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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기독교정보

마태복음 말씀 나눔

by 명주(明珠) 2025. 10. 30.

기도의 정석-주기도문 강해(마태복음6장9-13)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는 수단은 세 가지입니다. 말씀, 성례, 기도입니다. 성례는 침례와 주님의 만찬입니다. 마지막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기도 할 때 은혜를 주십니다. 기도 안 하면 안 주신다고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24시간 쉬지 않고 마치 숨을 쉬듯이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기도에 대한 신자의 자세를 먼저 말씀드리고 본문을 시작하겠습니다.

 

1. 교회론이 잘못되었을 때

 

얼마 전 시사프로에 한 여성의 안타까운 죽음이 나왔습니다.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자 답답한 마음에 평소 다니던 기도원에 갔습니다. 거기서 사기꾼 부흥 강사에게서 속는 사건이었습니다. 남편이 쓰러진 것이 “당신이 목사 사모님의 길을 안가서 모든 불행이 왔다.”라고 하여 현재 남편과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하게 만들어 가정을 파탄 냅니다. 또 선교비 명목으로 2억 원이 넘게 뜯어냈습니다. 이분이 결국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습니다. 속이는 사람이 물론 가장 악하지만 기도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신앙을 가졌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란 문구가 성경에 있을까요? 없습니다. 미국 교회 앞에서 설문조사 했더니 60프로가 성경에 나온다고 했답니다. 우리 부모들도 자식들이 무조건 땡 깡을 부린다고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습니다. 4살 아이가 칼을 요구하면 칼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제가 4살 때 어머니가 칼국수를 썰고 둔 부엌칼 몰래 들고 가다 넘어져 왼쪽 눈 아래를 찔려 상처가 났습니다. 저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제가 4살 때 벌써 칼을 잡았고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입니다. 부모는 그 자식의 요구가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닌가를 심사숙고한 후에 들어줄 건 들어주고 안 되는 것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2. 기도의 응답

 

하나님이 우리의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본다는 뜻도 기도를 100% 들어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뜻은 아버지가 아이들 두 발 자전거 가르칠 때 상상하시면 됩니다. 아버지는 계속 자전거를 뒤에서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다 어느 정도 스스로 타면 살짝 손을 놓고 뒤 따라 갑니다. 그리고 넘어지려는 순간에 다시 잡아 줍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아이의 자전거 뒤를 따라가는 형국을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본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3.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문화적 배경

 

마태복음 6장 9-13절을 주신 배경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절을 보십시오.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쭈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1세기 유대에는 세 개 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입니다. 당시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곧 올 거라는 믿음이 팽배했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아가 와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를 해방시키고 유대인이 중심이 된 나라를 건설한다는 사상입니다. 이날을 대배하기 위하여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이런 파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강조했습니다. 사두개파는 현실파입니다. 에세네파는 쿰란동굴에 거주하며 금욕을 강조했습니다. 이 파들은 제각기 자기들의 정체성과 사상을 담은 기도문이 있었답니다. 그걸 주문처럼 하루 3번씩 습관처럼 외웠습니다. 세례요한이 에세네파였습니다. 그의 제자 중 몇 명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력이 커지자 우리도 그런 정형화된 기도문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여 기도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을 주신 배경입니다. 동기야 어찌 되었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기독교의 핵심 내용을 담았고 우리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 다른 교회들은 주기도문을 습관처럼 자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주기도문인데 중간에 기도가 빠져 주문이 되기 쉽습니다. 주문 외우듯이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습관처럼 하지 않습니다.

 

4. 우리 아버지

 

먼저 6장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에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십니다. 드라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출생의 비밀입니다. 어렵게 살아가던 남자가 알고 보니 모 기업 회장의 감추어 둔 아들이었더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꿈을 꿉니다. 보모님들이 놀리느라 아이들을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면 “그래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 그렇다면 나의 출생의 비밀은 대기업 회장이 버린 아들이 아닐까?” 이런 꿈을 꾸기도 합니다. 저만 그런가요? 그러나 하나님과 회장은 비교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자들입니다. 하늘을 보좌 삼고 땅을 발등상 삼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는 아버지로 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이 있어야겠습니다.

 

본문에 아버지는 “파테르”입니다. 파테르는 근엄하게 “아버님 아바마마” 란 뜻이 아닙니다. “아빠”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던 친근한 단어입니다. 파테르는 구약에는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처음 쓰신 단어입니다. 우리 신분은 보통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친아들, 친딸이 된 자들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 아빠 앞에 서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단어는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로 부르라 합니다. 나의 아빠, 개인의 아빠가 아니라 우리 아빠로 부르라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공동체 지향적인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 아버지가 다른 분이 계시다면 한 지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5. 우리 아버지-아버지의 사랑

 

랍비의 우화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녀를 어깨에 메고 사랑을 표현하는 인물로 종종 묘사합니다. 저희 아버님은 4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기일이 9월 10일 얼마 전이었습니다. 제가 본문을 실감 있게 전달하기 위하여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제가 살던 동네 이름이 절골입니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절이 나오는 동네라서 절골이었습니다. 그 절골을 거쳐 외길을 따라 4킬로 더 가면 왕신이란 동네가 나옵니다. 왜 왕신이냐 하면 왕이 그 동네를 지나가다 신발 벗고 쉰 동네라 하여 왕신입니다. 갓거리도 있는데 왕이 지나가다 갓을 걸어 놓고 갔다 하여 갓거리입니다. 왕신에 사는 4-5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저를 괴롭혔습니다. 당시는 학교에서 건빵도 나눠줬는데 건방도 뺏고, 쥐어 박히기도 하였습니다. 같은 절골에는 도와줄 형들도 없었습니다. 고민 고민하다가 아버지한테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동네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이놈 들 왜 우리 아들을 괴롭혀!”라고 하며 큰소리를 지르면서 왕신으로 올라가는 아이들을 따라 가 혼내 주었습니다. 소리가 얼마나 큰지 절골이 다 떠나갈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고 괴롭히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그 뒤로 괴롭힘이 없어졌습니다. 왕신에서 학교를 등하교하려면 반드시 제가 살던 동네 절골을 거쳐가야 했습니다. 강과 산이 가로막혀 돌아가는 길은 없었습니다. 돌아가려면 2개월은 걸리는 길이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절골에서 이순신 장군처럼 떡 버티고 서서 저를 지켜 주셨습니다. 괴롭히려고 하면 “아빠한테 다 일러준다.” 이러면 꼼짝 못 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제가 비행청소년이 되지 않고 6년 개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사례만 더 말씀드립니다. 저희 딸이 5살 때 어버이날에 종이로 카네이션을 만들고 리본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어버이 감사합니다.” 란 글씨를 써서 선물을 했습니다. 이 선물 1년은 가슴에 달고 다니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도 아버지의 마음을 살피는 자세가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빠, 아버지 앞에 설 때에는 이 두 가지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내편이라는 마음과 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살펴드리려는 마음입니다.

 

6.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뜻

 

6장 9절 하반절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첫째로 기도해야 할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거룩히 여기라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뜻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분인데 우리가 거룩하라고 기도한다고 거룩이 더해지겠습니까? 하나님은 본래 영광스러운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광 돌린다고 영광이 증가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두 가지 사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야곱의 우물 한번 상상해 보겠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2천 년 동안 마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도 2년 동안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야곱과 예수님을 비교할 정도였습니다. 야곱의 우물을 칭찬하고 높이고 영광 돌리려면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곱의 우물에 꽃다발을 두르고 폭죽 터트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야곱의 우물을 매일 와서 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시원하다 칭찬하는 것입니다. 또 그 물을 혼자만 마시면 안 됩니다. 야곱의 우물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야곱의 우물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영광 돌리는 자세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점심때 먹는 애찬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찬을 준비하는 자매님들에게 영광 돌리는 방법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밥과 반찬을 떠서 밥상에 올리고 멋있다고 사진 찍고 냉장고에 넣고 보관하는 것이 영광 돌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밥과 반찬을 일단 맛있게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또 혼자만 맛있게 먹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 받게 하고, 영광 돌리는 방법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잘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 은혜를 혼자만 누리지 않고 많은 사람과 나누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드린다는 의미는 내 삶이 거룩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 성이 땅에 떨어지면 안 됩니다. 초반에 설명드린 기도원 사기꾼 강사 사건이 방송을 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입니다.

 

7.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뜻

 

6장 10절 상반절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두 번째 기도해야 할 것은 나라가 임하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나라의 3요소는 국민, 영토, 주권입니다. 본문에서 나라가 임한다는 뜻은 통치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없이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이 곧 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없으면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조상 중에 이렇게 산 사람이 있습니다. 김시습이란 사람입니다. 이분은 생육신의 한 사람입니다. 강릉 김 씨입니다. 조선 3대 천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시습은 생후 8개월에 글을 깨쳤답니다. 3 살에는 글을 지었답니다. 5 살 때 대학과 중용을 마스터하여 신동이라 불렸습니다. 세종대왕에게 까지 소문이 나 5살 때 왕궁에 들어가 글을 지어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세종대왕이 칭찬하고 비단을 선물로 줄 정도였습니다. 김시습은 금오신화 비롯하여 20편의 저작물이 있습니다.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인생의 허무를 노래하다가 자신을 학대하고 세상을 야유하며 살았답니다. 이분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이 어디로부터 어디로 가는지를 물었다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는 사람은 천재라도 방황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방황하다 사찰에서 59세에 생을 마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와 아직으로 설명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으로 이미 우리 마음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미래적으로는 천년왕국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가시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내 노력으로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위로부터 나야 가능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탄생한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 이후로 우리도 반드시 성령님으로 인하여 위로부터 나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역사가 계속 일어나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래서 김시습처럼 방황하는 사람이 줄어들도록 해야 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임해서 이번 10월 20일 침례식에 참여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8.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뜻

 

세 번째는 10절 하반절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나고 없습니다. 따라서 하늘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통치와 영광만 있습니다. 하늘은 또 죄와 고통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은 나 몰라라 하고 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나의 뜻 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 가 늘 살피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살피지 않고 인간적인 의욕과 열심을 내면 내는 만큼 손해입니다. 또한 하나님 뜻이 아니면 그 길을 가지 않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은 한편으로 보면 무서운 요구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완벽히 이루어진다면 공산주의가 다 무너져야 합니다. 공산주의 말만 공산이지 공산당이 특권을 다 차지하지 않습니까? 자본주의도 무너져야 합니다. 현재 전 세계 1%의 부자들이 나머지 99%를 다 합친 재산보다 2배가 많다고 합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신주주의, 신본주의로 바뀌어야 합니다.

 

또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은 생명이 살아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너무 맛있는 음식을 맛보거나, 너무 황홀한 자연경관을 보면 누군가 같이 먹고 봤으면 하는 마음이 많습니다. 특히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뜻은 혼자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불완전하지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늘에는 병자들이 없다고 했는데요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성도가 병으로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온전하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주변에 병으로 고통받는 성도를 위해 중보기도 하여야 합니다. 질병에서 온전케 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아야겠습니다.

 

9.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의 뜻

 

네 번째는 11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일용할 양식만 구하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무서운 요구이십니다. 우리는 10년 치 양식, 노후 대비 양식까지 구하기를 잘합니다. 또한 그 양식을 자손에게 물려주기도 합니다.

 

본문을 좀 달리 말하면 단순하게 하루치 양식만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복잡하지 않게 심플(Simple)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심플하지 않으면 신풀(Sinful)하게 된답니다. 신은 죄(Sin)에 붙이는 말입니다. 심플하지 않으면 심플하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훈련을 한 일이 구약의 만나 사건입니다. 당시는 하루치만 거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2~ 3일 치를 거두었습니다. 많이 거둔 양식은 아침에 다 썩어서 냄새가 났습니다. 하루 이상의 양식을 위하 수고한 모든 수고는 썩는 양식을 위해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6일 차에는 2일 치 양식을 미리 거두라 했습니다. 그다음 날은 안식일이어서 미리 거두어도 썩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꼭 7일째 거두러 나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혹시 실수로 하나님이 내려주지 않나 하고 나갔었습니다.

 

일용할 양식만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은 내일은 내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또 먹이시니까 그 하나님께 내일을 맡기라는 의미도 됩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란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내일의 주인이 하나님이니 하나님께 다 맡기라는 뜻입니다.

 

10.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의 뜻

 

다섯 번째는 12절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본문은 우리가 타인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큰일 났습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 가운데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운전하면서 뒤에서 빵빵 거리거나 갑자기 끼어드는 사람에게 살인 심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우리 주변엔 늘 원수들이 생겨납니다. 그럼 우리는 다 구원받지 못합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과의 연합의 교리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죄는 이미 예수님과 연합하여 십자가상에서 다 사해졌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의 위치에서 원수의 죄를 이미 용서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3:34절“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우리는 이미 원수의 죄를 용서했습니다. 이제는 이런 자들로서 남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기는 적어도 일곱 번까지는 용서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예수님께 묻습니다. 남을 7번까지는 용서해야 하냐고 예수님은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490번 하라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너희는 용서가 불가능하다는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면 유치원 원장이 여주인공의 외아들 5살 아이를 유괴하고 죽입니다. 엄마 입장에서 유괴살해범이 용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주변에서 성도들이 자꾸 용서를 강요합니다. 그래서 용서하러 교도소에 갔는데 범인도 이미 용서받았다과 하면서 얼굴이 너무 평온했습니다. 여주인공은 충격을 받고 쓰러집니다. 그 후로하나님을 원만하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직접 체험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돕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체험하러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체험한 입장이 아니라면 용서하라고 남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이 백데나리온 자기에 빚 진자를 용서 못한다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일만 달란트는 당시 유대 사람들이 로마에 마친 50년 치 세금에 해당하는 큰 액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어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 대한 마음의 증오를 밀어내야 진정한 용서가 된다는 뜻입니다. 마치 흙탕물에 맑은 물이 들어와 흙탕물을 밀어내면서 깨끗해지듯이 예수님도 용서를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율법적으로, 기계적으로 용서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더 커지기를 자연스럽게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11.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의 뜻

 

여섯 번째 기도가 13절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 본문에서 시험은 마귀,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을 말합니다. 악도 일반적인 악이 아니라 악한 자란 뜻으로 동일하게 사탄을 말합니다. 우리 성도는 영적인 전쟁터에 있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편에 서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탄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탄을 유혹을 이기셨고 십자가를 통해 사탄의 머리를 밟으셨습니다.

 

현재 세상은 하나님이 악을 어느 정도 누르고 있는 형국입니다. 어떻게 누르고 있습니까? 사회법으로 누르십니다. 형법, 민법, 도로교통법, 법 많습니다. 또 사람의 양심을 사용하셔서 악을 제어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4절을 보면" 위정자들이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위정자들을 세워 악을 제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악을 제어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시면 세상은 금방 악으로 가득 차고 종말이 옵니다. 제3차 대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탄, 마귀, 귀신과의 영적 전쟁터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도 문제지만 모든 일상을 귀신과 연결시키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단들 중에는 귀신론을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돌부리 걸려 넘어져도 귀신이 그랬다 합니다. 머리가 좀 아파도 귀신의 역사라 합니다. 본인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넘어진 것입니다. 본인이 건강관리 잘못하여 머리가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이 억울해한답니다. 내가 안 그랬는데 다 뒤집어씌운다고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잘 넘어갈 때는 내가 할 수 있을 때, 내가 성공했을 때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저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하면 유혹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에게 유혹이 된 거는 만들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왜 충신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와 간음죄를 졌습니까? 그가 목동이었으면 죄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왕이라서 모든 걸 할 수 있으니 죄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내가 뭔가 됐다 싶을 때, 성공했을 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기도하고 조심해야겠습니다.

 

또 하나는 사탄은 성도의 감정을 자극하여 유혹을 많이 합니다. 분을 내게 하여 성도 간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가인도 자기 분에 못 이겨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따라서 마음에 분노가 일 때 “아 이거는 사탄의 장난이구나!” 알아차리고 분을 내는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이상으로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에 대해 다 교제했습니다. 그러면 다 같이 주기도문으로 기도드리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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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과 예수님 설교의 확연한 차이(마태복음7장28-29)

오늘 성경 본문은 서기관과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설교를 하셨는지 본문을 통하여 배우길 원합니다.

초등학생 예화

아버지와 초등학생 아들이 함께 설교를 들었습니다. 교인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답니다. 감동의 눈물은 아니고 설교가 철학, 어려운 신학 용어를 써 어렵고 지루하여 하품을 많이 한 탓입니다. 예상했듯이 이런 예화는 어린 아들이 다른 반응을 보이죠. 아들은 졸지도 않고 똘망똘망 설교자를 주시합니다.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설교에 잘 집중할 수 있지?” 아들은 대답합니다. “저는 목사님을 보지 않고 뒤에 십자가를 봤어요. 십자가와 산수 시간에 배웠던 더하기 기호가 겹치며 예수님을 믿는 일은 더하기와 같음을 알았어요”라고 했답니다. 아버지는 설교보다 아들에게 더 교훈을 받았답니다.

 

게티스버그 연설 일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며 인용 횟수가 많은 연설은 미국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Gettysburg) 연설입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통치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이 문장이 나온 배경이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어느 작은 시골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목사님 설교에 유사한 문장이 나왔답니다. 링컨은 바로 메모를 했답니다. 메모지가 없어 낡은 편지 봉투에 기록합니다. 그리고 마차를 타고 오며 연설문을 작성했답니다. 게티즈버그는 남북 전쟁 때 5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난 전쟁터입니다. 여기에 국립묘지를 세웠고 링컨이 초대받아 연설합니다. 링컨은 당시 정치적인 열세였는데 설교로 인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시골 교회 무명 목사님 설교가 역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본문은 예수님 설교입니다. 마 7장 28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예수님 설교를 들은 제자와 무리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단순한 놀람이 아니고 깜짝 놀랐습니다. 패닉상태에 빠졌습니다.

패닉의 유리

패닉이란 말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합니다. 판이라는 목축의 신인데 모습이 괴이합니다. 하체는 소 모양이고 상반신만 인간입니다. 판이 우렁찬 목소리를 내면 사람들은 공포에 빠집니다. 패닉은 여기에서 합니다.

산상수훈

예수님의 설교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입니다. 산상수훈(山上垂訓) 부르고 보화와 같은 말씀이라 하여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을 몰라도 산상수훈은 압니다. 중등학교 도덕책에도 나왔습니다. 인도의 간디도 죽는 날까지 열심히 읽었던 부분이 산상수훈입니다. 여기서 비폭력 무저항 운동 정신이 나왔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고 1년 반 지났을 때 합니다. AD31년 경입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밤새워 기도합니다. 기도 후에 무리 중심역사에서 열두 제자 중심으로 전환합니다.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이들을 제일 앞자리에 앉힙니다. 뒤에는 몰려든 무리를 앉히고 한 설교입니다.

설교 장소는 산상이라 하여 높은 산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낮은 언덕 수준입니다. 갈릴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바위에 걸터앉아 말씀을 전합니다. 말씀 전하는 모습은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와는 정반대입니다. 구약의 계명은 시내 산에서 받습니다. 2,000m 정상입니다. 백성들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우레와 번개와 구름과 큰 나팔 소리와 불꽃, 지진 가운데서 율법을 받습니다. (출 19장 16-25)

그런데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반대입니다. 누구나 다 잘 볼 수 있고 잘 들리는 장소입니다. 아이들도 예수님 가까이 가 만질 수도 있는 분위기입니다. 율법과 은혜, 모세와 예수님의 사역 성격이 대비되는 장면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천국이란 단어를 많이 씁니다. 5번입니다. (마5:3,10, 19, 20, 7:21) 사역을 시작할 때 첫 메시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입니다. (마3:2) 천국은 영어로 Kingdom of heaven입니다. 하늘 왕국으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와서 힘으로 세운 왕국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의 천국은 로마 압제자들을 물리치고 유대인이 중심이 된 왕국이 아닙니다. 마음에 이루어지는 영적 왕국입니다. 그 왕국의 백성은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또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핍박받는 자여야 합니다.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도 돌려대는 자, 이자는 생각지도 않고 돈을 빌려주는 자, 남의 눈의 티보다는 자기 눈 들보를 먼저 빼려는 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에게 실망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상수훈에 천국 백성이 가져야 할 가치관은 세상 가치관과 반대입니다.

예수님 설교에 대한 무리의 반응

본문 강의 주제는 산상수훈 내용이 아니고 설교 방식과 무리의 반응입니다. 본문 29절에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은 권위 있는 자와 같았고 서기관들과 달랐습니다. 말씀이 역설적입니다. 당시 최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들이 공회 의원이고 바리새인이고 율법사들이며 최고 지도층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나사렛 시골 출신이며 무명의 청년에 불과합니다.

좋은 설교의 7가지 조건

로버트 루이스 데브니란 사람이 좋은 설교의 요건을 7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충실성입니다. 성경 본문에만 충실해야 합니다. 강단에서 개인의 신념, 철학을 설교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는 통일성입니다. 설교를 들은 10명 중 적어도 8명은 주제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설교주제가 일관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설교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교훈성입니다. 인간은 이성적입니다. 이성을 살찌우는 설교를 위하여 영양분이 풍부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역동성입니다. 마치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는 운동선수처럼 간결하고 짜임새가 있어야 합니다. 여섯 번째는 영향력입니다. 머리와 가슴을 때리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짜임새입니다. 구성의 앞뒤가 잘 들어맞게 통일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이 일곱 가지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백합화와 까마귀를 비유한 염려에 대한 설교는 일관성 있게 결론을 향해 달려갑니다.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고, 현세가 아니라 내세에 관심을 두도록 일관되게 설교합니다.

표현도 진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두괄식을 좋아합니다. 먼저 결론을 말씀하고 그다음에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복잡한 613개의 율법 조문과 수천 가지 실행 규정 열거할 필요 없이 핵심을 찌르는 설교를 합니다.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구제, 금식 등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설파합니다. 주옥같은 비유를 들어 말합니다. 성도를 빛과 소금에 비유합니다.

서기관의 설교

서기관들은 긴 예복을 입고 다니고 항상 옆구리에는 두루마리를 끼고 있었습니다. (눅20:46) 수백 미터 떨어져서도 서기관인지 아닌지 다 알았습니다. 당시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으니 구약성경은 파피루스에 손으로 일일이 써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일점일획도 잘 못 쓰면 안 되니까 똑똑한 사람들이 서기관들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이들은 율법을 정리하고 해석도 합니다. 그래서 율법사라 합니다. 이들은 율법 613개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613개 중 248개는 하라는 명령이고 365개는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서기관들의 설교를 상상하면 무엇 무엇을 하라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 많았을 듯합니다. 이들 앞에 백성들은 어떤 마음으로 나왔겠습니까?. 마치 회초리를 맞으러 나온 아이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놀랄 이유가 없었습니다.

설교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

다음은 저의 일천한 경험을 공유합니다. 저는 남 앞에 나서기를 부담스러워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일명 꿔다 놓은 보리 짝 형입니다. 걸을 때도 앞서가지 않고 남들 뒤에 따라가는 것이 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강의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저는 꿔다놓은 보리 짝 형이어서 강단에 섰다가 횡설수설하다 내려오거나 떨려 머리가 백지장처럼 될까 봐 원고를 작성하여 강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고를 작성의 좋은 점은 기록으로 남으니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성경강의는 글이 아니라 말이니 옆에 사람을 앉혀 놓고 말해주듯이 구어체로 원고를 작성합니다.

컵에 물을 꼭 들고 올라옵니다. 물을 준비해 주는 분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계기가 있습니다. 체육관에서 2,300여명이 앞에서 어떤 내용을 설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2,300 명이 주는 눈길이 아주 무서웠습니다. 긴장한 상태로 말을 하니 시작한 지 채 5분이 안 되어 입속이 다 말라버렸습니다. 입속이 마르니 혀가 입안 천정에 붙었다 아래에 붙었다 하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30분이었는데 10분도 안 되어 급히 마무리하고 내려온 일이 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꼭 물을 챙기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저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물을 꼭 챙겨서 낭패를 겪지 않길 바랍니다.

강단에 설 때는 욕심을 버리는 일이 제일 어렵습니다. 욕심 때문에 실패한 경험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여름 캠프 때 특강 강사를 부탁받은 일이 있습니다. 장소는 폐교된 시골 초등학교입니다. 제목은 창조과학관련 특강입니다. 제가 물리학 관련 학과 출신으로 전공 분야여서 의욕 백배, 사기충천했습니다. PPT를 50페이지 이상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강의 시작 하고 PPT 4컷이 넘어가면서 참석자의 반이 졸기 시작했습니다. 눈물도 고이셨습니다. 물론 하품을 많이 하여 고인 눈물입니다. 믿었던 장로 분께서 가장 먼저 눈을 감으셨습니다. 강의시간이 캠프 시작하고 둘째 날 점심 먹고 난 직후였습니다. 청중은 오랜만에 한적 한 시골 초등학교 캠프에 왔습니다. 잠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또 서로 간에 이야기 꽃피우느라 밤을 새운 분도 있었습니다. 또 몸보신한다고 점심메뉴에 탕도 준비하여 배불리 먹었습니다. 에어컨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천근만근 눈꺼풀이 10만 톤으로 내리 누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PPT 10컷 이후부터는 무성영화를 틀듯이 급하게 넘기면서 끝낸 적이 있습니다.

이 일 이후 욕심을 줄이는 방법을 고민하다 강의 원고의 장수를 철저하게 제한하였습니다. 수요일 강단 강의는 A4지 4장입니다. 일요일 강단은 5장입니다. 일요일에 너무 빨리 끝나도 점심 준비하는 성도님들의 항의가 있었습니다. 한글워드의 좌우여백은 30mm, 상하여백 15mm, 글씨 포인트는 10포인트, 문장 간격은 160%로 합니다.

사람의 인지능력은 20분까지 최고조에 달했다가 점점 떨어져 40분이면 바닥을 칩니다. 위와 같이 원고 장수를 제한하면 30-40분 사이에 강의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또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날려버려서 욕심을 부려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성경 텍스트도 길면 처음부터 마음이 힘듭니다. 10구절을 넘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청중들이 처한 환경과 대상의 수준을 미리 파악하여 준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와 타지 교회 청년연합 캠프에서 강의할 일 이 있었습니다. 장소는 농촌 마을 한 가정 집 방에 모였습니다. 한여름에 넓은 마당에서 삼겹살 파티를 했습니다. 예상 밖으로 방이 매우 좁았습니다. 시골집이니 에어컨이 없었고 몹시 더웠습니다. 모두 연신 부채질을 했습니다. 또 청년들이 당일 처음 만났습니다. 서로 잘 몰라 분위기가 서로 서먹서먹했습니다. 모기기가 많아 모기향을 피워 연기가 방안에 자욱했습니다. 마치 신병 훈련 때 가스 실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일 날은 전국 단위 축제 첫날입니다. 축제 첫날 저녁은 불꽃놀이를 합니다. 강의 도중에 폭죽이 터졌습니다. 폭죽이 터지자 시민들의 ‘와’ 하는 함성까지 방안에 들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고 강의 분량을 40분 분량으로 준비했습니다. 강의하는데 큰 곤혹을 치렀습니다. 환경을 예상하고 상황에 맞게 가벼운 분량으로 준비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어린 주일 학생들 앞에 설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인과 상황은 또 달랐습니다. 학생들은 강의를 듣다가 본인이 의문이 생기면 곧바로 손을 들어 질문을 합니다. 손 안 들고도 수시로 질문하기도 합니다. 청중의 수준에 맞게 준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전달하는 방법도 신경 써야 합니다. 목소리도 너무 저음으로 깔아도 안 되고 높아도 안 됩니다. 솔 톤이 가장 좋습니다. 말할 때는 될 수 있으면 부사나 형용사를 강조하면 안 된답니다. “비가 많이 내려서 큰 흙탕물이 내려갑니다.”란 문장을 전할 때 “많이~와 큰~”을 강조하면 본인은 감동이 되지만, 내용 전달력이 떨어집니다. 문장은 의미 덩어리로 될 수 있으면 명사를 강조합니다.

전달을 방해하는 요소 중에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는 음성이나 제스처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오른 손을 너무 자주 사용합니다. 적절한 제스처는 전달을 돕지만 불필요한 제스처는 전달을 방해합니다.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말도 있습니다. “에~ 그~ 저~ 에또 ~저또~ 참~ 그참~” 이런 말을 반복하면 전달력이 떨어집니다. 복장도 중요합니다. 최대한 정중한 복장, 밝은 표정으로 올라와야 합니다. 이빨에 고춧가루가 낀 것을 모르고 올라왔다면 성도들은 그 고춧가루에 신경이 쓰여 내용을 제대로 경청하기 어렵습니다. 10돈 황금 목걸이를 걸고 강단에 섰다면 반짝이는 목걸이가 신경 쓰여서 내용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습니다.

시선 처리도 중요합니다. 좌우 가운데 골고루 시선을 던져서 청중과 교감해야 합니다. 강단에 서기 전에 과식하거나 청량음료 예를 들면 콜라, 사이다를 마시면 절대 안 됩니다. 강의 도중 탄산가스가 계속 올라와 커억 커억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강의 제목을 정하는 것도 신경 써야 합니다. 제목을 들었을 때 청중의 흥미를 끌면서 본문과 잘 어울리는 제목을 고민하여야 합니다. 전문가들은 문장형식으로 길어도 안 되고 짧아도 안되고 두 단어를 조합한 제목이 좋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입니다. 자동차를 고치려면 리프팅 기계로 머리 위로 들어 올려놓고 천천히 살펴봅니다. 이처럼 내가 말씀 위에 서는 것이니라 말씀 아래에서 본문 파악을 철저하게 하고 묵상 시간을 통하여 내게만 주시는 말씀의 샘물을 길어 올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날은 본문을 읽고 이를테면 텍스트를 읽고 묵상하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영상시대 영상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강독 중요합니다. 대학에 독어독문학과, 영어영문학과를 가면 작품강독이라는 과목이 필수입니다. 옛날 고전 작품을 읽으며 저자의 뜻 의도를 찾아내는 작업 많이 합니다. 성경에 대하여도 이런 방식으로 강독하는 자세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성경강독을 통하여 본문의 제자들처럼 놀라움을 받는 명주로 교회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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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쉼을 주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11장 2-30)

아이들 키울 때 경험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아이들 3, 4살 때 집 안에서 북극곰 놀이 많이 했습니다. 한겨울에 방문, 베란다로 이어지는 문 다 열고 안방을 북극 온도로 만듭니다. 그리고 이불 뒤집어쓰고 아이들보고 “와!~ 들어와!~”하고 말하면 아이들은 이불 속으로 쏙 들어옵니다. 그러면 찬 공기를 피하는 놀이 했던 기억납니다.

 

또 아이들이 잘못하면 나무랄 때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밥을 먹다가 쏟으면 “나가서 벌서!”하고 꾸짖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네 어머님 나가겠습니다. “하지 않습니다. 울면서 엄마 품으로 와락 달려들어 안깁니다. 부모가 자신을 근본적으로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는 생태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라는 그런 뉘앙스입니다. 본문에서 12절에서 “천국은 침 노 당한다(12절)”라는 말씀에서 침 노의 뜻이 땅을 점령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아이들과 같이 하나님 품에 안긴다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본문 제목 오라의 의미를 상상하면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합니다. 초청 대상이 누구겠습니까? 본문에서는 2절부터 27절까지 그 대상이 나옵니다. 그 대상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첫 번째 대상은 세례요한입니다. (11당2~6)

 

2절을 보면 세례요한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옥에 갇혀있습니다. 어쩌다가 천하의 세례요한이 감옥에 갔을까요? 당시 왕을 탄핵하려다 갇혔습니다. 당시 왕은 분봉 왕 안티파스였습니다. 그는 이복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재혼한 아주 부도덕한 왕이었습니다. 그것도 헤로디아라는 아이까지 딸린 여인입니다. 문제는 아무도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세례요한 궁에 찾아가서 왕의 부도덕을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습니다. 1세기 유대 감옥이 좋았겠습니까? 요한은 어둡고 좁은 토굴 안에 갇혔습니다. 감옥은 비위생적이고 열악했습니다. 먹을 것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극한 환경에 처했습니다. 또 언제 목이 잘릴지 몰랐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옥에 갇히면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움직일 줄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추종 세력을 규합하여 붉은띠를 머리에 두르고 헤롯 정권 타도를 외치며 석방 운동을 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면회도 한번 오지 않았습니다. 석방 운동은커녕 시골 갈릴리로 물러갔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지친 요한은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인가?”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요한은 자신을 면회하러 온 제자 2명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그리고“예수님이 메시아 맞습니까? 아닙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셈입니다.

 

예수님은 의심에 찬 세례요한에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 예수님은 “내가 메시아 맞다. 더 이상 의심하지 마라.”하고 단도직입적으로 확답하지 않습니다. 5절은 구약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구약은 이사야 35장 5, 6절과 이사 야 61장 1절 말씀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나는 구약에 예언된 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약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고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말씀 앞으로 인도합니다. 구약에 예언된 말씀을 믿고 의심하지 말라고 돕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지 않음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때를 따라 움직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현재 처한 어려움과 고통을 나 몰라라 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누구보다 우리의 고통을 알고 이미 체험했고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응답은 우리의 스케줄을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옳은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다 옳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긍휼 없는 심판 3가지가 있습니다. 노아 홍수 사건, 아말에 족속 진멸 사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입니다. 이때 죄 없는 젖먹이 아기들, 말 못 하는 가축, 짐승들 모조리 죽었습니다. 이를 두고 하나님 불의하다 따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행위가 나의 뜻과 기대에 어긋나더라도 하나님의 처사는 항상 옳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영적인 메시아를 고대하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헤롯 정권을 타도해 줄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로마 식민지를 종식해 줄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GDP 80% 독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이런 빈익빈 부익부를 타계할 경제적인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또 당시 사회의 부패를 일거에 척결하고 구약의 다윗이나 솔로몬 왕국을 재현할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19세기 남미에서 일어난 해방신학이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약자를 위해 온몸을 바쳐 헌신하고 강자들의 탄압에서 약자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예수의 정신을 본받아, 교회는 억압받고 차별받는 자들의 해방을 위해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중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시각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칫 오해하기를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만을 위해 오신 분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복음 전한 자들은 기득권자, 종교 지도자, 부자, 왕, 다양합니다. 공회 의원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진리를 전했고, 부자 아리마데 요셉을 제자로 삼기도 하셨습니다. 교회는 소외된 자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구제 기관은 아닙니다. 교회는 양육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교육기관은 아닙니다.

 

독일의 히틀러의 나치즘이 유대인 600만을 학살했다고 합니다. 독일은 원래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기초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1919년 바이마르공화국이 전신입니다. 이 공화국은 바이마르헌법에 기초하여 탄생했습니다. 바이마르헌법은 20세기 근대헌법의 전형이 되었고 많은 민주주의 국가 헌법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1차대전을 패합니다. 그 후 독일은 전쟁 보상을 하느라 경제가 바닥을 칩니다. 이 혼란을 틈타 등장한 사람이 히틀러입니다. 히틀러는 교회를 빵 문제를 해결해주는 기독교로 변질시키며 정치에 이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엄청난 비극이 생긴 사례를 역사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빵 문제 해결사가 아닙니다. 교회는 영적인 일,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받도록 돕는 기관입니다. 아니 유기체입니다.

 

2. 두 번째는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11장7~8절)

 

7,8읽겠습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본문은 세례요한이 광야에 있을 때 세례요한을 찾는 목적이 잘못된 사람들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7절에서 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갔느냐!”의 뜻은 왕을 찾으러 갔느냐란 뜻입니다. 당시 갈대는 헤롯안티바스를 상징했습니다. 8절에 부드러운 옷은 사치와 방탕을 뜻합니다. 옷은 비쌀수록 부드럽습니다. 쌀수록 거칠고 뻣뻣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옷감은 볼리비야 비쿠냐 동물의 털이랍니다. 비꼬냐가 아니고 비쿠냐입니다. 이 동물은 낙타보다는 훨씬 작은데 낙타처럼 생겼습니다. 200g에 500달러 우리 돈으로 65만 원이랍니다.

 

당시 세례요한은 화려한 왕궁에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광야, 빈 들에서 사역했습니다. 부드러운 옷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빈티지 패션, 낙타털옷을 입었습니다. 검소한 음식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그는 구약 모세와 같이 훌륭한 지도자상이 아니었습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바리새인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본질은 외면하고 왕이라는 권력을, 또 화려한 부를, 자기들을 잘 먹고 잘살게 해줄 훌륭한 지도자를 추구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본질은 못 보고 자기들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이용하기 쉽습니다.

 

3. 세 번째는 진리에 무반응인 사람들을 초청합니다.(11장16~20절)

 

16절~20절에는 당시 아이들의 놀이를 비유하여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에 반응하지 않은 사람들을 지적하십니다. 19, 20절을 읽겠습니다. 오늘 날은 스마트폰이 나와서 아이들이 혼자 놀거리가 많습니다. 카페인 중독자가 많다고 합니다. 카페인의 카는 카카오톡, 페는 페이스북, 인은 인스타그램입니다. 당시는 아이들은 모여서 어른들 흉내를 많이 냈습니다. 시장 장터에서 물건 파는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흉내를 많이 내며 놀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고 또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방식으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여기에 호응은커녕 세례요한은 귀신 들렸다고 비난했고, 예수님은 쾌락주의자 취급했습니다.

 

오늘날도 복음의 진리에 무감각, 무반응 시대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허용한 빌리도 총독에게 예수님이 진리에 대해 증언한다고 하자 반응이 어땠습니까?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냐? (요18장37,38) 진리가 밥 먹여주느냐?”라고 하면서 비꼬았습니다. 진리는 외면한 채 상황 논리에 따라 강도 바라바를 풀어줍니다. 오늘날 이런 태도는 큰 문제입니다. 복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표현을 쓰면 비논리적인 게 힘을 발휘하는 세계를 믿습니다.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로 몇만 명을 먹이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는 반대로 갑니다. 논리적인 것, 과학주의, 실용주의, 인간성이 상실된 AI 시대로 흘러갑니다.

 

1995년 일본도쿄 지하철에 독가스 테러가 일어나서 12명이 죽고 5천여 명이 다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을 주도한 사이비 종교가 있었습니다. 옴진리교입니다. 어떤 분이 이 옴진리교 핵심 멤버 62명을 일일이 인터뷰했답니다. 근데 놀라운 것이 62명 대부분이 엘리트, 대학교수, 똑똑한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엘리트는 비논리적인 세계가 아니라 논리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논리만을 추구하면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는 사건이라 소개했습니다. 오늘날도 TV를 보면 엘리트들이 점을 많이 봅니다. 도사들을 많이 찾아다닙니다. 이단도 대학 교수진이 많다고 합니다.

 

4. 네 번째는 회개치 않는 사람들입니다.(11장21~25절)

 

21절에서 25절은 예수님이 공을 많이 들이고, 권능도 많이 행한 유대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음을 책망하십니다. 본문에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주요 사역지였습니다. 두로와 시돈과 소돔과 고모라는 이방 땅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음행과 음란의 대명사였던 북쪽 도시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 망한 최악의 도시입니다. 차라리 예수님은 거기에 복음을 전했으면 회개했을 뻔했다고 합니다. 아주 혹독한 비판입니다. 우리는 비교당하면 기분 나쁩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교만하고 회개치 않고 완악한 백성들에게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마음을 멸시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애통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마5:4) 다윗왕과 사울 왕의 죄를 비교하면 누가 더 파렴치 죄를 지었습니까? 다윗은 간음죄, 살인 교사죄, 직권남용죄, 거짓말한 죄를 지었습니다. 사울은 월권행위만 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양의 비유를 통하여 책망했을 때 회개의 눈물을 너무 흘려 침상이 눈물에 떠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애통하게 회개했습니다. 반대로 사울 왕은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숙도는 얼마나 빨리 회개하는 자인가? 아닌가가 가늠자가 될 수 있습니다.

 

5. 신약 신자들의 정체성(11-15)

 

11절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극찬합니다. 당시 상황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가고 예수님의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이때 보통 사람들은 상대를 비난하는 뒷담화를 많이 합니다. “세례요한 그렇게 안 봤는데 어떻게 선지자가 실족하냐? 어떻게 나를 의심할 수가 있지?”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극찬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말씀은 천국에서는 바로 우리 성도들이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히11장 39, 40절을 참고하면 됩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약속받지 못한 사람들이고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약속을 받아 온전케 된 자들이기 때문에 더 큽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세례요한보다 큰 자들입니다. 눅19:17절에는 우리가 장차 열 고을의 권세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10은 성경에서 완전수, 충만한 수를 상징합니다. 그러니 10 고을이 아니라 수많은 고을로도 번역합니다. 왕이 부러우십니까? 천국에서는 우리는 은하계 한 개씩은 맡아 다스릴 수도 있습니다. 은하계 한 개에는 4,000억 개의 태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4,000억 개의 별을 다스릴 큰 자들입니다.

 

6. 다 내게로 오라(28~30)

 

한번 정리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 초청의 대상은 구원받았지만, 의심한 세례요한, 권력과 부를 추구하는 자들, 진리에 무관심한 자들, 교만하고 회개치 않는 자들을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초청 대상자는 천국에서 세례요한보다 큰 자들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를 지칭하는 많은 단어가 있습니다. 무한경쟁 사회라 합니다. 위험사회라 합니다. 요즈음 싱크홀이 자주 발생하여 땅이 어디가 꺼질지 모릅니다. 소외사회라 말합니다. 군중 속의 고독, 왕따, 디지털 왕따가 많은 사회입니다. 정보사회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소비사회라고도 합니다.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입니다. 다원주의 사회라고도 합니다.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입니다. 글로벌 사회라고도 합니다. 지구촌이라 부르며 국가 간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습니다. 디지털 사회라고도 합니다. 요즈음은 AI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중 아주 흥미로운 정의가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라고 했습니다. 공감이 갑니다. 우리는 무한경쟁을 하느라 항상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니 거기에 따라가려니 압박이 심합니다. 성과주의 사회여서 어디 가나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그 결과에 대하여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피곤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유가 없고 짜증이 납니다. 짜증이 나면 싸우고 폭력적으로 됩니다. 피로사회여서 이혼율이 줄지 않습니다. 국가 간 전쟁도 끊이질 않습니다.

 

우리 개인에게 가장 큰 피로를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인류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의 짐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피로사회에서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다 예수님께 오라~”고 하십니다. 오면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쉬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쉬게 해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럼 우리는 내일부터 출근 안 해도 됩니까? 사업장 문 닫아도 다 먹고 살게 해주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땀을 흘려야 먹거리가 생기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출근은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쉼을 주십니까?

29절을 보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 마음에 쉼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마음에 생기는 불안과 두려움을 없애 줌으로 근본적인 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오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죽음의 짐을 벗겨 주심으로 쉼을 주십니다. 사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며 쉼을 주십니다. 본문에서 나에게 오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내게 배우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라는 뜻입니다.

 

이 시간은 온유와 겸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겸손이란 영어 단어 휴밀리티(humility)는 어원이 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본질이 흙입니다. 흙은 땅에 있어서 더 이상 아래로 떨어질 일이 없습니다. 사람이 높은 마음, 교만한 마음일 때 늘 불안한 것입니다.

 

온유에 대하여는 2가지 예화를 들겠습니다. 제가 탁구레슨을 3년 정도 받았습니다. 관장님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이 “힘 빼세요..” 입니다. 힘 빼고 건들건들 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힘 빼는 게 3년을 해도 안 빠집니다. 나도 모르게 욕심이 생겨서 힘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유명한 탁구 선수들 보면 아주 부드럽습니다. 여유가 있습니다. 왜입니까? 실력이 부족하지 않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어떤 귀부인이 모임에서 수십억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분이 그게 가짜라는 걸 알아보고 비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짜 귀고리를 한 부인이 신기하게 전혀 화를 안 냈습니다. 왜냐하면 귀부인의 백 속에는 똑같이 생긴 진짜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있었습니다. 혹시 잃어버릴까 봐 가짜를 귀에 걸었고 진짜는 백 속에 넣었던 겁니다. 진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의 비난에 초연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4,000억 개의 태양으로 구성한 은하를 1개씩 다스릴 자가 아닌가 상상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소유한 자들이면 이 세상 권력, 부, 명예에 좀 초연해지지 않을까요? 천국을 소유한 자의 정체성이 확고하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좀 더 온유해지지 않을까요?

 

본문에서 쉽고 가볍다는 의미를 살펴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과 나란히 같은 멍에를 맸다는 의미도 됩니다. 소 두 마리가 멍에를 같이 매면 힘이 강한 소가 약한 소를 끌고 가게 마련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도 예수님이 우리를 이렇게 끌고 가는 형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는 우리의 멍에가 가볍고 쉽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를 선교지에 파송할 때 3가지를 가졌는지를 묻는 답니다. “첫째는 가슴 속에 노래가 있는가? 두 번째는 가슴속에 유머가 있는가? 세 번째는 냄새에 무감각한가?”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쉼을 얻고 온유하고 겸손해진 자에게는 그 가슴에 흥이 있습니다.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그 여유 속에 유머가 나옵니다. 그리고 선교지에 어떤 냄새가 나도 화가 나지 않습니다. 냄새에 무감각하다는 것은 선교지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어떤 비난이 생겨도 그냥 다 무덤덤하게 넘어갈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을 얻고 이런 3가지를 가진 넉넉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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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마태복음12:1-15)

오늘 본문은 안식일 율법에만 열심을 내는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안식의 실체로 온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으로 안식일 율법 조항만을 지켰습니다. 십계명을 가지고 613 개의 세부 조항을 만들고 그 중 안식일 조항만 39가지였습니다. 안식일에 죽어가는 사람도 치료하지 않고 간단한 응급 조치만합니다. 안식일에는 집 밖 1,800미터 반경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침을 뱉어 땅이 패이면 밭갈이로 간주합니다. 이 바리새인들의 눈에 제자들의 잘못된 행동이 들어옵니다.

밀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을 고소한 바리새인

본문 1-2절을 참고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늘 배고팠던 제자들은 밀 밭 사이를 지나갈 때가 허기를 채울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입김으로 껍질을 날리고 먹습니다.

바리새인은 제자들이 손으로 비빈 행위는 탈곡행위요, 껍질을 날린 것은 도정 행위로 보고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송사합니다.

안식일 율법을 어긴 형벌 큽니다. 출31장14절을 보면 현장에서 돌로 쳐죽이라 합니다. 오늘 본문 분위기는 돌에 맞아 죽느냐 사느냐하는 긴박감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제자들을 변호합니까?

다윗을 예시로 제자들을 변호한 예수님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구약 시대 다윗과 제사장의 예를 들어 율법이라는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합니다. 삼상21:1-6참고하면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느라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래서 먹어서는 안 될 진설병을 먹고 생명을 구한 일을 하나님도 묵과하고 넘어간 사건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

마가복음 2:27에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다합니다. 본문7절에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합니다. 제사라는 형식보다는 마음 속에 자비라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사울왕의 월권행위

본문은 구약의 사울 왕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는 말씀의 인용입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에게 둘러싸여 망할 위기에 처합니다. 제사 드리기로 약속한 사무엘이 오지 않자 자신이 대신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라는 형식만 취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이끌어 내려고 합니다. 제사형식만 취하면 하나님이 기계적으로 도와 주리라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도깨비 방망이 취급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자고 우리 마음 중심을 봅니다. 마음없이 형식만으로 하나님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엘리 제사장의 오해

구약의 엘리 제사장은 기도를 열심히 한 한나에게 “언제까지 술에 취해 살 것이냐! 술을 끊으라!”고 합니다.(삼상1:12-14) 외형만 보고 마음을 몰라준 사례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머리에서부터 붓자 제자들이 낭비라고 책망하는 상황에서 여인의 진심과 속마음을 알아줍니다.(요12:5)

6절은 성전을 섬기는 일은 안식일 규례보다 위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성전 보다 더 큰 분이 예수님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

8절에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주인으로서 예수님은 무엇을 합니까? 한쪽 손 마른 사람, 병자를 고쳐줍니다.(마12:10-13절, 마12:15절) 바리새인들은 이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판단하고 방도를 찾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다른 날도 많은데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화를 자초합니까? 안식은 평안할 안(安) 쉴식(息)자 쓰고 뜻대로 평안히 쉬는 날입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7일째 안식합니다. 이 날을 복되게 하고 거룩하게 구별합니다. 5,6일은 보이는 물질에 복을 줍니다. 그러나 7 일째는 날에 복 주고 거룩하게 합니다. 시간에다 복을 줍니다. 우리는 시간을 맘대로 하지 못합니다. 손에 잡히지 않고 통제도 불가능합니다. 흐르는 시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아쉬움, 회환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7일 이후에는 밤이되고 낮이된다는 말씀 없습니다. 영원한 낮이 계속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에게서 생명력을 공급받아 영원히 안식을 누릴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이 창세기 3장 이후 범죄하면서 깨집니다. 인간은 죄로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힘이 단절되고 한 줌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육체의 한계를 안고 살므로 아쉬움과 회환이 있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에게 받는 생명력 대신 스스로 땀 흘려 일함으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이 생명력은 결핍이 있고 완전하지 못하며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참 사랑을 공급받지 못하니 불안, 두려움, 어두움, 가운데 삽니다. 물질 문명과 과학 기술이 이 결핍을 채우지 못합니다.

잃어버린 참 안식을 회복하는 방법

잃어버린 안식을 회복하는 방법은 골2:16-17을 참고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안식일의 실체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구약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요구한 것은 예수님이 와서 우리의 안식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예표입니다(출20:8-11, 출31:14-15, 겔20:10-13, 레25:2-5, 대하36:20-21) 구약에 안식일, 안식년, 희년도 안식을 주실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병자들이 많아 고통이 있는 안식일은 참 안식이 아니므로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칩니다.

히브리서4장3절에서는 예수님을 믿은 우리들은 이미 안식에 들어와 있다고 말씀합니다. 히4장10절에는 이미 안식에 들어 온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우리도 자기의 일을 쉰다고 말씀합니다. 자기일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쌓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서두에서 언급했던 종교행위들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을 구원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안식에 들어온 자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생명력을 공급 받기 때문에 더 이상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누리는 특권입니다. 우리 모두 이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주님이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실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오늘을 넉넉히 견딜 수 있는 교회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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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ㅡ물고기 입 속 성전세(마태복음17장22-27)

설렘은 “마음이 두근거리는 상태”입니다. 가라앉지 않고 들떠있는 마음입니다. 요즈음 말로 “심쿵”입니다. 심장이 쿵하고 놀라서 빨리 뛴다는 뜻입니다. 워즈워드라는 영국 시인이 있습니다. 18세기 낭만주의 시인입니다. 무지개란 시 모두 아실 것입니다. 읽어드립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볼 때면/내 가슴은 설렙니다./‘어렸을 때도 그러하더니/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합니다./늙어서도 그러할 것입니다./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바라기는 나의 삶 하루하루가/자연의 경건함으로 이루어져 가기를... ...”.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설레노라! 어린 시절의 순진함을 평생 유지하기를 바라는 시라고합니다. 어떻습니까? 여기계신 성도님들도 무지개를 보면 지금도 가슴이 뛰십니까? 그저 닭 쫓던 개 지붕 처다 보듯이 무덤덤합니까? 아니면 무지개하면 흰색과 검정색이 무지개 색에 속하나 안속하나가 의문만 듭니까?

 

성도님들의 신앙 가슴은 설렘이 있으십니까? 예수님과의 첫사랑 때문에 아직도 설레 입니까? 성경을 펼칠 때 마다 설레 입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설렘이 있으십니까? 교회 오실 때 어떤 설렘이 있습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오늘은 어떤 무지개를 보여주실까? 심쿵 하십니까?

본문은 성전 세 납부 사건입니다. 등장인물 예수님, 베드로, 세금징수원, 동전 문 물고기입니다. 등장하는 고기 물고기계의 일등 공신입니다. 아니 일등공어(一等公魚)입니다. 본문의 시기는 AD29년 경 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하고 3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예수님 공생애 기간은 3년 반입니다.

베드로도 제자 경력 3년을 넘긴 셈입니다. 베드로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마4:19절“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Follow me,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란 말씀으로 부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물고기를 낚듯이 사람을 낚으리라 약속 합니다. 베드로 낚시 고수였을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 이 약속의 말씀 한 마디에 베드로는 앞으로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단번에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베드로 니고데모에게처럼 거듭남의 비밀, 하늘나라의 확장하며 복잡하게 설명했으면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어릴 때부터 해 왔던 낚시에 비유하여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영적 낚시꾼입니다. 각자에게 맞는 미끼를 던집니다.

예수님에게 바라는 베드로의 마음과 예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세상 왕이 되면 총리자리를 차지하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소망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오늘 본문 22,23절을 참고합나다.“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예수님은 죽는 다고 합니다. 처음한 말씀이 아닙니다. 마태복음16장에 베드로에게 신앙 고백 받은 후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로 한적한데로 모시고 갔습니다. 예수님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그러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호된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제자들은 이번에는 근심만합니다. 본문 근심하다의 다른 번역은 “몹시 슬퍼했다. 큰 슬픔에 잠겼다.”입니다. 제자들은 근심으로 얼굴이 마치 장마철에 먹구름 낀 듯 어두웠습니다. 다시 산다는 말씀은 아예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성전세 반세겔

24절을 보십시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반 세겔은 성전 세입니다. 성전세의 유래는 출애굽 직후로 거슬러갑니다.(출30:11-16) 당시 각자의 생명 값으로 성막에 들어갈 때 돈을 내도록 합니다. 돈은 성전 운영비용으로 썼습니다.

반세겔을 드리게 한 것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킴과 동시에 장자들이 모두 죽는 심판에서 생명을 건짐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성전세를 속전(贖錢)이라고 합니다. 속전의 한자 뜻은 죄를 면할 속자 돈 전자를 씁니다. 히브리어로 “코페르”라고해서 죄수를 몸값을 치르고 풀어 주기 위한 돈 입니다. 속전은 누구나 공평하게 냈습니다. 가난하다고 덜 내고 부자라고 더 내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죄인이란 의미입니다.

속전의 의미

속전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모두다 죄에 속박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게 해줄 속전은 우리 자신이 죽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속전으로 대신 죽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속전에 해당하는 반 세겔은 당시 노동자 2일 품삯입니다. 요즈음 시세로 20만 원 정도 됩니다. 본문에 세금징수원은 회당 관계자 이거나 아니면 예루살렘 공회에서 대제사장이 파견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좋아 할리 없었습니다. 당시 이들은 부정축재를 많이싸여 다 손가락질 합니다. 깨끗한 사람이 지적하면 수긍을 합니다. 그런데 똥 묻은 개 재 묻은 개 나무라듯 징수원이 베드로에게 세금문제를 지적 하니 자존심 상했습니다.

징수원의 말에 베드로도 신경질적으로 대답합니다. 25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내신다.” 하고 말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예수님은 시몬아 하고 친근감 있게 이름을 부릅니다. 명령하지 않고 네 생각은 어떠하냐하며 의견을 묻습니다. 본문 관세와 국세는 “상품이나 물건 등에 붙이는 세금과 그 나라의 시민에게 붙이는 인두세”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당연히 타인에게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어라 하십니까? 26절 하반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입니다.(요3:16,요1:14, 요1서4:9)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입니다.

주인인 예수님은 성전세를 안내도 되는데 내려고 합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2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라고 합니다. 그들은 아직 믿음이 없는 예비 신자들입니다. 믿음이 어린 자들입니다. 실족(失足)하다는 발을 헛디뎌 넘어짐입니다. 덫이나 올가미를 놓아서 남을 넘어지게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실족하다란 말의 헬라어는 스칸달론입니다. 오늘날 말로는 스캔들(Scandal)이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심으로 불필요한 스캔들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세 내는 방법이 기상천외합니다. 27하반 절을 보십시오.“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합니다.

본문의 바다는 갈릴리 호수입니다. 한 세겔 동전을 문 일등 공어 이름은 탈라피아입니다. 성어가 39~ 40cm 정도 됩니다. 도미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탈라피아는 민물 어종이고 도미는 바다 어종입니다. 그런데도 식감이 비슷하여 사람들이 잘 속는다고 합니다. 자연산 도미 10만원인데 탈라피아 1만2천원입니다. 탈라피아 부부 금슬 좋습니다. 잉꼬 고기입니다. 새끼를 낳으면 2-3주간 암수가 협력하여 지극정성으로 돌봅니다.

알이나 새끼를 입속에 넣고 키우는 특성이 있다 합니다. 치어들도 위험한 순간이 오면 어미 입속으로 숨어버립니다. 아마도 이런 습성 때문에 동전도 쉽게 입에 넣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탈라피아 정보 좀 더 드립니다. 탈라피아 껍질이 화상치료에 쓰인답니다. 번식력이 강해서 생태계교란종입니다. 그런데 10도이하면 얼어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번식해도 겨울에 다 얼어 죽기 때문에 큰 염려는 하지 않는다 합니다. 번식력이 강해서 지구에 대 재앙이 올 때 비축용 식량으로 쓰려고 개인 수영장에서 수천마리씩 키우는 사람도 있다합니다.

한 세겔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찾아 보았습니다. 동전 이름은 스타테르라 합니다. 미국 달러 50 센트의 크기와 같다 합니다. 50센트 달러 지름이 30.61mm입니다. 감이 안 오시죠? 우리나라 500원 동전이 26.5mm입니다. 한 세겔은 500원 동전보다 약간 크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한 세겔은 노동자 4일치 품 삯입니다. 오늘 날 값어치는 40만 원 상당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베드로가 자기가 임의로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낚시를 던져 한 세겔을 문 물고기를 우연히 낚는 일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따져 봅니다. 한 세겔이 바다 바닥에 가라앉으면 안 됩니다. 물고기가 불도저처럼 바닥을 훑다가 동전을 입에 넣지는 못합니다. 동전이 나풀나풀 떨어지는 도중에 먹이인 줄 착각하고 물어야합니다. 40만 원짜리 동전을 누가 바다에 던질까하는 것도 의문입니다. 베드로가 낚시를 던지는 시간, 동전이 떨어지는 시간, 고기가 동전을 입에 넣는 시간, 그리고 나서 고기가 베드로 낚시를 무는 시간 이 모두가 맞아 떨어져야 가능한 일 입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날고 기는 30년 베테랑 낚시꾼이어도 이 고기 잡기는 불가능입니다. 전지 전능한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설레이는 마음-물고기 입 속에서 한 세겔을 꺼내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불가능함을 알았을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접고 순종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못 갔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랜만에 휴가 가는 기분으로 가버나움에 있는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식사도 했을 것입니다. 3년 동안 묵혀 두었던 낚싯대를 들고 갯바위로 가서 미끼를 끼고 바다에 던질 때의 그 설렘 상상해 보십시오. 또 일등공어 물고기를 끌어 올려 주둥이 속에 한 세겔을 꺼낼 때의 그 희열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일등공어 물고기 살았겠습니까? 죽었겠습니까? 당연히 살려 줬겠죠? 한 세겔을 물어다 줬는데 회 떠서 먹었겠습니까? 베드로는 이 일을 통해 먹구름 같았던 마음에 근심이 걷혔을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깊어졌을 것입니다. 특히 그는 자기 실력 믿고 자기 마음대로 낚시를 던지면 안 된다는 교훈도 얻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던지라 할 때 던져야 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능력 내 경험을 내려놓고 주님이 던지라 할 때, 주님이 던지라는 포인트에 던질 때 한 세겔을 낚아 올릴 수 있습니다. 낚아 올렸다고 해서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오로지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역사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언제 설렜습니까? 초등학교 때 소풍가기 전날 밤 설렜습니다. 김밥에 사이다에 별 사탕 들어간 뽀빠이 먹을 생각에 잠을 설쳤습니다. 대학 입학하기 전에도 설렜습니다. 군대에서 전역하기 전에도 설렜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도 설렜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때의 설렘과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무덤덤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적인 설렘이 없어졌습니다. 별로 심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설렐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답변입니다. 정리하며 말씀을 마무리 할까 합니다. 첫째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속전이 되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면세 혜택 받았습니다. 두 번째 전지(全知) 전능(全能)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표정만 봐도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물고기도 주관하시고 불가능한 경우의 수도 일치시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십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다 세고계십니다 세 번째 한계적인 나를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경험, 내 지식, 내 낚시 실력,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면 근심 걱정이 끊이질 않습니다. 영적으로 빈 낚시만 끌어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끝으로 갈급한 마음 입니다. 이 마음은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마음입니다.(시42:1) 이런 마음으로 기도의 낚시, 성경 읽기의 낚시, 성도와의 교제의 낚시, 전도의 낚시를 드리울 때 우리는 한 세겔을 끌어올리는 기쁨을 맛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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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들-작은형제(마태복음25:31-46)

 

 

양과 염소의 비유

본문 양과 염소는 예수님의 마지막 비유입니다. 십자가 사건 3일 전입니다. 유언과 같은 비유 말씀이므로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열처녀의 비유

25장에 첫 번째 나오는 비유는 열 처녀에 비유입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열 처녀 모두 등불을 준비합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열 처녀 모두 같이 졸았습니다. 어디에서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운명이 갈립니까? 아주 사소한 부분입니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기름 사러 갔다가 낭패를 당합니다.(마25:1-12)

달란트의 비유

이어지는 두 번째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아주 작은 일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돈을 땅에 파묻습니다. 감자 씨앗도 아니고 묻어버립니다. 묻을 힘으로 은행에 라도 가야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을 안 해서 낭패를 당합니다. 다른 두 명의 달란트 받은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 어떤 칭찬을 받습니까?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 입니다.(마25:14-30)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계속 이 작은 자 정신이 이어집니다.

비유의 원어 표현은 “파라볼라” 입니다. “팔아 버려!”가 아닙니다. 영어로는 parable입니다. 한자로는 견줄 비(比) 깨우칠 유(喩)입니다. 수학에서 평행선을 Parable line이라고 합니다. KTX 기차선로를 상상해 보십시오. 선로는 두 개가 나란히 이어집니다. 비유는 이와같이 핵심진리 한 가지에 촛 점을 맞추어 사용합니다. 하나의 핵심 진리가 있으면 그 진리 전달을 위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비유의 단어 뜻

비유에서 많은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거나 단어 하나하나 짝 맞추기식의 풀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열 처녀의 비유에서 기름이 휘발유, 경유, 등유인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많은 이단들이 비유풀이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비유는 대응하는 하나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우화나 신화하고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의 현실 생활과 밀접한 것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 당시 사람들은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인자가 올 때 믿음을 찾아 보기 어렵다

31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장차 영광 가운데 오십니다. 공중으로도 지상으로도 반드시 오십니다.

요한계시록 19장16절을 보면 예수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일컫습니다. 본문 앞에 있는 열 처녀의 비유도 또 달란트의 비유도 양과 염소 비유도 세상의 주인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일관되게 말합니다. 주인이 언젠가는 권리를 행사하러 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올 때는 혼자 안 오십니다. 천군 천사와 함께 옵니다.(눅2:13) 지구 밖에서 예상치 못한 때에 옵니다.(살전5:1-3) 침공하듯이 옵니다. 예수님이 처음 올 때는 가장 무력하고 연약한 한 아기 속에 왔습니다. 가장 낮은 마구간에 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 반전입니다. 눈부신 영광 가운데 옵니다.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았던 베드로는 넋이 나가서 같이 눌러 살자고 제안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공개적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할 일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와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32절을 보십시오.“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예수님은 먼저 모든 민족을 모읍니다. 빌2:10절은 하늘과 땅, 땅 아래 있는 자들까지 예수님이 이름 앞에 무릎 굻게 한다고 말합니다.

민족의 종류는 1만6천이지만 분류는 두 종류로 분류합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대륙별, 소득분위별 없습니다. 선진국 후진국 출신 분류도 없습니다. 빈부귀천 구분하지 않습니다. 수도권 지방 출신 구분 없습니다. 예수님은 양 계열과 염소 계열 2가지로 나눕니다.

성경의 숫자 2는 나눔, 분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섞는 걸 싫어합니다. 넓은 문 아니고 좁은 문,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아니고 반석 위 지은 집, 거짓이 아니고 참, 어둠이 아니고 빛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오른편에 의인 왼편에 악인을 둡니다. 오른손의 어원은 ‘옳다’에서 왔고 왼손은 ‘외다’란 옛 고어에서 왔습니다. ‘외다’의 뜻은 ‘그르다’입니다. 양을 의인에 염소를 악인에 비유합니다. 그야말로 비유입니다. 염소 자체가 나쁘다는 뜻 아닙니다. 염소는 잘못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양은 흰털을 가졌고 염소는 검은 털입니다. 성격적으로도 양은 온순하고 염소는 난폭하며 거칩니다. 염소자체는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

당시 사람들은 양과 염소를 썪어 키웠습니다. 3:1의 비율입니다. 양은 겁이 많아서 계곡을 지날 때 염소를 시범조교로 썼습니다. 양은 무식하게 풀을 뿌리까지 싹 슬어 먹는 습성이 있습니다. 큰 풀만 뜯는 염소를 썪어놓아야 목초지를 보호합니다. 양은 끼리끼리 붙어 있는 습성이 있어 여름에 쪄죽기 쉽습니다. 먹이를 먹을 때 한꺼번에 몰려 압사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뿔 달린 염소를 사이에 두어 양을 흩어지게 했습니다. 양은 겁이 많아 물먹다가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갑니다. 자기를 잡아먹는 유령 동물로 착각합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반드시 분리해야 할 때는 잠잘 때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밤낮 일교차가 심합니다. 양은 추위에 강하지만 염소는 약합니다. 그래서 염소는 따뜻한 곳에 재워야 합니다. 양은 잉꼬부부입니다. 수컷은 암컷을 끝까지 지키려는 속성이 강 합니다. 다른 수컷이 접근하면 죽자 살자 싸웁니다. 염소는 잉꼬가 아닙니다. 그래서 양과 같이 재우면 밤새 싸움이 일어나기 때문에 분리합니다.

예수님은 오른편 양계열의 사람들에게 어떤 은혜를 줍니까? 복 받을 자들. 하늘 나라를 상속 받을 자들, 의인이요, 예수님의 형제요, 영생에 들어갈 자들이라 합니다.(마25:34,37,40,46) 눅19:17절에 보면 신자는 열 고을의 권세를 차지합니다.

왼편에 선 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저주받은 자들, 지옥 불 못에 집어넣을 자들, 영벌에 처할 자들이라 합니다.(마25:41,46) 예수님이 오면 염소계열의 사람들은 더 이상 구원 받을 기회가 없습니다. 이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양 계열로 신분 세탁 불가능합니다. 검은 색을 흰 색으로 염색도 불가능합니다. 양 가죽 뒤집어 쓰고 줄 바꿔 설 수도 없습니다.

영벌과 영생, 지옥과 천국 엄청난 차이입니다. 이렇게 나눈 기준이 무엇입니까? 한나라를 구하고 못 구하고입니까? 구약 엘리야와 같이 위대한 선지자 노릇을 했고 안했고 입니까? 아니면 모세와 같이 훌륭한 지도자였고 아니였고 입니까? 아닙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 이들의 운명이 갈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 남에게 주어도 상을 잃지 않음

35,36절을 보면 예수님이 주렸을 때, 목말랐을 때, 나그네일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 도움을 주었느냐 안 주었느냐가 기준입니다. 그러자 37-39절에서 의인들은 도무지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답변으로 예수님은 작은 자 말씀을 합니다. 40절을 참고합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고” 본문에서 작은 자이긴 작은 자 인데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지극히는 원어 발음 ‘엘라키스토스“로 매우 작은, 극히 작은, 중요하지 않은, 사소 한이란 뜻입니다. 바로 이 작은 자에게 작은 사랑을 베풀었고 안 베풀었는지 여부가 이들의 운명을 갈랐습니다. 작은 자는 무시하기 쉬운데 이들은 달랐습니다.

왜 기억이 없다고 했을까요? 기억을 못하는 이유는 그만큼 작고 사소했다는 뜻입니다. 또 매우 일상적이었다는 뜻도 됩니다. 밥 먹듯이, 숨을 쉬듯이 나도 인식 못하게 작은 자들을 섬겼다는 뜻도 됩니다. 이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정신 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한 행동입니다.

염소계열이 심판 받는 이유

42,43절을 보십시오. 왼편에 있는 염소계열의 사람들이 심판 받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악을 행하는 것도 죄이지만 해야만 하는 것을 안 한 것도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고 사소한 일을 형제에게 한 것을 기억하고 알아 주는 분입니다.(마10:42)

그러면 작은 자를 섬겨야 할 또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40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작고, 소외된 자를 나의 형제로 표현합니다. Your brother 가 아니라 My brother로 부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으로 인정해 줍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과 동일시합니다.(행26:14)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작은 자 섬김의 본이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상종도하지 않았던 세리와 죄인들과 한 상에 앉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개, 돼지 취급했던 이방 여인을 딸로 받아 주었습니다.

장발장 예화

빅토르 위고의 소설 장발장의 한 대사를 인용합니다. 원제가 레미제라블인데 프랑스어로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용서와 구원과 사랑을 그린 소설입니다. 2012년에 뮤지컬 영화도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600만을 기록했답니다. 이 영화에서 장발장이 죽고 나서 방을 걸어 나가면서 하는 마지막 노래의 자막이 이렇게 나옵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자만이 신을 볼 수 있다.”입니다. 영어 대사를 직역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To love another person is to see the face of God.)입니다. 오늘 양과 염소의 비유의 결론을 반영하는 대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작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 사소 한 것을 크게 보시는 하나님 안에서 여기 계신 성도님 모두가 큰 위로를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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