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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이사야를 선지자로 세운 하나님(이사야6:1-13)

by 명주(明珠) 2024. 7. 12.

제1장 행동으로 메시지를 전한 이사야

 

이사야서는 남유다 선지자입니다. 60년 동안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사야의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입니다. 이사야는 왕족 출신입니다. 유다왕국 서열 세 번째입니다. 그는 선지자로 부름받고 활동하다 웃시야 왕이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고 잠시 떠났다가 다시 부르심을 받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구약에 많은 선지자들이 있지만 이사야만큼 고난을 많이 받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맨발에 알몸으로 메시지를 전하게 합니다. 또 허리와 두 팔목에 새끼줄을 감고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 다녔습니다. 70살이 넘은 선지자가 이렇게 한 것은 백성들이 말로 해서는 못 알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똑같이 이방 백성들에게 벌거 벗기우고 쇠사슬에 묶여 끌려간다는 무언의 메시지였습니다. 노 선지자가 몸을 사리지 않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은 눈물겹습니다. 히브리서 11장37절에 보면 톱으로 켬을 당하는 선진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바로 이 분이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제2장 이사야를 부르신 하나님(6:1~7)



1절을 참고하면 이사야는 웃시야 왕의 죽던 해 다시 부릅받습니다. 웃시야 왕은 유다의 10번째 왕으로서 52년간 통치합니다. 그는 약관 16세에 왕이 되어서 68세까지 통치합니다. 유대의 최장수 왕입니다 그는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외교와 국방을 튼튼히 하여 영토를 팔레스타인과 시리아까지 넓혔습니다. (대하26장) 유대 산간 지대를 개발하고 블레셋 지역을 장악하여 조공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평화와 번영을 누렸고 왕의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습니다.

리콴유 예화



리콴유라는 싱가포르 전 정치인이 92세에 별세했습니다. 이 늙은 정치인이 신문 지상에 계속 오르내립니다. 그의 삶이 솔선수범(率先垂範), 청렴결백(淸廉潔白)이었습니다. 뉴스에는 벽에 금이 간 그의 낡은 집을 소개했습니다. 이 집 마저도 남기지 말고 허물어 버리라고 유언했답니다. 그는 죽어서까지 추앙 받았습니다. 웃시야 왕도 이렇게 말년까지 선정을 베풀었으면 좋았겠죠? 그는 말년에 교만하여 져서 성전에 들어가 직접 분향하려다가 문둥병이 걸려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가 죽던 해라는 것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왕이 죽은 후입니다. 막강한 권력이 없어졌다는 것은 그 시대가 그만큼 혼란스럽웠다는 뜻입니다. 우리역사도 보변 고려 말, 조선 말에는 나라가 불안했습니다.

리콴유



당시는 주변 세계정세는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B.C. 745-727년)왕이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살만에셀인 그가 곧 북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수도인 사마리아를 완전히 함락시키고 나라를 없앱니다. 정치적으로 어지러우면 영적으로라도 안정되면 좋습니다. 그러나 반대입니다. 당시 종교적으로도 부패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는 하나님께 드렸지만 마음은 멀어졌습니다. 향락과 사치 풍조도 컸습니다.

간통죄 폐지



오늘날도 향락과 사치 풍조는 커갑니다. 2015.2.26일은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간통죄를 위헌 판정한 날입니다. 간통죄를 없앤 날이죠. 물론 우리나라 최고의 법률기관에서 시대상을 반영했을 뿐 아니라 충분한 법리 검토를 해서 합리적인 결정을 했으리라 여깁니다. 신문기사에는 사람들이 해방감을 누리려고 클럽으로 몰려가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 결정이 가정이라는 테두리가 법적으로 보호받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시대에 이사야가 성전에 갑니다. 왜 갔는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았지만 선지자로서 시대에 대한 위기의식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성전에 가서 이 어지러운 시대에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 너무 오래 침묵하고 계시지는 않을까? 묻기 위해 갔을 수도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간 이사야



1절을 보면 성전에 올라간 이사야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하늘 성전 보좌에 앉아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 모습은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왕들은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길게 늘어뜨린 옷을 입습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찼음은 그만큼 빛나는 영광을 상징합니다.

2절에 보좌 주변으로 스랍들이 모셔 섰다고 표현합니다. 보좌를 섬기는 천사는 그릅들과 스랍들이라합니다. 그릅들은 덥다, 가리다는 의미입니다. 스랍은 불타다 혹은 태우다는 뜻입니다. '스랍들'(세라핌)은 이사야서에만 나옵니다. 스랍들은 여섯 개의 날개가 있었으며 얼굴과 발을 가렸습니다. 날개는 명령을 신속히 이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전에서 본 환상



3,4절을 보면 이들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절을 보면 서로 두 그룹으로 나누어 화답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찬양하는 소리가 얼마나 힘이 있었는지 문지방의 터가 요동합니다. 마치 여호와 강림 때 시내 산이 진동했던 것처럼(출 19:18) 거룩함과 영광을 찬미하는 스랍들의 드높은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습니다. 또한 성전에 연기가 충만합니다. 연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4:5;왕상 8:10;겔 10:4)

이런 광경을 본 이사야는 시대가 아무리 어두워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영광과 거룩함을 나타내고 계심을 봅니다. 천사들은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했습니다. 온 땅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계, 온 천하에 미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이 득세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세상을 방치 하고 계신 줄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길로 온 땅을 부지런히 다스립니다.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습니다.(시121:4) 우리가 잠잘 때도 하나님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여전히 굴리고 계십니다.

이사야의 한탄-화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이사야는 어떤 마음이 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고 울부짖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악을 삼키는 불과 같다합니다.(33:14)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모습을 보면 죽는다고 합니다.(출 33:20;삿 13:22). 그래서 이사야는 고백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 선지자는 특별히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로 자기를 표현합니다.

왜 입술일까요? 손과 발도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에 쌓인 악이 말로 나옵니다.(마 15:11) 야고보서 3장2절은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입술 뿐 아니라 백성들의 입술까지도 부정했음을 고백합니다. 이사야서 29:13절을 보면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고“라합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고 살립니다. 사람의 마음은 순두부와 같습니다. 쉽게 상처받고 부서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혀를 제어하라 권면합니다.

이사야는 죄를 과감하게 즐기는 청년층이 부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뇌물을 꺼리낌없이 수수하고 인사청탁하는 지도자들이 부정하다 판단합니다. 매우 부족한 옷을 걸친 여인들도 부정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부정하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입만 열면 "안돼, 망했어, 죽겠다" 부정적인 말을 토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자기 자신의 죄가 하나님 앞에 드러나자 부끄러워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되었도다. 부정한 입술을 가진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과 두러움으로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악이 제하여 졌도다



그런데 어떤일이 벌어집니까?6,7 절을 보면 스랍 중 하나가 불을 집는 집게로 빨갛게 핀 숯을 꺼내 들고 와 이사야의 입술에 댑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선포합니다. “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이 행위는 이사야의 모든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입니다. 수많은 죄들을 타 태워 없애고 정한 입술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의 입술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입술이 됩니다. 그의 입술은 이제 확신과 용기와 희망적인 말들로 가득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골수를 찔러 쪼개는 날카로운 칼이 되기도 합니다.(사49:2).



제3장 나를 보내소서!(6:8~13)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묻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사명 자를 부를 때에 이름을 직접 부릅니다. 그러나 이사야에게는 간접화법을 씁니다. 이는 이사야의 마음을 세심히 살핀 조치 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사야가 충분히 생각하고 자원하는 마음이 들도록 하기 위함으로도 해석합니다.

이 때 이사야는 무엇이라 응답합니까? 8절 하반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나를 보내소서는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관용표현입니다. 이사야는 죄사함을 받은 감격이 헌신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시 51:12-15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당시 시대 상황은 요즈음과 같이 않았습니다. 생명을 담보로 전쟁터에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13절에 보면 말씀을 듣는 자가 십분의 일도 안 된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숫자적인 10%가 아니라 아주 작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이사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 길이 비록 험난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길을 기꺼이 가고자 했습니다. 강팎한 시대를 생각 할 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못들은 척 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처럼 보낼만한 자를 보내 소서하기 쉬웠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하기보다는 남을 추천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자원함으로 사명을 짊어졌습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보면 엄위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와 후에는 구원의 소식까지 모두 포함되어있습니다.

백성들의 반응



9~11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들은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 요한복음1장5절은 이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영적인 무지함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사야가 어느 때까지 이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인지를 묻자 더 절망적인 말씀을 합니다.

11절을 보면 성읍들이 황폐하여 지고 주민들이 모두 죽고 가옥들은 불타 없어지고 땅도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라합니다. 또한 1/10의 적은 부분이 남아 있을 지라도 이마저도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완전히 망하고 포로로 끌려 갈 때까지를 말합니다.

그러면 절망밖에 없습니까? 아닙니다. 13절 하반절은 그중에도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밤나무, 상수리나무는 베어내어도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돋는 강인 나무입니다. '그루터기'는 원어로 '마체베트''뿌리'(De Wette), '줄기'(Gesenius), '기둥' (Leupold)을 뜻하는 말로서, 원초적인 생명력을 가졌음을 말합니다. '거룩한 씨'는 거듭되는 심판을 겪고서도 끝까지 살아 남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킵니다(롬 11:5). 이들은 성장을 거듭하여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어'(37:31) 거대한 나무를 이룹니다.

그러면 이제 결론을 내겠습니다. 이사야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제2의 이사야를 찾고 계십니다. 요즈음은 기독교인의 수가 4년 연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단의 통계를 보니 1년에 13만8천명이나 줄었다고 합니다. 세상은 그 만큼 강퍅해졌고 복음에 관심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자들의 수가 하향곡선을 그리는 시대에 이렇게 예배당에 와서 말씀을 듣고 주님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자 모인 여러분들은 이사야 못지않은 분들입니다. 외국땅으로 복음을 들고 기꺼이 가는 신자들을 볼 때 귀한 분들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어두운 시대에 복음의 빛을 발하는 왕같은 제사장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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