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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말씀 의미와 교훈

예수님은 당시 사회적 약자만의 편이 아니었다.(막2:17)

by 명주(明珠) 2024. 8. 30.

성경을 읽다 보면 예수님은 소외된 사람, 가난한 사람, 사회적 권세와 지위가 없는 사람을 만나신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종교지도자 등 자기의가 많은 사람들과 반대편에 사람들이 주였다. 이를 보고 예수님은 무조건 사회적 약자의 편이었다고 오해한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일부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정치적 운동에 이용하기도 한다.
 
당시 팔레스틴은 척박한 땅이었고 로마의 식민국가 아래 일반 백성들의 삶은 녹녹치 않았다. 우리 일제 강점기에도 일반백성들의 삶은 가난하고 절망적인 면을 엿본다. 시대적인 배경이 불특정 다수가 절망적이고 가난한 사람들 밖에 없었다. 유대 백성들 90프로가 가난했다. 예수님이 만날 가능성이 소외된 자들이 많았을 뿐이지 예수님은 일부러 최하위, 차상위 계층만 골라서 만나지 않으셨다.
 
이들이 메시아를 기다린 이유가 절망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삶의 정황이 너나 나나 다 가난하고 절망적이었다. 예수님은 목숨 걸고 일부러 율법을 어겨가며 창기들 세리들을 찾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만민의 구주가 아니시다. 만약 그런 시각이라면 예수님은 돈이 단순히 많고 또 율법을 지켜가며 윤리적, 도덕적으로 잘 살려는 사람들은 역차별 하신 셈이다. 예수님의 구원은 돈에 많고 적음, 권세의 높낮이, 죄의 경중을 따져서 결코 주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진보적 정치인이 아니셨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종교지도자들과 대립하신 이유는 이들 안에 있는 자기 의 때문이다. 그들이 누리는 특권, 권력, 부가 율법을 잘 지키고 살았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는 자기 의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했다. 이들이 단순히 사회적 위치가 높아서 구원의 문을 좁게 열지 않았다. 또 반대 이유로 가난한 자에게 넓게 여신 것도 아니다.
 
단순히 돈이 없고 소외된 자라도 죄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책망하신다. 다시 말하면 회개하는 마음이, 회개의 영이 없는 자였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구원은 차별이 없다.
 
요한복은 1:44절을 보면 벳새다라는 지역이 나오는데 여기는 빌립, 안드레, 요한의 출신지이다. 마11:21, 눅10:13에 보면 예수님은 벳새다를 향해 회개하지 않는 지역, 화가 있을 것이라고 책망 받는다. 넓은 유대 땅에서 12제자 가운데 1/4이 벳새다 출신이다. 이 관점에서 보더라도 예수님의 구원의 기준은 지역적인 특성보다는 예수님을 순수하게 믿고 따른 결과였다.
 
창세기 18-19장에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 없는 심판이 나온다. 소돔과 고모라 심판계획은 아브라함이 먼저 듣는다. 그는 의인의 숫자로 하나님의 심판을 만류한다. 하나님은 45, 40, 30, 20, 10명까지 내려가지만 의인10명이 없어서 심판을 진행한다. 여기서 두가지 의문이 든다. 벧후2:7,8은 롯을 의로운 자로 칭한다. 그리고 과연 소돔과 고모라 성에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없이 산 사람이 롯과 가족들뿐이었을까? 의인 10명이 없었다는 하나님의 기준과 아브라함의 기준은 차이가 있다. 아브라함은 착한 사람이냐 아니냐에 무게가 있고 하나님은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롯과 딸들을 강제로 끌어내서라도 구원하셨다. 사위들은 하나님의 심판계획 말씀을 무시하고 농담으로 여겼다. 아브라함과 롯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 하나님의 주권,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런 사람10명 없었다. 롯은 처녀인 딸을 사람들에게 내 주려고 했다. 도덕적, 윤리적인 감각이 무너졌고 아버지의 기본적인 도리도 없는 비정한 사람이다. 요즈음 사람이었다면 매장 당할 일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이라 했는데 성경은 또 고모라의 대한 죄성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의인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여야 악하다. 롯은 형편없는 사람이지만 믿음이 있는 자였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셨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심판이 있을 거라는 것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가 어쩔수없이 가게 된 사람이다. 요나는 니느웨 외곽지역으로만 돌면서 말씀을 전했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베옷을 입었다. 왕부터 붉은 옷을 입고 재위에 앉아서 진실하게 회개했다. 앗수르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나라였고 이스라엘에 처들어 와 망하게 한 나라였다. 앗수르의 수도가 바로 니느웨였고 인구는 12만 명으로 본다. 요나는 원수같은 나라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못마땅했다. 하나님의 주권을 싫어하고 용납하지 못했다. 원수 같은 니느웨가 회개하는 것을 보고 심사가 뒤틀린 요나는 죽여 달라고 한다. 하나님은 박넝쿨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알려준다.
 
요나의 회개 선포는 BC760년이다. 앗수르에 대한 역사기록을 보면 바로 5년 전에 BC765년 앗수르 전체에 역병이 돌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일식이 있었다. 또 같은 해에 역병이 돌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앗수르 백성들의 마음에는 신이 자기들을 심판할 것 같은 분위기가 극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 요나가 나타났고 회개의 심판을 전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마음을 준비 시키셨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2:17에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라고 하신다. 벳새다, 소돔과 고모라, 니느웨에도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진실하게 회개한 자들을 구원하셨다.
 
물론 성경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고 돌보라는 말씀을 반복한다. 이를 하지 말자는 의미는 아니다. 신자로서 소외된 자들을 구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명기 10:18) 하나님은 이렇게 함으로 우리가 믿음이 없었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의지할 곳없었던 고아였고, 나그네와 같았었는데 여기서 구원 해 준 은혜를 기억기를 원하신다. 또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과 감사의 표현으로 약자에 대한 돌봄을 실천하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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