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TV를 통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을 봅니다.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잃은 제자들과 마리아도 같은 마음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예수님이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사형을 언도한 무리들 앞에 제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제 몸 하나 챙기려고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은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습니다. 바위가 터지고 지진도 났습니다.(마27:51-54) 6시간 흑암도 임합니다.(마27:45) 이날은 인류역사상 가장 슬픈 날입니다. 그러나 슬픔은 3일 만에 끝납니다. 예수님은 부활합니다.
1. 3의 의미
예수님 2일도 4일도 아니고 3일에 부활합니다. 성경에 숫자 3은 완성과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창조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에서 형태가 생기고 내용물이 채워지는 단위가 3일입니다. 예늘들면 첫날 빛 둘째 날 궁창과 하늘이라는 기초가 만들어지고 그위에 3일 째 내용물을 채웁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있었습니다. 예수님 나사로를 살릴 때 소식을 듣고 3일을 더 있다가 갔습니다. 성막도 뜰, 성소, 지성소 3개로 구분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 3번 이겼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요 새인류의 시작입니다.(고후5:17) 이것을 완성하시기 까지는 3일이 필요했고, 3일은 하나님의 완전함을 보여줍니다.
2. 부활 부정설들
부활은 과학적으로 타당한 일이아닙니다. 열역학 제2법칙 위배입니다. 자연계에서는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사람이 죽으면 72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합니다. 부패가 진행되다가 거꾸로 거슬러 생명이 살아나는 사례는 없습니다.
“거꾸로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라고 실험을 통하여 확정한 법칙입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시체가 살아나는 일은 없습니다.
이 법칙을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 요한, 막달라 마리아도 잘 알았습니다. 물리, 화학을 안 배워도 상식적으로 압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같은 상식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썰”이 나옵니다.
첫째 조작설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조작했답니다. 시체를 훔쳐서 숨기고 다시 살아났다고 유언비어를 퍼트렸답니다. 제자들 목숨 걸고 시신을 훔칠만한 대담성도 없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부터 여종 앞에서 제 목숨 부지하려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합니다. 제자들이 조작설을 일으킬까봐 당시 지도자들이 이미 조치를 취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빌라도 총독이 긴급회의를 합니다.(마27:62~66) 그 결과 무덤을 인봉합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군병들에게 돌로 막은 입구를 지키도록 합니다. 이 돌 솥뚜껑만하지 않습 니다. 장정 10명이 매달려야 굴립니다. 무덤 지키는 경비병들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로마 군병입니다. 세계를 정복하는데 앞장섰던 군인들입니다. 제자들이 로마군병들을 제압하고 무덤입구의 돌을 굴리고 예수님의 시신을 훔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시신을 훔쳐 가는데 수건을 벗겨 가지런히 개켜놓고 수의도 가지런히 해놓고 훔쳐가는 착한 도둑님은 없습니다. 부활 조작설은 조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다면 마리아의 소식을 듣고 황급히 무덤으로 달려갈리 만무합니다.
두 번째는 기절설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고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나서 도망쳤다는 설입니다. 기절설도 기절초풍할 정도로 말이 안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습니다. 40일을 금식했습니다. 금식한 분들은 10일 했으면 1년 동안은 몸을 조심하고 보양식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양들을 섬겼습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삽니다. 나중에는 십자가를 질 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졌습니다. 성인 남성이 십자가에서 보통 9시간은 버팁니다. 예수님은 힘이없어 3시간 남짓 버텼습니다. 당시 십자가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다리를 꺾어 일찍 죽도록했는데 예수님은 그럴 필요도 없이 이미 운명합니다. 십자가 달리기 전 채찍을 39대나 맞았습니다.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가 다 나왔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확률 0입니다.
본문을 보면 빈 무덤에 수건이 가지런히 개켜 있었습니다. 세마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기절하셨다 깨신 분이 예의 바르게 누운 자리를 잘 정리하시고 그것도 세마포를 다 벗고 민망한 모습으로 도망을 갈 수 있습니까? 큰 돌은 혼자 어떻게 또 굴리고요? 인봉한 부분은 어떻게 다시 복원해 놓습니까? 로마 군병들은 또 어떻게 제압할 수 있습니까? 기절설을 믿느니 차라리 부활을 믿는 것이 더 빠릅니다.
3. 부활은 구약의 성취
예수님은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이 부활 시켰습니다. 본문 12절은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합니다.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부활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앉은 위치에 주목해 주십시오. 이들이 앉을 곳이 그렇게 없었겠습니까? 무덤 밖 넓은 동산도 있었습니다. 무덤 입구에 서 있어도 됩니다. 그런데 굳이 무덤 안에 예수님 시신을 눕혔던 머리와 발쪽에 앉았습니다.
이 장면은 구약의 말씀을 상기 시킵니다. 출애굽기 25장 10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성막의 지성소 안에 둘 언약궤를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명령합니다. 18-20절을 보면 언약궤를 덮는 덮개 위 양쪽에 천사 두 명이 무릎을 꿇고 서로 마주보며 날개를 편 채 끝을 서로 맞대고 앉는 모형을 만들도록 합니다. 서로 맞댄 천사의 날개 아래가 속죄제단입니다. 그 위에 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짐승의 피를 뿌려 속제제사를 지냅니다. 이곳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천사 둘의 모양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속죄소는 다른 말로 시은 좌라 합니다. 한자로 베풀시(施), 은혜 혜(恩), 앉을 좌(座)자입니다. 은혜를 베푸는 자리란 뜻입니다.
부활현장에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시신을 뉘었던 자리 머리와 발쪽에 앉은 것은 이 장면을 재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정확히 속죄 제사제도가 예표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속죄를 위한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죄를 용서받고 의인이되는 은혜를 입습니다. 천사가 예수님이 누웠던 자리 양쪽에 앉았다는 것은 이곳이 바로 구약의 시은좌와 동일한 은혜의 자리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한 3년 만에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더 길게 살 수 있었습니다. 80 살 이상 살면서 좋은 말씀 많이 해주면 얼마나 효율적입니까? 그러면 제자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짧게 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맞추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 속죄의 자리,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자리로 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단한 번에 영원한 죄 사함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4.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 목격
본문 16,17절을 참고합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부활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자신을 보였습니다. 마리아는 반가운 나머지 예수님을 붙들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붙들지 말라는 섭섭한 말을 합니다.
도마에게는 옆구리에 창 자국과 손에 못 자국을 직접 만져보라고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남녀 차별 대우 합니까? 아니면 마리아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귀신이 들렸다가 놓여서 그렇습니니까?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온전해진 여인입니다. 그 은혜의 표현으로 300데나리온 어치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붙기도 했습니다. 우리 돈으로 4천만 원어치입니다. 설마 액수가 너무 작아서는 아니었겠죠? 억대가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성 평등위원회에 신고야합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보고는 “자신을 붙들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렇게 한 것도 구약시대 말씀을 성취한다는 의미가있습니다. 레위기23장10-14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지켜야할 절기 중 요제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제(搖祭)는 흔들요(搖) 제물제(祭) 자를 써서 제물을 앞뒤로 흔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방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 때 썼습니다. 첫 열매를 드리는 날이 안식일 다음 날입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부활한 안식 후 첫날과 동일합니다. 요제를 드리기 전까지 규칙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곡식의 어떤 열매도 미리 먹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기 전에는 아무도 곡식에 손을 댈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23절에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에 비유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지 못하게 한 것은 요제 때 첫열매와 같이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 하나님께 아직은 완벽하게 드려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마리아에게 “자신을 붙들지 말라.!”는 뜻은 이런 구약배경이 있지 결코 마리아를 섭섭하게 하려고 함이 아닙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는 말씀은 앞으로 마리아가 신앙생활 할 때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붙들고 살지 말라는 영적인 권면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가 단순히 보이는 예수님을 붙들 때 눈에 안보이면 또 슬픔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원수들의 손에 힘없이 죽은 예수님, 그 비참한 모습만 붙들고 살지 말아야합니다. 이제는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마음으로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5. 제자들의 부활신앙
본문의 제자들도 마리아처럼 인간적인 예수님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어떤 예수님입니까? 본문 9,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제자들은 무덤의 정황을 확인했습니다. 아이큐가 한 자리 수가 아닌이상 예수님의 부활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전에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을 충분히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 죽자 집으로 갔습니다. 형제로서의 매너도 꽝입니다. 마리아 자매님을 그냥 무덤에 내버려 두고 갔습니다. 마리아가 계속 울고 있건 말건 갔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말씀을 계속 읽어보면 제자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고도 갈릴리 바다에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물고기를 못 잡아서 한이 맺힌 사람들처럼 갔습니다. 가서도 물고기 많이 잡았습니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예수님을 붙들고 있었으며 왜 부활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 미적지근할까요?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하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 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요즈음 2018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다른 어떤 경기보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경쟁 때문입니다. 방금 읽은 본문도 그 짜릿한 한 판 승부가 나옵니다. 출전선수 이름이 누구입니까? 한 명은 베드로 다른 한 명은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 하는 선수였습니다. 본인은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했지만 우리는 요한인 줄 다 압니다. 처음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요한이 압도적인 거리를 두고 치고 나갔습니다. 젊음이 한몫했습니다. 베드로는 의욕은 넘쳤지만 나이는 못 속였습니다. 형제들은 경쟁심이 많습니다. 겨울이 되면 내복을 입고 사느냐 안 입고 사느냐로도 경쟁 합니다. 내복을 안 입는 것을 젊음과 건강의 비결로 내세웁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내복을 달고 삽니다.
5절을 보면 골인 지점에 먼저 도착한 요한은 무덤 입구에서 망설였습니다. 머리만 들이밀고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몸이 들어가야 골인인데 못 들어갔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뒤에 온 베드로는 요한을 밀치고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뒤처졌던 베드로는 이렇게 해서라도 요한을 눌러보고 싶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께 사랑 고백을 하고 나서 한 마짐ㄱ 질문이 무엇입니다. 요21:20 “주님 요한은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상관 말고 나만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격이 다릅니다. 베드로는 급하고 행동이 앞섭니다. 요한의 성격도 급하긴 했지만 행동은 신중했습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형입니다. 베드로는 돌다리라면 무조건 건너는 형입니다. 그러다 자주 걸려 넘어졌습니다.
제자들이 붙들고 있는 예수님은 자기들의 세상 꿈을 이루어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보좌역인 영의정, 좌의정을 하는 꿈입니다. 그 꿈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자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부활하자 다시 꿈틀댔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로마 정부를 무너트리고 왕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물고기 잡으러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 후 40일이 지나자 이제 하늘로 가야할 마당에 제자들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행1:52절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 “왕이 되실 때가 지금이 아니냐?”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엉뚱한 예수님을 붙들고 있을 때 서로 경쟁하는 구도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경쟁은 사람을 지치고 피곤하게 만듭니다. 얽어매고 자유가 없게 만듭니다.
참 자유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적 할 때 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면 구속할수록 자유롭습니다. 세상 명예, 권세, 물질, 사람 등 눈에 보이는 것들에 매이면 매일수록 자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언제 부활 믿음이 생깁니까? 성령께서 역사한 후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자 성격이 다른 베드로와 요한이 동역합니다. 합심하여 병자도 일으켜 세웁니다. 또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12제가가 함께 1세기 초대교회 복음 사역의 기초를 놓습니다.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붙들고 있습니까? 아직도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은 슬픈 운명의 예수님입니까? 자신의 세상 꿈을 이루어줄 예수님입니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 예수님을 붙들 수 있길 기도합니다. 부활한 예수님 몸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몸이었습니다. 문으로 드나들지 않고 벽을 뚫고 다녔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다가 갑자가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났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였습니다. 우리도 나중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이렇게 신령한 몸으로 변화합니다.(고전15:51) 우리가 늘 부활의 소망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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