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풍조
중세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는 신학, 예술, 이성과 학문, 과학기술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이런 가치가 인류에게 행복과 평화를 가져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다 세계 1, 2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전쟁에서 동물과 같이 서로 죽이고 파괴하고 빼앗는 모습을 보고 기대가 무너집니다. 그러자 허무주의가 생겼습니다. 그 허무주의 사이를 파고든 것이 물질만능주의입니다. 물질의 대표가 돈입니다. 성경은 돈을 추구함을 맘몬(돈) 숭배 사상이라 합니다.
이 풍조가 교회도 영향을 주었다고 걱정하는 분이 많습니다. 성경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하여 부정적입니다. 잘 개조하고 아름답게 꾸며서 살 곳이 아니라 합니다. 세상은 마치 가라앉는 배와 같습니다. 성경은 말세에 관해 말씀하면서 이 배에서 빠져나 다른 구명정으로 옮겨 타라고 합니다. 이 구명정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례요한의 탄생 배경과 삶의 모습
오늘 말씀은 세례요한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잘 칭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만은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합니다. (마11:22)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세례요한이 칭찬받은 이유를 배웁니다. 세례요한은 BC5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제사장이었던 사가랴고 어머니는 엘리사벳입니다.(눅1:57) 그는 성장하자마자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의 먹거리 메뚜기와 석청입니다. (막1:6)
메뚜기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앞으로 땅이 오염되면 인류의 주요 먹거리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메뚜기 효능을 알아보니까? 어린아이들의 경기에 좋고, 천식에도 좋답니다. 소화도 돕고요. 입맛을 돋웁니다. 석청은 돌 틈 사이에 있는 꿀입니다.
세례요한의 패션은 광야 패션입니다. 약대 털로 코트를 해 입었습니다.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두르고 살았습니다. 요즈음 패션 트렌드는 무엇입니까? 복고풍입니까? 아마 세례요한은 약대 패션 하나로 1년을 버텼을 것 같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에 나실 인처럼 구별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절제를 합니다. 그는 AD26년 방년 30세에 사역을 시작합니다. (눅3:3-14) 당시는 약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영적 암흑기입니다. 이때 세례요한이 나타나 회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메시지는 메마른 땅에 단비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세례요한의 사역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은 그에게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요단강에는 그에게 침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막1:4)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도 생겼습니다.
이 제자들은 35년이 지난 AD61년까지도 남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에베소를 개척할 당시 처음 만난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제자들입니다. 이들에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고 성령이 임합니다. 이들이 12명쯤 되었습니다. 에베소의 역사에는 회심한 이들로부터 시작합니다.
세례요한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세례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오해하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AD29년은 세례요한의 운명을 결정한 해입니다. 당시 헤롯 대왕이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합니다. 세례요한은 이때 왕을 찾아가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소!”하고 책망합니다. (막6:18) 왕의 죄를 지적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당시 왕은 생살여탈권을 가졌습니다. 아마도 세례요한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례요한은 그 대가로 옥에 갇힙니다. (눅3:19-20) 그리고 목 베임을 당하면서 짧은 생애를 마감합니다.
여러분들은 믿는 자들의 정치 참여를 어떻게 보십니까?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목 베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마14:12) 불의 한 시대에 의인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정권 퇴진 운동을 전개할 수도 있었습니다. 붉은 머리띠 두르고 “부도덕한 헤롯 정권 물러가라!” 시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마을로 가서 영적으로 목마른 영혼을 가르쳤습니다.(마14:13) 예수님은 영적인 사역에 전념합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
오늘 본문 요3:22-25절은 시기심 또는 경쟁심이 가득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나옵니다. 세례요한과 함께 그의 제자들의 인기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출현으로 이 인기는 금방 사라졌습니다.그러던 차에 유대인과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정결 예식에 관한 변론이 있었습니다. 다른 번역에는 변론을 말다툼이라 합니다. 사도바울은 '위험하고 쓸데없으며 분노에 찬 논쟁'(딤전 6:4; 딤후 2:23; 딛 3 :9)이라고 합니다.
말꼬리에 또 말꼬리를 잡고 물고 늘어지는 토론입니다. 이런 말꼬리 잡는 회의를 회의(懷疑)가드는 회의(會議)라 합니다.
토론 내용을 상상해 봅니다. 침례 자격, 침례의 의의와 효력, 침례에 관한 바리새파와 엣세네파의 견해 차이, 그리고 예수님의 침례는 과연 허용될 수 있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등등 토론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침례가 의의와 효용이 무엇이건 하나님의 역사는 예수님에게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제자들이 스승에게 알렸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침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까? 아주 짧습니다. “이”입니다.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상황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예수님을 깎아내리려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옛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본성 속에는 경쟁심, 시기심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못 봅니다. 망해도 같이 망하자 주의입니다. 자기들에게 와야 할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로 가자 이들은 스승님이 사태를 좀 해결해 주길 바랐습니다.
세례요한의 겸손
그러나 세례요한은 무엇이라 합니까? 27절을 참고하면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는 예수님을 시기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침례의 기득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역사임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일깨워줍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증언할 자”임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나라에 자신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20명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람은 몇 명 있는지 아십니까? 50명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몇 년 전에도 자칭 하나님 5명 자칭 메시아 27명이었는데 어느새 늘었습니다.
오래전에 선교사 한 분이 한국까지 교제하러 오겠다고 해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은혜로운 간증을 듣게 되었구나 잔뜩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간증이 점점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비몽사몽간에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 같은 분을 만난 얘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갔는데 천사가 자기를 탁 메쳐서 넘어졌다가 일어나 보니” 대충 이런 간증입니다. 처음에는 기도하다가 꿈꿀 수도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꿈 얘기는 30분이 지나도 1시간이 지나도 이어집니다. 끝에 가서는 자신이 요한계시록 11장 나오는 두 증인 중 한 사람이랍니다. 계시록의 두 증인은 입에서 불도 나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땅에 재앙을 내리는 권세도 있습니다. 삼천포로 빠져도 너무 갔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에는 순수하게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추종자들이 늘어나고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쯤 사단이 교만한 마음을 심어 얼굴을 바꾸어 자신이 하나님이요 자신이 재림주로 돌변하기 쉽니다. 성경을 교묘하게 바꾸어 자신의 주장을 포장합니다. 영적인 미혹은 지식이 많다고 머리가 좋다고 이기지 못합니다. 논리적인 이성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제 자체를 하지 말도록 권면합니다. 우리 모두 이단 교리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세례요한은 자칭 그리스도라 해도 의심할 자가 없었습니다. (눅3:15) 그러나 그는 자기 분수를 넘지 않습니다. (고후10:13, 롬12:3) 그는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세례요한의 역할
당시 신랑 친구는 신부를 신랑에게 인계해 주는 역할입니다. 그 과정에 대소사를 처리합니다. 세례요한도 양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사라지는 소리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역할을 행한 기쁨이 충만합니다.
30절 참고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병기 님의 낙화(洛花)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례요한은 떠날 때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흥하게 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세례요한의 뒷모습은 아름답습니다.
복음 역사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는 역사입니다. 양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는 역사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망하면 예수님의 역사는 살아납니다. 이것이 썩는 밀알의 원리입니다. 예수님도 성공하시고 나도 성공하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Win-Win 이 아닙니다. 복음 역사에서 내가 흥하면 예수님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내 자리를 비워 예수님께 내어드려야합니다. 복음 역사는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과 죽음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매일 죽고, 쇠하고, 희생하고, 손해 보고, 고난 가운데 살아야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없다면 우리는 불행한 자들입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앞으로 주실 영광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영광이 어떤지 직접 목격합니다. 그리고 롬8:18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합니다. “영어성경에는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not worth)”고 합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큰지 상상 불가입니다. 빌1:23절에서는 사도바울은 이 영광을 맛보고자 빨리 몸을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믿는 자들은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으로 구원받은 것 자체가 성공한 삶입니다. 우리가 이영광을 바라 보고 오늘도 계속 고난을 넉넉히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성경참고구절
요한복음 3장 22-30절
“22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23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24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25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26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7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8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29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30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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