 주도적으로 섬겨야할 위치입니다. 그럼에도 집에 발도 들이지 않습니다. 26절을 보면 종을 불러냅니다. 어떻게 불러냈을까요? 카카오톡으로 나오라고 했을까요? 그리고 불러 종에게 묻습니다. 묻는다는 단어는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 뜻이 아닙니다. 검사가 피의자를 심문하듯이 물었다는 뜻입니다. 종은 주인의 정확한 의도를 전달합니다. 주인이 둘째 아들이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 합니다. 종도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았는데 맏아들이 몰랐습니다.
맏아들은 “살진 송아지” 이 대목에서 속된 말로 뚜껑이 열렸습니다. 28절에 보면 노하였다고 나옵니다. 주석에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노하는 모습이랍니다. 이 모습은 일시적인 감정 폭발이 아니고 오래 깊이 쌓인 분노의 표출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다
29, 30절을 보십시오. 첫째는 "내가 몇 년을 아버지의 명을 안어기고 섬겼는데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 준 적 없더니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다 탕진하고 돌아온 저저 돌~돌~탕! 돌탕에게는 그 비싼 송아지를 잡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하고 따집니다. 송아지가 얼마나 비싸 길래 흥분할까요? 한우 송아지 한 마리 3백5십만 원 합니다. 염소 새끼는 10만원선입니다. 삼십오 배 비쌉니다. 맏아들은 자기에게 효자상을 줘도 시원치 않을 판에 염소새끼 한 마리 안 잡아 주신 아버지께 분노합니다. 돌아온 동생 다리 몽둥이를 부러트려도 시원찮을 상황에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축제를 하다니 말도 안된다고 합니다.
본문에 맏아들은 창기란 말은 없었는데 자기가 넣어서 동생의 부도덕함을 부각시킵니다. 또 집어 삼켰다라고 합니다. 재산이 껌도 아니고 집어삼켰다는 과장된 표현을 씁니다. 본문 맏아들은 지금까지는 잘 있다가 동생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와 비교하여 분노가 일었습니다.
동생을 남처럼 말하다
29절을 보면 동생을 남처럼 말합니다. 본문 단어 “이 아들은” 당신 아들(this thy son:KJV)이란 뜻입니다. 부모와는 1촌이고 형제간은 2촌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3인칭으로 동생을 지칭합니다. 또 “섬겼다,”라는 단어는 전형적으로 종이 주인을 위해 일한다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주인과 종과의 관계로 여겼습니다. 계약관계로 여겼습니다. 대가를 받고 일해주면 끝인 관계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맏아들의 가치 기준은 일, 염소 새끼, 살진 송아지, 아버지의 재산입니다. 관계중심의 사고가 아니고 소유 중심의 사고입니다. 동생이 돌아오니 자기가 물려받을 재산이 축나지는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동생이 살아 돌아왔다는 형으로서의 기쁨은 1도 없었습니다.
신명기 21장 18-21절을 참고합니다. “18.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본문의 맏아들도 율법적으로 보면 돌에 맞아야 죽어야 할 위기입니다.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화를 내며 아버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그것도 동네 사람 다 모인 자리에서입니다. 잔치의 흥도 다 깼습니다.
아버지의 권면
이런 아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대합니까? 28절을 참고합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데” 아버지가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갑니다. 둘째 아들 때도 멀리 동구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여기서도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권합니다. 권했다는 표현은 옆에 서서 아주 다정하게 말했다는 뜻입니다. 본문 권하다는 원어로 파라칼레오입니다. 이는 파라클레토스라는 성령님을 지칭하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본문의 시제는 미완료형입니다. 아버지는 끝까지 참고 끊임없이 옆에 서서 권면합니다. 성령님의 역할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다 지친 맏아들의 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지금 그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음식과 물과 쉼입니다. 그런데 욕심, 경쟁심, 분노 때문에 밖에 서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맏아들을 다 알았습니다. 쓰라린 마음, 질투심, 상처로 혼자 외로이 서 있었던 맏아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맏아들을 집밖으로 달려가 구합니다.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자기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그어 놓은 선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아버지가 아들을 대할 때는 기준이 없습니다.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는 특권
31절을 보십시오. 첫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진심이 잘 표현 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뜻은 아버지가 그렇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눈동자 같이 맏아들과 함께 합니다. 하나님이도 우리가 침 삼킬 순간도 함께 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임종할 때 팔을 높이 치켜들면서 기쁨이 넘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나와 하나님이 함께하는 데서 온다는 고백입니다. 맏아들은 이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내 것이 다 너의 것
두 번째로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합니다. “너 꺼는 다 내 꺼고 내 꺼는 내꺼다.”가 아닙니다. 내 것이 다 너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가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형과 동생의 관계, 이 관계는 보이지 않는 어떤 끈으로 묶여진 관계입니다. 생명의 관계입니다.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생명의 특징은 분리해서 말할 수 없다 입니다. 예를 들면 비행기가 뜨려면 추진력과 양력을 분리해서 생각해 줘야합니다. 그래서 추진력을 얻기 위해 막대한 기름을 태웁니다. 그리고 양력은 날개의 조작을 통해 얻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가진 새는 어떠합니다. 엉덩이에 불이 안 나가도 자유자재로 하늘을 납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것 내 것 동생 것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반대로 내 것이 다 너의 것이라고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둘째
본문 32절을 참고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를 죽었다가 산 자요. 잃어버렸다가 찾은 자로여기십니다. 사실 둘째는 죽은 적은 없습니다. 그냥 아버지 품을 떠났다가 그 품이 그리워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볼 때는 바로 이 아들을 죽었다가 살았고 잃어버렸다 찾은 자로 여기십니다. 만약 우리를 잠깐 까무러 쳤다 깨어났다고 여기거나 숨바꼭질하다 찾은 것 정도로 여기신다면 기쁨은 훨씬 덜하겠죠?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를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었다 산자로 보십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이제 다시 죽지 않습니다. 우린 모두 예수님 안에서 한번 죽었다 가 부활한 자입니다. 오늘이 부활절인데요.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연합된 것 자체 아니겠습니까?
제가 서두에서 성경은 구원이 끝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까지였습니다. 구원 이후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의미를 부여한다면 인격입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왕들이 됩니다. 우리는 다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제대로 된 백성이 되려면 왕도를 갖추어야합니다. 이 세상은 이 왕(王道)도를 배우는 훈련장입니다. 하늘나라의 왕도는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도가 아닙니다. 이것을 패도(覇道)라고 합니다. 왕도는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할 줄 아는 도입니다. 왕도의 모범은 예수님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인데 제자들의 냄새 나는 발을 씻기 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교회는 왕도를 훈련하는 곳입니다.
이제 말씀을 끝맺을까 합니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의 맏아들 같은 사람하고 있으면 불안하고, 경쟁심이 생기고, 질투가 일어납니다. 이런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은 불행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과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함께 일하고 싶고, 베풀고 싶어집니다. 바로 주님이 함께할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할 때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왕도를 배워서 모두 함께 여행하고 싶은 사람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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