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함께 공부할 말씀은 마가복음 5장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3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거라사 광인을 온전케 하신 예수님과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과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할 때 장벽이 되는 세 가지가 사단의 세력, 질병,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발목을 잡는 이런 문제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1장 거라사 광인을 온전케 하신 예수님(막5장:1~20)
은둔 형 외톨이란 말이 우리 사회에서 쓰이기 시작한 지가 오래입니다. 이 말은 일본어로 [히키코모리]라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45년 전인 1970년대부터 사회문제였습니다. 은둔 형 외톨이는 모든 사회 활동을 거부한 채 자기 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평균 10~21년 정도 은둔합니다. 최장 은둔을 기록한 사람은 34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라사 광인도 당시 은둔 형 외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는 증세가 심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거라사 광인을 사로잡은 세력을 더러운 귀신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귀신의 종류가 많이 있죠? 귀신 넘버원은 아무래도 처녀귀신이 아니겠습니까? 처녀가 원한을 품고 죽으면 이 귀신이 됩니다. 장가도 못가고 죽은 총각귀신은 무엇이라 합니까? 몽달귀신이라 합니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물귀신입니다. 물귀신 작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귀신은 이렇게 우리나라 전설 속에서 머리 풀고 입술에 피 묻히고 나오는 귀신은 아닙니다. 본문의 귀신은 영어로 Evil Spirit 또는 Unclean Spirit입니다. 직역하면 악한 영, 사악한 영입니다. 이 악령은 출신이 다릅니다. 타락한 천사 출신입니다.(계12:9)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단번에 알아봅니다.(7절) 악령은 실존하는 타락한 영입니다. 이들은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아서 자신을 귀하게 못 여기고 자학하도록 합니다. 또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합니다. 거라사 광인은 산이나 무덤가에 살며 밤낮 괴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5절) 이런 자들을 현대 의학용어로 정신분열, 복합우울증 또는 조울증 이라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 일행이 거라사인 지방에 도착한 때는 캄캄한 밤입니다 거라사 지방은 멀지않은 곳에 40m되는 절벽과 또 옛날 무덤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돼지를 많이 키웠습니다.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라고 유대인들은 키우지 않는데 거라사 지방에는 이방인들이 많이 살면서 키웠습니다. 당시 무덤은 석회석을 파고 만든 동굴입니다. 제자들은 안 그래도 어두워 무서운데 무덤 사이를 지나가려니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머리는 산적같이 하고 웃통은 벗었으며 발과 손에는 끊어진 쇠고랑을 찬 사람이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달려옵니다.(6,7절) 나이도 어리고 담력이 약한 요한은 놀라 잠시 기절했을지도 모릅니다.
거라사 광인은 예수님께 달려오다가 갑자기 기가 꺾입니다. 그는 예수님 가까이 와서 절하며 큰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고분 고분하게된 것은 예수님이 이미 귀신을 향하여 나오도록 명령했기 때문입니다.(8절)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광인의 이름을 묻습니다. 이름은 그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그는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군대는 헬라어 [레기온]으로 6,000명으로 이루어진 1개 군단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악한 영들은 광인에게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자 돼지에게 가기를 원합니다. (12절) 예수님이 허락하자 갑자기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비탈길을 향하기 시작합니다.(13절) 돼지도 춤을 춥니다. “돼지 트위스트” “돼지 삼바” “돼지 테크노”와 같은 춤을 추며 일제히 뛰어갔습니다. 신세대 돼지는 강남스타일 춤도 추면서 달렸습니다.(ㅎ.ㅎ)
그러면 지금부터 현재 돼지 시세를 발표하겠습니다. 110kg 짜리 한 마리는 33만원입니다. 2천 마리면 6억 6천만 원 상당의 가격입니다. 예수님은 값비싼 댓가를 치르면서 한명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2천이나 되는 악령이 떠나가자 거라사 광인은 언제 그랬나는 듯이 멀쩡해 졌습니다.(15절 ) 거라사 광인은 고침 받은 것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간청합니다.(18절)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그의 인생 방향을 줍니까? 19,20절을 참고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멀어진 관계를 회복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떻게 큰일 하셨는지를 데가볼리 지방에서 전파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당시 거라사 광인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예수님의 시각이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먼저 당시 사람들은 거라사 광인을 붙잡고 있는 악한 영을 보지 못합니다. 그저 외적인 현상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소리 지르면 입을 틀어막았고 사람을 헤치면 손과 발을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방법은 상황을 더욱 악화 시킬 뿐입니다
예수님은 악령의 세력을 내쫓음으로 원인 치료를 합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도 지배하는 전능한 분입니다. 악령은 예수님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돼지 2,000마리가 죽자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조금만 더 머무르른면 돼지 산업이 망할 것이 염려되었습니다. 이들은 한 생명이 사단의 세력에 빠졌다가 건저져 새롭게 변한 것은 보지 못합니다. 한 생명이 살아난 것 보다는 자신들의 손해가 더 크게 보입니다. 물질만능주의 가치관이 생명의 예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2장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5장24~34)
주인과 종의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신발을 사오도록 시켰습니다. 종은 신발을 사오면서 생각했습니다. 겨울이라 신발이 얼어 있으면 주인이 신발을 신을 때 발이 시릴 것이라 판단하여 가슴 속에 꼭 품고 왔습니다. 신발을 신어 본 주인은 발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자 종이 버릇없이 자기 신발을 먼저 신고 있었다고 판단해서 종을 내쫓아 버렸습니다. 사람의 진심을 알아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인의 진심을 잘 아아주신 예수님이 나옵니다.
예화입니다. 어떤 마을에 착한 아이와 좀 덜 착한 아이가 살았습니다. 이 아이들의 이름은 편의상 제가 붙이겠습니다. 착한 아이는 김반듯입니다. 반듯 학생은 공부 잘하고 효심이 많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옆집에 좀 덜 착한 아이가 사는데 이름은 막나가입니다. 물론 이름대로 막 나가는 학생입니다. 일진 학생입니다. 그는 막 나가서 부모 속을 많이 썩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반듯 학생 집에서 훈훈한 소문이 났습니다. 반듯 학생이 추운 겨울에 아빠 출근하는데 발이 시려울 것을 염려해 신발을 겨드랑이에 품었다가 따뜻하게 하여 내놓았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막나가 학생이 자기도 일생 처음으로 착 한일 한번 하기로 결심을 하고 실천에 옮깁니다. 그런데 막나가 학생 아버지 막가파 씨는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왜 더러운 신발을 겨드랑이에 넣고 그러니? 하라는 공부나 열심히 햇!” 하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남의 진심을 알아주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또 남이 나의 진심을 몰라줄 때 상처 받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열심히 예수님을 섬기는 분들입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이름도 빛도 없이 섬깁니다. 이것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 속상합니다. 알아주지 않는 것까지는 좋다 이겁니다. 칭찬은 커녕 한 일로 욕 먹을 때 더 속상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늘도 땅도 모르게 몰래 옷자락에 손을 댄 여인의 진심을 알아주는 예수님이 나옵니다. 본문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습니다.(25절)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재산도 모두 허비합니다.(26절) 여인은 처음에는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당시에 의사를 찾는 수준이었다면 상당한 부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 재산도 다 허비합니다. 병으로 인하여 여인으로서의 아름다움도 잃었습니다. 그는 바다 방파제에 신발 벗어 놓고 몇 번 뛰어 내릴까도 생각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의지가 약해서! 부모님 생각에!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고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소망을 갖었습니다.(27,28절) (당시 유대인들은 옷 끝단에 술을 달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시하였다고 함)
레위기15장2-14절 율법을 보면 여인의 병은 사람들과 스치기만 해도 부정하게 만드는 병입니다. 심지어 여인이 앉았던 곳 또 만졌던 물건에 다른 사람이 앉거나 만져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율법이 주는 높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여인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가는 것도 죽을 힘을 다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낳을 수 있다는 소망과 믿음으로 힘겹게 군중들 사이를 헤치고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그러자 병의 근원이 말랐습니다.(27절) 이는 병의 증상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나았다는 표현입니다.
목적을 달성하자 여인은 몰래 자리를 뜨려고 합니다. 그런데 청천 벽력같은 음성이 들려옵니다. 본문30절 하반 절을 보면 예수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며 여인을 찾습니다. 옆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뜬금없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친근감이 많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만졌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메달기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가까이 가려고 밀고 당기고 합니다. 베도로 는 질서를 잡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손댄 사람을 어떻게 찾는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치 않고 찾았습니다. (32절) 마치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 계속 찾았습니다. 여인은 이 예수님의 찾으심에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음을 직감합니다. 그는 많은 사람 앞에 일어난 일을 고백합니다.(33절 )
여인을 율법적인 시각으로 볼 때 정죄 받아 마땅합니다. 여인은 예수님 가까이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지고 부정케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까지 부정케 합니다. 사람들에게 이일이 알려지면 율법 사회에서 즉결심판으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반전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옵니다. 본문 34절을 참고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은 여인을 사랑하는 딸로 맞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면에 참 평강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여인이 그냥 몸만 고침 받고 사라졌다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돌려 세워 그의 육체의 병 뿐 아니라 마음의 병, 영혼의 병까지도 고쳐주었습니다. 이제 여인은 일상생활에서 두려움 없이 ‘내가 주안에 예수님이 내안에 거하심으로’ 영육 간에 건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민감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한 어떠한 행동도 다 알아줍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3장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막5장21~23/35~43)
얼마 전 의정부 아파트에 화재사고가 났습니다. 주민들 중 4살 아들을 살리고 본인은 큰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 치료받던 한 미혼모가 있었는데. 몇 일전 사경을 헤매다 숨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얼마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회당 장 야이로의 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12살 먹은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야이로는 회당 장으로서 존경과 사회적인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딸을 살리기 위해 무명에 가까운 랍비에 불과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합니다.(22,23절) 예수님은 야이로의 소원을 무시하지 않고 그의 집을 향해갑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 혈루증 여인을 만나서 시간을 지체했습니다. 야이로에게는 1초1초가 몇 십 년은 되듯이 느리게 흘렀고 속이 새까맣게 탔고 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그 사이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이제 모든 상황이 끝났으니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 합니다.(35절) 야이로는 밀려드는 슬픔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어떤 방향을 줍니까? 본문36절을 참고합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 두려워 말고 믿기만하라! 합니다. 이 상황에서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 급박한 상황에서 딸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체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야이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으로 끝까지 모시고 간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상을 당하면 전문적으로 대신 울어주는 직업인이 있었습니다. 이 직장 이름을 “장례 전문 애곡사”이렇게 불러야할까요? 이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바닥과 가슴을 치며 아주 구슬프게 통곡을 해 주었답니다. 심지어는 피리, 꽹꽈리 같은 악기를 동원해서 더욱 구슬프게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자 벌써 이런 시끄러운 소리들로 가득 찼습니다.(38,39절)
예수님은 이들에게 이해도 납득도 하지못할 말씀을 합니다. 죽은 아이를 잔다고 합니다. 잔다니요? 당연히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비웃음을 뒤로 한 채 아이 방으로 들갑니다. 그리고 달리다굼 합니다.(40,41절) 달리다굼은 당시 어머니들이 이른 아침에 자는 아이를 깨울 때 쓰는 사랑스런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달리다굼 하자 소녀는 한숨 잘 잤다는 듯이 일어났습니다.(42절 )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살리심으로 두려워 않고 믿음을 드린 야이로에게 선물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님께는 결코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우리 성도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해야하는 지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행전20:24절) 이 자세가 사도바울이 예루살렘 방문을 앞두고 가진 자세입니다. 우리는 받은 사명이 없다고요? 우연히 구원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고 구원했습니다. 크던 작던 사명이 있습니다. 요즈음 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세포는 120살까지 산다고 합니다. 만약 받은 사명을 120까지 완수해야 한다면 하나님은 120까지 살려두십니다.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죽이셔야 죽습니다.
두 번째는 죽음을 잠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영이 우리들 안에 있으므로 설령 현재 눈을 감는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은 안방에서 건너 방으로 옮겨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숨 잘 자고 나면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에서 삽니다.
세 번째는 살아생전 예수님이 오시면 죽음을 맛볼 필요가 없다는 자세입니다. 이단들의 잘못된 종말론 때문에 휴거라 말만하면 이단, 삼단으로 오해받기 쉬운데요. 우리가 살아생전에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것은 바른 신앙의 태도라 생각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4:17)
결론적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에 나 몰라라 하지 않는 분입니다. 우리를 치유하고 영육 간에 건강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고 증거합니다. 우리 모두 이 예수님 안에서 악령의 세력도 이기고 질병도 물리치고, 죽음이 쏘는 독화살도 막아 내는 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성경참고구절
막기복음5:1-20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1)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마가복음5:24-3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가복음5장21~23/35~43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성경강의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야를 선지자로 세운 하나님(이사야6:1-13) (0) | 2024.07.12 |
---|---|
끝까지 간 룻의 믿음(룻기1:1-20) (0) | 2024.07.12 |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요2장1-12) (0) | 2024.07.12 |
에스라의 영적인 결단(에스라7:1-10) (0) | 2024.07.12 |
믿으라!섬기라!죽이라!(요한복음20:24-29) (0) | 2024.07.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