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청문회에서 변론하는 내용입니다. 사도바울이 신앙출발한 지 26년 쯤 됩니다. 시기는 AD 59년경입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끝내고 이방교회에 선교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가이사라 총독 관저가 있는 곳에서 2년째 감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구금한 사람은 로마의 벨릭스 총독입니다. 벨릭스는 바울이 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2년간이나 가택연급 시킵니다. 왜 그는 시간을 끌었을까요? 제가 퀴즈 낼 테니 맞춰보십시오. 회사 면접 장면입니다. 면접자가 큰소리로 “저는 청렴, 결백, 정직을 인생의 모토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했는데 말도 끝나기 전에 “불합격!”했답니다. "청렴, 결백, 정직-불합격" 이 회사는 뭘 좋아 할까요? 뇌물입니다. 1세기나 21세기나 뇌물이 문제입니다. 벨릭스는 바울이 선교헌금을 많이 가져온 줄 알고 뇌물을 받을까 하여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이 뇌물이 그의 인생의 발목을 잡습니다. 벨릭스는 노예출신입니다. 로마황제 글라우디우스의 어머니의 노예였다가 해방되었는데도 그는 황궁을 떠나지 않고 충성하면서 돈을 모았습니다. 그 돈으로 유대 총독이라는 관직을 산 사람입니다. 그는 무고한 사람을 체포, 고문, 살해했고 뇌물을 받고 죄인을 풀어주었습니다. 이런 그의 부패행위가 로마황제의 귀에 들어가 경질이 됩니다. 그리고 후임으로 베스도 총독이 옵니다. 베스도 총독은 유대의 율법문화와 종교에 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때 마침 유대 왕 아그립바가 그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인사차 관저에 왔고 청문 주도권을 그에게 맡기는 상황입니다. 총독 관저가 있는 가아사라 지방은 로마가 유대를 다스리기 위하여 세운 행정 도시로 지중해 연안에 있고 여기부터 100km 내륙으로 들어와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바울의 감금과 청문은 가이사라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2년간 죄도 없이 애매하게 옥살이 한 셈입니다. 바울은 탱크 같은 추진력을 가졌고 활동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다닌 선교여행 거리는 16,000Km입니다. 이 거리는 강릉에서 부산을 32번간 거리입니다. 이런 그가 2년을 갇혀있다니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2년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면 죽이겠다고 한 자객이 몇 명이었죠? 40명입니다. 그것도 이들은 금식하며 결의를 다지고 기다렸습니다.(행23:12-15) 만약 바울이 안 갇혔으면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갇히면서 세계최강 로마 군병이 그를 지켜준 셈입니다. 470명의 정예부대 호위도 받습니다. 우리도 일이 잘 안 풀리고 꼬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낙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의미가 있습니다. 일이 꼬일 때가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입니다.
그럼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바울이 철수갑을 찬 손을 들어 올립니다. 이 행동은 왕과 총독에게 예를 갖춘다는 뜻입니다. 또 당당한 모습의 표현이랍니다. 그리고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추켜세웁니다. 당신은 한마디로 “율법 전문가이다.”라고 인정하고 시작 합니다. 상담학에서는 이를 라포 형성이라고 합니다. 형제님들이 면도할 때 베이지 않으려면 쉐이밍 크림을 바릅니다. 서양 사람들은 회의나 협상 시작 전에 항상 딱딱 분위기를 완화하려고 유머를 씁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바울은 상대를 치켜세움으로 신뢰를 형성하고 설득력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바울도 복음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바울은 자기 간증을 시작합니다. 이 간증이 4절부터~23절까지 길게 나옵니다. 이거다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여기 참석한 분들은 모두 신앙 9단이십니다.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는지는 아실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기만 합니다. 2년 동안 억울하게 옥살이 했으면 자기의 무죄를 밝히느라 정신없을 수도 있었습니다. 저도 법원에 서 본 적이 있습니다. 죄인이 아니고 증인으로 한 번 서 본 적이 있습니다. 법정에 서보니 남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나에게 피해 가 가지 않도록 자기방어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변명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 담대하게 전합니다.
바울은 간증을 사도행전에서 3번 합니다. 할 때 마다 조금씩 강조점이 다릅니다. 오늘은 다른 부분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첫째는 26장7절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바울은 소망 때문에 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구원자 메시아에 대한 소망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은 유대인들도 바랐던 소망입니다. 차이는 바울은 그분이 예수님이고, 유대인들은 힘없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유대인의 메시아는 로마의 압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줄 정치적인 메시아였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미 오셔서 오지 않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정치적인 메시아를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소망한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데 열심을 냈습니다. 9절을 보시면“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라고 합니다. “많은 일”을 주목해주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많은 일을 하는 것을 종교적 행위 또는 종교적 열심이라고 합니다. 이단들의 열심을 상상하면 되겠습니다.
바울의 이런 인생을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일침을 놓으시죠? 14절후반절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 많은 일, 종교적 행위를 “가시 채를 뒷발질 한다.”라고 말씀합니다.(행26:13) 바울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으면 본문13절을 보면 정오에도 예수 믿는 이단을 잡아 죽이려고 일하고 있습니다. 중동 정오는 시에스타(Sieta)라고 하여 너무 더워 낮잠을 자는 시간입니다. 바울은 낮잠도 안자고 땡볕에 일하고 있습니다.
가시채는 어떨 때 씁니까? 소가 밭갈이 할 때 대부분의 소는 앞으로 잘 갑니다. 그런데 꼭 엉덩이에 뿔난 소가 있습니다. 이런 소는 안가고 뒷발로 주인을 냅다 찹니다. 아니면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앞으로 안갑니다. “소 잡아 잡수 쇼”하면서 안갑니다. 이럴 때 주인이 뒤에서 쇠가시가 달린 막대기를 뒷발이나 몸에 댑니다. 그러면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합니다. 한번 대면 다시는 뒷발 못 올리고 앞으로 잘 간다고 합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한다.”는 현재 바울의 영혼의 고통도 말해주는 동시에 앞으로도 말 잘 안 들으면 가시채를 대겠다는 말씀입니다.
중동지방의 정오 햇볕은 얼마나 따갑습니까? 빛의 밝기를 나타내는 단위는 룩스라고 합니다. 1룩스는 가로세로 1미터 안에 비추는 빛의 양입니다. 형광등 한 개는 300룩스입니다. 태양빛이 중동지방은 다른 지방보다 훨씬 강합니다. 이 빛의 양이 13만 룩스랍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13만 룩스를 뚫고 그보다 더 강한 빛으로 바울에게 비추이셨습니다. 바울은 이로 인해 눈이 3일 동안 멀게 됩니다. 이 때 그의 불안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치 가시채를 뒷발질 할 때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은혜 없는 열심, 근거 없는 열심 조심해야합니다. 또 하나 교훈은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하십니다. 사무엘하 7장 14절을 참고하면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을 때 인생막대기와 사람 채찍을 쓰신다고 나옵니다. 가시채는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는 그전에 빨리 돌이키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 살펴볼 구절은 26장18절입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18절은 복음의 핵심이 다 들어 있습니다. 복음 선물꾸러미 구절입니다. 내용은 설명 안 해도 모두 이해하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탄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를 빼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라는 말씀만 살펴봅니다. 본문에 돌아온다는 표현은 쓴걸 보면 구원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거듭난다는 말씀이 같은 뜻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 강원연합 집회에서 단체 찬양을 했습니다. 제목은 “살아낸 만큼 사랑한 만큼” 찬양입니다. 저는 테너를 하면서 처음으로 높음은 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 음계차이를 알게 됐습니다. 음표를 그리는 시작점이 기준음이었습니다. 높은음 자리표를 그리기 시작하는 점이 “솔”이고 낮은음 자리표를 그래기 시작하는 지점은 “파”였습니다.
그러데 왜 끝나고 앵콜이 안나왔을까요? 앵콜이 안나와서 섭섭했습니다. 듣는 성도님들이 너무 감동하여 앵콜을 까먹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앵콜은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냥 앵콜은 연주가가 방금 연주한 곡 말고 다른 곡을 자유롭게 연주해달라는 뜻입니다. “비스”라고 발음하는 앵콜은 방금 연주한 곡을 똑같이 반복하여 연주해달라는 요청이라고 합니다. 거듭난다는 의미가 비스의 의미로 설명합니다.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은 창세기 2장7절이 재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2장 7절은 하나님의 생기, 하나님의 영이 아담에게 들어와 산 존재가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본문에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의미가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임한 성도는 사탄이 함부로 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요한1서5장18절은 이런 자들은 하나님이 지키심으로 악한 자가 감히 만지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요한복음10장28-29절은 사탄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성도를 빼앗을 수 없다고 합니다.
자 그럼 바울의 간증을 들은 이들의 반응이 어떤지 보겠습니다. 24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베스도 총독이 큰소리로 미쳤다고 두 번씩이나 말합니다. 이 베스도 총독 말에 바울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두 번씩이나 미쳤다 하니 자존심 상하여 강하게 나갈 수도 있었죠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그래 나 미쳤다. 미친놈 맛 한번 보실래요?” “보자 보자 하니 보자긴줄 아나, 가만있으니 가마닌줄 아나”하며 역공을 펼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합니다.
베스도는 세상 학문이 바울을 미치게 했다고 판단했는데 아니죠?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고상한 지식 때문에 오히려 세상 학문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3:8) 세상학문이 바울을 미치게 한 것이 아니라 세상학문이 오히려 복음을 역행하죠? 세상학문을 우리는 보통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으로 나눕니다. 형이상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를 설명하는 학문으로 철학이 대표적입니다. 형이하학은 반대로 눈에 보이는 현상을 다루는 분야로 과학이 대표학문입니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 여깁니다. 과학은 반드시 실험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만 법칙으로 다루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철학과 과학이 물위를 걷고, 동정녀 탄생, 오병이어의 기적,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 다 설명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철학과 허황된 지식을 경계하라는 성경구절이 많습니다.(골2:8, 딤전6:20) 요즈음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적을 모두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적은 그저 인간에게 교훈을 주기위한 상징으로 봅니다. 말도 안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기적을 못일으키실까요?
25절을 보십시오. 미쳤다고 하는 베스도에게 바울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총독이 미쳤다고 고성을 지르면, 속된말로 지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안 지리고 “각하~”하면서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고 존칭을 씁니다. 그리고 자신은 미친 게 아니고 참되고 온전하다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누가 미친겁니까? 바울입니까? 베스도입니까?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미친 사람이 맞습니다. 율법에 미쳤었습니다. 기독교인을 잡아 죽이는데 미쳤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고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참되고 온전한 상태로 돌아온 셈입니다. 베스도 입장에서 보면 바울이 예수님께 미쳐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혹시 성도님들도 주변에서 미쳤다는 소리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들어 보셔야 정상입니다. “제는 우리하고 같아~ 다를 바가 없어~”이러면 곤란합니다. 직장이나 군대에서 가끔 “최집사, 임목사, 김장로~”이렇게 불러주기도 합니다.
세상이 미친 것인지 믿는 우리가 미친 것인지 몇 가지 더 예를 들어볼까요? 세상에 점점 범죄가 끔찍해지고 범죄 연령대도 낮아지는 예는 들을 필요도 없겠죠? 2022년에 비만치료에 들어간 돈이 75억 달러 우리 돈으로 11조원입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는 5세 이하 어린이 1,150만 명이 굶주림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답니다. 강릉에 비가 오지 않는 근본 원인이 뭡니까? 사람들이 지구를 정상적으로 사용을 안 한 대가로 온난화가 가속화된 것이 아닙니까? 엘리트 스포츠의 예를 들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리가 체력단련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하는 운동을 탓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골프는 앞이 고부라진 쇠막대기로 호두 알 만 한 공 잘 치는 선수들에게 얼마를 줍니까? 수십억을 줍니다. 또 야구는 나무방망이 10번 중 4번만 지속적으로 잘 휘둘러도 수십, 수백억의 연봉을 줍니다. 이런 세상이 온전한 겁니까? 황금연휴에 이런 거 하거나 보러 안가고 수요 집회 와서 말씀 듣는 게 온전한 겁니까? 우리가 비정상이면 여러분도 다 미친 셈 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참되고 온전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바울은 베스도에게 향했던 시선이 아그립바 왕에게로 향합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본문에 “한 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다.” 란 말씀은 복음은 역사적인 사실이란 뜻입니다. 복음은 머리 좋은 사람이 만들어 퍼트지리 않았습니다. 선지자를 믿느냐는 물음은 구약에 예언된 선지자를 믿는다면 성경에 수 천 년 동안 예언한 예수님에 대하여 모를 리 없다는 무언의 압박입니다.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란 표현은 제발, 간절히 믿으시기를 바란다는 간청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아그립바 왕 넘어갈 듯 넘어갈듯 안 넘어 갑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아그립바의 대답입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적은말로”의 원어 뜻은 ''거의, almost''입니다. 본문 뜻은 “내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 했다.”입니다.
본문을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예를 하나듭니다. 제가 군대 얘기 하나하겠습니다. 제가 UDT, 해병대, 특전단 같은 특수 부대 출신은 아닙니다. 특수한 부대 출신입니다. 그 특수한 부대에 근무시절에 행정 상사님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늘 하는 자랑이 있습니다. “자기는 서울대 1차 합격했었는데 못갔다.”입니다. 서울대 중퇴도 아닙니다. “합격만 했는데 못갔다.”입니다. 우리는 이런 분을 서울대 나올 뻔한 사람이라 합니다. 아그립바 왕도 똑같습니다. “하마터면 구원받을 뻔했다.”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 예를 듭니다. 우리 교회 예배당 짓고 그동안 없었던 엘리베이터 가생겼습니다. 이때 처음 타보신 분의 소감이 뭔지 아십니까? 마치 엘리베이터타고 천국을 올라가는 기분이었다였습니다. 이 천국 가는 기분은 엘리베이터에 양발을 모두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문 앞에서 양다리 걸치고 있으면 올라가지 못합니다. 문앞에서 서성거려서도 안 됩니다. 두발 다 올리고 타야 합니다. 한발만 걸쳐도 안 됩니다. 이러면 문에 끼입니다.
하나님이 걸출한 복음 전도자 바울의 입을 통하여 구원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천금같은 기회를 발로 차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혹시 이런 분들 있을 수 있습니다. 넘어올 듯 넘어올 듯 안 넘어 오는 분들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11월 말에 복음전도 집회라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옵니다. 우리 모두 초청하여 이때는 구원받을 뻔 하지 말고 구원받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회가 많지 않다는 예를 하나 듭니다. 강릉시에서 발행한 “솔향강릉”이란 잡지 기사입니다. 제목은 “아버지의 기도”였습니다. 경포 석란정에 화재가 났었습니다. 1차 진압했다 다시 불이 번져 2차 진압하러갔다가 순직한 27세 소방관의 아버지 이야기 입니다. 이 아버지가 59세로 저랑 나아가 같았습니다. 그 불난 석란정 앞에 추모비가 세워졌습니다. 이 아버지가 아들을 못 잊어 7년간 거의 매일 새벽에 주변청소를 하고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아버지는 기사 말미에 아들묘지는 대전에 있는 소방관묘역인데 갈 때마다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제발 자기 아들 옆으로 묘비가 늘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마다 계속 늘어나는 것이 너무너무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저도 아버지 납골당에 갔었습니다. 작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차가 입구부터 막혔습니다. 그만큼 납골당 빈자리가 많이 찼다는 반증입니다. 아버님 옆에는 심지어 96년생 여성이 들어와 있습니다. 7년 전에 96년생이니 23살에 유명을 달리 한 셈입니다. 제가 이 예를 드리는 것은 주님이 언제 곧 오실지, 아니면 우리가 언제 주님께로 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에 있어서는 우물쭈물할 기회가 없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와 죽음의 문제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구원받을 뻔했다는 아그립바 왕에게 뭐라고 외칩니까?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모두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합니다.” 나와 같이 되십시오. 아니 바울 지금 세상에서 CEO의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세계선교협회 당회장 자리 아닙니다. 2년 동안 옥살이 하느라고 외모는 남루하고 손과 발에 철 수갑을 찬 죄수의 몸입니다. 그런데도 나와 같이 되라합니다. 총독과 왕이면 세상에서 권력, 부, 다 가진 자들 아닙니까? 우리가 부러워해야할 대상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전혀 부러워하지 않고 당신들도 자신처럼 되라고 당당히 외칩니다. 부러우면 지는 겁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당당한 자세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0-32절은 바울에 대한 이들의 최종판결입니다. 당연히 무죄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죄수의 몸으로라도 로마 땅을 밟기 위해 황제 상소권을 사용합니다. 이 상소권은 중간에 무죄이던 아니던 무조건 황제에게 가야합니다. 결국 바울은 청문 후 2-3주후에 꿈에도 그리던 로마 땅을 밟게 됩니다.
나비효과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1960년대 기상학자 로렌츠가 발표했습니다. 브라질에서 한 마리 나비가 날개 짓을 하면 반대에 있는 미국 텍사스에는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매우 작은 변화가 시간이 지나면 예측불가능한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 낸다는 혼돈이론입니다. 실제 기상예측 모델 실험에서 입증하였다고 합니다. 이 이론을 빗대어 봅니다. 사도 바울 한 사람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복음을 들고 간 일은 나비의 날개 짓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약400년 후에는 로마 전체가 국교로 되었습니다. 2,000여년이 지난 지금은 온 세계에 복음이 편만히 전해졌습니다. 복음은 그만큼 폭발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강릉이라는 도시에서 주와 복음을 위하여 하는 일이 비록 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힘이 장차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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