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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기독교정보

갈라디아서 말씀 나눔

by 명주(明珠) 2025. 10. 30.

바나바와는 함께 디도는 데리고 간 목적( 갈 2장1~9)

1. 갈라디아서를 쓴 배경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지방에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입니다. 갈리디아는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 같은 도시가 있는 큰 지역을 말합니다. 갈라디아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한 지역입니다. 바울이 떠난 뒤에 문제가 많이 생겼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으려고 갈라디아 서를 썼습니다. 바울을 1차 전도 여행자로 파송한 모교회가 어디죠?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안디옥은 최초 이방교회입니다. 여기서 타칭 그리도인이란 말이 생겼습니다. 우리도 직장이나 군대에서 너무 열심히 믿으면 비꼬는 투로 임목사, 정장로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 의미로 불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핍박 때 흩어진 성도들로 인하여 자생적으로 생긴 교회입니다. 교회가 커지자 예루살렘에서 바나바를 파송 합니다.

 

2. 교회와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과 성령님이다.

 

사도행전13장1절에 보면 안디옥교회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5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첫째가 바나바고 마지막이 사울입니다. 사울은 바울입니다. 이름순서는 어떤 순서로 썼을 까요? 가나다순, 알파벳 순 인가요? 저의 직장에는 명단 순서에 아주 민감 합니다. 실수로 후배 이름이 자기 위에 가있으면 항의 전화 받습니다. 밑에 이름이 있다고 숨을 못 쉬는 것도 아닌데 아주 민감합니다. 그래서 보통 가나다순, 직급 순으로 이름을 나열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헬라인들은 교회에 영향력을 얼마나 많이 미치는 순으로 이름을 적었습니다. 중요도 순으로 이름을 기록했다합니다. 그러면 안디옥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나바입니다. 다음 제일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사울입니다. 특히 사울 앞에는 “및”이란 단어가 붙습니다. 이것은 마지막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중요도가 미미하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그저 마지막 사람에게 묻어서 나온 다는 표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13장2절을 보면 1차 선교사로 바나바와 사울을 세웁니다. 성령님의 뜻으로 뽑힙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바나바가 빠지는 셈이됩니다. 중요한 사람이 빠지면 교회에는 어려움이 생기기 쉽습니다. 또 교회가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있으나 마나한 바울을 뽑았습니다. 그렇다면 선교역사 망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 온지 1년도 안된 초보를 보내고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교회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도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령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십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빠지면 교회가 망할 것 같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선교에 보내면 망칠 것 같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작년 올해 우리교회는 직장, 결혼, 군 입대 등으로 교회를 떠나간 분이 열손가락을 넘어갑니다. 염려와 걱정이 생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교훈을 참고하면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성령님께서 인도해 가십니다.

 

3. 유대에서 온 할례파 그리스도 인

 

행15장1,2절을 보겠습니다. “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본문은 1차 선교여행이 끝나고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디아 지역을 잠시 떠났을 때 문제가 발생한 사건을 기록합니다. 본문에서 이름의 순서를 한번 보겠습니다. 바나바가 먼저인가요? 바울이 먼저인가요? 바울이 계속 먼저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는 바나바와 바울은 비교조차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조건 바울이 먼저 나옵니다. 이제는 반대로 바나바 앞에 “및”이 붙습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잘 몰랐지만 이미 이방인의 사도로 예수님이 직접 택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그의 은사가 드러났습니다. 이 바울 때문에 선교역사는 결코 망하지 않았습니다. 성공적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유대로부터 내려온 형제들은 바리새파 유대인 개종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 행위인 할례를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미혹 받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성도들은 “유대로부터 온 사람들 얘기 들어보니 그런 거 같아, 일리가 있어.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거는 어쩐지 쉽더라 했어. 바울 그 양반 어쩐지 못미더워 보이더라고. 벌써 외모부터가 그래. 머리카락도 별로 없고, 매부리 코에다가. 어쩐지 좀 이상했어.” 하면서 넘어갔을 것입니다. 외모하고 진리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당시는 자체적으로 이 문제가 해결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판결 받을 곳은 본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밖에 없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람을 보내서 최종 판결을 받자고 했습니다.

 

4.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다

 

바로 이 사건을 배경으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14년 후에 다시 갔다고는 것은 14년 전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한번 갔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3년 정도 아라비아에 있다가 바나바의 중재로 예루살렘에 가 베드로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로부터 14년 후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바나바는 함께 갔다하고 디도는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아니 누구는 함께 가고, 누구는 데리고 갑니까? 차별하는 겁니까? 함께 갔다는 것은 당연히 함께 동역하기 위해서 갔습니다. 데려 갔다는 것은 디도가 원하든 원치 않던 그가 뭔가 특별히 감당해야할 일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억지로라도 데려가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3절에 나옵니다. “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방금 사도행전15장1,2절에서 예루살렘에 바리새파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구원의 조건이라 주장했다 했습니다. 디도는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님을 증명할 사람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디도는 이방인이었습니다. 할례를 안 받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증인이 디도였습니다.

 

5. 계시를 따르다.

 

2절을 보십시오. “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먼저 바울은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고 합니다. 계시를 따라 갔다는 것은 사람의 느낌을 따라, 감정을 따라, 인간적인 가치를 따라 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계시를 따라갈 때 결국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도 모두 계시를 따라 교회 지체가 되었습니다. 계시를 따라 섭리 가운데 된 것입니다. 계시를 따르지 않으면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계시를 따르는 삶, 말씀을 따르는 삶, 믿음을 따르는 삶을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본문에 유력하다는 것은 힘이나 세력이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유력한 자를 말하지 않고 예루살렘교회에서 유력한자를 말하는데 야고보, 베드로, 요한 같은 지도자를 말합니다. 사사로이 했다는 표현은 바울은 이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방 가운데서 일어난 복음 역사를 증거했다는 표현이 사사로이 했다는 뜻입니다.

 

6. 위로자 바나바

 

오늘 말씀 제목이 “함께, 데리고 갑시다.”입니다. 먼저 바울과 함께 갔던 바나바는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바나바는 본명입니까? 별명입니까? 별명입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바나바는 사도행전4장 36,37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입니다. 그가 얼마나 사람들을 위로를 잘했는지 위로의 아들이란 별명을 사도들이 붙였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때 재정이 가장 어려울 때 자기 밭을 팔아서 헌금한 사람입니다. 이름 앞에 바가 붙으면 누구누구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바나바는 나바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나바는 “예언하는자, 말하는자.”라는 뜻입니다. 바나바는 인간적 말로 위로 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초대 교회 가난한 성도들을 물질로 위로를 준 사람이요 또 말씀으로 위로 준 사람입니다. 또 바나바는 11년 동안 무명으로 지내던 바울을 위로하여 안디옥 교회로 데려온 인물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그 문제 많은 마가를 끝까지 감당한 인물입니다. 마가를 감당하려고 2차 선교여행 때는 바울과 큰 다툼도 하고 헤어지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바울도 마가를 인정합니다. 바울이 로마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차가운 감옥 벽에 등을 기대고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맞으며 자신을 위로해줄 사람으로 마가를 선택합니다. 마가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끝까지 감당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7. 특공대와 같았던 디도

 

이번에는 바울이 데리고 갔던 디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디도는 공경하다는 이름 뜻이 있습니다. 디도는 디도서1장 4절에 바울과의 관계가 나옵니다.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합니다. 우선 디도는 바울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었고, 영적으로 참 아들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들과 같은 사람이니 데리고 간다는 표현을 써도 되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면 디도가 사랑하는 참 아들이었으면 쉬운 일들을 맡겨야 하잖아요? 그런데 디도는 험지에만 투입합니다. 디도는 군대로 말하면 특공대 역할을 했습니다. 영적인 화재 진압군으로 쓰임받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교회 분쟁의 한 가운데로 디도가 투입됩니다. 디도가 예루살렘에서 꿔다 놓은 보리짝 마냥 가만 있었겠습니까? 할례파들을 설득하고 복음을 변호를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디도는 고린도교회 문제 해결사로 투입이 됩니다. (고후8:23 고후12:18) 고린도교회는 구체적으로 말씀 안드려도 문 제많은 교회임을 아실것입니다. 10대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디도를 보내서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또 디도는 디도서1장5절을 보면 어디에 남겨집니까? “그레데”라는 섬에 남겨집니다. 그레데는 지중해에 있는 섬입니다. 우리 제주도 보다 4배가 큰 섬입니다. 이곳 섬사람들은 기질 때문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어떤 문제인지는 디도서에 잘 나옵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 불순종, 가정을 무너뜨리는 사람들, 거짓말쟁이, 자기 배만 위하는 게으름 뱅이 등등으로 교회 문제를 묘사합니다. 디도는 바울이 여기에 남겨 두자 군말 없이 문제를 해결하고 장로들을 세우는 일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8. 하늘을 향해 가는 순탄한 순례여행을 하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여행의 묘미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명소라도 혼자가면 재미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좋은 사람 함께 가고 데리고 가야 여행의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우리 성도는 하늘을 향해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이 여행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바울의 함께 같던 바나바와 같고 디도와 같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이들은 위로의 사람이었고, 험한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행복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려면 함께 가지 말아야할 사람, 과감히 버리고 가야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 4~5절에 나옵니다.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서 조용히 엿보다가 자기들의 종으로 삼는 거짓형제들입니다. 거짓형제는 형제가 아닙니다. 이단입니다. 이단은 함께 가서도 안 되고 데리고 가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이단이 나는 이단입니다.”라고 공표하고 활동하지는 않습니다. 가만히, 기회를 엿보는 전략을 씁니다. 요즈음은 전략을 바꾸어 대놓고 신분을 드러내 놓고 한다고 합니다. 이단이 종 삼으면 2가지가 일어납니다. 가정 파괴와 교회 분열입니다. 그리고 전 재산을 헌납하게 합니다. 우리나라에 자칭 하나님의 수가 20명이 있답니다. 자칭 예수가 50명이랍니다. 500여개의 이단 단체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죽은 일도 일어납니다. 재림예수라고 했더 사람들이 뇌졸중, 심피어 폐렴으로 죽습니다. 그것도 여름에 폐렴으로 죽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본문에 한시도 복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시는 잠깐의 짧은 시간, 눈깜짝 할 시간입니다. 이단은 단 1초도 상종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9. 받은 사명이 다르므로 분명하게 선을 긋는 자세

 

함께 가고 데리고 가려면 분명하게 선을 긋는 자세 필요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우리가 잘 알듯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납니다. 강력한 빛가운데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눈이 3일 동안 멉니다. 그 이후에 이방인의 사도의 사명을 받습니다. 이 사명을 받기 전에 먼저 바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사도행전9장5절 “주여 누구시니이까?”입니다. 주님이 누구신지도 모른 체 일만하면 참 곤란합니다. 이러면 참 기쁨이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들은 유대인, 바울은 이방인 분명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남의 사명 터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싸울 일이 없습니다. 비교할 일도 없습니다. 각자 주님 앞에서 잘하면 되는 겁니다.

 

10. 이단을 경계하자

 

함께 가고 데리고 가려면 먼저 손 내미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9절입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 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방교회인 갈라디아의 문제를 본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가서 모든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계시받은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직통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목에 힘 꾀나 줄 수 있는 조건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해! 나는 직통계시자야! 나를 무시하지마! 그러다 큰코다쳐~” 이러면 이단 교주가 탄생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겸손히 예루살렘 본교회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또 문제가 있을 때마다 상의했습니다. 그의 선교사역 중 총4번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친교의 악수를 청했습니다. 먼저 손 내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를 죽여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힐링이 아니고 킬링이라고 합니다. 킬링할 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자기를 죽일수록 함께 가기 쉬운 사람이 됩니다. 자기가 살아 있으면 데리고 가기 곤란한 사람이 되고 걸림이 됩니다.

 

11. 사람을 세운 바울

 

결론적으로 바울은 어떻게 보면 일 중심 적인 사람같이 보였지만 아닙니다. 그는 바나바를 얻었고 디도와 디모데를 키우고 적재적소에 사람을 세운 사람입니다. 복음역사에 돈, 좋은 건물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환경을 바꾸고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우리도 이런 바울의 자세를 배워서 모두 함께 가고, 뒤 처지는 사람 없이 데리고 가는 한 해 되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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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자주 내려오지 맙시다(갈2:11-20)

1. 옛사람은 십자가에 달리고 새사람이 되다.

 

오늘은 결론부터 내려놓고 시작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2:20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나는 옛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된 나는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못 박힌 사건은 단회 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영원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육체 가운데 살기 때문에 옛사람의 기질이 자꾸 나타납니다. 이것을 저는 십자가에서 자주 내려온다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옛사람은 자기사랑, 자기애가 강한 사람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새사람은 이웃사랑, 이타적인 사랑으로 살아가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본받으면서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쉽지가 않습니다. 오늘은 바로 이 유명한 말씀의 배경이 된 사건을 다룹니다.

 

2. 우리는 한 식구

 

우리 가족관계를 말할 때 식구라고 합니다. 밥식(食), 입구(口)를 씁니다. 같은 집에서 한솥밥 먹는 입들을 말합니다. 동방파, 막가파 조직에 있는 분들은 “우리 한 식구 아이가!”라고도 합니다. 우리 명주로 교회 지체는 다 한 식구입니다. 그래서 식탁교제가 중요합니다. 워렌 버핏하고 점심 먹으려면 수억 원 내야하는 거 아시죠? 이런 논문이 있습니다. 밥을 한 주에 5번 같이 식사하는 집과 주에 한번 식사하는 집을 비교하여 우울증 발병률을 연구했습니다. 1번하는 집이 우울증이 거의 2배정도 잘 걸린답니다. 식탁은 자기사랑보다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리입니다. 알약 한 개로 세끼를 해결하는 때가 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좋을 까요? 안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일 애찬이 복음역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애찬 드실 때 다양한 분들과 함께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혼자 드시면 우울해집니다. 우리는 식구 아입니까? 오늘 본문은 밥 먹다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우리 속담에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오늘은 건드립니다. 그것도 까마득한 후배가 선배를 책망합니다.

 

3.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사건의 전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전 말을 보겠습니다. 11-13절을 읽겠습니다.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 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본문에서 외식은 바깥에 나가서 먹는 그 외식이 아닙니다. 겉을 꾸민다는 뜻입니다. 가면을 쓰고 연기한다는 뜻입니다. 게바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교회 수장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이며 예루살렘교회 최고 책임자였습니다. 안디옥은 최초의 이방교회였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 교회를 방문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는 500km 입니다. 성인남자가 한 달을 걸어가야 하는 먼 길입니다. 베드로가 이 먼 길을 온 거는 안디옥 교회가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잘된다는 교회는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는 베드로에게 식사 대접을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식사도중에 밥숟가락을 집어 던지고 후다닥 숨어버린 겁니다. 과연 숟가락을 던지기야 했겠습니까? 제각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니 밥에서 바퀴벌레라도 나왔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나온 적 있습니다. 결혼 전 서울에서 데이트 할 때 식당이었습니다. 국에 벌레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식당 주인에게 까칠하게 항의하지 못했습니다. 최대한 잘 보여야 하잖아요? 그래서 호들갑 떨지 않고 슬쩍 옆으로 밀어놓고 먹었습니다.

 

4. 베드로가 식사 자리에서 떠난 이유

 

베드로는 왜 이렇게 놀라서 숨었을까요?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같이 밥 먹던 바나바 다른 유대인들도 같이 36계를 했습니다. 야고보가 사람을 보냈다는데 진짠지 가짜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사도행전15징24절을 보면”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사칭하는 사기가 극성을 부렸던 것 같습니다. 사기는 1세기나 21세기나 계속됩니다. 종교적인 사기도 계속됩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전화로 카톡으로 확인도 못합니다. 베드로는 확인도 안 해보고 무조건 물러갔습니다. 파견된 유대인들의 눈이 두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함께 밥 먹은 사실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하면 비판받을 것이 두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답니다. 선민의식이 강하여 이방인을 개돼지 취급하고 이방인 집 마당도 안 밟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한상에서 먹는 걸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그게 생활화 되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영접하면서 다 무너졌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그 율법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던 겁니다. 옛사람이 소환된 겁니다. 십자가에 걸렸던 내가 잠시 내려온 것입니다. 유대인은 화장실에서 금“동” 눕니까? 다 똑같이 냄새납니다. 지도자 베드로가 일어나니 유대인들도 다 덩달아 일어났습니다. 지도자는 영향력이 큽니다. 위치에 따른 책임감도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많이 맡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십니다.

 

5. 바울의 책망을 사랑으로 받아 들인 베드로

 

그래서 까마득한 후배인 바울이 공개적으로 책망합니다. 조용히 화장실 뒤로 오라하여 “아니 베드로 형님 외이러십니까?” “이러시면 안 되죠?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하면서 조용히 책망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서 베드로의 지위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은 세워 줘야 하잖아요? 세상에도 의전이 있고 예우가 있습니다. 그거 다 무시하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겁니다. 아니 그렇게 했으면 그걸로 끝날 일입니다. 성경에 써 수천 년 동안 욕먹일 일 있습니까? 지금 2000년이 넘은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망신 줄일 있습니까? 베드로도 한 성격 합니다. 예수님 잡아 가는 군인에게 칼을 뽑아 말고의 귀까지 잘랐던 전적이 있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베드로 바울에게 화를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후서3장15절에 나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이 서신은 책망 받고 3년 정도 지나서 쓴 서신입니다. 이 원수 같은 바울이라 안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래 위도 모르는 형제 바울 안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사랑으로 책망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람이 칭찬도 중요하지만 진심어린 충고가 나를 키울 때가 많습니다.

 

저도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여동생 2명이고 장남이자 외아들로 컸습니다. 그러니 섬김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그 기질이 결혼하고 나타났 습니다. 밥을 먹는데 내 밥 내 숟가락만 가지고 먼저 먹었습니다. 저는 특히 배고프면 화가 나는 스타일이어서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충고가 날아왔습니다. 자기거만 먹지 말고 다른 사람 숟가락도 좀 놓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일로 내가 나도 모르게 이기심이 배어 있는 사람임을 발견했습니다.

 

6.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

 

그럼 바울이 왜 이렇게까지 화를 냈을까요? 그게 14-20절까지 통으로 연결됩니다. 본문 7절을 딱 4자로 줄이면 이신칭의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상당히 복잡하고 비슷한 말이 반복되는 것 같은데 딱 두 종류의 나만 구분하면 쉽습니다. 첫째는 16절에 율법의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육체가 나옵니다. 19절에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나옵니다. 16절과19절을 합하면 육체 안에 있는 나 옛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나는 20절에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두 번째 다른 종류의 나는 20절 중간에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로 나옵니다. 여기서의 나는 다른 나 새사람인 나입니다. 우리는 옛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아래 영원한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옛사람은 예수님과 연합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피의자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공소권 없음이 된 것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연약한 육체 가운데 살기 때문에 옛사람이 자꾸만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일이 생깁니다. 내려온다는 표현을 쓴다하여 구원을 받았다 못 받았다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안디옥 교회에서 밥 먹는 자리에서 바로 이 옛사람이 소환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예루살렘교회 수장이 왔는데 사람들이 떡 복기 한 접시, 감 밥 한 줄 딸랑 내어 놓았겠습니까? 중국 코스요리 나왔을 것입니다. 우리 어제 그제 2025년 첫 가정 집회 했습니다. 다과로만 하자고 8시로 옮겼는데, 한 번도 지켜지지 않은 듯합니다. 성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꾸만 음식 욕심이 늘어납니다. 안디옥 교회 무슨 요리로 대접했겠습니까? 500km를 걸어 온 이들에게 팔보채 나왔을 것입니다. 팔보채는 해삼, 오징어, 소라, 새우, 닭고기가 들어갑니다. 양장피 나왔을 것입니다. 양장피는 새우, 오징어, 돼지고기가 들어갑니다. 또 족발, 추어탕, 장어구이 다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물들 모두 율법에 부정한 동물입니다. 이방인하고 한 상에 앉은 것도 부정한데 부정한 코스 요리까지 먹었으니까 난리가 난 겁니다. 베드로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613개의 기본 율법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기본613개 조항에 세부세칙을 추가하여 수천가지의 율법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어떤 바리새인은 길가다 여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눈을 가리고 가다 전봇대에 이마를 박아서 피가 나기도 했답니다. 이걸 치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겼답니다. 이들은 이러면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을 자부심을 가지라고 준게 아입니다. 너희가 죄인임을 알고 두 손 두 발 들고 하나님께 나오라고 주었습니다. 율법은 자기 자신만 사랑하고 자기만 아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은 한마디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36계를 한 베드로를 보면 옛사람이 그만큼 끈질깁니다. 우리 성도는 그래서 날마다 옛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베드로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위로가 됩니다. 베드로도 넘어졌는데. 나도 넘어질 수 있고 남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넘어진 사람 너무 도끼눈 뜨고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7. 교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곳이다.

 

교회는 깊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실천되어야하는 곳입니다. 복음은 깊은 인간애가 바탕이 되는 겁니다. 교회도 내편 네 편 나누어지기 쉽습니다. 약자들을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호구조사를 많이 합니다. 학연, 지연, 혈연, 족보 따집니다. 그 사회 그 나라가 얼마나 좋으냐는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잘하는가에 달렸습니다. 따뜻한 인간애가 얼마나 있는가가 관건입니다. 18세기 영국은 인간 노예무역 때문에 세계 최강이 되었습니다. 노예무역이 국익의 30%를 차지했습니다. 바로 이 노예무역이 폐지를 위해 20년 동안 발로 뛴 사람이 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란 의원입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 인간을 상품처럼 사고팔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신앙 양심을 걸고 싸운 인물입니다. 오늘날 국익의 30%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사람들로 부터 생명의 위협을 많이 받았지만 결국 여론을 돌아서게 했고 1807년 2월 23일, 노예무역 폐지법 안이 통과되었습니다. 복음 정신, 복음을 가진 사람들의 양심은 국익보다 앞섭니다. 베드로는 이런 바로 복음의 핵심가치를 훼손한 셈인 것입니다.

 

8. 십자가에 달린 옛사람의 실체

 

우리 옛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베드로도 넘어지게 만드는가? 상고해 보겠습니다. 그러려면 에덴동산으로 가야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딱 한 가지 선악과는 금했습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 주인이 따로 계신다는 표식입니다. 에덴의 주인은 하나님이 시라는 표시였습니다. 사단의 유혹을 받은 인간이 선악과를 본 소감이 어떠했습니까? 창3장6절을 참고하면“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고 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나도 지혜롭게 되어 내가 에덴의 주인 노릇 한번 해려고 했습니다. 그 주체가 나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내가 지혜로워져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표현입니다. 우리 옛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영역을 확보하고, 자기를 견고히 하고자하는 강한 속성이 있습니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율법을 잘 지켜서 지혜롭고 의롭게 되고, 나의 영역을 확보하려고 한 것입니다. 율법으로 자기 사랑을 공고히 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민족적으로 유대감을 형성하여 이방인을 개돼지 취급하는 선민의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목적은 율법 앞에서 나는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두 손 두 발 들고 항복하라고 주었는데 반대로 갔습니다.

 

9. 인간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인 존재

 

모든 포유동물들이 태어나면 하나같이 자기 스스로 일어나 걸어서 어미의 젖을 뭅니다. 양, 송아지, 염소 다 제 발로 서서 엄마 젖을 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걸 못하는 동물이 있죠?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엄마가 아이에게 다가가 젖을 물려 주어야합니다. 스스로 기어서 젖을 물을 정도가 되면 젖을 떼야합니다. 아기는 엄마에게 젖 뿐 아니라 감탄과 칭찬과 사랑을 받습니다. 아이 키울 때 아이가 1주일 먼저 뒤집기만 해도 천재가 아닌가 착각하고 감탄합니다. 일주일만 빨리 걸어도 장차 손흥민처럼 되지 않나 착각합니다. 인간은 이렇게 부모의 칭찬과 감탄과 사랑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동물과 다르게 찬란한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못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감탄한다는 표현이 성경에 어려 곳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을 등지고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 없이도 잘살아 보겠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의로 내 자아를 실현하고, 자아의 영역을 확장하고, 자기 사랑을 극대화 하여 그 안에서 잘 먹고 잘살아 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10. 새사람의 삶의 방식-자기를 죽여 남을 살림

 

그러면 새사람은 어떤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하는 지보겠습니다. 마태복음27장42절에 잘 나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수님의 삶의 방식은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장차 하늘나라에 가면 모두 이런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겁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삶의 방식을 이 땅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끝까지 십자가에서 내려 와 자기를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전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하는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일을 하고도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내 몸을 튼튼히 하는데 썼습니다. 세상이 불행하고, 교회 공동체가 불행하고, 가정이 불행한 근본 이유는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거꾸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구원하고 남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옛 자아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걸려있는데, 자꾸만 내려오는 겁니다.

 

11. 옛자아가 살아 있는 신자의 모습

 

오늘 본문에 베드로, 바나바 도 순간적으로 십자가에 내려와서 이 사달이 난 것입니다. 우리 애완견, 애완 묘가 왜 그토록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합니까? 이들은 자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자아가 있어서 때마다 반기를 들고 양 펀치를 날리면 귀엽겠습니까? 원수가 따로 없겠죠?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야할 옛 자아가 내려와 활개 치는 교회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더럽다고 밥도 같이 못 먹겠다고 피하는 교회가 교회일 수 없습니다. 베드로, 바나바는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복음의 핵심 가치를 흔드는 일을 한 것입니다. 교회는 옛 사람, 옛 자아는 십자가에 걸어놓고 그리스도만 돌아다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돌아다니지 않고 아직도 자기애가 강한 까칠 남, 까칠 여가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까칠 남 까칠 여는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그리스도 만 활개 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옛사람이 살아있는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가 사회생활 하면서도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생활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혀지면 손해 볼 것 같으니 그리스인임을 감추기도 합니다. 성경책을 신문지에 고이 싸서 다니기도 합니다. 미신도 남아있기 쉽습니다. 믿고 나서도 시험 당일은 미역국은 절대 안 먹습니다. 미끄러 질까봐 걱정되어서 입니다. 빨간색으로 이름을 안 씁니다. 문지방 위에는 올라서지 않습니다. 문지방 밟으면 복이 나간답니다. 그리고 문지방 귀신이 노한답니다. 믿음 결혼에도 궁합을 봅니다. 결혼 날도 손 없는 날로 잡습니다.

 

12. 사람은 악보다 선 때문에 악해 질 수 있다.

 

쟈크엘륄 신학자는 사람이 악 때문에 악 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 때문에 악해진다고 했답니다. 그 예로 오펜하이머란 사람을 소개합니다. 오펜하이머는 핵 프로제트를 성공시킨 사람입니다. 그는 핵무기를 만든 목적이 히틀러라는 악인을 제거하고자 만들었답니다. 근데 히틀러는 안 죽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이 떨어져 민간인 희생자만 21만 명 발생했습니다. 이중 한국인도 2만 명이나 된답니다. 선한 목적으로 개발된 핵무기가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악한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오펜하이머는 평생 이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자기 손에 항상 피가 묻어 있는 것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평생 원자 폭탄 반대 또 수소 폭탄 반대 운동을 하며 살았답니다. 그런데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 세계가 핵무기로 무장했습니다. 세계적으로 15,000개다 있고 이중 1% 터져도 지구는 멸망합니다. 아무리 선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그것을 자아실현, 자아 확장, 확고한 자기 영역 구축으로 쓰면 악이 됩니다. 아마 요즈음 유행하는 AI기술도 핵무기처럼 인류에게 치명적인 무기로 바뀔 수도 있는 것입니다.

 

13. 교회일로 자기의가 생기면 남을 정죄하기 쉽다.

 

우리도 선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면 남을 정죄하기 쉽습니다. 작년에 성경통독 2번 한분이, 성경 한 번도 통독 하지 못한 사람은 성도도 아니야 하며 정죄할 수 있습니다. 이러면 통독 2번 안하니 못 한 겁니다. 1년 54주 예배 다 참석한 분이 예배를 빠지는 성도가 성도야 하며 정죄하기 쉽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자기의가 되면 반드시 남을 정죄하는 쪽으로 작용합니다. 자기의의 빼지들을 많이 달고 다니는 사람일수록 까칠 성도, 헐크성도가 되기 쉽습니다. 올해는 우리가 십자가에서 자주 내려오지 말고 옛 자아는 걸어놓고 그리스도로만으로 살아가는 한해가 되길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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