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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한나와 브닌나의 싸움과 사무엘의 탄생 배경(사무엘상1장)

by 명주(明珠) 2024. 7. 12.

제1장 한나의 고통(삼상1:1~9)



하나님은 일부일처제만 허용했습니다. 아담에게 하와 한 사람만 창조합니다. 본문 1,2 절에서 제사장은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어겼습니다. 엘가나는 브닌나를 집안에 또 들입니다. 본문을 보면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했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열 아들 보다 낫지 않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면 입장 바꾸어 생각해 봅니다. 한나 입장에서는 남편에 대한 배신감이 들었습니다. 남편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브닌나를 들여서 갈등의 원인을 제공할 이유는 없습니다. 한나는 말은 안하지만 상처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로마 군병의 채찍보다 더 아프신 일은 사랑을 주었던 제자들의 배반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3절은 당시 대제사장은 엘리이고 아들은 홉니와 비느하스였다고 알려줍니다. 본문은 이들의 이름을 거론함으로 당시 시대가 얼마나 어두웠는가를 소개합니다. 엘리는 정통성 있는 가문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대제사장까지 올라갔음은 정치적인 수완과 처세술이 뛰어났음을 봅니다. 요즈음 로비 리스트가 세간에 화제입니다. 아마 엘리 제사장도 로비라면 한 수 했을 지도 모릅니다. 엘리는 자식들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스하스는 성막에서 하나님께 드릴 고기의 좋은 부분을 갈고리로 미리 건져 먹었습니다. 또 성막을 섬기는 여인과 부정한 일을 자행합니다.

이런 시대를 사무엘상3장1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 표현합니다. 삼상 3장3절은 이런 시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린 사무엘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등불 역할을 할 사무엘을 낳고 키운 한나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 4절참고하면 당시 히브리 모든 남자는 1년에 최소 3번 성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엘가나는 순번에 따른 의무 봉사 기간도 있었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 바친 화목제물은 서로 나누어 먹었습니다. 화해의 제물의 의미를 살린 조치입니다. 엘가나는 이때받은 소의 가슴과 뒷다리 살을 별도의 장소에서 먹었습니다. 엘가나는 한나의 몫으로 브닌나에 2배를 줍니다. 소고기 맛있는 부위는 채끝살, 안창살입니다. 한나에게 안창살을 주었을지 모르죠. 그러나 한나가 고기를 배로 받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적수가 있는 한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불가능합니다.

본문 6절을 참고 하면 그의 적수는 브닌나입니다. 한나를 심히 격분케하고 괴롭힙니다. 7절동일한 말을 반복합니다. 본문 적수는 NIV영어 성경은 Rival입니다. 라이벌의 우리말 뉘앙스는 대등한 입장의 두 사람을 말하는데 한나는 아마도 일방적으로 당했습니다. 어떻게 고통 받았을 까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한나가 브닌나 보다는 연장자였겠죠. 브닌나는 이를 무시합니다. 군대에서는 하극상이라고 하죠? 브닌나는 집안 허드렛일을 한나에게 떠 넘겼을 것 같습니다. 말끝마다 “애도 없는 주제에... ...” 무시 했을 듯합니다. 가사노동에 지쳐 한나가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붙일라치면 “애도 없는 것이 누워서 편안하게 잠잘 시간이 어디 있냐고” 구박했을 지도 모릅니다. “나 같으면 벌써 집나갔다.”하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했을지 모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것도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괴롭히다 보면 탄력이 붙어서 통제하기 힘들어집니다.

오늘날 왕따가 사회문제입니다. 이것도 작은 무시가 세력이 붙어 점점 커지고 강도가 세어진 결과입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 한 여 순경이 왕따 문제로 자살 하려는 여학생을 발견합니다. 여학생은 마포 대교에서 우산을 쓰고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앉아 있었습니다. 여순경은 그 여고생의 손을 잡아주고 대화해 주자 마음을 고쳐먹고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다 합니다. 그 여순경은 관심과 따듯한 말 한마디로 어린 목숨을 살릴 수 있다 했습니다.

본문7절을 보면 브닌나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한나는 눈물로 시간을 보냅니다. 식욕마저도 잃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자녀가 있으면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습니다.(신 7:13 , 14 ; 시 107:13) 자식이 없음은 하나님의 징계 또는 저주로 보았습니다. (창 20:18).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한나의 태를 막았다합니다. (5,6절) 한나의 괴로움을 노력해서 해결되는 일이면 덜 서러웠습니다. 태가 닫힌 일은 노력해서 될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주변의 시선도 괴로움을 더하게 했습니다.

여기까지 한나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입니다. 여기서 메시지를 끝내면 비극 이지만 반전이 있습니다. 이 반전 때문에 이스라엘의 꺼져가는 등불이 다시 켜집니다.


제2장 여호와 앞에 심정을 토로한 한나(삼상1:10~28)



반전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됩니까? 10,11절을 참고합니다.한나는 자신의 태를 닫으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한나의 기도는 구체적입니다. 아들을 주시면 다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서원은 하나님과 약속하는 행위입니다. 삭도는 머리를 깎는 칼입니다.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겠다는 것은 나실인(Nazirite)에 대한 규정입니다.(민수기 6:2절) 하나님께 드렸다는 의미로 머리를 깍지 않는 이유는 자신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고전 11:3-10>하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나실인으로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기도 자세는 두 손을 하늘로 올리거나 일어서서 큰소리를 냈답니다. 한나는 어떤 자세로 기도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기도는 간절했고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는 마음의 아픔을 하나님께 다 털어 놓습니다. 한나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으면 나중에는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한나



대제사장 엘리는 한나의 마음을 먼저 알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나를 책망합니다. (13,14절) 엘리 제사장은 포도주를 끊으라 합니다. 한나가 낮술에 취하지 않았나 오해합니다. 안 그래도 서러운데 이런 오해까지 받아야하다니! 보통 여인 같았으면 “그래 나취했다. 취한 여인 맛좀 보실래요?”하며 이판사판으로 나오기 쉽죠.

그러나 한나는 어떻게 오해를 풉니까? 한나는 엘리 제사장에 대한 예의를 끝까지 지킵니다.(15,16절) 엘리 제사장을 “내 주여”하고 높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상세하게 알립니다. 한나의 진심을 알게 된 엘리는 “평안히 가도록 했고” 한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시도록 빌어줍니다.

한나의 태도는 이제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한나의 마음에 슬픔이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고통의 그림자가 아침 안개 걷히듯 걷힙니다. 입맛도 돌아왔겠죠. 그의 얼굴에는 근심의 빛이 없습니다. 브닌나의 어떠한 구박도 이 한나의 얼굴빛을 어둡게 만들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막11장24절에서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고 말씀합니다. 한나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서원한 후에도 계속 울면서 보냈다면 그것은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한나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들을 이미 받은 줄로 알고 슬픔을 극복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한나를 축복하고 아들을 주었습니다.(19) 한나는 이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습니다.(20) 사무엘이라는 뜻은 “내가 여호와께 구하였더니” 하나님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에게 받았으니 한나는 서원을 지킵니다.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성막에 두고 오는 일이 쉬웠겠습니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민수기30:8절을 참고하면 당시 한나가 하나님께 서약한 것을 남편 엘가나가 허락하지 않으면 합법적으로 무효가 되는 길도 있었습니다. 서원은 하나님과 한나 사이에 은밀하게 체결한 서원입니다. 문서로 남기고 도장 찍고 복사하고 사인하고 코팅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한나는 서원을 무를 핑계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핑계거리로 엘리 대제사장과 그 아들들의 타락상을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열악한 양육 환경을 부각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한나는 남편 엘가나까지 설득합니다. 그리고 모든 예를 갖추어 사무엘을 드렸습니다. (삼상1:23~25) 형편이 그리 넉넉지도 않았을 텐데 수소 세 마리를 잡습니다. 소 세 마리 중 한 마리는 사무엘을 위함입니다. 한나는 서원을 공식화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27~28) 이렇게 드려진 사무엘은 하나님의 등불로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은 후에 아들 셋을 한나에게 더 주십니다. 그리고 예쁜 공주님도 두 명이나 더 주십습니다.(삼상 2:21) 브닌나보다 자녀가 하나 더 많은 듯합니다 . 한나와 브닌나의 라이벌 대결은 완벽한 한나의 승리로 끝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마음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한나를 배웁니다. 한나는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현실의 슬픔을 극복합니다. 우리 주변에 브닌나는 항상 있습니다. 라이벌은 항상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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