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편23편)
본문은 다윗이 고난의 때에 쓴 시입니다. 내용은 고난이 뭍어나지 않고 아름답습니다. 시편23편입니다. 사업가 한분이 폭망합니다. 실의에 차 등대 앞에 신발 나란히 벗어놓고 바다에 뛰어들기 직전에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이 간단한 처방을 내렸습니다. 시편23편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10번씩 읽으라고 합니다. 3년 후에 사업가는 죽지 않고 성공하여 다시 찾아 왔답니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항상 살아계시며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출 3:14) 이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목자가여서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이 시의 저자 다윗은 왕이어서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시편23편은 푸른 초장을 거닐며 쓴 시도 왕궁에서 뒷짐 지고 쓴 시도 아닙니다. 광야에서 썼습니다. 아들 압살롭의 반역으로 다윗은 왕궁을 떠납니다. 다윗은 광야에 피신했습니다. 다윗은 최악의 상황이지만 목자이신 하나님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합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는 초식동물이 생명을 유지하는 장소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노래한 것은 하나님이 목숨을 책임지며 영육간에 필요를 공급해 준다는 고백입니다.
본문 2절을 통하여 목자가하는 역할을 압니다. 목자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양들을 데리고 갈 수 있어야합니다. 삐쩍 마른 풀만 먹여도 안 됩니다. 잡초나 독초를 먹이면 죽습니다. 그렇다고 고기를 갈아서 먹여도 안 됩니다. 또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목말라 죽습니다.
팔레스틴의 초지는 고원지대에 있는데 눈이 녹은 후에 푸른 초장이 형성되고 최상급 꼴이 나옵니다. 목자가 양들을 끌고 이곳에 가는 2가지 길이 있습니다. 산등성이로 가는 길과 골짜기 길입니다. 산등성이 길은 맹수의 공격도 없고 쉽게 갑니다. 반면 골짜기는 폭우로 급류 발생, 동굴에 숨은 사자나 곰의 기습, 산사태 등 위험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죽음의 골짜기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위험을 무릎 쓰고 이 길을 갑니다. 왜냐하면 물이 가까이 있고 풀도 많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쉴만한 물가란 표현은 쉬지 못할 물가도 있다는 뜻입니다. 양은 숏 다리이고, 몸이 둔해 수영을 못합니다. 물을 먹다가 털이 물에 젖어 딸려들어 가기 쉽습니다. 양이 물에 빠지면 오리털 코트 입고 수영하는 격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잔잔하고 쉴만한 물가로 가야합니다. 이런 장소가 없으면 목자가는 지류를 막고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양을 지키려고 맹수와 사투도 벌여야합니다.
강단에 서시는 분들도 청중을 영적인 초장과 물가로 인도해야합니다.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초장 찾는 작업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작업은 할 만합니다. 인터넷에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또 교회 도서실에 주석서와 문헌들이 줄지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작업 중 어려운 일은 나를 가르친 한 가지를 찾는 작업니다. 그 한 가지를 발견할 때 나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신선한 풀입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얻은 꼴입니다. 그럴 때 신명나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일은 독초를 먹이지 않는 것입니다.
의의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3절을 보십시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생명 자체여서 우리 영을 살립니다. 또한 길과 진리이기 때문에 선한 길로 인도합니다. 본문에 이름을 위한다는 표현은 이름걸고 한다는 뜻입니다. 이름은 인격, 존재, 명예를 대변합니다. 브랜드 파워가 있듯이 자기 이름을 위함은 그만큼 신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확실히 인도하기 때문에 믿고 신뢰가능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어둡고, 두려운 삶의 경험들을 말합니다.
유대광야는 석회암 지역으로 동굴이 많습니다. 골짜기와 등성이의 고저차가 1,200m입니다. 석회암은 잘 깎이기 때문에 V자형 계곡을 형성합니다. 동굴에는 사자, 표범, 늑대, 여우, 갈색곰, 하이에나들이 살았습니다. 목자들은 이 맹수들로부터 양떼를 지키기 위하여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합니다.
`지팡이' 와 `막대기'는 목자의 장비이자 무기입니다. `지팡이'는 목자들이 양들을 위험한 곳에서 안전한 곳으로 옮길 때 사용합니다. `막대기'는 (삼하 23:21) 공격해 오는 맹수들을 방어하는 도구입니다. 막대기는 유사시에 집어 던져서 양들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허리에 차고 다니다가 사자나 곰이 달려들면 때려서 쫓거나 잡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지팡이와 막대기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원수 사탄을 물리쳐줍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지팡이와 막대기 역할을 하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원수는 사탄입니다. 엡4:27절에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합니다. 공동번역에는 마귀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말라합니다. 엡6:16절에서 마귀가 불화살을 퍼붓습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에 작은 틈이라도 있으면 비집고 들어오는 불화살을 쏩니다. 불화살 맞으면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가장 큰 틈을 제공하는 요소는 죄와 가까이 있을 때입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에 생기는 영상과 생각들 이 생기게 하여 두려움을 심는 영적 세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단의 불화살입니다. 디모데후서 1:7은 신자가 가질 정상적인 마음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단의 불화살이 상처를 냈다고 여기십시오.
내 잔이 넘치나이다
5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4절까지의 배경은 목장입니다. 5절부터는 분위기가 축제분위기로 바뀝니다. 한마디로 잔칫집입니다. 집 주인이 자신의 가장 귀한 손님에게 "상"을 베풀어줍니다. 주인은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줍니다'(5절).
고대 근동에서 손님이 집으로 들어올 때, 주인이 입구에 서서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정중하게 맞아들이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들어오는 손님에게 향수를 뿌려 줍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손님으로 식탁에 초대받은 상황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정중한 손님으로 맞이합니다. "내 잔이 넘친다"라는 표현은 아쉬움 없는 풍성한 접대를 말합니다. 은혜가 넘치는 장면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영적으로 마음의 잔이 넘치십니까? 축제 분위기 입니까? 아니면 빈 잔이십니까? 마음이 초상집 분위기 입니까? 스폰지에 물을 부으면 처음에는 계속 흡수하다가 한계에 이르면 흘러나옵니다. 물을 은혜로 바꾸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흘러 나오는 힘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무리가 없습니다. 은혜의 잔이 넘치지도 않았는데 일 먼저 하다보면 무리가 옵니다. 아직 차지 않은 분은 넘치도록 도와 주여야하고 또 때로는 넘칠 때까지 기다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6.을 보십시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은 굶주리고 집 없는 아이들을 모아 커다란 캠프 안에 함께 살도록 합니다. 거기서 아이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며 보살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밤이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묘안을 생각해냅니다. 아이들이 침대에 들어간 후 손에 빵을 들고 자도록합니다.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들려만 줍니다. 빵 한 조각이 놀라운 효과를 가져 왔습니다. 아이들은 내일 먹을 것이 있다는 안도감에서 평안히 잠들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트웹스키는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인생에서 절망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원을 보낼 천국이 돌아갈 고향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일 때 불안해하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
우리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양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어야합니다. 영어로 Sheep Identity입니다. 그러려면 양이 어떤 동물인지 알아야겠죠?
양은 2m터 이내밖에 못봅니다. 동료들끼리 자주 들이 받습니다. 서로 들이 받지 말라고 목자는 기름을 발라줍니다. 물론 코에 기생충이 들어가지 말라고 발르기도 합니다. 청각은 발달하여 양은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따라갑니다.
중동을 여행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목동 세명이 양떼를 거느리고 시냇가에서 물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물을 다 먹인 후에 한 목동이 큰 소리로 “멘아 멘아”하고 부르니까 그 중1/3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라갑니다. 조금 있다가 두 번째 목동이 “멘아 멘아”하고 부르니 1/3일 가고 나머지도 그렇게 했습니다. 목동은 자기의 양을 세거나 등에 표시해 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멘아 멘아” 는 아랍말로 “나를 따라 오라”입니다.
양 수칙 제1번 목자의 음성만 따라가자 입니다. 가짜 목자가 양을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양 바비큐를 해먹거나 양 삼겹살 파티를 하려거나 아니면 양을 팔아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부릅니다. 우리는 사탄의 음성 잘 구분하여 따라가지 말아야겠습니다. 확실한 목자의 음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있습니다.
양 수칙제2번 서로 들이받지 말라입니다. 양은 머리로 서로 들이 받는 습관이 있습니다. 머리를 들이대고 밀어 내치면서 받으면서 싸웁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의머리에 기름을 발라두면 밀치면 미끄러져 버립니다. 머리와 머리를 대고 밀고 밀리며 싸워야 박진감 넘치고 재미가 있는데 머리를 대자 마자 미끄러져 버리니까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서로 들이 받는데 흥미를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들끼리 분쟁을 막기 위하여 목자가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바릅니다. 우리의 기름은 성령님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들이받을 이유가 없어집니다. 성령님은 인격자 이면서 조력자 역할을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인격을 무시하면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로봇처럼 조정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발적인 동의하에 일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기름으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들이 받지 않는데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또 우리 먼저 된 자들이 좋은 목자의 역할을 감당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애끓는 마음의 승화(시편42편1-5)
시편42편은 고라자손이 쓴시입니다. 일각에서는 다윗이 쓴 시라고도 합니다. 본문이 다윗이 직접 썼던 아니면 고라자손이 다윗의 상황을 염두해 두고 지었든 실각한 다윗의 심정을 반영한 시임에는 분명합니다. 고라 자손은 성전에서 노래와 음악적인 봉사를 담당했던 자들입니다. 아마도 고라 자손도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예루살렘성전으로 떠날 때 성가대원 이었던 이들도 함께 피난을 같이 갔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과 동행하면서 성전을 떠나 있는 비통함과 하나님을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을 대변할 수도 있습니다.따라서 다윗의 상황을 자세히 소개하는 것이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됩니다.
정선 아리랑의 탄생 배경
강원도 정선이란 곳에는 10월초면 아리랑 축제를 합니다. 아리랑 축제 하이라이트는 정선 아리랑 노래 경연대회입니다. 정선아리랑은 아주 느리고 애절한 곡입니다. 정선 아리랑 중에서 2절입니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날 좀 건네주게 / 싸릿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 사시장철 임 그리워서 난 못살겠네!" 후렴구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좀 넘겨주게”입니다.
이 노래는 남녀 간의 비극적인 사랑 노래입니다. 정선군 여량리에 가면 ‘아우라지’ 란 강이 있습니다. 아우라지는 두 개의 강이 한 개로 어우러진다는 뜻입니다. 두 개의 강이 한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강의 폭은 몇 배로 커지는 것이죠? 지금은 강이 좁아졌지만 옛날에는 넓어서 뗏목을 띄워서 서울까지 나무를 나르기도 합니다. 강을 건너려면 배가 필요합니다. 청년이 살았던 동네 이름이 싸릿골 입니다. 우리 유교 사상 중에 예기라는 문헌에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7살 이후에는 남녀가 같은 자리에 앉을 수가 없는 규약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 세대는 “신랑, 신부 얼굴을 결혼식 후에 보았다.”고 말합니다. 어른들 말만 믿고 결혼했는데 “속았다. 취소도 못하고”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속였는지 미지수라는 것이죠? 당시도 이런 규약 때문에 젊은 연인은 몰래 몰래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싸릿골 총각이 사는 동네에는 올동박 나무가 많았나 봅니다. 이 박나무는 흥부놀부에 나오는 박이 아닙니다. 노란 꽃이 피고 벚나무 열매 같은 열매가 맺히는 나무입니다. 아우라지 처녀는 부모님들에게 동박꽃 구경을 간다고 거짓말하고 싸릿골 총각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던 중 장마철이 되었습니다. 장마철에는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납니다. 불어난 물로 배도 같이 떠내려갔습니다. 장마가 오래지속 되는 만큼 두 연인은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만날 수가 없어 그리움과 애타는 심정으로 부르는 아우라지처녀의 노래가 정선아리랑 2절입니다. 문헌에는 이 두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아우라지 강에서 수영을 하며 많이 놀았습니다. 강 건너편에 처녀같이 생긴 바위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를 처녀바위라 했고 아우라지 처녀가 그리워하다가 죽어서 바위가 되었습니다.
솔베이지의 노래 배경
외국의 경우 노르웨이의 노래 중에서 “솔베이지의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 선율도 가슴을 후벼 팔 듯이 애절합니다. 이 노래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노르웨이의 작은 산골 마을에 청년 페르귄트와 아름다운 처녀 솔베이지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여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가난이 이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페르귄트는 가난을 탈피하고자 이웃 나라로 돈을 벌기 위해 갑니다. 베르귄트는 갖은 고생을 하며 돈을 법니다. 어느덧 십년의 세월이 흘러갑니다. 어느 정도 돈을 번 베르귄트는 10년 만에 귀향길에 오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입니까? 그는 돌아오는 배에서 해적을 만나 돈을 모두 빼앗깁니다. 그리고 목숨만 겨우 건지게 됩니다.
베르귄트는 절망합니다. 빈손으로는 도저히 돌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절망으로 일생을 방황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늙고 병들어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르귄트는 죽기 전이라도 고향에 돌아가고자 결심합니다. 어머니라도 뵙고 죽고자합니다. 이윽고 집으로 돌아온 베르귄트는 어머니를 찾았지만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안계셨습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솔베이지가 사는 오두막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곳에 솔베이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솔베이지는 평생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 아름다웠던 솔베이지도 어느새 백발이 다 되어 있었습니다. 일어설 기력도 없는 베르귄트는 솔베이지의 무릎을 베고 눕습니다. 솔베이지는 누운 남편을 위해 마지막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베르귄트는 이 노래를 들으며 숨을 거두고 말죠. 그리고 솔베이지도 이런 남편을 따라 같이 죽음에 이른다는 내용입니다. 바로 이때 부른 노래가 '솔베이지의 노래'입니다. 솔베이지의 노래 가사도 정선 아리랑하고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가사를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겨울이 떠나고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해가 지나면-중략- 당신은 제게 돌아오겠지요, 분명 당신은 제게 약속했지요. 저는 진정 당신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가호가 당신에게 있기를 -중략- 저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제 곁에 오실 때 까지 –중략-” 이 노래 곡조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다. 성도님들은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압살롬에게 반역 당한 다윗의 슬픔
오늘 본문의 시편에서는 저자의 애타는 심정을 엿봅니다. 물론 그 대상은 연인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오늘 시편은 다윗의 상황을 알아보면 이해하는데 도움이됩니다. 다윗은 왕으로 세움 받은 후의 삶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며 갖은 고난을 겪습니다. 이 고난의 기간이 십년쯤 됩니다.(B.C. 1020~ 1010) 다윗은 어렵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후 영토 확장을 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킨 후(삼하5:4-10) 블레셋(삼하5:17-22), 모압(삼하8:2), 욥바와 아람 지역(삼하10:1-19)을 쳐서 승리를 거둡니다.
다윗은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그만 열정이 사라집니다.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열정이 사라지자 게으름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 정복전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부하 장수들만 전쟁터에 보냅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다윗은 저녁이 될 때 까지 늘어지게 잠을 잤습니다.(삼하11:2) 그러다 일어나 옥상을 어슬렁거리다가 밧세바와 죄에 빠지지 않습니까? (삼하11:3) 또 그 죄를 감추고자 우리아도 전쟁터에서 죽게 만듭니다.(삼하11:17) 다윗은 이후로 뼈아픈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왕권을 찬탈당하는 사건입니다.
우리 옛말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일 없다.’고 합니다. 다윗은 7명의 아내로부터 10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암논, 길르압, 압살롬, 아도니아, 스바댜, 이드르암, 솔로몬, 삼무아, 소밥, 나단) 그중 셋째아들이 가장 말썽을 일으킵니다. 그가 바로 압살롬입니다. 압사알~놈 네 발음을 잘하셔야합니다. 압살롬의 이름의 뜻은 “아버지와 평화”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름과는 달리 아버지를 배반합니다. 압살롬은 용모가 출중합니다. 삼하14:5절에서 그는 아름다움으로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젊을 때는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고 증거 합니다.(삼상16:12) 압살롬은 아마도 다윗의 외모를 많이 닮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들보다 더욱 사랑했는지 모르겠습니다.
80년대만 해도 터프한 남성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90년대에는 꽃미남, 부드러운 남자 인기였죠? 2000년대 빨래판을 가슴에 새긴 짐승남, 요리 잘하는 남자가 인기입니다. 요즈음은 인기 있는 남성을 뇌섹남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뇌는 호두 같이 쭈글쭈글하게 생겼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신조어를 잘 몰라서 쭈글쭈글한 뇌가 잘생기면 얼마나 잘생겼나 생각 합니다. 뇌 MRI를 찍어서 비교하나 싶었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네이버가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뇌섹남은 '뇌가 섹시한 남자'를 줄여 이르는 말로 주관이 뚜렷하고 언변이 뛰어나며 유머러스하고 지적인 매력이 있는 남자를 가리킨다.”고합니다. 혹시 우리 청년 자매들 중에 이런 남성을 찾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네 그렇다면 계속 혼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지구에는 이런 상대는 없습니다. 수성이나 금성에 한 번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압살롬의 반역
압살롬이 뇌섹남 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속을 많이 썩이게 되죠? 압살롬은 자기 여동생 다말을 욕보인 이복 형 암논을 살해합니다.(삼하13:28,29) 압살롬은 4년 동안 치밀하게 왕위 찬탈을 준비합니다. 그는 호위병 50명을 거느리고 병거와 말들을 앞세우고 다니므로 백성들에게 위엄을 일부러 보입니다.(삼하15:1) 매일 아침 성문에 가서 재판하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서 자기편을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그의 행동을 백성들의 마음을 훔쳤다고 합니다.(삼하15:6) 그리고 때가 되자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떠나 자신의 지지 세력들을 모아 스스로 왕이 됩니다.(삼하15:10) 다윗은 압살롬의 세력이 점점 커진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과의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미리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삼하15:14~23) 아버지가 떠나자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삼하14:37) 그리고 압살롬은 떠난 아버지 다윗과 부하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1만이천 명이 넘는 군대를 보냅니다.(삼하17:1, 26)
오늘 본문은 바로 아들 압살롬의 진압군대를 피해 광야 길로 도망가는 배경으로 합니다. 육체의 고통보다 몇 배 더 아픈 것은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반 아니겠습니까? 다윗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을 것입니다. 또 이런 처지의 다윗을 조롱하는 자들까지 있었습니다. 시므이는 다윗 일행을 따라오며 돌까지 던지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삼하16:6,7) 또 주변사람들은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조롱합니다.(시편42:3)
다윗 왕이 화려한 왕좌에 앉아 있을 때는 한낱 목동이었던 자신을 왕으로까지 높이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잘 증거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광야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도망하는 신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저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다윗은 이런 슬픈 상황을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다합니다. 음식을 먹듯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칼이 뼛속까지 찌른다합니다. (시42편10절)
자 그렇다면 시편 저자는 마냥 이렇게 슬퍼만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마스길이란 단어가 붙습니다. 마스길은 교훈을 주기위한 시라는 뜻입니다. 교훈시를 쓰려면 저자는 이미 모든 슬픔을 극복한 후 여야합니다.
슬픔의 극복
그러면 다윗 혹은 시편의 저자는 어떻게 슬픔을 극복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갈급하게 찾습니다. 본문 1절을 참고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사슴이 갈증으로 시냇물을 찾음에 비유합니다.
중동지방은 50도를 오르내립니다. 후라이 팬없이 아스팔트에 계란만 던져도 프라이가됩니다. 여기는 4-10월이면 강은 마릅니다. 사슴이 물을 찾지 못하면 죽습니다. 암사슴이 찾지 못하면 새끼도 죽습니다. 사슴은 모성 본능이 강합니다. 풀이 없으면 일주일 견뎌도 물없으면 2일밖에 못삽니다. 물을 찾는 사슴의 간절함이 어떤 지 짐작합니다. 사슴은 물을 찾아 뜨거운 광야를 뛰어 다닙니다. 헐떡이며, 울부짖으며 찾아다닙니다. 사슴이 얼마나 갈급했으면 맹수들이나 사냥꾼도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시편 기자는 이런 사슴과 같은 자세로 주를 찾고 있습니다. 잠언8:17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간절히 찾는 자들을 만나주십니다. 또 시편9편10절은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약속합니다. 다윗 왕이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갈망하고 찾았을 때 결국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고 다시 왕권을 회복시킵니다.
두 번째로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 슬픔을 극복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먼저 시편기자는 낙심해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을 꾸짖습니다. 자기 자신을 제3자로 객관화합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자신을 봅니다. 이런 자세는 우리가 사탄과 싸울 때 취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세입니다. 딤후1:7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사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심습니다. 이런 마음은 절대 자연스런 현상이 아닙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최악의 상황을 마음속에 떠올리게 함으로 두려움을 심기도 합니다. 미네소타 대학교 심리학과 에릭 클링거 교수가 발표한 결과를 보면 보통 사람은 16시간 동안 무려 4천 가지 정도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13%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떠오른답니다. 예를 들면 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생각이 떠오른다던가, 불치병이 걸린 상황이 떠오른다던가, 직장에서 퇴출당하는 생각, 음란, 탐욕의 마음, 누구를 해치는 무서운 생각도 듭니다. 작게는 어떤 분은 외출해서 가스밸브를 잠그지 않은 것 같은 생각에 하루 종일 불안에 떨기도 합니다. 이때는 119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우리 집이 아닌가 깜짝깜짝 놀랍니다. 심리학으로 강박사고라합니다. 심한 분은 외국가는 비행기 탔다가 확인하러 집으로 옵니다. 그러나 롬7장23절에서는 사도바울은 이런 상황을 사탄이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아가는 것을 보는 도다! 라합니다.
우리는 죄의 법으로 끌려가는 자신을 가만히 두고지 말아야합니다. 꾸짖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둥지를 틀도록 내버려두지 말아야합니다. 생각으로 어려우면 기도와, 말씀과 찬송으로 싸워야합니다. 우리가 불안과 두려움에 처한 자신을 객관화하여 싸울 때 시편 기자와 같이 승리합니다.
이렇게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을 꾸짖은 후에 할 일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는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합니다. 이를 NIV 영어성경으로 보면 “Put(두라) your hope(너의 희망을) in God(하나님 안에)”입니다. 하나님 안에 희망을 두라입니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세상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아침안개와 같습니다. 또 풀의 꽃과 같습니다. 해가나면 모두 사라집니다.(벧전1:24,야고보4:14)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격입니다.(마7:26) 이런 자들은 환란이 닥치면 넘어지고 쓸려 내려갑니다.(마7:27)
다윗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나타나고 도움을 주리란 희망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낙심과 불안이 찬송으로 바뀝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성경에는 꿈, 혹은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합니다.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잠언29:18) 오스트리아에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독일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을 직접 체험합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160만 명의 유대인과 정치범이 죽었다합니다.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극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합니다. 쉰들러 리스트란 영화에 보면 독일군 장교가 마치 동물 사냥을 즐기듯이 사람들에게 총을 쏘며 즐기는 모습도 나옵니다.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소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은 살아남았습니다. 반면 소망을 포기한 사람들은 심신이 최악의 상태로 진행되어 결국은 죽음에 이르렀다합니다.
그는 이 꿈과 관련하여 한 가지 특이한 점을 소개합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죽은 때는 1944년 성탄절 이후부터 그다음 해 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주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성탄절 때에 독일 군들이 가석방 시켜주는 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 1944년 말에는 전쟁이 끝나서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나리라는 전쟁은 1년이 더 지나간 1945년 9월2일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가도 가석방이나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품었던 꿈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살 의욕이 없어지자 죽는 사람이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늙은이와 젊은이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나이입니까? 피부의 노화 정도 입니까? 요즈음은 의학이 발달하여 주사 한 방이면 20년은 젊게 보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꿈, 하나님 안에서의 비전이 있느냐 없느냐가 젊었는가? 늙었는가?를 나눕니다. 60대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 있으면 젊은 사람입니다. 20대에도 하나님 안에 꿈이 없으면 애늙은이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이 있는 한 우리의 속사람은 늙지 않습니다.(요엘2:28) .
우리는 교회에 무슨 기대를 안고 옵니까? 하나님을 향해 가진 소망과 갈망이 있습니까? 때만 되면 오고 시간되면 가고 하는 신자를 시계추신자라고 합니다. 시계추 신자가되면 안되겠습니다. 마음이 화석처럼 딱딱해진 신자, 예배에 가봤자 매번 보는 분들만 만나고 새로운 것이 있겠냐며 아무 기대도 없이 습관적으로 오면 안되겠습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만사가 매너리즘에 빠져 의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신앙적으로 악해지면 각종 불안, 두려움들이 밀려듭니다. 이것이 사단이 준 마음인 줄 알면서도 대적할 힘을 잃습니다. 우리는 내면에 별 기대감 없이 꿈이 없이 살지 않고 마음을 돌이켜야합니다. 사도바울은 신앙 안에 비록 겉 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서 점점 더 젊어져야 합니다. (고후4:16)
하나님께 소망이 있는 한 우리의 속사람은 늙지 않습니다.(요엘2:28) 우리가 시냇물을 찾는 사슴같이 하나님을 찾고, 말씀을 찾는 자들이요 날마다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성도이길 기도합니다. 우리 젊은 청년들은 애늙은이가 되지 않고 또 우리 장년들은 점점 더 젊어지는 성도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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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이겨내는 비법(시편42편1-11)
제목:탄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이겨내는 비법
말씀:시편42편1-11
시편은 총 150편입니다. 시편 하면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하는 내용만으로 대부분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시죠? 아닙니다. 오늘 시편 42편을 탄식 시라고 합니다. 시인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탄식을 쏟아놓는 내용입니다. 시편 150편 중 이런 탄식 시가 무려 70편입니다. 찬양 시가 30편, 감사 시가 15편이고 세 가지가 섞여 있는 시가 35편입니다. 탄식 시가 반이 넘는 셈입니다. 우리 네 인생이 너나 나나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반은 탄식이 있을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동해 앞에 살면서 물 때문에 탄식할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본문에는 시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로 탄식하는 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3절에 보면 그 상황 때문에 눈물이 음식이 될 정도로 슬프다고 합니다. 4절에는 아는 사람들이 자기를 배반해서 마음이 상한 상태라 합니다. 또 5절과 11절은 마음이 낙심하고 불안한 마음이라 합니다. 7절에는 생의 파도와 물결이 자신을 휩쓸었다고 표현합니다. 9절에는 원수의 압제로 슬펐습니다. 10절에는 비방을 받아서 칼이 뼈를 찌르는 아픔이 있다고 합니다. 시어를 보면 시인이 처한 상황이 마치 깜깜한 터널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 1절 앞에 붙은 문구가 무엇입니까?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른 노래"라고 합니다. 본문의 저자는 고라 자손입니다. 마스길은 교훈 시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탄식하는 상황에서도 결국은 그 탄식을 넘어서게 되었고 우리에게 노래가 되어 교훈을 주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라자손은 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하는 레위인 입니다. 찬양전문가들이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찬양전문가들이 많으시죠. 저는 이과라 음악에는 문외한인데 테너를 시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무늬만 테너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임 테너라고 부릅니다. 이번 강원연합찬양집회 지역교회 합창에서 테너를 잘 감당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본문의 시인 상황은 고립되었고, 남들에게 비난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너의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라고 하며 신앙마저 부정당하는 상황입니다. 시인의 상황과 우리의 현실을 접목하기 위해 에릭 프롬이라는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저서 하나만 소개하겠습니다. 에릭 프롬은 1900년대에서 1980년대 사람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가 “소유냐 존재냐”입니다. 영어로 “To have or to be?”라고 합니다. 책 내용은 인간 삶의 형태를 소유 중심의 삶과 존재 중심의 삶으로 분류합니다. 소유양식보다는 존재 양식의 삶을 추구해야 인간은 행복하다고 주장 합니다. 소유형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로 자기를 규정하지만, 존재형은 소유보다는 존재가 어떤 경험을 하느냐를 중요시합니다. 예를 들면 들에 꽃이 있으면 꺾어서 집에 가져와 화병에 꽂아야 직성이 풀리면 소유형의 삶이고, 그냥 그 꽃 앞에서 향기를 맡고 아름다움을 즐기며 행복해하면 존재형의 삶이라 규정합니다. 성경에서 예를 들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일이 소유적인 삶을 지향한 태도입니다. 율법을 자기가 지켜서, 자기 의를 쌓아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이 소유형이고,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인 신분이 되는 것이 존재형입니다. 예수님의 삶잘 들여다보면 존재형 삶을 사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미디어 사회라고 합니다. 미디어를 과소비하는 시대입니다. 특히 익명성이 보장되니 그 익명성 뒤에 숨어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시대입니다. 악성 댓글 시대입니다. 온라인상에서 왕따당해 고립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그 일로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온라인상에서는 그 사람의 소유만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상대를 왜곡되게 인식할 가능성이 큽니다. 작년 5월의 원주에 사는 17살 고등학교 남학생이 김해에 사는 16살 여학생을 크리스마스 전날 그 여학생 아파트 근처에서 20차례나 칼로 찔러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두 사람은 4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오로지 온라인상에서 문자로만 4년 동안 사귀기만 했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존재는 사실상 많이 왜곡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소한 오해가 생겼고 남학생은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채 크리스마스 선물 준다고 속여서 나오라고 하여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사건은 온라인이 사람을 얼마나 왜곡되게 판단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특히 SNS에는 소유형 인간이 넘쳐납니다. 좋은 집, 외제 차, 명품 가방과 명품 목걸이를 건 모습을 보여 줌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합니다. 샤넬 가방, 반클리프 아펠, 그라프, 나토 목걸이 처음 듣는 명품 이름이 요즈음 뉴스에 많이 나옵니다. 모 부인께서 받았던 명품이랍니다. 그런데 명품을 걸친다고 하여 사람이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명품 인간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재가 될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당신의 작품이라고 칭합니다. 사람들은 남의 사진을 보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립니다. 이것으로 인간은 점점 고립되는 시대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은 사람을 더욱 외롭게 만들고 또한 쉽게 낙심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시대에 낙심하지 않고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잘 대처할 수 있는가 알려줍니다.
1.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불안하고 낙심이 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본문의 저자는 하나님을 얼마나 갈급하게 찾는지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에 비유합니다. 사슴이 왜 물을 찾습니까? 새끼들하고 물놀이하려고 찾습니까? 여름휴가 즐기려고 찾습니까? 아닙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에 ‘갈급하다’라는 것은 ‘부르짖다’. ‘헐떡거리며 달린다’는 의미입니다. 중동지방은 영상 50도를 오르내립니다. 아스팔트는 달구어져서 영상 80도까지 오릅니다. 아스팔트에 날달걀만 까 던져도 맛있는 달걀 프라이가 됩니다. 이곳은 4월에서 10월까지 일 년에 7개월이 강이 항상 말라 있습니다. 강릉은 원래 연평균 강수량은 1,445mm입니다. 이 비가 7, 8월에 반이 와야 하는데 한 번도 안 와서 물난리를 겪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연평균 강수량이 500mm밖에 안 된답니다. 이런 지방에서 사슴이 물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 찾지 못하면 죽습니다. 특히 암사슴이 물을 찾지 못하면 새끼도 같이 죽습니다. 사슴은 모성 본능이 강합니다. 먹을 풀이 없으면 일주일을 견뎌도, 물이 없으면 2일밖에 못 삽니다. 물을 찾는 사슴의 간절함이 어떤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사슴이 얼마나 갈급했으면 맹수들이나 사냥꾼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시편 기자는 이런 사슴과 같은 자세로 주를 찾고 하나님을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오봉저수지 바닥 갈라진 화면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그 갈라진 바닥이 얼마나 물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목마름을 실감 나게 전달하기 위해서 제 간증하나 하겠습니다. 제가 지난 7월1일 자로 부서를 옮겼습니다. 취업 담당 부서입니다. 이 부서가 토익스피킹 시험 장소를 제공하고 관리하는 일도 합니다. 근데 시험은 꼭 토요일, 일요일 10시쯤에 봅니다. 이것을 전담하는 다른 직원이 있는데 일이 생겨 제가 지난 주일 10시에 문을 열어 주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일이니 몇 번씩 9시 반, 9시 반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까먹어 버렸습니다. 지난 주일 9시 59분에 예배드리겠다고 예배당에 앉아서 시계를 보는데 생각이 난 겁니다. 9시 59분이면 시험 1분 전입니다. 온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구치고,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차 비상깜빡이 넣고 총알같이 올라갔습니다. 신호등 3분 기다리는 시간이 30년처럼 느껴졌습니다. 다행히 신호는 한 번 걸리고 통과하여 7분 만에 올라갔습니다. 사무실 키가 없어서 종합상황실에서 마스터키를 빌려 시험 장소를 뛰어 올라갔습니다. 시험 장소는 4층 PC 실인데 엘리베이터 타는 시간도 아끼려도 4층 계단을 뛰어올라가니 10시 10분이었습니다. 10분 만에 열어줬습니다. 다행히 시험이 11시에 있었고 10시부터는 시험을 준비하는 시간이어서 펑크는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올라가는 10분이 얼마나 마음이 갈급했는지 입술이 바짝 말라서 허물이 한번 벗겨졌습니다. 올라가면서 기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여~주여~”만 외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입술이 말라 허물이 벗겨지도록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 법을 강제로 배우도록 한 것 같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뵐까?” “하나님의 얼굴을 뵐까?” 하는 탄식은 시인이 과거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때를 회상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회복하기를 갈망함에서 오는 탄식입니다. 우리가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 방식 3가지만 상기해봅니다. 첫째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찾는데 여러분은 저자의 직강을 주로 들으십니까? 아니면 배달해주는 말씀을 주로 들으십니까? 배달해주는 말씀은 강단에서 여러 형제님이 전해주는 말씀이나 유튜브에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는 것을 말합니다. 배달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여기에만 의존하는 것도 그렇게 건강하지는 않습니다. 저자의 직강을 제쳐 두고 배달해주는 그것에만 의존해도 안 되겠습니다. 말씀 자체에 설득당할 때 오래 갑니다. 두 번째는 두말하면 잔소리 기도입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만년필 뚜껑을 잃어버렸는데 그 뚜껑 찾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 본 적 있습니다. 그만큼 겸손히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는 자세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본문에 2절에서 예배를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바로 예배와 성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세입니다.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에 부닥치면 말씀이 눈에 안 들어옵니다. 직강이고 뭐고 성경 펼 마음도 안 들기 쉽습니다. 성경을 폈다 해도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오기 쉽습니다. 또 기도는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그저 주여만 외칠 뿐이게 됩니다. 이때 예배와 모임에 참석하고 성도들에게 기도 부탁하는 일 중요합니다. 어려운 상황이 되면 자신을 더 고립시키기 쉬운데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교회가 최후의 보루이고 교회가 최후의 울타리입니다. 주님도 2~3,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반드시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사람을 쓰셔서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상황에 압도당하여 당황하면 안 됩니다. “고객님 많이 당황하셨어요?” 옛날의 개그프로에 이런 멘트도 있었습니다. 하늘의 왕자 독수리가 사자에게 왜 가끔 잡아먹힌다고 합니다. 땅의 왕자 사자가 더 용감해서가 아닙니다. 독수리가 땅에 먹이를 낚아채려고 앉았다 사자가" 어흥~”하고 위협하면 독수리가 막 달려가다가 잡아먹힌다고 합니다. 사자의 소리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기가 나는 새라는 것을 까먹고 뛰어가다 먹힌답니다. 꿩도 마찬가지입니다. 꿩 사냥할 때 사람들이 줄 서서 꿩을 놀라게 하며 몰이하면 꿩은 나는 것을 까먹고 머리만 풀 속에 처박습니다. 그러면 주워 담으면 됩니다. 우리가 당황하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됩니다.
2.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3, 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본문은 시인이 낙심하고 절망하는 이유가 전에 함께 예배드렸었던, 하나님께 함께 기쁨과 감사를 드리며 잘 알았던 사람들의 비난 때문입니다. 요즈음 표현으로는 이들의 악풀 때문에 주야로 눈물을 빵처럼 먹을 정도로 슬프다고 고백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조롱합니까? 남의 신앙까지 들먹이면서 조롱합니다. “네가 그렇게 잘난 척하고 믿던 하나님은 지금 어디 가고 현재 너 모양이 그 모양인가?”“네 꼬락서니가 어떤 꼬락서니인가 한번 봐라!.”하고 비난합니다. 가까운 사람이 배신할 때 그 아픔은 배가 됩니다. “회식 모임에 나오라고 했더니 집회에 간다고 나오지 않더니 야 꼴 좋다.” 하면서 하나님을 욕할 때 정말 속상합니다. 그런데 더 속상한 것은 하나님마저 침묵하고 계신 것 같을 때 더 답답한 마음이 됩니다.
3.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런데 이렇게 시인은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5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본문을 잘 분석해 보면 두 사람이 나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 낙심하는가? 앞에 내와 뒤에 네는 서로 다른 나로 보입니다. 앞에 나를 A라고 하고 뒤에 나를 B로 넣어서 본문을 읽어보면 A인 나가 B인 너에게 어찌하여 낙심하는가 책망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자아가 비정상적인 자아를 타이르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보입니까? 미친 사람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나에게 말을 걸고 타이르는 것을 우리는 자기 성찰이라 합니다. 자아 성찰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제삼자로 객관화하여 자기에게 말을 거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마음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앞으로 갔다가 바로 뒤로 갈 수 있게 하는 게 뭡니까? 엑셀로 가능합니까? 기어의 문제입니다. 기어를 바꾸는 자세 바로 본문의 시인처럼 하는 자세이고 이것을 능동적인 자세라고 합니다. 수동적인 자세는 나를 탄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그대로 두면 자동차 엑셀을 더 세게 밟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끝도 없는 나락으로 끌려갑니다.
제가 토익스피킹 문 열어 주러 가는 사이에 어떤 상상이 떠올랐는지 아십니까? 전국 뉴스에 나와서 창피를 당하고, 직장 잘리고, 방송 타는 상상이 들었습니다. 수험생들이 시험 못 봐서 취직까지 망쳤다고 소송이 들어와 쇠고랑 차는 상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니 입술이 10분 만에 벗겨지는 것입니다.
미네소타 대학교 심리학과 에릭 클링거 교수가 발표한 논문을 참고합니다. 보통 사람은 하루 동안 무려 4천 가지 정도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40~50%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떠오른답니다. 이를 비자발적 생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나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생각이 떠오른다던가, 불치병이 걸린 상황이 떠오른다던가, 직장에서 퇴출당하는 생각, 음란, 탐욕의 마음, 누구를 해치는 무서운 생각도 듭니다. 30년 전에 창피를 당했던 생각이 불쑥 들어서 지름 심장이 빨리 뛰고 얼굴을 붉히기도 합니다. 과거 사고 났던 생각에 사로잡혀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외출해서 가스레인지 밸브를 잠그고 스위치를 껐는지 안 껐는지 몰라 하루 종일 불안에 떨기도 합니다. 이때는 119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우리 집으로 가는 게 아닌가 놀랍니다. 이것을 강박사고라 합니다. 심한 분은 외국에 가는 비행기 탔다가 취소하고 확인하러 집으로 오기도 합니다. 롬 7장 23절에서는 사도바울은 이런 상황을 “사탄이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아가는 나를 보는 도다!”라고 합니다. 사도바울도 죄로 사로잡혀 가는 자신을 제삼자의 처지에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죄의 법으로 끌려가는 자신을 가만히 두고 있지 않고 타이릅니다.
우리도 제삼자인 내가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을 꾸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이 들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로마서 8장 38, 39절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어!”하고 마음을 다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자세를 자기가 자기 자신에 설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저자는 자신에게 뭐라고 설교합니까?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고 합니다. 이를 NIV 영어성경으로 보면 “Put(두라) your hope(너의 희망을) in God(하나님 안에)”입니다.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랍니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세상 안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자기 자신 안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또 풀의 꽃과 같습니다. 해가 나면 모두 사라집니다. (벧전1:24, 야고보 4:14)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격입니다. (마7:26) 이런 자들은 환란이 닥치면 넘어지고 쓸려 내려갑니다. (마7:27)
성경에는 꿈, 혹은 희망(소망)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합니다.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잠언 29:18) 오스트리아에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독일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을 직접 체험합니다. 여기서 160만 명의 유대인과 정치범이 죽었다합니다.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극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합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 소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은 살아남았습니다. 반면 소망을 포기한 사람들은 심신이 최악의 상태로 진행되어 결국은 죽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는 이 꿈과 관련하여 한 가지 특이한 점을 소개합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죽었을 때는 1944년 성탄절 이후부터 그다음 해 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주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전염병이 돈 것도 아니고 자연사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1944년 말 성탄절 때에 독일 군들이 가석방 시켜주는 제도가 있었고 또 1944년 말에는 전쟁이 끝나서 모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의 전황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끝나리라는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5월 8일에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하며 끝났습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에 항복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이날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이 1944년이 다 지나가도 가석방이나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소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망했고 소망이 없어지자 자연사하는 사람이 급격하게 늘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례를 통하여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웁니다.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소망으로 구원받는다고도 합니다.
본문에서 저자의 하나님께 대한 중요한 자세 한 가지 더 배웁니다. 감정을 하나님께는 있는 그대로 다 숨김없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눈물이 음식이 될 정도로 슬픕니다. 하나님 사람들이 나를 배반해서 마음이 상합니다. 또 5절과 11절은 하나님 제 마음이 낙심하고 불안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원수의 압제로 슬픕니다. 하나님 칼이 뼈를 찌르는 아픔이 있습니다. 왜 저에게 이런 아픔과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하며 하나님께 모든 감정을 숨김없이 다 토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슬픔을 토로하는 마음 깊숙이에는 하나님의 선한 주권을 끝까지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의 하나님이 반드시 나타나서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 탄식 상황에서도 여전히 찬송하겠다고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면서 시를 끝냅니다. 오늘 본문 5절과 11절은 같은 시어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 신뢰, 소망을 잃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저자의 자세를 배워서 어떤 탄식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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