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아리랑의 탄생 배경
강원도 정선이란 곳에는 10월초면 아리랑 축제를 합니다. 아리랑 축제 하이라이트는 정선 아리랑 노래 경연대회입니다. 정선아리랑은 아주 느리고 애절한 곡입니다. 정선 아리랑 중에서 2절입니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날 좀 건네주게 / 싸릿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 사시장철 임 그리워서 난 못살겠네!" 후렴구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좀 넘겨주게”입니다.
이 노래는 남녀 간의 비극적인 사랑 노래입니다. 정선군 여량리에 가면 ‘아우라지’ 란 강이 있습니다. 아우라지는 두 개의 강이 한 개로 어우러진다는 뜻입니다. 두 개의 강이 한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강의 폭은 몇 배로 커지는 것이죠? 지금은 강이 좁아졌지만 옛날에는 넓어서 뗏목을 띄워서 서울까지 나무를 나르기도 합니다. 강을 건너려면 배가 필요합니다. 청년이 살았던 동네 이름이 싸릿골 입니다. 우리 유교 사상 중에 예기라는 문헌에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7살 이후에는 남녀가 같은 자리에 앉을 수가 없는 규약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 세대는 “신랑, 신부 얼굴을 결혼식 후에 보았다.”고 말합니다. 어른들 말만 믿고 결혼했는데 “속았다. 취소도 못하고”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속였는지 미지수라는 것이죠? 당시도 이런 규약 때문에 젊은 연인은 몰래 몰래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싸릿골 총각이 사는 동네에는 올동박 나무가 많았나 봅니다. 이 박나무는 흥부놀부에 나오는 박이 아닙니다. 노란 꽃이 피고 벚나무 열매 같은 열매가 맺히는 나무입니다. 아우라지 처녀는 부모님들에게 동박꽃 구경을 간다고 거짓말하고 싸릿골 총각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던 중 장마철이 되었습니다. 장마철에는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납니다. 불어난 물로 배도 같이 떠내려갔습니다. 장마가 오래지속 되는 만큼 두 연인은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만날 수가 없어 그리움과 애타는 심정으로 부르는 아우라지처녀의 노래가 정선아리랑 2절입니다. 문헌에는 이 두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아우라지 강에서 수영을 하며 많이 놀았습니다. 강 건너편에 처녀같이 생긴 바위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를 처녀바위라 했고 아우라지 처녀가 그리워하다가 죽어서 바위가 되었습니다.
솔베이지의 노래 배경
외국의 경우 노르웨이의 노래 중에서 “솔베이지의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 선율도 가슴을 후벼 팔 듯이 애절합니다. 이 노래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노르웨이의 작은 산골 마을에 청년 페르귄트와 아름다운 처녀 솔베이지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여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가난이 이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페르귄트는 가난을 탈피하고자 이웃 나라로 돈을 벌기 위해 갑니다. 베르귄트는 갖은 고생을 하며 돈을 법니다. 어느덧 십년의 세월이 흘러갑니다. 어느 정도 돈을 번 베르귄트는 10년 만에 귀향길에 오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입니까? 그는 돌아오는 배에서 해적을 만나 돈을 모두 빼앗깁니다. 그리고 목숨만 겨우 건지게 됩니다.
베르귄트는 절망합니다. 빈손으로는 도저히 돌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절망으로 일생을 방황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늙고 병들어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르귄트는 죽기 전이라도 고향에 돌아가고자 결심합니다. 어머니라도 뵙고 죽고자합니다. 이윽고 집으로 돌아온 베르귄트는 어머니를 찾았지만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안계셨습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솔베이지가 사는 오두막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곳에 솔베이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솔베이지는 평생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 아름다웠던 솔베이지도 어느새 백발이 다 되어 있었습니다. 일어설 기력도 없는 베르귄트는 솔베이지의 무릎을 베고 눕습니다. 솔베이지는 누운 남편을 위해 마지막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베르귄트는 이 노래를 들으며 숨을 거두고 말죠. 그리고 솔베이지도 이런 남편을 따라 같이 죽음에 이른다는 내용입니다. 바로 이때 부른 노래가 '솔베이지의 노래'입니다. 솔베이지의 노래 가사도 정선 아리랑하고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가사를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겨울이 떠나고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해가 지나면-중략- 당신은 제게 돌아오겠지요, 분명 당신은 제게 약속했지요. 저는 진정 당신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가호가 당신에게 있기를 -중략- 저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제 곁에 오실 때 까지 –중략-” 이 노래 곡조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다. 성도님들은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압살롬에게 반역 당한 다윗의 슬픔
오늘 본문의 시편에서는 애타는 심정을 엿봅니다. 물론 그 대상은 연인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오늘 시의 저자는 다윗 왕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세움 받은 후의 삶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며 갖은 고난을 겪습니다. 이 고난의 기간이 십년쯤 됩니다.(B.C. 1020~ 1010) 다윗은 어렵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후 영토 확장을 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킨 후(삼하5:4-10) 블레셋(삼하5:17-22), 모압(삼하8:2), 욥바와 아람 지역(삼하10:1-19)을 쳐서 승리를 거둡니다.
다윗은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그만 열정이 사라집니다.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열정이 사라지자 게으름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 정복전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부하 장수들만 전쟁터에 보냅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다윗은 저녁이 될 때 까지 늘어지게 잠을 잤습니다.(삼하11:2) 그러다 일어나 옥상을 어슬렁거리다가 밧세바와 죄에 빠지지 않습니까? (삼하11:3) 또 그 죄를 감추고자 우리아도 전쟁터에서 죽게 만듭니다.(삼하11:17) 다윗은 이후로 뼈아픈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왕권을 찬탈당하는 사건입니다.
우리 옛말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일 없다.’고 합니다. 다윗은 7명의 아내로부터 10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암논, 길르압, 압살롬, 아도니아, 스바댜, 이드르암, 솔로몬, 삼무아, 소밥, 나단) 그중 셋째아들이 가장 말썽을 일으킵니다. 그가 바로 압살롬입니다. 압사알~놈 네 발음을 잘하셔야합니다. 압살롬의 이름의 뜻은 “아버지와 평화”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름과는 달리 아버지를 배반합니다. 압살롬은 용모가 출중합니다. 삼하14:5절에서 그는 아름다움으로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젊을 때는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고 증거 합니다.(삼상16:12) 압살롬은 아마도 다윗의 외모를 많이 닮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들보다 더욱 사랑했는지 모르겠습니다.
80년대만 해도 터프한 남성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90년대에는 꽃미남, 부드러운 남자 인기였죠? 2000년대 빨래판을 가슴에 새긴 짐승남, 요리 잘하는 남자가 인기입니다. 요즈음은 인기 있는 남성을 뇌섹남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뇌는 호두 같이 쭈글쭈글하게 생겼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신조어를 잘 몰라서 쭈글쭈글한 뇌가 잘생기면 얼마나 잘생겼나 생각 합니다. 뇌 MRI를 찍어서 비교하나 싶었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네이버가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뇌섹남은 '뇌가 섹시한 남자'를 줄여 이르는 말로 주관이 뚜렷하고 언변이 뛰어나며 유머러스하고 지적인 매력이 있는 남자를 가리킨다.”고합니다. 혹시 우리 청년 자매들 중에 이런 남성을 찾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네 그렇다면 계속 혼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지구에는 이런 상대는 없습니다. 수성이나 금성에 한 번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압살롬의 반역
압살롬이 뇌섹남 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속을 많이 썩이게 되죠? 압살롬은 자기 여동생 다말을 욕보인 이복 형 암논을 살해합니다.(삼하13:28,29) 압살롬은 4년 동안 치밀하게 왕위 찬탈을 준비합니다. 그는 호위병 50명을 거느리고 병거와 말들을 앞세우고 다니므로 백성들에게 위엄을 일부러 보입니다.(삼하15:1) 매일 아침 성문에 가서 재판하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서 자기편을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그의 행동을 백성들의 마음을 훔쳤다고 합니다.(삼하15:6) 그리고 때가 되자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떠나 자신의 지지 세력들을 모아 스스로 왕이 됩니다.(삼하15:10) 다윗은 압살롬의 세력이 점점 커진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과의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미리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삼하15:14~23) 아버지가 떠나자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삼하14:37) 그리고 압살롬은 떠난 아버지 다윗과 부하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1만이천 명이 넘는 군대를 보냅니다.(삼하17:1, 26)
오늘 본문은 바로 아들 압살롬의 진압군대를 피해 광야 길로 도망가는 배경 하에서 지은 시입니다. 육체의 고통보다 몇 배 더 아픈 것은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반 아니겠습니까? 다윗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을 것입니다. 또 이런 처지의 다윗을 조롱하는 자들까지 있었습니다. 시므이는 다윗 일행을 따라오며 돌까지 던지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삼하16:6,7) 또 주변사람들은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조롱합니다.(시편42:3)
다윗 왕이 화려한 왕좌에 앉아 있을 때는 한낱 목동이었던 자신을 왕으로까지 높이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잘 증거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광야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도망하는 신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저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다윗은 이런 슬픈 상황을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다합니다. 음식을 먹듯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칼이 뼛속까지 찌른다합니다. (시42편10절)
자 그렇다면 다윗은 마냥 이렇게 슬퍼만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마스길이란 단어가 붙습니다. 마스길은 교훈을 주기위한 시라는 뜻입니다. 교훈시를 쓰려면 저자는 이미 모든 슬픔을 극복한 후 여야합니다.
슬픔의 극복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슬픔을 극복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갈급하게 찾습니다. 본문 1절을 참고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사슴이 갈증으로 시냇물을 찾음에 비유합니다.
중동지방은 50도를 오르내립니다. 후라이 팬없이 아스팔트에 계란만 던져도 프라이가됩니다. 여기는 4-10월이면 강은 마릅니다. 사슴이 물을 찾지 못하면 죽습니다. 암사슴이 찾지 못하면 새끼도 죽습니다. 사슴은 모성 본능이 강합니다. 풀이 없으면 일주일 견뎌도 물없으면 2일밖에 못삽니다. 물을 찾는 사슴의 간절함이 어떤 지 짐작합니다. 사슴은 물을 찾아 뜨거운 광야를 뛰어 다닙니다. 헐떡이며, 울부짖으며 찾아다닙니다. 사슴이 얼마나 갈급했으면 맹수들이나 사냥꾼도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시편 기자는 이런 사슴과 같은 자세로 주를 찾고 있습니다. 잠언8:17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간절히 찾는 자들을 만나주십니다. 또 시편9편10절은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약속합니다. 다윗 왕이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갈망하고 찾았을 때 결국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고 다시 왕권을 회복시킵니다.
두 번째로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 슬픔을 극복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먼저 시편기자는 낙심해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을 꾸짖습니다. 자 자신을 제3자로 객관화합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자신을 봅니다. 이런 자세는 우리가 사탄과 싸울 때 취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세입니다. 딤후1:7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사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심습니다. 이런 마음은 절대 자연스런 현상이 아닙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최악의 상황을 마음속에 떠올리게 함으로 두려움을 심기도 합니다. 미네소타 대학교 심리학과 에릭 클링거 교수가 발표한 결과를 보면 보통 사람은 16시간 동안 무려 4천 가지 정도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13%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떠오른답니다. 예를 들면 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생각이 떠오른다던가, 불치병이 걸린 상황이 떠오른다던가, 직장에서 퇴출당하는 생각, 음란, 탐욕의 마음, 누구를 해치는 무서운 생각도 듭니다. 작게는 어떤 분은 외출해서 가스밸브를 잠그지 않은 것 같은 생각에 하루 종일 불안에 떨기도 합니다. 이때는 119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우리 집이 아닌가 깜짝깜짝 놀랍니다. 심리학으로 강박사고라합니다. 심한 분은 외국가는 비행기 탔다가 확인하러 집으로 옵니다. 그러나 롬7장23절에서는 사도바울은 이런 상황을 사탄이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아가는 것을 보는 도다! 라합니다.
우리는 죄의 법으로 끌려가는 자신을 가만히 두고지 말아야합니다. 꾸짖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둥지를 틀도록 내버려두지 말아야합니다. 생각으로 어려우면 기도와, 말씀과 찬송으로 싸워야합니다. 우리가 불안과 두려움에 처한 자신을 객관화하여 싸울 때 시편 기자와 같이 승리합니다.
이렇게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을 꾸짖은 후에 할 일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는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합니다. 이를 NIV 영어성경으로 보면 “Put(두라) your hope(너의 희망을) in God(하나님 안에)”입니다. 하나님 안에 희망을 두라입니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세상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아침안개와 같습니다. 또 풀의 꽃과 같습니다. 해가나면 모두 사라집니다.(벧전1:24,야고보4:14)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격입니다.(마7:26) 이런 자들은 환란이 닥치면 넘어지고 쓸려 내려갑니다.(마7:27)
다윗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나타나고 도움을 주리란 희망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낙심과 불안이 찬송으로 바뀝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성경에는 꿈, 혹은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합니다.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잠언29:18) 오스트리아에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독일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을 직접 체험합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160만 명의 유대인과 정치범이 죽었다합니다.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극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합니다. 쉰들러 리스트란 영화에 보면 독일군 장교가 마치 동물 사냥을 즐기듯이 사람들에게 총을 쏘며 즐기는 모습도 나옵니다.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소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은 살아남았습니다. 반면 소망을 포기한 사람들은 심신이 최악의 상태로 진행되어 결국은 죽음에 이르렀다합니다.
그는 이 꿈과 관련하여 한 가지 특이한 점을 소개합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죽은 때는 1944년 성탄절 이후부터 그다음 해 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주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성탄절 때에 독일 군들이 가석방 시켜주는 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 1944년 말에는 전쟁이 끝나서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나리라는 전쟁은 1년이 더 지나간 1945년 9월2일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가도 가석방이나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품었던 꿈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살 의욕이 없어지자 죽는 사람이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늙은이와 젊은이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나이입니까? 피부의 노화 정도 입니까? 요즈음은 의학이 발달하여 주사 한 방이면 20년은 젊게 보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꿈, 하나님 안에서의 비전이 있느냐 없느냐가 젊었는가? 늙었는가?를 나눕니다. 60대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 있으면 젊은 사람입니다. 20대에도 하나님 안에 꿈이 없으면 애늙은이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이 있는 한 우리의 속사람은 늙지 않습니다.(요엘2:28) .
우리는 교회에 무슨 기대를 안고 옵니까? 하나님을 향해 가진 소망과 갈망이 있습니까? 때만 되면 오고 시간되면 가고 하는 신자를 시계추신자라고 합니다. 시계추 신자가되면 안되겠습니다. 마음이 화석처럼 딱딱해진 신자, 예배에 가봤자 매번 보는 분들만 만나고 새로운 것이 있겠냐며 아무 기대도 없이 습관적으로 오면 안되겠습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만사가 매너리즘에 빠져 의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신앙적으로 악해지면 각종 불안, 두려움들이 밀려듭니다. 이것이 사단이 준 마음인 줄 알면서도 대적할 힘을 잃습니다. 우리는 내면에 별 기대감 없이 꿈이 없이 살지 않고 마음을 돌이켜야합니다. 사도바울은 신앙 안에 비록 겉 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서 점점 더 젊어져야 합니다. (고후4:16)
하나님께 소망이 있는 한 우리의 속사람은 늙지 않습니다.(요엘2:28) 우리가 시냇물을 찾는 사슴같이 하나님을 찾고, 말씀을 찾는 자들이요 날마다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성도이길 기도합니다. 우리 젊은 청년들은 애늙은이가 되지 않고 또 우리 장년들은 점점 더 젊어지는 성도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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