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제는 “크리스챤으로서 푸근한 이미지의 사람이 되자. 좀 더 은혜로운 사람이 되자.” 입니다. 본문은 요1:14-17절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떠오르는 이미지
예수님 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 진리를 사수하는 투사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양을 안고 있는 인자한 모습입니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는 모습입니까? 투사의 모습은 한번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람들이 시장판으로 만들었을 때 채찍을 만들어 상인들을 내쫓고 돈 통과 의자를 엎었습니다.(막11:15) 대부분 은혜로운 모습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님
오늘 본문은 예수님 안에 은혜(grace)와 진리(truth)가 충만하다 증거 합니다. 여러분은 삶 속에서 무엇을 강조합니까? 진리입니까? 아니면 은혜입니까? 또 아이들을 교육할 때도 진리를 강조합니까? 은혜를 강조합니까? 진리만 강조하면 은혜를 놓치기 쉽습니다.
저에대한 이미지는 어떠합니까? 은혜로운 사람입니까? 아니면 바늘로 찔러도 피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한 사람입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하면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죠? 이만재라는 분이 “교회가기 싫은 77가지 이유”라는 책을 썼습니다. 제목만 소개합니다. “노방 전도하는 것을 보면 오만 정이 떨어진다.” 그래서 교회가 싫어답니다. “말 많은 전도자 너무 싫어!” “부흥집회 가보니 어이가 없네?” “조용한 교회 어디 없나?” “광적인 행위 너무 무서워” “부자교회 천국 갈 수 있을까?” “건축헌금이 무섭다.” “너무 배타적이다.” “팔자 편한 사람들이 다니는 곳” “각종 제약이 너무 싫다.” “무전여행 때 교회에서 문전박대 당했다.” “양보를 모르는 교회 악덕집단” “교회에는 쓸만한 총각이 없다.” “교회는 또 하나의 계급사회” “양보 없는 일등주의가 싫다.” “인간미도 재미도 없는 교인” “일요일에 늦잠 잘 수 없어서 싫다.” “이중인격자가 많아 교회가 싫다.” “헌금에 따라 대접이 달라진다.”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없다.”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다.” “꼴보기 싫은 사람이 너무 많다” “신분차별 때문에 벽을 느꼈다.” 시사하는 바가 있죠?
선교사 예화
30세 나이 쯤 되는 미국 선교사와 예배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10-12개 월 된 어린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가만히 있질 않겠죠? 그런데 25 센치 길이이고 연필굵기의 크기 작은 회초리를 들고 아이가 칭얼거리며 예배를 방해할 때마다 손등이나 종아리 같은데 톡톡 건드렸습니다. 그들만의 교육철학인지는 몰라도 속으로 너무 엄격하지 않나? 부정적으로 본 기억이 납니다. 아빠가 너무 엄격하면 아이들이 하나님도 그런분으로 여길까 염려됩니다.
딸의 초등학교 운동회
딸의 초등학교 운동회를 보러갔습니다. 계주 선수여서 어떻게 달리는 지 궁금했습니다. 아이들의 운동신경은 나를 닮지 않았습니다. 평일이어서 직장에 휴가까지 내고 갔습니다. 그런데 저같이 궁금한 학부모들이 많았습니다. 주차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날따라 교통경찰 분들이 단속까지 합니다.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합니다. 주차공간을 찾아 한참을 배회하다가 텅텅 비어 있는 주차장을 발견합니다. 학교 근처 교회의 주차장입니다. 그런데 주차장 입구에 들어서려는 순간 교인들이 막아섰습니다. 남의 주차장에 세우지 말랍니다. 평일 오전이어서 교회행사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화가 나서 “아니 교회에서 왜 이럽니까?” “교회가 마음을 넓게 쓰십시오.” 교회를 강조하며 항의 해보았지만 끝까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무한 경쟁 사회입니다. 어떤 분은 일터가 아마존 정글과 같다 합니다. 약한 자는 언제 강한 자에게 잡아먹힐 줄 모르는 양육강식의 정글입니다. 사람들은 정글에서 상처받고 지칩니다. 교회는 이런 영혼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야 맞죠? 가기 싫은 곳이 된다면 문제입니다.
다윗이 있는 아둘람 피난처에 모임 사람들
삼상22:1-2을 참고합니다. 본문에서 ‘아둘람’이라는 뜻은 피난처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고 승승장구하다가 사울의 시기를 받아 쫓겨 다닙니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침을 흘리며 미친 행세도 합니다.(삼상21장) 그러다가 피해간 곳이 아둘람 동굴입니다. 요즈음도 이 아둘람 동굴은 성지로 개방합니다. 석회암 동굴로 700명 수용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TOEIC 900점 이상자, MBA과정이수자, SKY대 출신자, 석,박사 학위 소지자 였습니까? 아니죠? “환난 당한 자,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입니다. 다윗에게 이런 자들이 모였다는 것은 다윗이 이들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목숨을 구걸해야만 할 정도의 수많은 고난을 통해 이런 자들을 품고 섬길만한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다윗은 이런 자들과 함께 왕국의 기초를 놓습니다. 교회도 이러해야겠죠?
교회가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
그러면 이런 의문 듭니다. 왜 교회가 꼭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가? 왜 나만 가지고 그래? 하는 농담이 있죠? 성도님들도 똑같이 정글에서 경쟁하느라 지치고 힘듭니다. 그런데 왜 우리만 져주고, 양보하고, 손해보고, 받아주고, 사랑을 베풀고, 용서하며 살아야합니까? 억울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화도 내고, 남을 밟고 올라서기도 하고, 권력을 휘 둘러 보기도 하고싶은 생각 들지 않습니까? 왜 그러면 안 되는지 답변을 드립니다.
첫째는 이렇게 사는 것이 손 해 보는 장사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이제 70,80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원히 살아야합니다. 그 영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무엇이 기다립니까? 그리스도의 심판석입니다.(고후5:10, 고전3:13-14,롬14:10) 결산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상급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또 이런분 있습니다. 나는 쩨쩨하게 상은 바라지 않는다. 그냥 ‘막 살아 볼란다. ’막가파 정신으로 살란다.’ 그런데 신자는 막 산다고 막 살아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생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택한 자들입니다.(히12:7-8) 하나님이 막 살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끝까지 간섭하고 진리의 길로 인도합니다.(요16:13) 하나님이 손쓰기 전에 알아서 잘 하시길 바랍니다.
율법과 은혜 비유
본문 1:17절참고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은 모세로부터 은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본문에 맞추어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은혜를 어떻게 비교하는지 알아봅니다.
- 피와 포도주
모세가 애굽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처음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나일강물을 지팡이로 쳐서 피로 물들입니다(출7:19-21) 피로 물든 강에서 많은 생명이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어디를 가셨습니까? 혼인잔치에 가셨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 포도주는 생명의 상징이죠.(요2:7-11)
- 어두움과 빛
모세의 9번째 재앙이 무엇입니까? 흑암 재앙이죠. (출10:22-23)
반대로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요8:12, 요9:5)
- 죽음과 생명
율법이 처음 선포되었을 때 몇 명이 죽었습니까? 3,000명이 레위 자손의 칼에 죽임을 당합니다. (출32:26-28)
그러나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의 은혜가 처음 선포되었을 때는 3,000명이 구원을 받습니다.(행2:41)
- 찾는 것과 구하는 것
율법은 예수님을 찾을 수 있을 때 내가 노력하여 찾으라고 합니다.(사55:6, 아모스5:4.5)
그러나 은혜는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줍니다.(눅19:10) 찾되 찾을 때까지 찾습니다.
- 행위와 생명
율법은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합니다. (레18:5)
그러나 은혜는 무엇이라 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요19:30) 구원을 위해 우리가 행할 것이 없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 영원한 속죄
율법에서 양과 소로 드리는 속죄제사는 영원하지 못하죠(히10:1)
그러나 예수님은 단번에 그 몸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죄가 영원히 사해졌습니다. 죄는 과거, 현재, 미래 통 털어서 영원히 사해졌습니다.(롬5:1)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죄값을 다 치르셨다는 증거요 표적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요소 살펴 봅니다.
첫 번째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첫째의 마음
우리는 남의 약점을 보는 데는 천리안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픕니다. 남의 험담이나 뒷 담화는 은밀한 쾌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눅15:25-32절에는 첫째 아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신앙생활에 어느 정도 구력이 생기면 둘째아들의 시각에서 첫째아들의 시각으로 넘어갑니다. 물려받은 재산을 다 날리고 돼지 밥으로 허기를 채웠다는 동생 소식을 들었으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야합니다. 그러나 첫째는 분노합니다. ‘분노하다.’라는 말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다.’란 뜻입니다. 일시적인 화가 아니라 깊이 쌓인 분노와 노여움의 표현입니다. 형은 아버지와 몸은 늘 가까이 있었지만 그 마음을 읽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도 첫째 아들과 같은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고 은혜가 사라집니다.
두 번째는 율법주의 입니다. 수많은 법들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자신을 가둡니다. 율법주의의 대표자는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구약에 기록한 613개의 율법에 각각 수십 개의 세칙조항을 달아놓고 지켰습니다. 613개에 10개씩만 정해도 세칙은 6,130 개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안식일에 거울을 볼 수 없습니다. 거울을 보다가 여드름을 발견하거나 흰 새치를 발견하면 떼어내고 싶은 유혹을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새치하나 떼어내는 것도 일로 보았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규정을 지키기 위해 여인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여인이 옆을 지나가면 안보고 눈감고 가다가 전봇대와 헤딩하여 이마가 깨지기도 합니다. 피가 나면 이들은 자랑하려고 붕대를 감고 다녔습니다. 이런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합니까? 마23:23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은혜를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율법으로 자신을 치장할 때 은혜가 사라집니다.
세 번째는 사함 받은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남의 작은 잘못도 용서해주지 못함도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8장24-35절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일명 “내보따리 내놔라” 비유입니다.
본문에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의 돈을 갚지 않는 사람의 멱살을 잡고 내 돈 내어놓으라고 협박합니다. 백 데나리온은 오늘날 천 만 원 가량 됩니다. 일만 달란트는 19조4천억 원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금340,000Kg입니다. 19조면 헤아릴 수 없는 액수입니다. 일생 값을 수도 없는 구원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남의 작은 허물을 용서 못하는 문제가 본문의 일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의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우리는 모두 오십 보 백 보의 죄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입니다. 8,848미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다는 어디 입니까? 괌 옆에 있는 마리아나 해구라고 합니다. 에베레스트 산보다 깊습니다. 11,000미터입니다. 지구는 상당히 울퉁불퉁하죠? 만약 지구를 저 멀리 목성쯤에서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요? 볼링공처럼 매끈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이 이렀습니다. 우리의 의나 또 허물이 에베레스트 산 같을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개미가 파놓은 흙 둔덕 같이 낮게 보입니다. 우리도 이런 시각으로 남의 허물을 바라보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참고구절
요한복음1:14-17절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4)진리가 충만하더라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4)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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