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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기독교정보

로마서 말씀 나눔(8장~16장)

by 명주(明珠) 2025. 10. 29.

당신은 안정합니다.(로마서8:1-15)

꺾이지 않는 마음

카타르 월드컵이 끝났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16강을 간 후 손흥민 선수가 명언을 합니다. 줄여서 중꺾마란 말을 합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의 약자입니다. 이 말은 손흥민 선수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컴퓨터게임 우승자의 말을 인용합니다. 그는 롤 게임 선수인 데프트 김혁규입니다. 그가 게임 계에서는 얼마나 유명한지 게임계에 BTS랍니다. “그가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롤 게임을 우승했답니다.” 내년 우리 교회 비전이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입니다. 중꺾마는 바로 우리 믿는 자가 써야 합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믿음이다.” 줄여서 “중꺾믿”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정죄가 없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이제는 하고 시작합니다. 이것은 본문 7장까지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한층 더 강화된 의미를 진행 시키겠다는 뜻입니다. 7장까지 내용을 한마디로 하면 “예수님을 믿은 우리는 안전하다. 구원받은 성도는 안전하다.”입니다. 지난달 11일 경북 봉화군 아연 채굴 광산에서 2명의 광부가 매몰됐다 10일 만에 구조된 일이 있습니다. 2명의 광부가 커피 믹스로 연명을 합니다. 이 커피 믹스가 기적의 비상식량으로 떠올랐습니다. 커피 믹스 끊었다가 다시 먹는 사람 속출합니다. “누구냐고요?”“접니다.” 지하 190m에 갇힌 작업반장 아들이 인터뷰에 자주 나왔습니다. 시추공으로 “아버지 사랑합니다.”하고 손 편지도 넣었습니다. 이 아들에게 아버지를 구했다는 전화를 한다고 한번 상상해 봅니다. 아들의 첫마디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거기 지금 몇 십니까? 군수님은 나와계십니까?” 이런 거 물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 무사합니까? ” 이게 첫 질문이었겠죠? 다음이 어떻게 구했냐?“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이 바로 우린 이제는 안전하다는 표현입니다. 왜 안전한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안전합니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정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죄가 없는 것은 정죄할 대상이었던 옛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나를 보실 때 내가 안 보이고 그리스도만 보이신다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릅니다. 정죄 대상이 죽어 없어졌으니 단죄는 없습니다.

성령과 생명의 법

2절은 어떻게 안전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본문에 성령의 법, 생명의 법, 죄의 법, 사망의 법하며 법이란 용어를 많이 씁니다. 왜 법이란 용어를 많이 쓸까요? 우리 말다툼할 때 “그런 법이 어디 있어”하며 싸우기도 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악법도 법이다.”라고 소크라테스가 법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법의 한자는 물 수 자(水)에 갈 거자(去)의 모양을 합하여 법(法)이라 합니다. 물이 흘러가는 길 모양을 땄습니다. 법은 인간의 도리, 원리, 이치를 말합니다. 법의 사전적인 의미는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만든 규칙입니다. 우리가 무인도에서 혼자 벌거벗고 살면 법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필요합니다. 따라서 사회는 법이 반드시 있어야 질서가 유지됩니다. 작은 계모임을 만들어도 회칙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법을 만들고 나면 사람들은 그 법을 지켜야 합니다. 지키지 않으면 처벌받거나 따돌림당합니다. 법이 만들어진 다음에는 사람이 그 법의 지배하에 있게 되는 셈입니다. 성경이 법용어를 쓰는 것은 “지배 아래에 있다. 영향권, 어떤 영역 안에 있다. 누구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2절은 우리가 과거에는 좌와 사망의 재배 아래에 있다가 이제 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 아래로 옮겨진 것을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동네에서 생명과 성령의 동네로 완전히 이주합니다. 북한에서 삼팔선을 넘어서 남한으로 탈북한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더 이상 북한의 법에 지배받지 않습니다. 북한법과는 영원히 이별하고 남한의 법을 따릅니다.

3, 4절에서는 옮겨진 방법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합니다.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the Spirit)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시겠습니까? 마치 외계어 듣는 느낌이 드는 분계십니까? 그렇다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본문은 쉽게 말하면 너희는 예수님 믿고 구원 받은 것을 율법, 육신, 죄, 아들의 용어로 다시 설명합니다.

영(spirit)

본문 1-15절까지 영이란 단어는 15번이 나옵니다. 그중 13번이 다 성령님을 말합니다. 영은 영어로 “sprit”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첫 자 S를 대문자로 써서 우리의 영과 다르게 표현합니다. 본문은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계획하셨고(하나님이 보내셨음), 예수님이 실행에 옮기셨고(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예수님), 성령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적용하셨다(영을 따르는 자)는 설명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구원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합작품입니다.

율법을 준 이유

본문 내용 설명을 좀 더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었습니다. 왜 주셨겠습니까? 삶아 먹으라고 주셨겠습니까?^^ 당연히 지키라고 주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되 완벽히 지켜내라고 주었습니다. 두 번째 또 다른 율법의 목적은 율법은 죄를 보는 거울이라 합니다. 율법이 옴으로 과거에는 죄인지 아닌지 모호했던 것이 죄로 확실히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에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이 없었다면 탐심이 뭔가 문제이긴 문제인 것 같은데 죄인지는 모르다가 율법이 주어져서야 죄인 줄 압니다. 율법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우리 육체가 약해서 율법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는 말씀에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살 때 겨울에 도끼로 나무를 많이 팼습니다. 그런데 도끼가 오래되면 도낏자루 끝이 잘 부러졌습니다. 도낏자루가 나무로 되어 있었고 도끼 목 부분이 힘을 제일 많이 받는 부분이어서 자주 부러졌습니다. 이것은 쇠로 된 도끼 자체가 문제가 있어서 나무를 못 패는 것이 아닙니다. 자루가 약해서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나무 도낏자루를 대체해서 쇠자루로 만들어서 아예 도끼와 용접해 나오기도 합니다.

 

 

도끼가 율법이고 우리의 육체는 나무 자루에 비유한다면 나무 자루가 약해서 안 되니까 하나님이 쇠자루로 바꾸셨습니다. 그 쇠자루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100% 지키셨습니다. 본문에 죄인의 모양으로 죽으셨다는 표현은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셨지만 죄는 없기 때문에 모양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육체에 죄를 뒤집어서 쓰시고 정죄 받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이 구속역사의 완성은 그냥 하루아침에 즉흥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계획하시고 수천 년 동안 약속되어 오다가 2000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셨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사 믿게 하신 일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상태

본문 5-9절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상태를 잘 대조해서 보여줍니다.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the Spirit)을 따르는 자는 영(the Spirit)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the Spirit)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the Spirit)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본문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흉악범을 말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이 아닌 자연인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불신자의 최후는 사망이고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는 자이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는 자입니다. 반대로 영을 따르는 자는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읽으며 너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무언가 내가 잘못하고 있지는 않나? 내가 모르는 다른 신앙의 비법이 있지 않나?“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말씀입니다.

생각의 중요성

본문에서 우리가 영적 교훈을 하나 얻는다면 생각의 중요성입니다. 데카르트가 생각에 대해서 유명한 말을 합니다.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이 문장을 가지고 한 유머 버전이 많습니다. 코로나 19버전입니다. “나는 마스크를 쓴다, 코로(고로가 아니고)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데카르트가 퇴근 후에 아내하고 근사한 저녁 외식을 하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부인에게 제안합니다. “우리 오랜만에 근사한 식당에 가서 저녁 먹읍시다.” 그런데 하필 그날 부인은 간식을 많이 먹어서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별로 생각이 없네요.”하고 대답하자 부인 갑자기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본문은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비교합니다. 우리는 평소 무슨 생각을 하냐가 중요합니다. 외국에서 반려 고양이가 죽자 수십 년 이 고양이만 생각하며 살았던 한 여인이 있었답니다. 나중에 이 여인이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여인은 삼시세끼 고양이 밥만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또 고양이처럼 기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말보다 “야옹~~”소리를 더 많이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모든 계급장 다 떼어 보십시오. 누구 아빠, 누구 엄마, 회사에서 직급, 사업장에서 위치 다 떼 보십시오. 그 사람을 정의 할 수 있는 것은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무엇을 생각하는 사람인가입니다. 생각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말합니다. 본문에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해서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기적, 어떤 이상한 기운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영의 생각입니다. 말씀을 생각하며 묵상하는 것이 영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할까? 모임의 날에 어떻게 하면 은혜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까? 어떻게 하면 성도님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모두가 영의 생각들입니다.

영을 따르는 자의 의미

본문 5절에 “영(the Spirit)을 따르는 자”란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을 따라 걷는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이 자율주행으로 가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인생의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대신 잡지 않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다 인도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운전은 내 손과 발로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어서 우리의 코를 꿰서 강제로 끌지 않습니다. 완력을 쓰지 않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인도 방법은 마음에 확신을 주시는 방식으로 합니다. 우리의 의지를 설득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조명해주며, 새로운 이해를 시켜서 인도합니다. 성령님은 신구약 성경을 통해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령을 따르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엄동설한에 수요집회 와서 앉아 있는 일도 성령 따르는 삶입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는 행동이 모두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직장에서 연수 가보십시오. 재미없으면 중간에 밖에 나가 담배 피우거나 커피 뽑아 마십니다. 우리 말씀들을 때 그렇게 하지 않잖습니까? 2시간을 해도 앉아서 들어주지 않습니까? 이거 다 성령님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신자의 현재 상태

본문 10절은 우리의 현재 상태를 증거합니다.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your spirit)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지난 주일 김성금, 김대현 형제님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물에 온몸이 잠겼다가 다시 올라왔습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나의 옛사람이 또는 옛 자아가 죽었다는 상징입니다. 물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자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새사람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의 영이 살았다고 표현하면서 이런 현재의 우리를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크리스천은 예수님으로 옷을 입고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자입니다. 영이 살았다는 의미는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게된 상태를 말합니다.

미래의 신자의 상태

11절은 미래의 우리의 상태를 증거합니다.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the Spirit)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his Spirit)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장차 우리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현재 아픈 몸 그대로 부활하면 어떡하나? 늙은 몸 그대로 부활하면 어떡하나? 비행기 사고로 몸이 없어진 성도는 어떻게 부활하나? 부활해서도 현재 남편하고 다시 살게 되면 어떡하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부활하면 시집 장가가지 않습니다. 현재의 몸 구조와는 전혀 다른 몸 구조로 부활합니다.

신자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12, 13절에서 계속 권면합니다.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the Spirit)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도 성령님을 지칭합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라 해서 한겨울에 얼음 깨고 입수하라는 얘기 아닙니다. 산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담쌓고 수도승처럼 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101가지 율법 정해놓고 지키라는 뜻도 아닙니다. 계단을 무릎으로 기면서 고행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 삶 속에서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과 힘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몸의 행실은 우리를 괴롭히는 죄들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정죄가 없다는 선언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을 때는 죄를 계속 지을 것임을 예측한 말씀입니다. 죄를 짓더라도 정죄 감에 빠져 자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성화의 과정으로 성령님을 의지하여 우리가 죄와 싸워야하는 삶의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 영의 인도를 받는 양자의 삶

14절을 보십시오.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삶입니다. 계속 15절을 보십시오,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종의 영을 받은 자가 아니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된 자들입니다. 종의 영은 비참한 영입니다. 늘 주인의 눈치를 보고 두려움과 죄책감 속에 살게 하는 영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아이 어릴 때 놀리려고 ”너는 굴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라고 가끔 말 합니다. 그러면 평소에는 괜찮다가 부모님이 자신을 섭섭하게 하면 “나는 진짜 굴다리 밑에서 주워온 자인가?”의심하며 서러워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종의 영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 15절의 양자 제도는 로마의 양자 삼는 제도를 배경으로 합니다. 로마 황제 네로도 양자였다고 합니다. 로마의 아버지는 아들이 저같이 부실하거나, 아들이 없으면 종 중에 머리 좋고 신체 튼튼한 종을 택해서 양자로 호적에 올립니다. 양자는 법적인 아들입니다. 양자에게는 몽학선생을 붙여서 강하게 교육합니다. 그리고 친아들과 똑같은 특권을 주었습니다. 특히 동일한 상속권 갖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에 비유하는 이유는 바로 법적 구속력과 상속권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강력한 법적 구속력이 있어서 무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장차 하늘의 기업을 재산으로 물려받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굴다리 밑에서 주워온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확실한 자녀임을 알 수 있는 증거를 본문은 무엇이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아빠는 어린아이가 아주 친근하게 부르는 아랍어입니다. 아랍어가 공교롭게도 우리말과 비슷합니다. 우리 희성이가 “아바마마 진지 잡수셨습니까?” 하면 징그럽습니다. 아빠하고 친근하게 다가와야 아이답습니다. 본문은 아빠를 부르짖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비명을 지른다는 뜻입니다. 여기 계신 성도님들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언제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가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늙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어린아이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큰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종교가 세상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슬람은 알라신을 부르는 방법이 99가지가 있답니다. 그런데 그중에 아빠, 아버지는 없습니다. 아빠라 불렀다간 신성모독 죄로 잡혀갑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늘 어린아이로 살 수 있길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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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히 이기는 삶, 압도적인 승리(로마서8:16-39)

[위기의 순간 도움 받은 경험]

설악산을 하루 코스로 등반한 일이 있습니다. 내설악 설악동, 공룡능선, 중청을 올랐다 반대쪽 외설악 오세암, 수렴동 계곡, 백담사, 용대리까지입니다. 경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멋있었습니다. 온종일 걸어 어두워지기 시작한 저녁에 백담사에 도착했습니다. 백담사에서 용대리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인 줄 알고 내려가는 도중이었습니다. 트럭 한 대 옆에 섰습니다. 산적같이 생긴 운전자가 무조건 타라고 합니다. 괜찮다고 해도 무조건 타야 한다 했습니다. 차에 탔고 내려가면서 왜 강제적으로 타라고 했는지 알았습니다. 용대리까지는 트럭으로도 30분이 넘게 걸렸습니다. 걸었다면 캄캄한 밤길을 1시간 30분 이상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발을 헛디뎌 계곡으로 떨어졌거나 멧돼지에게 받혀 비명횡사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 한 번 겨울에 폭설이 왔습니다. 산등성이를 넘어가다 타이어에 펑크가 났습니다. 바람이 완전히 빠져 눈 속에 갇혔습니다. 핸드폰도 보험회사 비상 출동 서비스도, 지나가는 차도 없던 시절입니다. 직접 스페어타이어를 갈려고 공구를 꺼내 펑크 난 타이어 암나사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암나사에 스패너를 걸고 올라타 발로 밟았는데 스패너 손잡이가 엿 가락처럼 휩니다. 차 출고할 때 기본적으로 비치한 공구가 불량이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또 트럭 한 대가 지나가다 섰습니다. 다짜고짜 타라고 합니다. 트럭을 타고 시내에 가 철물점에서 스패너를 다른 걸 구매하고 다시 와 스페어타이어를 갈아야 한답니다. 어쨌든 이번에도 트럭 기사의 도움으로 진퇴양난의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이 왜 자주 도움을 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어떤 방법으로든 손길을 주고 헤쳐 나갈 길을 낸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로마교회 상황]

현재 로마서 서신을 받는 로마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이 절체절명의 상황입니다. 손가락 하나로 생명을 좌지우지하고 천하를 다스리는 로마 황제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로마교회는 20~50명 단위의 작은 교회 5개에 200명 정도였다고 추정합니다. 이들은 내부적으로 유대교 출신 신자와 이방인 출신 신자 간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 이단도 공격했습니다. 클라우디오 황제는 유대교인들 추방칙령도 내립니다. 향후 네로와 도미시안 황제의 통치 기간에는 박해가 극에 달합니다. 방화범으로 몰아 죽이고, 성찬식을 오해하여 식인종으로 몰았습니다. 서로 형제자매로 부른다 하여 근친상간자로도 매도합니다.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카타콤이라는 지하 묘소에 숨어 삽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도 사도바울은 성도들이 압도적 승리,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도록 힘을 줍니다.

[현재 고난과 장차 영광 비교]

먼저 로마서 8장 16~18절입니다.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後嗣)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로마 성도의 위치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후사이고, 장차 받게 될 영광을 생각하며 현재 고난을 이기도록 돕습니다. 후사는 나중에 후히 대접한다는 뜻 아닙니다. 뒤 후(後) 이을 사(嗣)를 써서 상속자란 뜻입니다. 하늘에 세상 그 어떤 것도 비교가 안 되는 값진 재물이 상속으로 주어집니다. 현재 우리는 그 후사가 무엇인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는 직접 눈으로 3층 천까지 올라가 확인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하늘 영광을 목격한 바울은 하루빨리 세상을 떠서 그리로 가려 했습니다.

우리가 받을 영광이 얼마나 큰지 잠시 받는 고난은 비교조차 하지 말라 합니다. 비교 불가 예를 들면 태양과 지구 크기 비교와 같습니다. 태양 안에 지구 109만 개를 넣습니다. 태양을 농구공으로 줄이면 지구는 그 위에 볼펜 점 하나입니다. 우리가 받을 영광이 그만큼 큽니다. 비교하려고 시도도 하지 말랍니다. 하나님의 후사는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는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 함을 말합니다.

[세 가지 탄식]

19~23절입니다. 본문에 탄식이 세 번 나옵니다. 피조물들의 탄식, 신자들이 하는 탄식, 성령님 탄식입니다. 신자의 탄식은 아직 영화롭게 되지 않은 죄의 몸 때문에 오는 탄식입니다. 연약한 몸을 빨리 벗어났으면 하는 탄식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탄식은 자연 탄식입니다. 자연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연의 탄식 소리 들었습니다. 감염병도 자연 탄식의 일종입니다. 우리가 잔디밭에 잠깐만 앉아 있어도 잡다한 벌레가 튀어 오릅니다. 숲도 멀리서 볼 때는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룻밤 자려면 모기나 해충들이 달려듭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를 봐도 압니다. 농사짓는 분들은 자연의 탄식 잘 듣습니다. 돌아서면 풀이 나와서 뽑아줘야 한답니다. 엘니뇨, 라니냐도 탄식이고, 이상고온, 이상저온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자연의 탄식을 구속 사적 관점에서 봅니다. 자연은 인간이 저주받으면서 함께 받았습니다. 인간의 구원이 완성되어야 자기들도 탄식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니 빨리 인간들이 구원받기를 고대하여 나오는 탄식입니다. 사람들의 구원이 시급하고 당위성이 있음은 자연이 탄식하고 학수고대하기 때문입니다. 환경 논자들의 자연보호 중요합니다. 기후 위기의식도 중요합니다. 우리 신자가 가져야 할 자연을 보는 시각은 구원이 하루빨리 완성되어야 자연도 탄식을 멈추고 회복 가능합니다.

이번에는 성령님의 탄식입니다. 본문 로마서 8 : 29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님의 탄식은 차원이 다릅니다. 병아리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장면 상상해보십시오. 알 속에서 목도 가누지 못하고 온몸은 젖어서 작은 부리로 천천히 알껍데기를 깨는 모습입니다. 이를 보면 안타깝고 대신 깨주고 싶습니다. 대신 깨 주면 병아리는 살지 못하고 죽는답니다. 스스로 알껍데기를 깨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살 수 있습니다.

 

아기들이 한 살이면 막 걷기 시작합니다. 벽을 잡고 겨우 서고 뒤뚱뒤뚱 걷다가 자주 넘어집니다. 부모는 가서 일으켜 세우고 손잡아 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그러면 빨리 걷지 못합니다. 성령님과 하나님의 탄식은 이와 같은 탄식입니다. 도와주면 우리의 성장이 없으므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상황이 성령님의 탄식입니다.

성령님의 탄식은 우리를 위한 간구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 아버지”만 반복할 때가 많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럴 때 우리의 든든한 지원군 성령님이 대신 간구해 줍니다. 우리가 미처 못 드리는 기도마저도 성령님이 도와주신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보혜사라고도 합니다. 바로 곁에 서서 도와주는 스승님이란 뜻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룸]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선을 이룹니다. 선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최종목적입니다.

최종목적이 본문 29, 30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예정하고 부르고 의롭다고 하고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 구원은 길거리 캐스팅이 아닙니다. 즉흥적으로 길 가다 구원하자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구원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합작품입니다. 과정도 예정, 부르심, 칭의, 영화라는 세심한 단계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 성도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앞으로 영화가 남았습니다. 영화는 아바타 같은 영화가 아닙니다. 영화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화려한 절정의 순간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 몸이 변하여 하늘 영광으로 들어감을 말합니다. 구원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우리를 선하게 인도합니다.

현재 우리 성도의 삶은 좌충우돌합니다. 내 인생에 둔 하나님의 전체 그림이 잘 안 보입니다. 우리 삶의 단편 단편이 숨은 그림 맞추기에서 부분 조각 같습니다. 인생의 쪽 그림만 보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전체 그림을 보여 줍니다. 요셉도 그랬습니다. 일생 왜 인생이 그렇게 꽈배기처럼 꼬이는지 몰랐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형들이 먹을 걸 구하러 왔을 때 그의 인생에 둔 하나님의 전체 그림을 압니다. 생명을 구하려고 하나님이 미리 보내신 그림입니다. 그는 이 그림을 보고 원수 같은 형들을 용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 허물도 반전시켜 선하게 인도합니다.

[4가지 질문과 답]

다음 31~39절까지는 바울이 자문자답하는 수사학적 기술입니다. 좋은 질문이 답을 만든다는 말 있습니다. 강사가 강의가 끝나고 질문 있는 사람하고 호명하면 다 숙연해집니다. 시킬까 봐 강사와 눈을 최대한 마주치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시간이란 무엇일까? 중력은 어떻게 생겼는가? 빛보다 빠른 건 없나? 빛에 올라타 우주여행 하면, 어떻게 되나? ”였답니다. 평생 이 질문을 하고 거기에 답하려는 과정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깁니다. 예수님도 어린 시절에 성전에서 선생님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다고 합니다.

바울의 첫 번째 질문은? 31절에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두 번째는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오?” 세 번째는 34절에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오?” 네 번째는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입니다. “대적하리오. 송사하리오. 정죄하리오. 사랑에서 끊으리오 .”입니다. 질문에 답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도 정죄, 송사, 대적하지 못한 다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눈 부릅뜨고 누가 감히 자녀를 건드려! 누가 감히 손을 대냐는 의미입니다.

이 사랑이 얼마나 질기고 단단한 지 17가지 종류로도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17 가지는 35절에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입니다. 적신은 헐벗는다는 뜻입니다. 칼은 목 베임입니다. 30절에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 현재 일, 장래 일, 능력입니다. 사망과 생명은 죽든 지 살든 지이고, 천사와 권세 자는 영계를 말합니다.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은 시간의 개념입니다. 능력은 천재지변입니다. 폭풍, 지진, 천둥, 번개 등입니다. 39절에는 높음, 깊음, 아무 피조물입니다. 높음과 깊음은 공간개념입니다. 천국과 지옥, 하늘과 땅의 권세를 말합니다. 끝으로 아무 피조물은 위의 16가지를 제외한 모든 것을 지칭합니다. 세상에 있는 유형무형의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랑의 끈을 끊지 못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영원성]

그 사랑의 확실성은 35절로 압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당연히 자녀를 아낍니다. 부모가 대신 죽기가 쉽지, 자식을 죽이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했습니다. 죄인들을 구하려면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잘 느껴지지 않는 분은 십자가를 바라보면 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37절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본문에 넉넉히 이긴다는 뜻은 압도적인 승리를 말합니다. 다른 표현은 정복자들 그 이상이란 뜻입니다.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더 올라간 승리란 표현입니다. 본문에서 이긴다는 단어는 승자와 패자가 있는 이김이 아닙니다. 물론 영적인 시각으로 사단이 패자입니다. 본문 이김은 승자와 패자를 넘는 이김, 한계선을 넘어서는 이김입니다.

넉넉한 이김의 사례로 안이숙 여사의 간증 소개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간증 서적도 썼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안이숙 여사는 교편생활을 하며 신사참배 강요 탄압에 궐기 투쟁합니다. 기독교인으로 기독교 탄압에 항의하다 평양 감옥에 투옥되어 6년간 옥고를 치릅니다. 그때 감옥에서 전도한 수기 중 한 가지입니다. 괴물 같은 만주 여자 사형수로 들어왔답니다. 남편에게 학대받다가 살인을 했답니다. 여자는 그 과정에 반미치광이처럼 변했습니다. 머리도 풀어 헤치고 씻지도 않고 냄새도 났고 성격도 포악해서 밤새 알 수 없는 말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답니다. 옆에 가면 물어뜯어 독방에 가뒀답니다. 안이숙 여사는 이 여자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마음의 부담으로 교도관에게 부탁하여 같은 방에 같이 넣어 달라고 합니다. 만주 말을 몰랐던 안 여사는 " 그래, 네 말이 맞는다." 딱 한 마디만 배워 여자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그래, 네 말이 맞는다.”라고 반복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추운 교도소에 맨발을 한 여자 사형수를 가슴으로 품게 되었답니다. 여자 발은 형편없이 더러웠고 냄새도 났습니다. 예수님이 그 발을 품으라는 뜻에 순종하여 품었을 때 예상을 깨고 발에 악취가 아니라 향기가 났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결국 여죄수는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여사는 간단한 찬송도 가르쳐 줍니다. 여자는 때가 되어 사형장으로 갈 때도 끌려가지 않고 여사에게 먼저 큰절하고 감사 인사를 건넨 후 천국으로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사형장으로 향했다는 일화입니다.

넉넉히 이김은 한계선을 넘는 승리입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에게 저희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랑을 통하여 승자만 있는 이김이 넉넉히 승리한다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신자 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현재 로마 성도가 처한 진퇴양난, 절체절명의 위기는 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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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특별한 사람(롬9:1-13)

펀치넬로 동화 예화

오늘은 동화하나 소개하면서 시작 할까 합니다. 나무 나라 이야기입니다. 나무로 만든 인형만 사는 나라가있습니다. 재질만 나무지 사람하고 똑같이 도시를 이루고 삽니다. 이들은 특이한 관습이 있습니다. 남과 비교하여 잘하는 것이 있으면 몸에 금별을 붙여주고 못하면 흑점을 붙입니다. 나무 칠이 벗겨져도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검은 점을 붙였습니다. 금별을 가장 많이 붙인 나무사람이 시장입니다. 시장은 거만하여 검은 점이 많은 사람을 무시합니다. 검은 점별만 붙인 나무 사람이 있는데 이름이 펀치넬로입니다. 그는 나무 나라의 가장 소외된 사람입니다. 펀치넬로는 늘 기죽고 죽눅들어 삽니다. 그런던 중 금별, 점별 아무것도 안붙은 친구 소개로 자기를 만든 목수를 찾아갑니다. 목수는 거인입니다. 그는 펀치넬로를 손바닥으로 들기도 합니다. 목수가 말합니다. "나는 너를 만들 때 아주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단다. 그래서 남과 비교할 필요가없다. 비교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점별, 금별이 달라붙는다."라고 합니다. 남의 시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별이 안붙는 다는 겁니다. 펀치넬로는 목수의 말을 듣고 문을 나서며 아마 그럴지도 몰라하고 생각하는 동시에 흑점 하나가 뚝 떨어져 날아가면서 동화는 끝납니다. 맥스루카이도 목사가 쓴 "너는 특별하단다."란 동화입니다. 주인공 펀치넬로는 광대들 사이에서 왕따 당하는 광대의 영어이름에서 따왔답니다.

오늘 본문이 이 동화가 많이 생각나게 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성도도 하나님이 선택한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특별하게 부른자녀입니다. 오늘 본문 통하여 나는 하나님 앞에서 아주 특별한 사람임을 새롭게 인식하고 교회 문을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9장에서 구원론을 확대합니다. 구약 성경의 주인공은 누구죠? 유대민족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러면 " 이들을 택한 하나님의 선택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하나님 말씀이 폐하여 진 것인가?"하는 의문이듭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에 답을 줍니다.

바울의 동족에 대한 슬픔(로마서 9:1-5)

1,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바울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참말이다. 거짓말이 아니다고 합니다. 말하는 사람 곧 화자에 대하여 신뢰하도록 합니다. 연쇄 살인범이 나와 "내말은 이제부터 참말입니다."하면 신뢰감이 없습니다.

신뢰감이 있은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말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빤히 보고 있기 때문에 참말이라합니다. "내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 할 수있겠는가?"라는 말과 같은 뉘앙스입니다.

바울은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합니다. 슬픔은 가식적인 악어의 눈물이 아닙니다. 진정성 있는 깊은 슬픔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슬픈 이유는 3절에 언급합니다.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은 자기동족이 구원받지 못하여 슬픕니다. 동족구원 열망이 얼마나컸으면 자기가 저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할 정도입니다. 진짜 끊어진다가 아니라 반어법입니다.

유대 동족은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을 사사건건 반대했습니다. 불독처럼 바울의 복음역사를 따라 다니며 물고 늘어졌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이 예루살렘 방문 때 죽이려고 40인 암살특공대도 조직했었습니다. 이 지경까지 갔으면 바울도 같이 미워할 법합니다. "이 원수들아! 잘됐다."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구원 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괴로워했습니다. 동족을 나의 형제로 부릅니다. 바울은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보입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뜨거운 가슴도 있는 사람입니다. 로봇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역사는 뜨거운 가슴이 필요합니다. 뜨거운 형제애 아무 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나는 끊어져도 동족은 살리는게 좋다는 마음이 진심인 근거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한다합니다. 이것이 복음정신입니다. 나는 죽고 너는 살리는 정신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입니다.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유대인의 사도가 체질에 맞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는 체질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체질을 부인하고 이방인의 사도가됩니다. 자기 기호, 입맛에는 맞지 않지만 성령의 뜻에 순종하여 이방인의 사도가되었습니다. 바울은 항상 성령의 뜻을 따랐습니다. 본문에 성령 안에서는 이런 의미가 담겼습니다.

계속 본문1,2절에서 내 양심이 나와 더불어 증언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양심과 나를 분리합니다. 양심과 나를 별개로 취급합니다. 바울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표현을 많이 합니다. 저희 아들 어릴 때회사에서 퇴근 하려는데 전화가왔습니다. 아들은 "게임 절제해야해! 빨리와!"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견하게도 게임도 다 절제하고"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게임 절제가 아니고 제 카드로 게임 결재해야 하니 빨리오라했다고 금방 양심적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갈수록 양심이 무뎌지기쉽습니다. 양심은 내 안에서 나를 감시하는 독립기관으로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심의 소리들어야 합니다. 양심이 괴로워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심은 내면에서 잘못 할 때 쏘는 화살입니다. 나를 아프고 괴롭게 만듭니다. 양심의 소리를 계속 외면하면 무뎌집니다. 그래서 양심이 화인 맞았다고도 합니다. 얼마 전 끔찍한 강남납치 살해 사건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양심이 무너진 사람들을 목격합니다. 양심이 무뎌지지 않으려면 항상 비추임 받아야합니다. 본문을 참고하면 성령님과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양심을 갈고 닦아야하고 양심에 귀 귀울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4,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 본문은 바울이 동족들이 가졌던 특권을 나열 합니다. 하나하나가 다 특별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 예수 그리스도가가 이들을 통하여 오심이 가장 큰 특권입니다. 이 예수님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고 만물 위에 계시는 분입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의 머리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글의 흐름을 무시하고 예수님이 나오면 벅차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찬송을 올리는 모습 봅니다.

4절에서 특권들을 보면 먼저 양자의 특권입니다. 양자는 오늘날 우리 성도가 양자되었다는 의미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왕과 그의 백성 정도의 관계를 말합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목격한 민족이란 뜻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 광야에서 불기둥과 물기둥으로 인도 받은 사건 등 다 목격한 민족입니다. 또 언약을 받은 민족입니다. 언약은 쌍방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을 언약이라합니다. 또 이들은 율법을 직접 받았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배하는 법도 알려 준 민족입니다.믿음의 조상들도 소유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로마서 9:6-13)

6절을 보십시오."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바울은 이스라엘의 특권을 나열하고 나서 다소 충격적인 발언을 합니다. 본문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라는 뜻이 무엇이죠? 초당에 순두부 마을에 가면 원조 따집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도 참이스라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별도로 택한 참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은 폐하여 지지 않았다고합니다. 본문 "폐하여졌다." "None effect"로 효과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현재 조건과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는 실패하지 않았고 효력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참이스라엘이란?

참이스라엘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2가지를 구약사건을 예로듭니다. 참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고 부르신 자들만입니다. 첫째 증거로 이스마엘과 이삭을 예로듭니다. 7절에서 9절까지 입니다.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이스마엘은 하나님 뜻과 무관하게 아브라함과 사라의 합작품으로 하갈에게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난 자녀입니다. 본문 9절은"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합니다. 명년은 그 다음 해를 말합니다. 당시 사라와 아브라함의 몸상태는 아이를 나을 상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99세, 사라90세입니다. 이들에게 이삭이 태어나는 일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적 일으키려면 바로 그 다음날, 한달 후에 이삭이 태어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임신기간을 다 고려하여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지만 자연법칙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습니다.

약속의 자녀가 중요하다.

본문8절에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라고 합니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뜻은 "존재하도록 부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존재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하나님의 약속활동으로 존재케된 자."가 이삭입니다. 약속의 백성이 아니면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혈통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혈통만 아브라함의 후손이면 자동구원이라고 여겼습니다.

오늘 날도 "나는 기독교국가에서 태어났으니 자동구윈이야, 나는 믿는 부모에게서 났으니 자동구윈이야, 나는 3만명 대형교회 소속이니까 자동구원이야!"하기 쉽습니다. 침례라는 형식만 통과하면 자동구원이야하는 생각도 맞지않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혈통으로는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이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약속으로 존재케된 사람이 이삭만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하고 언약적 의미가담긴 자녀만이 참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우선의 법칙, 하나님의 선택우선법칙이 적용된 자여야 참이스라엘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이런 탄생 과정을 거친 제2의 이삭들입니다. 우리도 신령한 출생을 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위로부터 초자연적으로 새생명을 주셔서 존재케 된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특별한다는 두번째 예를 하나더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서와 야곱입니다.10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

본문 마지막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뜻은 에서를 싫어하는 감정표현이 아닙니다. 우선순위의 표현입니다. 사랑과 미움은 "택했다. 택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의미로 해석하면 됩니다.

이삭과 이스마엘과 야곱과 에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름이 다 두 자인데 이스마엘만 4자인가요? 차이는 어머니가 같고 다른 점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태어난 시간 차도 없고, 어머니도 같은 태였고, 태어나서 어떤 선악의 행동도 하기 전에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야곱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으로만 선택된 사람입니다. 부르심은 우리 행위와 무관합니다. 또 내가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이 먼저였습니다.

하나님만의 특별한 방식

하나님은 왜 이런 방식을 쓰십니까? 그래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도저히 할 수없는 방식으로 일합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고 죽은자를 살려냅니다.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태초부터 우리를 선택하고 부르셨습니다. 태어난 이후 구원도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방식은 오로지 주권자요 전능자인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만이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폐하여 지지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방식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잘하나 잘못하나 지켜 보다 잘하면 구원하는 방식이라면 우리 구원은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가 훼손되는 셈입니다. 하나님 미리 다정했으니 전도할 필요없다고 삐딱선을 타는 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를 선택하고 부르셨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 하나님은 구원 역사에 우리의 손과발과 입을 도구로 사용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도 이삭과 야곱같이 약속과 부르심에 의하여 존재케된 자들입니다.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자들입니다. 골3장12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로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특별한 자들입니다. 펀치넬로같이 비교우위로 주눅들 필요없습니다.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 선택으로 구원하셨기에 복음이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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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기원(롬9:14-24)

레이건 대통령 일화

레이건 대통령은 대통령되기 전 캘리포니아 지사였습니다. 그는 새크라멘토의 유명한 식당에 친구와 갔습니다. 대기 줄이 너무 길었습니다. 30분이 지나고 40분이 넘어 가자 레이건이 지배인을 불렀습니다. 자신의 신분은 말하지 않고 “좀 빨리 안되냐?” 물었습니다. 지배인은 말도 안 되고 순서를 기다리란 말만하고 쌩 가버렸습니다. 레이건이 친구에게 “저 사람에게 내가 누구인 줄 좀 알려 줘야겠지"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귓속말로 이미 30분 전에 말해줬다고했습니다. 이 말에 레이건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밥줄 예민합니다. 권위는 아무 때나 사용하면 안 됩니다. 지사가 아니라 대통령이 와도 밥줄은 안 바꿉니다. 그러나 저희 교회 애찬 밥줄은 사랑으로 바꾸어 줍니다. 부친님, 모친님 염려하지 마시고 새치기하시기 바랍니다.

 

 

족제비와 생쥐 예화

 

다른 예화 하나 더 듭니다. 족제비에게 늘 당하기만 했던 생쥐들이 있습니다. 고양이 앞에 쥐가 아니고 족제비 앞에 쥐들이었습니다. 쥐들이 늘 잡아 먹히니하루는 긴급 생쥐회의를 합니다. 생쥐들의 운영회의입니다. 우리 교회도 오늘 형제 운영회의 합니다. 이 회의에서 낸 결론이 “우리에게 대장 쥐가 없어서 늘 당한다.”였습니다. 대장 쥐 10마리를 세워 족제비에게 대항하자고자 했습니다. 뽑힌 10마리 대장 쥐들은 일반 쥐하고 구별하려고 머리에 벼슬을 달았습니다. 벼슬을 단 대장 쥐들을 앞세워 생쥐와 족제비와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족제비와 생쥐 상대가 안 되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안 돼 모든 쥐들은 쥐구멍으로 다 도망을 왔습니다. 그런데 이 10마리 대장 쥐들만 사라졌습니다. 알고 보니 이들은 도망 처 들어오다 벼슬이 구멍에 걸려 못 들어 오고 족제비에게 다 잡아먹혔습니다. 벼슬을 세우면 안됩니다. 겸손이 미덕이라는 교훈을 주는 예화 입니다.

엿장수 맘대로

 

엿장수 맘대로란 말이 있습니다. 말뜻은 엿장수가 엿을 마음대로 길게 늘렷다가 짧게 줄였다하는 행동에서 유래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벼슬을 세워봤자 생쥐벼슬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물론 엿장수는 아니시지만 늘렷다 줄엿다 할 권한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주권자입니다. “이 사람아!” 오늘 본문은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음

 

14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 14절 이전에 내용은 하나님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 어떤 잘잘못을 가릴 행동을 하기 전에 엄마 뱃속에서 한 사람은 택하고 한사람은 버렸다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엿장수 맘대로 하시는가? 불의하다. 불공평하다.”라고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답변이 14절입니다. 바울은 “무슨 말을 합니까? 하나님 불의 하지 않습니다.”라며 강한 부정을 합니다. "하나님 불의하다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없다."란 뜻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하여 이어서 설명합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의 모세와 바로 왕을 비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모세

 

먼저는 모세입니다. 15,16절입니다."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출33:19〕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본문15절은 출33장19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고 시내산 아래 60일 만에 도착합니다. 시내산에서 11개월을 머뭅니다. 이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율법 받으러 올라 가 내려오는 것이 지체됩니다. 백성들은 아론을 부추겨 금 모으기 운동을 합니다.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고 이제부터 우리를 인도할 신은 금송아지을 선포합니다. 백성들은 금송아지에게 제사지내고 춤추고 먹고 마시며 니나노 판을 벌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진노하시고 백성들을 다 죽이려고 합니다. 출애굽한 200만 명을 싹쓸어 버리고 모세를 조상으로 택한 백성을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때 모세가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은 뜻을 돌이킵니다. 땅에 내려 온 모세는 레위 백성의 손을 빌어 주동자 3000명을 죽이는 벌을 내리고 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은 일단락 합니다.

 

이 사건에서 모양새는 모세 때문에 백성들이 멸망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인간의 원함, 달음박질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이 논증을 확대하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운 것도 그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것도 이들이 예쁜 짓을 하여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긍휼 때문입니다. 모세는 살인자였습니다. 도망자였고 한낱 양치기 신세일 때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430년간 노예로 찌든 연약하기 그지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유대인들 머리는 좋다하지만 외모는 그다지 잘생긴 민족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일방적으로 택하십니다.

바로왕이 강팍하게된 이유

 

당시에 하나님이 택하여야 할 인간적인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모세보다는 바로 왕입니다. 그는 힘과 권력이 있었습니다.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세계4대문명 중 하나가 이집트문명입니다. 나머지는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이집트의 바로를 악한 역할로 사용합니다. 17,18절입니다."[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출 9:16〕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바로는 강퍅한 자로 씁니다. 본문에 강퍅은 굳셀강(剛) 강퍅할 퍅(愎)자입니다. “성미가 깐깐하고 고집이세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를 참고하면 바로왕은 악역으로 쓰입니다. 9번의 재앙을 당하고도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습니다. 피재앙, 개구리 재앙, 이재앙, 파리재앙, 악질재앙, 독종재앙, 우박재앙, 메뚜기재앙. 암흑재앙입니다. 그러다 10번째 장자들이 다 죽는 재앙을 맞이하고서야 내보냅니다. 내 보내고나서도 마음이 완악하여져 다시 이스라엘을 추격합니다. 그러다 홍해에서 수장되고 물고기 밥 신세가 됩니다. 지금도 홍해에 밑바닥에는 수장된 군사들의 전차가 발견된답니다. 바퀴가 그대로 보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바로왕 스스로 완악하게 되었다란 표현이11번이고, 하나님이 일부러 바로왕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단 표현이 9번 정도 나옵니다. 11대9를 기억해 두십시오. 하나님은 바로 왕을 통하여서도 당신의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십니다. 일부러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셔서 알립니다. 이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그러면 처음 야곱과 에서의 미리 택함 문제로 가졌던 하나님 불공평하게 보이는 문제가 이번 모세와 바로왕의 비교에서도 다른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누구는 좋게 써먹고 누구는 나쁘게 써먹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태양은 지구 어디든 햇빛을 비춥니다. 그런데 본문은 누구는 비추고 누구는 안 비추고 하는 개념입니다. 바울은 선별적으로 긍휼을 베푸는 난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악의 기원은 하나님이 아니다

 

어떻게 결론을 낼지 기대하면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과연 악한 사람을 만들어 내시는 분인가? 이거야 말로 하나님 불의하심의 근거 아닌가? 하나님 마치 북한의 김정은을 일부러 세워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아니신가?”라는 질문에 답을 합니다.

 

일단 단도직입적으로 악은 하나님이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악은 사단이 하나님을 반역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악의 기원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악을 잠시 허용하십니다. 따라서 현재 이세상은 사단이 잠시 활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나다

 

로마서가 주장하는 인간의 실존은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죄인입니다. 태어나자마자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이상한 아기는 없습니다. 한없이 맑은 아이들도 자라면서 악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성경은 세상에 의인은 없다고 선언합니다. 경험상으로도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늘 뉴스로 이를 확인합니다. 미국은 하루가 멀다 하고 총기사고가 납니다. 우리도 얼마 전 강남 부녀자 납치 살해 사건이 났습니다. 요즈음 마약 판매가 는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만취운전자가 초등학생을 치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만들어 우리의 공분을 샀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악이 만연하여 폭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그나마 하나님이 세상의 악을 제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형국입니다. 브레이크 안 밟으면 벌써 인류는 세계대전이 일어나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여기 저기 핵폭탄 펑펑 터뜨려 금방 종말이 왔을 것입니다. 로마서1장28절을 보면 하나님 심판 방법이 상실한 마음대로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본문에 바로왕은 그냥 두어도 원래 악합니다. 태생이 악합니다. 하나님이 그 악한 마음에 기름을 살짝 부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님 처음부터 악한사람 만드시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에 바로 왕이 11번은 스스로 완악해졌고 9번은 하나님이 완악하게하셨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악한자도 필요하시면 도구로 쓰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악도 필요하다면 선용하십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악의 기원은 하나님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현재 악한세상을 적절하게 브레이크를 밟고 계십니다. 브레이크 예를 들면 우리 안에 양심을 심어 제어하십니다. 양심이 내면의 감시자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권력자를 세워 질서를 유지합니다. 가장 큰 브레이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악 한자를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흙탕물에 맑은 물을 섞는 형태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역할을 하는 신자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비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우리가 왈가왈부하여서는 안 된다고 계속 증거합니다. 19,20절 입니다.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 드디어 오늘의 제목이 나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개역한글 성경은 본문을 반문을 힐문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말이 어렵지만 뜻은 더 잘 통합니다. 힐문은 물을 힐(詰), 물을 문(問)자입니다. "트집을 잡아서 따져 묻다."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아 트집 잡지마!” 여기 “이 사람아?”에서 이 사람은 몰라서 순수하게 묻는 사람이 아닙니다. 몰라서 알려고 질문하는 신앙태도는 좋습니다. 질문을 하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거는 좋은 신앙태도입니다. 본문에 이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태클을 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권리로? 엿장수 맘대로 말이야 사람 마음 강퍅하게 만들고,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지옥에 던져 넣고 말이되냐?”라며 하나님에 대하여 삐딱한 마음으로 불만을 품은 자의 힐문을 지적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라고 했는데 그 누구인지에 대한 답변이 20절 하반절과 21절에 이어집니다. "[20]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그 누구를 2가지로 말씀합니다. 진흙과 지음 받은 물건입니다. 지음 받은 물건의 어원이 "플라스틱"이랍니다. 오늘날 플라스틱은 해양 오염의 주범입니다. 우리는 합성제품과 같이 바다 여기 저기 떠다니는 플라스틱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또 우리는 토기장이 앞에 진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자기비하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이라는 전제 가 붙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합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본질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질은 진흙이요 플라스틱입니다.

인간의 본질

 

주제를 바꾸어 본문에서 교훈 하나 더 짚고 넘어갑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사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17절에 보면 성경이 말해준다고 했고, 말끝마다 구약 말씀을 인용 합니다. 로마서 9장도 창세기, 말라기, 출애굽기, 호세아, 이사야를 인용합니다. 바울은 성경적인 권위를 빌어서 말합니다. 성경은 고전작품이 아닙니다. 철학서도 아닙니다. 과학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베게로만 쓰는 분 있습니다. 성경을 부적처럼 365일 차 트렁크에 싣고만 다니는 분도 있습니다. 성경을 주일에만 들고 오는 용으로 쓰기도합니다. 에릭프롬이라는 학자는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는 책에서 자기는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안보고 유대소수민족의 역사책 정도로만 보았습니다. 이러면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 앞에서는 어린 아이의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선입견, 편견, 자기생각을 버리고 성경이 비추어 주는 대로 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경 재판관, 성경 재단사가 되면 안됩니다.

 

본문에서 우리를 지음 받은 물건과 진흙에 비유했습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지음 받았다는 뜻은 본래부터 그렇게 창조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 인간을 어떻게 창조했죠? 하나님 형상을 따라 심히 기뻐한 완벽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창조사역을 돕는 존재였습니다. 본문은 이런 상태로 창조된 인간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흙덩이 상태인 인간을 말합니다. 진흙덩이는 이미 타락하여 하나님 형상을 잃고 모두 죄인이 된 우리를 놓고 한 비유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자유의지도 손상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이끌리지 않으면 사단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 예화

 

본문에 이해를 돕기 위하여 흙탕물 예 하나 들겠습니다. 강릉에 오봉 땜을 무너뜨려 시내를 물바다로 만들 뻔 한 태풍이 있었습니다. 루사입니다. 2002년 8월23일일입니다. 루사 피해로 사망·실종 246명이었습니다. 일일 강수량 강릉이 1위였습니다. 하루에 900밀리가 왔습니다. 양동이로 퍼붓는 듯했습니다. 그때 포남동 남강 초등학교 옆에 방앗간을 하는 집을 제가 알고 있었습니다. 이 집 주인이 물을 막으러 아파트에서 방앗간을 아침에 갔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인이 다급하게 저에게 전화하여 자기네 방앗간을 한번 가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장대비를 뚫고 공단대교를 갔습니다. 그런데 흙탕물이 이미 대교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포남동 시내는 물바다가 되어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흙탕 물이 무시무시했습니다. 트럭이 마치 성냥각 떠내려가듯이 떠내려갔습니다. 다행이 방앗간 주인이 전화통화만 안될 뿐이었고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이 흙탕물을 상상력을 발휘하여 온 인류가 이렇게 죄의 흙탕물에 다 쓸려 지옥의 바다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흙탕물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건져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건져진 사람이 “왜 나만 건져 내고 다른 사람은 그냥 두십니까?”하고 따질 입장이 아닙니다. 그저 흙탕물에서 건져준 사실만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인간은 이와같이 원죄 때문에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스스로 진 죄의 댓가로 지옥 갑니다. 하나님께는 조금도 귀책사유가 없습니다. 내가 죄짓고 내가 복음을 거부하여 지옥갑니다. 다 악한데 바로 왕을 좀 더 악하게 만들어 하나님이 천한 그릇으로 썼습니다. 문제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시는가? 왜 천한그릇 귀한그릇 미리 선택하시는가?” 여기에 대한 답변이 무엇이죠? 본문을 보면 “하나님 토기장이야! 너희 진흙이야!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반문해!” 하면서 바울은 더 이상 논증을 진행시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 까지만 말하고 왜 그렇게 하시는 가에 대하여는 침묵합니다. 단지 우리입장에서는 귀한 그릇으로 택해 주신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 알려고 하지마! 다쳐!”하는 뉘앙스입니다. 예정 선택의 교리는 수세기 논쟁거리였습니다. 더 진전시키다 운명론, 결정론, 필연론, 예정론 등등의 무리한 해석들도 나왔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입장에서 더 이상 해석하려하지 않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성품

바울은 왜에 대한 답변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 관용은 너그러울 관(寬) 얼굴용(容)입니다. “너그러운 얼굴”로 넓은 마음으로 잘못을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품상 죄에 대하여는 용납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진노하셔야 정상입니다. 하나님은 죄는 꼴도 보기 싫어 심판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본문은 참고 관용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왕도 10번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죄를 범하면서 구약을 거쳐 예수님이 이땅에 오사 구원을 완성하기 까지 몇 년이 걸렸습니까? 4000여년 입니다. 4000년을 참으셨습니다. 지금도 참고계시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이 참는 이유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도 심판이 즐겁지 않다는 걸 보이십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 빰 때리기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처럼 사디스트가 아닙니다. 진노와 심판을 즐기는 분이 아닙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이 참는 것은 복음을 들을 기회를 충분히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기회를 충분히 주십니다. 하나님은 다 회개에 이르기를 강력히 원하십니다. 세번째 참는 이유는 심판의 엄중성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수영장에 가면 높은 곳에 물통이 있고 물이 차면 옆으로 확 기울어지면서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기구가 있습니다. 이 기구 상상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차곡차곡 쌓았다가 한꺼번에 쏟으십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통하여도 능력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4대 문명을 일으킨 수장을 홍해 바다를 무 가르듯 갈라 수장시키면서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 소돔과 고모라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번째는 지옥 가는 자들이 핑계치 못하게 하기 위하여 관용하십니다. 하나님 최대한, 충분히 참고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지옥 가도 핑계치 못하게 만드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 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본문의 부요는 부요할부(富), 넉넉할요(饒)자입니다. “어떤 것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부요한 분이심을 보이기 위해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고자 미리 예비하셨습니다. 예비한 시점은 창세 전부터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은 미리 예비하시는가? 그렇게 하셔야 하나님의 영광과 부요가 드러난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님 부요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부요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보면 다 부요한자, 부자들입니다. 그렇게 느끼십니까? 어떻게 부요한 자입니까?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장차 왕노릇 할 자산가들입니다. 성령님 안에 살게 된 것도 부요한 요소입니다. 보배이신 예수님을 소유한자들이기도 합니다.

 

저는 특별히 우리가 교회의 지체가 된 것도 부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묵상이 되었습니다. 어제 한형제 자매의 결혼식이 전주에서 있었습니다. 한옥마을 옆 향교에서 했습니다. 400년 된 은행나무 옆에서 야외 결혼식을 했습니다. 신랑측 교회 청년 특송 6명, 신부측 교회 특송 40명이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신부 측도 은혜로 왔지만 우리 교회가 좀 더 은혜롭게 여겨졌습니다. 우리가 일가친척 결혼식은 참석하지 않더라도 교회 지체의 결혼식은 참석합니다. 우리는 서로 생명부지의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교회로 모이게 하셔서 형제자매 관계로 맺어주셨습니다. 이 관계로 인해 우리는 몸으로 가서 결혼을 축하해 주던 생업 때문에 가지는 못하고 마음으로 축하해 주던 큰 기쁨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교회 지체로 형제자매라는 큰 자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택하시고 부요하게 하셨는데 정작 우리는 가난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환경 때문에 가난해진 분이 있다면 부요하신 하나님 붙잡고 가난 탈 출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가 잠깐 마음이 가난했었습니다. 원인은 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 병원 5군대과 진료를 받고 약을 드시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골다공증으로 인한 척추압박 골절로 척추센터에서 시멘트 시술을 받았습니다. 고혈압, 당뇨로 심장내과 약을 드십니다. 방광염으로 비뇨기과 진료도 받았습니다. 치매로 신경과, 넘어져 머리 충격으로 인한 뇌출혈로 신경외과 진료도 받았습니다. 요즈음은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와야 입원이 가능해 보통 3-4시간을 기다립니다. 저는 아저씨들이 틈만 나면 환자 간이 침대에 벌렁 벌렁 눕고, 공간만 있으면 신문지 깔고 앉고 하는 것이 이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저가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저는 신경이 날카롭게 되어 잠시 마음이 가난해 졌습니다. 그러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부요하게하신 하나님을 통하여 마음의 가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24절은 긍휼의 그릇을 택하고 부르시는 것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구원은 혈통, 상태, 조건, 조상이 누구든 아무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라고 증거하며 끝을 냅니다. 그래서 저도 여기서 끝을 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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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치는 돌과 디딤돌(롬9:25-30)

예화-달정사

달정사라는 절에서 스님들이 어려운 안건을 놓고 토론을 했습니다. 토론이 뜨겁습니다. 심각합니다. 심지어 고성이 오갑니다. 밤새도록 토론은 끝이 안 났습니다. 새벽이 밝아옵니다. 이때 구석에 있던 한 스님이 손을 듭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이제 그만들 하십시오.”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러면서 토론이 끝났습니다. 십자가는 보통 명사화 됐습니다. 십자가를 지겠다는 얘기가 나았으니 기독교의 영원한 숙제 가롯 유다 딜레마 말씀드립니다. 가롯 유다가 12제자 중 예수님을 파는 총대를 멨다는 딜레마입니다. 그가 총대를 메지 않았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미완성이라는 주장입니다. 가롯 유다는 십자가 복음의 지대한 공로자입니다. 말이 되나요? 유다는 하나님 말씀을 이루려고 총대를 메지않았습니다. 유다는 자기 욕심 때문에 스스로 악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유다는 결코 희생양이 아닙니다. 유다는 자기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악한 자를 만들어 악한 일에 써먹는 분이 아닙니다. 악의 기원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유다가 원래 악한데 그 악함을 하나님이 단지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그 사람에게 귀책사유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 입장에서 구원의 원인

 

또 한 가지 관점은 구원을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구원의 원인이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가면 선물을 많이 준다고 하여 이웃집 형을 따라 교회에 갔다가 덜컥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가자고 제안한 형, 따라간 나 그리고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내가 구원의 원인이 아닌가 의문이 듭니다. 아닙니다. 구원의 동기는 될 지언정 원인은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믿어서, 내가 잘나서, 내 공로가 단 1프로도 안들어 갔습니다. 그런 마음을 준분도 하나님입니다. 구원받은 자 입장에서는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과 작정으로만 이루어졌습니다. 작정은 한자로 지을 작(作), 정할 정(定)입니다. 작정은 "일을 어떻게 하기로 결정하다."입니다. 결정한 때가 창세 전입니다. 작정한 목적은 하나님 한분만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요, 예수님의 은혜만 만천하에 드러나게 하려함입니다. 지난 강의까지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공평, 불공평 논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고통

 

오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어집니다.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동족인 유대인이 버림받았고 이방인이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개, 돼지 취급했습니다. 이방인의 마당도 더럽다고 밟지 않았습니다. 혹시 잘못하여 밟으면 먼지를 털어버렸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이 버림 받은 것도 유대인의 딜레마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딜레마로 보이는 이 일이 이미 800년 전 구약성경에 예언되었음을 증거합니다.

호세아의 글

 

본문 25,2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문 25절은 호세아서 2:23을, 26절은 호세아1장10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선지자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뺀 10지파가 떨어져 나가 세운 왕국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이해하기 힘든 명령을 수행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음란으로 명성이 자자한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라합니다. 결혼한 고멜은 아들-딸-아들 순서대로 세 명을 낳습니다. 첫째는 이스르엘로 이름 뜻은 “씨를 뿌린다.”입니다. 둘째는 로루하마입니다. 히브리어 앞에 “로”가 붙으면 부정입니다. 영어 “not"입니다. 뒤에 단어가 “아니다.” 란 뜻입니다. 루하마가 긍휼로 “사함받다.”는 의미이니 로루하마는 “긍휼은 없고 심판받는다.”라는 뜻입니다. 셋째는 로암미 입니다. 암미는 “내 백성이다.”입니다. “로”가붙으니 “내백성이 아니다.”란 뜻입니다.

호세아 자녀들의 이름을 통하여 시대상을 알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를 아이들의 이름이 대변합니다. 고멜은 명색이 선지자와 결혼했습니다.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러면 가정에 충실해야합니다. 그런데 고멜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자녀를 버리고 도망가 삽니다. 가서 잘 살지 못합니다. 그 눈 맞은 남자에게도 버림받습니다. 이런 고멜을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다시 찾아가 끝까지 사랑하고 다시 아내로 맞으라 합니다.

이 가정의 비극은 당시 북이스라엘과 똑같다는 메시지입니다. 북이스라엘은 각종 죄와 우상으로 아이들 이름같이 하나님의 긍휼도 얻지 못하고 버림 받아 앗수르에게 완전히 멸망당한다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변함없는 성품, 변함없는 구원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 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심판자체가 아닙니다. 본문에 내백성이 아닌 자를 내백성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고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자라 했다는 뜻은 결국은 회복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상황이 유대인들이 넘어지고 이방인이 구원받은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내 백성이라 한 유대인들이 넘어지고 내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이 구원받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본래 고멜과 같고 로루하마, 로암미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사랑받는 자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우리 전도 집회가 9일 남았습니다. 이 집회를 통하여서도 내 백성 아닌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호세아서를 인용하는 목적

 

사도 바울이 이렇게 호세아서를 인용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전도 집회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얻는 것이 목적이듯이, 바울도 동족을 한 사람이라도 얻으려합니다. 800년 전에 이미 예언된 상황을 보여 주며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영접하고 유대인들도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겁을 줘서 돌아오라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전도하다 말 잘 안 들으면 심판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무시무시한 지옥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옛날에 어떤 부흥집회에 참석 한 일이 있습니다. 부흥 강사가 강대상 옆에다 고기 굽는 드럼통을 두었습니다. 그 위에 돼지 바베큐처럼 헝겊으로 사람 모형을 만들어서 걸쳐놨습니다. 왜 그러나 궁금했는데 지옥의 실상을 전하고 나서 헝겊에 불을 붙였습니다. 지옥 가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천정으로 연기가 펄펄 났습니다. 강사의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의아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관용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줘야 사람을 얻습니다.

이사야서의 인용

 

다음은 이사야서 인용입니다. 계속 27,28 절을 보십시오.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본문은 이사야의 글 10:22,23을 인용했습니다. 다른 점은 구약에는 이사야가 외쳤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구약을 인용하며 외쳤다는 해석을 넣었습니다. “외치다. ”는 “새가 압박을 받아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에서 유래했답니다. 정말 하기 싫은 말을 해야 할 때 울부짖으며 말했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점은 이사야서는 남은 자가 돌아온다 했고, 바울은 구원받는다 했습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는데 이 심판을 끝까지 행한다고 했는데 사도바울은 심판 얘기는 생략했습니다. 바울은 심판 얘기를 빼고 남은 자를 구원하는 사랑의 하나님을 최대한 부각 시킵니다. 바울이 구약을 인용할 때 문자 그대로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내용은 살아 있지만 조금씩 문구는 바꾸어 인용했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 하나 알 수 있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구약의 인용한 말씀에서 같은 부분과 다른 부분을 부각시키는가 하면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구약과 신약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구약말씀의 1차 수신자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2차 수신자가 있습니다. 바울 당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관계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또 요한계시록에도 남은 자 사상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12:17에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이라고 나옵니다. 3차 수신자는 오늘날 우리와 먼 미래 예수님의 증거를 가잔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복합적 시각이 필요합니다. 구약 따로 신약 따로 국밥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성경 어느 곳에서나 예수님을 예표하는 구절을 찾을 수가 있다고 하십니다.

제가 드리고자하는 메시지는 성경66권은 죽어 있는 책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문자 그대로가 아니어도 또 성경의 일부분만 떼서내어도 우리 삶에 적용이 가능합니다. 이 말씀의 원리는 현재 우리 인생의 깊은 고민거리를 해결해 줍니다. 성경에 인생의 해답이 있습니다. 진리가 있습니다. 구약은 옛날 기록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삶에서 오늘날 우리 삶의 원리를 찾아 냅니다. 그래서 성경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남은자 사상

 

27,28절의 핵심은 남은 자 사상입니다. 남은 자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지만 하나님은 그 중에 남은 자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희망을 주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버림받은 유대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는 자들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남은 자는 남겨 둔 씨로 다시 설명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으로 하나님의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은 도시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으로 끝내는 분이 아니라 씨를 남겨 두십니다. 남은 자와 씨는 같은 의미입니다.(이사야1장9)

 

우리는 남은 자들이고 하나님이 남겨 둔 씨들입니다. 남았다고 하여 우리가 찌꺼기란 뜻은 아닙니다.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키듯이 좀 모지라는 사람이 교회를 지킨다.” 말이 있습니다. 여기계신 분들이 못난이란 의미는 아니겠죠? 여기 계신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이 남겨둔 남은 자 곧 하나님이 보전한 씨들입니다. 못난 자는 결코 아닙니다.

정약용 이담속찬

정약용이 편찬한 속담집인 “이담속찬”에 나오는 말입니다. “농부는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 말이 있답니다. 아무리 먹을 게 없어도 다음 농사에 쓸 종자는 남겨둔다는 말입니다. 강릉 대기리에 가면 씨감자를 키웁니다. 씨감자는 사람들이 직사광선을 피하고, 섭씨 3-4도씨에 잘 보관했다가 파종하는데 씁니다. 씨감자는 최우수품종입니다. 병충해에도 강하고 바이러스 피해도 없습니다. 수확량도 월등하게 증가하게 해줍니다. 애지중지 키웁니다. 대기리 고랭지사업소에 알아봤습니다. 종돈, 종자 소도 있습니다. 종자 소 한 마리에 2억8천 만원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씨의 예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애지중지하여 남기고 보전하신 분들입니다. 자부심 가지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 조건에도 씨를 남겨두는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 장래도 걱정하지 말아야합니다. 개인의 장래뿐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50대 아저씨 들이 은퇴하고 나면 명주로 교회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게 아닌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씨를 남겨서 보존해 주십니다.

이신칭의

 

30,31,32절은 사도바울이 지금까지 줄곧 증거한 이신칭의 사상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원리를 증거합니다.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유대인들은 믿음의 법을 따르지 않고 행위의 법을 따랐습니다. 행위의 법을 따른 다는 것에 대한 간단한 예를 하나들겠습니다. 저희 딸 예린이가 4살 때 울릉도에 간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깥 경치를 잘 보려고 배 창가에 자리 잡았습니다. 얼마 못가 배 가운데로 바로 옮겼습니다. 너무 출렁였습니다. 제일 걱정했던 예린이는 울릉도 도착 할 때까지 잘 잤던 기억이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대한 예화

강릉에서 울릉도까지 161km정도 됩니다. 우리는 배를 타고 갔는데 바다 위를 걸어서 가려는 사람이 있다 가정합시다. 가능합니까? 안목에서 걸어가다가 바닷물이 코에 차면 다시 뒤돌아 나오고 또 돌아 나오고 일생을 해도 몇 십 미터 못갑니다. 어떻게 가야합니까? 묵호항에 가서 배를 타면 됩니다. 배에 타기만하면 3시간 반이면 울릉도까지 갑니다. 걸어서 울릉도 가려는 게 율법의 행위입니다. 율법을 다 지키다 한 가지만 어겨도 다시 제자리입니다.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라는 구원의 배,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야 합니다.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

 

33절을 다 같이 읽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은 돌 사상으로 마무리합니다. 32절 하반 절에 부딪칠 돌이 나옵니다. 또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가 나옵니다. 성경에는 돌이 많이 나옵니다. 주춧 돌, 뜨인 돌, 머릿 돌, 모퉁이 돌, 산 돌, 반석 많습니다. 이것만 정리해도 하나의 메시자 될 듯합니다. 돌, 반석은 모두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이고 힘 있는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반대였으니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니 구약 성경을 달달 외워도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선입견 없이 어린아이 같은 시각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잘못인용하면 이단이 탄생합니다.

인생의 디딤돌이신 예수님

 

예수님을 믿은 우리는 예수님이 인생의 디딤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빼면 시체인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데는 1등 국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없어 넘어졌습니다. 부끄러운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잉크 먹은 스펀지를 꾹 누르면 잉크물이 나오듯이, 신자들을 꾹 누르면 예수님이라는 국물이 나와야합니다. 뒤에 플래카드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했습니다.(빌1:21)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야합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열면 예수님이 살고 계셔야합니다. 빈 집이면 안 됩니다. 다른 분이 살고 있어도 안 됩니다.

 

본문에서 또 하나 중요한 메시지는 나는 명주로 교회에 디딤돌인가? 아니면 걸림돌인가 한번 자문해 봐야합니다. 디딤돌은 못 되도 적어도 걸림돌은 되지 말아야합니다.

 

토머스 카알 라일은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한 사람은 그것을 걸림돌이라고 여기고 주저 앉지만, 강한 사람은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딛고 더 높은 곳을 향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산돌이신 예수님을 디딤돌 삼아 어떤 역격도 다 이겨내는 성도들 되기를 기도하면서 제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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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쉽습니다.(롬10장1~10)

오늘 10장에서는 바울이 동족인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언급합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역사를 사사건건 방해했습니다. 방해 정도가 아니라 죽여 없애려고 했습니다. (행23:12) 몇 번 했는지 AI GTP에게 물어봤습니다. “8번이었고 최근 연구에 의하면 2번을 더하여 10번이란” 답을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정도 되면 미움이 생길 만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롬10: 1절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바울은 동족들을 “형제들아!”하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부릅니다.

“이 원수들아!”하고 불러도 시원치 않을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의 마음으로 동족들이 한 명이라도 구원받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또 이를 위해 늘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만 “형제들아!” 하는 사랑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서신서만 72번 나옵니다. 그리고 딱딱하다는 로마서에만 10번이 나옵니다. “형제들아!”하는 말씀에 비추어 받는 교훈은 교회는 사랑 제일주의여야 합니다. 교회가 사랑 하나면 끝이 아니겠습니다. 교회에 사랑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우리도 교회 형제·자매들을 늘 이런 사랑스러운 호칭으로 부를 수 있길 기도합니다.

롬10: 2절

.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내가 증언한다고 합니다. 증언은 사실을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증언한다는 뜻은 자신이 이미 경험하고 검증했다입니다. 자신도 옛날에는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봤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데 일등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의 원수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스테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의 동족인 이스라엘은 42대째 하나님을 섬긴 모태신앙입니다. 마태복음 1장17절에 보면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2대째 모태신앙이라고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탄생연대를 BC1900대로 보면 약 2천여 년간 모태신앙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던 민족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말짱 꽝이라는 겁니다. 본문에서 지식의 뜻은 구원을 얻는 정확한 지식, 구원을 얻는 방식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영국의 헉슬리 교수가 더블린에서 개최하는 학술협회에 참석하려고 더블린의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늦어서 급하게 이륜마차를 탔습니다. 당시는 1800년대이니 택시는 없었습니다. 그는 마부에게 급하게 소리를 쳤습니다. “자 늦었어요. 빨리빨리 달립시다!" 그러자 마부는 힘차게 말을 달렸습니다. 열심히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렸습니다. 그런데 학술회 시간이 다 돼가는데도 도착을 하지 않고 여전히 마부는 달리기만 했습니다. 이미 학술 회장에 도착했어야 하는데도 계속 달리기만 합니다. 그래서 왜 아직도 달리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마부는 “저는 열심히 달리라 해서 달리고 있습니다.” 목적지는 당신이 처음부터 말 안 해 주어서 그냥 열심히 달리고만 있습니다." 헉슬리 교수는 급한 나머지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고, 마부도 물어보지 않고 무조건 달리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니 말이 달리면 달릴수록 엉뚱한 곳으로 가버린 셈입니다.

마차

어제 코로나19 이후 오랜만에 강원연합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자바라 게임이 있었습니다. 자바라 게임이 술래잡기 게임이냐 아니냐가 강릉에서 춘천을 향해 올라가면서 논란이 많았습니다. 자바라는 현재 교회 식당에 있는 접이식 문처럼 겹치기로 접었다 펼쳤다 하는 기구를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한 분이 게임 중반까지 진행하였는데도 룰을 이해하지 못하여 우왕좌왕하다 엉뚱한 곳으로 열심히 달려서 상대에게 지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열심히 엉뚱한 곳으로 뛰기만 했습니다. 올바른 지식이 없는 열심이 얼마나 모호하고 위험한가 생각해 주는 예를 두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유사하다는 말씀입니다. 42대째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배척했고 구원받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신앙적으로 열심의 문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짓된 열심, 그릇된 열심입니다. 이 열심은 에너지지와 같습니다. 불 에너지와 비유합니다. 불을 통제하지 않으면 재난이 옵니다. 강릉에서 4월에 경포 산불이 났습니다. 강한 강풍을 타고 불과 8시간 만에 주택 40채, 펜션 28채, 호텔 3개를 태웠습니다. 열심 자체가 필요 없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통제하지 않으면 집, 산, 사람 목숨도 잃습니다.

한국기독교 교계에서 이단이라고 규정한 교회들이 그러합니다. 참 열심입니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전도합니다.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열심히 합니다. 지식 없는 열심은 광기가 되는 사례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도 확인합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 나치즘도 예가 됩니다.

그릇된 열심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봅니다. 첫째 이런 모임은 사람을 따릅니다. 어느 모임이나 항상 교주가 있습니다. 사람이 머리가 됩니다. 두 번째는 모임이 조직적입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갑니다. 조직을 배반하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세 번째는 모임이 행함 위주입니다. 사람의 인격, 사람의 됨됨이는 뒷전입니다. 모임의 분위기가 축구 광팬과 같습니다. 네 번째는 모두 다 자신감이 넘칩니다. 자부심들이 대단합니다. 자기 모임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검증하거나 비판받지 못하도록 합니다. 자신들을 비판하면 싸우려고 덤벼듭니다. 다섯째는 진정한 지식, 기독교 정통의 교리, 진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말씀도 몇 가지만 입맛에 맞는 부분만 인용합니다. 그리고 환상주의, 신비주의, 기적, 은사들을 추구합니다. 끝으로는 균형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전도만 열심히 하면 끝이다.”라는 자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쉼이 없습니다. 항상 불과 같이 끓어올라서 안식과 평안이 없이 계속 불탑니다. 우리는 지식 없는 열심 주의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안하무인, 독불장군의 마음, 권면을 못 받아들이는 마음, 균형 없는 마음이 있다면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롬10: 3절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그릇된 열심히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 본문에 의(義)가 나옵니다. 의는 옳다는 뜻입니다. “옳다 그르다.”“의”가 왜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야 합니까? 사람이 배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자고, 먹고, 자고 그냥 육신의 요구대로 살면 좋지 않을까요? 왜 골치 아프게 의와 불의를 따져야 하는가가 의문입니다. 그 대답은 한마디로 인간은 하나님이 의롭게 살아야 하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기독교가 아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를 인간 본성의 법칙, 도덕률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정의롭게 살지 않으면 불행하고, 불안하고, 죄책감 이 들게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만 뜨면 옳고 그르냐를 놓고 싸웁니다. 개인 간, 집단 간, 국가 간에도 싸웁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러시아가 헤르손 댐을 폭파했습니다. 어제 우리가 춘천에서 강원교회 연합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장소가 소양강 댐 아래 샘밭이라는 마을입니다. 폭파한 댐의 저수량이 이 소양감댐 6배랍니다. 주민들이 수몰 위기에 처했다 합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싸우냐 하면 바로 의 때문에 싸웁니다.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마지막 의자가 다 같습니다. 의롭냐, 의롭지 않냐, 옳으냐, 그르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심어놓은 본성의 법칙입니다. 사람은 한마디로 정의롭게 살아야 행복한 존재입니다.

3절에서 유대인의 문제는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의에 복종할 수 없었고 대신 자신의 의를 세우려 했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자신의 의를 세우려 힘쓴다는 말에서 ‘힘쓰다’는 ‘안달한다’는 뜻입니다. 집요하고 끈질기게 노력과 수고하는 행위를 힘쓴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기 의를 쌓으려고 열심을 냈습니다. 행위로 의롭다고 함을 받으려 했습니다. 자기만족,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의를 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자기의 만을 추구했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의 의에 복종한다는 뜻은, 나의 의의 옷을 벗고 하나님이 입혀주는 (갈3:27)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음을 말합니다.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내셔널 골프클럽에 방문할 때는 반드시 그린재킷을 착용해야 들여보내 준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문안으로는 다른 옷은 필요 없고 하나님이 만든 그리스도라는 옷을 반드시 착용해야 들어갑니다.

제가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6년 동안 기차 통학을 하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수백 명의 학생 기차표를 매일 발급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 이용권을 발급하여 주었습니다. 이걸 “패스”라고 합니다. 패스만 있으면 대합실을 무사통과했습니다. 구원의 관문도 예수님이라는 패스만이 유합니다. 다른 표로는 패스할 수 없습니다.

본문 3절에서 또 하나 교훈을 생각해 본다면 교회 일을 자기의, 자기만족 때문에 열심히 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는 매일 나가 살다시피 하면서 정작 집에 남편과 아이들의 밥은 굶든지 말든지 내 팽개치는 분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가 대견스럽고 그래서 더 열심히 하면서 정작 집안일은 내팽개치면 문제입니다.

성경 통독 12번 하겠다고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통독하고 나서입니다. 읽어 낸 자기가 대견하여 성경 1년에 한 번도 못 읽는 사람은 성도도 아니라 하고 정죄합니다. 이러면 곤란합니다.

산에 가 산기도 40일 하고 돌아온 성도가 있습니다. 돌아왔으면 사랑이 더 깊어지고 성도를 더 잘 섬겨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40일 기도한 일이 자기 의가 되어 다른 성도들을 비판하고 잡아먹을 듯이 하면 안 됩니다. “기도 않는 사람은 성도도 아니야!” 이렇게 나오면 곤란합니다.

박사 학위 따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독일에서 신학박사 2개를 따 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박사 학위 2개만큼 사람이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사랑이 많아져서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눈빛이 달라지고 모든 성도를 다 자기 발아래로 본다면 문제입니다. 이러면 자기의 자기만족을 위해 열심히 공부한 것밖에는 안 됩니다.

사람이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자기 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일을 하고 난 후에는 어느새 자기 의가 생겨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 의는 다 해가 되고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빌3:8) 우리도 이런 자세 필요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의를 위하는 자세 필요합니다.

롬10: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이스라엘이 복종하지 않은 의,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따로 제공한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한마디로 잘 표현한 구절이 본문입니다.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는 말씀은 기독교의 대헌장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셨냐는 내용은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9장까지 지속해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시려고 율법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이를 성육신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살면서 율법을 100% 지켰습니다. 그리고 끝에는 율법을 단 한 개라도 어겼을 경우 받을 형벌을 우리 대신 받으셨습니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어긴 사실이 없었으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형벌을 대신할 충분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다 이루었다.”입니다. 이는 원어로 “테텔레스타이”라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첫째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마감, 완성, 다 수행했다.”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백성들의 죗값을 다 지불했다.”“내가 율법의 요구를 다 지불했다.”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공한 의는 분명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성육신, 율법을 완벽히 지킨 삶, 예수님의 속죄 죽음,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이 내용이 없는 구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는 율법을 다 지킨 셈이 되고, 의로운 자가 되며, 율법이 주는 정죄에서 해방됩니다.

롬10: 5-8절

본문은 아주 복잡한 말씀 같지만 한마디로 간단히 옮길 수 있습니다. “구원은 참 쉽습니다.”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1~4절까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서, 힘을 써서, 자기 의를 쌓아 구원받으려고 했다고 했는데 본문은 그것과 반대로 말씀합니다. 애쓰고 힘쓰지 말라 단순히 믿기만 하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무저갱은 바닥이 없는 구멍입니다. 사단이 심판받는 곳입니다. 구원받으려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고 바닥끝까지 내려가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내려오신다는 내용이 8절입니다. 구원받으러 하늘 끝까지 반대로 바닥끝까지 갈 필요 없습니다. 구원은 가장 가까운 너의 입에 너의 마음에 있습니다. 본문 8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구원은 받기에 자존심 상할 정도로, 구원받기에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아주 쉽니다. 구원은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니고 앉아서 떡 먹기라고 할 정도로 쉽습니다. 본문은 이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롬10: 9, 10절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본문은 복음 전도 집회만 하면 단골로 등장하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제가 또 설명하면 입만 아픈 말씀입니다.

시편 116펀10절은“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도 나는 믿었도다”입니다. 이 말쯤의 영어 어순은 내가 먼저 믿었고 그리고 말했다고 나옵니다. 마12장34절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앵무새처럼 “믿는다.”라고 고백하거나, 고객 서비스 센터에서 “고객님 사랑합니다.” 하는 인사처럼 말하면 안 됩니다. 마음으로 믿어서 마음에서 차오르는 것이 말로 나와 고백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알고 믿고 고백해야 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주님이고, 부활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는 헬라어이고 히브리어로는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란 뜻으로 영원히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히1장3절 중간에 보면 “예수님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고 말씀합니다. “붙들다”는 영어로 “consists”로 우주의 질서와 정렬을 관장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고 연합하고 통일하고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이분이 인격자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믿음과 구원의 고백 내용이어야 합니다.

끝으로 고백의 중요성을 말씀드리고 정리하겠습니다. 사랑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사랑이 무엇입니까? 저같이 소심한 사람이 많이 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짝사랑입니다. 짝사랑은 고백하지 않아서 오는 비극입니다. 본문에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폭넓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 신앙 고백하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고백하는 것도 고백입니다. 예를 들어 침례에 순종하는 것도 고백의 일종입니다. 교회 지체로서의 생활도 신앙 고백의 일종입니다. “구원받았으면 끝이야! 나는 이제 산속에서 혼자 편하게 살거야!”“ 교회는 맘에 안 드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이러면 곤란합니다. 히브리서 10장25절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 권면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더해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회에 더해져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했습니다. 이런 모든 삶이 고백하는 방식들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교회 지체로서의 역할, 교회 지체로서의 삶의 방식 아주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비빔밥이 맛있습니까? 참기름과 고추장과 밥과 재료들이 서로 어우러져 잘 비벼질 때가 맛있습니다. 따로 놀면 맛없습니다. 우리 명주로 교회도 모두가 서로 잘 비벼져서 하나님 보시기에 맛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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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을 벌리고 계시는 하나님(롬10:11-21)

로마서 전체 구조를 볼 때 오늘 10장은 별책부록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 복음의 주류에서 밀려난 이유를 계속 설명합니다. 바울의 마음은 “ 거봐라! 말 듣지 않더니 잘됐다!” 이런 심정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롬10:1) 오늘 말씀도 연장선상의 내용입니다.

 

1. 바울은 구약을 인용합니다.

11절부터 보겠습니다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성경에 이르되”하고 시작합니다. 11절은 사28:16 인용입니다. 13절은 요엘2:32절, 15절은 사57:7절, 16절은 사53:1절, 18절은 시편19:4, 19절은 신32:21절, 20,21절은 이사야65:1,2절 인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개인적인 말이 거의 없습니다. 바울은 구약을 인용하지 않아도 할 말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왕년에 복음 전하러 배 타고 가다 죽을 뻔했다. 14일을 낙동강 오리알처럼 표류했다. 한 섬에 갔는데 불피우다 독사가 손가락을 깨물어서 죽다 살았다.” 이런 간증을 해도 좋습니다. 죽을 뻔한 바다가 아드리아 바다입니다. 만난 태풍이 유라굴로입니다. 섬은 멜리데입니다.(행27:27-44, 행28:1-10) 또 “내가 39대나 두들겨 맞아 거반 죽었다가 살아났었다. (고후11:23-27) 내가 3층 천까지 갔다 온 사람이야!(고후12:1-4)” 셋째 하늘을 본 이야기만 하여도 3박 4일은 걸립니다.

 

바울은 구약성경만으로 설득합니다. 그는 성경의 권위에 의지하여 설교합니다. 유대인은 구약을 아주 사랑했습니다. 글귀를 써서 손목에 매고 다니고, 이마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집 문설주와 대문에다 붙였습니다. (신명기6장4-9) 고린도전서 9:22에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수준에 맞게 설교를 하는 셈입니다. 우리도 이런 자세 필요합니다. 주일 학생이면 주일 학생 수준에 맞게 말씀을 전 해야 합니다. 학생이면 그 수준에 맞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중을 존중하는 설교 3 법칙 있습니다. 첫째 쉬워야합니다. 어려우면 안됩니다. 두번째 의미가 있어야합니다. 셋째가 눈높이에 맞아야합니다. 눈높이가 중요합니다.

 

두 번째 바울에게서 배우는 것은 말씀 제일주의입니다. 말씀 자체가 생명력이 있습니다.

 

일본에 한 대학교 여학생 기숙사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한 여학생이 다 훔쳐서 막 나가려는 강도에게 “저 값비싼 고서는 왜 안 가져가냐?”하고 외쳤답니다. 강도는 얼떨결에 고서를 들고 갔는데 안 팔렸습니다. 그래서 책에 무엇이 적혔는지 궁금하여 읽었는데 성경이었습니다. 강도는 읽다가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온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일화도 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을 갔다 한국에 선교하려고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관군에 의해 배가 불탔답니다. 겨우 대동강에 도착했는데 그만 칼에 맞아 순교합니다. 그의 나이 27세입니다. 그가 피를 흘려 죽어가면서 관군이었던 박춘권에게 성경책을 쥐여 줍니다. 얼떨결에 성경을 받은 박춘권은 자기가 읽지 않고 조카 이영태에게 줍니다. 그 조카가 성경을 읽다 변화되어서 나중에 선교사를 도와 성경 번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먼저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우리 자녀들도 교회에 와서 알든 모르든 꾸준히 말씀을 들으면 좋습니다. 언젠가는 열매를 맺습니다. 아이들 다른 곳 말고 교회에 풀어서 놀도록 할 수 있기를 권면합니다.

 

2. 차별이 없는 복음입니다.

1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본문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없다합니다. 헬라인은 그리스 사람을 말합니다. 왜 그리스인 안 그러고 헬라인이라고 할까요? 그리스 신화에 그리스인들은 "헬렌"이라는 사람의 후손으로 나옵니다. 이 신화에서 유래된 이름이 헬라입니다. 로마의 헬레니즘 문화도 같은 어원입니다.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이방인들은 모두 헬라인으로 통칭하여 불렀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하면 전 세계 사람, 세상 만민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이시라 선언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한 민족의 신이 아니고. 온 세상, 온 우주의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또 예수님도 만주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차별이 없다고 하는데 우리는 차별을 두기 쉽습니다. 다 구원받아도 저 사람만큼은 복음이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사람 있습니다. 찔러도 복음이 들어갈 틈이 없을 그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들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북한 김정은도 복음으로 변화될까요? 지나가는 스님 복음이 들어갈까요? 차별이 없습니다. 유교인, 힌두교인, 차별 없습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큰 죄인이나 작은 죄인이나 복음은 차별이 없습니다.

 

본문에 차별이 없다고 했는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지금 어디 있는가?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나?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는 구원받았나? 복음의 복자도 못들어본 사람들이 죄다 지옥 가면 하나님 불공평하다. 차별은 없지만 불공평은하다?”하는 의문이 듭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라 답변하겠습니까? 정답은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하여 명확한 답변을 주고 있지 않다입니다. 일단 우리가 가져야 할 시각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아담 안에 죄, 원죄를 안고 태어납니다. 만일 양심에 단 한 점도 거리낌 없이 살았다면 구원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전지전능하십니다. 죽기 직전 강도도 구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들에 대하여 지옥행 아니면 천국행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심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 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성적으로 죄를 알기 전 죽은 아기들은 천국 간다는 주장도 합니다. 우리는 다만 성경이 침묵하면 우리도 침묵해야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에는 제한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3. 주님을 부른다는 의미

13절을 보십시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본문에서 부른다는 것은 기계적으로 부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앙 고백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에 배가 파선하여 나뭇조각 하나 붙잡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헤엄칠 힘도 없고, 지나가는 배도 없고, 등에 탈 고래 한 마리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사람 살려!”하고 애타게 부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내게는 구원받을 조건이 전혀 없음을 인식하고, 오로지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부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복음서에 세리가 자신의 죄인이 된 모습을 깨닫고 어떻게 했습니까? 가슴을 치면서 나는 죄인이다! 죄인이다! 했습니다.(눅18장9-14)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설교를 들은 무리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했습니다. (행2:37) 빌립보 감옥 간수도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했습니다.(행16장29-30) 부르는 대상은 오직 주의 이름입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을 줍니다.

 

4. 하나님은 사람을 세워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14,1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본문은 어찌 부르리요, 어찌 믿으리요, 어찌들으리요, 어찌 전파하리요. 어찌란 가정법을 써서 단정합니다.

 

본문에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복음을 사람을 임명하여 들려주는 방식을 쓰십니다. 사람으로 구성된 시스템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오늘날 교회로 확대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통하여 같은 방법을 쓰십니다. 요즈음은 다양한 방식의 매체가 발달했습니다. 좋은 신앙 서적도 많습니다. 유튜브를 검색하면 명설교가 소낙비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매체들이 교회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모여서 말씀 선포의 방식을 쓰십니다. 눈과 눈을 마주치며 말씀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라는 공동체가 다 같이 가고 자라는 방식을 원하십니다. 혼자는 도움을 주고받을 수 없습니다. 인격과 인격의 부딪힘 속에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반복하는 말씀이 듣고 들려준다 입니다. 16,17절도 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왜 보여 주는 방식보다는 들려주는 방식을 택하셨을까요? 극지방에 가면 오로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천국의 모습을 하늘에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옥의 고통스러운 모습도 단 한 번만 보여 주면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엇 하러 입 아프게 설득하고 설명합니까? 이 부분에 대한 답변은 회개 때문입니다. 보여 주면 천국이 좋아서 교회 오고, 지옥 가는 것이 두려워서 교회에 옵니다. 이 경우는 인격적인 돌이킴이 쉽지 않습니다. 복음은 모델하우스처럼 보여 주고 입주시키는 구조가 아닙니다. 들려주고 설득하여 회심하게 만들어 입주시키는 구조입니다.

 

5. 메시지의 내용은 좋은 소식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설교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설교의 내용은 좋은 소식이어야 합니다. 좋은 소식은 영어로 “good news!”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성경에 기쁨이란 표현이 신약에만 326회 나옵니다. 설교는 도덕과 윤리강의 아닙니다. 율법 강의도 아닙니다. 좋은 소식을 전달하는 작업입니다.

 

마라톤이 생긴 유래가 그렇습니다. BC490년에 1만 명의 아테네군이 10만 명의 페르시아군을 마라톤 평원에서 싸워 이깁니다. 이 소식을 휘디피데스(Pheidippides)라는 병사가 아테네까지 약 40km 달려와 수많은 시민 앞에서 “기뻐하라, 우리가 이겼노라!”라는 소식을 전하고 죽었답니다. 이를 기념하여 마라톤 경기가 생겼습니다. 마라톤 달리는 거리는 42.195km입니다. 왜 195가 붙었을까요? 사연이 있습니다. 1908년 런던 올림픽 때 왕실 사람들이 마라톤 경기의 출발과 골인 지점을 평안히 앉아서 잘 보이는 위치를 정하려다 보니 195가 늘어났답니다.

 

복음은 휘디피데스(Pheidippides)라는 병사가 전한 소식처럼 희소식, 기쁜 승전보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에서 이제 풀려난다는 소식입니다. 우리의 메시지의 내용도 이런 자유, 감격, 즐거움, 기쁨, 환희가 담겨야 합니다. 메시지는 이 기쁨을 기본으로 하여야 합니다. 심각하면 안 됩니다. 설교가 또 정치적, 사회참여 촉구여서도 안 됩니다. 심리 상담도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전하는 메시지 속에 기쁨이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가 좋은 설교인지 아닌지 시금석입니다. 교회는 잔칫집이어야 합니다.

 

어떤 기쁜 소식인지 복습합니다.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렸습니다. (엡2:1,2)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심판과 지옥에서 벗어났습니다. 죄가 사라지고 의인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지간에서 화평케 되었습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새생명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후사 곧 상속 재가되었습니다.

 

6. 복음 역사의 거대한 흐름

16~21절까지입니다. 본문을 설명하는데 너무 긴 시간 쓰지 않겠습니다. 본문은 우리 모두 잘 아는 복음 역사의 흐름입니다.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구원이 넘어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구원을 많이 받으면 이스라엘이 시기심이 생겨 예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생깁니다. 현재는 땅끝까지 복음이 편만이 전해진 상태이고 유대인들도 많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메시아닉주 같은 곳이 생겼습니다. 본문에서 이방인인 우리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내 백성이 아닌 백성, 미련한 백성, 하나님을 찾지도, 묻지도 않던 백성입니다. 이런 상태에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메시지는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해서 이방인이 우리에게 복음이 넘어간 것이 그냥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하신 일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하리라는 예언은 이사야53장1절에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우리가 예배 때 아주 잘 인용하는 고난받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고난받는 메시아는 유대인이 거절하리라는 예언이 이미 이사야서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서의 기록이 BC700년이니 이미 800년 전에 예언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19,20절은 신명기32:21절과 이사야65장1,2절의 인용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BC1,450년에 기록했습니다. 유대인이 시기하여 돌아오리라는 예언은 이미 1,450년 전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는 것도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우리에게 적용해 봅니다. 여러분이 이 찜통더위에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저의 메시지를 듣는 일도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창세 전부터 계획되었고 때가 되어 부르시고 구원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다른 큰 교회와 비교하여 나는 왜 이런 교회의 소속인가 불만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저분만 앞에 세우고 나는 왜 뒷전이야? 저분만 우리 지체 중에 눈과 귀와 입 역할 하면서 튀게 하고 나는 왜 뒤치다꺼리만 하는 냄새 나는 발 역할 만해?” 이런 불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섭리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다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처 해진 환경에 너무 불만을 품지 말고 하나님 섭리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7. 두 손을 종일 벌리고 계시는 하나님

끝으로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21.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불순종하고 거슬러 말하는 유대인에게 손가락질해도 시원찮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은 장본인들도 유대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돌아오기를 바라며 종일 서서 두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본문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소개합니다. 두 손을 벌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실감이 나게 해주는 성경 장면이 없나 찾아보니 출애굽기17장10-15절에 나옵니다. 이 구절은 출애굽 한 백성이 아말렉과 전쟁을 합니다. 실전은 여호수아에게 맡기고 모세는 산 위에 올라가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들고 기도를 합니다. 그의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지고 올려야만 이기는 상황입니다. 제가 실제 두 손을 벌리고 있어 봤습니다. 1분도 안 돼서 근육이 저렸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양옆에 아론과 훌이 받쳐주어 그 손이 해가 지도록 올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이처럼 종일 팔이 저리고 아파져 와도 늘 내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 부분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1절에서는 11.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고 12절에서는 “12.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안 당한다는 뜻은 “배신당하지 않는다. 거부당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뉴스에 보면 늘 사기꾼 이야기가 넘칩니다. 그러나 사람은 배신해도 하나님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아멘의 하나님이라 합니다. 아멘에 신뢰할만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아멘의 반대말을 노멘 (nomen) 이랍니다. 하나님은 노멘이 아닙니다. 본문 “부요하다.”는 뜻은 넘치고도 남을 충분한 은혜의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며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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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긍하지 말라(롬11:1-36)

신학 용어 중에 신인동성동형론(神人同性同形論)이라고 있습니다. 안트로포모르피즘 (Anthropomorphism)이라고 읽습니다. 오늘 본문 33절에는 인간의 머리로는 하나님을 헤아리지 못하고 찾을 수없는 분으로 증거합니다. 이와같이 크신 하나님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 사람을 비유하여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예를 든다면 롬10:21절에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종일 두 손을 벌리고 계시는 하나님이 신인동성동형론적 표현입니다. 출 34:14절에는 하나님을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람이 보통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배우자가 다른 남자 만나도 덤덤한 마음이 들면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먼저 택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사랑을 배신하고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넘어진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방인을 택하고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유대인이 질투, 시기가 나서 다시 돌아오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오늘 본문이 모두 이와 관련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유대인은 완전히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 대신 택함 받았다고 그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성도는 유대인 무시하지 않습니다. 한 번도 만난 본 적이 없는 분들을 왜 무시합니까? 우리의 상황은 이렇지만, 당시 로마교회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로마서 9.10.11장에 걸쳐 정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교회는 유대인이 많았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갈등이 교회의 존폐를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반드시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정리하는 바울의 마음을 우리는 본문에서도 엿볼 수있습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바울은 동족을 “형제들아!”하고 부릅니다. 형제는 원어로 아델포스입니다. 아는 같은이고 델포스는 어머니의 태란 뜻의 합성어로 같은 태에서 난 자란 뜻입니다. 그래서 형제라는 용어는 가장 친밀하고 가장 애정이 담긴 용어입니다. 바울은 동족을 그렇게 애정어린 마음으로 대합니다. 그리고 14절에 보면 유대인 중에 얼마를 구원하려는 심정도 있습니다. 이 마음으로 로마서9~11장을 할애하여 길게 언급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을 본 적은 없지만, 시각을 바꾸어서 우리도 유대인처럼 될 수 있다는 견해에서 본문을 보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바울시대의 이스라엘의 상황(롬11:1-10)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버리셨는가? 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교회 소수의 유대인 성도들 기죽지 말라 합니다. 버리지 않았다는 첫째 근거가 바울 자신이 유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 버릴 의도였다면 자기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 직분은 동족인 이스라엘 처지에서 보면 종교적인 매국노입니다. 나라 전체가 다 예수님을 거부하는데 자기만 믿고 따랐습니다. 게다가 사도라고 주장합니다. 유대인은 바울을 극도로 미워했고(행14:19) 사도권을 공격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영적인 직분을 귀하게 여기는 자세를 배웁니다. 구약의 에서는 명분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었습니다. (창25:24-34) 우리도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왕들입니다.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벧전2:9) 우리가 받은 영적인 신분은 바울처럼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겉모습은 별 볼 일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저도 중년 아저씨로 보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영적인 정체성은 확실해야 합니다.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다는 두 번째 근거는 2~6절까지입니다. 2절만 읽어보겠습니다. “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 엘리야는 BC852~798년까지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바울은 엘리야가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 고발한 사건을 인용합니다. 고발은 경찰에 범죄자를 신고해 처벌해달라 요구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왜 자기 백성을 고발했나요? 당시 엘리야의 상황은 너무 힘든 상황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우상 지도자 850명과 대결하여 대성공을 거둡니다.(왕상18장) 이런 일이 있었으면 이스라엘 나라가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바알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아합왕과 이세벨은 엘리야 처단 특공대를 조직하여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왕상19:2,14) 그래서 엘리야는 광야로 나가 싸리나무 밑에서 나 좀 죽여 달라고 하기에 이릅니다.(왕상19:4) 바울은 이 상황을 고발이란 용어로 인용했습니다. 죽여 달라는 엘리야를 하나님은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그래 그럼 죽어봐라! 명색이 선지자가 왜 그 모양이야?”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단 천사를 보내어 지극 정성 돌보십니다. 엘리야의 회복을 도운 후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왕상19:5,6) “너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너 같은 사람 7천 명을 남겨뒀다. (왕상19:18)”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힘내라고 고하십니다. 칠천 명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말씀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으로 일부는 확인 가능합니다. 첫째 엘리야의 수제자 엘리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바댜도 있었습니다. 오바댜는 구약 성경에서 제일 짧은 1개 장을 쓴 선지자입니다. 엘리야 당시 오바댜는 아합과 이세벨의 눈을 피해 선지자 50명을 둘로 나누어 동굴에 숨기고 빵과 물을 공급한 장본인입니다.(왕상18:1-6)

엘리야는 자기하나 없어지면 하나님 역사는 망한다 또는 끝장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너무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였습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명을 남겼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하여 주도적으로 끌고가는 역사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교회의 없어서는 안될 기동들입니다. 소중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시각은 "나 하나 없어져 봐라. 교회가 잘되는가? 망한다."하는 생각은 갖지 말아야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남은 자를 남기시고 본존 하십니다. 이 하나님 때문에 우리교회 50년의 역사가 이어왔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뒤에 계십니다.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일반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서 힘을 얻고 한 일이 시골에서 농사 짓던 엘리사 제자 한 명을 세우고 교육하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게 우리한테 왜 그리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도 때문입니다. 우리 형편에 따라 하나님이 버렸다 안 버렸다 하면 신뢰도에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하고 사랑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숫자에 연연하지 않을 수있길 기도합니다. 교회를새로지었는데 빨리 의자가 안찬다고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엘라야처럼 하나님이 하라고 주신 작은 일에 충성하면됩니다. 아무리 형편이 어렵게 보여도 “그런즉 이처럼 지금도”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이방인에 대한 경고(6-24)

17절을 다 같이 일겠습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21,22절도 같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본문의 핵심은 자랑하지 말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이방인의 위치가 돌감람나무고, 곁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절에 보면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에 자랑은 옛날 개역한글 성경은 자긍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긍은 “자신을 지나치게 치켜올려서 허풍을 떨며, 호언장담하는 행위”로 나옵니다. 우리 중에 이런 분 계십니까? 없는 줄 압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교훈을 얻는다면 우리가 연약한 성도를 낮게 보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교회에서 학연과 지연 따지기 쉽습니다. 지식, 은사, 말솜씨로 다른 성도를 무시하기 쉽습니다. 나는 이 교회 조상이고 터줏대감이라며 우월성을 주장하면 안 되겠습니다. 또 "구원은 우리 교회만 있어 우리 교회만 최고야" 하며 타교회를 무시하는 자교회중심주의도 경계해야 합니다.

믿음 안에 우린 모두는 평등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세 필요합니다. (빌2:3) 낮은 위치가 물리적으로도 가장 안정적입니다. 자기를 높여 봤자 불안하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1-24절까지 요약하겠습니다. 먼저 택한 이스라엘이 넘어졌습니다. 특히 메시아이신 예수님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냈는데 그들은 율법에 눈이 멀어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본문 6-8절은 이런 이스라엘의 상태를 소개합니다. 그 상태를“우둔하여 졌다. 혼미한 심령이다. 보고 듣지 못한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회개치 않으면 심판을 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준엄하신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심판에 대한 말씀이 9-10절입니다.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이 된다.”라는 시편 69편 22절 다윗 시 인용입니다. 밥상머리는 가장 평안한 자리입니다. 밥상이 올무가 된다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일상의 평안함이 다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등이 굽었다는 뜻은 “포로들이 움츠리고 끌려가는 모습, 슬픔이나 고통으로 위축된 모습”을 상징합니다. 또 등이 굽었기 때문에 올바른 길을 못 찾는 상태를 말합니다.

3.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한 축복과 풍성(롬11:11-15)

본문11-14절은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자극해 결국 돌이키기도 한다는 내용을 반복합니다. 15~24절까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비유로 소개합니다. 본문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비교할 때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떡 덩이,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로 비유합니다. 가루의 비유는 하나님께 바쳐진 일부의 곡식 가루로 떡을 만들면 전체가 다 거룩하다는 비유입니다. 샘플이 거룩하면 나머지가 다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수박이 잘 익었나 익지 않았나 알아볼 때 삼각형으로 구명 뚫어 뽑아서 맛을 봅니다. 그와 유사합니다. 샘플이 맛있으면 다 맛있습니다.

유대인은 참 감람나무이고 우리는 거기에 접붙인 바 된 돌감람나무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유대인이 있기 때문에 이방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이란 발판을 딛고 이방인에게 복음이 넘어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또 자랑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도 신앙선배들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복음을 접했습니다. 선배를 무시하는 자세는 올바른 태도가아닙니다. 북음은 계승의 역사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인, 이방인 모두 뿌리로부터 진액을 받습니다. 뿌리와 접붙임에 대한 예화 하나 소개합니다. 포도주 하면 프랑스입니다. 상표가 보르도입니다. 프랑스에는 양질의 포도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양질의 와인을 생산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150년 전에 프랑스의 포도나무가 다 말라죽었답니다. 이유는 프랑스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뿌리혹벌레가 들왔습니다. 뿌리혹벌레는 포도나무 뿌리에 붙어 즙을 빨아 먹는 해충입니다. 뿌리를 공격하니 줄기, 잎이 모두 말라 죽습니다. 원예가들이 연구한 끝에 미국산 포도나무가 뿌리혹벌레에 강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미국산 포도나무를 대량수입합니다. 문제는 미국산 포도나무가 병충해에는 강하지만 맛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프랑스산 포도나무 가지를 미국산 포도나무 가지에 접을 붙였습니다. 그리하여 뿌리혹벌레에도 강하고 맛도 좋은 포도를 생산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니 프랑스 포도밭을 갈아엎는다고 합니다. 요즈음 20~30대 젊은이들이 와인보다 맥주를 좋아하여서 수지타산이 안 맞기 때문이랍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 예화에서 뿌리가 중요함을 확인합니다. 또 접붙일 때는 원예학적으로 돌감람나무에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는게 맞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농부가 아니고 조제 업자여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구원역사는 자연스럽지 않음을 확인합니다. 구원역사는 영적 생명이 살아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절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죽었다 살아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는 기적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진액을 공급받는 부분은 뿌리입니다. 저희 집에 십몇 년 키운 큰 화분이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 그만 말라 죽었습니다.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분갈이가 필요하답니다. 분갈이를 몇십 년 전 사고 단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말라 죽자 밑동 5cm만 남기고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 화분을 내다 버리려고 했는데 귀찮아서 차일 피를 미루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잘라낸 밑동 옆으로 풀이 삐쳐서 나왔습니다. 뽑아버리려고 보니 풀이 아니고 뿌리로부터 새로운 싹이 나왔습니다. 두 달 동안 삼복더위에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새싹이 나왔습니다. 너무 반갑고 신기하여 기념사진도 찍어두었습니다. 뿌리가 살아있으니 죽지 않는다는 체험을 했습니다. 이나무가 킹벤자민이라고 합니다. 벤자민은 요셉 동생 베냐민의 영어 이름입니다. 바울도 베냐민 지파입니다. 킹벤자민 나무는 난방기 유해 물질, 주방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도 정화해 줍니다. 또 풍요와 발전의 상징이랍니다. 우리도 왕이신 예수님께 접붙여진 사람들로서 그분으로부터 영적인 공급을 받아 항상 싱싱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위도 정화해 주는 빛과 소금 역할도 하길 기도합니다.

4. 이스라엘의 회복과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25-31)

25~2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본문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이스라엘도 결국은 돌아온다는 설명입니다. 본문 26절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돌이키겠다는 말씀이고 이 사실을 신비라고 말씀합니다. 신비는 비밀과 다릅니다. 신비는 영어로 미스터리고 비밀은 시크릿입니다. 시크릿은 누구에게나 감추어져 있는 것이고 신비는 공개되어 있습니다. 공개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복음이 그렇습니다. 복음은 만천하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둔하게 되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변치 않습니다. 요즈음 시대 상황을 보면 이스라엘이 많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통계에 이스라엘 인구가 865만입니다. 그중 유대교가 75%고 이슬람이 18%고 기독교가 2% 정도입니다. 17만 명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본문 29절은 이 하나님을 후회가 없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후회가 없다는 뜻은 “마음이 변치 않으신다. 어떤 변화도 없다. 목적은 이루어지고 성취된다.” 뜻입니다. 후회는 뒤후(後), 뉘우칠회(悔)를 씁니다. 인간은 후회를 먹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절대 후회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택함과 부르심에도 후회가 없으십니다.

5. 이스라엘의 위치(32-36)

32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본문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셨다.”라는 뜻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27절에 보면 죄를 제거해 주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긍휼을 베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예수님을 통하여 긍휼을 얻습니다. 유대인에게 십계명, 곧 율법을 준 것은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그 앞에서 죄를 깨닫고 구원받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십계명은 인류 보편적인 가치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지켜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샘플로 택함 받았습니다.

33-36절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과 지혜와 지식을 찬양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36절만 같이 읽고 정리하겠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 구절과 관련한 예화가 있습니다. 과학자 중에 마이클 패러데이가 있습니다. 마이클은 천사장 미카엘의 영어 이름입니다. 이분은 전자기유도법칙을 알아낸 분입니다. 패러데이는 오늘 본문 36절 설교를 듣다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라는 구절을 듣고 자석 주위에 보이지 않는 힘이 N극에서 나와서 S극으로 휘몰아치며 들어가는 걸 상상했고 1831년 코일 근처로 자석을 움직이면 전류가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마이클패러데이의 전자기유도법칙에 따라 발명한 전자기 회전 장치는 전기 모터의 근본적 형태가 되었고, 결국 이를 계기로 전기를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만물의 시작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힘을 얻고, 영감을 얻고, 위로를 얻는 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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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드리라(로마서12:1-5)

2021.6.13주일말씀

오늘 본문은 5개 절 입니다. 로마서는 극찬을 받는 성경입니다. 성경중의 성경, 성경의 보화, 모든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합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성경이 로마서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단어 하나하나 마른 오징어를 씹듯이 씹어야 제 맛이 납니다. 저는 5개 절을 묵상하면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입니다. 하나님이 4번 나옵니다. 하나님의가 2번,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각각 한 번씩 나옵니다. 5절에는 그리스도 안에 란 단어가 언급됩니다. 로마서12장부터는 실천편입니다. 우리는 이 두 단어를 통하여 실천에 앞서 인생의 주어가 하나님이어야하고 인생의 기초가 그리스도 안 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기초를 어디에 두느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7장24-27절을 보면 반석위에 기초를 둔 집, 모래위에 기초를 둔 집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 모래위에 지은 집은 다 무너진다고 하십니다. 이 비유는 기초의 중요성을 말씀하지 쌓아올리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초가 부실해 지난번 중국에서는 97층 빌딩이 흔들리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또 몇 일전 광주 붕괴 사고도 기초적인 부분을 건드려 중심을 잃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의 주어는 하나님 기초는 그리스도안 기억하시면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절을 먼저 참고합니다.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그러므로 라는 접속부사를 써서 본문은 앞 전체 내용을 바탕으로 전개합니다.

먼저 본문 1절 전반 절은 바울이 어떤 마음으로 서신을 쓰고 있는지 단어 뜻에서 압니다. 먼저 "형제들아!"입니다. 이는 사랑스러운 호칭입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로마서도 고린도에서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도로를 따라 1195.2km입니다. 바울은 몸은 멀리 떨어졌지만, 마음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하듯이 로마 성도를 부릅니다.

다음은 자비하심으로입니다. 자비하심의 자비의 한자는 사랑할 자(慈) 슬플 비(悲)입니다. 사랑하는데 슬프다는 의미입니다. 짠한 마음, 울컥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 마음, 긍휼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이런 마음으로 권면합니다. “권하노니”라는 말 그대로 명령이 아니라 권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명령할 권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비한 마음으로 서신을 씁니다.

지체의 교리

4, 5절입니다. 로마교회는 작은 교회입니다. 거대한 로마제국에 비하여 로마 신자들은 소수였습니다. 소수의 무리가 모여 신앙생활 하기가 힘겨웠습니다. 로마교회는 사도들이 직접 개척하여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예루살렘 박해로 흩어진 일반 신자들이 모임을 이루었습니다. 적은 무리이지만 튼튼하게 교회를 유지해갈 비결을 바울은 말합니다.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처럼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바울은 교회는 지체라고 합니다. 지체는 조직이 아닙니다. 유기체이고 생명체입니다. 지체는 촘촘한 신경망과 핏줄로 서로 연결하여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호가 감각신경을 타고 뇌로 갔다가 손에 있는 운동신경에 전달하는 시간은 0.013초 걸립니다. 눈 깜짝할 새는 0.4초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보다 30배나 빠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한 지체 의식을 가지라는 권면은 교회 신자가 서로 무신경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로 뭉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지체 의식으로 고난과 핍박을 헤쳐 나가도록 돕습니다.

몸은 산제물로 드리라

1절 하반 절은 개인적인 삶에 대한 권면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몸을 드리라고 합니다. 몸을 드리라는 것은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신앙이 아니고, 관념적인 신앙이 아니고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행동으로 나올 때 참믿음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데모를 많이 했습니다. 데모 전에 마이크를 잡고 선동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가 항상 반복하는 첫 멘트는 “행동하는 지성! 일만 이천 학우 여러분!” “행동하는 지성!”이었습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지 말고 나와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몸을 제물로 드림이 바로 행동하는 성도가 되어야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겠죠? 머리로만 생각하는 신앙 이상합니다. 참 믿음은 행동으로 나옵니다.

몸을 드리는 신앙은 영적 예배로까지 연결합니다. 영어 성경은 합리적인 예배라 표현합니다. 또 제물 앞에 “산”자가 붙습니다. 성경에 “산 소망, 산 돌”이란 표현도 있습니다. 산은 영어로 living으로 생활로 번역합니다. 생활 속에서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란 뜻입니다. 예배는 교회라는 특정 장소에서 특정 형식을 통하여 드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권면합니다. 내가 가는 모든 곳이 예배처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양치질하고 탁구치고 잠자고 아이 돌보고 대화하고 집안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음악을 듣고 직장이나 사업장에 출근하는 모든 곳 모든 행동이 예배고 예배처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권면합니다.

 

제물의 특성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물은 구약의 제사 때 드린 제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돼지, 개 가능합니까?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서 안됩니다. 소, 양, 염소, 비둘기, 곡식, 기름, 포도즙 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왜 돈, 다이아몬드, 부동산을 제물로 바치라 하지 않았을까요? 구약 제물의 공통점은 “먹을 수 있다.”입니다. 우리는 왜 먹죠? 살기위해 먹습니다. 음식은 우리의 생명유지 기능을 합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죄를 없애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죄를 없애는 방법은 나의 생명을 죄 값으로 죽이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를 죽일 순 없으니 생명유지기능을 하는 음식을 대신 제물로 죽여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의 요건은 첫째도 거룩 둘째도 거룩입니다. 흠이 없어야합니다.

몸을 산 제물로 드림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양이 아니라 실제 몸을 드린 예가 있습니다. 구약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신약은 예수님 자신이 산 제물로 십자가에 드려졌습니다. 제물은 그 자체가 남을 위해 드려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남을 제물 삼아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잡아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란 말씀 또 소금과 빛이 되라는 말씀도 희생을 바탕으로 합니다. 소금은 자기를 녹여서 맛을 내고, 빛은 자기를 태워 어두움을 밝힙니다.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이 현실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가는 이사야 53장 7절에 나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산 제물의 특징은 입을 열지 않았고 잠잠했습니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삶은 거룩하며 말씀에 묵묵히 순종하는 삶입니다. 또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하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제목이 몸을 드리라 입니다. 영을 드려라 혼을 드려라하면 오히려 복잡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이 뭐야?”합니다. 그런데 몸을 드리라 입니다. 단순 명료 한 권면입니다. 오늘날은 몸을 못 쓰게 하는 시대입니다. 온라인 시대, 가상현실, 증강현실, 유비쿼터스 시대입니다. 눈과 손가락만 많이 쓰게 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를 거슬러 몸을 쓰는 신자이길 기도합니다. 교회 청소시간이면 “일어납니다. 청소함에 갑니다. 마대자루 듭니다. 그리고 바닥을 닦습니다.”이렇게 몸을 움직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앉아서“청소란 무엇일까? 왜 청소를 하는가? 청소의 원어 뜻은 무엇인가? 저분은 왜 청소를 매번 빠지는가?”복잡한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주일이면 “일어납니다. 세수합니다. 그리고 교회 옵니다.” 몸을 움직이면 정신도 건강하게 변합니다.

2절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울은 먼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본받는다."라는 같은 모양이 된다는 뜻입니다.

세대를 본받지 말라

본문에 세대를 본받자 말했는데 오늘날 어떤 세대가 있는지 알아봅니다. 베이비붐 세대, 386세대, X세대, C세대, Y세대, M이라 해서 밀레니얼 세대, Z세대로 나눕니다. 밀레니얼의 M과 Z를 합하여 MZ세대입니다. Z세대의 특징 하나만 소개합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가 Z세대입니다. 왜 Z세대냐 하면 20세기 마지막에 태어난 세대여서 알파벳 마지막 자를 땄습니다. Z세대는 디지털 세대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스마트 폰을 끼고 사는 세대입니다. 온라인상에서 많은 활동을 합니다. TV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습니다. 유튜브하고 아주 친합니다. 여가를 유튜브하고 지냅니다. 이들을 팩트광이라고 합니다. 스마트 폰으로 팩트 체크 바로 들어갑니다. 강단에서 말을 잘못하면 바로 검색 들어갑니다. Z세대는 개인주의 성향 뚜렷합니다. ”혼밥“”개인 맞춤 서비스“”자기중심“이 키워드입니다. 욜로족이라고도 합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약자- ”인생은 오직 한 번뿐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한다. “가 욜로의 뜻입니다. ”겟꿀러“라고도 합니다. -겟(get)은 영어 얻다 꿀은 달콤한 꿀에서 인용-이는 가격보다 취향을 중시하는 성향을 뜻합니다. 취향에 맞는다면 가격 따지지 않고 뭐든 삽니다. 또 소확행이라 해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현재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이런 이들에게 기성세대가 ”라 때는 말이야. “하고 옛날 얘기하면 꼰대 소리 듣습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질문도 삼가 해야 합니다. ”“취업 언제 할래? 결혼 언제 할래?” 함부로 물어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말라

본문은 “이런 세대의 성향, 풍조를 닮지 말라!” 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은 현재가 아니고 미래지향적입니다.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고 개인주의가 아니라 이타주의지향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Z세대의 성향을 보면 복음과 친하기 어렵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저는 이런 세대 속에 믿음으로 살아야하는 우리 명주로 교회 Z세대들은 얼마나 힘들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이 응원해 주고 기도해주어야겠다는 생각 들었습니다. 우리 청년회 조이름 지은 거 보셨습니까?. 8개조가 있습니다. 톡톡 튀는 개성 엿보입니다. “갈렙조, 열정넘치조. 풋풋하조. 큐티하조. 중후반조. 사랑하조. 앰마오조. 만나조.”입니다.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대를 본받지 않는 방법 2가지를 권면합니다. 2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먼저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죠? 공책에 연필로 까맣게 그림이나 글씨를 쓰고 지지우개로 지웁니다. 깨끗하여 지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이 묵은 마음은 지우고 늘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늘 새로운 마음은 내가 먹어야합니다. 그럴 때 변화시켜주시는 분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켜 주십니다. 두 번 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고합니다. 분별하다는 원어로 인정하다 입증하다란 뜻입니다. 하나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어가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곧 성경말씀입니다. 말씀이 분별력을 키워줍니다. 말씀은 원어로 로고스 이고 로고스는 losic 곧 논리가 어원입니다. 우리 말씀 따라 사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광신이고 제정신 아니라 비웃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이 가장 논리적입니다. 합리적입니다.

 

그다음은 세 번째 권면으로 넘어갑니다. 3절을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먼저 은혜로 말미암아를 전제로 합니다. 은혜는 값없이 받습니다. 댓가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은혜입니다.(고전16:22,-24) 세상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갑니다. 공기, 햇빛, 물 이것이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골고루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 성도는 여기에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 하늘 기업을 약속으로 받은 은혜, 돌보심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늘 이 받은 은혜를 헤아려 보고 또 그 은혜 안에서 살아야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고합니다. 분별하다는 원어로 인정하다 입증하다란 뜻입니다. 하나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어가라는 권면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

사도바울의 은혜에 기초한 오늘 마지막 권면이 무엇입니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생각 좀하면서 살랍니다. 생각의 중요성 생각의 힘 중요합니다. 특히 본문은 공동체 안에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 가를 말씀합니다. 본문은 그 이상이란 단어와 분량이란 단어가 대구를 이룹니다.

 

먼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었던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요한3서에 나옵니다. 디오드레베란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가 으뜸 되기를 좋아했다(요한3서1장10)고 소개합니다. 그는 순회 사역자들이 자기 교회 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순회 사역자를 파송한 요한과 그 측근 들을 비방했습니다. 순회사역자를 섬기는 형제들도 못하게 막았고 말 안 들으면 그들도 비방했습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의 교회가 자기 개인 교회 인양 월권행위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쁜 선례로 이름이 올라가 대대손손 영원히 욕을 먹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큰자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

예수님의 12제자도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그 좌우편은 자기 자리로 다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에서 그 이상의 생각을 품으면 갈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치열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발꼬락 냄새가 진동을 해도 누구하나 물 떠오는 사람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좀 튀는 행동을 하면 비방의 화살을 날렸습니다. 갈등이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야고보와 요한이 엄마찬스를 이용해 예수님께 인사 청탁한 사건입니다. 이를 안 10명의 제자가 분노했습니다. “누군 엄마 없나? 두고 보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품은 생각은 마땅히 품어야할 생각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하시면서 큰 자는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낮아져 종처럼 섬기는 자라는 바른 생각을 품도록 하셨습니다.

믿음의 분량만큼 생각하라

 

본문은 또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자기 분량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지 않습니까? 너 자신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자아발견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아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 때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반대로 과대평가하지 않습니다. 보여 주기식 신앙, 척하는 신앙 가지지 않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 몸도 나이에 맞는 분량이 있습니다. 스포츠에도 체급이 있지 않습니까? 탁구도 부수가 정확히 나누어져 있습니다. 7부가 분량을 모르고 3부에게 덤비면 안 됩니다. 한 점도 못나고 지는 창피를 당합니다. 몸도 나이에 맞는 분량있습니다. 자기 몸의 분량을 모르고 밤 한번 새웠다가 어지럼증이 와서 혼난 적 있습니다. 소화력의 한계를 모르고 과식했다가 식중독 걸려서 죽을 뻔했습니다. 영적인 부분에서도 분량이 있습니다.

받은 은사에 따라 생활 하라

 

끝으로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지 않음을 은사와 연결해서 생각해보고 마치겠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만 특별하게 준 것을 말합니다. 아기를 보면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성도가 있는가하면 강 건너 불 보듯 또는 지나가는 멍멍이를 보듯 무덤덤한 성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왜 아이를 귀여워하지 않을까? 이상하다. 판단하면 안 됩니다. 교회에 먼지가 날린다든지 휴지조각 하나 나뒹구는 것 가만히 못 보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크게 신경쓰지 않는 성도도 있습니다. 마음에 부담이 되면 본인이 조용히 주으면 됩니다. 왜 쓰레기를 지나치지? 돼지 우리과냐!”하며 판단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결벽증이 있는가? 해도 안될 것입니다. 본인 마음에 부담이 되면 은사로 주셨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기 보다는 현재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성도로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 상대가 은사대로 하나님 앞에 살도록 기도해 주어야합니다. 우리 모두 주신 은사를 발견해서 마음껏 교회를 위해 쓸 때 나도 기쁘고 교회도 부족함이 없어집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부족함이 없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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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지 은사(롬12장1~8)

1. 로마서 실천편

드디어 오늘부터는 실천편입니다. 로마서는 편지글입니다. 바울은 편지쓰기를 좋아하는 로맨티스트여서 서신을 자주썼을 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를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길이 막혀서 어쩔 수 없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집필 장소는 고린도입니다.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현대 도로를 따라 얼마나 떨어졌나 살펴보니 1195.2km입니다. 바울은 아주 멀리 떨어진 로마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세한 것은 만나서 얘기하기로 하고 로마서를 썼습니다. 대강 썼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전체 내용은 개요만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교리의 엑기스만 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어 하나하나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어떤 성도는 교회에서 볼 때는 천사신자입니다. 그런데 교회문을 나가 집에 가면 헐크로 변신합니다. 직장에 가면 더 심한 헐크로 변합니다. 이러면 곤란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무엇을 어떻게 실천하라고 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2. 산 제물

먼저 1절을 보십시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므로”라는 접속부사로 시작합니다. 이는 앞장1-11장까지 내용을 근거로 실천하라고 합니다. 1-11장까지의 핵심내용은 바울은 인간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선언합니다. 죄인은 예외없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입니다. 이런 상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믿음만이 벗어나게 해줍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므로 실천하라고합니다. 거듭나지도 않았는데 실천만 열심히 하여도 문제입니다. 어떤 분은 주변에서 너무 구원받으라고 밀어붙여서 자기도 모르게 덜컥 구원받았다고 말했다가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극단적인 예로 평생을 장로로 봉사했는데 마지막 죽을 때 쯤 중병이 들었습니다. 자녀가 “찬송가를 틀어드릴까요?”했는데 “애야 찬송가도 예수님도 다 필요없다. 불경이나 좀 틀어라!”라고 말하는 분도 있답니다.

 

그러므로 다음 문장은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입니다. 바울은 사도입니다. 당시 사도의 권위는 대단했습니다. 병든자도 일으켜세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앞세워 이렇게 편지 서두를 쓸 수도 있었습니다? “이 평신도 들아! 사도인 내가 감히 너희에게 명령한다.” 실제 구약에서 모세가 율법을 선포할 때는 명령조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입니다. 형제들아 하고 동급으로 로마 성도를 부릅니다. 형제들아는 영어로 “brother and sister"입니다. 자매님들도 반드시 포함한 용어입니다. 로마 교회는 노예, 종, 군인들이 많았답니다.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무시 받는 계층입니다. 바울은 로마성도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자비한 마음으로 간청했습니다. 그야말로 천키로나 떨어져 있었거고 게다가 얼굴도 모르는 로마 성도와 마치 함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듯한 느낌으로 권면합니다. 교회는 계자가 없어야합니다. 계층, 계급, 계파입니다. 교회 성도는 모두 동등한 brother and sister들입니다.

 

바울이 간절히 권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1절하반절을 보십시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본문은 자기 몸을 진짜 잡아서 드리란 말이 아닙니다? 2011년에 경북 문경 채석장에서 진짜 자기 몸을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뜻은 몸을 모든 삶 속에서 또 생활 속에서 거룩하게 유지하고 거룩하게 살라는 의미입니다.

 

1세기 해가지지 않는 로마가 왜 망했습니까? 왜 해가 졌습니까? 목욕탕 때문에 망했습니다. 당시 좁은 로마시에 만 목욕탕이 170개가 있었답니다. 규모가 동네 목욕탕 수준이 아닙니다. 가로215미터 세로330미터인 탕도 있었답니다. 축구장 2개 반을 붙여놓은 크기였답니다. 로마는 세계를 정복하고 막대한 부를 누렸습니다. 식민국가 사람을 노예로 잡아왔습니다. 모든 허드렛일은 노예들이 다했습니다. 그런데 몸에 무슨 먼지 묻힐 일이 있다고 밤낮 목욕을 합니까? 몸의 쾌락을 즐긴거라고 추측할 수 밖에 없습니다. 로마 멸망의 내적 요인으로 쾌락, 사치, 폭력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로마사람들의 유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노예 검투사가 3천명이 있었답니다. 로마는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해가졌습니다. 몸을 거룩하게 하라는 권면은 당시 시대상도 반영했으리라 짐작합니다.

 

몸을 산제물로 드리라는 권면은 구약에 제사제도를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에서 탈출시킨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백성을 따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의 중심에는 성막, 성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소, 양, 비둘기를 잡아 제사 드리는 삶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여기에 쓰이는 제물은 반드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만 드렸습니다. 제사장이 흠이 있나, 없나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우리 몸도 이렇게 매사에 거룩함을 유지하라는 권면입니다. 이를 영적예배라고 합니다.

 

몸을 드리는데 몸적예배라 해야 맞지 왜 영적예배라고 합니까? 우리는 몸 따로 영혼따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몸은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을 표현하는 기관입니다. 몸은 전인격을 말합니다. 영적예배는 가장 합리적인 예배로 번역합니다. 본문에서 눈여겨 볼 단어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입니다. 2절에도 기뻐하시고란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 웃음의 하나님, 대단한 유머가 있으신 하나님입니다. 온 우주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하나님의 유머가 깃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매일매일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기뻤다 하셨고, 사람을 만든 다음에는 심히, 매우 기뻤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동물원에 가면 하나님의 유머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코끼리, 하마, 개코원숭이 많습니다. 지구촌 사람도 서로 닮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리는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러면 나도 기쁜 삶입니다. 본문을 고행하라는 말씀으로 받으면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몸을 함부로 굴리면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을 뿐더러 나도 물론 기쁘지 않습니다. 신앙의 기쁨이 없다면 몸을 함부로 굴리고 있지 않나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두에도 말씀드렸듯이 신자가 헐크로 변해서 남을 욕하고 비방한다면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고 본인도 기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나한테 바치라 하시고 나머지는 나몰라라하고 방치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신약시대는 몸이 성전인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기뻐하셨으면 우리 몸을 거처로 삼으셨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몸을 거처로 삼으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우리를 도구로 자신의 뜻을 이땅에서 펼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역사하고 직접 음성을 들려주는 시대가 아닙니다. 하나님 보고 싶으면 옆자리에 있는 성도 얼굴을 보면 됩니다. 지난주일 호주 선교사님이 대구사역자로 가려고 할 때 또 호주 선교사로 나가려고 할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온 게 아니고 하나님이 마음에 부담을 주셨다고 간증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성령시대는 우리가 조금만 힘쓰면 성령님이 도와주셔서 산제물로 넉넉히 드릴 수 있는 시대입니다.

 

우리 몸에 대해 가져야하는 또 하나의 관점은 아직은 불완전하다입니다. 우리 몸은 아직 완전히 구속받지 못했기 때문에 죄의 에너지가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이 에너지가 활동하지 못하게 막아야합니다. 몸의 활동, 보고, 먹고, 말하고, 듣고, 축구, 탁구 치는 등 모든 일에 거룩해야하고 이것이 하나님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꿩 먹고 알 먹고의 삶입니다.

 

3.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2절을 보십시오. “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울은 몸에서 또 한 단계 들어가 마음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에 대해 권면합니다. 본문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새롭게는 영어로 Renewing으로 새로워 졌는데 다시 새롭게란 뜻입니다. 거듭나서 한번 새로워진 것으로 끝이 아니고 늘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 새로워진 상태는 증기기관차에 비유를 합니다. 증기기관차가 철로 위에 방향이 서울 방향이었는데 그 반대 방향으로 전환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옥행에서 천국행으로 방향을 180도 바뀌었음을 말합니다. 이 변화는 우리가 사탄의 노예에서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영원을 향해가는 거룩한 순례자가 된 것을 말합니다. 새롭게 변화받은 신자로서 매일 매일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권면입니다.

 

마음을 새롭게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보는 시각부터 변해야합니다. 이 세대는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 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배경에는 사단의 검은 손길이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겠습니다. 세계1,2차 대전을 예로듭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자가 28,555,886 명이 죽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7천500만 명이 죽었답니다. 2차 세계 대전은 히틀러가 악의 축입니다. 세계대전을 히틀러 한 사람의 문제, 한 인물의 문제로 봐야할까요? 그렇다면 히틀러 한 사람 없어지면 세상이 바뀌어야합니다. 그런데 스탈린이 또 나타났습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흐름에는 세력이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범죄가 계속 반복되면서도 커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신본주의에 바탕을 두지 않은 문화입니다. e-스포츠도 하나님이 관여해서 만들었을까요? 답은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교회 안에도 세상풍조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요즈음 과학주의 시대입니다. 나노, 테라 단위 까지 좌지 우지하는 시대입니다. 요즈음은 슈퍼컴퓨터를 넘어 양자컴퓨터를 생산하려 하고 있습니다. 슈퍼컴퓨터도 빠른데 양자컴퓨터는 슈퍼컴의 30조배 빠르답니다. 슈퍼컴이 1만년 걸려 계산할 걸 양자컴은 단 3-4분이면 끝낸답니다. 이런 시대인데 “동정녀탄생, 부활, 물위를 걷는 기적 이런걸 믿는 일이 말이돼냐? 성경에서 이런 신화적인 요소는 다 빼자.” 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도 있답니다. 갈릴레오 재판아시죠? 당시 교회가 지구가 돈다는 그를 사형판결한 일은 교회 내에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겠습니다. 본받을 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밖에는 없습니다. 그 뜻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대로 믿고 그 진리를 따라 살면 모든 것이 제대로 분별이 됩니다.

 

4. 마음을 새롭게 하라

오늘 제목이 두 가지 몸가짐 입니다. 첫째 몸은 성령님이 거하는 몸을 거룩하게 마음은 새롭게 하라 했습니다. 그 다음 권면은 3절입니다.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세 번째는 생각은 분량만큼 품으라고 합니다. 생각을 품으라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감자를 캐서 손으로 품고 나를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욕심을 내어 감자를 너무 많이 품으면 어떻게 됩니까? 다 와르르 쏟아집니다. 또 감자 달랑 두 개만 들고 나르면 눈치 보이고 효율성이 없습니다. 감자는 적당히 품고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생각도 이렇게 하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지혜롭게란 뜻은 균형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뜻 입니다. 균형감을 상실하지 않는 생각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은 구름 위에 붕 떠 있다는 뉘앙스입니다. 구름위에 떠있다는 것은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본문을 적용하면 자신에 대하여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과소평가도 안됩니다. 교회에서 “나는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야!” 이런 생각한다던가 아니면 구름위에 가면 보이는 것이 없듯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남을 무시하고 자랑해서도 안됩니다. 성경은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했습니다. 무시의 타킷은 교회 지도자가 되기 쉽습니다. 내가 남을 무시하는 생각이 품어지면 구름 위에 있다고 여기고 빨리 안전한 지상으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분배해주셨기 때문에 공평하고 공정합니다. 남의 떡 크지 않고 자기 떡 결코 작지 않습니다. 자기를 자랑하거나 남을 무시할 이유가 전혀없습니다.

 

5. 지체 교리

다음은 두 번째 몸입니다. 교회의 지체로서의 몸 가짐 교리를 4-8절까지 증거하고 있습니다. 4,5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지체의 교리는 너무 유명하여 자세히 설명 드리지 않겠습니다. 교회를 몸의 지체라고 정의한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교회는 조직입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합니다. 위에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십시오. 교회는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조직입니다. 부장, 과장, 대리, 상사, 중사, 하사, 병 이런 조직과 같아야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썼다면 얼마나 살맛 나지 않고 삭막하겠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몸입니다. 그래서 탄생과 성장이 모두 신비롭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여서 사람이 인위적으로 좌지우지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몸이라는 것은 다양성이 합하여 연합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손톱, 발톱을 우리는 쓸모없이 여기기 쉽습니다. 가끔 무좀도 생기고 성가십니다. 그러나 손톱 발톱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보호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한답니다. 히말라야 등반 갔다가 손락 끝 8개를 동상으로 잃은 분 인터뷰를 봤습니다. 손톱이 없으니 손끝이 계속 쓸려서 너무너무 아프답니다. 우리 몸의 지체는 쓸모 없는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지체라는 것은 이와 같이 없어서는 안 될 불가분의 존재란 뜻입니다. 우리 모두 자신을 그렇게 여기고 옆에 성도도 그렇게 여겨야겠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몸의 지체로서의 기능과 몸 가짐을 7 가지로 말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쓰라고 주신 은사라합니다. 재능은 타고난 것이고 은사는 거듭나면서 특별히 받은 선물을 말합니다. 저는 둘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이것을 교회를 위해 사용하면 굳이 은사와 재능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분별합니다. 또 본문의 은사는 대표성을 띱니다. 은사는 7가지 이외에 훨씬 많다고 봅니다.

 

6. 7가지 은사

6-8절입니다.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의 은사입니다. 각 은사의 의미는 다른 형제님이 많이 교제해주셨으니 생략합니다. 지금부터 상황을 설정하고 그 상황을 보며 나에게 어떤 마음이 드는지 알아 보고 자신이 어떤 은사를 가졌는지 판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애찬 때 식당에서 줄을 서서 배식을 받습니다. 밥을 푸는 테이블 앞에 접시가 2줄로 쌓여있습니다. 애찬하시는 한 자매님이 음식을 놓으려고 왔다 갔다 하다 쌓아 논 접시를 떨어뜨려서 와장창 깨졌다고 상상합니다.

 

첫 번째 반응으로 “자매님 행동을 자세히 보니 앞으로 신경에 관한 병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조심해야할 것 같은데요”하면서 미래에 대하여 조언해 주는 마음이 들면 예언의 은사입니다. 두 번째는 곧바로 달려가 접시를 주으며 쓸고 닦고 하면 섬기는 은사입니다. 세 번째는 “저 테이블이 너무 좁아서 접시가 쏟아 졌어! 가로 3,12미리 세로 4.5센티 늘리자!” 이런 마음이 들면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네 번째는 “자매님 기왕 접시 깨진 거 어찌하겠습니까? 어디 발은 안다치셨어요? 다행이네요?” 이러면 위로의 은사입니다. 다섯 번째는 누구를 시켜서 “약상자 가져와! 빗자루 가져와! 스카치 테이프 가져와! 아이들 주변에 오지 말게 해!” 하면서 상황 정리하는 사람은 다스리는 은사입니다. 여섯 번째는 “접시 값 얼마예요? 제가 쏩니다. 다 변상해 놓을 께요.” 이러면 구제의 은사입니다. 일곱 번째는 “자매님 더 많이 다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예요.”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며 같이 공감하고 안타까워하면 긍휼의 은사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한 두 가지는 해당되겠죠?

 

바울은 이런 은사를 가진 지체로서의 몸가짐을 덧붙여 설명합니다. 섬기는 일은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는 일로하라 합니다. 한 마디로 본문은 남의 동네에 기웃거리지 말라입니다. 손으로 숟가락 질 해야지 발이 숟가락 잡으려 하지 말라는 겁니다.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는 것은 도를 넘지 말고 선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구제는 성실함으로 하라는 뜻은 “단일한 마음으로”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눈과 사람의 눈을 모두 인식하는 두 마음으로 하지 말라입니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는 열정을 가지고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저기 모든 일에 참견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는 억지로 의무감으로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6-8절에서 제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단어는 “할 것이라. 행하라.”입니다. 영어로 “do it"입니다. 은사는 김치처럼 묵히면 안 됩니다. 은사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적극 사용해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거듭나면서 성령님이 거하는 개인의 몸과 교회의 지체로서의 몸 가짐에 대하여 어떻게 하라는 권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개인으로 삶 속에서 드리는 예배를 사적예배라 하고 교회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를 공적예배라 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예배 모두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합니다. 사적예배를 소홀히 하면 형식적이고 눈가리고 아웅 식의 신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공적예배를 소홀히 여기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이도기 쉽습니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 몸 중 첫째 몸은 거룩하게 마음은 새롭게 생각은 분량만큼 해야 합니다. 두 번째 지체로서의 몸은 교회를 위해 열심히 사용하라는 권면을 기억하시기를 바라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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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신앙, 국가에 대한 자세(롬12장11~18 13장1~14)

1. 로마서 기록 배경

 

로마서 후반부는 교회론입니다. 바울 당시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들었습니다. 당시는 소작농이 많아서 근근이 먹고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풍년이 들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기근마저 들었으니 설상가상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인 교회에서는 기근을 만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구제 헌금을 걷었습니다.(행 11:27-30) 바울과 바나바는 그 구제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로마서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로마서에는 당연히 화합, 연합이라는 주제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 교회와 이방교회의 연합, 로마교회 내에서도 유대인과 이방인 크리스천의 화합을 많이 강조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이 연합을 지체와 은사의 교리로 설명을 했습니다.

 

 

 

2. 거짓없는 사랑

오늘 본문도 이어서 성도가 실제 생활 속에서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갖어야 하는가를 권면합니다. 12장 9절부터 보겠습니다. 12: 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에 대하여는 더 이상 설명하면 제 입만 아프고, 시간 낭비입니다. 성경 검색기에 사랑을 검색하니 635번 나옵니다. 로마서에도 23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도 6번 나옵니다. 바로 그다음 구절 10절에는 형제사랑에 대하여 나옵니다. 또 사랑은 13장으로 넘어가 8,9,10절에 나옵니다. 본문에서는 성도 간에는 서로 사랑의 빚만 지라고 합니다. 다른 빚지면 안 됩니다. 사랑의 빚만 서로 많이 지워서 완전히 파산시키시기 바랍니다. 저는 파산직전입니다. 저는 기도의 빚도 많이 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아들 수능 때문에 너무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은 구약에서 613개의 율법을 만들었고 파생된 수천 개의 율법 만들어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랑하나면 끝이 납니다. 사랑은 만능키입니다. 사랑하는데 이웃의 담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 살인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본문 12장10절입니다. “거짓 없는”은 원어로 “휘포그리테스”입니다. 뜻은 배우가 연기한다입니다. 연기하는 사랑, 위선적 사랑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즈음 사랑 용어 남발 시대입니다. 쉽사빠는 손쉽게 사랑에 빠지는 스타일을 말합니다. 금사빠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스타일을 줄인 말입니다. TV에서도 하루 이틀 만에 사랑에 빠지는 프로가 많습니다. 작년에만 25개 나왔답니다. 또 사랑을 육체적인 것만 부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 성도는 연기하는 사랑, 휘포그리테스의 사랑을 하면 안 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넘어가겠습니다.

 

3.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두 번째 권면은 “악을 미워하라고 하고 거기에 머물지 말고 선에 적극 속하라.”라고 권합니다. 바울의 성경 기술 방식은 소극적인 것을 먼저 말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이어서 기술하는 방식이 많습니다.

 

악은 미워하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이 콘셉트이고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면 악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악은 미워해야 합니다. 악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악은 실체로 존재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제3의 세력입니다. 악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실제 세력입니다. 악은 사탄, 마귀로부터 기인했습니다. 본문에 악을 미워한다는 단어 원어의 뉘앙스는 “움찔하면서 두로 펄쩍 물러난다.”는 뜻입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입니다. 길 가다가 갑자기 뱀을 보면 머리카락이 쭈뼛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 상상하면 됩니다. 저는 뱀을 잘 보는 비상한 능력이 있습니다. 어릴 때 산에 다니면서 뱀을 볼까 봐 겁을 먹고 살피는 습관이 누적되어 이런 능력이 생겼습니다. 성도는 과거에 죄를 즐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몸이 죄를 기억해서” 죄를 미워하지 않기 쉽습니다. 죄를 미워하지 않으니 금죄빠가됩니다. 금방 죄에 빠집니다. 금죄빠가 되지 않으려면 죄에 대하여 소스라치게 놀라고 미워해야 합니다. 죄에 빠진 자기를 자책하는 것에 앞서 나를 유혹하고 넘어지게 만드는 제3의 실체인 악의 세력을 먼저 극렬하게 미워해야 합니다.

 

바울은 악을 미워하는데 머물지 말고 적극 선에 속하라고 권면합니다. 선에 속하라는 단어는 “선에 강력 본드로 붙여서 밧줄로 꽁꽁 동여맨다.”는 뜻입니다. 선에 속하는 자세는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악은 미워집니다.

 

4. 악을 미워하는 방법

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미워해야 할까요? 그것이 바로 로마서 13장 11-14절 말씀입니다. 본문은 성어거스틴을 거듭나게 한 말씀입니다.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 알제리 출신입니다. 흑인이었는지는 본 사람이 없어서 잘 모른답니다. 그의 기독교 신학은 존 칼빈, 마르틴 루터에게 까지 영향을 주었답니다. 그러면 루터하고 어거스틴하고 친구일까요?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354년에 태어났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에 일어났습니다. 루터보다 1163년 전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은 회심하기 전까지 악을 매우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니교인 이교에 심취했습니다. 대학 때 동거해서 사생아까지 낳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정원에서 기도하는 중에 담장 너머에서 “톨레레게”란 소리를 듣습니다. “톨레레게”는 라틴어로 “집어 들고 읽어라!”란 뜻입니다. 그래서 즉시 성경을 집어 들고 읽었는데 그 본문이 오늘 로마서 13장 11-14절이었습니다. 그럼 우리도 “톨레레게”한번 해보겠습니다.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구절로 어거스틴은 악행을 청산하였답니다. 참회록이라는 유명한 저서도 남겼습니다. 톨레레게는 이웃집 아이들이 부른 노래가사였답니다.

 

본문에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는 것은 군대 기상나팔 소리 상상하면 됩니다. 나팔 불면 일어나기 싫어도 무조건 벌떡 일어나서 연병장으로 나가야 합니다. 본문은 세상을 밤으로 비유합니다. 밤 문화가 문제입니다. 천로역정에서는 현세상을 ”허영의 장터“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이 허영의 장터에서 깨어나서 군복을 입듯이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합니다. 본문에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단어의 그림은 옷을 벗어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방탕의 누더기, 술 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 육신의 일의 누더기를 벗어던져야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을 걸치면 악이 더 이상 우리를 터치할 수 없습니다.

 

5. 영적으로 게으르지 말자

 

다음 권면은 로마서12장 11절입니다.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게으르다는 할 일을 안 하며 뭉그적거리는 것을 말합니다. 기상나팔을 불었는데도 연병장으로 안 나가고 뒹구는 모습입니다. 전도서 11장 4절 “바람만 살피는 자는 씨 뿌리지 못하고, 구름만 살피는 자는 추수하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농부가 바람과 구름 한 점 없는 날만 기다리다 보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뜻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나가서 씨 뿌리고 돌봐야 추수합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는데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섬길 수 있을까요? 교회를 섬기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 생활, 교회 활동,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성도 두 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에도 지대한 관심이 있으신데 교회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를 불러내신 것도 교회로 불러내셨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유리관 속에 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수도승이나 은둔자로 사는 게 아닙니다. 교회에 속하여 그 관계 속에서 삽니다. 교회라는 관계 속에 뒹굴면서 크리스천으로서의 인격이 형성됩니다. 로마서 후반부는 다 교회론입니다. 그래서 14장에는 교회에서 연약한 한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한 장을 다 할애하기도 합니다.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신앙의 기본을 잘하는 것입니다. 신앙실천의 3요소는 기도, 말씀 읽기, 교제입니다. 교제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주님과의 교제를 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도 포함합니다. 수평적으로는 성도 간의 교제입니다.

 

6. 소망, 환난, 기도

그다음 권면은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입니다. 본문의 소망은 인생대박의 소망이 아닙니다. 하늘의 소망입니다. 기독교의 사관은 직선적인 역사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시작하셨으면 반드시 끝맺으십니다. 그 끝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이루실 새로운 왕국입니다. 여기에 대한 소망은 현실의 고난을 이길 기쁨을 줍니다.

 

환난 중에 낙심하지 말고 참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모난 신앙 인격을 깍아내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도합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이 일 때는 맞서기보다 잠잠하기를 기다리는 게 상책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환난의 폭풍 속에서 인내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합니다. 아이들 밤에 잠재워 보셨습니까? 아이가 무섭고 두려우면 부모에게 말을 많이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는 집 밖에 공동화장실이 있었습니다. 밤에는 무서우니 부모님 하고 같이 갑니다. 부모님이 냄새나는 화장실 안에 같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안에서 저는 부모가 밖에 서 있는지 없는지 계속 말을 걸고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있음이 확인되면 안심합니다. 기도가 이와 유사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수시로 하나님께 말을 걸고 이를 통하여 안심이되고 두려움도 이깁니다.

 

7. 구제

다음 권면은 13절입니다. “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구절입니다. 본문에 쓸 것은 금, 은, 다이아몬드, 명품 백이 아닙니다. 기본적인 필수품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 시대나 예수님께서 육체로 활동하던 시대나 상황은 비슷하여 예수님 당시 시대상황을 소개합니다. 예수님 당시는 소작농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소작농은 지주에게 수확물의 2/3를 바쳤습니다. 수확물의 66%를 바친 셈입니다. 그리고 국가도 세금을 걷어 갔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배 하였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소작농을 포기하고 노예가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또는 떼강도 무리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강도당한 자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바울 당시 성도는 실제적인 구제가 필요했습니다. 또 로마에는 여관이 퇴폐영업을 많이 해서 성도가 가면 잘 곳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성도 집에서 대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면 본문의 권면처럼 손님 대접에 힘써야겠습니다. 손님 대접할 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부터 4일간 진행하는 전도 집회에 우리가 적극 손님을 초대하고 복음으로 대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 원수 사랑

다음 권면은 롬12:14절입니다.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예수님도 강조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권면과 같음 맥락의 권면입니다. 이 권면은 오늘 본문롭ㅁ12장 17절, 20절, 21절에도 이어집니다. 12:17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2:20절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절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고 합니다. 이 말씀은 지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적용하면 좋겠습니다. 전쟁을 멈출 수 있습니다. 동해보복법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만큼만 남에도 해를 가한다는 보복률 사상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반대로 하라는 권면입니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을 빌라는 뜻입니다. 저도 메신저여서 말씀은 전하지만 쉽지 않은 권면입니다. 하여간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합니다. 비범한 사랑을 하여야 합니다.

 

9. 함께하라

롬12장15절입니다.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고 합니다. 자 어떤 것이 어려울까요? 같이 즐거워하는 일이 어려울까요? 같이 울어주는 게 어려울까요? 힌트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입니다. 우는 함께 우는일보다 함께 즐거워해주는 것이 어렵습니다. 올림픽 시상식에서 금메달 딴 선수가 은, 동메달 딴 선수에게 자기 자리로 올라 와서 같이 사진 찍자고 제안하면 자존심이 상해 잘 올라가지 않습니다. 올라가더라도 어색하게 웃습니다. 성도는 이러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내 즐거움으로 여겨야 합니다. 오늘 롬12장10절에 보면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는 구절이 있는데 원어의 뜻은 “어떤 보석의 정당한 값어치를 먹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라는 의미입니다. 상대를 평가절하하지 말고 은사를 적극 인정 해 주는 마음이 있을 때 진심으로 기뻐해줄 수 있습니다.

 

10.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라

롬12:16절은 “12: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했고, 다음 19-20절은 “12:19 내 사랑하는 자 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직접 원수 갚지 말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공정하십니다. 내가 원수 갚으면 상대가 내 눈을 상하게 했으면 나도 눈만 상하게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감정이 상해서 아예 목을 칩니다. 보복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의도가 하나님 나보다 힘이 더 세시니까 상대를 완전히 가루를 만들어주시기 때문에 맡기라는 뜻도 아닙니다. 심판하는 주권을 모두 하나님께 양도하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다.” 란 구절에 있습니다. 당시 문화가 성냥이 없었으니 집에 불이 없을 때는 화로를 이웃에게 가져가서 거기에 숯을 담아서 얻어왔습니다. 또 이집트 풍습에 회개의 증표로 숯을 담은 냄비를 머리에 이고 돌아다녔답니다. 우리 어릴 때 이불에 오줌 싸면 키 쓰고 이웃에게 소금을 받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면 창피하니까 다음에는 오줌을 안 싸게 됩니다. 숯불을 쌓는다는 뜻은 원수를 선대하면 그의 마음에 고통과 불안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양심의 가책과 고통을 느끼게 함을 의미합니다. 가책이 크다보면 결국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오게됩니다.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11. 화목하라

롬12: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할 수 있거든 하라 그러면 할 수 없으면 머리끄덩이 붙들고 싸우라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할 수 있거든은 영어로 “If you can~”이 아니고 “If it be possible~”입니다. 타인이나 환경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화목하란 뜻입니다. 나는 화목하고 싶어도 환경이나 타인이 그렇게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내가 군인이라면 총 안 잡을 수 없습니다. 강도가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화목합시다.” 할 수 없습니다. 할수 있거든이란 말씀은 불가항력적인 한계를 설정한 것입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입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12. 국가권력과 성도와의 관계

롬13장으로 넘어갑니다. 13장 1-7절까지는 국가와 신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권면합니다. 본문에는 국가의 권력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가치관 하나는 위의 권세가 진화의 산물이 아니란 겁니다. 오랜 시간 동안 정치의 발전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 아닙니다. 위의 권세는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질서라는 아이디어는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위에 권세에 앉은 자들은 자기가 잘나서 앉은 게 아니란 걸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권세가 하나님의 대리자의 역할을 함으로 위에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는 국가에 대하여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군대도 가야 합니다. 세금도 잘 내야 하고 법도 잘 지켜야 합니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서 대통령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인정 못한다는 자세도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13. 국가권력에 대한 신자의 태도

국가권력은 나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줍니다. 범죄자들을 잡아 가둬서 나에게 악을 행사하지 못하게 막아 줍니다. 정부는 강도, 살인 방지, 악인의 징벌 기능이 있고, 교통질서 유지, 상하수도관리, 공공복지증진, 경제문제 해결 등 많은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가 평온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본문롬13장 3절에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구절이 있습니다. 본문은 원수를 선으로 대할 때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게 한다는 사상과 일맥상통합니다. 실제 스탈린 때 보고가 올라왔답니다. “공장에서 가장 선하고 믿을 사람은 그리스도인들 밖에 없다.”입니다. 그래서 스탈린도 기독교인을 칭찬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영광 받게 됩니다. 반대로 잘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리가 판단하기 애매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의 기준은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라고 권면합니다. 옛날에 KBS 개그콘서트에서 박성광이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이런 코너에서 술에 취해서 이런 대사를 합니다. “국가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어!” 합니다. 국가권력은 순기능도 있지만 권력을 남용할 때 국민이 고통받습니다. 실제 100년 역사 동안 국가권력에 희생된 사람이 2억 명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국가가 월권하여 악을 행사하면 신앙 양심을 따라 불복할 수도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자신을 숭배하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가 혁명에 참여해야 합니까? 공권력이 국민의 재산과 안전을 지켜주지는 않고 악을 행사하면 양심을 따라 참여해도 죄는 아닙니다. 물론 선거라는 법제도를 통해서 악한 정부를 바꾸면 가장 좋습니다. 노조 참여해야 합니까? 신앙양심상 불법노조, 불법집회가 아니면 참여해도 죄가 안 됩니다. 양심에 따라 참여했는데 정죄해도 안 될 것입니다. 행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결정하면 총 들고나가야 할까요? 나가야 합니다.

 

본문 롬13장4절에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칼은 권위를 상징합니다. 바울 당시 로마 총독이 지방 총독을 임명할 때 단검을 주었습니다. 이 검의 용도는 그들이 비행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목을 취하겠다는 상징적인 용도로 주었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공적으로 법을 잘 지키도록 하는 길은 칼을 휘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로는 안됩니다. 형벌이라는 제도로 악을 억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형제도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의 견해는 긍정적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사형제도는 있습니다. 또 사형집행이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공권력과 법의 테두리 안에서 시행하며 악을 방지하는 목적이라면 굳이 없앨 필요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14.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

끝으로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4가지 형태가 있었습니다. 첫째 국가가 교회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형태입니다. 영국의 국교회에서 국왕이 교회 머리라고 주장했었습니다. 두 번째는 반대로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입니다. 중세교회가 국가의 문제를 좌지우지했었습니다. 세 번째 형태는 교회와 국가는 적대관계로 봅니다. 교회는 신성하고 국가는 사탄의 종으로 봅니다. 종교개혁시대 이런 주장을 했었습니다. 네 번째는 교회와 국가는 상호 공존하는 형태입니다. 이것이 바람직합니다. 교회가 기독교정당을 만들어 정치에 관여하는 것도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정치는 정치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교회 본연의 임무인 영혼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힘써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제목과 같이 형제 사랑은 기본이고 원수를 사랑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들이 되어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그리스도인 또 위의 권세 자 곧 세상으로부터도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 모두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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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받으라 (롬14장1~23 롬15장1,7)

1. 서론

 

아기 목욕시킬 때를 상상해보겠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땀을 흘리며 열심히 목욕시킵니다. 씻긴 더러운 물을 버리라고 남편에게 시킵니다. 그런데 버리러 간 남편이 구정물은 안 버리고 아이를 버렸다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남편은 우리가 모두 잘 돌봐드려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 아이는 본질이고 씻긴 물은 비본질을 말합니다. 오늘 교제는 교회에서 비본질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변두리 문제, 주변 문제입니다. 교회는 주변 문제로 아이를 버리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지침은 성경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성경 기록에 “주님의 만찬을 행하라.”라고 말씀하면 그대로 행하면 됩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면 살인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문제는 직접적인 명령이 성경에 없습니다. 구원과 핵심 교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교회에서 대립합니다. 그 과정에서 성도간에 서로 마음에 상처 주거나 받는 일이 많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가 얼마 중요하였으면 14장 전체를 할애하여 설명합니다.

 

2. 로마교회의 비본질 적인 문제들

 

그러면 로마 교회의 비본질적인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세계 평화 문제, 인구감소 문제였을까요? 아닙니다. 로마서14장2절을 보십시오. “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문제였습니다. “치사하게 먹는 거로 그러냐?”고 합니다. “네 먹는 거로 그럽니다.” 사람들은 먹는 거에 민감합니다. 모든 기관에서 설문을 받으면 다 먹는 거에 대한 불만이 1순위입니다. 그러나 창사 이래로 단 한 번도 불만이 없었던 기관이 있습니다. 강릉 명주로 교회 애찬입니다. 로마 교회는 고기를 먹고 안 먹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고기 파와 채소 파의 대립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 주변 문제는 5절입니다. “5 어떤 사람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어떤 특정한 날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의 문제입니다. 로마 교회는 고기 문제와 날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애찬에 나왔던 고기는 모두 신전에 바쳐졌던 고기였습니다. 당시 유통구조가 시장에는 우상에게 드린 고기만 풀렸답니다. 우리 교회 애찬 메뉴 중 최고의 인기 메뉴는 제육볶음입니다. 이 제육볶음이 우상에 제물로 바쳐졌다가 나온 고기라고 상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듯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다 선합니다. 또 우상은 없습니다. 우상으로 만든 나무는 그냥 나무일 뿐입니다. 금으로 만든 우상도 그냥 금일 뿐입니다. 그 앞에 두었던 고기가 이상한 정기가 들어가 부정한 성분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부 성도는 이 고기를 먹으며 마음과 양심이 상했습니다. 특히 수천 년 동안 율법을 지켜왔던 유대인 성도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제육복음 먹는 사람들은 모두 간접 우상숭배자 들로 여겼습니다. 반대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아니 고기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믿음으로 먹지!”하고 업신여겼습니다.

 

당시는 안식일과 주일이 혼재했던 과도기였습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키던 성도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에 주일을 지키기 시작하니 이것도 걸림이 되는 성도가 많았습니다. 또 율법에 절기들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율법의 의식법은 폐하여 졌습니다. 그러나 일부 신자는 성도가 절기를 지키지 않는다며 대립했습니다. 일명 안식일 파와 주일 파로 나뉜듯합니다. 또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금식일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성도도 아니야”하고 판단하거나 “이런 사람은 거듭났는지 의심해 봐야 해!”하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일 파는 “날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일 년 365일 24시간을 다 예배해야지!” 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요즈음도 교회가 비본질의 문제로 의견이 나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만찬 예배 때 사용하는 떡은 이스트를 넣어 부풀리면 안 되고 무교병과 같은 딱딱한 떡을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부드러운 빵 파와 딱딱한 빵 파가 싸우기도 합니다. 만찬 예배 때 사용하는 포도주에는 알코올이 들어가면 안 되며 포도즙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알코올 파와 즙 파가 싸웁니다. 자매님들은 바지는 절대 입으면 안 되며 긴치마만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일명 치마 파와 바지 파가 싸웁니다. 교회에서는 절대 정숙해야 하며 불경건하게 뛰어다니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교회는 잔칫집과 같아야 한다며 시끄러울 수도 있다고 서로 판단합니다. 일명 정숙 파와 잔치 파가 대립합니다. 어느 성도가 깜박하고 식사 기도를 빼먹고 밥을 먹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걸고넘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 점심때 짜장면을 먹을까요? 짬뽕을 먹을까요?”라며 하나님께 기도로 물었답니다. 이 모습을 본 다른 분이 “그냥 땅기는 대로 먹으면 되지 그런 걸 다 기도하냐!”하고 비난합니다. 예배의 순서만 좀 바뀌어도 이상하게 봅니다. 우리가 10명에게 복음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힘들어진 1명의 성도가 교회를 떠나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3. 비본질 적인 문제들에 대한 권면

 

사도바울은 연약한 자와 강한 자 모두에게 권면합니다. 본문에서는 무엇을 하지 말고라는 권면을 여섯 구절에 걸쳐서 합니다.로마서14장 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합니다. 3절에서는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반대로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 합니다. 그다음 10절에서는 비판하고 업신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13절에서는 다시 비판하지 말고 형제 앞에 장애물을 놓지 않게 주의하라고 합니다. 15절에는 형제를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망하게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끝으로 21절에서는 거리끼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대신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롬14:1절에는 “받으라.”고 합니다. 로마서15장1절에서는 “약점을 담당하라.”고합니다. 7절은 “서로 받으라.”고합니다. 받으라는 “받아들이다. 환영하다. 영접하다. 친절하게 대하다.”입니다. 소싸움 하듯이 들이받지 말고 서로 끌어 안으라고 합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 또 날의 문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구원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바울은 성도 간에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받아 주라고 합니다.

 

탁구에서 고수의 아량이 있습니다. 하수와 고수가 시합하면 고수가 하수에게 최대 5점을 잡아줍니다. 하수가 아무리 구석구석으로 쳐도 고수는 다 받아 줍니다. 또 힘과 기량을 100% 쓰지 않고 절제합니다. 탁구 고수도 이렇게 하는데 우리 성도는 더 큰 아량으로 서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4. 비판하지 말고 서로 받아 주어야할 이유

 

사도바울은 우리가 서로 받아 주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롬14장4절-9절까지입니다. 4절에서는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라고 합니다. 본문은 한마디로 형제에 대한 비판은 월권행위라 합니다. 어떤 분이 남의 집에 가 자녀를 나무라면 부모의 입장은 어떻게 됩니까? 부모를 무시하는 무례한 행위입니다. 남의 집 귀한 자식 또 남의 집 귀한 종은 그 누구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하면서 구해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했습니다. 그를 죽이고 살리는 권한까지도 주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삼자가 감히 비판하겠느냐는 논리입니다.

 

5. 형제를 비판하지 말아야할 이유

 

형제를 비판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로마서14: 11,12절입니다.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본문과 병행 구절은 고린도후서 5장10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섬기는 주님은 마냥 좋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참 좋으신 하나님만은 아닙니다. 공의의 하나님이고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장차 우리도 이 재판장 앞에 서야 할 처지입니다. 이 심판장 앞에서는 실오라기 하나 숨길 수 없습니다.

 

6. 그리스도의 심판대

 

어떤 분이 중국 공안에게 끌려갔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는 것까지 공안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자기도 몰랐던 수학 65점 맞은 것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 공안도 이런데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생각할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심판대는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를 결정하는 심판이 아닙니다. 상을 받기 위한 심판입니다. 받을 상도 천국에서 계급을 나누기 위한 상이 아닙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평생 선교사로 사신 분은 천국 청담동 126억 시가의 더 펜트하우스같은 곳에 살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시베리아와 같은 환경의 판자촌에서 개털 모자 쓰고 덜덜 떨면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 선만 있는 곳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을 천국에 투영하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한다는 행위가 하나님께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고양이 예를 들겠습니다. 들고양이가 가끔 새끼를 낳고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길고양이를 따라가 새끼들을 구해 집으로 데려와 돌봐 줍니다. 이 고양이가 구해준 집사에게 고맙다고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설거지해줄까요? 세탁기를 돌려줄까요? 아닙니다. 큰 쥐를 사냥하여 현관에다 자랑스럽게 갖다 놓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한다고 하는 행동이 이와 같이 정말 하나님께 직접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또 그만큼 순수할 수 있을까 자문해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랑하지 말고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눅17:10)

 

저는 우리가 미래에 재판장 앞에 갈 것을 생각하지 말고 지금 갈 것을 권면합니다. 지금 주님께 속으로 고백하고 바른대로 말해보십시오. “주님 저 형제가 정말 꼴 보기 싫은데 어찌합니까?” “고기도 안 먹고 채식만 하는데 정말 못 봐주겠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직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재판장님에게서 바로 답이 옵니다. “너는 10배나 더 꼴을 보기 싫은 사람이었다. 차마 눈 뜨고 봐주지 못할 죄인이었다.” “내가 그런 너를 받아줬다. 너도 당연히 받아 줘야 하지 않겠냐!” 이렇게 응답이 올 것입니다.

 

7. 의, 평강, 희락

 

비난과 권면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 판별법을 17,18절에 말씀합니다.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받느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칭찬받는 판별 기준은 의, 평강, 희락입니다. 우리가 남을 권면한 후에는 그 사람하고 의의 관계가 안 깨지고, 평화스럽고, 서로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행동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본질은 의, 평강, 희락입니다. 부수적인 문제로 의가 상하고, 평강이 깨지고, 기쁨을 상실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8. 교회에서 회의에 임하는 자세

 

그러면 우리가 의, 평강, 희락을 현실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교회회의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교회는 회의의 연속입니다. 형제운영회의, 자매회의, 교사회의, 직분자회의, 학생회회의, 청년회회의, 체육관설립회의 등 회의가 많습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의, 평강, 희락을 깨는 그야말로 회의(懷疑)가 많이 드는 회의(會議)가 되기 쉽습니다. 회의하면서 서로 감정이 상하여 상처 주고 상처받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러면 좋은 회의를 하려면 어떤 자세로 해야 할까요?

 

첫째는 교회회의는 가족 간의 회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회의의 상대는 형제자매입니다. 사업 상대와 회의 아닙니다. 협약을 위한 국가간의 협상 테이블도 아닙니다. 여당과 야당 회의도 아닙니다. 가족회의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사랑을 바탕에 깔고 가야 합니다.(고전16:14) 위에 계신 분은 회의 때 방울뱀이 되기 쉽습니다. “쓰읍~~ 어디서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쓰읍”라는 태도 갖기 쉽습니다. 어린 분들은 헐크가 되기 쉽습니다. “으악! 나 건드리지 마, 치받는 수가 있어!”라고 하는 분위기이면 안 됩니다. 사람은 논리와 이성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감성적인 동물입니다. 사람이 기분이 상하면 끝입니다. 감정이 상하고 나면 의, 평화, 기쁨이 이미 깨진 셈입니다.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사람을 논리로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두 번째는 재판장의 입장에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법원에서 판사가 검사, 변호사, 증인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판결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대의 의견은 들어볼 필요도 없이 이미 결론을 내는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서로 의만 상하고, 평화는 깨지고, 얼굴을 굳게 만듭니다.

 

셋째는 대화를 해야지 논쟁을 하면 안 됩니다. 교회 회의는 TV 무한도전 예능이 아닙니다. 누가 한마디 하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능은 시청자에게 웃음을 주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대화는 의견을 나누고 그 과정에서 상대의 관점을 서로 이해하는 것을 대화라 합니다. 논쟁은 상대를 이기려고 애쓰고 말꼬리를 자르거나 물고 늘어집니다. 자기의 지식을 뽐내며 본인의 옳음을 끝까지 입증하려고 하는 것이 논쟁입니다. 논쟁이 아닌 대화를 하고 나면 “상대방의 입장 저랬었구나!”하고 상대를 알고 이해합니다. 교회 회의는 이런 대화의 장이어야 합니다. 논쟁의 장이 아닙니다.(고전11:16)

 

9. 연약한 자와 강한 자에 대한 권면

 

다음에 바울은 연약한 자와 강한 자 모두 해당하는 권면을 합니다. 로마서12장14절, 16절, 19절, 20절, 22절, 23절입니다. 강한자에게 해당하는 권ㅇ션은 22절입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강한 자는 지식으로 교만하여 져서 연약한 자를 사사건건 가르치려 들기 쉽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절제하라고 합니다. 고전8:13절에는 바울은 고기를 먹을 자유가 있지만, 형제를 넘어지게 한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다음 연약한 자에 대한 권면입니다. 5절에서는 “마음에 확정하라.”라고 합니다. 14절에서는 “속되게 여기면 속되다.”라고 합니다. 20절에는 “거리낌으로 먹으면 악하다.”라고 합니다. 22절에서는 “자기를 책하지 말라.”고 합니다. 23절에서는 “의심하고 먹는 자. 믿음으로 쫓아 하지 않는 게 다 죄다,”라고 합니다. 이 다섯 구절을 풀어주는 열쇠는 바로 14절 전반 절입니다. “주안에서 알고 확신한다.”라는 표현입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이고 일등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안에서 알고 확신한 진리로 율법을 극복하고 양심에 꺼림 없이 행했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서 알고 확신한 것은 양심에 가책받지 않고 그대로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이 양심은 선한 양심입니다. 선한 양심이 가책받으며 하는 행동은 죄입니다. 비본질의 문제로 사람의 눈치 보지 말고 신앙 양심을 따라 소신 있게 행동하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서로 받아 주는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관계에서 의, 평강, 희락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칭찬받는 성도가 모두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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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권면(롬15:1-13)

신앙 양심을 따르라

사도바울은 로마서12장부터 신앙의 실천문제를 다룹니다. 오늘 본문이 마지막 권면입니다. 지난 시간까지는 아디아포라에 대하여 다루었습니다. 헬라어 아디아포라의 뜻은“아무래도 좋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우리 시조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시조가 있듯이 성경에 직접적인 명령이 없는 문제 즉 비본질적인 문제를 아디아포라라고 합니다. 아디아포라의 예로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고, 안 먹고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결론은 먹고 안먹고는 신앙의 양심을 따라 행하면 됩니다. 먹는 다고 정죄하지 말고 못 먹는다고 비난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먹을 자유를 가진 자가 약한자를 위해 절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소한 일로 교회 분열 예화

미국의 한 교회에서 예배당 건물을 잘 짓고 나서 성도들 간에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분열의 이유가 심각한 교리 문제가 아닙니다. 카펫의 색깔을 빨간색으로 까느냐 아니면 노란색으로 까느냐의 문제였답니다. 카펫을 무지개 색으로 깔든, 하얀색으로 깔든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이와 비슷한 비본질 적인 문제로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는 꼴보기 싫은 사람이 너무 많아 못가겠다.” “교회에는 쓸만한 총각이 거의 없어 못가겠다.” 이러면 곤란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바로 아디아포라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비본질을 절대화하고 독선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부인이 실수로 접시를 깨면 이혼사유로 삼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의 신앙 자세

15장 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담당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7절도 비슷한 권면입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7절에서는 서로 받아주라고 권면합니다. 받으라고하여 들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수용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는 약자가 강자를 섬깁니다. 특히 동물의 세계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습니다. 사자와 얼룩말이 친구 먹는 거 보셨습니까? 이를 약육강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사회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제가 사는 집이 이안아파트입니다. 주차난이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공룡주차장이 생겨서 아주 편리해졌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차장 바로 붙어서 GS마트가 최근 새로 생겼습니다. 저는 속으로 뭐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100미터에서 200반경 안에 큰 GS마트 2개가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CU도 1개 있습니다. 24시간 무인편의점 신 구멍가게도 있습니다. 바로 그 사이를 비집고 GS마트가 또 들어 온 겁니다. 저는 속으로 “상도덕이 없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 같이 죽자는 건가? ”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어느새 그 GS에 라면을 사러 갔습니다. 저희 아파트에서 가장 가까웠고 30초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먹고 사는 세계가 그야말로 약육강식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담당하라

확대하면 국제관계도 마찬가지로 약육강식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뭐라고 권면합니까? 강자가 약자를 담당하라고 합니다. 믿음의 세계, 예수님의 세계는 세상과 정확히 반대의 가치관입니다. 사랑의 세계, 은혜의 세계, 영적인 세계의 가치관은 세상과 다릅니다. 강자가 약자를 감당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강자가 약자를 담당하고 받아줘야 공동체가 살고, 영적인 생명력이 살아납니다.

여기계신 성도님들은 본인이 약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강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강한 자에게도 약점이 있고, 약한 자에게도 강점이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에니어그램이라고 사람의 성격을 9가지로 분류합니다. 성격유형검사(KEPTI)가 이렇게 분류합니다. 첫째가 개혁자형입니다. 이 형은 도덕적으로 완벽주의자고, 아주 성실하고 정직합니다. 반면 단점은 편협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합니다. 둘째는 협조자형입니다. 이 사람은 감정이 풍부합니다. 반면 의지가 약합니다. 셋째는 동기부여자형입니다. 이 형은 자신감이 있고 야심가고 최고가 되려합니다. 약점은 고집이 셉니다. 넷째는 예술가형입니다. 이 사람은 직관적이고 동정심이 많고 개성이 강합니다. 반면에 우울하고 광기가 있습니다. 다섯째는 사상가형이 있습니다. 이 유형은 탁월한 지각을 가졌고 전문가가 될 수 있는 형입니다. 약점은 편집병적일 때가 있습니다. 여섯째는 충성가형이 있습니다. 이런 형은 감정에 호소하고 사랑받는 사람이고 장난기도 있고 유머도 있는 아주 좋은 형입니다. 약점은 너무 의존적입니다. 일곱째는 만능선수형입니다. 이 형은 순발력이 강합니다. 신바람 나게 삽니다. 단점은 즉흥적이고 지구력이 약합니다. 여덟째는 도전자형입니다. 이 형은 자신이 일단 옳다고 생각하면 누구도 말리지 못합니다. 이런 형의 약점은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한답니다. 마지막으로 아홉 번째가 중재자형입니다. 이런 형은 수용능력이 있고, 신뢰할 수 있고 느긋하고 낙천적입니다. 약점은 수동적입니다. 그래서 큰일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형에 속합니까? 혹시 예술가형하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의 똘 끼를 받아주어야 예술가형하고 살수가 있습니다. 제가 왜 9가지 유형의 강점과 약점을 소개하는가하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에 서로 담당하고 서로 받으라는 것은 남의 강점은 밀어주고 약점을 담당해 주어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이웃을 기쁘게 해야한다.

바울의 두 번째 권면은 2절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1절 하반절과 이어져서 성도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고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고, 남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기조를 가지고 창세기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아담부부가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짓기 전에는 기쁘게 해야 하는 순서가 어떻게 됩니까? 첫째 하나님을 가장 먼저 기쁘시게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하와를 기쁘게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입니다. 여기에 참 기쁨과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난 후 이순서가 뒤엉키고 거꾸로 되었습니다. 아담부부는 하나님으로부터 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와에게 죄의 원인을 전가 했습니다. 핑계를 대었습니다. 죄는 기쁘게 하는 순서를 다 무너트렸습니다. 세상이 불행하게 된 원인은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먼저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만을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고, 이 사회도 마찬가지고, 국가도 만찬가지입니다. 건전한 가정, 건전한 사회, 건전한 국가가 되려면 나보다는 남을, 자신보다는 이웃을 기쁘게하여야 합니다. 선진국의 지표를 사회적 약자를 얼마나 잘 보호하는 장치가 많은가로 선진국을 판가름 합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제도가 많이 강화가 되었습니다.

부서진 공동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좀 더 이 논조를 확장해 봅니다. 누가복음은 무너진 공동체, 부서진 공동체를 많이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6장19절부터 보면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오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비유로 지옥의 고통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그 이면에 각박하고, 삭막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부자는 왕같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초호화 파티를 즐겼습니다. 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온몸이 종기가 나서 성하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가 부자의 대문 앞에서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라도 배울 채우려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동네 들개들이 날름 먼저 집어먹었습니다. 나사로의 상처까지도 핥아먹었습니다. 그러다 이 거지는 그냥 그 대문 앞에서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부서진 공동체: 재판장과 울부짖는 과부의 비유

누가복음 18장2절부터 보면 한 도시가 나옵니다. 이 삭막한 도시에 과부와 재판장이 살았습니다. 재판장은 사회 지도층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무시한다는 것은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그는 원한을 가진 과부를 한 마디로 사람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과부는 사회적 최약자였습니다. 당시는 여성이 12-13세에 결혼 했습니다. 과부는 남편이 없으면 경제능력이 없어집니다. 게다가 아이까지 낳으면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재판장은 이 과부의 안타까운 울부짖음을 외면했습니다. 밤낮 간절한 울부짖음을 외면하다가 나중에 귀찮고 짜증나서 들어준다는 비유입니다. 물론 본문도 기도에 대한 비유이지만 그 당시 사회의 삭막함을 충분히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부자는 불쌍한 거지 한사람 마당 한편에 들어오게 해 밥 한 그릇 차려주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를 재판장은 자기 발의 떼 만큼도 여기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두 비유는 강자가 약자를 무시하는 사회의 단면입니다. 이런 사회를 우리는 공동체가 무너졌다고 진단합니다. 이런 삭막한 도시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된 질서를 바로 잡으십니다. 부자가 나사로를 기쁘게 하는 사회. 재판장이 과부를 기쁘게 해주는 사회가 건전한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 적용

교회도 하나의 작은 공동체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공동체인가? 하나님과 이웃을 더 기쁘게 하려는 공동체인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고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려고할 때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저도 하나님께서 이 강단에 세우신 목적이 자기를 기쁘게 하라는 게 아닙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할 때 부담이 되는데, 하나님과 이웃을 기쁘게 하려고 할 때 본문 말씀의 의도만 순수하게 드러내려는 마음이 생겼고 부담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서로 영적인 유익을 나누라: 빌드업 정신

본문 2절 하반 절을 계속 보십시오.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하고 권면을 마무리합니다. 본문의 뜻은 “서로 영적인 유익을 주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선은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하는 행동”을 선이라고 정의합니다. 덕을 세운다는 뜻은 타인의 믿음의 성장을 촉진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서로 서로 영육 간에 유익을 주어 교회를 잘 세우라는 권면입니다. 본문에 세운다는 뜻은 영어로 “빌드업”이라고 씁니다. 빌드업은 요즈음 많이 쓰는 단어입니다. 특히 축구에서 많이 씁니다. 빌드업 단어의 뜻은 차근차근 쌓아올린다는 뜻입니다. 축구 공격수는 자기 혼자 상대 골대까지 몰고 가서 골인을 넣지 못합니다. 수비수부터 시작하여 미드필더로 연결해 주고 미드필더에서 최전방 공격수까지 차근차근 패스를 주고받으며 공격하는 전술이 빌드업전술입니다. 축구는 11한 명이 원 팀이 되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 최근 아시안게임 4강전이 있기 전에 모 두 선수가 멱살을 잡았다느니, 주먹을 날렸다느니 하는 좋지 못한 소문이 났었습니다. 이러면 빌드업이 안 됩니다. 요즈음 노래에서도 빌드업이란 표현을 씁니다. 서로서로 도와서 최상의 하모니를 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교회도 빌드업 정신이 필요합니다. 교회 빌드업 철학에는 스타플레이어가 있으면 안됩니다. 어떤 교회는 한 사람의 스타 목사가 신앙을 좌지우지 하다 문제가 생깁니다. 강한 자는 어떤 이미지가 있습니까? 이해심이 큽니다. 넉넉합니다. 그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받아 줍니다. 이런 환경도 저런 환경 다 넉넉하게 이해하고 이겨냅니다. 반면 약한 자는 어떤 이미지가 있습니까? 남을 이해 못하고, 작은 일에도 걸려 넘어지고, 오해 잘합니다. 속된말로 밴댕이 속 같다고 말합니다. 약해서 민감합니다. 약하기 때문에 만사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대할 때 어떠합니까? 똥오줌 다 받아주고 응석 다 받아줍니다. 그래서 우리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빌드업 하고, 약한자도 강한 자를 빌드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또 강해져야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어린 디모데에게 딤후2:1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우리 모두는 강할 수가 있습니다. 약학자를 빌드업 해줄 수 가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담당함에 본이 된 예수님

3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강자가 약자의 연약함을 감당한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외모는 마른 땅에서 나오는 정말 마른 새순 같이 볼품없었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누구보다 강하셨습니다. 그 강함으로 죄로 연약해진 인류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조금도 기쁘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 만민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침 뱉고 조롱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올 테면 내려와 봐라하고 사람들이 비방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정말 내려와서 본때를 보여 줄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참고 견디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 때문에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었습니다. 본문 5-7절까지 이렇게 우리를 받아 주신 예수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서도 받아주고 감당하라고 계속 바울은 권면합니다. 담당하고 받아 주는 게 바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교회 공동체에게 주는 마지막 권면입니다.

인내, 위로, 소망

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그리고 본문4절은 13절과 연결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인내, 위로, 소망이란 단어에 주목해보십시오. 성경 기록은 우리가 현실의 고난을 인내하고, 위로를 얻고 끝에는 소망을 잃지 않게 해주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 역할을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하지 말고 성경 속에서 위로를 받아야겠습니다.

본문에 소망은 현실에서 잘 먹고 잘살려는 소망은 아닙니다. 세상을 도피한다거나, 몽상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영생과 하늘과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하늘에 대한 소망이 가장 컸던 사람들이 이 땅에서는 일을 가장 많은 일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당장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가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가장 복음의 일을 많이 했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힘을 잃는 이유는 하늘을 지향하지 않고 세상을 지향했기 때문입니다. 땅을 지향하면 우리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늘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 올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을 묵상해보면 참 이 땅에 발 딛고 살면서 하늘에 마음을 두고, 천국을 늘 소망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늘 하늘을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져야할 가치관 중에 하나는, 우리 안에는 이 세상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빈방이 있다는 겁니다. 돈을 많이 벌면, 권력을 많이 가지면, 꿈에도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서 결혼하면 이 빈방이 채워질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기쁨은 모두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감정의 유통기한 900일입니다. 새 차를 뽑고 나서 뿌듯함의 유통기한은 6개월입니다. 새집 샀을 때 유통기한은 1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잠시 맛보는 기쁨들은 다 맛보기 입니다. 신기루이고, 메아리입니다. 본향에 진짜가 있습니다. 이 진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 기쁨을 신기루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연연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 하늘의 소망 때문에 고난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저도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으면 젖은 낙엽 전법이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명예롭게 퇴진해서 쉬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쉼도 결국 유통기한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다.

세상만민에 메시야

본문 8절부터12절까지는 구약말씀을 계속 인용합니다. 9절하반절은 시편18:49절을, 10절은 신명기32장43절을, 11절은 시편117:1절을, 12절은 이사야 11장10절을 인용합니다. 약을 인용하는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지금 로마교회의 최대의 갈등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갈등입니다. 이에 바울은 예수님, 곧 메시야가 오신 것은 유대인의 메시야임과 동시에 이방인의 메시야도 된다는 것을 구약을 인용을 통하여 설득합니다.

할례의 추종자

9절에서 예수님이 할레의 추종자가 되셨다고 합니다. 할례는 최초에 아브라함에게 명령했습니다. 할례는 유대인의 전유물입니다. 할례를 예수님이 순종한 것은 유대인의 메시야임을 선언한 행동입니다. 9절부터 12절까지 인용한 인용문 중 계속 반복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열방”입니다. 열방이 5번 반복합니다. 열방은 10개국이란 뜻이 아니고 “many nation” 많은 나라를 말합니다. 세상 만민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메시아를 약속 할 때부터 세상 만민의 구주로 오실 것임이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유대인 신자, 이방인 신자 싸우지 말고 본문 6절에서처럼 한마음 한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바울이 본문에서 소개하고 싶은 하나님은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 위로, 소망이 없다면 우리 죄인들은 한시도 살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성령님께서 늘 곁에 서서 힘과 위로를 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이 인내와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 안에서 힘을 얻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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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선교 열정(롬15:14-33)

도입

어느 유명한 교회에 사역자 초빙 공고를 냈습니다. 여러 명이 지원했겠죠. 지원서류에 자기소개서 심사를 했습니다. 황당한 소개서가 있었습니다. 소개서 내용은“저의 외모는 키가 작습니다. 저는 머리카락이 거의 없고요. 코는 메부리코 입니다. 저는 건강도 매우 않좋습니다. 안질도 있고 편두통을 달고 삽니다. 게다가 저는 말도 더듬습니다. 아나운서같이 매끈한 설교는 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듣던 교인들은 수군수군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저런 사람이 지원서를 어떻게 냈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장일치로 떨어뜨렸습니다. 이 지원자가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핸디캡이 많았음에도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분입니다.

오늘 말씀부터 사도바울의 앞으로의 계획과 문안인사가 16장까지 이어집니다. 바울은 예수님 보다 10년 정도 어립니다. 예수님 BC4년 탄생하셨고 바울은 AD5년입니다. 예수님 살아생전에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원수였습니다. 예수믿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감옥에 처넣는 일을했습니다. 이런 원수를 예수님은 변화시켰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고 쓰셨습니다.

 

 

본문요약

오늘 본문이 깁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려놓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요집회 참석하시는 성도님들은 신앙 9단들이십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90%는 알고 있으시리라 판단합니다. 바울의 현재 위치는 고린도입니다. 그는 로마를 거쳐서 땅 끝까지 가고자했습니다. 땅 끝은 서바나로, 현재는 스페인입니다. 바울은 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기근이 들어서 이방교회에서 이들을 돕고자 모금을 했는데 그 모금한 것을 예루살렘교회에 전해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방문은 굉장히 위험했습니다. 바울을 미워했던 유대인들 40인이 바울 암살단을 조직하여 금식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울을 죽이기로 ”맹세했다.“ 했습니다. 유대인의 맹세는 장난이 아닙니다. 배신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맹세입니다. 실제 로마 총독이 이들로부터 바울을 보호하려고 군사 470명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을 가고자 합니다.

영적인 눈,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롬15:14-15)

오늘 본문 롬15:14절 부터는 논조가 완전히 바뀝니다. 사도바울 자신을 가리키는 주어 “내가” 15번 나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14.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로마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닙니다. 생면부지의 성도들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내 형제들아하고 친근감 있게 부릅니다. 늘 옆에서 보아 왔던 가족을 부르듯 친근하게 부릅니다. 바울은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영적인 눈으로는 늘 봐왔습니다. 바울은 늘 한 사람 한 사람 로마 성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눈으로 본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를 칭찬합니다. “선하고, 영적 지식이 풍부해서 서로 잘 돕고 있다.“고합니다. 실제 로마교회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의 갈등 심각했습니다. 또 영지주의 이단 문제도 있었습니다.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럼 칭찬 보다는, “정신 좀 차리십시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편을 갈라 싸웁니까?”하고 따끔하게 조언을 해야 맞습니다. 반대로 칭찬합니다. 심지어 로마서1장8절에서 로마교회 성도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고 까지 합니다. 이것이 오병이어정신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들고 나온 안드레의 믿음을 크게 보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지 않았습니까? 바울도 성도들의 작은 믿음을 크게 보는 자세가 있었습니다.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기 보다는 장점을 부각 시키는 자세 필요합니다. 남을 살려주는 자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이 무엇입니까? 다시 생각나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뭔가 막 쇼킹하고 신비하고 새로운 것을 주려고 한 게 아닙니다. 기존의 내용을 다시 상기 시키려고 했습니다. 인간은 망각합니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이론이 있습니다. 공부하고 나면 10분 후부터 망각이 시작된답니다. 완벽하게 외운 것 같은데 1시간 후면 44%만 머리에 남는 답니다. 하루가 지나면 33%만 남습니다. 한 달이 지나면 21%만 남는다는 곡선입니다. 그래서 잊혀 지기 전에 복습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매일 성경을 보고 설교도 매주 2번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로마서를 대략 썼다고 합니다. 대략은 구체적이고 부분적인 것을 뺀 어떤 일의 줄거리. 대략의 진행 상황을 쓰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는 대략 썼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것은 만나서 전해 주고자 했습니다. 대략 썼는데도 로마서는 성경의 꽃이라고 극찬합니다. 제가 로마서 본문으로 오늘 28번째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대략 썼는데도 그렇습니다. 만약 대략 안 썼으면 아마 제가 평생 교제해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간증합니다. 그 은혜의 구체적인 내용은 16절에서 설명합니다. ”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한마디로 자신을 구약의 제사장 직분에 빗대어 증거 합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3D 직종입니다. 폼 잡고 우아하게 일하는 직종이 아닙니다. 3D는 'Difficult(어렵고)/Dirty(더럽고)/Dangerous(위험한)'약자입니다. 구약 제사장이 하는 일이 어렵고, 더럽고, 위험했습니다. 소, 양을 잡아야 했습니다. 각을 떠서 태워야 했습니다. 아주 Difficult합니다. 또 태우면 연기가 솟구칩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습니다. 그 피를 재단에 뿌렸습니다. 한마디로 Dirty합니다. 제사장 직분 수행하다 죄가 있으며 죽습니다. 일하다가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Dangerous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자신이 이런 영적인 제사장이라 소개합니다. 마찬가지로 선교도 우아 한 일이 아닙니다. 죄인들과 싸워야 합니다. 설교도 은혜만 전달 할 수 없습니다. 죄와 죽음과 심판과 지옥을 전해야 합니다. 또 십자가와 피에 대한 설교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 십자의 보배피를 통하여 씻겨 져야 하나님이 받으심 직한 제물이 됩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영적으로 제사장적인 일을 해왔고 또 그것이 은혜였다고 간증합니다. 자랑스러워합니다. 우리도 만인제사장입니다. 우리도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십니까?

 

제사장 직분(롬15:17-19)

제사장 직분이 3D 직종이지만 바울은 훌륭하게 감당했다고 계속 소개 합니다. 17-19입니다. “17.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바울은 자랑할 게 많은 사람입니다. 출신이 금수저 출신입니다. 학문도 좋았고, 집도 부자였습니다. 헬라어도 능통했고, 로마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1-3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복음을 전한 지역만 해도 중복 포함하여 29군데 지역입니다. 그 열매만 자랑해도 3박4일은 걸립니다. 바울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으로 증거합니다. 자기는 도구였을 뿐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역사임을 고백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있었기에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편만(遍滿)이라는 한자 뜻은 두루 두루 편(遍), 찰 만(滿)입니다. 편만은 빠짐없이 두루두루 모든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1차, 2차, 3차 전도 기간을 합치면 약 9년입니다. 바울은 신약성경 27권중 13권을 썼습니다. 바울이 선교사역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었을 까요? 저는 끊임없이 걷는 거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걸은 거리가 1만7천km라 합니다. 바울이 하루 20km 걸었다고 하면 선교기간 9년 중 2년 반을 도로 위에서 보냈습니다. 당시는 변변한 교통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어떻게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을까요? 바울의 선교열정이 식지 않게 해준 동기에 대하여 묵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바울은 부르심이 확실했습니다. 그는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강력힌 빛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평생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바울은 3층천에 가서 천국의 실상을 다 봤습니다. 세 번쩨는 그의 사역의 고비 때 마다 주님께서 옆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다섯째는 복음에 대한 절대성과 양들에 대한 사랑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에서 갈증으로 죽어 가는데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모든 이방인에게 복음은 이런 생명수였습니다. 복음이 없는 개인, 복음이 없는 가정, 복음이 없는 사회는 제대로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영화를 만들면 영혼의 고통을 줄 수있습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책을 쓰면 그것도 피해만 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절대주의 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디든 복음을 들고 달려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롬15:20-21)

20절을 보십시오. ”20.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바울의 선교 원칙이 있었습니다. 오로지 복음의 불모지, 아무도 발을 들여 놓지 않은 복음의 황무지만 찾아다녔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터가 없는 곳을 찾아 다닌 것이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욕심, 개인적인 철학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52장15절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 말씀은 본문 21절에 인용합니다. “21.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복음 역사에 씨뿌리는 사역에 올인 했습니다. 복음역사는 씨만 뿌려서 안 됩니다. 물을 주어서 자라게 하는 사역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바울은 자라게 하는 방법도 썼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제자들을 2년 동안 눈물로 가르친 역사도 있습니다. 그 제자들을 통해 아시아 전체에 복음이 전해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유연한 자세(롬15:22)

22절을 보십시오. “22.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바울의 복음역사는 계획 한대로 만사형통이 아니었습니다. 턱턱 막힐 때가 있었습니다. 로마행은 여러 번 막혔습니다.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환경을 통하여 막으셨습니다. 바울은 탱크처럼 밀어붙이는 정신이 있었습니다. “안되면 되게하라.” 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막으면 유연한 자세가 있었습니다. 밀어붙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에게도 진리에는 타협하지 않는 강직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연성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성령의 방향을 잘 살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울의 향후 계획(롬15:23-29)

23절부터 29절까지는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바울의 향후 계획입니다. 24절을 보면 로마 성도들의 지원을 받아 땅 끝까지 가고자 했습니다. 그 지원이 돈은 아니었습니다. 사귐을 통한 기쁨이었습니다. 성도 간에 교제를 통한 기쁨이면 내가 땅 끝까지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배울 점입니다. 우리도 성도 간에 만나면 기쁨을 주고받는 관계여야합니다. “만나면 피곤하기만 해!” 이러면 곤란합니다. 누가 같이 식사하자고 하면 불편하니까 핑계 대서 빠지는 관계면 곤란합니다. 우리 명주로교회가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서 힘을 얻고, 위로를 얻고, 각박한 현실을 이길 용기를 얻는 관계이기를 기도합니다.

본문에 이방교회에서 연보(捐補)를 걷었다했습니다. 연보의 한자 뜻은 내놓다, 기부하다의 연(捐)과 돕다는 의미의 보(補)입니다. 연보의 뜻은 ‘내어놓아 남을 돕는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왜 목숨 걸고 예루살렘에 연보를 전해 주려 했을까요? 본교와 이방교회를 화해시키는 절호의 기회로 보았습니다. 본문 28절에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다는 뜻은 이방에서 일어난 역사도 보고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증거하겠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한마디로 피스메이커의 역할을 하려고 했습니다. 거기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신자는 어디 가든 피스메이커가 되어야합니다. 트러블 메이커가 되면 안 됩니다. 바로 복음역사가 하나님과 죄인을 화해시키는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29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간다고 합니다. 현재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장소는 고린도입니다. 고린도에는 고령토가 풍부했습니다. 그 흙으로 만든 특상품의 항아리가 유명했습니다. 항아리를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이탈리아로 수출도 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내가 로마에 갈 때 고린도의 특산품을 들고 가겠다, 고급항아리를 가지고 가겠다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항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 영적인 복을 가지고 가겠다고 합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줄 것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주고 싶은 것이 넘쳐서 빨리 로마 성도를 보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의 기도부탁(롬15:30-31)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30-31절은 바울의 기도부탁입니다. 기도제목은 40인의 암살단에게서 건짐을 받는 것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 잘하는 것입니다. “암살단 정도는 믿음으로 의연하게 대처해야지. 기도 부탁을 하면 믿음이 없어 보이지 않나요?” 오랫동안 선교한 선교사님이 사인펜 뚜껑을 잃어버렸답니다. 그는 그 뚜껑 찾아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더랍니다. 우리가 기도 부탁을 하려면 기도의 능력, 기도의 힘 절대적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기도제목을 제시했습니다. 복음역사는 기도가 전부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손을 움직여야합니다. 복음역사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일입니다. 사탄의 손에서 빼내 오는 일입니다.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분은 딱 한 분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복음역사는 기도를 통하여 이 하나님의 손을 움직여야합니다. 말솜씨, 영적인 지식, 도전정신, 우수한 프로그램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기도 부탁하는 바울을 통하여 기도의 중요성 배웁니다.

끝인사(롬15:32-33)

32,33절은 끝인사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고 합니다. 평강이 중요합니다. 어떤 팀, 어떤 조직, 어떤 회사에서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무엇이 제일 많았을까요? “일이 적은 것? 월급? 좋은 복지 혜택?”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안정감이 제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평강이었습니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평강이 가장 중요합니다. 평강은 히브리어로는 "샬롬"입니다.

시편 91편11,12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수호천사들을 붙여 주시기까지 하면서 지켜주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 이 천사의 수종을 받아 천국으로 갑니다. 우리 모두가 이 하나님 안에서 내면 깊숙한 평강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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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동역자 소개(37명)(롬16:1-23)

주목받지 못하는 휴지통

나이 들어가는 증거 중 하나는 무얼 잘 흘리거나 쏟습니다. 정교한 작업을 하는 능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컵 가장 자리에 봉지에 든 커피를 걸치고 뜨거운 물을 부어 내렸습니다. 뜨거운 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하다가 뚜껑위에 떨어뜨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저희 집 휴지통은 발로 쓰레기통 아래 레버를 밟으면 뚜껑이 열리고 안에 휴지를 버리고 내리는 형태입니다. 발로 레버를 밟는 시간과 커피봉지를 떨어뜨리는 시간이 맞지 않아 뚜껑에 쏟았습니다. 휴지통 뚜껑과 몸통 전체에 묻은 흔적을 닦아 내는데 휴지통과 주변이 매우 지저분했습니다. 닦아내며 든 생각이 "휴지통 너 참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갖 냄새나는 것은 다 속에 담아 두는 중요한 일을 하면서 정작 인정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휴지통을 끌어안고 고생이 많다 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복음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정작 이름도 빛도 없었던 분들 이름이 나옵니다.

 

 

로마서를 쓰는 이유

로마교회는 바울이 개척하지 않았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 또는 초대교회 핍박 때 흩어진 성도들에 의해 자체 형성된 교회입니다. 북한이나 중국의 지하교회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바울은 본인이 개척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로마서를 써서 권면하는 것입니까? 왜 남의 교회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겁니까? 월권행위 아닌가요? 예를 들면 우리 교회 성도가 다른 교회에 서신을 써 보내면서 권면하면 기분 나쁜 일입니다. 바울은 거기에 대하여 15장에서 내가 이방인의 사도의 자격으로 로마서를 쓴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도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 증거는 내가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편만하게 전했다고 증거 합니다.(행15:19) 그것도 남들이 밟지 않은 미개척지, 황무지 지역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행15:20)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 근거를 사도 증명서, 학벌로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실제 몸으로, 삶으로 살아낸 모습이 증거라고 합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까지 다닌 총거리가 2만키로가 넘었습니다. 지역도 수십 개가 넘습니다. 바울이 정신이 나가지 않고 선 복음 전한다고 하여 빌딩이 몇 채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로마서를 쓰는 다른 목적은 바울의 마지막 비전에 있었습니다. 그는 땅 끝까지 가고자 했습니다. 거기에 중간 기착지가 로마였습니다. 땅 끝은 어디죠? 서반아로서 지금의 스페인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어제 결혼한 부부도 스페인으로 신혼여행 간답니다. 이들이 사도바울의 열정을 배우러 갈까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바울의 열정도 생각하면서 축구장도 구경하고 잘 다녀오시 길 바랍니다.

사람이 중요하다.

예화 하나 말씀드립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살바토르문디”라는 작품이랍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렸습니다. 가격이 우리 돈으로 5,062억 원 이랍니다. 이 그림은 인물화입니다. 사람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이 그림 주인은 사우디 왕세자 빈살만 입니다. 이 그림이 어디에 걸려 있는지 아십니까? 안방이 아닙니다. 개인 요트에 걸려있답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5천억 원이 창고에 걸린 셈이죠? 저는 세계 가장 비싼 그림 15개 작품을 검색했습니다. 10개가 모두 인물이 주제였습니다. 무엇을 말씀드리고 싶냐하면 사람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복음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열매는 사람입니다. 유럽에 교회 건물을 보면 세계 최고를 자랑합니다. 관광객도 1년에 600만씩 다녀간답니다. 그런데 정작 예배 때는 신도수가 거의 없고 노인들만 몇 명 있다고 합니다. 최근 들어서는 유럽의 성당이나 교회들이 클럽이나 호텔로 재단장하는 사례가 늘고 있답니다. 인걸은 간 데 없고 건물만 남아서 관광 수익만 올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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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명의 사람 이름(로마서16:1~23)

오늘 본문은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37명의 사람들을 거론합니다. 실명이 35명,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자매 간접적으로 2명을 언급합니다. 1절 뵈뵈, 2절 브리스가와 아굴라, 5절 에배네도, 6절에 마리아, 7절에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8절 암블리아, 9절 우르바노와 스다구, 10절에 아벨레와 아리스도불로, 11절에 헤로디온과 나깃수, 12절에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13절 루포와 그의 어머니, 14절에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 15절에 빌롤로고, 율리아, 네레오, 네레오의 자매, 올름바 29명입니다. 그리고 21절부터는 로마 성도가 아니고 바울과 같이 있는 로마지역 이외 성도를 소개합니다. 21절에 디모데, 누기오, 야손, 소시바더, 22절 더디오, 23절 가이오, 에라스도, 구아도, 총 8명이 나옵니다.

바울의 소개 방식

이름 앞에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나의 보호자, 나의 동역자, 나의 사랑하는 자, 나를 위해 목이라도 내어놓을 자들, 수고하고, 많이 수고하고, 택하고, 인정 받고,”입니다. 제가 어제 결혼한 한 자매를 다른 교회 소개할 때 “교회의 000 자매”입니다. 이러면 사무적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믿음이 좋고, 주일학교를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섬겼던 훌륭한 교사 자매입니다.” 라고 하면 타인이 볼 때 그 사람에 대한 가치가 달라 보입니다. 남을 잘 소개하다 끝에 가서는 은근 슬쩍 그 사람을 깎아 내리고 자기를 은근히 높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나가다 삼천포로 빠집니다. 본문에서는 바울의 남을 높이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은 몇 백억 자산가 누구, 전직 사장님 누구라고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보석과 같은 믿음을 알아봤고, 제대로 평가하여 소개합니다.

바울의 행복

바울의 주변 사람들을 보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변에 나를 위해 목을 내놓을 사람 한 명만 있어도 행복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이 진짜 부자입니다. 요즈음은 눈만 감으면 코 베 가려는 시대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용하는 시대입니다. 얼마 전 유명 골프선수와 아버지와의 관계도 뉴스에 나왔습니다. 요즈음은 AI를 이용한 딥 페이크 사기도 유행합니다. 이런 시대에 자기를 위해 목이라도 내어 줄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뵈뵈(로마서16:1,2)

37명이 누구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1절에 뵈뵈입니다. 1,2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뵈뵈는 우리 말 어감은 좋지 않습니다. 배배 꼬인 자매님 아닌가? 그러나 배배 꼬여서 뵈뵈가 아닙니다. 뵈뵈란 이름은 이방신 아폴로와 연관이 있답니다. 아폴로는 태양신입니다. 부모가 태양을 잘 숭배하라고 지어준 이름입니다. 뵈뵈는 태양을 섬기던 자매님이 복음을 영접하고 변화되었습니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 일군입니다. 겐그레아는 고린도에서 11키로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사도행전18장18절을 보면 바울이 서원한 바가 있어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뵈뵈는 바울의 보호자 역할을 했습니다. 보호자는 먹이고 입히고, 성인으로 성장하기까지 물질적인 것을 다 공급하는 사람입니다. 뵈뵈가 바울에게는 이런 역할을 했습니다. 주석에는 뵈뵈가 상당한 재력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본문에는 이 뵈뵈를 로마교회에 천거하는 형식으로 소개합니다. 뵈뵈 자매님은 로마서 신서를 직접 들고 로마교회에 전해주었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읽어주고, 설명도 해주었다고 봅니다. 사도 바울을 대신하는 역할을 맡겼습니다. 겐그레아에서 로마까지 육로로 2100km, 배로는 1000km, 최소3개월은 걸리는 여행입니다.

본문에서 추천한다는 단어 뜻은 “함께 세운다. 함께둔다.”입니다. 당시에는 복사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뵈뵈는 교회를 순회하며 서신을 읽어 주고 필사도 하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교회에 뵈뵈가 가면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고 합니다. 당시 여인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로마 당시 분위는 남성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감사하는 게 있었답니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했답니다. 그 정도로 여성을 무시하는 시대였습니다. 로마교회에서도 “아니 뭐 대단한 분이 온다더니 여인이왔어?”하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 “소용되는 데로 도와주라.”는 의미는 마치 종이 주인 곁에 서서 시종을 듯이 도와주라는 의미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로마서16:3,4)

두 번째 소개하는 분들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입니다. 3,4절을 읽어볼까요?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사도행전 18장에 자세하게 나오는 부부입니다. 브리스가는 귀족에게 붙이는 이름이랍니다. 아굴라는 유대에서 로마에 노예로 잡혀 온 가문이었습니다. 귀족가문과 노예가문의 두 사람이 결혼에 골인하기까지 무엇인가 대단한 스토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1세기에 로맨스가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손에 물 한번 안 묻혔던 브리스가가 텐트 만드는 일을 했을 아굴라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잘 생겨서 였을 까요? 아마도 믿음이 특출 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들 부부는 고린도 교회 개척 때 텐트 만드는 업이 같아서 바울과 만났죠? 그리고 이들은 원래 로마에 살다가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 로마 추방령을 내려서 고린도에 와 있었고 바울을 만났습니다. 이 때부터 이들은 바울의 선교 여행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가정을 개방하고 헌신적으로 섬겼습니다. 목을 내놓다는 표현은 바울과 죽음의 고비도 함께 넘겼다는 뜻입니다. 브리스가는 애칭입니다. 우리 애칭은 아주 가까운 사이에 씁니다. 부부사이에 ”자기야!“하고 부릅니다. 아이들 부를 ”똥깡아지, 뚱뿐이“하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부부는 애칭을 부를 정도로 가깝고 신뢰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쓸 당시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로마에 있었습니다.

에배네도(로마서16:5)

그 다음은 5절에 에배네도 입니다. 에배네도도 현재는 로마에 있습니다.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애배네도 이름 뜻은 “칭찬받을 만한”입니다.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서 맺어 주신 첫 열매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이 아시아를 개척할 때 3개월을 회당에서 대중 설교를 했는데 실패합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두란노 서원을 빌려서 12명 정도 제자를 따로 세우고 가르치는 사역을 했습니다. 밤낮으로, 눈물로 2년을 가르쳤습니다. 이들이 나가서 아시아 전체에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때 첫 열매가 애배네도 였습니다. 애배네도는 고생 고생하여 얻은 열매입니다. 마치 사막에서 핀 꽃과 같은 존재입니다. 어느 교회나 첫 열매가 있습니다. 바울이 열매를 소개하는 방식에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신 열매라고 합니다. 복음의 열매, 생명이 살아나는 일은 그리스도만이 맺어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 첫 열매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 열매는 대표성을 띠며 전체를 상징합니다. 첫 열매를 귀히 여긴다는 것은 모든 복음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로마서16:6)

6절에 마리아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마리아는 “가장 높다,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마리아 자매님은 수고했는데 얼마나 수고했으면 많이 수고했다고 합니다. “많이 수고했다.”의 시제가 과거완료입니다. 지금은 많이 수고하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마리아 할머니 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복음을 위해 많이 헌신했는데 지금은 마리아 모친님이 되셨습니다. 이분들도 귀하게 여기고 합당하게 대우하라고 합니다.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로마서16:7)

7절에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입니다.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안드로니고는 헬라식 이름으로 남성이고, 유니아는 로마식 이름으로 여성입니다. 이들은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바울보다 먼저 믿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친척이라고 하는데 친척은 정말 삼촌, 사촌 같은 혈통이란 뜻이 아닙니다. 동료, 동족이란 의미입니다. 같은 유대인 들은 다 친족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졌다고 합니다. 존중의 뜻은 “탁월하다.”로 번역합니다. 아주 특출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실 바울보다 더 특출한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바울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세가 있었습니다.

암블리아, 우르바노, 스다구(로마서16:8)

8절에 암블리아, 9절에 우르바노와 스다구입니다.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암블리아는 노예들 이름입니다. 우르바노는 “도시에.”란 뜻의 노예 이름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마당 쇠, 돌 쇠” 이런 이름입니다. 스다구도 “이삭, 곡식의 알멩이.” 란 뜻입니다. 그 다음 10절에 나오는 아벨레도도 노예에게 붙인 이름입니다. 바울은 노예들에게도 “내 사랑하는, 우리의 동역자”란 수식어를 붙여서 부르고 있습니다.

아벨레, 아리스도불로, 헤로디온, 나깃수(로마서16:10)

10절에 아벨레와 아리스도불로, 11절에 헤로디온과 나깃수가 나옵니다. 10,11절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아벨레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인정받다는 테스트 겪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달아 보셨는데 거기서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리스도불로는 헷롯 왕의 손자입니다. 왕족입니다. 나깃수도 로마의 귀족 가문입니다.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12절에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입니다.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두르배나, 드루보사 자매님들은 귀족의 딸들입니다. 이들이 “주 안에서 수고했다.”의 헬라어는 “코피아오”로 “죽을 힘을 다해 수고했다. 진액을 짜서 섬겼다.”는 뜻입니다. 본문에 수고하고는 현재분사입니다. 이들은 현재도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 다음은 “많이 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버시에게 붙은 “수고하고.”는 부정과거분사입니다. 지금은 수고하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현재 수고하는 자매님과 이미 수고한 자매님을 소개합니다. 이는 믿음의 계승이 시니어에서 주니어로 잘 이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루포와 그의 어머니(로마서16:13)

13절을 보겠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루포와 그의 어머니가 나옵니다. 루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가시다 힘들어서 쓰러 지셨는데 이 때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입니다. 로마병사에게는 식민지인에게 아무나 붙잡고 짐을 지우고 오리를 가자고 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마가복음15장21절에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으로 나옵니다. 구레네는 아프리가 북쪽에 있고, 예루살렘까지 2000km 떨어진 지역입니다. 몇 달 동안 걸어서 예루살렘에 순례객으로 걸어온 시몬입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운 나쁘게 또 억지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 일로 시몬은 구원받았습니다. 바로 이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이 루포입니다. 시몬의 부인이 루포의 어머니입니다. 루포의 어머니가 얼마나 복음 역사를 잘 섬겼는지 바울은 그의 어머니가 자기 어머니라고 고백합니다. 재수없게 얻어 걸려서 억지로 진 십자가가 구원을 가져다주었고, 그 신앙이 부인과 자식에게 다 영향을 줬습니다. 루포의 어머니는 바울이 초기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 어머니처럼 섬겨줬던 분입니다. 현재는 루포와 그의 어머니가 로마교회에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하다 보면 의무감, 책임감, 억지로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은 귀하게 쓰신다는 사실을 본문을 통하여 배웁니다.

바울 주변의 동역자(로마서16:21~23)

21-23절에는 로마교회 사람이 아닌 바울 주변에 있는 동역자들을 소개합니다. 본문22절입니다.“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더디오는 바울의 로마서를 대필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안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디오 같은 대필자가 필요했습니다. 더디오가 바울 옆에서 기계적으로 받아 적기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바울님 이 부분은 이게 아닌데요,” 하고 태클을 걸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더디오는 바울 옆에서 맞장구도 치고, 같이 감격도 했을 것입니다. 바울과 늘 옆에서 동행하면서 위로를 주었을 것입니다. 더디오도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바울의 복음 역사를 이름도 빛도 없이 섬긴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5개 로마교회(로마서16:1~16)

본문 1-16절 그리고 21-23절까지의 이름 들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무엇인지 알아봅니다. 첫째 로마에 있는 교회의 숫자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로마교회는 최소한 5개는 있었다고 봅니다. 로마교회는 건물 교회가 아닙니다. 집 교회, 가정 교회였습니다. 아무리 집 크다 하여도 40명이상 모일 수 없었으리라 짐작합니다. 5개 교회 중 첫째는 본문 5절에 브리스가와 아굴라 저의 집에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10절에 “아리스도볼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에서 권속은 자기 집안에 딸린 식구를 말합니다. 여기도 하나의 교회를 형성했습니다. 세 번째는 11절에 나깃수의 가족 중 주안에 있는 자들이 나옵니다. 여기도 집단을 말합니다. 네 번째 14절에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이 나옵니다. 여기도 교회였습니다. 다섯째는 15절에 울름바와 함께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당시는 건물에서 공식적으로 모이기는 불가능했습니다. 로마황제의 핍박이 심하여 공적으로 만나기도 어려웠습니다. 목숨 걸고 만나야 했습니다. 한번 모이면 “오늘도 살아서 이렇게 보네요.”라고 하며 뜨겁게 인사했습니다. 당시는 어머니, 보호자, 형제, 자매와 같이 가족보다 더 끈끈한 관계여야 로마교회가 유지되었습니다.

계층이 다양한 로마교회

두 번째 특징은 계층의 다양성입니다. 특히 자매님 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뵈뵈부터 자매이름을 가장 먼저 거론했습니다. 브리스가, 마리아, 유니아, 두르배나, 두루보사, 버시, 루포의 어머니 다 자매님들입니다. 그리고 노예이름도 나옵니다. 아굴라, 안드로니고, 유니아, 암블리아, 우르바노, 허메, 울름바, 나깃수가 노예였답니다. 또 왕손도 있습니다. 11절에 아리스도불로 헤롯대왕의 손자인데 로마 교회에 더해진 사람입니다. 로마교회는 아니지만 고린도 교회에 재무관 에라스도와 구아도도 있었습니다. 재무관은 공무원으로 재정과 회개 일을 했습니다. 야손도 데살로니가 읍장 출신입니다. 이를 볼 때 로마교회 뿐 아니라 당시 교회는 남녀차별, 빈부귀천, 지위고하의 차별이 없었습니다. 현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 안에서 동등한 존재입니다.

배만 위하는 이단을 조심하라.(로마서16:17~20)

로마서16장을 바울이 로마서를 끝내며 하는 마지막 권면입니다. 그 중 하나가 이단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17-20절입니다. 본문은 한 마디로 자나 깨나 불조심하듯 자나 깨나 이단 조심하라는 권면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고린도서에 바울이 복음역사에 방해가 된 것을 나열합니다. 자연재해도 있지만, 동족의 위험, 강도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이 컸다고 고백합니다. 본문의 37명은 함께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본문17-20절까지는 함께 가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함께 갈 필요가 없으니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가지 말아야 할 사람의 특징은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고 자기 배만 섬기고 교활한 말로 아첨하고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배만 섬긴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양의 비유에서 삯군목자입니다. 삯군은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몰래 넘어갑니다. 그는 양을 잡아 다 양 꼬치 구이 하여 술안주 하려고 넘어갑니다. 또는 양을 팔아서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입니다. 복음역사를 이렇게 섬기는 자들이 자기 배 만을 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특징이 또 다 말로 유혹합니다. 이들에 대하여는 말을 섞지 말고 떠나 상종하지 말라 권면입니다. 왜냐하면 뒤에 악한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은 논리로 이겨낼 수 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족, 함께 걸어가는 길

저희 어머니가 80세입니다. 그런데 건강상 어려움이 있을 때 마다 저에게 “컴퓨터 한번 처 봐라!”고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컴퓨터가 만능일줄 알고 계십니다. 몇 년 전에 본인도 컴퓨터를 해 본다고 하여 중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켜고 끄는 것을 스위치를 눌러서 켜고 끄고 하여 일주일 만에 망가졌습니다. 다른 걸로 교체하고 끄는 법부터 알려드렸습니다. 한글타자 연습하고, 영상 보는 것 정도만 하시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마우스 화살표 움직이는 것도 어려워하셨습니다. 요즈음은 저희 어머니 말처럼 컴퓨터가 만능인 시대가 왔습니다. AI 곧 인공지능 때문입니다. 저도 설교 준비하면서 AI 검색으로 “로마서16장으로 설교문 하나만 작성해 줘!” 했습니다. 몇 초 안되어 설교문을 만들어줬습니다. 제목은 “하나님의 가족, 함께 걸어가는 길” 이라고 정해줬습니다. 소단위 제목을 넣어서 설교문을 만들어 줬습니다. AI가 이렇게 설교문도 만들어 주는 시대에 설교자의 역할은 어떠해야 할까 고민이 됩니다.

오늘은 AI가 정해준 제목으로 결론을 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2가지 반복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22번 반복하는 단어가 “문안하라” 입니다. 9번 반복하는 단어가 그리스도 안, 주 안입니다. 본문의 37명과 5개의 교회를 묶어주는 단어가 바로 “주안, 그리스도 안입니다. 주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결혼식이 있었는데 우리 모두의 딸을 결혼시킨 겁니다. 또 신랑은 우리 교회의 사위로 맞아들인 겁니다.

각 나라의 다양한 인사법

본문에 문안은 물을 문(問) 평안할 안(安)자입니다. 문안은 히브리말로 바꾸면 샬롬 입니다. 인사말에는 그 시대 역사가 반영됩니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하면 밥을 굶는 것을 밥 먹 듯이 했던 시절에는 한 끼 먹었느냐를 묻는 것이 인사였습니다. 악수는 전쟁이 많았던 시절 “난 빈손이다. 당신을 해칠 의사가 없었다.”는 뜻으로 악수를 했습니다. 특이한 인사법은 아프리카에서 얼굴에 침을 많이 뱉을수록 반가움도 배가 되는 인사가 있습니다.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인사가 나왔다 합니다. 티벳에는 모자 벗고 혀를 최대한 길게 내미는 것이 인사랍니다. 이 나라의 악한 왕은 혀가 없었답니다. 나는 그의 신하가 아니란 뜻으로 이런 인사법이 생겼습니다.

문안하라(로마서16:16)

사도 바울은16절에서 교회도 서로 문안하도록 권면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합니다. 우리가 진짜 입을 맞추면 곤란합니다. 그 정도로 반갑게 인사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형제, 자매, 보호자, 나의 동역자, 나의 어머니, 내 친척, 내 사랑하는 자들, 다 같은 권속입니다. 우리 교회가 서로 문안하며 가족 같은 사랑을 나누면서 함께 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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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결론 ㅡ복음의 정의, 과정, 결과 (로마서16:25-27)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복음을 소개했고(로마서 1장 2~4절) 끝내면서 다시 복음을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은 짧지만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합니다. 두 번째는 이 복음이 어디에서 왔는가? 복음의 출처와 복음이 전달되는 과정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복음이 온 결과, 복음이 전파된 후 효과에 대해 말씀합니다.

 

 

1.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25상 반절에 보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원어에 보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카이”라는 헬라어 접속사가 있답니다. 카이(kai)는 “그리고, 또한, 마찬가지로”란 뜻이랍니다. 본문을 카이를 넣어서 읽으면 나의 복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나의 복음이라는 독특한 표현에 대해 알아봅니다. 나의 복음이란 표현의 의미를 가장 잘 전해주는 부분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서 데려왔을 때 고백입니다. 아담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고 합니다. 뜻은 내 분신과 같아집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분신 관계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도 같이 아픕니다. 나의 복음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분신과 같고 복음이 없이는 바울도 없습니다.

나의 복음이란 표현에는 바울의 개인적인 경험도 녹아 들어간 표현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박해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자와 아이는 보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외국 지역인 다메섹까지 가서 여인들까지 색출해서 넘겼습니다. 스테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이런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옆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 음성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바울 개인만 들었습니다. 이렇게 찾아온 예수님은 원수인 사도바울을 용서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십니다. 나의 복음은 이렇게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찾아 주신 경험이 녹아든 표현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다 개인적으로 상황이 다르게 예수님을 만난 나의 복음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2. 감추었다가 나타난 복음, 계시 된 복음

25절 하반 절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 했습니다. 26절 상반 절은 그러다“이제 나타내신바” 되었습니다. 26절 하반 절은 “알게 하신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의 출처는 하나님입니다. 전파 방식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되었습니다. 복음은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찾아왔습니다. 본문에는 3번이나 강조합니다. “나타내셨다. 알게 하셨다. 계시를 따라 되었다.”라고 합니다. 계시는 외부에서 와야 합니다.

실화 하나만 소개합니다. 1964년에 도쿄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주 경기장이 좁았던 것 같습니다. 확장 공사를 했습니다. 어느 날 작업자들이 스타디움 주변의 집 지붕을 벗기려다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도마뱀의 꼬리 위쪽에 못이 박혀서 꼼작 못하고 계속 몸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인부들은 3년 전 집을 지을 때 못이 꼬리 위쪽에 박혔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이들은 3년을 도마뱀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공사를 전면 중단하고 지켜봤습니다. 얼마 후 놀랍게도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어 주는 겁니다. 한번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행동이 이어졌습니다. 먹이를 물어다 주는 도마뱀이 친구인지, 엄마인지, 자매인지는 모릅니다. 이들이 계속 먹을 걸 물어 주어 3년을 살았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인부들은 이어 그 도마뱀을 고통에서 해방해 줬답니다. 도마뱀이 3년을 산 원인이 외부에서 먹을 걸 물어다 줬기 때문이란 사실을 우리에게 적용해봅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믿음도 내가 믿어서 된 그것이 아닙니다. 도마뱀처럼 하나님이 주셔서 믿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도 하나님이 명하셨고, 나타내셨고, 전파되었고, 계시하셨고,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칫하면 노력하자, 운동하자, 열매 맺자 같이 행위 중심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율법 중심의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바탕으로 내용을 더 확대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8복을 말씀하셨습니다. 8 복도 우리가 엄청난 노력을 해야 받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헬라어의 원어에 가깝게 직역을 하면 뭔가 우리가 복을 받으려고 끊임없이 투쟁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앞 절에 있는 상태에 놓인 자는 뒤에 상태에 자연스럽게 놓이기 때문에 복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심령을 가난하게 하자. 온유해지자. 긍휼히 여기자. 그러면 뒤엣것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자연히 천국이 그들의 것인 상태가 되니까 복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애통해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뒤에 위로가 따라오기 때문에 복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부분도 기뻐하려고 억지로 노력하고. 감사하려고 억지로 노력하면 기쁜 일과 감사할 일이 생긴다고 해석하면 완전히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가난한 해석이랍니다. 본문도 어떤 상태를 규정하고 있다고 보면 좋습니다. 너희는 이미 구원 받은 자로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해야 할 상태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절에는 9가지 성령의 열매를 열거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이 열매도 내가 힘껏 노력하여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님 내주하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로 보아야 합니다.

3. 복음의 결과는 믿어 순종케 하고 견고하게 한다.

26절을 보면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결과는 ㄴ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견고하게 하십니다. 복음이 견고하게 된다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교제하겠습니다.

복음을 가진 사도바울은 얼마나 견고한 신앙인지를 확인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고 예루살렘 방문계획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40명이 바울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영단일까요?” 아닙니다. 암살단입니다. 이들의 의지가 얼마나 의지가 단호했는지 바울을 잡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이런 상황을 예견한 바울 주변의 성도들이 모두 만류합니다. 심지어 가이사랴에서 아가보라는 선지자는(행21:10-12) 바울을 만나자 허리띠를 풀고 그걸로 자기 손발을 묶고 예루살렘에 가면 이렇게 묶여서 죽는다고 적극적으로 말렸습니다.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말렸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무엇이라 합니까? 사도행전21:13절“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서 나는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도 내놓습니다. 그 정도로 견고함이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과연 바울의 자기 의지의 결단으로 되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바울 안에 어쩔 수 없이 밀어붙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출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믿음을 가진 자, 복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점에 대하여 몇 가지 사례를 알아봅니다. 사형 집행장에 가 보면 복음이 사람을 얼마나 견고하게 하는지 볼 수 있답니다. 복음 영접한 사형수는 “내가 진작 복음을 알았더라면 이렇게는 살지 않았을 텐데.” 후회하면서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기도하며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지 않은 사람, 평생 자기 주먹 하나 믿고 산 사람은 “이놈들 너희가 나 죽이고 편히 살 줄 아느냐?” 소리치고 원망하고 발악하면서 간 다 합니다. 복음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견고하게 합니다.

독일의 암 병동에서 혀 암에 걸려 수술을 앞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사, 간호사, 여러 보조 의사들이 수술대 주변에 빙 둘러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세 번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 땅에서 마지막 말이 예수님이었습니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 사람이 폐수종으로 입원했습니다. 그는 입원 한 달 내내 의사, 간호사, 주변인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고함치며, 절규했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 때문에 견딜 수 없어 했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감히 자기 병명이 무엇인지 묻지도 못했답니다.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도 묻지를 못했답니다. 이 사람이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였답니다. 1980년 4월 16일에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세상을 떴습니다. 그가 떠나고 프랑스 신문들이 기사를 썼답니다. 『싸르트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였답니다.

복음으로 견고해 진 자의 고백이 그 유명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하박국 3:17-18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의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우리 속담에 “사흘 굶어 남의 집 담 안 넘는 님 없다.”라고 있습니다. 사흘 굶어 보면 “하나님이고 뭐고, 구원이고 뭐고 다 소용없다.” 합니다. “구원이 밥 먹여 주냐!” 합니다. “진리가 밥을 먹여 주냐?”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요즈음 모 야당 대표는 “먹사니즘”이 최고다고 합니다. “먹고사는 게 최고 가치'라는 뜻의 신조어입니다. 하박국은 열매와 소출이 없어도, 먹을 게 없어도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다양한 필요가 충족되지 못해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는 고백입니다. 구원만으로 만족한다는 고백입니다. 나의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특별한 믿음이라면 구원 하나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앞으로 올 영원한 세상을 얻었기 때문에 설령 세상에 있는 것이 결핍이 있더라도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우리 신앙의 최종 지향점은 하늘입니다. 하늘에 산소 망이 있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기업이 있습니다.

또 복음으로 견고해진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감사합니다. 감사와 관련한 복음 성가가 있습니다. “날 구원 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2절에 보면“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아픔과 기쁨도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날 감사”란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 안에서 만사형통이면 다 감사입니다. 그런데 나의 간절한 기도에 침묵하실 때도 그 주권을 인정해 드릴 수가 있습니까? 아픔, 슬픔, 장미꽃 가시, 외로운 가을날과 같은 상황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감사가 할 수 있습니까? 내 속에서 만들어진 복음,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있는 자들은 처음에는 좋지 않은 상황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는데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인정하는 자리로 가게 되는 자들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27절입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본문은 마지막 송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란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할 때인 로마서 1장 1절도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16장 27절 끝날 때도 예수 그리스도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도 항상 이런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입니다. 예수님을 놓치면 말짱 꽝인 자들입니다.

도마뱀 예화를 다시 한번 상기해보십시오. 현재 우리의 육체는 묶여있는 도마뱀처럼 아직 완벽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죄에 유혹이 있고, 죄에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 인해 신자는 끊임없는 내적 갈등을 겪는 자들입니다.

이 갈등에 대하여는 롬7:22~24절에 잘 나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옛날 로마제국에서 사형수를 처벌하는 방법 중 하나가 자기가 죽인 사람의 시신과 얼굴과 몸을 똑같이 포개어 묶어놓는 형벌이 있었답니다. 시신의 코와 코, 입술과 입술, 배와 배, 무릎과 무릎을 맞대어 놓습니다. 시신이 썩어가면서 나오는 독소 때문에 같이 죽게 만드는 끔찍한 형벌입니다. 본문 사망의 몸은 이런 상황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본문은 사도바울 구원받은 이후에 내적 갈등을 실감이 나게 표현한 부분입니다. 성도는 죄와 전혀 상관없고 죄를 아예 안 짓는 사람이 아닙니다. 죄를 향하여 늘 넘어지는 자신을 목격하고 내적 갈등을 겪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갈등으로 끝나면 절대 안 됩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누구에게로 가야 합니까? 예수님에게로 가야 합니다.

마5:4절을 참고하면서 결론을 내겠습니다. “애통해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받을 것임이요” 본문의 해석은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애통하자가 아니고 얘통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뒤에 위로가 오는 상태가 되어 복이 있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본문에 애통하다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고 애통하는 극심한 슬픔이랍니다. 그리고 위로받는다는 뜻은 “가까이서 부르다. 초청하다.”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애통을 신자에게 적용하면 신자의 겉 사람과 속사람 간의 내적 갈등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2개의 자아가 생깁니다. 속사람과 겉 사람, 옛사람과 새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새로운 자아 곧 새 생명을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반대로 옛사람은 끊임없이 반대로 죄를 향해 가려고 합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는 갈등입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을 바로 이럴 때 위로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초청된다, 불린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들이 복되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늘 죄 앞에서 넘어지고 내적 갈등을 겪는 자들인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결국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되어 위로받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이 없었으면 어떡 할 뻔했나?”하고 예수님 뒤에 숨는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 매 순간순간 예수님 안에서 위로받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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