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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기독교정보

마가복음 말씀 나눔

by 명주(明珠) 2025. 10. 30.

제5의 힘(마가복음2:1-12)

자연에 존재하는 4가지 힘

자연에 존재하는 힘은 4가지로 분류합니다. 중력, 전자기력, 핵력, 약력입니다. 중력은 잘 아시죠? 전자기력은 이 힘 때문에 스마트폰 잘 쓰고 있습니다. 핵력은 원자폭탄 생각하십시오. 약력을 사람 경력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약하게 작용하는 힘입니다. 원자핵 내에서 작용하는 힘입니다.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는 과정을 전문용어로 베타 붕괴라고 합니다. 이 때 상호 작용하는 힘입니다. 오늘 제목을 제5의 힘으로 한 것은 이 4가지 힘 이외의 어떤 힘을 소개하려고합니다. 이 힘은 초자연적인 힘, 영적인 세계에 작용하는 힘입니다. 그렇다고 숟가락을 엿가락처럼 휘게 하는 초능력, 염력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소문을 듣다

1절을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어봅니다.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본문에 수일 후 AD27년경입니다. 가버나움은 지금 팔레스타인 북쪽 지역입니다. 가버나움이란 지명의 뜻은 “위로의 집”이란 뜻입니다. 예수님 수일 후에 다시 여기에 들갔습니다. 그럼 수일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하면 앞장을 참고합니다. 가르치는 일을 주로 합니다. 사람을 사로잡은 악한 영들을 쫒아냅니다. 그리고 병을 고칩니다. 마지막으로 고친 병이 나병환자입니다. 나병도 불치병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고치고 나서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라 당부합니다. 그런데 병자는 말 안 듣고 소문을 퍼트립니다. 예수님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국으로 퍼집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군중들을 피했다가 다시 가버나움에 들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일이 주목적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대형종합병원을 차리고 돈을 쓸어 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 계신 곳은 어디입니까? 한 집입니다. 대형체육관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집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임

이 집에 얼마나 사람이 많이 모였을까요? 2절을 계속 보십시오.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집안은 물론 꽉 찼으며 문 앞까지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아마도 키 작은 사람은 까치발을 했고, 키 큰사람은 기린목도 뺐습니다. 푸시맨도 있었습니다. 서울지하철 출근시간에 한명이라도 객차에 더 밀어 넣으려고 푸쉬맨 고용하지 않습니까? 번호표 제도 있었으면 수백 번까지 밀렸을 정도로 많이 모였습니다. 보통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으면 군중의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무엇을 합니까? 그 힘을 이용합니다. 유투브를 시작하여 좋아요 구독 조회수 늘려 돈을 법니다. 아니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대권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기를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군중들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도를 말합니다. 돈 잘 버는 비법, 핵 인싸가 되는 법 처세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도는 헬라어 원어로 ”로고스“입니다. ”진리, 말씀,”이란 뜻입니다. 도는 하나님 나라, 구원의 길, 천국, 지옥, 미래의 세계 영적인 세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도를 가르치다

도를 가르치는 도중에 이상한 일이 생기죠? 3,4절을 보십시오.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진지하게 강의하고 있는데 갑자기 지붕에 속된 말로 빵꾸가 뚫렸습니다. 그러더니 중풍병자가 달려 내려옵니다. 콘크리트 지붕을 어떻게 빵꾸 냈냐구요? 당시 지붕은 대들보에 나무를 걸치고 흙과 짚으로 덥어서 평평하게 만들었습니다. 빵구 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일은 정말 황당한 일입니다. 줄서서 기다렸던 사람들에게 비난이 쏟아졌급니다. “거 좀 신사적으로 합시다.” 집주인 입장은 어떠했겠습니까? 경찰 부르고 싶었습니다. 제가 이들의 죄를 오늘날 법으로 따져봤습니다. 5가지 죄목이 나옵니다. 주거침입 죄, 새치기 죄, 재물손괴 죄, 예배방해죄, 환경오염 죄입니다. 여러분 새치기 하지 마십시오. 경범죄로 처벌받습니다. 예배 방해죄도 있습니다. 형법 제158조에 보면 “설교를 방해한 자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로 나옵니다.

죄사한을 먼저 선포하신 예수님

계속 5절을 봅니다.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 5가지 죄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보이는 건가요? 추상명사입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볼 수 없는 마음 중심을 봅니다.

본문에 메고 온 4명은 병자의 친구였습니다. 4명의 친구 사랑 대단합니다. 요즈음 남에게 관심 없는 시대입니다. 무정한 시대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 나왔던 해외골프여행 남자 사건 있습니다. 그가 택시타고 공항 가다가 택시 기사가 갑자기 심장마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앞 차를 들이박고 멈춥니다. 옆에 탔던 남자가 차키 뽑아서 내리면서 전화합니다. 그런데 119부르지 않고 다른 택시 불렀습니다. 트렁크 열고 골프가방 챙겨 떠나버렸습니다. 응급처지가 늦은 택시기사는 심장 마비로 죽었습니다. 이 장면이 CCTV에 찍혀서 공분을 샀습니다. 2018년 동계 올림픽에서 팀 추월 경기 때 있었던 일 기억하십니까? 3명이 동시에 들어와야 하는데 한명의 동료를 버려두고 둘만 들어와서 논란을 빚었습니다. 오늘날 스피드 시대로 다들 바쁩니다. 청년들도 바쁩니다. 자기코가 석자입니다. 취업준비, 결혼준비, 할 일이 많습니다. 이를 볼 때 본문의 4명의 친구들은 남다른 사람들입니다. 또 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예수님이 있는 집까지 메고 왔지만 집에 들어갈 틈이 없으면 보통은 돌아갑니다. “오늘만 날이냐? 내일의 태양은 또 뜬다. 돌아가라는 운명인가 보다?” 이렇게 말하며 포기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들어 갈 틈을 만들었습니다. 친구를 살리고자하는 뜨거운 사랑, 열정, 예수님께만 데려가면 고치리라는 믿음이 컸습니다.

 

중풍병자의 믿음도 생각해 봅니다. 병을 오래 앓았으면 몰골이 말이 아니었겠죠? 냄새도 납니다. 그는 자기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기 싫었습니다. 특히 남자들이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래서 여자들보다 평균 5년 일 찍 죽습니다. 남자들은 낯선 곳 가면 절대 길을 묻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모양 빠지는 거 싫어하고, 가오가 구겨지는 거 싫어해서입니다. 병자의 자존심도 강합니다. 본문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오는 일은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는 병자의 자존심, 남자의 모양 다 버렸습니다. 신사적인 태도 다 버렸습니다. 그도 예수님께만 나아가면 건강해 지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4명의 친구는 빵꾸 뚫는 믿음으로 병자는 모든 견을 견디는 무릎 쓰는 믿음입니다. 우리도 빵꾸 뚫는 믿음, 무릎 쓰는 믿음 가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중풍병자를 소자로 불러주심

예수님은 무릎 쓴 중풍병자를 어떻게 불러줍니까? “작은 자야” 하고 부릅니다. 무시하는 말 아닙니다. 번역하면 “MY SON! 나의 아들아!”하는 뉘앙스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따뜻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중풍병자는 지금까지 자기를 이렇게 다정스럽게 불러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친구에게 들려 온 것을 보면 가족도 외면했습니다. 만약 쓰러지기 전에 약혼녀가 있었다면 이미 옛날에 신발 거꾸로 신었습니다. 이런 그를 예수님은 사랑하는 아들로 받아 주었습니다.

중풍병자를 아들로 영접해 준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 다음엔 병을 고쳐 주셔야 순서가 맞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라 하십니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합니다. 중풍병자 오늘 예수님과 초면입니다. 만남의 방식이 좀 기상천외 했지만 초면입니다. 예수님께 죄 지을 기회도 없었습니다. 욕 한번 한적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피해 당사자처럼 말씀하였고 그 피해에 대한 벌을 내리기 보다는 용서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느끼시는 죄의 개념이 우리와 다름을 유추합니다. 예수님의 죄의 기준은 높습니다. 도덕적인 죄, 윤리적인 죄, 실정법을 어긴 죄도 죄지만 마음속에 악한 생각 자체도 죄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불신의 죄도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원죄라 합니다.

서기관들의 고소

그러면 본문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봅니다. 본문6-7절을 보십시오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여기서 새로운 무리가 등장합니다.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은 당시 기득권층으로 예수님을 항상 죽이려는 원수역할을 합니다. 중풍병자를 어찌하든지 살리려고 했던 4명의 친구와 비교하면 서기관의 가슴은 차가운 사람들입니다. 중풍병은 몸이 마비된 자이지만 서기관은 마음과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 죄로 몰려고 마음만 먹었습니다. 당시는 그 자리에서 돌로 치는 즉결 심판도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이번에도 그들 의 악한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봤습니다.

예수님의 질문

8,9절을 계속 보십시오.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9. 중풍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은 이들 마음속의 소리를 들으시고 만천하에 공개합니다. 아마 서기관들 뜨끔했습니다.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오리발 내밀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자칫 돌에 맞아 죽을 급박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질문을 합니다. 쉬운가? 어려운가 OX문제를 내십니다. 인간 편에서는 둘 다 어렵고 예수님 입장에서는 둘 다 쉽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본다면 병고침이 쉽습니다. 눈에 보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 중풍병자 용서되었습니까?”하며 확인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면서 죽음이 왔습니다. 그 죽음의 한 증상이 바로 병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병고침의 효과보다 죄문제라는 본질적인 문제해결이 우선입니다 “뭣이 중헌지” 아시겠죠?

일어나 걸어가라

본문 10-12절을 보십시오. 10.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중풍병이 단번에 나았습니다. 예수님 복잡한 뇌수술 집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말씀 한마디 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올 때는 4명이 들고 왔지만 갈 때는 혼자 당당하게 걸어가게 합니다. 평생 누워 살았으면 재활훈련 해야 제대로 걷습니다. 우리 다리 근육 하나만 파열되어도 4개월은 재활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명령하자마자 일어나 바로 중심잡고 걸었습니다. 아니 뛰어갔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은 자연의 4가지 힘의 법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일입니다. 이 4가지 자연 법칙을 위배하려면 제5의 힘, 초자연적인 힘이 가해져야합니다. 의사가 아무리 유능해도 무엇을 창조해 내지는 못합니다. 그저 우리 몸이 스스로 치유되는 것을 도울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삐쩍 마른 병자의 팔과 다리에 새살이 나게 합니다. 우리 뇌 속에는 1000억 개 뉴런, 100조개 시냅스가 있습니다. 이 조직은 전기신호와 화학신경 물질을 통하여 움직입니다. 예수님은 이 전기신호와 화학물질을 창조하셔서 중풍병자의 막힌 뇌를 뚫었습니다.

무리들의 반응

본문에 10절 마지막 구절은 목격자들의 반응입니다. 고친 것은 예수님인데 영광은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목격할 때 이런 반응 보입니다. 구약에 구원자가 왔을 때 알아 볼 수 있는 특징이 예언했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불치병치유입니다. 문둥병, 중풍 병을 고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 영접하고 영광돌립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러 왔습니다. 그 방법은 자신이 죄인 대신 벌을 받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갚을 빚을 대신 갚아주었습니다. 이 방식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이 십자에 죽고 부활 승천한 일입니다. 이 일은 2000년 전에 단 한번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과거의 사건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현재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바로 그 제5의 힘, 초자연적인 힘이 우리와 상호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현재적으로 부활한 예수님의 영이 우리의 죽은 영을 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힘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제가 처음에 성경이 사실이란 고고학적인 근거를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의 성은 성스러울 성이고 경은 그 내용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할 때 경자를 붙입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보고 만지고 느껴서 믿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권위를 통하여 믿습니다. 우리가 조선시대를 가 보고 믿지 않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책의 권위를 인정하여 믿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얻고 또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개인 간증

저는 1986년 가을 대학 2학년 때 믿게되었습니다. 저의 전공은 물리학과입니다. 그래서 진화론과 유물론을 믿었습니다. 그러다 기독교 동아리에서 봉사활동을 나갔습니다. 땅콩을 작은 봉지에 싸서 사람들에게 팔아 이익금으로 고아원, 양로원 등 불우이웃돕기를 합니다. 저는 낯을 많이 가리는 형입니다. 그래서 팔러 나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런데 남자의 자존심 때문에, 모양 빠질까 봐, 거의 끌려가다 시피 나갔습니다. 저 한 박스를 언제 다 파나 했는데 의외로 1-2시간 만에 다 팔렸습니다. 원가보다 10배는 더 받았는데 잘 사주었습니다. 제가 맡은 구역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는데 오히려 더 잘 사줬습니다. 저는 이 전에 창세기 1장27절 말씀을 공부하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내면에 하나님의 성품을 심어 놓았다는 구절입니다. 땅콩 사건은 이 성경구절이 정말 사실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절대선하며 인격을 가진 분입니다. 저는 그전에는 인간을 그렇게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하여 인간의 성품 속 한 구석에는 선한 성품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품을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성경말씀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믿음을 갖게 되자 나를 만드시고 나를 구원하려고 이미 십가가의 일을 완성하셨고 또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제5의 힘,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큰 감동과 기쁨으로 다가 왔습니다. 중풍병자가 누워만 살다가 뛰어가 보십시오. 세상이 달라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저도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경험 합니다. 여러분도 모두 이런 경험 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예배방해죄 짓지 않으시고 경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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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질병,  육체의 질병(마가복음2:1-12)

1. 서론

 

마가복음의 저자는 마가입니다. 마가는 큰 망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름을 쓰지는 않습니다. 임 망치, 최 망치하지 않습니다. 조폭느낌이 나는 이름인데 유대인은 좋은 의미로 많이 씁니다. BC167-164년에 일어난 유대 민족 독립운동을 주도한 맥카피 혁명의 주도자도 같은 이름입니다. 마가복음은 AD65에 기록했습니다. 오늘은 주일학생도 잘 아는 중풍 병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한 사건입니다. 성경에는 중풍 병자가 많이 나옵니다. 중풍 병자의 영적인 의미는 율법이라는 틀에 갇혀 꼼짝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무기력한 세상 사람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2. 왜 예수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이는가?

 

오늘 본문은 내용이 스릴이 있고 스펙터클합니다. 본문 1,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예수님 소문 듣고 사람이 많이 모였습니다. 사자숙어로 인산인해(人山人海)라 합니다. 사람이 산처럼 쌓이고 사람으로 바다를 이뤘습니다. 왜 예수님께 사람이 많이 모일까요? 저는 1년이 가도 몇 사람 찾아오지 않습니다. 예수님 대통령과 같은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대통령은 스케줄을 5분 단위로 짜야 할 정도로 사람이 옵니다. 예수님 돈도 많은 분 아닙니다. 갑부 빌 게이츠도 4-5분 단위로 스케줄을 짤 정도입니다. 권력도 없고, 돈도 없는데 왜 예수님에게 사람이 많이 모입니까? 왜 사람들이 자석에 끌리듯 예수님께 가려고 합니까? 심지어 예수님에게 여인이 향유를 붓고 발을 씻기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이러고 싶은 분이셨습니다. 우리 이러고 싶은 분 주변에 있습니까? 막 태어난 아기는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너무 사랑스러워 입으로 발에 뽀뽀도 합니다. 예수님 이러고 싶은 분이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없지만 이럴만한 인격과 그릇이 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 가면 인생에 해답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으면 그 힘을 이용하려 합니다. 군중의 힘을 믿고 출마를 합니다. 총선에 나가 국회의원을 하고, 대선에 나가 대통령에 도전합니다. 아니면 인기를 이용해 유튜브를 시작합니다. '좋아요'와 ‘구독’을 요청하여 수입을 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힘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도를 아십니까?”하고 길다가 묻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 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길, 진리의 길, 구원의 길,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 돈 잘 버는 비법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핵 인싸가 되는 법, 처세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도는 헬라어 원어로 ”로고스“입니다. “진리, 말씀,”이란 뜻입니다. 하여간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도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3. 지붕을 뚫은 친구들의 죄목

 

예수님 한참 도를 가르치는 도중에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3~5절을 보십시오. “3. 사람들이 한 중풍 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서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남의 집 지붕을 뚫고 병자를 달아 내린 사건입니다. 이들의 행동은 용감한 시민상을 줘야 합니까? 상식적으로는 얌체 같은 행동입니다. 이들이 오늘날 실정법을 적용하면 5가지 죄목이 나옵니다. 주거침입죄, 새치기 죄, 재물손괴죄, 예배방해 죄, 환경오염 죄입니다. 여러분 새치기하지 마십시오. 경범죄로 처벌받습니다. 예배 방해죄도 있습니다. 형법 제158조에 보면 “설교를 방해한 자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나옵니다. 여담입니다만 제가 어떤 강연장에서 이런 분 봤습니다. 강연 내용이 마음에 안 들었나 봅니다. 그럼 끝나고 질문하고 반론을 제기하면 됩니다. 이분이 강연 중간에 강단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자기 한쪽 신발을 벗어서 강연자에게 던지면서 막 뭐라 하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저의 오늘 설교가 약간 지루하더라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3년 이하 징역, 500만 원 이하 벌금 기억해 주시고 조금만 참으시기를 바랍니다. 신발 벗어 봤자 안좋은 향기만 납니다.

 

4. 아들로 영접 해 주시는 예수님

 

지붕에 큰 구멍이 뚫리며, 흙이 떨어지고, 먼지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시체 같은 병자가 달려 내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놀라서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새치기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분위기는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을 것입니다. 집주인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그야말로 112에 신고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이 집이 신혼 집 이었으면 어떠했겠습니까? 비새는 집에서 신혼살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3년 이하 징역과 5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렸습니까? 아닙니다.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작은자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작은자는 영어로 “My son!”“나의 아들아!”라는 뉘앙스가 있답니다. 이 호칭은 아버지가 아들을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따뜻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겉모습보다 속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시고 알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서로 속마음을 몰라주어 얼마나 많은 오해와 갈등이 생깁니까? 예수님은 마음을 읽는 분이십니다.

 

5. 영적인 질병과 육체의 질병 무엇이 더 중요한가?

 

그런데 그 다음이 이상합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줘야 합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먼저 선포하십니다. 중풍병자에게 시급한 일은 병 고침입니다. 중풍병자 오늘 예수님 처음 만났습니다. 처음 본 사람에게 예수님은 너의 죄를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중풍 병자에게 손해를 입은 적도 없었는데 대단한 손해를 입은 당사자처럼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둘 중 하나입니다. 정신이 이상한 분이시거나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입니다. 모든 인류는 이 선의 기준에 맞게 살아야 하고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증거합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고 죽음의 증상들이 병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는 중풍병자는 병고침 보다 더 근원적인 죄문제 해결이 시급했습니다.

 

6.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야만 하는 이유

 

예수님은 바로 이렇게 죄사함을 선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이 예수님은 다시 이 땅에 오실 예정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는 4천 년의 역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이후에 2년 여년의 역사가 흘러갔습니다. 올해가 벌써 2024년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야 했고, 하나님은 이렇게 6천 년 여년이라는 긴 서사가 필요했을까요? 예수님이 왜 오셔야 했는가 많은 신학적인 해석이 있지만 이런 측면으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만 우리에게 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초등학교를 다른 친구들보다 1년 일찍 들어갔습니다. 저는 한글을 제대로 쓸 줄 몰라서 어머니가 제 연필 잡은 손을 같이 잡고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머니가 한글은 모르는 분인데 저에게 한글을 가르쳐 줄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사랑이 있으니 우리에게 사랑을 넣어 주어 사랑할 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성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에게 창조 능력을 주어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 편에서 죄인처럼 되어 죽어보신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경험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경험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를 우리에게 주시는 방법은 직접 경험이 아닌 믿음을 통하여 입니다. 예수님을 믿음 것으로만죄를 위해 죽고 부활한 경험을 우리에게 넣어 주시고 새로운 영적 생명을 주시는 방식이 바로 구원역사입니다. 그러면 왜 6천여 년의 역사가 필요하셨는가? 이것은 하나님 그만큼 큰 신분이시고. 기독교가 그만큼 단순하지 않다고밖에 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우리 역사 속 시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년을 하루 같이 여기십니다.

 

7. 점점 메말라 가는 사회에 귀감이 되는 중풍병자의 친구들

 

본문에서 우리는 4명의 친구에게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중풍병 친구를 고치려 할까요? 병자 친구가 돈을 많이 꾸어서 고쳐서 빚 받으려고 이렇게 애를 썼을까요? 중풍병자에 대한 따뜻한 인간애입니다. 요즈음 무정한 시대입니다. 얼마 전에 이케아란 설문조사 기관에서 발표한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38개국이 설문에 참여했습니다. 첫째 “집에서 홀로 있을 때 즐거움을 느낀다.”에 한국인이 40%가 좋다고 답했습니다. 38개국 중 1등을 했습니다. 또 “식구들과 함께 웃는 시간이 즐겁다.”란 설문에 14%만 긍정 답변을 했습니다. 이 부분은 꼴찌입니다. “집에서 자녀와 손주를 키우는 게 즐겁다.”란 항목의 답변은 우리나라는 8%였습니다. 평균이 22%였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붕괴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주는 기사여서 인용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개인주의 성향이 미국과 유럽보다 더하다고 합니다. 이런 우리 사회를 파편화된 사회, 나노 사회라고 보도를 했습니다. 이들 4명의 친구는 나노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4명의 친구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예수님이 있는 집까지 메고 왔지만, 집에 들어갈 틈이 없으면 그냥 돌아가기 쉬웠습니다. “오늘만 날이냐? 내일의 태양은 또 뜬다. 하나님은 환경으로 말씀하신다.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싸인 인가 보다?”하며 포기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믿음으로 지붕으로 올라가 구멍을 뚫었습니다. 친구를 살리고자 하는 뜨거운 사랑은 겨울한파도 녹일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만 데려가면 고치리라는 믿음 우리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 서기관도 도와야 할 대상으로 보신 예수님

 

본문6-7절부터는 이 훈훈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걸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단지 마음만 먹었는데 예수님은 이들 마음속까지 다 들여다보고 선제 대응을 하십니다.

 

8-10절을 계속 보십시오.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9. 중풍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예수님은 이들 마음속의 소리를 들으시고 만천하에 공개하십니다. 이어 공개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병을 고침과 죄사함 어떤 것이 쉬운지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 입장에서 둘 다 쉽습니다. 둘 다 쉬운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쉽냐는 질문입니다. 우리 사람입장에서는 둘 다 어렵습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병을 고침은 눈으로 보이는 기적적인 일입니다. 눈에 보이냐 안보이냐는 기준에서는 죄를 사함이 쉽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첫째 병의 원인이 죄임을 인식시키려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와 병을 연관시키고자하는 의도가 있으십니다. 육체의 질병보다는 영적인 질명이 더 중하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서기관을 돕고자 하는 마음도 있으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에 매여 “사람을 어찌하여!”라고 하며 늘 남을 판단하고, 누군가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 쉬운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도 남을 판단하는 마음을 접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예수님 자체에 관심을 두도록 유도하셨습니다.

 

9.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다

 

본문 11-12절을 보십시오.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은 중풍병을 단번에 낫게 해 주심으로 당신이 죄사함을 선포할 권세가 있음을 입증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심을 입증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중풍병자는 단번에 걸었습니다. 평생 누워 살았으면 1년은 재활훈련 해야 정상입니다. 차츰차츰 한 걸음 한 걸음 떼며 점진적으로 회복돼야 합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예수님이 명령하자마자 일어나 바로 중심 잡고 걸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첫째 우리의 구원도 단 한번으로 끝난다는 메시지입니다. 단 한 번 믿으면 영 단번 모든 죄가 용서됩니다. 구원은 일생 살다 죽어봐야 아는 게 아닙니다. 구원 점진적이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중풍병자가 어쩌다 꼼수로 나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힘이 작용하여 고쳐졌습니다. 의사가 아무리 유능하여도 무엇을 창조해 내지는 못합니다. 우리 몸이 스스로 치유되는 것을 도울 뿐이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른 병자의 팔과 다리에 새살과 근육이 생기게 했습니다. 우리 뇌 속에는 1,000억 개 뉴런과 100조 개 시냅스로 구성되었다 합니다. 이 조직은 전기신호와 화학 신경 전달 물질을 통하여 움직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전기신호와 화학물질을 창조하셔서 중풍병자의 막힌 뇌를 뚫었습니다. 여기 계신 성도님들은 모두 하나님이라는 초자연적인 힘이 영적으로 막힌 뇌를 뚫어주신 분들입니다.

 

저는 1986년 가을 대학 2학년 때 뚫어 주셨습니다. 저는 물리전공이어서 창조주하나님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진화론을 믿었고, 실험으로 입증되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다 선교회에서 봉사활동 하다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봉사활동 방법은 땅콩 20알 정도를 선물 봉지로 잘 포장하고 겉에는 성경구절도 써 붙여 팔아이익금으로 고아원, 양로원을 도왔습니다. 저는 성격이 꿔다놓은 보리짝 형입니다.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형입니다. 그래서 죽어도 땅콩을 팔러 나가기 싫었지만 단체로 다 나가기 때문에 혼자 빠질 수없어 마지못해 끌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2시간 만에 다 팔았습니다. 제가 맡은 구역이 제일 가난한 동네였음에도 더 잘 팔렸습니다. 대학생이 불우이웃돕기 한고 하니 더 잘 사줬습니다. 저는 당시 하나님이 당신의 성품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배웠습니다. 그 성품 중 하나가 선입니다. 저는 땅콩이 잘팔리는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 안에 선한 성품을 실제로 심어 주셨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제5의 힘,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창조주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후에는 문둥병자를 손으로 만지며 낫게 해주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죄사함과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10. 결론

 

결론적으로 인생에 해답은 예수님이십니다. 중풍병자에게도, 몰려든 군중들에게도, 중풍병자 친구들에게도 해답은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9장2절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게에 “작은자야 안심하라!”라고하셨습니다. 안심하라는 말씀이 더해졌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근원적인 불안이 있습니다. 그 불안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초자연적인 힘으로 계시는 하나님, 절대적인 선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은 언젠가는 지켜보시다가 하늘을 뚫고, 지구를 뚫고 침공 하실 것입니다. 이때는 심판의 주로 오십니다. 무대 뒤에서 감독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면 그 연극은 끝났음을 압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선하게 살지 못하면 못한 것 때문에 벌 받을 것 같은 불안이 있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중풍병자와 같이 예수님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으면 누구든지 근원적인 불안이 없어집니다. 안심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하십니다. 작은 자 대신 자기 이름을 넣어 주십시오. 우리 모두 올 한 해도 이 하나님 예수님 안에서 불안이 없는 삶, 일어나 당당하게 걸어가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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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의 전략 파헤치기(마가복음4:1-11)

오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긴 예수님에 대하여 교제를 나눕니다. 본문은 마태복음4:1-11절입니다. 순서대로 강해하지 않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주제별로 정리하겠습니다. 대주제는 마귀의 특징이고 7가지 소주제를 정하여 공부합니다.

1. 마귀는 성경에 익숙하다.

마귀는 성경 친화적 입니다. 영화에서 악귀들에게 성경이나 십자가만 갔다 대면 쫓겨 가는 모습을 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성경책을 항상 차 뒤쪽에 싣고 다닙니다. 그냥 365일 싣고 만 다닙니다. 성경책이 효염이 있어 사고를 막는다 여깁니다.

마귀가 성경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성경 내용을 인용도합니다. 우리도 잘 알지 못하는 시편 말씀입니다. 본문6절 시편 91편 12절 인용 입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어 받쳐 주어 나비와 같이 바위 위에 사뿐히 내려앉을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본문 전후 문맥을 보면 하나님의 각별한 돌보심을 뜻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인도하였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출19:4) 독수리 아무리 강해도 사람 못태웁니다. 마귀도 성경을 잘 인용한다는 사실 알아야합니다.

2. 마귀는 진짜 같은 거짓말을 합니다.

인간이 먹고 마시지 않고 사는 최소기간은 1주일입니다. 삼풍백화점 건물이 무너졌을 때 마지막 생존자는 21일까지 살았습니다. 사람이 물 만 먹으면서 최대 40일삽니다. 마지막에 간에 있는 글리세롤 지방이 포도당으로 바뀌면서 에너지를 보충해줍니다. 전환될 에너지가 없는 최대 기간이 40일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40일 금식하셨으니 나는 하루 더 해서 41일 금식하겠다하다 목숨을 잃었답니다. 본문에 40일 굶은 예수님은 당장 빵 한 조각이라도 먹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일단 살아야 사명완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아들 능력을 사용하여 신속히 돌로 빵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입니다. 마귀가 돌로 사람들을 죽이라한 것도 아닙니다. 마귀의 말에는 악한요소가 없습니다. 본인 목숨부터 살리랍니다. 아주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말입니다.

3. 창세기3장과 비교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사단은 동일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마귀의 정체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바뀌지 않았는지 창세기 3장 내용과 본문을 비교합니다.

하와가 사단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본 소감은 창3 장 6 절에 나옵니다. 첫째 먹음직하고 두 번째는 보암직하고 세 번째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합니다. 미각 자극, 시각 자극, 마음 자극해 교만을 심습니다.

예수님 첫째 유혹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도록 합니다. 미각자극입니다. 두 번째 예루살렘성 꼭대기에서 뛰어 사람들 앞에 능력있는 분으로보이게 유혹합니다. 시각 자극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50미터 고지대에 있고 성전 꼭대기는 더 높은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세계 각지에서 예배 하러온 사람들로 늘 붐볐습니다. 이때 뛰어 내려 사뿐히 내려앉으면 예수님은 일약 슈퍼스타로 등극합니다. 얼마나 보기에 멋있습니까.

세 번째로 절 한 번으로 손쉽게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영광 준다는 유혹입니다. 마음에 교만을 심는 유혹입니다.

최초 인류 아담과 하와의 유혹과 동일하게 마귀는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도 유혹하여 복음역사를 실패하도록 만들고자 합니다.

4. 사단은 속성을 추구합니다.

여기서 속성은 본성이 아니고 빠르기 입니다. 속성 다이어트, 속성운전면허학원, 속성영어란 말 많이 들어 보셨죠. 1주일만 먹어도 20키로 빠지는 신비의 식품, 1일이면 운전면허 오케이, 한번만 읽으면 말문이 트이는 영어 이런 것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공부는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마귀의 첫째 유혹은 속성 돌떡을 만드는 기적이죠. 두 번째는 속성 인기를 얻는 것이죠, 셋째는 한 번 엎드리면 속성으로 천하만국 얻도록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방법과 정반대입니다.

우리 인간은 창세기3:19절을 보면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 쓸개 다 빼놓고 일하지 않습니까? 자영업이나 사업하시는 분들은 더 많이 빼놓으신다 합니다. 간, 위, 폐, 심장, 콩팥, 소장, 대장, 위, 방광 이랍니다. 오장 육부 나열해 보았습니다. 또 어떤 분은 출근할 때 뇌를 집에 두고 간다 합니다. 위에서 시키는 것을 머리 굴리다 보면 힘드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자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으려면 과정이 필요합니다. 농작물 수확도 경작하고, 씨 뿌리고, 김매고, 거두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사단은 모든 과정 무시하고 속성으로 하라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속성을 알고 악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한다고 한탄 합니다.(눅11:29)

우리가 어떻게 안전을 보장 받습니까? 신비로운 방법은 없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유해로 고통 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망자가 239명이랍니다. 안전의식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끊임없는 교육과 훈련과 사회인식이 바뀌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한 번 뛰었는데도 완벽하게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것은 마귀의 성향입니다. 속성안전은 없습니다. 세 번 째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엎드려 경배 한 번만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얻는다는 것도 비정상 적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단순하게 살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 영혼이니, 죽음 이후 니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말라 합니다. 단순하게 보이는 세계만 쫓아 즐기며 살라 합니다.

5. 마귀는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영적인 세계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깁니다. 그러나 세상은 반대입니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깁니다. 약자가 강자를 섬깁니다. 약자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자존심입니다.

본문 3 절과 6 절을 참고하면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못해? 너를 한 번 증명해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그런 것도 못하냐?” 이런 뉘앙스입니다.

자존심 상하게 하는 유혹이 십자가 상에서도 있었습니다. 마 27 장 40 절에 보면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계신 예수님께 무엇이라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구원해보라고 조롱합니다. “네가 왕이면 한번 내려와 봐! 못하잖아!” 이런 조롱입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유혹은 돌을 떡으로 충분히 만들 능력이 없는 우리 보다는 충분한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더 유혹 됩니다. 우리는 마귀의 제안을 예수님이 물리치기 위하여 대단한 자제력이 필요했음을 짐작합니다.

6. 마귀는 강압적이지만 하나님은 자발적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BC67년에서 37년까지 약30연간 유대인들은 혁명을 많이 일으킵니다. 이 혁명 봉기로 남자만 15만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여자 아이 합하면 45만 명입니다. 유대인들이 고분고분한 민족이면 다루기가 쉬운데 이들은 선민의식이 강하여 어려웠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로마 병사도 더 무정 무자비하게 유대인을 대합니다. 당시 헤롯은 악랄한 왕으로 유명합니다. 예수님 탄생 시 2살 아래 남자아이를 다 죽이라고 살인 교사 명령을 내린 장본입니다.(마2:16) 그가 처음 왕으로 부임해 오는 날 로마군인들이 유대인들의 집과 시장과 심지어 성전에서 까지 여자와 아이들을 살해하는 것을 보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인들이 성읍의 모든 거주민과 재산을 다 빼앗아 가니 나는 이렇게 광야같이 황폐한 땅에서 왕이되어야 하는가?”하고 한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런 시대 배경 하에 유대인들은 강력한 힘을가진 메시아가 나타나 무력으로 정부를 세워주기를 바랐습니다.경제적, 정치적인 메시아를 바랐습니다. 당시 메시아는 성전 꼭대기로 임한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백성들이 원하는 메시야가 되라고 유혹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길가에 널려있는 돌덩이들을 모조리 빵을 만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을 지배해주기를 바랐습니다. 또 수백 미터에서 뛰어내려도 안전하게 착지하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자신들을 인도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천하만국을 휘어잡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으로 로마를 몰아내고 자신들을 다스려 주기를 바랐습니다.

우리도 가끔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이 세상 불의를 그냥 보고만 있는지 의문을 가집니다. 북한의 미사일 개발 비용이 3조4592억원이 들어간답니다. 북한 주민 3년 먹을 치 식량입니다. 미사일 개발할 돈으로 이들을 먹이는데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 불의한 지도자들을 향해 하박국 선지자는 무엇이라 했습니까? 하박국1:13“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우리 자신도 하나님께서 무언가 확실한 방법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구원 받았으면 가슴에다가 구원받았다고 불도장을 찍어 주면 갈등도 안하고 얼마나 좋을까요? “위 사람은 1900년 9월 15일 구원받았음하고 확인서를 때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혹은 ” 돌판에 증서 하나 만들어 주면 내가 구원 받았나 그렇지 않은가 갈등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죄를 향해서 갈 때에는 발목을 비틀거나 부러뜨려서라도 막아주셨으면 좋다는 생각도 듭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도 둘째가 유산을 요구해 나가려고 하면 허용해 주는 아버지의 사랑이 잘 이해 되지 않습니다.(눅15:11-24) “애비가 죽지도 않았는데 유산을 요구해! 못난 놈!”하며 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강압적이지만 하나님은 비강압적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강압적인 방법을 쓰지 않으십니다. 가슴에 불도장은 앞으로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한 가지 자신을 죽이는 방법, 십자가의 방법을 써서 구원합니다.(눅18:33)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고 묻혀서 열매 맺는 방식을 씁니다.(요12:24) 선(善)이란 상명하복 방식(上命下服 方式)으로 외부로부터 강요되어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선(善)이란 내부에서 밖으로, 아래에서 위로 자랍니다. 사탄의 권력은 강요하고, 현혹하고, 파괴합니다. 외적이고 강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력은 내적이고 비억압적 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라는 씨앗은 강압적인 토대 위에 자라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랑의 방법에만 반응합니다.(요1서 4:16) 총과 칼로 사람에게 사랑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만으로 우리의 자발적인 순종을 요구합니다.(요15:12)

7. 모든 것을 다 체휼하신 예수님

마귀는 한 마디로 어떤 존재입니까? 요8:44절을 참고하면 거짓말 장이입니다. 우리를 거짓의 세계로 들어오게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친화적입니까? 아니면 마귀 친화적입니까? 마귀친화적인 속성이 더 강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40일 굶은 상태에서 돌을 떡으로 만들라면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슈퍼스타로 만들어 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머리 한 번 만 숙이면 천하만국 영광을 주겠다는데 마다할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발걸음은 늘 세상을 향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귀의 유혹을 이기고 말씀을 쫓아 살 수 있습니까? 결론은 예수님을 의지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히4: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2:18“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몸으로 다 겪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춥고 황량한 광야에서 40일 동안 굶주림으로 인간의 극한까지 체험합니다. 한사람도 예수님 편이 없이 십자가의 외롭고 고통스런 길을 갔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홀로 기도했습니다.(눅22:44) 예수님은 인간으로 겪어야할 최고의 고통겪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영이 있습니다.(롬8:9) 그래서 우리가 겪는 고난,고통 잘 아십니다. 우리가이 예수님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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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을 잠재운 예수님은 인생의 광풍도 막아주신다.(마가복음4:35-41)

오늘 본문은 AD65-70년경 마가가 기록한 복음서의 내용입니다. 기록장소는 베드로와 마가가 감옥에 있을 때로 추정합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출생이나 어린 시절을 과감히 생략하고 1/3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서술합니다. 마가는 12사도에 포함되지 않은 제자이고 사도바울과의 선교여행에서 한번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에서 폭풍을 만나며 일어난 사건의 기록입니다.

 

1. 광풍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제자들(막4:35-38)

바람은 기압 차이 때문에 뜨거운 공기가 차가운 쪽으로 이동함으로 생깁니다. 바다 표면은 육지와 다르게 낮 동안 공기가 서서히 달구어졌다 밤이 되면 서서히 식습니다. 밤에는 육지보다 뜨거운 바다의 공기가 위로 상승하면 그 자리를 육지의 차가운 공기가 메웁니다. 이러한 원리로 밤에는 바람이 육지에서 바다로 붑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은 바람의 방향을 바꾸어 없어지게함으로 자연의 순리를 바꿉니다.

갈릴리 바다는 호수이지만 크기 때문에 바다라고 합니다. 둘레가 63km입니다. 주위로는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리어 있습니다. 만년설이 있는 헬몬산도 있어서 아름답습니다.

 

지금부터 이 갈릴리 바다로 시간여행을 떠나 봅시다. 때는 2,000여 년 전, 등장인물은 12제자와 예수님입니다. 막 4장 35절을 인용합니다.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녁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습니다. 36절을 참고하면 예수님은 배 위에서 종일 말씀을 전하였기 때문에 매우 지쳤습니다. 반대로 제자들은 휴가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은 자들입니다. 오랜만에 일상을 벗어나 바다에 나왔습니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휘영청 밝은 달도 이들을 반겨주었습니다.

이들의 배는 어떤 폭풍우도 견디는 무적함대 같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 빌립, 안드레가 어부 출신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왕년에 갈릴리 수산계를 주름잡았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갈릴리 수협장 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자로 부름을 받으며 수협 장의 꿈은 접었을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 안에서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국무총리 자리에 앉는 꿈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비슷합니다. 꿈 실은 배는 순풍에 돛단 듯이 바다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갔습니다.

바다 한가운데 들어서자 기상이 급변했습니다. 휘영청 밝은 달이 갑자기 먹구름 뒤로 숨었습니다. 한 줄기 바람이 일어나 제자들의 머리칼을 날렸습니다. 제자들은 어부의 본능적인 직감으로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꼈습니다. 각자는 배에서 정해진 역할에 따라 제 위치로 갔습니다. 머리칼을 스쳤던 한 줄기 바람은 곧이어 거센 바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바람은 제자들의 몸을 송두리째 바다로 던져버릴 수 있을만큼 쎘습니다. 파도가 배 옆구리를 여러 차례 때리자 배 안은 금 새 바닷물로 가득 찼습니다. 제자들은 놀란 토끼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물을 퍼내고, 돛을 접고, 배에 균형을 잡기 위해 키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파도는 제자들의 노력을 비웃었습니다. 어부의 경험은 이 상황에서는 휴지 조각같았습니다. 타개할 방법이없었습니다. 이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베드로는 '아 총리의 꿈은 여기서 수장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이때 제자 중 오병이어 기적의 주인공 안드레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하자고 동료들에게 제안했습니다. 이들은 일제히 예수님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2.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막4:38-41)

38절을 참고하면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고물은 배의 뒷전입니다. 예수님은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밤은 왜 있지? 밤은 잠자라고 있는 것이다."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았습니다.

창세기 1장5절을 참고하면 하나님은 낮과 밤을 창조함으로 하루의 단위를 정하였습니다. 밤도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주십시오. 시편 127편 2절에는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준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호흡을 주고 심장을 감찰한다합니다. (사도행전17:25 예레미아11:20) 하나님은 폐와 심장은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숨 쉬며 뛸 수 있게 했습니다. 이 기관은 자율신경계에 의해 스스로 움직입니다. 폐와 심장의 기능까지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한다면 매우 피곤할 것입니다.

밤은 어두워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이후 밤을 낮같이 밝혔습니다. 오늘날은 이로인해 잠 못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구, TV, 영화, PC, 스마트 폰 등이 숙면을 방해합니다. 외적인 조건이 이라라 내적인 불안, 두려움 등으로 자고 싶어도 못 자는 분들도 많습니다. 통계에 의하연 현대인의 수면제 소비량이 점점 늘어나고 있답니다.

하루 동안 지친 몸이 온전히 회복되려면 7~8시간이 걸립니다. 잠을 1시간 더 자면 500여 개의 유전자 신호 스위치가 작동하여 신체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7시간 자면 6시간 자는 것보다 동맥에 쌓이는 칼슘양이 33% 줄어 혈압을 낮춥니다. 기억력도 향상됩니다. 뇌는 잠자는 동안 노폐물 제거 활동이 깨어 있을 때보다 10배는 빠르게 진행됩니다. 우리는 밤에 반드시 쉬어야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광풍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곤히 잠들 수 있는 예수님을 배워야겠습니다.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비결을 배워야겠습니다.

어부 출신도 어찌할 수 없는 큰 광풍이 일고 있는 바다는 두려움의 바다입니다. 제자들은 이 바다에 빠져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곤히 잠만자고 있는 예수님이 야속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장 물 한 바가지라도 퍼낼 일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급기야 이 예수을 다급히 깨웠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39절을 참고하면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바람에게 명령합니다. 예수님은 인격체를 향해 꾸짖듯이 말씀합니다. 바람은 이 말씀에 즉각 순종하였습니다. 바람의 방향이 저기압에서 고기압쪽으로 바뀝니다. 바람은 발이 달린 듯 육지로 달음질쳐 헬몬산 넘어로 사라졌습니다. 먹구름도 걷혔습니다. 그 뒤에 숨었던 휘영청 밝은 달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달은 마치 제자들을 나무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휘둥그레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자들에게 "그래 고생들 했다. 마침 날 잘 깨웠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어찌할 뻔했니?"하고 칭찬했습니까? 아닙니다.

40절을 참고하면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없느냐?’ 고하며 책망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서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행동을 믿음 없음을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무서워함과 믿음 없음은 마치 자석의 같은 극끼리 밀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무서워함은 믿음을 밀어내고 믿음이 없을 때 무서워합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 염려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인생의 대전환기를 한 참 지났습니다. 그러자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체해서, 어지럼증으로, 허리와 목 디스크로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물리치료 받으러 일주일을 병원에 갔습니다. 서로 다른 종류의 약봉지가 네 개나 쌓였습니다. 약을 많이 먹으니 위까지 쓰렸습니다. 몸이 바벨탑 무너지듯이 한꺼번에 무너졌습니다. 그러자 "아! 이러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가 몰려왔습니다. 저는 두려움의 바다에 빠져 오래 허우적댔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살피면서 광풍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자들과 나의 모습이 똑같았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음에서 오는 광풍 앞에 무서워하는 저에게도 예수님은 믿음 없음을 간접적으로 책망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히브리서 12:2는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저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새롭게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바라보고 또 나의 경험과 상식만을 의지할 때 두려움과 무서움에 빠집니다. 그러나 시선을 믿음의 주인인 예수님에게 돌릴 때 극복가능합니다. 두려움의 바다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바람과 폭풍도 잠잠케 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다른 성경 구절을 참고합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 예수님은 창조주입니다. 온 우주를 만든 분입니다. 예수님이 만유의 주인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 온 우주의 주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어부들로서 목수 출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배에 모시고 간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바다와 배에 대하는 예수님보다 한 수 위라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님의 배에 탄 것입니다. 제자들의 생명의 주인,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을 믿고 어떤 광풍도 무서워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광풍은 예수님에게 맡기고 그 옆에 같이 드러눕는 배짱이 있어야 했습니다. 코까지는 골지 못하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한숨 푹 자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면 같이 들어가면됩니다. 끌고 들어간 분이 다시 끌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는 능을 가진분입니다. 생명의 근원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산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만사형통은 아닙니다. 크고 작은 광풍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광풍은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키워주는 역할도 합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도 잠잠케 하는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41절을 참고합니다.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바람과 바다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바람과 바다까지 순종시키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아서 평안하고 순탄한 인생 항해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바람과 바다까지 순종시키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아서 평안하고 순탄한 인생 항해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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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는 비밀(마가복음4:35-41)

오늘 본문 말씀은 광풍사건입니다. 본문은 막4:35-41절까지입니다. 마8:24-27절과 눅8:22-25절에도 나오는데 마가복음이 가장 길게 기록합니다.

고요와 반대말은 불안, 두려움, 무서움입니다. 이런 요소를 일으키는 상황을 한 마디로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팽팽히 조인다.(stringer)”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의학적용어로 ‘외부 자극에 대하여 자신이 있던 안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저항하는 반응’입니다. 셸리라는 학자는 스트레스를 경보반응(alarm), 저항반응(resistance), 탈진반응(exhaustion) 단계로 나눕니다. 탈진반응까지 가면 몸에 병이 옵니다.

스트레스 자가 측정표

미국의 정신의학자 토머스 홈즈(Thomas Holmes)와 리처드 라헤(Richard Rahe)는 스트레스 측정표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인 5천명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설문합니다. 이 표를 사회 재적응 평가 척도(SSRS)라고 합니다. 이 지수가 300이상이면 2년 내에 질병 확률 80%입니다.

아래 내용을 진단해 보기 바랍니다. ①배우자의 사망100 ②이혼 73 ③부부 별거 생활65 ④구류63 ⑤친척의 사망63 ⑥개인의 사고나 병 53 ⑦결혼50 ⑧해고 47 ⑨부부 갈등(심각한 갈등) 45 ⑩퇴직(은퇴) 45⑪가족의 건강 변화44 ⑫임신 40 ⑬성적 장해 39 ⑭가족 구성원의 증가 39 ⑮직장업무변화 39 ⑯경제 상태의 큰 변화 38 ⑰친구의 사망 37 ⑱새로운 일 시작, 직장 옮김 36 ⑲부부싸움 35(갈등보다는 좀 약한) ⑳1,000 만 원 이상의 대출 31 ㉑대출금을 갚지 못함, 빚 독촉 30 ㉒업무상 책임의 변화(승진, 보직 변경) 29 ㉓자녀 별거(결혼, 유학)29㉔친척과의 트러블, 고부갈등29 ㉕개인의 성공 28 (성공해도 스트레스는 있음, 좋은 스트레스)㉖부인의 취직이나 이직, 실직, 은퇴 26 ㉗입학, 졸업 26 ㉘생활 조건의 변화25 ㉙개인적 습관의 수정 24 ㉚상사와의 트러블 23 ㉛노동 조건의 변화 20 ㉜주거의 변화 20 ㉝전학, 이사 20 ㉞여가생활의 변화19 ㉟교회 활동의 변화 19 ㊱사회 활동의 변화18 ㊲1,000만 원 이하의 대출17㊳수면 관습의 변화16 ㊴가족 모임의 변화 15 ㊵식습관의 변화 15 ㊶휴가 13 ㊷크리스마스, 명절12 ㊸가벼운 위법 행위(신호위반, 무단횡단 등) 11 총합1632 적은 지수를 모두 합치시기 바랍니다.

지수가 0~149이면 양호입니다. 150~199는 가벼운 위기상황입니다. 질병 발생확률 37%입니다. 200-299이면 보통위기상황으로 질병 발생률 51%입니다. 300이상이면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질병발생률 80%입니다.

예수님의 스트레스 지수는 얼마였을까요? 400은 넘을 것으로 예측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병사하지 않았습니다. 내면의 고요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광풍에 대한 제자들과 예수님의 반응을 대조합니다.

갈릴리바다의 크기

갈릴리 바다는 둘레 55키로 입니다. 세로(남북) 21키로 폭13키로(동서) 입니다. 모양은 거문고 형태라고 해서 게네사렛 호수라고도 부릅니다. 해수면보다 200미터 아래에 있습니다. 북쪽은 2,815미터의 헬몬산이고 정상에는 만년설이 있습니다. 산의 찬 공기가 내려오다 바다의 더운 공기와 만나 돌풍이 생길 확률이 높은 지형입니다. 요즘도 광풍이 일면 200명승선 유람선도 운항 포기합니다.

이스라엘 기노사르 키부츠 박물관에 당시 배 한 척을 갈릴리 바다에서 건져 전시했습니다. 길이는 8.2미터이고 폭은 2.3미터입니다. 가운데에는 돛이 하나 있고 바람이 없을 때는 노를 저어서 이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때 쓴 배 상상하면 안 됩니다. 어깨를 맞대고 앉아야 하는 수준입니다. 잠들어 있는 예수님도 눈앞에 보이는 배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이 어부 입니다. 나다나엘, 도마, 작은 야고보, 시몬은 어부는 아니지만 갈릴리 바닷가 출신입니다. 제자 12명 중 9명이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진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전문가 집단입니다.

전문가들이 광풍 앞에서 무서움의 웅덩이에 빠져 익사 할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원망의 화살은 예수님께 돌렸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호칭이 어떻게 바뀝니까? “선생님!”입니다. 주님으로 부를 때는 언제고 상황이 변하자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어떻게 상황을 정리합니까?

갈릴리 바다를 꾸짖음

바람과 바다를 꾸짖습니다. “바람 너 좀 잠잠해! 파도야 너 좋은 말로 할 때 좀 고요해라!” 바람과 바다는 무 인격체 입니다. 우리가 바람에게 이렇게 했다가는 엠뷸런스가 와서 즉시 싣고 갑니다. 예수님 말고는 누가 광풍을 감히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꾸짖었다는 것은 창조주의 권위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창조주이기 때문에 무 인격체가 즉시 순종합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도 꾸짖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주석에는 ‘아직도’란 단어가 첨가된 문장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부르심 받은 지 1년 째 입니다. 아직도 광풍을 무서워합니다. 도대체 믿음은 어디다 두고 온 것입니까? 영어로 Where is your faith? 하고 예수님은 믿음 없음을 책망합니다.

41절은 보면 제자들이 기적을 체함하고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놀랍니다. 그는 만물의 주인이시고 창조주입니다.(골1:16절)

인생의 광풍 앞에서

인생의 광풍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예수님에게서 지혜를 배웁니다. 고물에서 고요하게 잠자는 것입니다. 고물은 배의 뒤쪽을 말하고 앞쪽은 이물이라 합니다. 제자들은 돛을 내리고, 물을 퍼내고, 밧줄을 당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물론 광풍에 미리대비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노력으로 어찌할 수없는 광풍에는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광풍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36절을 참고합니다.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이 배에 모시고 갔다고 생각합니다. 착각입니다. 배의 선장은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배에 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선장도 내가 아닌 예수님입니다.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는 비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마음에 고요함을 유지할 할수있을까요? [맥도날드 고든]이란 분이 쓴 [내면세계와 영적성장-IVP출판]이란 책에서 몇 가지를 인용합니다. 고든의 친구가 미국 핵잠수함 장교였습니다. 당직을 서고 있는데 갑자기 잠수함이 요동치고 흔들렸습니다. 잠수함은 바다 위로 수많은 배들이 지나다니는데 갑자기 나타날 때 피하기 위하여 비정상 적인 움직임이 많다고 합니다. 갑자기 잠수함이 많이 흔들리니까 배의 함장이 조정실을 방문합니다. 함장은 “이상 없나?”하고 물었고 친구는 “네 이상 없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함장은 조정실 안을 둘러보더니 “내가 보기에도 괜찮아 보이는군!”하면서 조종실을 나갔다고 합니다.

위의 상황을 다시 상상해봅니다. 잠수함 밖에는 많은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배의 운명을 결정짓는 곳은 어디 입니까? 내부 조정실입니다. 함장은 본능적으로 배가 흔들리자 조정실부터 찾았 습니다. 조정실이 공포의 기색 없이 고요합니다. 고도로 숙련된 승무원들이 차분하게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함장과 조정실의 승무원들은 수천번이상은 비상 시 상황훈련을 했습니다. 잠수함 밖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과잉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조정실이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면 잠수함의 안전은 보장됩니다. 그러나 조정실이 질서 없이 우왕좌왕하면 위험합니다. 재난이 닥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질서 없이 우왕좌왕 하는 상황과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잠수함에 조정실과 같습니다. 외부에 어떤 상황이 닥쳐도 우리 마음에 이상이 없으면 괜찮습니다. 조정실이 우왕좌왕하고 질서가 없으면 문제입니다. 위기가 오고 질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잠언 4:23절은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나라”고 합니다. 롬12:2절에서도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합니다.

우리 마음 조정실의 질서를 유지하는 비결 12가지가 책에 소개됩니다. 몇가지만 언급하면 첫째 내면세계에 신경 쓰라고 합니다. 외적인 세계에만 매진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 번째 적당한 쉼을 가지라고 합니다. 월화수목 금금금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 중심적인 삶을 살지 말라고 합니다. 일 중심적인 사람을 쫓기는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그 반대는 부르심 받은 자의 삶이라고 합니다. 부르심 받은 자의 삶은 성경적으로 말하면 청지기의 삶, 종의 삶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도 잠깐 빌린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도 내 소유가 아닙니다. 잠깐 맡았다가 주인이 찾으면 돌려주어야합니다.

시간관리

세 번째 시간 관리의 조언도 있습니다. 시간 관리는 최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선순위와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잃어진 자를 구원하입니다. 잃어진 자를 만나는 것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마지막에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유월절 종교 축제가 있었습니다. 6~7시간만 가면 예루살렘 도착 입니다. 그런데 지체합니다. 제자들의 속을 많이 태웁니다. 중간에 소경거지가 애타게 불러서 만나느라 지체합니다.(눅18장) 또 얼마 지나 느닷없이 뽕나무를 쳐다보더니 삭개오를 내려오라 합니다. 몇 시간이면 예루살렘인데 그의 집에 들어가 하루를 묵습니다. 예수님은 잃어진 자 소경거지와 삭개오를 만나는 것보다 시급한 일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12명의 제자만을 키우는데 온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결정과 행동을 앞두고 반드시 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복음서에는 홀로 한적한 곳에 계셨다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의 금요 기도 모임, 수요 예배, 주일 예배와 주일말씀 등 모두가 내면세계와 영적인 성장을 위함입니다. 수요 예배 온다고 하여 실질적으로 떡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인생의 광풍 앞에서 믿음으로 고요하게 잠을 청할 수 있는 내적능력이 생깁니다.

간디의 물레질 교훈

작가는 내면세계를 항상 정돈하라는 차원에서 인도 간디 수상의 물레질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의 물레질은 정치적인 제스처의 차원이 아니라 내면을 정리하는 도구로 쓰였슷니다. 간디는 인도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늘 왕궁과 정부청사에서 당대의 유명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집에 오면 언제나 가장 단순한 물레질을 합니다. 물레질은 그를 교만하지 않게 하고 삶의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저는 이 작가의 주장을 보면서 사도바울의 텐트 만드는 작업을 떠올렸습니다. 성경에서 사도바울만큼 바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늘 그는 저녁이 되면 한 올 한 올 텐트 깁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 일로 마음을 정돈하고 성령의 힘을 덧입고 교만함을 물리치고 영적인 힘을 덧입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인생은 호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는 과정입니다. 나그네와 같이, 소풍 온 장소와 같이 지나가는 곳이거나 잠시 머무는 곳 입니다. 인생항로의 선장은 내가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선원입니다. 우리가 늘 이 예수님을 의지하여 인생의 수많은 광풍 앞에서 무서워 떨지 않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외면세계에 올인 하지 말고 내면세계를 갈고 닦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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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라사 광인, 혈루증 여인, 야이로의 죽은 딸(!(막5장1-43)=

오늘 함께 공부할 말씀은 마가복음 5장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3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거라사 광인을 온전케 하신 예수님과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과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할 때 장벽이 되는 세 가지가 사단의 세력, 질병,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발목을 잡는 이런 문제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1장 거라사 광인을 온전케 하신 예수님(막5장:1~20)

은둔 형 외톨이란 말이 우리 사회에서 쓰이기 시작한 지가 오래입니다. 이 말은 일본어로 [히키코모리]라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45년 전인 1970년대부터 사회문제였습니다. 은둔 형 외톨이는 모든 사회 활동을 거부한 채 자기 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평균 10~21년 정도 은둔합니다. 최장 은둔을 기록한 사람은 34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라사 광인도 당시 은둔 형 외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는 증세가 심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거라사 광인을 사로잡은 세력을 더러운 귀신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귀신의 종류가 많이 있죠? 귀신 넘버원은 아무래도 처녀귀신이 아니겠습니까? 처녀가 원한을 품고 죽으면 이 귀신이 됩니다. 장가도 못가고 죽은 총각귀신은 무엇이라 합니까? 몽달귀신이라 합니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물귀신입니다. 물귀신 작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귀신은 이렇게 우리나라 전설 속에서 머리 풀고 입술에 피 묻히고 나오는 귀신은 아닙니다. 본문의 귀신은 영어로 Evil Spirit 또는 Unclean Spirit입니다. 직역하면 악한 영, 사악한 영입니다. 이 악령은 출신이 다릅니다. 타락한 천사 출신입니다.(계12:9)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단번에 알아봅니다.(7절) 악령은 실존하는 타락한 영입니다. 이들은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아서 자신을 귀하게 못 여기고 자학하도록 합니다. 또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합니다. 거라사 광인은 산이나 무덤가에 살며 밤낮 괴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5절) 이런 자들을 현대 의학용어로 정신분열, 복합우울증 또는 조울증 이라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 일행이 거라사인 지방에 도착한 때는 캄캄한 밤입니다 거라사 지방은 멀지않은 곳에 40m되는 절벽과 또 옛날 무덤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돼지를 많이 키웠습니다.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라고 유대인들은 키우지 않는데 거라사 지방에는 이방인들이 많이 살면서 키웠습니다. 당시 무덤은 석회석을 파고 만든 동굴입니다. 제자들은 안 그래도 어두워 무서운데 무덤 사이를 지나가려니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머리는 산적같이 하고 웃통은 벗었으며 발과 손에는 끊어진 쇠고랑을 찬 사람이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달려옵니다.(6,7절) 나이도 어리고 담력이 약한 요한은 놀라 잠시 기절했을지도 모릅니다.

거라사 광인은 예수님께 달려오다가 갑자기 기가 꺾입니다. 그는 예수님 가까이 와서 절하며 큰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고분 고분하게된 것은 예수님이 이미 귀신을 향하여 나오도록 명령했기 때문입니다.(8절)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광인의 이름을 묻습니다. 이름은 그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그는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군대는 헬라어 [레기온]으로 6,000명으로 이루어진 1개 군단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악한 영들은 광인에게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자 돼지에게 가기를 원합니다. (12절) 예수님이 허락하자 갑자기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비탈길을 향하기 시작합니다.(13절) 돼지도 춤을 춥니다. “돼지 트위스트” “돼지 삼바” “돼지 테크노”와 같은 춤을 추며 일제히 뛰어갔습니다. 신세대 돼지는 강남스타일 춤도 추면서 달렸습니다.(ㅎ.ㅎ)

그러면 지금부터 현재 돼지 시세를 발표하겠습니다. 110kg 짜리 한 마리는 33만원입니다. 2천 마리면 6억 6천만 원 상당의 가격입니다. 예수님은 값비싼 댓가를 치르면서 한명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2천이나 되는 악령이 떠나가자 거라사 광인은 언제 그랬나는 듯이 멀쩡해 졌습니다.(15절 ) 거라사 광인은 고침 받은 것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간청합니다.(18절)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그의 인생 방향을 줍니까? 19,20절을 참고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멀어진 관계를 회복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떻게 큰일 하셨는지를 데가볼리 지방에서 전파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당시 거라사 광인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예수님의 시각이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먼저 당시 사람들은 거라사 광인을 붙잡고 있는 악한 영을 보지 못합니다. 그저 외적인 현상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소리 지르면 입을 틀어막았고 사람을 헤치면 손과 발을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방법은 상황을 더욱 악화 시킬 뿐입니다

예수님은 악령의 세력을 내쫓음으로 원인 치료를 합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도 지배하는 전능한 분입니다. 악령은 예수님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돼지 2,000마리가 죽자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조금만 더 머무르른면 돼지 산업이 망할 것이 염려되었습니다. 이들은 한 생명이 사단의 세력에 빠졌다가 건저져 새롭게 변한 것은 보지 못합니다. 한 생명이 살아난 것 보다는 자신들의 손해가 더 크게 보입니다. 물질만능주의 가치관이 생명의 예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2장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5장24~34)

 

주인과 종의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신발을 사오도록 시켰습니다. 종은 신발을 사오면서 생각했습니다. 겨울이라 신발이 얼어 있으면 주인이 신발을 신을 때 발이 시릴 것이라 판단하여 가슴 속에 꼭 품고 왔습니다. 신발을 신어 본 주인은 발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자 종이 버릇없이 자기 신발을 먼저 신고 있었다고 판단해서 종을 내쫓아 버렸습니다. 사람의 진심을 알아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인의 진심을 잘 아아주신 예수님이 나옵니다.

 

예화입니다. 어떤 마을에 착한 아이와 좀 덜 착한 아이가 살았습니다. 이 아이들의 이름은 편의상 제가 붙이겠습니다. 착한 아이는 김반듯입니다. 반듯 학생은 공부 잘하고 효심이 많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옆집에 좀 덜 착한 아이가 사는데 이름은 막나가입니다. 물론 이름대로 막 나가는 학생입니다. 일진 학생입니다. 그는 막 나가서 부모 속을 많이 썩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반듯 학생 집에서 훈훈한 소문이 났습니다. 반듯 학생이 추운 겨울에 아빠 출근하는데 발이 시려울 것을 염려해 신발을 겨드랑이에 품었다가 따뜻하게 하여 내놓았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막나가 학생이 자기도 일생 처음으로 착 한일 한번 하기로 결심을 하고 실천에 옮깁니다. 그런데 막나가 학생 아버지 막가파 씨는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왜 더러운 신발을 겨드랑이에 넣고 그러니? 하라는 공부나 열심히 햇!” 하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남의 진심을 알아주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또 남이 나의 진심을 몰라줄 때 상처 받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열심히 예수님을 섬기는 분들입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이름도 빛도 없이 섬깁니다. 이것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 속상합니다. 알아주지 않는 것까지는 좋다 이겁니다. 칭찬은 커녕 한 일로 욕 먹을 때 더 속상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늘도 땅도 모르게 몰래 옷자락에 손을 댄 여인의 진심을 알아주는 예수님이 나옵니다. 본문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습니다.(25절)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재산도 모두 허비합니다.(26절) 여인은 처음에는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당시에 의사를 찾는 수준이었다면 상당한 부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 재산도 다 허비합니다. 병으로 인하여 여인으로서의 아름다움도 잃었습니다. 그는 바다 방파제에 신발 벗어 놓고 몇 번 뛰어 내릴까도 생각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의지가 약해서! 부모님 생각에!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고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소망을 갖었습니다.(27,28절) (당시 유대인들은 옷 끝단에 술을 달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시하였다고 함)

레위기15장2-14절 율법을 보면 여인의 병은 사람들과 스치기만 해도 부정하게 만드는 병입니다. 심지어 여인이 앉았던 곳 또 만졌던 물건에 다른 사람이 앉거나 만져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율법이 주는 높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여인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가는 것도 죽을 힘을 다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낳을 수 있다는 소망과 믿음으로 힘겹게 군중들 사이를 헤치고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그러자 병의 근원이 말랐습니다.(27절) 이는 병의 증상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나았다는 표현입니다.

목적을 달성하자 여인은 몰래 자리를 뜨려고 합니다. 그런데 청천 벽력같은 음성이 들려옵니다. 본문30절 하반 절을 보면 예수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며 여인을 찾습니다. 옆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뜬금없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친근감이 많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만졌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메달기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가까이 가려고 밀고 당기고 합니다. 베도로 는 질서를 잡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손댄 사람을 어떻게 찾는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치 않고 찾았습니다. (32절) 마치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 계속 찾았습니다. 여인은 이 예수님의 찾으심에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음을 직감합니다. 그는 많은 사람 앞에 일어난 일을 고백합니다.(33절 )

여인을 율법적인 시각으로 볼 때 정죄 받아 마땅합니다. 여인은 예수님 가까이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지고 부정케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까지 부정케 합니다. 사람들에게 이일이 알려지면 율법 사회에서 즉결심판으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반전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옵니다. 본문 34절을 참고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은 여인을 사랑하는 딸로 맞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면에 참 평강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여인이 그냥 몸만 고침 받고 사라졌다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돌려 세워 그의 육체의 병 뿐 아니라 마음의 병, 영혼의 병까지도 고쳐주었습니다. 이제 여인은 일상생활에서 두려움 없이 ‘내가 주안에 예수님이 내안에 거하심으로’ 영육 간에 건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민감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한 어떠한 행동도 다 알아줍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3장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막5장21~23/35~43)

얼마 전 의정부 아파트에 화재사고가 났습니다. 주민들 중 4살 아들을 살리고 본인은 큰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 치료받던 한 미혼모가 있었는데. 몇 일전 사경을 헤매다 숨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얼마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회당 장 야이로의 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12살 먹은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야이로는 회당 장으로서 존경과 사회적인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딸을 살리기 위해 무명에 가까운 랍비에 불과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합니다.(22,23절) 예수님은 야이로의 소원을 무시하지 않고 그의 집을 향해갑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 혈루증 여인을 만나서 시간을 지체했습니다. 야이로에게는 1초1초가 몇 십 년은 되듯이 느리게 흘렀고 속이 새까맣게 탔고 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그 사이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이제 모든 상황이 끝났으니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 합니다.(35절) 야이로는 밀려드는 슬픔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어떤 방향을 줍니까? 본문36절을 참고합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 두려워 말고 믿기만하라! 합니다. 이 상황에서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 급박한 상황에서 딸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체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야이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으로 끝까지 모시고 간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상을 당하면 전문적으로 대신 울어주는 직업인이 있었습니다. 이 직장 이름을 “장례 전문 애곡사”이렇게 불러야할까요? 이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바닥과 가슴을 치며 아주 구슬프게 통곡을 해 주었답니다. 심지어는 피리, 꽹꽈리 같은 악기를 동원해서 더욱 구슬프게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자 벌써 이런 시끄러운 소리들로 가득 찼습니다.(38,39절)

예수님은 이들에게 이해도 납득도 하지못할 말씀을 합니다. 죽은 아이를 잔다고 합니다. 잔다니요? 당연히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비웃음을 뒤로 한 채 아이 방으로 들갑니다. 그리고 달리다굼 합니다.(40,41절) 달리다굼은 당시 어머니들이 이른 아침에 자는 아이를 깨울 때 쓰는 사랑스런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달리다굼 하자 소녀는 한숨 잘 잤다는 듯이 일어났습니다.(42절 )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살리심으로 두려워 않고 믿음을 드린 야이로에게 선물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님께는 결코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우리 성도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해야하는 지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행전20:24절) 이 자세가 사도바울이 예루살렘 방문을 앞두고 가진 자세입니다. 우리는 받은 사명이 없다고요? 우연히 구원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고 구원했습니다. 크던 작던 사명이 있습니다. 요즈음 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세포는 120살까지 산다고 합니다. 만약 받은 사명을 120까지 완수해야 한다면 하나님은 120까지 살려두십니다.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죽이셔야 죽습니다.

두 번째는 죽음을 잠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영이 우리들 안에 있으므로 설령 현재 눈을 감는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은 안방에서 건너 방으로 옮겨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숨 잘 자고 나면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에서 삽니다.

세 번째는 살아생전 예수님이 오시면 죽음을 맛볼 필요가 없다는 자세입니다. 이단들의 잘못된 종말론 때문에 휴거라 말만하면 이단, 삼단으로 오해받기 쉬운데요. 우리가 살아생전에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것은 바른 신앙의 태도라 생각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4:17)

결론적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에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치유하시고 영육 간에 건강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주님 안에서 악령의 세력도 이기고, 질병도 이기고, 죽음이 쏘는 독화살도 막아내는 강한 성도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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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되신 예수님ㅡ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마가복음 9장1~23절)=

1. 변형되신 예수님

본문은 마가복음 9장2~23절입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 모습이 변형됩니다. 어떻게? 옷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빛이 나려면 광원이 필요합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광원 없이 빛이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빛은 초자연적 현상입니다. 원인 없이 결과가를 내는 분은 창조주밖에 없습니다. 빅뱅이론도 질량이 큰 불덩어리가 있었다고 전제합니다. 불덩어리의 제1원인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가졌지만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한 분입니다. 동등한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 흰 정도를 빨래에 비유합니다. 2절을 보면“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이라는 비유법과 “매우 희어졌다.”는 강조법을 사용합니다.

대학 실험실에 선배 대학원생이 강의를 할 때 와이셔츠를 입어야하는데 세탁을 귀찮아했습니다. 목 카라에 때가 끼면 지우기가 번거로웠습니다. 담가만 두어도 희게해 주는 세제가 처음 나오자 뛸 듯이 기뻐한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은 담가 둔 사실을 깜박 잊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세제가 강해 와이셔츠가 흐물흐물하였습니다. 세제의 수십 배가 와이셔츠 값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옷은 세상 어떤 초강력 세제로도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났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함께 올라간 산은 헬몬산 입니다. 해발 2,850미터입니다. 설악산(1,780미터) 보다 1,070미터 높습니다. 만년설이 있는 아름다운 산입니다. 예수님 옷은 만년설보다 더 빛났습니다. 예수님은 옷뿐 아니라 용모도 변했습니다.(눅9:29)

예수님의 변한 모습도 신비한데 누가 나타났습니까?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약BC,1400년 전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약BC800년 전 선지자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나이차이도 600살입니다. 시공을 뛰어넘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천년을 하루 단위로 봅니다.

예수님은 기도 중에 변형되었습니다.(눅9:29) 예수님이 기도하면 제자들이 같이 하는 행동이 있죠? 잠을 잡니다. 누가복음9:32절은 깊이 졸았다 합니다. 영어로 very sleepy입니다. 졸다가 깨어난 베드로는 예수님께 획기적인 제안을 합니다. 초막 세 개를 짓고 거기서 눌러 살자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땅에 눌러 살고자 함이 문제입니다. 이땅에서 천년만년 살수 없는데 말이죠? 베드로는 자기를 위한 초막은 필요 없다 합니다. 아랍사람들은 존귀한 사람이 왔을 때 존경과 예의의 표로 장막을 쳐줍니다. (왕하 4:9,10). 베드로는 초막 셋의 제안으로 최고의 예우를 갖춥니다.  

베드로는 ‘먼동나생’ 형입니다. 먼저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하는 스타일입니다. 이런 스타일은 추진력이 있고 겉과 속이 투명함이 장점이지만 실수도 많이 합니다. 베드로는 눌러 앉자는 제안을 해놓고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초자연적인 광경이 무섭기도했습니다.(막9:6)

예수님은 인생들을 섬기느라 바빴습니다. 잠도 못잤습니다. 폭풍 속에 짬이나 곤히 잠을 청하기도 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자주 녹초가 되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참고하면 예수님은 12제자를 앞세워 일합니다. 2만 명에게 떡과 고기를 나누어주는 일이 쉬웠겠습니까? 제자들은 이사야 선지자 예언대로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는 예수님만 보았습니다. 그러다 변형된 예수님을 봤습니다. 베드로는 문제 많은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습니다.예수님과 천년만년 눌러 앉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변한 모습을 보이셨을까요?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고 하였던 분이 왜 보여주었을까요? 9장7을 참고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귀를 틀어막지 말고 들으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말씀을 들으려하지 않으니 예수님은 충격요법 썼습니다. 하나님도 엄위하게 직접 말 좀 들으라 합니다. 믿어야할 근거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로 선언한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 곧 하나님이기 때문에 믿어야합니다.

아들은 어떤 자입니까? 피조물은 만들고 아들은 낳습니다. 아들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입니다. 낳다는 영어로는 beget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만든 피조물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낳은 유일한 독생자입니다.

‘믿다’의 뜻은 첫째 한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입니다. 두 번째 신뢰를 근거로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셋째 미래를 위해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어떤 대상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상태를 믿음이라합니다.

이들이 믿을 내용은 8장31절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고 예수님이 이땅에 온 목적입니다. 수 천 년 동안 약속되고 예견된 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십자가 말씀을 듣자마자 얼굴이 사색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조용히 따로 모시고 가 책망합니다. 본문에는 항변했다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고 꾸짖습니다. 예수님의 최 측근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 길을 가야합니다. 이들은 최측근으로 예수님의 뜻을 먼저 알고 믿어야했지만 베드로는 오히려 길을 막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예수님에 대한 충심에서 나오기도했지만 예수님이 힘없이 죽으면 자기의 인간적인 꿈도 물거품이 됨으로 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2.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신 예수님

귀신들린 아이를 고친 사건은 9장 14~29절입니다. 이 사건 속에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 엿봅니다. 측근 3명의 제자들뿐 아니라 산 아래 있던 나머지 9명의 제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9명 모두 고치지 못합니다. 이를 보고 있던 서기관들이 제자들의 무능력에 대하여 공격합니다. “너희가 그러고도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있느냐?”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영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왜 아이를 못 고칩니까? 지도자들이 깨어 있었다면 귀신들이 아름답고 튼튼하게 자라야할 아이를 사로잡았겠습니까? 믿음이 없는 시대일수록 귀신들이 득세합니다. 영혼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갑니다. 시대가 어두운 것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한 신자들의 책임도 있습니다.

본문의 아버지의 마음을 상상해 봅니다. 저의 첫째 딸이 4살 때입니다. 이때 한 인물했습니다. SNS 사진 보고 아동 모델 하라고 제안 전화 오기도 했습니다. 대학생들이 예쁘다고 사진 찍느라 바빴습니다. 이런 딸을 둔 저는 얼마나 더 사랑스러웠겠습니까? 어느날 아이가 종이 날에 손을 베었습니다. 피가 나왔습니다. 또 한 번은 아빠 면도하는 것이 신기했던지 자기도 면도한다고 흉내내다 입술을 베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나의 손가락이 아프고, 입술이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본문에 아이 아빠의 심정도 자기가 대신 병에 걸렸으면 했습니다. 아이 아버지는 예수님께 어떻게 말합니까? 9장23절에 “무엇을 할 수 있거든” 고쳐달라합니다. 할 수 없으면 말라는 것이죠? 아버지도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인 서기관들, 둘러싼 무리들, 아이의 아버지, 최측근 제자들 모두 하나같이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대에게 무엇이라 한탄합니까? 9장19절“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다른 성경에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하고 한탄합니다. 패역하다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를 거스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뭐라 합니까? 9절23절“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제자들에게는 무엇이라 합니까? 8절33절“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또 9장29절에는“기도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배우는 교훈입니다. 첫째는 믿음을 뒤흔들고 갉아먹는 감정을 다스려야합니다.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를 생각해봅니다. 베드로는 처음 물 위에 발을 딛을 때는(마태복음14장28~31절)예수님처럼 물위를 걸을 수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베드로는 전능하신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자신도 충분히 물위를 걷게 하리라는 사실을 이성으로 믿었고 감정도 그렇게 여깁니다. 처음엔 물위를 잘 걸었습니다. 중간에 바람이 불었고 바다 아래를 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작용하여 걷는게 지속된다는 객관적인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숨어서 안보이시는 것도 아닙니다. 변한 것은 갑자기 자신을 집어 삼킬 듯 한 시퍼런 물을 보고 빠져 죽을 것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생깁니다. 이감정이 요동쳐 이성적까지도 마비 시킵니다. 우리는 늘 이런 바람들을 만납니다. 바람으로 감정이 춤을 추며 믿음의 성을 허뭅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잘 살아야지 하며 승용차를 출근하다 눈이 내리는 상황이 되면 눈에 미끄러져 10중 충돌사고 나면 어떡하지 하고 믿음을 잃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성경캠프나, 수련회 에서서 믿음이 충만하다가도 집에 돌아와 일상생활을 하면 제자리걸음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감정이 구원 받았나 받지 않았나 의심하게 만듭니다. 구원은 성경 말씀에 기초한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근거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감정이 이 이성을 넘어뜨립니다. 우리는 믿음의 습관을 들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습관화를 위하여는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신자들과 교제를 꾸준히 하여야합니다.

 

본문 아버지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아들을 고처줄 줄 믿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예수님이 산에 가고 없자 9제자들에게 부탁했는데 못 고쳤습니다. 9제자들 경험 부족아니었습니다. 둘 씩 둘 씩 전도여행 보냈을 때 귀신 쫓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그런데 왜 못한 것입니까? 경쟁심, 욕심에 사로잡혔습니다. 3명만 따로 산에 데리고 간 예수님께 불만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3명만 제자냐? 우리도 있다?”할 수있었습니다. 예수님 안 계실 때 한 건하여 점수 따자하는 경쟁 심리도 있었습니다. 또 의지할 예수님이 눈에 안보이니 우리가 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도 들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초심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거든하고 가정법을 썼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할 수 있을까? ” 우리는 이럴 때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하고 물리침으로 믿음을 잃지 않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지적합니다. 사람의 일은" 예수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다 하겠습니다"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꼭 있습니까? 살아서 왕이 되어 세상을 잘 다스려 주면 우리도 좋고 다 좋아집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일거양득이라 생각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2:13절은 ‘너희 안에서 행하는 이는 하나님이 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농사지어 자랑스럽게 내놓은 가인식 믿음은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양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바란 아벨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본문의 아버지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말이냐! "하는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버지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예수님만 온전히 믿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 믿음 위에 예수님은 온전케 된 아들을 선물로 줍니다. 우리가 이런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날마다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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