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다윗이 고난의 때에 쓴 시입니다. 내용은 고난이 뭍어나지 않고 아름답습니다. 시편23편입니다. 사업가 한분이 폭망합니다. 실의에 차 등대 앞에 신발 나란히 벗어놓고 바다에 뛰어들기 직전에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이 간단한 처방을 내렸습니다. 시편23편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10번씩 읽으라고 합니다. 3년 후에 사업가는 죽지 않고 성공하여 다시 찾아 왔답니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항상 살아계시며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출 3:14) 이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목자가여서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이 시의 저자 다윗은 왕이어서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시편23편은 푸른 초장을 거닐며 쓴 시도 왕궁에서 뒷짐 지고 쓴 시도 아닙니다. 광야에서 썼습니다. 아들 압살롭의 반역으로 다윗은 왕궁을 떠납니다. 다윗은 광야에 피신했습니다. 다윗은 최악의 상황이지만 목자이신 하나님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합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는 초식동물이 생명을 유지하는 장소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노래한 것은 하나님이 목숨을 책임지며 영육간에 필요를 공급해 준다는 고백입니다.
본문 2절을 통하여 목자가하는 역할을 압니다. 목자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양들을 데리고 갈 수 있어야합니다. 삐쩍 마른 풀만 먹여도 안 됩니다. 잡초나 독초를 먹이면 죽습니다. 그렇다고 고기를 갈아서 먹여도 안 됩니다. 또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목말라 죽습니다.
팔레스틴의 초지는 고원지대에 있는데 눈이 녹은 후에 푸른 초장이 형성되고 최상급 꼴이 나옵니다. 목자가 양들을 끌고 이곳에 가는 2가지 길이 있습니다. 산등성이로 가는 길과 골짜기 길입니다. 산등성이 길은 맹수의 공격도 없고 쉽게 갑니다. 반면 골짜기는 폭우로 급류 발생, 동굴에 숨은 사자나 곰의 기습, 산사태 등 위험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죽음의 골짜기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위험을 무릎 쓰고 이 길을 갑니다. 왜냐하면 물이 가까이 있고 풀도 많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쉴만한 물가란 표현은 쉬지 못할 물가도 있다는 뜻입니다. 양은 숏 다리이고, 몸이 둔해 수영을 못합니다. 물을 먹다가 털이 물에 젖어 딸려들어 가기 쉽습니다. 양이 물에 빠지면 오리털 코트 입고 수영하는 격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잔잔하고 쉴만한 물가로 가야합니다. 이런 장소가 없으면 목자가는 지류를 막고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양을 지키려고 맹수와 사투도 벌여야합니다.
강단에 서시는 분들도 청중을 영적인 초장과 물가로 인도해야합니다.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초장 찾는 작업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작업은 할 만합니다. 인터넷에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또 교회 도서실에 주석서와 문헌들이 줄지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작업 중 어려운 일은 나를 가르친 한 가지를 찾는 작업니다. 그 한 가지를 발견할 때 나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신선한 풀입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얻은 꼴입니다. 그럴 때 신명나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일은 독초를 먹이지 않는 것입니다.
의의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3절을 보십시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생명 자체여서 우리 영을 살립니다. 또한 길과 진리이기 때문에 선한 길로 인도합니다. 본문에 이름을 위한다는 표현은 이름걸고 한다는 뜻입니다. 이름은 인격, 존재, 명예를 대변합니다. 브랜드 파워가 있듯이 자기 이름을 위함은 그만큼 신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확실히 인도하기 때문에 믿고 신뢰가능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어둡고, 두려운 삶의 경험들을 말합니다.
유대광야는 석회암 지역으로 동굴이 많습니다. 골짜기와 등성이의 고저차가 1,200m입니다. 석회암은 잘 깎이기 때문에 V자형 계곡을 형성합니다. 동굴에는 사자, 표범, 늑대, 여우, 갈색곰, 하이에나들이 살았습니다. 목자들은 이 맹수들로부터 양떼를 지키기 위하여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합니다.
`지팡이' 와 `막대기'는 목자의 장비이자 무기입니다. `지팡이'는 목자들이 양들을 위험한 곳에서 안전한 곳으로 옮길 때 사용합니다. `막대기'는 (삼하 23:21) 공격해 오는 맹수들을 방어하는 도구입니다. 막대기는 유사시에 집어 던져서 양들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허리에 차고 다니다가 사자나 곰이 달려들면 때려서 쫓거나 잡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지팡이와 막대기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원수 사탄을 물리쳐줍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지팡이와 막대기 역할을 하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원수는 사탄입니다. 엡4:27절에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합니다. 공동번역에는 마귀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말라합니다. 엡6:16절에서 마귀가 불화살을 퍼붓습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에 작은 틈이라도 있으면 비집고 들어오는 불화살을 쏩니다. 불화살 맞으면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가장 큰 틈을 제공하는 요소는 죄와 가까이 있을 때입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에 생기는 영상과 생각들 이 생기게 하여 두려움을 심는 영적 세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단의 불화살입니다. 디모데후서 1:7은 신자가 가질 정상적인 마음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단의 불화살이 상처를 냈다고 여기십시오.
내 잔이 넘치나이다
5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4절까지의 배경은 목장입니다. 5절부터는 분위기가 축제분위기로 바뀝니다. 한마디로 잔칫집입니다. 집 주인이 자신의 가장 귀한 손님에게 "상"을 베풀어줍니다. 주인은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줍니다'(5절).
고대 근동에서 손님이 집으로 들어올 때, 주인이 입구에 서서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정중하게 맞아들이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들어오는 손님에게 향수를 뿌려 줍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손님으로 식탁에 초대받은 상황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정중한 손님으로 맞이합니다. "내 잔이 넘친다"라는 표현은 아쉬움 없는 풍성한 접대를 말합니다. 은혜가 넘치는 장면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영적으로 마음의 잔이 넘치십니까? 축제 분위기 입니까? 아니면 빈 잔이십니까? 마음이 초상집 분위기 입니까? 스폰지에 물을 부으면 처음에는 계속 흡수하다가 한계에 이르면 흘러나옵니다. 물을 은혜로 바꾸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흘러 나오는 힘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무리가 없습니다. 은혜의 잔이 넘치지도 않았는데 일 먼저 하다보면 무리가 옵니다. 아직 차지 않은 분은 넘치도록 도와 주여야하고 또 때로는 넘칠 때까지 기다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6.을 보십시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은 굶주리고 집 없는 아이들을 모아 커다란 캠프 안에 함께 살도록 합니다. 거기서 아이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며 보살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밤이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묘안을 생각해냅니다. 아이들이 침대에 들어간 후 손에 빵을 들고 자도록합니다.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들려만 줍니다. 빵 한 조각이 놀라운 효과를 가져 왔습니다. 아이들은 내일 먹을 것이 있다는 안도감에서 평안히 잠들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트웹스키는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인생에서 절망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원을 보낼 천국이 돌아갈 고향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일 때 불안해하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
우리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양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어야합니다. 영어로 Sheep Identity입니다. 그러려면 양이 어떤 동물인지 알아야겠죠?
양은 2m터 이내밖에 못봅니다. 동료들끼리 자주 들이 받습니다. 서로 들이 받지 말라고 목자는 기름을 발라줍니다. 물론 코에 기생충이 들어가지 말라고 발르기도 합니다. 청각은 발달하여 양은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따라갑니다.
중동을 여행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목동 세명이 양떼를 거느리고 시냇가에서 물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물을 다 먹인 후에 한 목동이 큰 소리로 “멘아 멘아”하고 부르니까 그 중1/3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라갑니다. 조금 있다가 두 번째 목동이 “멘아 멘아”하고 부르니 1/3일 가고 나머지도 그렇게 했습니다. 목동은 자기의 양을 세거나 등에 표시해 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멘아 멘아” 는 아랍말로 “나를 따라 오라”입니다.
양 수칙 제1번 목자의 음성만 따라가자 입니다. 가짜 목자가 양을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양 바비큐를 해먹거나 양 삼겹살 파티를 하려거나 아니면 양을 팔아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부릅니다. 우리는 사탄의 음성 잘 구분하여 따라가지 말아야겠습니다. 확실한 목자의 음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있습니다.
양 수칙제2번 서로 들이받지 말라입니다. 양은 머리로 서로 들이 받는 습관이 있습니다. 머리를 들이대고 밀어 내치면서 받으면서 싸웁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의머리에 기름을 발라두면 밀치면 미끄러져 버립니다. 머리와 머리를 대고 밀고 밀리며 싸워야 박진감 넘치고 재미가 있는데 머리를 대자 마자 미끄러져 버리니까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서로 들이 받는데 흥미를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들끼리 분쟁을 막기 위하여 목자가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바릅니다. 우리의 기름은 성령님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들이받을 이유가 없어집니다. 성령님은 인격자 이면서 조력자 역할을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인격을 무시하면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로봇처럼 조정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발적인 동의하에 일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기름으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들이 받지 않는데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또 우리 먼저 된 자들이 좋은 목자의 역할을 감당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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