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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구절교훈

하늘의 문이 열리고 보이는 것 그리고 인 재앙(요한계시록4장~6장)

by 명주(明珠) 2024. 8. 31.

요한계시록 4장
 
‘이 일 후에’는 첫 번째 환상과 연결한다. 하늘의 열린 문에서 들린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이다. 그 예수님의 음성이 요한을 하늘로 불러올린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셨다. 흰옷을 입고 면류관을 쓴 24 장로가 그 보좌 주위의 다른 보좌에 앉아있었다. 보좌 앞에 일곱 영, 성령이 계셨으며 유리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앞뒤에 눈이 가득한 네 생물이 있었다.
 
계 4:3은 하나님을 묘사한다. 여기서 벽옥과 홍보석 그리고 녹 보석으로 하나님을 설명한다. 4장 3절의 보석을 포함한 12 보석으로 표현한다. 구약에도 똑같은 보석이 등장한다. 교회를 상징하는 대 제사장의 에봇 위에 거는 정사각형의 흉패에 박힌 보석 들다. 계 4:4절은 흰옷을 입고 금 면류관을 쓰고 보좌에 앉아있는 24 장로가 나온다. 흰옷을 입고 면류관을 쓸 수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 교회를 말한다. 계시록 21장에서 예수님의 신부 교회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거기에 12지파의 이름과 12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둘을 합한 수 24 장로가 바로 교회를 나타낸다. 보좌에 앉은 흰옷을 입고 면류관을 쓴 24장으로는 교회를 상징한다. 요한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입은 교회가 함께 하나님의 보좌 둘레에 앉아 있다. 미래 완성된 교회를 보여 주신다. 이를 통해 현재적으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주님은 핍박과 고난, 실패와 좌절 속에 있던 지상의 교회들이 불안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완성된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교회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심으로 이 땅에서의 환경이나 상황들이 우리를 공격해 오지만,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 모양이지만 장차 하늘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그렇게 이미 완성이 되겠구나 절대 용기를 잃지 말고 낙담하고 알고 좌절하지 말고 끝까지 한번 싸우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신다.
시내 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도 “번개와 뇌성과 나팔소리 같은 음성과 불 가운데” 여호와께서 강림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여호와의 앞에 거룩하지 못한 것들은 절대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곱 나팔의 재앙이 일어날 때, 일곱 대접의 재앙이 일어날 때도 똑같이 번개와 뇌성과 음성이 등장한다. 재앙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은혜로 부르시는 부르심이 되지만 죄인들에게는 심판이다.
 
본문의 유리바다와 거기서 찬양하고 있는 교회인 24 장로의 모습은 성경에 그림자로 모형으로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교회와 그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백성들의 모습이다. 그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가 전가받았다. 그 단서는 오늘 본문 10절 11절에서 24 장로들이 그 승리의 면류관을 하나님 앞에 벗어서 다시 돌려 드리는 것이다.(계 4:7)
 
요한계시록 5장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을 하시고 ‘그 말을 간수하고 마지막 때까지 봉함하라’고 하셨다. 다니엘서에서 언급하는 봉인된 책의 내용은 메시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의 내용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는 책의 내용은 메시아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고대에는 중요한 계약서와 유언장에 일곱 인으로 봉인을 했다. 그리고 앞면에는 전체 내용을 요약했고 뒷면에는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다. 일곱 인으로 봉인을 한다는 것은 일곱 증인을 뜻한다.
 
일곱 증인은 그 안의 내용들이 반드시 실현된다는 의미다. 유언은 유언장을 작성한 사람이 죽어야 유효하다. 살아있을 때는 유언장을 열 수도 없고 유언이 실효성이없다다. 따라서 복음도 예수님이 죽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오늘 본문에서 오직 그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만이 인봉을 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표현이 같은 의미다.
 
책의 인이 떼어질 때마다 저주와 심판이 있다. 이는 구원은 항상 심판과 함께 오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지만 죄에 대한 심판을 동시에 표현다. 복음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저주의 심판이다. 일곱 인이 떼어질 때마다 전쟁과 기근과 역병, 그리고 자연의 법칙, 우주의 파괴가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번개와 뇌성과 음성이 악한 세상에는 심판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외침이다. 성도들의 기도를 “향”이라고 묘사한다. ‘이스라엘의 제사 때 향 제물은 숯불을 담은 냄비 안에서 만들었다. 숯불에서 나오는 연기가 향과 섞인 형태가 기도를 상징한다. 요한은 그 하나님의 계획이 유보되거나 지연될 것을 염려하여 울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세상으로 오셨다’라는 성육신에 관해 말씀하시는데 거기 쓰인 ‘왔다’라는 단어가 완료형 동사다. 헬라어의 완료형은 과거에 한번 일어난 일이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사신다. 요한이 들은 것은 분명 ‘사자’의 모습이었는데 직접 보니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이다. ‘죽임을 당하다’라는 말은 ‘도살당한’이다. 우리는 ‘승리’하면 나의 힘을 키워서 상대방을 누르는 것을 연상한다. 성경의 승리는 내가 당하고 내가 죽어서 이루는 승리다.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원리, 하나님의 지혜다. 천국의 삶의 원리다.
 
어린양은 일곱 뿔을 가진다. 구약에서 뿔은 항상 힘과 승리를 상징한다. 뿔이 일곱인데 일곱은 완전 수이다. 일곱 뿔은 ‘신적인 힘, 전능, 완전한 승리’를 말한다. 전능하신 힘을 가지신 분이 세상에서 그 힘을 발휘하셨는데 어린양의 모습이다. 그 힘이고 완전한 승리다.
 
상징으로 보면 본문의 사건들을 시간적인 순서로 이해를 하면 안 된다. 요한 계시록은 논리적인 순서로 이해를 해야 한다. 인은 차례차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전쟁, 기근, 질병, 자연재해 이런 것은 노아 때도 아브라함 때도 모세 때도 지금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마지막 때로 가면서 점점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요한 계시록은 시간적인 순서로 배열이 된 사건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공부해야 한다.
 
찬양의 이유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셔서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하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고 이것이 새 노래다. 계시록을 시제가 혼용한다. 4장과 5장은 구속의 시작과 완성이 적혀 있는 책이 열리고 그 일이 지상에서 실행에 옮겨지는 일이 남은 듯한데 하나님은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라고 과거로 말씀 신다. 우리는 already... not yet의 원리를 잘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으로는 이미 이루어져 있고 시간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나라와 제사장이 이미 되어 있고 또 이 시간 속에서 나라와 제사장이 되어 간다. 이를 ‘신분적 운명적으로는 이미 완성이 되어 있고 존재론 적, 시간 적으로는 아직 완성으로 가는 상태다’라고 설명한다.
 
 
요한계시록 6장
 
계 6:1-11
 
일곱 재앙의 부분은 점진적이며 반복적인 기법으로 종말에 일어나는 재앙을 기록했다. 따라서 일곱 번째 인이 떨어질 때 일곱 나팔이 나오고 일곱 번째 나팔을 불 때 일곱 대접이 나온다. 일곱 인이 일곱 나팔을 물고 있고 일곱 나팔이 일곱 대접을 물고 있는 형국이다. 일곱 인 환상은 4+3의 구조이다. 말 탄 자 넷이 나오고 그다음에 세 개의 인이 나온다. 다섯 번째 인부터는 영화장면이 바뀌는 듯하다. 나팔 재앙도 마찬가지고 대접 재앙도 마찬가지이다. 4+3의 구조이다. 일곱 인의 재앙 중 처음 네 재앙에는 모두 말 탄 자가 나온다.
 
처음에 백마를 탄자가 나오고 두 번째 인에서 붉은말, 세 번째 인에서 검은 말, 네 번째 인에서 청황색 말 탄 자가 나온다. ‘말 탄자는 예수다, 아니다. 적그리스도다. 천사다’ 등의 시각차이가 있다. 그러나 말 탄자들을 1:1로 누구를 대응할 필요는 없다. 말 탄자들을 통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이해하면 된다. 말 탄 자가 나오는 구약을 참고한다. “슥1:7-12, 겔 14:12-23, 슥6:1-7, 슥14:1-5” 말씀이다. 여기에 네 말은 모두 골짜기에 있다. 골짜기는 이사야서 44장 27절에서는 다르게 바다의 깊은 곳이라고 번역했다. 말 탄 자가 골짜기에 서 있고 그들이마다에서 나온다. ‘바다의 깊은 곳’은 죽음 저주, 심판을 상징한다. 따라서 요나가 바다 깊은 곳에 빠졌을 때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라고 그곳을 ‘음부’라고 표현을 한다. 바로의 군대가 바다에 빠져 수장될 때도 그 ‘깊음’이라는 용어가 쓰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옛사람을 죽이신다. 이를 위해 심판과 저주와 재앙을 사용하신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야 부활을 할 수 있다. 애굽에서 장정 60만 명이 나와 광야에서 다 죽고 새 사람 60만 명이 가나안에 들어갔다. 우리는 어디에서 구원받았는가? 하나님의 진로에서 구원받았다. 우리는 무엇으로 구원받았는가?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구원받았는가? 이사야서 47장 3절을 참고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받았다.
 
본문에 붉은 말과 그 말을 탄자는 땅의 화평을 제하여 버리고 서로 죽이게 한다. 이는 전쟁을 상징한다. 둘째 인의 내용은 전쟁이다. 오늘날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근과 흉년으로 죽어가고 있다. 짐승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고 그들을 죽이는 것처럼 보인다. 재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무섭다. 세상은 세상 권세 잡은 사탄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다. 도미티 안 황제 때는 성도들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했다. 이때가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던 AD95년 96년 경이다. 요한 계시록은 당시 핍박받던 교회들이 흔들리고 있을 때 하늘나라의 영광과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해 환상을 보여 줌으로 힘과 용기와 격려를 주는 책이다.


 
예수님이 둘째 인을 떼자 붉은 말과 그 말을 탄자가 나온다. 말 탄 자가 땅의 화평을 제하여 버리고 서로 죽이게 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전쟁을 의미한다. 우리 주변에는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난다. 세상은 전쟁을 겪으며 어두움과 절망과 좌절과 사망으로 던져진다. 성도들은 전쟁 속에서 십자가의 도를 배운다.
 
5절과 6절에서 셋째 인을 떼자 검은 말이 나오고 그 말 탄 자가 손에 저울을 들고 나온다. 성경에서 저울이 등장하면 흉년과 기근을 상징한다. 6절에 나오는 밀과 보리 감람유와 포도주는 유대인들의 식량을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감람유와 포도주는 부유한 사람들을 상징하는 식품이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에 기근이 심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아이를 잡아먹기도 했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이 있다. 그때 사람들이 밀과 보리를 더 심기 위하여 감람나무와 포도나무 밭을 갈아엎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감람유와 포도주를 해치 말라고 하시는 말씀은 아무리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도 부자들은 여전히 부자로 남아 있는 현상이 일어난다.
 
오늘날도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근과 흉년으로 죽어가고 있고 죽어갈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품고 있기에 만족한다. 성도들은 물질적이거나 영적 기근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의 풍요가 무엇인지를 배운다.
 
네 번째 인을 떼시자 온갖 종류의 죽음이 나온다. 청황색 말이 먼저 나온다. 청황색은 잿빛, 암갈색, pale이라는 뜻이다. 죽은 시체의 색깔이다. 말 탄 자의 이름이 ‘사망’이다. 청황색 말 탄자는 ‘사망을 의인화했다. 말 탄 자들 또한 하나님이 세상에 심판과 저주와 재앙을 상징한다. 청황색 말을 탄 사망이 ‘죄의 삯인’ 사망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 죽인다. 거기서 사망의 원어 뜻은 ‘온역, 전염병’이다. 네 번째 인은 앞에서 묘사된 모든 인들이 가지고 있는 전쟁, 기근을 포함한 죄의 삯인 사망으로 죄인들을 몰고 간다. 이것도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들이다.
 
구약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을 항상 칼과 기근과 온역으로 표현했다. 본문에 인을 떼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럴 때마다 전쟁과 기근과 온역이, 질병들이 일어난다. 말세 때가 되면 마치 하나님께서 전쟁과 기근, 질병 같은 재앙을 일으키셔서 세상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처럼 생각하실 수가 있는데 그것은 아니다. 모든 재앙들은 타락한 인간과 마귀의 세력 즉, 악한 세상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 전쟁은 하나님이 일부러 일으키지 않는다. 전쟁도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 낸다. 기근도 인간의 이기심의 죄가 만들어 낸다. 인간들이 욕심을 부려 자연을 파괴하고 땅을 혹사시켜 기근이 생긴다. 독점하려는 욕심이 풍요 속의 기근을 만든다. 질병과 전염병도 마찬가지로 자연의 순리를 어긴 인간에 의해 발생한다. 그 배후에는 사탄이다. 모든 재앙의 원인은 우리의 죄 성으로 향한다. 타락한 인간은 마귀의 세력과 공범으로 심판을 받는다. 아무리 마귀가 유혹을 해도 우리 동조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악한 길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 그 모든 재앙은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재앙이 아니라 마귀의 세력을 포함한 타락한 인간들의 죄 성이 만들어 낸다. 하나님께서 이것도 선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수단과 방법으로 쓰시는 것뿐이다. 인의 재앙, 나팔 재앙, 대접 재앙 이 모든 재앙의 서론인 첫 번째 인을 떼실 때에 흰 말을 탄 활을 든 자가 ‘이기고 또 이기는 모습이 나오는 것’이다.
 
첫 번째 인에서 흰말을 타고 활을 든 자가 나오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요한은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게 두렵고 무시무시한 것’이라는 것을 첫 번째 인에서 인식시킨다. 그런데 그 재앙은 하나님이 만들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흉내 내고 있는 악한 세력에 의해, 죄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 세력은 세상에서 이기고 또 이기는 모습으로, 승리자의 모습으로 보일 거었다. 무저갱의 사자 사탄을 원어로 ‘파괴자’라고 부른다. 마귀의 세력과 그 세력에 동조하는 사탄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재앙을 만들어 내고 하나님은 그것을 그냥 허락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 이 땅에서 겪는 재앙의 실체이다. ‘그러나 그 어떤 재앙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유익이며 복이다’ 이것이 바로 인의 재앙이 주는 메시지이다. 인을 우리 주님이 떼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건 들 위에 우리 주님이 계신다. 모든 것은 우리 주님의 허락 하에만 일어난다.
 
계 6:9-11
 
다섯 번째 인의 재앙에서는 순교자들이 나온다. 계속하여 전쟁, 기근, 질병 같은 재앙이 나오다가 갑자기 재앙의 내용이 아닌 순교자들이 나온다. 순교자 하면 예수 믿다가 소천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말세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말한다. 오늘날을 포함한 전체 교회 시대를 말세라고 한다. 따라서 교회는 반드시 이 땅에서 환난과 궁핍과 핍박을 통과한다. 그것이 마치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이 힘이 든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고 표현한다. 성도가 기도를 하니 하나님께서 흰옷을 주시면서 ‘아직 잠시 동안 쉬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말씀하신다. ‘죽어야 할 자들이 다 죽어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해 놓으신 죽임을 당할 자들의 수가 다 차면 완성이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켜서 죽임을 받을 자들이라고 표현하신다. 우리는 새 생명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그 새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옛 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 옛 것을 부수는데 필요한 것이 바로 순교자 적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환난과 고통을 통하여 주신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이 세상은 여전히 마귀의 손아래 있다. 사단의 나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그 세상 속에 임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통치권의 개념이다. 그 세상 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생겼다.
 
계 6:12-17
 
여섯 번째 인이 떼어지자 우주의 질서가 파괴되는 모습이 나온다.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고 별들이 쏟아져 내려온다. 달이 피같이 된다던 가 별들이 땅에 떨어지는 부분을 문자 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여섯 번째 인의 환상은 예수님께서 AD70년에 있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종말의 사건을 동시에 이중적으로 예언을 하시는 부분이다. 미래에 올 최후의 종말과 현재에 일어나고 있고 잠시 후에 일어나게 될 사건들을 한 사건처럼 설명한다. 성경의 이 모든 구절들은 역사 속에서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즉, 현재에 일어나는 사건들과 종말의 궁극적 심판을 동시에 한 사건인 것처럼 경고하고 선포하는 구절들이다. 언젠가 이 우주는 최후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인데 지금 우리의 역사와 인생 속에서도 그 최후의 종말로 향하는 작은 종말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도 역시 ‘지진이 일어나고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는다’는 똑같은 표현이 쓰인다. 똑같은 작은 종말의 사건을 겪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돌이킨다. 성도는 작은 종말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옛 것들을 태운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한 발 한발 간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 이 계시록을 경험케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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