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와 인간창조(창세기1장-1-6 / 26-31절)
창세기 제목은 원래 창세기(創世記)가 아니었습니다. “태초에”입니다. 첫 문장의 첫 단어로 제목을 붙입니다. 유대인은 이런 관습이있다합니다. 모세 오경들의 제목도 이런 원리로 지었습니다. 출애굽기 제목은 “이름들” 원어로 “쉬모트”입니다. 레위기 이름은 “부르셨다.” 원어로 “와이크라”입니다. 민수기는 “광야에서”이고 원어로“브미드바르”입니다. 신명기는 “말씀들”이고 원어로“드바림”입니다.
창세기란 이름은 70인 역 본부터 나옵니다. 70인 역은 BC 300년에 헬라어로 구약을 번역한 역본입니다. 창세기는 비롯할 창(創) 세상 세(世) 기록 기(記)자를 써서 세상이 시작된 기록이란 뜻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모세입니다. 기록연대는 BC 1400년경입니다. 수신자는 애굽 노예생활을 하다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200만 명이 광야 생활을 앞두고 있습니다. 광야는 물도 없습니다. 떡도 없습니다. 전갈, 독사가 우글거립니다. 맹수도 있습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곳입니다. 주변국들이 호시탐탐 노립니다. 광야에서는 미래가 안 보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들을 택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고자 창세기를 기록합니다. 창세기를 통하여 미래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주려고 합니다.
모세는 이집트 왕자로 40년, 또 양 똥 치우는 양치기로 40년, 이스라엘 지도자로 40년을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22절에 보면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했다.”고 나옵니다. 당시 이집트는 세계 최고의 문명국입니다. 당시 이집트에는 원시문자인 상형문자(象形文字)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당연히 이 문자를 배웠고 성경을 기록하는데 사용했다고 봅니다. 모세가 우여곡절 끝에 왕궁에 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무계획이 계획이 아니셨습니다.
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창1:1-6)
그러면 창세기 1장 1절을 참고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장1절을 믿으신다면 게임은 끝났습니다. 창세기1장1절을 믿는데 성경에 못 믿을 구절이 없습니다. 신앙 출발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면서 합니다.
창세기1장1절은 히브리어 7자입니다.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엣, 하샤마임, 에트, 하레레츠” 해서 7입니다. 성경에서 7은 “안식, 창조, 신의 수, 완성”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1 단어 하나하나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 하나님이 영감을 주었습니다. 축자영감(逐字靈感)이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류가 없습니다.
분문에 태초는 클 태(太) 처음 초(初)를 써서 큰 처음이란 뜻입니다. 이는 “시간의 시작점”을 말합니다. 태초 전후는 영원입니다. 요12:48절은“마직막 날 심판을”말씀하고 마태13:49절은“세상 끝”날을 묘사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태초라는 시점에서 시간을 시작하셨고 끝을 내신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돌고 도는 물레방아 사상이 아닙니다. 인간이 죽으면 천국이냐 지옥이냐 둘 중 하나입니다. 세상은 종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역사관을 직선적사관이라 합니다. 과학자들도 세상은 태엽이 풀리는 시계와 같다 합니다. 태양도 언제 가는 수명을 다합니다. 태양은 초당 4백만 톤 씩 무게가 줄어듭니다. 태양 중심의 수소가 다 타 없어지면 무게가 1/10로 줄어 백색왜성이 되었다가 서서히 사라집니다. 이 과정에서 지구도 흔적 없이 녹아 없어집니다. 앞으로 태양이 다 타려면 100억년 남았답니다.
창세기 1장1절의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라 읽습니다. 이 이름이 성경에 6,800번 나옵니다. 이는 성경 전체의 주어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창조(원어:바라)는 유에서 무가 생긴 것을 말합니다. 롬4장17절을 보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입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무에서 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벤허의 작가도 하나님 없음을 증명하려고 성경을 읽다 감동하여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파스퇴르,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뉴턴, 파스칼, 패러데이, 갈릴레오, 보일 등이 유명한 과학자로 하나님을 믿은 분들입니다.
창세기1장1절에서 또 하나 주는 메시지는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입니다. 주인을 높인 말이 주인장입니다. 주인장의 준말이 쥔장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쥔장, 시간의 쥔장, 세상과 우주만물의 쥔장, 또 인간의 주인장입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한 철학자 니체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46세에 정신발작을 일으킨 후 10년을 정신병원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니체 대학 화장실 낙서 유머 아시죠? 한 학생이 대학 화장실 벽에 “신은 죽었다.” -니체- 하고 썼습니다. 그 바로 아래 다른 학생이 “니체도 죽었다.” -신- 이라 썼습니다. 그러자 “여기에 낙서한 놈들 둘 다 나한테 죽었어!”하고 -청소아줌마-가 적었답니다. 하나님을 꼭 믿어야하나 착하게 살면 그만이지 하나님을 주인장으로 모고 살면 구속되는 것 같아 싫다는 분들 있습니다. 또 내 주위에 신자를 보면 제대로 된 사람 못 봤다고 혹평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장이 그 마음에 없으면 로마서 2장9절에서는 “영에 환난과 곤고가 끊임없이 있다.”고 합니다. 마치 광야 한가운데 이스라엘 백성과 같습니다.
2,3절을 참고합니다. 처음 지구의 모습은 혼돈, 공허, 흑암입니다 이를 카오스라고 합니다. 혼돈은 섞일 혼(混) 어두울 돈(沌), 공허는 빌공(空) 빌허(虛), 흑암은 검을 흑(黑) 어두울 암(暗)자를 씁니다. 뒤섞여 있고, 어둡고, 텅 비어 있고, 검은 상태를 묘사합니다. 한 마디로 최초 땅의 상태는 사람 살 곳이 못 되었습니다. 3절을 보면 “빛이 있으라!” 하고 명령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외치면 공허한 메아리일 뿐인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빛의 종류만 해도 우주에 30 만 종류 입니다. 최초의 빛이 지구를 비추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장관이었을 듯합니다. 등대가 배를 비추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등대는 밝아서 43키로까지 비출 수 있답니다. 요한1서1장5절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은 빛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길을 밝혀 줍니다. 빛은 에너지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도 우리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해 줍니다.
본문 2절에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말씀에서 하나님의 영은 성령님을 뜻합니다. 이 말씀 전체 표현은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입니다. 우리 “닭대가리!”라고하며 닭을 빗대 무시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실제 닭의 아이큐가 6이랍니다. 한 자리 수 입니다. 닭의 기억력은 6초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어릴 때 닭이 곡식이라도 쪼아 먹을라 치면 빗자루로 쫓습니다. 꼬꼬댁하고 쫓겨 갔다 6초 후면 잊어버리고 또 오는 것을 자주 봤습니다. 닭이 머리는 좀 나쁠지라도 모성애는 지극합니다. 암탉은 20일 동안 알을 품습니다. 첫 5일은 식음을 전폐하고 꼼짝도 안하고 품고 있습니다. 5일 후 부터 하루 한 번 잠깐 나오는데 모이 먹고 흙 목욕하고 다시 품습니다. 하루 20분 정도만 나옵니다. 품속 알도 골고루 돌려가며 품어서 온도를 유지 시킵니다.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알을 품다 부화시키고 나면 몸무게가 반으로 줄어듭니다. 본문에 “운행하시니라.”란 단어는 독수리가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둥지 위를 유유히 날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애정을 가지고 땅을 품고 계셨습니다. 성경에 닭과 독수리 비유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도 동일하게 품고 돌보신다는 의미로 많이 나옵니다.
본문 1절에 “천지” 할 때 “지”는 지구를 말합니다. 2절 첫 단어 땅을 원어로 풀면 “그런데 바로 그 땅”으로 1절과 연결됩니다. 1절과 2절이 같은 날로 봅니다. 그러나 1절과 2절 사이에는 긴 기간이 있었고 첫 창조 후 재창조를 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지 않습니다. 첫 창조물을 보고 하나님은 기뻐합니다.(4) 그리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혼합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피조된 것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빛을 낮 어두움을 밤이라 지으십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너는 나의 소유다.”하며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뜻합니다. 빛을 창조하심으로 창조 첫날이 지나갑니다. 여기서 하루는 문자 그대로 24시간을 뜻합니다.
본문 1-5절까지 보면 지구를 중심으로 기술합니다. 태양이 중심이 아닙니다. 태양은 넷째 날 창조합니다. 태양도 지구를 위해 있습니다. 태양을 도는 행성은 수금지화목토천해명 9개입니다. 행성들이 의미 없이 궤도를 돌지 않습니다. 이들은 지구를 멸망 시킬 수도 있는 혜성들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지구 방파제 역할입니다. 특히 목성은 커서 많이 막습니다. 달도 그냥 보기 좋으라고 떠 있지 않습니다. 지축의 기울기를 유지 시킵니다. 밀물과 썰물도 일으켜 바다에 영양소를 공급합니다. 달이 없으면 맛있는 회도 먹지 못합니다.
본문에 창조 수단이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만으로 만물을 창조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가 1장에서는 8번 반복합니다.(창1:3,6, 9, 11, 14, 20, 24, 26, 29)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창1:3, 7, 9,11, 15, 21,24,30) 말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속의 뜻, 의사, 계획을 전달하는 매개체입니다. 예수님을 말씀이 육체가 되어서 오신 분이라고 증거합니다.(요1:14)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안에 계획을 그대로 실천하러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실천합니다. 십자가에 죽으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고 구원을 완성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39절에서 성경이 당신을 증거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성경을 읽고 성경말씀에 순종하고 성경의 가치관대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2.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창1: 26-31)
다음은 사람 창조로 넘어가겠습니다. 사람 창조도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무계획이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26절을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6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은 제일 마지막에 창조합니다. 창조의 초점은 인간 창조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본문에 “우리가”란 주어를 반복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혼자 즉흥적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님께서 긴밀히 협의합니다.
세 번째 특징은 인간을 만드실 때 모델이 있었습니다. 그 모델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입니다 이는 외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좀엄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형상을 가졌다는 근거 중 하나 예를 듭니다. 하나님은 절대 선입니다. 그래서 우리 내면에는 절대 선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이것을 도덕률이라 합니다. 도덕률은 교육으로 사회 관습으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 안에 도덕률을 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증거를 삼기도 합니다. 우리는 타락해서 도덕률대로 살 능력을 상실합니다. 그래서 우리 내면에는 항상 벌 받을 것 같은 불안,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안 저절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을 통해서만 없앨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빚으십니다. 아주 섬세하게 장인정신으로 빚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인체의 신비 소개합니다. 우리 몸의 방어체계를 예로 듭니다. 1차 방어체계는 입속 침 속에 라이소자임이라는 효소가 있는데 나쁜 세균이 입으로 들어오면 분해합니다. 꼭꼭 씹어 먹으라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위액은 산성이어서 2차로 균을 죽입니다. 2차 방어시스템은 항체 방어시스템이 있습니다.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면 우리에게 항체를 형성하게 해 주어 바이러스를 이깁니다. 항체는 단백질로 우리 몸속에 아주 유능한 경찰과 같습니다. 항체는 몸속에 바이러스, 세균, 나쁜 물질이 들어오면 열쇠가 자물쇠에 끼워지듯 딱 달라붙어서 바이러스가 몸속에서 증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식균작용을 하는 백혈구는 피아구별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이 항체만 붙어있으면 잘 잡아먹습니다. 마치 적군 군복에 빨간 물감을 칠해서 잘 보이도록 한 것과 같습니다. 항체가 붙어있는 바이러스를 골라 폭파시키는 역할을 하는 단백질이 있는데 보체라고 합니다. 이 보체는 평소에는 쥐죽은 듯 있다가 항체가 들러붙은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잠에서 깨어나 폭파시킵니다. 그래서 항체가 있나 없냐가 관건입니다.
인간 창조의 다섯 번째 특징은 하나님이 숨을 코에 불어 넣으셔 산 존재가 되게 한 부분입니다. 창세기 2장7절을 참고하십시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 안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방이 있습니다. 이 방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는 우리를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셨습니다. 28절을 보면 우리는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함부로 자연을 파괴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맞게 해야 합니다. 한국은 빠른 산업화로 평균온도가 과거보다 1.8도 올라갔다고 합니다. 평균온도가 올라가면 이상기후가 많이 나타납니다.
27절을 보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나옵니다. 세상에 남녀 비율이 적절히 조정되는 것도 신비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조절하지 않나 추측합니다. 생명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생명 탄생과정도 너무 신비롭습니다. 염색체도 남자에게서 23개 반수체와 여자에게서 23개의 반수체가 융합하여 온수체 23개의 쌍이 되면서 부모의 유전형질이 전달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은 3~5억분의 1의 경쟁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 다 아실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처음 엔 채식을 합니다. 땅이 저주를 받으면서 약육강식으로 전락하면서 육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채식만하면 단백질이 모자라 어떻게 살았냐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덩치 큰 코끼리도 잘 살고 있습니다. 소도 잘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에 리틀타이크라는 사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자는 고기를 거부했답니다. 채식만 합니다. 그런데도 안 죽고 잘살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가오는 천년왕국 시대에는 다시 사자와 곰들이 어린양과 함께 사이좋게 풀을 먹는 시대입니다.
31절을 참고합니다. 하나님이 창조된 세상을 보고 소감 발표합니다. 심히 좋았다는 표현은 “보라! 얼마나 좋으냐”란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감탄한 존재입니다. 누가 나를 감탄하면서 봐준다고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요즈음은 온갖 악성 댓글이 난무하는 세상 아닙니까? 악성 댓글 때문에 목숨도 끊습니다. 통계를 보니까 60%이상이 악플을 단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밴드는 악플 제로입니다. 선한 댓글 100프로입니다.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주인장이 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당신의 형상을 닮은 선한 존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나를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 안에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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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제공한 특별한 공간(창세기2:8-25)
행복은 원어로 에셰르입니다.(신33:29) 국어사전에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흐뭇한 상태"입니다. 본문 창세가 2장에서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을 만들고 그들이 살아갈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아담부부는 이 공간에서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아담 부부의 행복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지 살펴봄으로 우리가 행복 할 수 있는 조건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에덴동산은 기쁨의 동산(garden of joy)이란 뜻입니다.
1. 에덴동산(창2:8-17)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설하셨다고 나옵니다. 원어의 뜻은 “울타리를 치고 무언가를 심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별한 공간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부모가 신혼 집을 마련해 주듯이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의식주 걱정이 없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에덴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과일나무가 즐비합니다. 성도님은 어떤 과일 좋아하십니까? 저는 딱딱한 복숭아를 좋아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과일은 무엇이고 가격을 얼마일까요? 일본의 유바리 멜론이 2,800 만 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과일은 무등산 수박입니다. 19kg 한 통에 199,900원입니다. 수박은 넝쿨에 달리기 때문에 과채소라 합니다. 에덴동산에는 이런 비싼 과일 지천으로 널렸을 것입니다.
특별한 과일도 있었습니다. 9b절을 보십시오. 동산 가운데에 있는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천 년 만 년이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특별한 나무는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는 절대 따먹지 말도록 하나님이 명했습니다. 아담 부부는 먹으라는 생명 나무 열매는 먹지 않고 선악과 열매를 먹습니다. 그 결과 낙원을 잃어 버리는 불행이 찾아옵니다. 죄인에게는 청개구리 속성이 있는가 봅니다. 금지하면 더 먹고 싶어합니다.
2. 4대강(창2:10-14)
10~14절은 4대 강을 소개합니다.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입니다. 이름의 뜻은 비손은 풍성하다이고, 기혼은 터져 나가다이고, 힛데겔은 화살처럼 빠르다이고, 유브라데는 달콤하다 입니다. 성경에서 4는 동서남북, 사방, 온 세상을 싱징합니다. 4개 강 이름 뜻으로 문장을 만들어 봤습니다. ‘풍성하고 달콤한 것이 화살처럼 빠르게 온 세상으로 흘러간다,'입니다. 신약에서 강은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에덴에는 생명의 젖줄인 강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4대 강은 무엇입니까?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입니다. 집중 호우로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 4대 강은 홍수 걱정이 없었습니다. 제방이 금입니다. 금도 100% 순금입니다. 한국 금거래소에 금 시세는 한 돈 301,500원입니다.
에덴 4대 강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었습니다. 베델리엄은 진주를 말하고 호마노는 붉은 줄무늬 보석입니다. 최영 장군의 아버지가 “황금 보기를 돌 같이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데요 에덴동산의 강 주위는 황금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황금이 돌보다 많아 진짜 돌 취급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덴은 무해한 환경입니다. 해충이 없었습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벌고 벗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기후가 인간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온도와 습도여서 보온이 필요 없었습니다. 동식물이 인간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호랑이, 사자, 심지어 코브라도 고분 고분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그냥 둔 것이 아니고 특별한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수많은 별들 가운데 지구를 보면 특별한 공간입니다. 지구는 생명이 살 수 있는 최적의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 하나님이 설계한 또 다른 특별한 장소가 에덴동산이었습니다.
현재는 죄로 인해 에덴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러나 요14:2절을 참고하면 예수님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하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합니다. 에덴을 창설해 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앞으로 특별한 공간을 마련해 주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이 특별한 장소를 천년왕국(계20:6), 새 하늘과 새 땅(계21:1), 새 예루살렘(계3:12), 새 성전(계3:12), 천국(마5:10)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할 일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었습니다. 일하는 분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하고 실컷 놀아 봤으면하는 로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위도식하는 삶이 과연 행복을 가져다 줄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고” 아담의 사명은 에덴을 경작하고 지키는 일입니다. 경작하다는 원어로 아바드 인데요. 경작하다 이외에 “일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다.”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무위도식하게 두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몸을 써서 일했을 뿐아니라 머리를 써서 일하게 했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주로 한 일은 이름 짓기입니다. 이름을 지으므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돕고 있습니다. 들짐승, 새, 생물, 가축들 이름을 아담은 지어 줍니다. 이름 짓기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벤치마킹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스스로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여 이름을 지어야 했습니다. 인간은 창조할 때 행복합니다. 창조성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예술계에서도 창조를 중요시합니다. 창조경제, 창조교육이란 말도 씁니다. 요즈음은 지식이 무한하게 데이터로 주어 지고 검색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교육에서는 창조 능력을 중요 시합니다.
어떤 행위 예술가는 화장실에서 누렇게 찌든 남자 변기를 떼어다 놓고 작품이라고 합니다. 제목은 맑은 물이 나오는 샘이라고 붙입니다. 누구나 변기는 갖다 놓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분은 최초로 상상력을 부여하여 제목을 붙여 작품성을 인정 받았습니다. 이 작가가 프랑스 뒤샹입니다.
아담이 이름을 짓는 것은 지어준 대상이 그의 소유이고 관리 대상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아담의 위치는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영장입니다. 적합한 이름을 지으려면 동물의 내외적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지구상 동물 종류가 150만 종입니다. 아직도 이름 없는 종이 1,000~2,000만 종이라 합니다. 당시 아담이 이 많은 동물의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 지 불가사의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을 통하여 질서를 세웠습니다. 그 질서는 아담에게 준 명령의 말씀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9-17절을 보십시오. 특히 본문 16절을 보면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으라 합니다. 마음껏 먹으라 합니다. 무한한 자유를 줍니다. 2,800만 원 멜론도 맘대로 먹으라 합니다. 단 한 가지 선악과만 먹지 말라 합니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 말씀으로만 경고 했지 선악과에 접근 금지 장치를 해놓 진 않았습니다. 30만 볼트 고압 전기 담장도, 위험 표지판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아담 부부가 마음만 먹으면 자유롭게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명령만 주고 인간에게 자유롭게 선택권하도록 했습니다. 자유의지로 선악을 판별하고 선을 선택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쥐에게 전기 쇼크를 주어 치즈를 먹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쥐가 치즈에 입을 댈 때마다 전기 쇼크를 주면 됩니다. 그러나 쥐의 머릿 속에 “주인의 명령을 어기고 치즈를 훔쳐 먹는 것은 잘못이다.”란 생각을 넣어서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게 만드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를 주어 자유롭게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선악과 명령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써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행복할 수 있는 존재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선악과 명령을 어긴 댓가로 인류는 불행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단지 과일 하나 따먹었을 뿐인데 하나님이 너무 과한 조치가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게다가 온 인류가 육체의 죽음까지 이르게 한 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일 한 개에 방점이 있지 않고 누가 명령했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랑과 신뢰 관계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과 육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 받아 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요 우리는 피조물로서 그 사이에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 질서는 하나님이라는 영역 안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하나님의 영역을 벗어나 독립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에너지 공급이 차단되고 한계가 있는 자기 능력만으로 살게되었습니다. 그 하나님과 관계가 차단됨으로 온 증상 중 하나가 육체의 죽음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잃어버린 행복을 찾기 위하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회복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신뢰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죄사함입니다. 죄사함을 통하여 구원받은 행복에 대하여는 다윗 왕을 예로 듭니다. 다윗은 훌륭한 왕이지만 간음 죄와 충신을 살인 교사하는 죄를 범합니다. 그는 이 죄의 아픔 때문에 울어서 침상이 눈물에 뜰 정도입니다.(시6:6) 그런데 회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 받고 난 행복이 얼마나 큰 지를 노래한 것이 시편에 많습니다.(롬4:7,8)
3. 아담에게 돕는 베필을 지으심(창2:18-20)
하나님은 아담의 행복을 윗나여 돕는 베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본문은 18-25절까지입니다. 배필의 한자 배는 “나눌배, 짝지을 배”입니다. 또 필은 “짝 필, 상대 필자”입니다. 배필은 아담과 대등한 짝, 대등한 상대를 지칭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계속 좋았다고 소감을 말했는데 처음으로 좋지 못한다는 표현이 18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합니다.(21절) 하나님은 유사 이래 최초로 외과 수술을 집도합니다. 옆구리를 가르고 갈빗대 하나를 꺼내 하와를 만듭니다.
남성들 자기 갈빗대 한 개 어디 갔나 찾지마십시오. 24개 다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55번의 수술을 한 사람이 있었다 합니다. 뼈가 필요하면 오른 쪽 가슴 아래 갈비뼈를 떼다가 사용합니다. 뼈가 또 필요하면 의사는 찢은 자리를 또 찢고 뼈를 잘라씁니다. 뼈는 골막을 손상하지 않고 남겨 두면 다시 자랍니다. 특히 갈비 뼈는 골막이 발달하여 잘 자란다고 합니다.
4. 결혼을 제정하심(창21-25)
본문은 23절은 최초의 결혼, 최초의 가정에 관하여 기술합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첫 눈에 반하여 외칩다. 23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문장은 아담이 반복법과 대구법을 사용하여 최고의 감탄과 최고의 찬양을 한 표현이랍니다.
24절에 보면 부부는 둘이 한 몸을 이룬다 합니다. 두 개의 개체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친밀한 관계입니다. 성경은 부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을 신비라고 합니다. 한 몸이 되는 조건이 부모를 떠나라고 합니다. 이는 부모를 고려장 시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두 사람이 연합하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고려장은 고려 시대 때 자식이 부모 모시는 책임 회피를 위해 노모를 지게에 지고 멀리 갔다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는 효와 충을 국시로 한 시대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문화재 도굴을 위하여 지어낸 것이 고려장이라고 주장하는 학회도 있습니다.
에베소서 엡5:31‐32절과 계21:2을 참고하면 예수님을 신랑, 교회를 신부에 비유합니다. 부부관계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온 몸을 던져 십자가에 희생하였으면 부부도 서로 희생하여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온 몸을 던져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면 부부도 그렇게 서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한국의 한 여론 조사 기관에서 30‐40대 기혼 여성들에게 ‘007같이 합법적인 살인 면허를 준다면 누구를 제일 먼저 쏠 것인가?’라고 물었답니다. 1위가 남편입니다. 또 신학대학에서 예비 목사님들 1,000명에게 물었답니다. “다시 태어나도 현재 사모님과 결혼하겠습니까?” 했더니 90%가 아니라고 나왔답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주석에 나라 별로 결혼에 대한 속담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먼저 러시아 속담입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라. 바다로 떠날 때는 두 번 기도하라. 결혼 할 때에는 세 번기도 하라.”고 합니다.
다음은 에스토니아 속담입니다.“한 가마의 빵을 잘못 구우면 일주일을 망치고 추수의 수확이 나쁘면 일 년을 망치고 불행한 결혼을 하면 일생을 망친다.”
끝으로 한국 속담입니다. “남편을 잘못 만나면 평생 원수, 아내를 잘못 만나도 평생 원수.”
하나님은 아담 부부를 위해 에덴을 창설하고 모든 행복의 조건을 갖추어 주었습니다. 환경도 완벽했고, 사명도 있었고, 계명을 통한 질서도 세웠고, 가정도 이루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류는 죄로 인하여 현재는 에덴동산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불행 중 다행은 현재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에덴은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이 이 예수님 안에서 마음으로 관계적으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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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야 할 행복ㅡ에덴동산(창세기2:7-25)
1. 행복했던 경험
성도님들은 살아오면서 어떤 순간이 가장 행복하셨습니까? 다음 주 결혼식이 있는데 행복 중에 하나에 들어가겠죠? 제인생 중 언제 행복했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대학에 합격했을 때 인거 같습니다. 제가 3시면 해가 지는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하버드대에 합격한 것도 아닌데 기차역에 축하 포스터가 붙었습니다. 군대 전역할 때도 행복했었습니다. 27개월을 마치고 부대를 향해 오줌도 누지 않겠다고 했던 곳을 빠져 나올 때 기뻤습니다. 또 뒤늦게 취업했을 때도 행복했습니다. 제가 20대 때 선교 활동한다고 성경책 끼고 왔다 갔다 하면서 30살이 되도록 취직도 하지 않고 부모님 걱정을 많이 끼쳤었습니다. 그러다 취업해서 어머니 축하를 받았던 때가 눈에 선합니다. 또 자매를 만나서 결혼했을 때도 아주 행복했습니다. 제가 33살 노총각이 구제를 받았었습니다. 결혼하고 첫째 딸이 태어났을 때도 행복했습니다. 주위에서 예쁘다고 칭찬해 주고 심지어 아동복 회사에서 모델하자고 제의도 왔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행복했습니다. 아들하고 4살 때 한겨울에 방문과 바깥 베란다 문 다 열어놓고 안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북극곰 놀이할 때 행복했습니다. 지금은 고등하교 졸업했습니다. 이제는 옆에 가면 저를 징그러워합니다. 역시 가장 큰 행복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또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 사함 받았을 때 아주 행복했습니다. 성도님들은 언제 행복하셨습니까?
2. 저자 모세에게는 본문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행복이란 단어를 알라딘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서 검색했습니다. 26,976건이 나왔습니다. 세상에서는 행복에 대해 쓴 책이 한 트럭입니다. 오늘은 성경 창세기 2장에서 행복론을 찾아보겠습니다. 창세기 저자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모세 BC1446년경에 기록했답니다. 모세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 같은 시대에 썼습니다. 창세기는 싯점이 창세 때부터 하나님이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가 모세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의 순전한 상상력인데요? 모세가 가장 불행 할 때 창세기를 주셨을 것입니다. 모세는 롤러코스터 인생이었습니다. 40년을 대 이집트 왕자로 살다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당시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의 자리에 있다가 살인자가 되어 미이안 광야로 도망 갑니다. 이 광야에서 그야말로 양 똥치는 양치기로 40년을 살았습니다. 모세가 왕궁에 살 때 창세기를 기록 했겠습니까? 아마도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고, 가장 괴롭고, 가장 비참할 때 기록하게 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우리 민족은 왜 이집트의 노예로 몇 백 년 동안 괴롭힘을 받는가? 나를 지도자로 세웠다고 하는데 나는 평생 이 미디안 광야에게 양똥만 치우다 죽을 인생이구나.” 이런 원망이 들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오경을 주신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태초에 인생들에게 어떤 행복을 주셨고, 우리는 왜 그걸 잃어버렸는가? 하는 것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것으로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형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노예백성을 구하기 위해 갈 때였다면 갈 수 있는 힘도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세기를 기록으로 남겨 우리에게까지 읽도록 한 것은 현재 우리도 창세기 2장을 보면서 모세와 동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으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3. 인간의 본질
그럼 창세기2장 7절부터 보겠습니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1장은 일반적으로 천지창조에 대해 기술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장부터는 인간을 중심으로 다시 창조를 기술합니다. 본문 7절은 인간의 기원, 인간의 본질을 전해줍니다. 인간은 땅의 흙으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사람은 동물과 창조과정이 완전히 다릅니다. 공정과정이 다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장인 정신으로 한 땀 한 땀 빚어서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셨으리라는 상상이 듭니다. 그래서 인체는 너무너무 신비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은 존엄합니다.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신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남을 무시해도 안 되고 자기를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와서 살게 된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자기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서 살게 해 준 분을 전혀 모르고 사는데 과연 진정한 행복이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본문에서 유추할 메시지는 먼지 철학입니다. 생기가 없어지면 인간은 흙만 남습니다. 흙은 영어로 “dust” 입니다. 먼지입니다. 우리는 생기가 빠지면 먼지뭉치에 불과합니다. 옆에 있는 분 한번 보십시오. 먼지뭉치로 보이십니까? 저희 아버님이 4년 전 돌아가셨는데 화장하고 분골이 딱 한 뭉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지끼리 너무 아옹다옹 싸우지 말아야 겠습니다. 그래 봤자 먼지만 날립니다. 또 먼지를 너무 치장하려고 애쓰고 고생하지 않아야 겠습니다. 또 먼지 뭉치를 수백 억짜리 아파트에 재워 본들 뭐하겠습니다. 먼지철학만 가져도 욕심이 없어지고 행복이 옵니다.
그 다음에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환경이 행복의 절대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그러나 비가 줄줄 새는 집에 앉아서 “나는 행복해!” 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에덴동산을 창설하셨다고 나오는데요. 하나님은 특별한 공간,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4. 에덴동산의 환경
여기 환경이 어떠했을까요? 9절을 보십시오. 우선 먹을 걱정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 먹고 살기 위해서 다 이 난리를 하지 않습니다. 살려고 죽도록 일하지 않습니까? 에덴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과일나무가 즐비했습니다. 성도님은 어떤 과일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어릴 때는 시원한 배가 좋았는데 요즈음은 사과가 좋습니다. 사과는 다양한 맛이 있습니다. 에덴에 과일 생각하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과일을 찾아봤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일본의 유바리멜론이라고 합니다. 경매로 2,800 만 원에도 팔렸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과일 찾아보니 무등산 수박입니다 19kg 한 통에 199,900원입니다. 빨리 겨울이 가고 수박 먹는 철이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이런 비싼 과일도 지천으로 널렸습니다.
5. 인류가 불행하게 된 원인
인류 최대의 불행은 죄와 죽음 때문입니다. 본문 9절과 16,17절은 이 죄와 죽음이 왜 왔는지 단서를 제공합니다. 9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그리고 이 나무는 어떻게 하라는 명령을 주셨죠? 16,1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이거 따먹으면 천년만년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좀 전에 인간이 살려고 발버둥 친다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린 다 죽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죽음 앞에 장사 없고, 죽음이 주는 두려움, 불안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덴은 죽음이 없는 곳,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해주는 나무가 있었는데 이걸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하셨습니다 선과악은 우리말로 옳고 그름입니다. 하나님이 경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기어코 명령을 어기고 따먹었습니다. 먹으라는 생명나무 열매는 안 먹고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어서 인간은 에덴을 상실했습니다. 현재는 실낙원을 한 상태입니다. 이로 인해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온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죄인의 속성에는 청개구리 성향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 말라하면 더 하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아이들이 저녁에 아무 말 안하면 알아서 일찍 어 오다가 “11시까지 꼭 들어와!” 이렇게 명령하면 꼭11시 넘겨서 들어옵니다.
본문에서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신학적 의미를 논하기에는 오늘 주제가 행복이기 때문에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모세 당시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인류가 불행하게 된 원인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낙원을 상실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이 있습니다. 인류가 유토피아를 추구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복론 책도 한 트럭 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또 개인과 인류의 역사는 전쟁사입니다. 오늘 아침도 한바탕 하신 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러시아가 전쟁 중입니다. 중동의 화약고가 터지려는 조짐도 보입니다. 북한에서도 막 하루가 멀다 하고 포를 쏘고 있습니다. 이 모슨 현상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입니다. 선과악의 기준이 각자에게 있기 때문에 인류는 끊임없이 옳고 그름의 문제로, 죽고 죽이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생명나무는 안 먹고 하나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주었다면 지금은 그 반대로 가야 행복이 있습니다. 현재는 영적으로 생명나무와 선악과로 기인한 문제가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아주 행복한 소식입니다. 복음입니다. 그 소식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영원한 생명이 선물로 옵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이 찾아옵니다.
6.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
선악과 문제에서 한가지 만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16절을 보면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으라. 합니다. 이것을 볼 때 아담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단 한 가지 금령 선악과만 먹지 말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위험한 선악과에 접근금지 장치를 했습니까? 30만 볼트 고압 전기 담장 했습니까? 위험표지판 세웠습니까? 아닙니다. 아담부부가 마음만 먹으면 자유롭게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인간은 자유로울 때 행복한 존재입니다. 군대가 힘든 것은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공간적로도 그렇고 조직구성도 그렇습니다. 쥐를 예로 듭니다. 쥐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쥐에게 치즈에 입을 댈 때마다 전기쇼크를 주어서 치즈를 못 먹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쥐의 머리에 “주인의 명령을 어기고 치즈를 훔쳐 먹는 것은 나쁘다.”란 생각을 넣어서 자발적으로 못 먹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도 강제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자유를 바탕으로 한 사랑이 참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사랑할 때 만족하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30만 볼트 담장 치지 않으셨습니다. 행복의 조건에 자유 중요합니다.
7. 에덴에 흐른 4대강
10~14절은 에덴의 환경 중 4대강을 소개합니다.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입니다. 이름의 뜻을 찾아봤습니다. 비손은 ‘풍성하다’고 ‘기혼’은 ‘터져 나가다’고 ‘힛데겔’은 ‘화살처럼 빠르다’고 ‘유브라데’는 ‘달콤하다’입니다. 4대강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었습니다. 베델리엄은 진주를 말하고 호마노는 붉은 줄무늬 보석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에덴동산의 강 뚝은 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홍수가 나도 절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환경이 행복의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너무 터부시하는 것도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물질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고 그 물질로 인간을 빚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또 하나님은 물질로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금욕주의나 나는 세상이 싫어하면서 산속에서 혼자 사는 은둔주의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부자들은 모두 나쁜 사람으로 몰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요하다는 공산주의도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의식주의 욕구, 성욕, 다른 기본욕구들 다 하나님이 선하게 주신 것입니다. 다만이 이것이 선을 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욕, 정욕 이러면 곤란하지만 그 자체는 선합니다.
8. 아담에게 준 사명
그리고 또 하나님은 아담이 무위도식 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고” 경작하고 지키는 일은 죽도록 일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만물의 영장의 위치에서 관리하고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몸과 마음과 머리를 써서 일을 했습니다. 저같이 퇴직 때가 5년 정도 남은 분들은 빨리 퇴직하여 무위도식 하고픈 마음이 절로 듭니다. 일터가 야생정글입니다. 저희 직장도 명예퇴직한 분들이 많습니다. 어느 날 식당에서 한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저의 손을 잡으면서 당부했습니다. “절대 나오지 마라! 쓸어도 쓸리지 않는 젖은 낙엽처럼 꼭 붙어있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젖은 낙엽 전법 아직까지 쓰고 있습니다.
아담이 주로 무슨 일을 했을까요? 19-20절을 보십시오. 이름 짓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집을 지으면 마직 막으로 문패를 답니다. 이 건물은 내 소유다는 선언입니다. 이름 짓기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종지부를 아담에게 찍도록 위임하신 일입니다. 현재 이름이 있는 동물 종류가 150만 종입니다. 아직도 이름 없는 종이 1000~2000만종이라 합니다. 아담이 적당한 이름을 지으려면 동물의 속성과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람이 창조적인 일을 할 때 행복이 있음을 유추합니다. 세상은 창조성을 인정해 주고 습니다. 창조교육, 창조경제란 말도 씁니다. 예술계도 마찬가지로 인정해줍니다. 어떤 현대 작가가 남성 변기를 놓고 “샘”이라고 작품 이름을 붙였답니다. 이게 무려 176만 달러, 한화로 22억 8천 8백만 원에 팔렸답니다. 이분 이름이 뒤상입니다. 창조적인 일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치매에도 좋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창조하며 무엇을 느꼈을까요? 동물과 자신은 아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원숭이 아무리 훈련해 봐도 젓가락 리듬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진화했다는 것은 아예 생각할 수 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동물을 숭배하는 것은 더 말이 안 됩니다. 두 번째는 동물이 모두 암수 짝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자기의 짝이 될 만한 것은 동물 중에는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아담의 짝을 만들어 이끌어 주십니다.
9. 가정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 돕는 배필의 의미
하나님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마지막으로 가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정을 이루어주시고 행복한 모습은 본문 18-25절까지 입니다. 1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계속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으로 좋지 못한다는 표현이 본문에 나옵니다. 아담을 만들어 놓고 가만히 보니 별로 안 좋네 하면서 하와를 만들겠다고 즉흥적으로 생각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본문에 좋지 못했다는 뜻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아직 완성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 완성단계로 가는 중간과정이라는 뜻입니다. 그 완성단계가 바로 돕는 배필 하와를 만들어 이끌어가는 단계였습니다. 배필(配匹)에 한자 배를 보면 사람 키만 한 술독 앞에 한 사람이 마주보고 서서 술 잘 익었나 안 익었나를 살펴보는 형국에서 만들었습니다.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는 옆에 나란히 서서 도와주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이 두가지 사례에서 우리는 배필의 존재의 의미는 아담과 동등하다는 것을 압니다. 누군가를 도와주려면 기능적으로 더 우월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여성은 재질이 흙과는 재질의 차이를 보이는 뼈로 만들었습니다. 색깔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최고의 도자기는 소의 뼛가루가 40% 섞어서 만든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본차이나들이 여성입니다.
하와를 만드는 과정은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합니다.(21절) 그리고 하나님은 유사 이래 최초로 외과 수술을 집도합니다. 옆구리를 가르고 갈빗대 하나를 꺼내 하와를 만드십니다. 혹시 형제님들 자기 갈빗대 한 개 어디 갔나 찾아보지 마십시오. 24개 다 있습니다. 아담만 없습니다.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메시지 한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 봅니다. 아담의 잠은 죽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의 뼈의 개념은 생명과 동일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뼈에서 피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죽고 그 허리에서 생명이 만들어진 것이죠?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십자 상에서의 장면과 겹쳐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육신의 어머니를 사도요한에게 부탁합니다. 예수님은 동생도 여려 명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이 동생들에게 부탁하지 않고 사도 요한에 부탁하시는 것은 앞으로 육신의 가족이 아닌 영적인 가족의 탄생을 예고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옆구리를 찔렀을 때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생명의 역사로 인해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아담의 허리에서 하와를 만드신 사건 속에도 복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으면서는 눈을 씻고 찾아도 자기의 짝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만들어 이끌어 오시는 하와를 보고 첫 눈에 자기 짝 임을 알고 외치는 시가 23절입니다. 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내 살이요 내 뼈라는 표현은 바로 “하와가 나네! 나와 같네!”란 뜻입니다. 분리 되지 않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서로 비방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격입니다. 이 문장은 아담이 반복법과 대구법을 사용한 최고의 감탄이요. 사랑고백입니다. 그러면 형제님들도 아담과 같은 마음으로 자매님들에게 고백 해보시기 바랍니다.
10. 가정의 행복 조건
24절에 보면 부부는 둘이 한 몸을 이룬다 합니다. 두 개의 개체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을 신비라고 합니다. 한 몸이 되는 조건이 부모를 떠나라고 합니다. 이는 부모를 고려장 시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두 사람이 연합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정의 행복조건을 봅니다. 자식을 잘 못 떠나보내는 분들을 헬리콥터라에 비유합니다. 자식 주변을 계속 헬리콥터처럼 돌면서 참견합니다. 부모 품을 잘 못 떠나는 자식을 캥거루에 비유합니다. 이렇게 되면 가정이 불행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행복의 원천, 행복의 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을 지켜야 행복합니다. 한국의 한 여론 조사 기관에서 30‐40대 기혼 여성들에게 ‘007같이 합법적인 살인 면허를 준다면 누구를 제일 먼저 쏠 것인가?’라고 물었답니다. 1위가 남편입니다. 또 신학대학에서 예비 목사님들 1000명에게 물었답니다. “다시 태어나도 현재 사모님과 결혼하겠습니까?” 했더니 90%가 “아니라”고 나왔답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주석에 보니까 나라별로 결혼에 대한 속담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먼저 러시아 속담입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라. 바다로 떠날 때는 두 번 기도하라. 결혼할 때에는 세 번기도 하라.”고 합니다. 다음은 에스토니아 속담입니다.“한 가마의 빵을 잘못 구우면 일주일을 망치고 추수의 수확이 나쁘면 일 년을 망치고 불행한 결혼을 하면 일생을 망친다.” 끝으로 한국 속담입니다. “남편을 잘못 만나면 평생 원수, 아내를 잘못 만나도 평생 원수.” 였습니다. 어쨌든 원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정은 서로 예수님을 배우는 장이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부인의 사진을 수첩에 넣고 다니면서 힘들 때 마다 꺼내 봤답니다. “아니 부인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렇게 합니까?” 물었답니다. “내가 이 부인의 잔소리를 20년을 들으면서 참고 살았는데 뭘 못 참겠는가!”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내려고 이렇게 했답니다.
결론적으로 인생의 행복의 키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야합니다. 엄마 품을 떠난 아이가 행복할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야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품 안에서 잃어버린 낙원의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는 여지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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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쌓기 중단 사건(창세기11장1-9)
언어학회에서 발표한 지구상에 언어는 약 6,500개입니다. 오늘은 언어가 이렇게 나뉜 윈인이나옵니다.
본문은 바벨탑 사건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사람들의 모든 생각이 항상 악합니다.(창6:5) 하나님은 노아와 8가족만 남기고 홍수로 심판합니다.(벧전3:20) 홍수 후에 하나님의 뜻은 인류가 흩어져 온 땅에 충만해지는(창1:28) 것입니다. 노아도 자식들에게 이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후손들은 노아의 지시도 하나님의 명령도 어깁니다.
태초에 언어가 하나
1절을 보면 당시 언어와 말이 하나였습니다. 좋았을 것 같습니다.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영어에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합니까? 영어 사교육시장 규모는 6조를 넘었습니다.
당시에는 한 개의 말과 글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어떤 말과 글이 공용어로 쓰였을까요? 주석에는 공용어가 히브리어 또는 셈족어라 추측합니다.
2절을 보면 사람들은 동방으로 옮기다 시날 평지에 정착합니다. 하나님은 흩어지라 했는데 모였습니다. 시날 평지는 4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지역입니다. 여기에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있습니다. 이 유역을 바벨론이라고 부릅니다. 계시록에 보면 바벨론은 악을 생산 해 내는 도시입니다.(계14:8)
3절을 보면 이곳은 돌보다 흙이 많은 지역입니다. 사람들은 흙과 역청을 섞어 벽돌을 만들고 구웠습니다. 역청은 아스팔트(asphalt)입니다. 아스팔트는 석유를 거른 후 마지막에 남는 물질입니다. 중동에 가면 아스팔트 샘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샘에서 물이 나오는데 여기는 기름이 나옵니다.
미국 석유 왕 록펠러라는 사람은 본문 11장3절에서 힌트를 얻어 중동석유 개발을 했답니다. 스탠더스 회사입니다. 유프라테스 강 주변에 직원을 파견하여 유전을 개발하고 이윤을 남겨 세계적인 부호가 되었습니다. 록펠러는 침례교도입니다. 교회 4,000개를 세웠습니다. 시카고 대학 등 학교도 12개 세웠습니다. 그는 항상 주일예배 40분 전 교회에 옵니다. 헌금도 40분 동안 기도로 준비하고 예배 후 회계사 30 명을 부릅니다. 그들을 통해 십일조를 정확히 계산하여 내고 갔답니다.
성경에는 석유보다 더 값진 보물을 소개합니다. 예수그리스도입니다.(벧전2:4) 사도바울은 이 보배를 발견하고 자신의 유형, 무형의 가치 있는 것들을 배설물로 여깁니다.(빌3:8)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주는 가장 큰 복은 영생입니다. 시편133편3절은 말합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언어가 갈라진 배경
3절에 2번 반복하는 단어가 대신(instead of)입니다. 돌 대신 벽돌, 진흙 대신 역청입니다. 돌과 진흙은 하나님이 순수하게 주었습니다. 벽돌과 역청은 인위적으로 만듭니다. 4절을 보면 이것으로 성읍(City)을 건설하고 탑(Tower)을 쌓았습니다. 성읍은 성곽을 두른 도시를 말합니다. 지금도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이 탑은 지구라트(ziggurat) 유적입니다. 피라미드 형태의 계단식 탑입니다. 꼭대기에는 제단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25 개를 발견합니다. 큰 것은 길이가 102미터, 높이는 24미터입니다.
성읍과 기념탑을 세우는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4절은“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라 합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유명하게 하려고합니다. “흩어짐을 면하자!”는 창세기 1장28절 말씀에 정면 위배입니다. 28절은 “땅에 충만하라!” 고합니다. 온땅에 흩어져 충만해지는 것이 지상명령입니다. 그런데 “흩어짐을 면하자.”하고 거역합니다.
당시는 홍수 심판을 경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탑을 될 수 있으면 높이 쌓는 것은 물이 아무리 차고 올라 와도 잠기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입니다. 탑을 쌓아 하나님의 심판도 피해보려는 시도입니다.
사람들은 바벨탑을 무서운 속도로 쌓아 올렸습니다. 그냥 두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요?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의 킹덤 타워라고 합니다. 1,007미터입니다. 2위는 일본 토교의 스카이트리입니다. 634미터입니다. 3위는 중국 상하이 타워로 632미터입니다. 우리나라 서울의 롯데월드 타워는 5위입니다. 555미터입니다.
현대의 건축 기술, 과학 기술을 투입하여 하늘 높이 탑을 쌓아 올라갈 수 있는 최대 높이가 600~1000미터입니다. 당시 유적지 지구라트는 24미터입니다. 높이를 대기권과 비교 해 봅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기권의 높이는 1백5십만 미터 입니다. 바벨탑 높이 24미터는 우리가 하늘이라고 말하는 대기권 높이의 0.000016%입니다. 바벨탑은 그야말로 “하늘아래 뫼이로다.” 입니다.
5절을 보면 하나님이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내려 옴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장차 내려올 것을 약속합니다.(살전4:16)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은 심판의 날임과 동시에 믿는 자들에게는 축제의 날입니다.(계19:9)
6절은 무리가 한 족속이고 언어도 하나였기 때문에 “이 후로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고 합니다. 막을 수 없다는 표현은 사람들의 죄악이 절정에 달하여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 때나 소돔과 고모라 지역과 같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유황 불의 심판을 받은 지역입니다. 당시 5개의 성이 있었는데 한 개의 성에 5천명이 살았습니다. 총인구 2만5천 명입니다. 이들 중 10 명의 의인이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보면 됩니다. 의인은 0.004%도 없었습니다.
7-9절은 “자 우리가 내려가자!”합니다. 본문3절과 4절에도 자~란 표현이 있습니다. 자는 “자자 모여봐!”란 뉘앙스로 영어로는 “Come on!”입니다.
우리란 표현은 혼자가 아님을 암시합니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 3위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9절의 바벨은 섞다, 혼합, 혼란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내려 오셔서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합니다.” 하루 아침에 말이 안통합니다. 우리말 “사랑해!”를 영어로는“아이 러브 유”하였습니다. 일본어 “아이 시떼루” 중국어 “워아이니” 스페인어 “떼 기예로” 프랑스어 “주 떼므” 힌두어 “마이 툼 세 피아르 카르타 훙”입니다. 힌두어로 사랑고백하기 힘듭니다. 아랍어로는 남자가 여자에게는 “우히부키”라하고 여자가 남자에게는 “우히부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어 한 두 개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말이 달라지니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사랑해라고 말했는데 자기에게 욕하는 줄 알고 칼을 꺼내 휘둘렀습니다. 벽돌을 달라고 했는데 식빵을 가져왔습니다. 심지어 같은 나라 말이라도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 많잖습니까? 북한말과 남한말의 다른 점 몇 개를 예로 들겠습니다. 수영에서 ‘평영’을 북한에서는 ‘가슴헤엄’이라합니다. ‘박치기’를 ‘골받이’라합니다. ‘볶음밥’은 ‘기름밥’입니다. ‘근시’는 ‘병신눈’이라합니다. ‘버리이어티쇼’는 ‘노래춤묶기’라합니다. ‘헤어드라이기’는 ‘머리건조선풍기’입니다. 북한 말로는 “오늘 교회오실 때 머리건조선풍기 하고 오셨습니까?”하고 물어야합니다. ‘건강진단’은 ‘위생통과검열’입니다. 올해 ‘위생통과검열’은 받으셨습니까?하고 물어야합니다. 같은 민족의 말도 이렇게 다른데 당시는 외국어끼리 뜻이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탑 쌓기는 금방 중단하였고 인류는 온 지면에 흩어집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흩음으로 죄의 확산도 막았습니다. 온 땅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뜻도 이룹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변하지 않고 성취됩니다.
타이타닉호의 교훈
타이타닉호의 침몰 사건을 소개합니다. 제목은 “교만한 선장의 최후”입니다. 타이타닉 호 사건은 1912년 4월14일에 인류가 만든 최고의 초호화 유람선이 대서양 횡단 4일 만에 가라앉은 사건입니다. 106년 전 일입니다. 2,300명이 승선했었는데 1,514명이 희생당합니다. 700명만 구명정에 옮겨 타 살아남습니다. 당시 선장은 항해 전에 이미 대서양에 빙산이 떠다닌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선장은 “길이 269미터 폭28미터 높이 11층인 46,328톤급의 배가 과연 가라앉을 것인가?”생각하며 경고를 무시 합니다. 항해 중에도 6번이나 빙산에 대한 경고를 무선으로 연락했는데 항해사도 선장도 무시합니다. 항하사는 무선을 선장에게 전달하며 “ 전방에 빙산이 있다는 무선을 받았는데 어찌할까요? 설마 이 타이타닉호가 빙산 따위에 눈 깜작이나 하겠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선장은 한술 더 떠 “하나님이라도 감히 이 배를 어찌할 수 없을 걸세! 항해를 계속해!”하고 명령합니다. 이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최고속도(40Km/h)로 달리다가 빙산을 피하지 못하고 충돌합니다. 빙산에 배가 부딪혀 구멍이 나고 얼음 파편이 들어와도 사람들은 얼음으로 축구를 합니다. 어떤 분은 위스키에 기념으로 빙산 파편을 넣어 먹으려고 챙기기도 합니다. 배가 기울어 구명정에 올라타라고 해도 사람들은 작은 구명정보다는 가라앉는 고철 덩어리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타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70 명 정원의 구명정을 28 명만 태우고 내리기도 합니다.
배가 가라앉는 중에도 의연했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8명의 연주자들입니다. 이들은 “내주를 가까이 하게함은”이란 찬송을 연주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켰습니다. 배가 가라앉기 10분 전까지 연주를 계속 합니다. 악단 장은 하틀리라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는데 평소 가장 사랑했던 찬송가(새찬송338장)였답니다. 8 명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반면 어떤 한 사람은 여성과 아이들만 태울 수 있었던 구명정에 여장을 하고 몰래 탔다고 합니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 비난여론에 시달리다 스트레스로 10 년밖에 살지 못했다 합니다. 주석서의 결론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가? 그리고 사람들의 교만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초래케 하는가 하는 사실을 보여 주기에 충분한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다 속 저류와 같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사실은 온 우주를 창조하셨고 통치하고 지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입니다.(계19:16) 이 하나님은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계2:18)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은 없습니다.(신4:39)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셨으면 우리는 그분을 믿어야합니다.(눅2:11)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미래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별도로 마련하셨다 하시면 우리는 거기에서 살 준비를 해야 합니다.(벧후3:11, 계21:1) 이 땅에서 성읍과 바벨탑을 쌓고 천년만년 살려는 태도는 버려야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끝까지 버틸 때 심판하십니다. 마지막 심판은 불 심판을 말씀하십니다.(막9:49, 벧후3:10-12) 우리가 매사에 매순간에 하나님을 인정하고(전12:1)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시편119:105)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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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뭇별을 세어 보라(창세기15장)
다사다난(多事多難) 했던 한 해가 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올 해를 돌아보면 화를 많이 냈습니다. 화낸일로 밤참을 설치며 후회해도 쏟아낸 분은 주워 담지 못합니다. 아이들한테는 본의 아니게 헐크 아빠로 변했습니다. 아내에게도 상처 줄 때가 많았습니다. 내년에는 좀 더 신앙인격이 성숙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올해는 사회적으로 입에 거론하기도 싫을 정도로 바다에서 하늘에서 또 땅에서 사고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사회 안정망이 좀 더 잘 갖추어져서 내년에는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함께 교제하고 싶은 말씀의 주제는“우리는 어떻게 의인이 되었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부주제로는 “방패 되시고 상급되시는 하나님”이 어떤분이신가 알아봅니다. 말씀은 창세기 15:1~6절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환상 중에 직접 찾아 가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현재 아브라함은 신앙생활 10년 째 입니다. 그의 나이는 85세 입니다.
아브라함 조카 롯을 구하다.
14장에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나라와 나라가 연합을 맺었다가 배반하고 배반하자 전쟁을 일으키고 하는 복잡 다양한 동맹구도가 나옵니다.
제1다국적군은 4개국으로 이름과 왕은 시날(왕:아므라벨) 엘라살(왕:아리옥) 엘람(왕:그돌라오멜) 고임(왕:디달) 이었다.
제2다국적군은 5개국으로 이름과 왕은 소돔(왕:베라) 고모라(왕:비르사) 아드마(왕:시납) 스보임(왕:세메벨) 소알(왕:벨라) 이었습니다.제2다국적군이 속한 나라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속해 있었습니다.
제2다국적군이 속한 나라가 힘이 약했습니다. 제1다국적군이 속한 나라를 십이년 동안 조공을 바치며 섬겼습니다. 이들이 힘이 커지자 계약을 폐기하고 배반합니다. 제1다국적군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배반한 다음 해에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제1다국적국 대장인 엘람국 그돌라오멜은 제2다국적국을 치러 가면서 르바, 수스, 엠, 호리, 아말렉, 아모리 등 6개 족속을 통합합니다.제2다국적국이 이들과 연합전선을 펴지 못하도록 아예 싹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 제1다국적군은 제2다국적군이 진치고 있는 싯딤 골짜기까지 쳐들어갔습니다. 제2다국적군에게는 싯딤 골짜기가 역청과 구덩이가 많아 지형에 익숙하지 않아 불리한 조건임에도 대승을 거둡니다. 완패한 제2다국적군을 포로를 사로잡아 가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잡혀갔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질때 죄악의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여 떠나가자 아브라함은 서운하게 생각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조카 롯이 포로가 되어 목숨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아브라함은 사병 380명을 이끌고 단까지 쫓아가서 기습작전을 펼쳐 승리하였습니다.
적의 인원이 수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기록에는 80만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318대 80만! 이 대목에서 영화 “명랑”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섭섭하겠죠? 바다에는 12척의 배로 왜군 33 0척을 이긴 이순신 장군이 있다면 육지에서는 318대 80만이라는 아브라함의 승리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명랑에 이순신 장군 멘트를 날린다면 “신에게는 아직도 318명의 군사가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죠!
그런데 바로 이 아브라함의 전투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함께한 전투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얘를써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리품은 실오라기 또는 신발 끈 한 개도 취하지 않습니다. (창14:22-23)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브라함의 영적인 상태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대 승리 후 아브라함에게는 영적인 침체가 왔습니다. 잘 나갈 때, 뭔가 일을 이루었을 때 영적으로 조심해야 할 시기입니다. 마음이 느슨해졌을 때 사탄이 맹공을 퍼붓는 시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육 간에 힘들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방문합니다.
요즈음 같았으면 간단히 카톡을 보냈겠죠. “ 아브라함아 왜 그러느냐 힘을 내라! 하나님 보냄” 이렇게 문자를 쏘실 수도 있었겠죠? 아니면 천사를 대리인으로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발람 선지자를 깨우치시는 방법 같이 말하는 당나귀를 보내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방문한 것을 보면 사안이 시급했습니다. 아니면 정말 아브라함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시고자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직접 찾아 가신 하나님
직접 찾아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책망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10년이면 이제는 좀 성장해야지 계속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이냐?” 아니면 원칙론을 말씀하며 “신앙생활의 ABC! 신앙생활의 3박자” “말씀 읽기 기도하기 순종하기” “내가 그렇게 강조 했 건 만 꼴좋다.” 그러나 어떻게 하십니까? 1절 전반부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두려워 하지 말라” 합니다. 두려워 말라! 이 말씀은 하늘과 땅의 주인 인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제가 두려하는 분에게 “두려워 마십시오.” 했다면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한번 두려움이 밀려들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었을까요? 첫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전쟁사에 길이 남을 승리는 거두었지만 언제 연합군이 쳐들어와 목숨을 앗아갈지 몰랐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류 최대의 적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입니다. 나이 이십 대도 아니고 벌써 85살인데 자신의 DNA를 물려받은 자식 하나 없으니 불안했습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는 이유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아야할 이유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1절 하반부를 보십시오.“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말씀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 나야! 내가 있잖아!”입니다.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어 어떠한 환난이나 위험 가운데서도 보호해준다고 합니다. 80만의 적이 밀려 들어와도 다 막아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바로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축복의 근원 자체이신 하나님이 상급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신자에게 불화살을 날립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인생 끝날 것 같은 불안이 밀려옵니다. 더이상 성경말씀을 따라살며 손해 보기 싫다 내 맘대로 살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맘대로 살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방패 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손해를 다 배상해 주실 든든한 보험! 전액 보상이 아니라 수 천 수만 배 덤을 얹어서 보상해주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어서도 영원히 쭉 보상해 줍니다.
방패요 상급되시는 하나님
방패요 상급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방패이시라는 말씀은 영접한 듯합니다. 방패이신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브라함은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급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것도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을 더욱 반발하게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똑같은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합니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 이다.” 아브라함은 사실 자식 하나 바라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75세까지 자식 하나 없던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삼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정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났습니다. 10년이면 아브라함도 많이 참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나 저제나 사라의 배가 불러오기를 바랐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습니다. 제 계획대로 밀고 나가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계획
고대 근동 지방에는 노부부가 아이가 없을 경우 양자를 들이는 관습이 있습니다. 양자는 재산 상속을 약속 받습니다. 그 대가로 늙은 양부모를 부양해야 하고 죽었을 때 장래를 책임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관습에 따라 하나님의 약속은 다 포기하고 자기 집에서 길 리운 종을 양자로 삼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자기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이 한번 약속으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룹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노력 더하기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모든 노력을 차단하고 이미 태가 닫힌 사라의 몸을 통하여 구속역사를 성취합니다.
하늘의 뭇별을 세어보라
하나님은 방안에 드러누워 자기 생각으로 꽉 차 있는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갑니다. 우물 안 개구리 마냥 갇혀 있는 아브라함의 닫힌 세계의 문을 열고 광활한 하나님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자기 의로 똘똘 뭉쳐진 아브라함의 세계를 깨트리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세계로 이끌고 갑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억지로 끌고 나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에만 코를 박고 고민하지 말고 하늘을 우러러 보라고 명령합니다. 땅의 논리를 떠나 하늘의 논리로 세상을 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늘을 올려 다 보았습니다. 그날따라 밤하늘의 별은 초롱초롱 빛났습니다. 별들이 금방이라도 땅으로 쏟아 질듯합니다. 지금은 가로등 때문에 우리는 별 볼 일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외곽으로 벗어나도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재작년에 주일학교에서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별을 보러 갔습니다. 운동장에 자리를 펴고 누워 하늘에 별을 관찰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별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교사들이 더 흥미롭게 별을 관찰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평상에 누워 모깃불 피워놓고 자주 쏟아지는 별을 본 기억이 많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별헤는 밤”읽어드립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겨울이 지나고 내별에도 봄이 오면” 시를 통해 아브라함의 상황을 좀 더 생생하게 상상해 보시라 낭독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하늘의 뭇별을 세어 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명령에 따라 별을 세어 보았습니다. 별 하나 별둘 별 셋 ...별 백오십 별 백육십 별 천 별천 구백이십 둘 그런데 갑자기 어느 별부터 세기를 시작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세어 본분들은 알 수 있습니다. 세다 보면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헷갈립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세어 야합니다. 여러분 하늘의 뭇별을 과연 아브라함이 다 셀 수 있었겠습니까? 셀 수 없습니다.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의 이름은 안드로메다입니다. 우리은하(Our galaxy 또는 Milky galaxy라고도 함)라고 합니다. 우리 은하계에 태양계만 1000억 개입니다. 우주에는 우리 은하계와 같은 은하계가 또 1000억 개입니다. 숫자에 약하신 분들은 감이 안 오시죠? 그래서 제가 1억이 얼마나 큰 숫자인지 인터넷을 찾아봤습니다. 1에서부터 1억까지 숫자를 세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단1초도 쉬지 않고 세면 약7년 정도 걸린답니다. 잠자고,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일상적인 생활을 빼고 센다면 약20년이 걸립니다. 1억을 우습게 보시면 안 됩니다. 아주 큰 숫자입니다. 그런데 1000억에 또 1000억은 얼마나 많은 별이 있는지 아시겠죠? 하늘의 별을 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뭇별을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수많은 별을 반복하여 세면서 닫혔던 마음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에 감탄합니다. 마음이 열리자 아브라함의 입도 와아! 하고 열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어 네 자손도 이와 같으리라 선언합니다. 벌어진 아브라함의 입속으로 약속의 말씀이 쏙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달라진 것도 없습니다. 그의 몸에서 나오겠다던 자식은 지금부터 14년이 지난 후입니다. 언제 318명에게 당했던 주변 그돌라오멜 동맹국들이 아브라함을 치러올지 모릅니다. 상황은 어제나 오늘이나 조금도 나아진 바 없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었습니다. 의인으로 칭해 주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의인이 되려면 반드시 의로운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남대천 길을 걸어서 출근하다 보면 강 옆에 흉상이 하나 있습니다. 이 흉상은 1999년 1월 얼음이 녹아 있는 줄 모르고 들어가 놀다가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러 뛰어 들어 갔다가 돌아가신 택시 기사님 문성관씨를 기리는 동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을 의인이라고 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믿기만 했을 뿐인데 의인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바로 칭의(稱義)라고 합니다.
칭의
그러면 칭의(Justification)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면서 강의의 결론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4장에서는 상기 말씀으로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교리를 설명합니다. 제가 문성관씨의 예를 들었는데요. 의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의로운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의로운 행위가 없는데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 대신 의로운 행위를 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우리 대신 의로운 행위를 한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합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의롭다 칭해 줍니다. 의롭다 칭함 받은 자들은 영원한 심판에서 면제됩니다. 의롭다 칭함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방패이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게 됩니다. 상급이신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 됩니다.
올 한 해도 방패 되시고 상급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내년 한해도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
가를 지신 주님의 은혜가 넘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방패 되시고 상급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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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지파 탄생사ㅡ진흙탕 속에 핀 꽂(창세기30:1-24)
본문은 이스라엘 12지파 탄생 배경입니다. 당연히 좋은 배경 하에 등장할 것으로 기대하죠? 그러나 오늘 본문은 기대와 다릅니다. 4 명의 여인들 시기, 질투로 12지파가 탄생합니다.
12지파의 시작은 야곱의 탄생부터입니다. 야곱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택함을 받습니다.(창25:23)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와 짜고 염소 털 변장술을 이용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쟁취합니다.(창27:19-22) 축복을 빼앗긴 에서가 동생을 죽여 복수하고자 합니다.
야곱은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합니다. 라반은 야곱을 20년 동안 무려 10번을 속입니다.(창31:41)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는 야곱
그중에 백미는 결혼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써먹었던 변장술에 똑같이 당합니다. 결혼 첫날밤에 변장한 레아를 라헬로 착각합니다. 어떻게 사랑했던 라헬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7년을 몇칠같이 여길 정도로 사랑한 사랑입니다.
야곱이 속았다는 것은 라반이 그만큼 치밀하였다는 방증입니다. 그러면 라반이 야곱을 이렇게라도 하여 붙잡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야곱은 라반의 재산을 늘려 주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결혼 첫날밤 속은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더이상 속이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반성하였으리라 추측합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불철주야 성실하게 일합니다.(창31:38-40) 라반은 재산을 불릴 목적을 위해서 딸 레아를 수단으로 사용해도 괜찮다는 심산입니다. 아니 그의 욕심 때문에 딸의 불행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반이 야곱을 속이기 위해 레아를 어떻게 준비 시켰겠습니까? 라반은 레아의 얼굴 뿐 아니라 몸 전체를 철저히 가렸습니다. 신혼 방을 최대한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물 샐 틈이 아니고 빛 샐 틈 없이 차단합니다. 라반이 동네 큰잔치를 연 것을 보면(창29:21절) 야곱에게 독한 술을 먹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독한 술은 폴란드 산 보드카라고 합니다. 알코올 도수 96도라고 합니다. 화기 엄금입니다. 술 먹다 화상 입습니다. 라반은 또 레아에게 철저히 “라헬처럼 말하고 라헬처럼 행동하라!”고 시켰을 듯합니다. 심지어 연기학원 원장을 초빙해 고액 속성 연기 과외도 시켰을지 모릅니다.
레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야곱의 사랑은 오로지 동생 라헬을 향해 있는 줄 뻔히 알았습니다. 레아는 시력이 약했다고 나오는데요. 시력이 안 좋다기보다는 눈매가 부드러운 여인으로 보면 되겠습니다.(창29:17) 당시 미의 기준으로 레아는 전혀 먹히지 않는 외모입니다. 요즘이었다면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야곱의 눈에는 차지 못합니다. 아버지인 라반도 레아를 저평가 합니다. 레아를 타인에게 보내느니 야곱에게 보내는 편이 낫다 합니다.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식을 과대평가합니다. 첫 걸음마를 다른 아이보다 일주일만 빨리 떼도 “천재가 아닌가!”생각합니다. 돌 잔치 때 연필만 잡아도 의사, 판사, 교수 감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라반은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레아는 아비에게도 치이고, 야곱의 마음도 못 끌고, 동생 라헬과의 경쟁에서도 밀릴 수밖에 없는 비련의 여인입니다.
야곱과 라헬의 갈등
본문30장1절은 야곱과 라헬의 부부싸움으로 시작합니다. 라헬은 곱고 아리따웠습니다.(창29:17) 여성들은 10대부터 60대까지 좋아하는 남성상이 다 다릅니다. 남성은 다 똑같이 예쁜 여인을 좋아한답니다.
야곱과 라헬은 결혼 후 3년이 지났습니다.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은 유효기간이 18개월입니다. 최장 30개월이 마지노선입니다. 야곱 부부는 마지노선을 넘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라헬이 자식 4명씩이나 있는 언니를 시기합니다. 언니 레아는 이미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를 이미 낳은 상황입니다.(창29:31-35) 하나님이 경쟁에서 밀리는 레아의 심정을 헤아려주었습니다.
본문에 시기란 단어는 “얼굴에 붉은 핏발이 서릴 정도로 매우 흥분한 모습.”입니다. 라헬은 흥분의 화살을 야곱에게 돌립니다. 라헬은 “아들 낳게 하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합니다. 2절에 야곱도 분노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도 되는가? 임신 못하게 한 분이 하나님이신데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말인가?"합니다. 성경 기록이니까 점잖게 표현한 듯합니다. 험악한 톤으로 말했겠죠.
우리 교회 형제자매님들은 부부싸움도 일 년에 한번 미만으로 하는 잉꼬부부들 인 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일 년에 싸움을 한 번도 하지 않는 부부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문화재급 부부입니다.
라헬의 여종 빌하
3,4절에 라헬은 여종 빌하의 태를 빌어서 자식을 얻고자합니다. 당시는 자식이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였습니다. 자식이 없으면 사람들로 부터도 무시 받고 하나님이 저주했다고 여겼습니다. 자식의 많고 적음이 곧 세상이 자기를 평가해 주는 잣대입니다.
본문에서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란 표현은 양자를 삼는 다는 뜻입니다. 야곱도 “나는 라헬 당신밖에 없다.” “Only you!" 하며 좀 멋있어지면 안 되겠습니까? 그도 못이기는 척 빌하에게 갔습니다. 5-8절을 보면 이렇게 얻은 두 명의 아들이 단과 납달리 입니다. 두 사람 이름의 뜻을 주목해 주십시오. 단은 “내 억울함을 풀어주셨다.”는 뜻이고 납달리는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는 뜻입니다.
한 핏줄인 자매끼리 억울하면 얼마나 억울하고 크게 경쟁해 이기면 또 뭐하겠습니다. 4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요. 이 문제를 초등학생들에게 냈습니다. 한 학생은 사촌이 땅을 사면 “가본다!”로 답을 썼다고 합니다. 4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지 말고 가보아야겠죠. 가보고 축하해줘야죠? 2촌인 라헬은 안 가봤습니다. 배 아파합니다. 억울해하고 경쟁심으로 잠 못 이뤘습니다. 라헬은 사랑도 외모도 다 가진 여인입니다. 그러나 경쟁심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4명의 아들들
본문9절에 레아는 아들 4명을 이미 얻었습니다. 첫째 르우벤을 낳고 자기의 괴로움을 돌아보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29:32) 둘째 시므온을 낳고 사랑받지 못하는 자기의 심정을 헤아려주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29:33) 셋째 레위를 낳고는 남편과 연합할 희망을 가졌습니다.(창29:34) 마지막 유다를 낳고는 하나님을 찬송하기에 이릅니다.(창29:35)
그러나 이 마음이 양자를 품에 안은 동생을 보자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래서 자기도 같은 방법으로 아이를 얻는데 갓과 아셀 입니다. 이름은 복되고 기쁘다는 뜻입니다. 아이를 얻은 후 이름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이이 갖기 전에는 레아의 마음이 저주스럽고 슬펐다는 뜻으로 유추합니다.
레아와 라헬의 대립
본문30:14-21절은 레아와 라헬이 대립합니다. 밀 거둘 때에 레아의 첫아들 르우벤이 합환채를 엄마에게 선물합니다. 한자 뜻은 합할합(合) 기쁠환(歡) 나물채(菜)입니다.(아가7:13) 합환채는 여인이 아이를 갖는데 특별한 효험이 있다고 합니다. 잎은 우리나라 쑥갓 잎처럼 생겼고 뿌리는 감자처럼 생겼습니다. 밀 추수 때에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가져왔습니다. 밀 추수 때는 5월 초순인데 10월에서 4월까지가 우기(雨氣)입니다. 5월 초는 우기 때 충분한 수분을 먹고 식물들이 활발히 자라나는 시기입니다.
당시 르우벤의 나이는 6세로 추정합니다. 어린 르우벤의 눈에도 두 자매간의 경쟁을 알아차릴 정도로 심합니다. 가제는 게편이라고 르우벤도 주위에서 좋다고 하니 영문도 모르고 합환채를 구해 엄마에게 선물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라헬이 보았습니다.
본문14,15절에 라헬이 합환채를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레아는“남편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아들의 합환채까지 빼앗아간다.”며 언성을 높입니다. 남편까지 빼앗겼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상황을 확대합니다. 상처가 깊으면 별 의미 없는 타인의 말에도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라헬은 합환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야곱을 하룻밤 넘겨주기로 하고 기어코 합환채를 손에 넣습니다. 이렇게 하룻밤 사랑을 얻은 레아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까지 하루 종일 야곱을 기다립니다. 사실 남편에 대한 갑은 첫 부인인 자신이 아닙니까? 그러나 사랑에 밀려 어쩌다 을의 입장에 살아갑니다. 레아는 처량함을 넘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레아에게 태를 열다
17절을 보면 하나님은 레아의 닫혀 있던 태를 엽니다. 아들 2명을 주는데 이름은 잇사갈과 스불론이고 딸을 주는데 이름은 디나입니다. 그런데 레아의 남편에 대한 집념도 대단합니다. 스불론 이란 이름에는 “이제는 남편이 자기와 함께 살 것”이라는 희망을 담습니다.(창30:20절)
합환채를 놓고 언니와의 대결에서 실패한 라헬은 마음이 매우 낮아 진 것 같습니다. 22절을 보면 드디어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고 소원을 들어줍니다. 아이 못 낳는 부끄러움을 씻어줍니다. 하나님은 라헬을 끝까지 생각했고 그녀의 기도를 다 듣고 있었습니다. 라헬이 마음고생 끝에 얻은 아들이 그 유명한 요셉입니다. 요셉이란 이름의 뜻은 “또 다른 아들을 더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으로 본문 내용은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이 싸움에서 굳이 주인공을 뽑으라면 누구 같습니까? 라헬 같죠?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했고 뭇 남성들이 좋아할 외모를 가진 라헬입니다. 그러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레아가 주인공입니다. 성경은 라헬을 불신앙으로 슬피 우는 어머니의 표상으로 기록합니다.(렘31:15-16). 마2:18절에서 예수님의 탄생 후 헤롯의 시기로 2살 이하의 어린 생명이 모두 죽는 사건을 라헬이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에 비유한 내용도 있습니다.
12지파 계보
라헬
라헬의 이름의 뜻은 어린 암양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들에서 키우는 암소입니다. 라반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습니까? 자기 이름은 흰색입니다. 딸 이름을 들소라고 지었습니다. 또 레아의 히브리어 뜻은 “지쳤다.”란 뜻입니다. 딸 이름이 지쳤다가 뭡니까? 라반 흉보다가 지치겠습니다. 본문에서 약자는 들소의 여인 레아입니다. 레아는 인정받지 못했고, 사랑받지 못했고, 저평가 받았습니다. 이 레아가 구속사적 관점에서는 주인공입니다. 레아에게서 이스라엘의 제사장 레위 지파가 시작되었습니다. 레아에게서 이스라엘 왕손의 조상인 유다가 출생합니다. 이 유다 지파를 통해 메시아 예수님이 탄생합니다.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이윤추구가 가능합니다. 개인과 기업은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합니다. 이 과정에서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상처를 주고 받고 합니다. 야곱의 가계 스토리는 마치 현 세상의 축소판 같습니다. 하나님은 레아, 라헬, 빌하, 실바의 태를 닫기도 하고 열어 주기도 합니다. 야곱이 양과 염소를 얻도록 돌연변이를 일으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도와 주기도 합니다. 이들의 고통을 돌아 보아 주고 소원을 들어주고 위로도 줍니다. 이런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이스라엘 12지파가 탄생했습니다.
세상 속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외모 때문에 염려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당시 전혀 먹히지 않는 외모셨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흠모할만한 점이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갖은 멸시와 징벌을 당했습니다. 결국엔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했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 때문에 진흙탕 인생 우리들은 소망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 때문에 가장 위대한 복인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갈2:20을 마지막으로 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잉태한 자들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산다는 표현은 원어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보다는 우리의 믿음은 비록 약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간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죄와 허물과 실수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당신이 목적한 신 바대로 선한 길, 진리의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으므로 우리는 인기가 있든 없든, 소유가 많건 적건, 많이 배우던 적게 배우던, 혈통과 출신에 관계없이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뭘 못했다고 주눅들 필요 없고 뭔가를 잘했다고 자랑할 거리도 없습니다. 4여인의 경쟁 속에서도 이스라엘 12지파를 세운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하늘나라 가기까지 기어이 인도할 줄 믿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항상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드리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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