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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말씀 의미와 교훈

요한계시록 7 교회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계시록 2장-5장)

by 명주(明珠) 2024. 8. 31.

7 교회에 보낸 서신은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신약의 선지자 요한을 통하여 전체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에게 구속사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본다. 전체 교회사를 통해 교회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적으로 기술했다. 편지의 마지막마다 ‘이기는 자에게는‘이 후렴구로 나온다. 일곱 편지의 모든 내용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한다. 마지막에는 승리자에 대한 보상 약속이 끝난다. 후렴구에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하겠다, 둘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않게 하겠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고 약속한다. 우리는 세상이 주는 ‘환난, 핍박, 고난’을 이겨야 한다. 또한 우리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이겨야 한다. 육신과의 싸움도 이겨야 한다.
 
3절 참고하면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정신, 풍조 등이 적그리스도이다.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 정신, 풍조를 말한다. 초대 교회 때는 네로를 적그리스도라고 생각을 했다. 네로는 커다란 정치세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반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였다. 이와 같이 교회 시대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모독하고 그 분과의 연합으로 구원을 받는 복음을 왜곡하면 적그리스도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방해하면 적그리스도다. 적그리스도는 지금 우리 싸워야 할 우리 안의 육신이며 세상 적인 풍조이며 정신이며 실존하는 마귀의 세력이다. 지금이 종말의 때요 지금이 심판의 때면 지금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기라’하고 요구한다.
 
 


에베소 교회(계 2:1-7)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
 
에베소는 로마 속령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번창하는 항구도시였다. 남자가 40,000명이 넘었고 전체 인구가 225,000명이었다. 에베소는 로마에 대한 충성과 봉사를 인정받아 자치 도시가 되었다. 따라서 로마군이 주둔하지 않았고 가끔 총독이 방문하여 회의를 주재하는 자유의 도시였다. 에베소에는 카이스터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강에 무역을 위한 항구가 있었다. 강이 주변은 산에서 내려온 침적(沈積) 토 때문에 강이 낮아질 때는 항구를 다른 곳으로 옮겨 도시를 재정비해야 했다. 이 배경 하에 5절에 있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은 ‘회개치 않으면 내가 속히 임하여 촛대를 옮기리라’였다. 촛대를 옮기면 마치 도시를 옮겼을 때 얼마나 황폐케 되는 지를 직감적으로 알았다.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과 많은 우상들을 섬겼다. 에베소는 에베소 원주민들과 헬라인들 그리고 다른 헬라계 주민들과 유대인들이 섞여 살았다. 에베소는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기 전까지 목회를 하였다.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던 곳이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에베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60마일 떨어져 있는 밧모 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내는 첫 편지가 에베소교회이다. 에베소 교회는 정통 교리도 있었고, 바울-디모데-아볼로-브리스길라-사도 요한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있었다. 사도 바울이 3차전도 여행 때 삼 년간 머무르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5시간씩 2년 동안 기독교 교리 설교를 했던 교회이다. 이런 에베교 교회에 너희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말씀하신다. 바로 그 처음 사랑, 처음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행위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40년 후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이 편지를 받아 적을 때는 ‘행위도 여전히 풍성했고 교리도 바르게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형식적인 행위요 형식적인 지식이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 고 하신다. 여기서 ‘생각하라’라고 하는 것은 헬라어 단어‘므네모뉴오’는 ‘remember‘’ 기억하라’는 말이다. 본문은 현재 시제이다. 계속 기억하라는 것이다. 구원을 계속 ‘기억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회개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연이어 ‘행하라’ 하고 말씀하신다. 둘 다 부정과거 시제이다. 결단을 요구하신다. 에베소 교인들은 니골라당을 몰아낼 정도로 교리에 밝았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을 만큼 행위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원의 은혜와 감사에 근거하지 않은 지식과 행위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되지 못한다. 실제로 에베소 교회는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촛대는 옮겨졌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와 같이 하나님은 계속 경고하신다.
 


 
서머나 교회(계 2:8-11)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이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타기 투스의 연대기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기독교 인 들이 네로의 정원에서 찢기고 불태워져 밤을 밝히는 연료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자들을 위해 서커스가 공연되었다. ” 많은 박해가 기독교 인들에게 닥쳤다. 그리고 성도들은 당시 상인들의 조합이었던 길드 조직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기 위하여 그들은 상인들의 조합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길드 조직은 상인들의 연합 집단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사업의 번창과 무역의 흥왕(興旺)을 위하여 제사를 자주 드렸다. 일 년에 몇 번씩 Trade Guild Festival을 열어 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조직 유지를 위해 돈을 거두었다. 성도들은 그 돈조차 내지 않았다. 따라서 당연히 그들은 길드 조직으로부터 외면을 당했고 장사도 못하게 되었다. 생계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심지어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성도들은 시이저 황제를 섬기는 신전에 내야 하는 돈도 바치지 않았다. 당시도 그 신전을 유지하고 운영해 나가는데 많은 돈이 들었다. 성도들은 시이저를 신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돈을 내지 않았다. 서머나는 로마에 가장 충성을 했던 도시였다. AD26년에 로마가 티베리우스 신전을 세우기 위해 11개 도시를 놓고 심사를 하여 가장 충성스러운 도시를 뽑아 신전을 서머나에 세웠다. AD81-96년까지 도미티 안 황제가 로마를 다스릴 때는 더 심한 박해가 있었다. 도미티 안은 자신을 신으로 생각했고 신처럼 숭배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지 않는 자들을 잔인하게 사형에 처하거나 유배를 시켰다. 사도 요한은 그때 유배를 당했다.
 
서머나라는 도시는 기원전 6세기에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기원전 3세기에 다시 새롭게 세워진 도시이다. 서머나 사람들은 파괴되었다가 다시 새롭게 세웠다. 죽었다가 살아난 ‘재건’의 개념이 늘 마음속에 있었다. 따라서 서머나 교회 사람들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금방 그 의미가 와 이해했다. 서머나 교회의 폴리캅이 계시록의 편지를 읽고 화형대에서도 당당했다. AD156년이면 요한 계시록이 쓰여 진지 60여 년 후이다.
 
 


버가모 교회(계 2:12-17)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3이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먼저 12절을 참고하면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라고 예수님을 묘사한다. 좌우에 날 선 검은 말씀이다. 검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쟁의 상징이었고 권위와 심판의 상징이었다. 당시의 로마 총독들은 생사여탈권을 가진 막강한 권력이 있고 심판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한 총독들을 가리켜 ‘검의 법’이라고 이야기했다.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진정한 권위와 심판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먼저 밝히고 있다. 진정한 권세와 심판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버가모라는 도시는 로마 ‘아시아도’의 행정수도였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신전인 아우구스투스 신전을 비롯한 황제의 신전이 3개나 있었고 제우스 신전, 아테네 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아스클레 피오스 신전 같은 그들의 신을 섬기는 신전이 4개나 있던 그야말로 우상 천지인 도시였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버가모를 가리켜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는 표현을 쓰셨다. 당연히 우상 숭배와 황제 숭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는 그러한 외부적인 핍박을 잘 견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아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가 안디바라는 순교자다. 안디바는 성경에 여기에 한번 나오는 인물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버가모 교회의 순교자 명단에도 빠져있는 사람이다. 아마 다른 도시에서 와서 순교를 한 사람일 것이라 추측을 할 뿐이다. 예수님은 안디바를 아신다. 예수님은 이름을 직접 호명하시며 편지에 기록하신다. 버가모의 신전에는 여 사제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창기였다. 우상을 섬기고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자들은 제물을 바치고 그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는 것과 동시에 그 신을 섬기는 여 사제와 관계를 가짐으로 그 신을 온전히 섬기게 된다고 생각을 했었다. 버가모 교회 안에도 같은 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도 섬기면서 우상도 섬기는 혼합주의를 말한다. 버가모 교회는 외적인 핍박은 잘 견뎌냈으나 내적인 부패를 막지 못했다.
 
니골라당은 당시 초기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무 율법주의를 가르쳤던 자들이다. 율법주의는 ‘우리는 이제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천국 간다. ’라고 주장했다. 영지 주의는 ‘영적인 것은 고급한 것이고 육적인 것은 아주 저급한 것이어서 육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를 주장했다. 육으로 지은 죄가 영으로 얻은 구원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영지주의 자들은 교회 안에서는 아주 신실하게 종교 생활을 하다가 자기 삶의 현장에 나가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다. 이들이 바로 니골라 당입니다.
 
발람이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라는 뜻이다. 발람의 헬라어가‘니골라’이다. 당시 법정에서 흰 돌을 주면 무죄였고 검은 돌을 주면 유죄였다. 그리고 흰 돌은 성결과 거룩을 상징했다. 버가모 교회 사람들이 이 편지를 받아 읽으면서 흰 돌을 주겠다고 하셨을 때에 죄를 사하여 주시고 거룩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 극장에 들어갈 때 입장권이 돌에 이름을 새긴 것이었다. 따라서 흰 돌에 이름을 새겨서 주시겠다고 했을 때 그들이 아마 천국의 입장권을 생각했다. 보석이라고 번역이 된 ‘에벤’은 ‘돌, stone’을 말하는 것이다. 돌 위에 이름을 새기는데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긴다. 의미는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두아디라 교회(계 2:18-29)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 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두 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두아디라’라는 도시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버가모나 이집트 등이 전쟁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지나게 되는 곳이다. 여러 나라의 침략을 많이 당했던 도시였다. 이 도시는 상업을 통한 부를 얻었다. 로마가 두아디라까지 도로를 낸 것은 상업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옷을 만드는 기술과 봉제업, 그리고 옷에 부착하는 가죽을 다루는 기술 거기에 다는 도구를 만드는 대장장이들의 제련 기술도 발달했다. 상업 조합이 생겼고 조합마다 각자 섬기는 수호신들이 많았다. 수호신을 섬기는 무당들, 제사장들이 많았던 도시였다. 조합들이 벌이는 축제는 아주 유명했다. 두아디라 교회는 그러한 사회적 영향을 받았다. 도아디라는 교회 안에 이교적 신앙의 모습이 많이 침투해 있었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를 다시 번역하면 ‘나는 네 행위 즉,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이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행위를 버렸다고 책망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나중행위가 더 많았다고 칭찬하신다.
 
이세벨은 그렇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술수를 행하던 선지자였다. 따라서 주님께서 이세벨을 ‘자칭 선지자’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주님은 그 이세벨의 가르침에 넘어간 자들을 책망하고 계신다. 그러면 그 이세벨의 가르침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세벨이 이스라엘에 끌고 들어 온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교신앙이다.
 
 


사데 교회(계 3:1-6)


 
사데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로 인정도 받고 인기도 얻고 유명했지만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예배당 밖에만 나가면 그 도시의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문란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사데’라는 지방은 고원지대이다. 따라서 그 도시 전체가 요새화되어있는 도시이다. 산 위에다가 성을 쌓고 남쪽 한 군데에만 입구를 만들어 놓아서 난공불락의 요새로 이름이 난 도시이다. 도시가 요새화되다 보니까 그 성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제한이 되어서 그 주변에 위성도시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전체를 다 합쳐서 ‘사데’라고 불렀다. 샤데는 아주 부유한 도시였다. 도시 아래로 흐르는 팍톨루스 강에서 사금이 나고 있었고 그 사금 덕에 최초의 금화를 주조한 도시였다. 그리고 허무스 평야의 풍요로운 농산물도 사데의 부에 일조를 했다. 그런데 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두 번 완전히 파괴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BC549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하여, 그리고 BC218년에 안티오쿠스 대제에 의하여 점령당했다. 그런데 두 번다 하룻밤 사이에 반대편 절벽을 타고 넘어오는 게릴라전에 의해 패했다. 그리고는 로마의 아시아도의 한 도시가 되었다. 밤사이에 도적같이 침공해 온 적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망한 전력이 있는 사데 교회에 예수님께서 편지를 보내신다.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는 내용은 그런 사데 도시의 배경을 들어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경고를 하신다.
 
1절 후반부에 주님께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I know your deeds’라고 하셨다. 행위가 복수이다. 사데 교회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행위들이 그들의 자랑이었다. 사데 교회는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다’고 1절에서 말씀하신다. 사데 교회 내에는 이단들도 없었고 도시로부터의 핍박도 없었다. 사데 교회는 인기가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런 사데 교회를 ‘살아있는 교회’라 불렀다. 그런데 주님은 실상은 네가 죽었다고 하신다. 행위가 풍성했는데 죽은 행위들을 하고 있었다. 샤데는 도덕적으로 아주 문란했다. 그런 영향으로 교인들이 예배당 밖에만 나가면 그 도시의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문란한 생활을 했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를 겉만 번드르르한 죽은 행위라고 하신다.‘깨어나라, wake up’‘그레고 류오’라는 단어는 ‘잠에서 깨어 정신을 똑바로 차리다’라는 뜻이다.
 
‘일깨워’라는 말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기누 그레고론’이다. ‘기누’는 become이라는 뜻을 가진 ‘기노마이’의 현재 중간 태 직설법이다. 그리고 ‘그레고론’은 ‘그레고류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계속적인 진행을 나타낸다. 해석은 ‘계속하여 깨어있어라’라는 뜻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계속하여 깨어있지 못한 자들은 완전히 ‘죽은 자’ 아니면 ‘죽어 가는 자’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계 3:7-12)


 
빌라델비아 교회는 빌라델비아에 사는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따돌림과 핍박을 당했던 그런 교회였다. 7번의 큰 지진으로 도시가 거의 황폐하게 되었고 AD17년에 있었던 큰 지진 후에는 도시를 다시 세워야 할 만큼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때 (도시를 재건할 때)에 로마 황제의 지원을 받아 도시를 재건했는데, 도시를 재건하고 나서 로마 황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도시의 이름을 새롭게 바꾸었다. (New city of caesar) ‘시저에게 바치는 새로운 도시’라는 새 이름으로 도시의 이름을 바꾸었다. 30여 년 간을 그 이름을 쓰다가 다시 빌라델비아로 이름을 고쳤다. 12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는 그 사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하겠다. ’라는 표현을 쓰신다. 주님을 ‘거룩하고 진실하신 이’라고 표현을 한다. 이 표현은 ‘진짜 거룩’‘참 거룩’이라는 의미이다. ‘거룩’이라는 말은 원래 하나님께 쓰이는 단어이다. 히브리어로 ‘카다쉬’ 헬라어로 ‘하기오스’라는 단어는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단어이다. 우리 흔히 ‘거룩’하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단어로 생각들을 하는데 사실 그 단어들은 하나님의 신비함과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거룩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이미 천국의 문을 열어 두었고, 그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 ” 는 더할 나위 없는 위로의 말씀이다. 그 문은 아무도 닫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지금 밤 같은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지만 실상은 영적으로 대낮을 살고 있다.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라는 말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우리의 인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인내’이다. 다시 번역을 하면 ‘예수님의 인내에 대한 말씀을(복음을) 잘 지켰기에(테레오)’이런 말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인내와 부활을 이해하고 잘 지켰다. ‘그러한 너희들을 내가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겠다 ‘고 말씀하신다. 이는 ‘지켜주겠다’는 것이지 아예 시험을 없애 주겠다는 뜻이 아니다. 영어로는 ‘keep you from the hour of trial’이다. 이들이 지킨 것은 10절에서 ‘예수님의 인내에 대한 말씀’을 지킨 것 즉, 복음을 말한다. 이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 ’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기둥들은 결코 다시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둥 위에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 교회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을 새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성전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그 기둥은 성전을 지탱하는 것이다. 그 기둥이 빠져 버리면 성전은 붕괴한다.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의 성전은 붕괴되고 말 것처럼 묘사를 하신다. 우리는 그처럼 하나님께 대우를 받는 존재들이다.
 


라오디게아 교회(계 3:14-22)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교통의 요지였고 상업과 무역이 발달한 도시였다. 라오디게아는 부유한 도시였고 인구도 많았다. 은행업이 발달해 있었고 아주 유명한 의술 학교와 의료 시설이 있었던 도시이다. 그 의료시설에서는 안질을 낫게 하는 훌륭한 안약이 생산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에서 북쪽으로 6마일 떨어진 곳에는 온천으로 유명한 히에라 폴리스라는 도시가 있었고 남쪽으로 10마일 떨어진 곳에는 우리 잘 아시는 차가운 생수로 유명한 골로새라는 도시가 있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게 편지를 보낼 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도 읽게 하라고 당부를 할 정도로 아주 가까운 도시였다.
 
그런데 라오디게아는 식수가 형편없었다. 석회처럼 보이는 진흙이 물에 섞여 있었기 때문에 마실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웃 도시인 히에라 폴리스의 온천물과 골로새의 차가운 생수를 수로를 통해 끌어다가 사용했다. 그런데 그 물이 긴 거리를 오면서 미지근해졌다. 따라서 그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 토할 지경이었다. 문맥 보면 찬 것이나 더운 것이나 둘 다 좋은 것이다. 단지 미지근하지만 말라는 것이다. 히에라 폴리스의 온천수와 골로새의 차가운 생수를 수로를 통해 대다 먹던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그 말뜻을 금방 이해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을 부자라 했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었다. 본문은 자기의 힘으로 부자가 되어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걸 미지근한 신앙이라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말씀하신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그 십자가의 삶이 영광스러운 부활로 가는 길임을 깨달아 참된 부요의 삶을 살라는 충고다. 그리고 세 번째로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하신다. 안약으로 유명했던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했다.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은 두 동작이 아니라 하나이다. 듣는 사람은 열게 되어있다는 뜻이다. 내가 문을 열 것인지 말 것인지를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권 적으로 열고 들어오신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자들이다. 따라서 당연히 문을 언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문을 열어 주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맞아들이고 우리는 그의 종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계시록 7교회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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