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냐 은혜냐?(요한복음1:14-17절)
오늘 주제는 “크리스챤으로서 푸근한 이미지의 사람이 되자. 좀 더 은혜로운 사람이 되자.” 입니다. 본문은 요1:14-17절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떠오르는 이미지
예수님 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 진리를 사수하는 투사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양을 안고 있는 인자한 모습입니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는 모습입니까? 투사의 모습은 한번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람들이 시장판으로 만들었을 때 채찍을 만들어 상인들을 내쫓고 돈 통과 의자를 엎었습니다.(막11:15) 대부분 은혜로운 모습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님
오늘 본문은 예수님 안에 은혜(grace)와 진리(truth)가 충만하다 증거 합니다. 여러분은 삶 속에서 무엇을 강조합니까? 진리입니까? 아니면 은혜입니까? 또 아이들을 교육할 때도 진리를 강조합니까? 은혜를 강조합니까? 진리만 강조하면 은혜를 놓치기 쉽습니다.
저에대한 이미지는 어떠합니까? 은혜로운 사람입니까? 아니면 바늘로 찔러도 피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한 사람입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하면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죠? 이만재라는 분이 “교회가기 싫은 77가지 이유”라는 책을 썼습니다. 제목만 소개합니다. “노방 전도하는 것을 보면 오만 정이 떨어진다.” 그래서 교회가 싫어답니다. “말 많은 전도자 너무 싫어!” “부흥집회 가보니 어이가 없네?” “조용한 교회 어디 없나?” “광적인 행위 너무 무서워” “부자교회 천국 갈 수 있을까?” “건축헌금이 무섭다.” “너무 배타적이다.” “팔자 편한 사람들이 다니는 곳” “각종 제약이 너무 싫다.” “무전여행 때 교회에서 문전박대 당했다.” “양보를 모르는 교회 악덕집단” “교회에는 쓸만한 총각이 없다.” “교회는 또 하나의 계급사회” “양보 없는 일등주의가 싫다.” “인간미도 재미도 없는 교인” “일요일에 늦잠 잘 수 없어서 싫다.” “이중인격자가 많아 교회가 싫다.” “헌금에 따라 대접이 달라진다.”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없다.”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다.” “꼴보기 싫은 사람이 너무 많다” “신분차별 때문에 벽을 느꼈다.” 시사하는 바가 있죠?
선교사 예화
30세 나이 쯤 되는 미국 선교사와 예배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10-12개 월 된 어린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가만히 있질 않겠죠? 그런데 25 센치 길이이고 연필굵기의 크기 작은 회초리를 들고 아이가 칭얼거리며 예배를 방해할 때마다 손등이나 종아리 같은데 톡톡 건드렸습니다. 그들만의 교육철학인지는 몰라도 속으로 너무 엄격하지 않나? 부정적으로 본 기억이 납니다. 아빠가 너무 엄격하면 아이들이 하나님도 그런분으로 여길까 염려됩니다.
딸의 초등학교 운동회
딸의 초등학교 운동회를 보러갔습니다. 계주 선수여서 어떻게 달리는 지 궁금했습니다. 아이들의 운동신경은 나를 닮지 않았습니다. 평일이어서 직장에 휴가까지 내고 갔습니다. 그런데 저같이 궁금한 학부모들이 많았습니다. 주차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날따라 교통경찰 분들이 단속까지 합니다.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합니다. 주차공간을 찾아 한참을 배회하다가 텅텅 비어 있는 주차장을 발견합니다. 학교 근처 교회의 주차장입니다. 그런데 주차장 입구에 들어서려는 순간 교인들이 막아섰습니다. 남의 주차장에 세우지 말랍니다. 평일 오전이어서 교회행사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화가 나서 “아니 교회에서 왜 이럽니까?” “교회가 마음을 넓게 쓰십시오.” 교회를 강조하며 항의 해보았지만 끝까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무한 경쟁 사회입니다. 어떤 분은 일터가 아마존 정글과 같다 합니다. 약한 자는 언제 강한 자에게 잡아먹힐 줄 모르는 양육강식의 정글입니다. 사람들은 정글에서 상처받고 지칩니다. 교회는 이런 영혼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야 맞죠? 가기 싫은 곳이 된다면 문제입니다.
다윗이 있는 아둘람 피난처에 모임 사람들
삼상22:1-2을 참고합니다. 본문에서 ‘아둘람’이라는 뜻은 피난처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고 승승장구하다가 사울의 시기를 받아 쫓겨 다닙니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침을 흘리며 미친 행세도 합니다.(삼상21장) 그러다가 피해간 곳이 아둘람 동굴입니다. 요즈음도 이 아둘람 동굴은 성지로 개방합니다. 석회암 동굴로 700명 수용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TOEIC 900점 이상자, MBA과정이수자, SKY대 출신자, 석,박사 학위 소지자 였습니까? 아니죠? “환난 당한 자,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입니다. 다윗에게 이런 자들이 모였다는 것은 다윗이 이들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목숨을 구걸해야만 할 정도의 수많은 고난을 통해 이런 자들을 품고 섬길만한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다윗은 이런 자들과 함께 왕국의 기초를 놓습니다. 교회도 이러해야겠죠?
교회가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
그러면 이런 의문 듭니다. 왜 교회가 꼭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가? 왜 나만 가지고 그래? 하는 농담이 있죠? 성도님들도 똑같이 정글에서 경쟁하느라 지치고 힘듭니다. 그런데 왜 우리만 져주고, 양보하고, 손해보고, 받아주고, 사랑을 베풀고, 용서하며 살아야합니까? 억울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화도 내고, 남을 밟고 올라서기도 하고, 권력을 휘 둘러 보기도 하고싶은 생각 들지 않습니까? 왜 그러면 안 되는지 답변을 드립니다.
첫째는 이렇게 사는 것이 손 해 보는 장사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이제 70,80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원히 살아야합니다. 그 영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무엇이 기다립니까? 그리스도의 심판석입니다.(고후5:10, 고전3:13-14,롬14:10) 결산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상급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또 이런분 있습니다. 나는 쩨쩨하게 상은 바라지 않는다. 그냥 ‘막 살아 볼란다. ’막가파 정신으로 살란다.’ 그런데 신자는 막 산다고 막 살아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생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택한 자들입니다.(히12:7-8) 하나님이 막 살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끝까지 간섭하고 진리의 길로 인도합니다.(요16:13) 하나님이 손쓰기 전에 알아서 잘 하시길 바랍니다.
율법과 은혜 비유
본문 1:17절참고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은 모세로부터 은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본문에 맞추어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은혜를 어떻게 비교하는지 알아봅니다.
피와 포도주
모세가 애굽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처음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나일강물을 지팡이로 쳐서 피로 물들입니다(출7:19-21) 피로 물든 강에서 많은 생명이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어디를 가셨습니까? 혼인잔치에 가셨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 포도주는 생명의 상징이죠.(요2:7-11)
어두움과 빛
모세의 9번째 재앙이 무엇입니까? 흑암 재앙이죠. (출10:22-23)
반대로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요8:12, 요9:5)
죽음과 생명
율법이 처음 선포되었을 때 몇 명이 죽었습니까? 3,000명이 레위 자손의 칼에 죽임을 당합니다. (출32:26-28)
그러나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의 은혜가 처음 선포되었을 때는 3,000명이 구원을 받습니다.(행2:41)
찾는 것과 구하는 것
율법은 예수님을 찾을 수 있을 때 내가 노력하여 찾으라고 합니다.(사55:6, 아모스5:4.5)
그러나 은혜는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줍니다.(눅19:10) 찾되 찾을 때까지 찾습니다.
행위와 생명
율법은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합니다. (레18:5)
그러나 은혜는 무엇이라 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요19:30) 구원을 위해 우리가 행할 것이 없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영원한 속죄
율법에서 양과 소로 드리는 속죄제사는 영원하지 못하죠(히10:1)
그러나 예수님은 단번에 그 몸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죄가 영원히 사해졌습니다. 죄는 과거, 현재, 미래 통 털어서 영원히 사해졌습니다.(롬5:1)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죄값을 다 치르셨다는 증거요 표적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요소 살펴 봅니다.
첫 번째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첫째의 마음
우리는 남의 약점을 보는 데는 천리안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픕니다. 남의 험담이나 뒷 담화는 은밀한 쾌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눅15:25-32절에는 첫째 아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신앙생활에 어느 정도 구력이 생기면 둘째아들의 시각에서 첫째아들의 시각으로 넘어갑니다. 물려받은 재산을 다 날리고 돼지 밥으로 허기를 채웠다는 동생 소식을 들었으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야합니다. 그러나 첫째는 분노합니다. ‘분노하다.’라는 말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다.’란 뜻입니다. 일시적인 화가 아니라 깊이 쌓인 분노와 노여움의 표현입니다. 형은 아버지와 몸은 늘 가까이 있었지만 그 마음을 읽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도 첫째 아들과 같은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고 은혜가 사라집니다.
두 번째는 율법주의 입니다. 수많은 법들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자신을 가둡니다. 율법주의의 대표자는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구약에 기록한 613개의 율법에 각각 수십 개의 세칙조항을 달아놓고 지켰습니다. 613개에 10개씩만 정해도 세칙은 6,130 개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안식일에 거울을 볼 수 없습니다. 거울을 보다가 여드름을 발견하거나 흰 새치를 발견하면 떼어내고 싶은 유혹을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새치하나 떼어내는 것도 일로 보았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규정을 지키기 위해 여인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여인이 옆을 지나가면 안보고 눈감고 가다가 전봇대와 헤딩하여 이마가 깨지기도 합니다. 피가 나면 이들은 자랑하려고 붕대를 감고 다녔습니다. 이런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합니까? 마23:23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은혜를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율법으로 자신을 치장할 때 은혜가 사라집니다.
세 번째는 사함 받은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남의 작은 잘못도 용서해주지 못함도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8장24-35절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일명 “내보따리 내놔라” 비유입니다.
본문에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의 돈을 갚지 않는 사람의 멱살을 잡고 내 돈 내어놓으라고 협박합니다. 백 데나리온은 오늘날 천 만 원 가량 됩니다. 일만 달란트는 19조4천억 원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금340,000Kg입니다. 19조면 헤아릴 수 없는 액수입니다. 일생 값을 수도 없는 구원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남의 작은 허물을 용서 못하는 문제가 본문의 일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의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우리는 모두 오십 보 백 보의 죄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입니다. 8,848미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다는 어디 입니까? 괌 옆에 있는 마리아나 해구라고 합니다. 에베레스트 산보다 깊습니다. 11,000미터입니다. 지구는 상당히 울퉁불퉁하죠? 만약 지구를 저 멀리 목성쯤에서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요? 볼링공처럼 매끈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이 이렀습니다. 우리의 의나 또 허물이 에베레스트 산 같을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개미가 파놓은 흙 둔덕 같이 낮게 보입니다. 우리도 이런 시각으로 남의 허물을 바라보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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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의 혼인잔치와 성전 정화(요한복음2:1~12)
오늘은 요한복음 2장1-12 말씀에 나오는 두 가지 사건을 통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제1장 그대로 하라!(요2장1~12)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혼인 풍습에 대하여 먼저 알아봅니다. 요즈음 결혼식은 1시간 안에 끝납니다. 어느 결혼식에 15분 늦었는데 이미 신랑 신부가 퇴장하고 있었습니다. 속전속결 이었습니다. 주례 아르바이트 있습니다. “귀족알바”라고 합니다. 한 번에 15~20만원 번답니다. 저도 퇴직하면 귀족알바 도전해볼까요? 좋은 스펙이 없어서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최소한 ‘장’자가 몇 개 있어야 명함을 내밉니다. 예수님 당시는 혼인예식은 7일입니다. 이기간 동안 계속 잔치를 합니다.
당시는 결혼 1년 전에 정혼을 합니다. 마리아도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합니다.(마1:18) 정혼기간이 지나면 예식은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데리러 신부집으로 가면서 부터시작합니다. 이동은 밤에 합니다. 그래서 신부 친구들이 횃불 또는 등불을 준비해야 합니다. 10처녀의 비유도 여기에서 유래합니다.(마25;1) 혼인잔치 하객은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합니다. 예복이 없는 사람은 쫓겨났습니다.(마22:11~13) 당시 혼인예식에 초대 받은 것을 명예롭게 여겼습니다. 초대 받지 못하면 수치로 여겼습니다. 심하면 초대안한 것을 빌미로 결투까지했습니다.
요즈음은 청첩장이 고지서 역할을 해서 안 오면 잘됐다 합니다. 직장은 부조를 인터넷으로 하고 월급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갑니다. 정년이 가까운 사람은 자녀를 빨리 결혼시켜 수금을 서두르기도 합니다.
신부가 신랑 집에 오면 그때부터 일주일 동안 흥겨운 잔치를 시작합니다. 손님들 중 연회장을 뽑습니다. 연회장 임무는 분위기를 UP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님들의 자리 배치도 담당합니다. 연회장이 정해주지도 않은 자리에 앉았다가는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연회장은 포도주에 물을 얼마나 탈지도 정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어머니가 먼저 잔치집에 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신랑이나 또는 신부 측과 친분관계가 있었나 봅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도 청함을 받았고 혼인잔치에 참여합니다.
예수님은 본성상 거룩합니다.(요한1서2:20).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양에 비유합니다.(벧후3:13 요1:36) 비둘기 같이 순결함에도 비유합니다.(요1:32) 이런 예수님은 높은 산에 은둔하면서 산상수훈 같은 교훈의 말씀만 전하기 쉽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 안에 들어오십니다.(요한1서4:14) 혼인잔치는 물론 세리들과 창기들과도 함께 식사합니다.(막2:15)
혼인 찬치가 무르익어갈 즈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것을 마리아가 알아챘습니다. 이를 볼 때 마리아는 손님처럼 대접만 받지 않고 여기 저기 다니며 손을 보태고 참견했습니다. 김치 겉절이 간을 보며 “소금 더 넣어라!”는 주문도 했겠죠.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면 흥이 깨지고 분위기가 차갑게됩니다. 신랑 신부를 축복하는 마음도 식습니다. 마리아는 이 상황을 예수님께 알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어라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여자여!’는 원어적으로 보면 어머니를 무시하는 말투는 아닙니다. 일반적인 극존칭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청을 거절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본문에는 구체적인 이유는 없습니다. 상상을 발휘하면 마리아는 예수님께 인간적인 기대감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들의 대화의 80%는 자식 자랑 아니겠습니까? 나머지 20%는 남편 흉보는 것이죠? 마리아는 자신의 청으로 예수님이 문제를 바로 해결하면 체면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 인간적인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셨습니다. 마리아는 무엇이든지 예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한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와 때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주인공은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내 하나 없어져 봐라!” 집안 꼴이 잘 돌아가나? 많이 들어본 말이죠?” 집안은 안돌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길가의 돌들로도 아브라함을 만들어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을 드러내는 분입니다.(이사야26:15) 그럼에도 우리 연약한 인간들을 쓰시는 것은 은혜요 감사한 일입니다. 시편84:10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여도 좋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모자지간의 연을 끊자!”“호적 정리하자”하였습니까? 요즈음 호적이 없어지고 가족관계부로 바뀌었습니다. “가족관계부 정리하자!” 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하라”고 일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주권을 맡기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하인들을 시켜서 예수님이 일할 환경을 예비합니다.
때가 되자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어떤 지시를 합니까? 6~8절을 보십시오. 정결예식에 쓰는 돌 항아리 6개에 물을 채우라 합니다. 돌 항아리 한 개에는 물이 120리터 들어갑니다. 페트병이 2리터이니 60개가 한 통이고 6통은 360개입니다. 양은 많았지만 하인들은 다 채웠습니다. 그리고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줍니다. 하인들은 다소 힘은 들었지만 할 일을 했습니다. 또 할만한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초인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분량만큼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오병이어를 들어 크게 쓰십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물이 변하여 최고의 포도주로 변합니다. 혼인 잔치 분위기가 경색될 위기가 다시 화사하게 변합니다. 신랑은 영문도 모른 체 연회장에게 칭찬을 들었습니다. 보통 잔치 후반으로 갈수록 질이 나쁜 포도주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번 연회는 갈수록 최상의 포도주가 나왔습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가 고등학교 화학 시간으로 돌아가 봅니다. 물리는 물려서 포기하고 화학은 화나서 포기하신 분 계시죠? 물의 화학식은 H2O입니다. 산소 원자 한 개에 수소원자 두 개가 붙은 것이 순수한 물 분자 식입니다. 그러면 알코올의 화학식을 기억하시는 분은 아마 없으시겠죠? 저도 찾아보니까 C2H5OH입니다. 탄소 원자 2와 수소 원자 6개 산소 원자 한 개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알코올 화학식에서 새로운 원소인 탄소가 들어간 것을 확인 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없던 것이 새로 생기는 기적입니다. 무에서 유가 생기는 기적입니다. 물의 형태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디 포도주에 탄소하나만 새로 생겼겠습니까? 당분도 창조되었고, 유기산인 타르타르산도 있고, 무기물인 캄륨, 나트륨, 마그네슘, 철이 생겼습니다. 붉은색을 내는 안토시아닌, 탄닌, 또 아황산염 등 다양한 성분이 만들어졌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일은 창조주 만이 할 수 있는 기적입니다.
11절봅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님은 스스로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이 사건으로 제자들의 믿음이 한층 깊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잔치집에서 시작합니다. 첫 기적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일입니다. 표적의 의미는 도로표지판과 같이 무엇을 가리킨다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 시킨 일이 가리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는 앞으로 예수님이 하실 일의 성격을 암시합니다. 이 세상은 마치 포도주가 떨어져 흥이 깨진 잔치집과 같습니다. 분위기는 냉냉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상처 받고 영혼이 병든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킬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냉냉한 잔치집의 분위기와 같은 세상을 바꾸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왜 하필 율법을 따라 정결예식에 쓰는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포도주로 바꾸셨겠습니까? 돌 항아리 속 물의 용도는 집을 들고 날며 손 발을 씻고 몸에 물을 뿌리며 자신을 깨끗케 하려는 율법의식에 쓰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되려는 노력을 상징합니다. 돌 항아리에 든 물을 뿌리는 인간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고 포도주 역할을 하신 예수님 만이 의롭게하 실수 있다는 표적을 본문은 말해줍니다. .
따라서 예수님이 함께하는 교회의 생활은 잔치집과 같습니다. 초상집 분위기 아닙니다. 교회는 고행하는 곳이 아닙니다. 근엄한 곳도 아닙니다. 혼인 잔치집과 같이 즐겁고 환하고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물 같은 죄인이 포도주같이 변화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에게 고후5:17절은 무엇이라 합니까? “보라 새사람이 되었도다”
제2장 이 성전을 헐라!(요2장13~22)
13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때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최대의 명절입니다. 이날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이날에는 세계 곳곳에서 산 넘고 물 건너고 바다 건너서 예배하러 온 사람들이 수백 만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파합니다.(요7:37,3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하며 목마른 영혼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 입니다.(요한1서4:9) 그리고 온유합니다.(마태11:29) 예수님은 어린아이들도 손을 얹어 기도해 주기를 즐겨합니다.(마태19장14)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많이 몰려오자 제자들이 “아이들은 가라!”하며 오지 못하게 막기도 했습니다. 열심당원 시몬은 군기반장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합니다. 아이들 일일이 손을 얹어 기도해 주었습니다. 12제자 중 가장 어린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자주 기댔다고 합니다.(요13:23) 그 정도로 친근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4~16절 말씀은 이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노 합니다. 채찍으로 성전 안에 소나 양을 다 내어 쫓았습니다. 돈 통의 돈을 쏟았습니다. 상까지도 뒤집어 엎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감히 막지 못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사도요한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은혜가 충만하시지만 진리 앞에서는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합니다. 성전은 장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입니다.(이사야56장7절) 하나님께 예배하는 구별된 장소입니다. 이런 진리가 무너졌을 때 예수님은 분노하셨고 바로 세우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하에 있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성전 옆에 제사장들의 복장을 보관하는 창고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복장을 찾아갈 때마다 보관세를 받았습니다. 제사장들은 돈이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멀리 이방 땅에서 오는 사람들이 제물로 드릴 소나 양을 끌고 올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빈 몸으로 와서 제물을 사야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시아나 항공에 소를 실을 수는 없잖습니까? 비행기가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짐승을 사고파는 행위가 시작되었습니다. 또 로마 돈은 유대인들이 쓰는 세겔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성전에서 환전이 성행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이 과정에서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수입을 챙겼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해야 할 성전이 세속화한 것에 분노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더 신랄하게 비판합니다.(마21:12-13,막11:15-17, 눅19:45-46)
예수님의 이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은 구약의 시편 말씀을 기억합니다. 17절은 시편 69:9절을 인용한 것으로 다윗왕의 시입니다. 다윗왕은 자신은 화려한 궁에 거하는 반면 하나님은 장막에 계신다고 생각하여 성전을 짓 고자 하는 열정이 컸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도 양심이 있으면 예수님의 이 분노를 통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눈에 가시 처럼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체포해서 죽일까 밤낮 모의합니다. 그러나 군중들이 무서워 체포할 수도 없었습니다.(막11:18) 그래서 예수님이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는지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마태12:39절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표적요구에 대한 답변이 무엇입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 일으키리라”합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3일에 헐고 다시 짓는 것은 이해 불가입니다. 당시 샌드위치 패널 같은 건축 자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21,22절에 말씀의 뜻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유대인 뿐아니라 모든 사람이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제도를 통해 예배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성전의 역할을 합니다. 제자들은 처음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몰랐다가 부활하신 후에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헐라!”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지켜온 율법주의를 헐라는 말씀으로도 이해합니다. 613개 이상의 율법 조항을 만들고 지키는 것 자체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들이 이방인들을 개돼지 취급하며 지켜온 선민사상(유다이즘)을 허물라는 뜻도 됩니다. 마음은 사라지고 예배의 형식만 남은 껍데기를 허물라는 말씀도 됩니다.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은 실제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신성모독 죄로 정죄 받았습니다. (마태26:65)그리고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에베소서3:12)율법의 시대가 허물어지고 은혜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에베소서3:12) 한 마디로 율법의 시대가 허물어지고 은혜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 예수님의 공로에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저의 메시지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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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興)”과 “쇠(衰)”ㅡ세례요한(요한복음 3장 22-30절)
시대의 풍조
중세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는 신학, 예술, 이성과 학문, 과학기술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이런 가치가 인류에게 행복과 평화를 가져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다 세계 1, 2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전쟁에서 동물과 같이 서로 죽이고 파괴하고 빼앗는 모습을 보고 기대가 무너집니다. 그러자 허무주의가 생겼습니다. 그 허무주의 사이를 파고든 것이 물질만능주의입니다. 물질의 대표가 돈입니다. 성경은 돈을 추구함을 맘몬(돈) 숭배 사상이라 합니다.
이 풍조가 교회도 영향을 주었다고 걱정하는 분이 많습니다. 성경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하여 부정적입니다. 잘 개조하고 아름답게 꾸며서 살 곳이 아니라 합니다. 세상은 마치 가라앉는 배와 같습니다. 성경은 말세에 관해 말씀하면서 이 배에서 빠져나 다른 구명정으로 옮겨 타라고 합니다. 이 구명정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례요한의 탄생 배경과 삶의 모습
오늘 말씀은 세례요한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잘 칭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만은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합니다. (마11:22)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세례요한이 칭찬받은 이유를 배웁니다. 세례요한은 BC5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제사장이었던 사가랴고 어머니는 엘리사벳입니다.(눅1:57) 그는 성장하자마자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의 먹거리 메뚜기와 석청입니다. (막1:6)
메뚜기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앞으로 땅이 오염되면 인류의 주요 먹거리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메뚜기 효능을 알아보니까? 어린아이들의 경기에 좋고, 천식에도 좋답니다. 소화도 돕고요. 입맛을 돋웁니다. 석청은 돌 틈 사이에 있는 꿀입니다.
세례요한의 패션은 광야 패션입니다. 약대 털로 코트를 해 입었습니다.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두르고 살았습니다. 요즈음 패션 트렌드는 무엇입니까? 복고풍입니까? 아마 세례요한은 약대 패션 하나로 1년을 버텼을 것 같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에 나실 인처럼 구별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절제를 합니다. 그는 AD26년 방년 30세에 사역을 시작합니다. (눅3:3-14) 당시는 약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영적 암흑기입니다. 이때 세례요한이 나타나 회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메시지는 메마른 땅에 단비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세례요한의 사역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은 그에게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요단강에는 그에게 침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막1:4)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도 생겼습니다.
이 제자들은 35년이 지난 AD61년까지도 남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에베소를 개척할 당시 처음 만난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제자들입니다. 이들에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고 성령이 임합니다. 이들이 12명쯤 되었습니다. 에베소의 역사에는 회심한 이들로부터 시작합니다.
세례요한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세례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오해하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AD29년은 세례요한의 운명을 결정한 해입니다. 당시 헤롯 대왕이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합니다. 세례요한은 이때 왕을 찾아가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소!”하고 책망합니다. (막6:18) 왕의 죄를 지적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당시 왕은 생살여탈권을 가졌습니다. 아마도 세례요한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례요한은 그 대가로 옥에 갇힙니다. (눅3:19-20) 그리고 목 베임을 당하면서 짧은 생애를 마감합니다.
여러분들은 믿는 자들의 정치 참여를 어떻게 보십니까?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목 베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마14:12) 불의 한 시대에 의인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정권 퇴진 운동을 전개할 수도 있었습니다. 붉은 머리띠 두르고 “부도덕한 헤롯 정권 물러가라!” 시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마을로 가서 영적으로 목마른 영혼을 가르쳤습니다.(마14:13) 예수님은 영적인 사역에 전념합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
오늘 본문 요3:22-25절은 시기심 또는 경쟁심이 가득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나옵니다. 세례요한과 함께 그의 제자들의 인기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출현으로 이 인기는 금방 사라졌습니다.그러던 차에 유대인과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정결 예식에 관한 변론이 있었습니다. 다른 번역에는 변론을 말다툼이라 합니다. 사도바울은 '위험하고 쓸데없으며 분노에 찬 논쟁'(딤전 6:4; 딤후 2:23; 딛 3 :9)이라고 합니다.
말꼬리에 또 말꼬리를 잡고 물고 늘어지는 토론입니다. 이런 말꼬리 잡는 회의를 회의(懷疑)가드는 회의(會議)라 합니다.
토론 내용을 상상해 봅니다. 침례 자격, 침례의 의의와 효력, 침례에 관한 바리새파와 엣세네파의 견해 차이, 그리고 예수님의 침례는 과연 허용될 수 있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등등 토론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침례가 의의와 효용이 무엇이건 하나님의 역사는 예수님에게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제자들이 스승에게 알렸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침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까? 아주 짧습니다. “이”입니다.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상황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예수님을 깎아내리려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옛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본성 속에는 경쟁심, 시기심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못 봅니다. 망해도 같이 망하자 주의입니다. 자기들에게 와야 할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로 가자 이들은 스승님이 사태를 좀 해결해 주길 바랐습니다.
세례요한의 겸손
그러나 세례요한은 무엇이라 합니까? 27절을 참고하면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는 예수님을 시기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침례의 기득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역사임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일깨워줍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증언할 자”임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나라에 자신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20명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람은 몇 명 있는지 아십니까? 50명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몇 년 전에도 자칭 하나님 5명 자칭 메시아 27명이었는데 어느새 늘었습니다.
오래전에 선교사 한 분이 한국까지 교제하러 오겠다고 해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은혜로운 간증을 듣게 되었구나 잔뜩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간증이 점점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비몽사몽간에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 같은 분을 만난 얘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갔는데 천사가 자기를 탁 메쳐서 넘어졌다가 일어나 보니” 대충 이런 간증입니다. 처음에는 기도하다가 꿈꿀 수도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꿈 얘기는 30분이 지나도 1시간이 지나도 이어집니다. 끝에 가서는 자신이 요한계시록 11장 나오는 두 증인 중 한 사람이랍니다. 계시록의 두 증인은 입에서 불도 나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땅에 재앙을 내리는 권세도 있습니다. 삼천포로 빠져도 너무 갔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에는 순수하게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추종자들이 늘어나고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쯤 사단이 교만한 마음을 심어 얼굴을 바꾸어 자신이 하나님이요 자신이 재림주로 돌변하기 쉽니다. 성경을 교묘하게 바꾸어 자신의 주장을 포장합니다. 영적인 미혹은 지식이 많다고 머리가 좋다고 이기지 못합니다. 논리적인 이성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제 자체를 하지 말도록 권면합니다. 우리 모두 이단 교리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세례요한은 자칭 그리스도라 해도 의심할 자가 없었습니다. (눅3:15) 그러나 그는 자기 분수를 넘지 않습니다. (고후10:13, 롬12:3) 그는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세례요한의 역할
당시 신랑 친구는 신부를 신랑에게 인계해 주는 역할입니다. 그 과정에 대소사를 처리합니다. 세례요한도 양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사라지는 소리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역할을 행한 기쁨이 충만합니다.
30절 참고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병기 님의 낙화(洛花)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례요한은 떠날 때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흥하게 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세례요한의 뒷모습은 아름답습니다.
복음 역사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는 역사입니다. 양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는 역사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망하면 예수님의 역사는 살아납니다. 이것이 썩는 밀알의 원리입니다. 예수님도 성공하시고 나도 성공하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Win-Win 이 아닙니다. 복음 역사에서 내가 흥하면 예수님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내 자리를 비워 예수님께 내어드려야합니다. 복음 역사는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과 죽음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매일 죽고, 쇠하고, 희생하고, 손해 보고, 고난 가운데 살아야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없다면 우리는 불행한 자들입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앞으로 주실 영광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영광이 어떤지 직접 목격합니다. 그리고 롬8:18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합니다. “영어성경에는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not worth)”고 합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큰지 상상 불가입니다. 빌1:23절에서는 사도바울은 이 영광을 맛보고자 빨리 몸을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믿는 자들은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으로 구원받은 것 자체가 성공한 삶입니다. 우리가 이영광을 바라 보고 오늘도 계속 고난을 넉넉히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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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믿음 순(요한복음5장1-42)
1989년 강우석 감독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란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과한 교육열을 꼬집었습니다. 과한 학업경쟁을 비판했습니다. 당시 성적 스트레스로 유명을 달리한 여중생 유서에 있었던 문장을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영화 제목처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닙니다. 행복은 믿음 순입니다.
1. 경쟁이 치열했던 베데스다 연못은 우리 사회 축소판
베데스다 연못가는 우리 사회 축소판입니다. 과한 경쟁 시스템입니다. 1등만이 고침 받았습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름만 은혜로웠습니다. 연못가에 누운 병자들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병자 중 38년간 한 번도 일등 한 적이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병자 사회의 왕 고참입니다. 38년 병자는 자기보다 늘 앞서 가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합니다. 7절을 참고합니다. 예수님은 낫고 쉽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동문서답을 합니다. 나를 못에 넣어줄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다 하며 주위 사람들의 냉정함과 무정함을 토로합니다. 또 자신 앞에는 항상 앞선 사람이 있었다며 실패와 좌절감을 표현합니다.
한국일보에 났던 기사 하나 소개합니다. 일명 죽마고우 4억 보험사기 살인 사건입니다. 대구 금호 강변에 시신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옵니다. 머리와 이마, 등, 가슴 등 21군데 이상 묵직한 둔기로 맞은 처참한 모습입니다. 범인 검거에 36명의 경찰을 투입하여 용의자를 잡았습니다. 범인은 둘도 없는 죽마고우 K입니다. 이들은 중학교 때부터 절친입니다. 또 소문난 우정을 과시합니다. 이들 때문에 부모 친척들 서로 알고 지냈습니다. 둘은 동업하여 인터넷 쇼핑몰도 열었지만 3개월 만에 망합니다. 그래도 우정은 금이 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친구 K가 생명보험 계약서를 내밉니다. 사망 시 수익자는 서로 상대방입니다 설계사는 보통은 가족이 수혜자인데 친구가 수혜자인 보험은 처음이라 합니다. 상해 시 2억 죽으면 4억 보험입니다.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부모까지 책임지는 기 데이~~”하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K의 덫입니다. K는 일정 직업 없이 여기 저기 빌린 돈이 1억 이상입니다. 인터넷 요금도 내지 못해 독촉에 시달렸습니다. 시달리다 보험사기를 죽마고우를 상대로 계획하고 인면수심의 범행을 합니다.
본문 38년 병자도 비슷한 상상 가능합니다. 어느 날 시각 장애우 S씨가 찾아옵니다. “나는 당신의 발이 되어 줄 테니 당신은 나의 눈이 되어 주시오.”하고 우정을 맺습니다. 물이 동한다는 소식에 S씨가 왕고 병자를 등에 업고 서로 도우며 못가에 도착합니다. 이제 어떡하겠습니까? S는 업고 온 친구를 내 팽개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 앞에 우정은 휴지조각처럼 구겨집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은 오랜 만에 갈릴리 시골에서 예루살렘 도시로 상경합니다. 명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첫 발길을 양문 곁 베데스다 못가로 향합니다. 여기저기 신음 소리 천지입니다. 고약한 냄새도 났습니다. 제자들은 불만이 많았으리라 짐작합니다. 시골에서 상경했는데 코엑스도 가보고, 남산 타워도 가보고, 에버랜드에서 T익스프레스도 타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T익스프레스는 2018년 기준 목재 롤로코스터 중 세계에서 제일 높은 56미터에서 직강 한다고 합니다. 떨어졌다 올라가는데 받는 중력가속도는 4.5G로 우주 비행사가 받는 중력과 거의 같다고 합니다. 저는 돈 받고도 무섭고 어지러워 못 탑니다.
2.경쟁에서 가장 소외된 38년 병자를 찾아주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장 소외 된 곳에 가장 상처 깊은 38년 병자를 만나 고칩니다. 그를 안고 집어 던지는 방식으로 고치지 않았습니다. 말씀만으로 고쳤습니다. 병자는 말씀만 듣고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단번에 걸었습니다.
의학적으로 다리에 깁스하고 2주 만 지나고 풀어도 금방 걷지 못하고 재활 치료를 해야 합니다. 심지어 갓 태어난 송아지도 일어나는데 한참 걸립니다. 본문 병자는 바로~ 단번에~ 즉시~ 걸었습니다.(8절) 처음에 포복하다가 그 다음 엉금엉금 기다가 일어서 비틀거리며 걷다가 점진적으로 완벽하게 걷지 않았습니다. 바로 걸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단번에 구원 받습니다.
3.경쟁에서 승리한 자가 아니라 믿는 자를 구원
본문24,25절을 참고합니다. 1등하는 자가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 입니다. 믿는데 돈과 노력 들어가지 않습니다. 듣는데도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세상 만인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길이 열려있습니다. 공평하게 믿음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구원 받을 때 참행복이 찾아옵니다. 경쟁으로 지친 영혼들이 믿음 안에 행복을 얻습니다. 행복은 성적이 아니라 믿음 순입니다.
세상에 있는 고등 종교는 둘로 나눕니다. 이신론과 범신론입니다. 이신론(理神論, deism)은 세상을 만든 초월적인 신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 신은 세상과는 별개입니다.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시, 기적 등이 없다고 보는 종교관입니다. 알라신을 섬기는 이슬람이 대표적입니다. 반대로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은 초월 신을 인정치 않습니다. 세상 만물이 다 신이라 합니다. 나무도 신, 바위도 신, 동물도 신, 하늘, 태양도 신입니다. 옆 사람도 신입니다. 불교 등이 대표적입니다.
본문2,3절에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낫는다.]는 내용은 괄호가 처져 있습니다. 주석은 “민중에 떠도는 전설이다. 또는 병자의 개인적인 신념이다.”라고 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간헐천입니다. 가끔 땅속에서 물이 올라와 부글부글 끊는 다고 합니다. 물에는 피부병에 좋은 유황성분이 다량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분은 본문 3절처럼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도 고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어쨌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민족인데 그 신앙 속에 미신적인 요소가 들어왔습니다.
기독교는 이신론입니까? 범신론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임을 밝힙니다.
교육의 역사와 철학 책에 도제제도가 나옵니다. 도제는 제자를 말합니다. 이 제도는 직업전수를 위해 1:1제자 훈련을 한 제도입니다. 중세 유럽 상인 수공업자들이 시행한 길드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입니다. 도제로 전수 가능한 직업은 기계, 미용, 요리, 배관, 목공, 벽돌 쌓기 등 다양합니다. 스승은 도제를 5-9년 동안 데리고 있습니다. 그 기간에 장인의 비법을 전수합니다. 학교의 직업 교육제도에 바로 이 도제제도가 녹아들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가업의 비밀을 전승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스승, 아들이 도제가 되는 셈이죠. 예수님도 사생애 기간 아버지로부터 목수로서 대패질을 어떻게 하는지, 다림줄을 어떻게 쓰는지, 가구를 어떴게 짜는지, 못 질은 어떻게 하는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전수 받았습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그 집안의 가업 비법이 생기면서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은밀하고 배타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이런 제도를 염두 하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거 하며 정체성을 밝힙니다. “17절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아들도 일한다. 19절은 아버지께서 행하는 것을 아들도 행한다. 21절은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아들도 살린다. 22절은 아버지로부터 심판의 권세도 위임받으셨다. 26절은 아버지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아들도 생명을 준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요즈음 아빠와 아들관계로 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 아버지를 생각하면 주종관계, 상하관계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성경에서 아들의 개념은 이런 관계가 아니고 아버지와 동일한 능력, 동일한 본성을 가졌다는 뜻입니다(발2:6) 도제제도와같이 아버지와 아들과의 끈끈하고,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관계도 생각하면 됩니다.
27절을 참고합니다.“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본문은 예수님을 인자로 표현합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입니다. 이 조건을 만족하는 분만이 우리를 구원할 자격이 있습니다.
4. 고침 받은 병자를 다시 찾은 예수님
당시는 이기적인 사회였습니다. 이타적이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에는 나 이외에 제3자, 타자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다는 개념이 숨어 있습니다. 그 타자를 사랑하고 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 타자에게 주도권을 맡깁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의 문제 때문입니다. 주도권은 당연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어서 세상의 주도권을 잡으려했습니다. 선악과만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은 주도권을 가지게 될 걸로 착각했죠.(창3:5)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의 문제를 세 가지로 지적합니다. 첫째 본문38절입니다. 말씀이 사람들 마음에 거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42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속에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44절입니다. 사람들이 서로의 영광을 취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고침 받고 난 후 38년 병자는 불치병이 나았는데 적어도 고쳐준 분의 이름은 알아야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스파이처럼 몰래 고쳐주지 않았고, 복면을 쓰고 변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조금만 마음을 쓰면 누군지 알았을 것입니다. 병자는 나중에 고친 분이 예수님이란 걸 알고 어떻게 했습니까? 유대인들에게 가서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병자가 안식일 노동금지법으로 고소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일러바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병자는 나았는데 건전한 삶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죄를 즐길 생각이 많았으리라 짐작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다시 한 번 찾아갑니다. 14절을 참고합니다. 그를 만나고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범하지 말라합니다. 인류에게 병이 찾아온 것은 하나님께 범죄한 이후입니다. 인류에게 가장 시급히 해결 해야하는 문제가 죄문제입니다.
5. 믿음의 역사를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
유대인들은 고통 받던 한 영혼이 살아난 역사는 보지 못합니다. 안식일 노동금지법을 어긴 범법 행위만 봤습니다. 안식일을 어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유대인들은 계명을 준 하나님의 진의는 보지못합니다. 형식적으로 수천가지 율법의 세부 규정만 정하여 지켰습니다. 안식일 노동금지관련 기준도 39가지가 있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20미터 이상은 짐을 옮기지 못했고 침을 뱉어땅이 파이면 밭갈이 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라 합니다. 안식일은 안식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기리고 그분께 영광 돌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형식주의에 사로잡혀살았습니다. 율법을 만들고 법을 지켜내는 자신들을 대견하게 여겼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준수로 영적인 지도자와 선생님 대접을 받으며 스스로 영광을 챙겼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했듯이 이들은 마음에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고 자기 영광만 추구합니다. 마음에 참 진리가 없으면 외적인 형식과 율법주의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타락함으로 죄와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질병과 고통이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갈등과 경쟁과 슬픔이 많습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은 참 안식을 주러 왔습니다. 안식일 날에 병으로 고통 받는 자들이 있으면 안식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안식이 무엇인지 보이기 위해 안식일 날에 병자들을 많이 고칩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싫어하고 죽이려고 하는데도 목숨을 걸고 고칩니다.
6.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본문3절을 보십시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3명만 생각해 보십시오. 물에 뛰어 드는데 경쟁력 있습니까? 하나같이 무력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 받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경제시스템, 교육시스템, 정치시스템, 법률 시스템, 과학기술시스템, 4차 산업 시스템으로도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과학기술의 발달은 우리의 삶을 매우 편리하게는 해줄 수 있을지언정 영혼의 구원은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부작용으로 영혼의 자유를 잃게 만듭니다.스마트 폰이 편리함을 제공하는 면도 많지만 우리를 옭아매는 면도 많습니다. 수요 집회 도중에도 진동이 울리면 궁금해서 열어봐야 하지 않습니까? 회의 도중에도 진동이 울리면 사방에서 다 자기 스마트폰 아닌가 하고 만집니다. 스마트폰 진동으로 어깨 안마도 한답니다. 스마트 폰을 깜박하고 회사에 두고 온 날에는 밤새도록 찜찜합니다. 혹시 시장님이 전화하면 어떡하나 대통령이 전화하면 어떡하나 걱정 합니다. 아이들도 부모님 말은 안 들어도 스마트폰 말에는 즉각 반응합니다.
본문에서 병자가 왜 하필 38년 병자일까요? 35년도 괜찮고 40년도 딱 떨어져 괜찮은데 말입니다. 신2:14절을 보면 38년은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광야를 방황한 기간입니다. 38년이 상징하는 의미는 자신의 행위, 자신의 힘,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구원자이십니다. 결론적으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닙니다. 행복은 믿음 순입니다. 오늘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서 행복한 삶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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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거지가 눈 뜬 사건(요한복음 9:1~7절)
오늘 말씀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입니다. 미국 중서부에는 주기적으로 많은 매미 떼가 나타납니다. 이 매미는 17년간 애벌레로 땅속에 있습니다. 17년을 주기로 나온다고 해서 17년 매미 입니다. 어떻게 이들이 알람 시계없이 17년을 정확히 알고 나오는지는 미스터리입니다. 이들은 일주일간 짝짓기하고 알을 낳고 죽습니다. 수컷 매미 한 마리가 내는 소리는 믹서기 소음에 맞먹는 70∼90dB입니다. 수십억 마리가 단체로 울어대는 소리는 가히 공포영화를 방불케합니다. 주민들에게는 골칫거리입니다. 유서 깊은 음악제도 취소합니다. 이 매미의 이름 앞에 매직(magicicada)란 말이 붙어 매직매미라 합니다.
이 매미가 지상에서 나와 사는 7일의 삶이 우리 인간들의 평생과 비교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17년 매미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모친님들이 주로70-80대인데 주일날 모시고 오다 보면 ‘세월 금방 지나갔다.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영국의 노벨상을 탄 대문호 버나드 쇼(1856~1950)는 묘비명을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버나스 쇼 옛날 사람치고는 오래 살았습니다. 95세를 살았습니다. 그래도 우물쭈물했다는 해학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만큼 짧다는 표현입니다. 우리도 우물쭈물하다 보면 어느새 예수님 앞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이 기회를 주실 때 더욱더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1장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1~3)
오늘 본문2절에서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질문하여 이득을 많이 못봅니다.(눅17:4,막10:37,막14:29,눅13:23) 책망을 듣기 일쑤입니다.가장 질문을 많이 한 사도는 누구일까요? 베드로 입니다. 그만큼 순수했다는 반증입니다. 저는 질문을 잘 못합니다. 또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금방 긴장해서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실력이 다 들통 날 것 같은 염려 때문입니다. 다 아는 척하고 앉아 있습니다. 3년 전에 주일학생에게 말씀을 전한 적이 있는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와서 초보강사로서 진땀을 뺀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6 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에 성전에서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배우는 사람들의 가장 기본자세가 듣고 묻기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부분에서는 질문을 많이 하길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도 질문을 많이 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질문을 많이 드린 구약 선지자느 하박국 선지자죠? 그는 풀리지 않는 시대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하박국1:2-4)
제가 기초 양육반을 섬기고 있는데 컨셉이 Open mind, Open Mouth!입니다. 마음을 열고 입을 열어서 질문도하고 말도 많이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잘하지 않죠? 가끔 누군가 질문을 하면 매우 반갑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부분에서는 질문을 많이 하길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께도 질문을 많이 드리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질문을 많이 드린 구약 선지자가 있죠? 누구입니까? 하박국 선지자입니다. 그는 풀리지 않는 시대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질문을 많이했습니다.(하박국1:2-4)
본문2,3절에서 우리는 소경을 보는 제자들의 시각과 예수님의 시각에 차이를 봅니다. 제자들의 시각은 부정적입니다 예수님의 시각은 긍정적입니다. 제자들은 소경의 불행의 원인을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은 죄가 자신에게 있든 부모에게 있든 불공평하다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부모가 진 죄의 결과가 자식에게 나타났다면 억울합니다. 자신이 죄를 졌다면 태어나기 전에 엄마 뱃속에서 죄를 졌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엄마 뱃속에서 무슨 죄를 짓겠습니까? 기껏해야 엄마 배를 발로 찬 죄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소경의 불행이 자신 죄도, 부모 죄도 아니라 합니다. 예수님은 불행의 원인을 따지기 보다 불행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시각을 가지셨습니다. 3b을 보면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비록 소경이 태어날 때부터 어두움가운데 살아야했지만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있었습니다. 불행 자체가 주는 어두움에 갇서 누구의 죄 탓만 면 안됩니다. 상황 탓, 운명 탓, 부모 탓, 선생님 탓, IQ 탓, 대학 탓, 탓 탓 탓하면서 아무것도 못합니다. 냉정한 시각이지만 소경이면서도 운명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례를 많이 봅니다.
헬렌켈러 예화
헬렌켈러(1180~1968)입니다. 그는 태아나자마자 1년 5개월에 성홍열과 뇌막염에 걸렸습니다. 위와 뇌에서의 급성 출혈이 났습니다. 병의 결과 눈이 멀고, 귀도 멀고, 언어장애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정교사 설리반의 도움으로 20세에 하버드대학에 입학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합니다. 그는 미국의 작가, 교육자이자 사회주의 운동가가 됩니다. 일대기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말을 옮겨봅니다.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불행할 때, 세상에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타인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한 삶은 헛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보이거나 만져질 수 없습니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낍니다. 희망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느끼고, 불가능한 것을 이룹니다. 절대로 고개를 떨구지 마십시오. 고개를 치켜들고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십시오.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지만 고난을 극복한 것으로도 가득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 우연히 던져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반드시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영어성경은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we are God's workmanship)’로 번역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제가 아는 대학 때 한 남자 후배는 외모는 영화배우처럼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가 보기엔 멀쩡한데 턱이 약간 비틀어 졌다는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시험성적은 형편없이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에 턱의 각도와 양쪽팔의 각도와 책을 세워놓은 각도 맞추느라고 온힘을 기울이입니다. 턱-팔-책을 이루는 그만의 트라이앵글이 정확히 맞아야 비로소 공부를 합니다. 문제는 이 트라이앵글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3시간을 공부하면 2시간 반 정도는 앵글 맞추느라고 시간을 다 허비합니다. 이 정도면 병적인 수준입니다. 요즈음은 외모 지상주의 때문에 성형중독인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그래서 이런 광고 문구도 있습니다. “어머니 날 낳으시고 성형외과 원장님 날 만드셨네! 요즈음은 원장님들이 다 비슷하게 만들어서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수능끝난 여학생들에게 무엇을 제일 하고 싶으냐고 물으니 성형수술이랍니다. 수험표 보여주면 특별세일을 해준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쌍꺼풀이 없어도 최고 걸작입니다.(창1:31) 하나님은 우리가 턱이 삐뚤었으면 삐뚤어진 대로 키가 작으면 작은 데로 심히 기뻐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콤플렉스가 운명이되지 않습니다. 콤플렉스는 극복의 대상일 뿐입니다.
제2장 때가 아직 낮이매(9:4)
예수님은 불행의 원인을 찾지 말고 적극적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고 합니까? 4절을 참고해 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또 본문에서 주어는 우리가 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당시 낮이라는 개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죽기 전까지입니다. 우리에게 낮은 육체의 생명이 있을 때까지 입니다. 또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도 됩니다.(살전5:2) 말씀대로 밤이 곧 오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Night is coming.입니다. coming soon입니다. 밤이 곧 오기 전에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합니다.
요즈음 핫 이슈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관한 것입니다. 국정화에 대한 찬반은 강단에서 다루어야할 주제에서 벗어납니다. 단지 나라 전체가 관심을 갖는 걸 보면 역사가 중요한 것은 분명한 사입니다. 그런데 찬반의 관점이 평행선을 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역사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를 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역사관 예를 들면 실증주의사관, 민족사관, 순환사관, 유물사관(마르크스), 영웅주의 사관, 우연사관이 있습니다. 우연사관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에 의해 역사가 진행한다는 사관입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자들은 어떤 역사관을 가져야합니까? 본문에 힌트가 있습니다. 4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 본문에서 말씀 하신 바와 같이 낮이 시작되었으면 반드시 밤이 온다는 사관이 기독교사관입니다. 다른 말로 기독교사관을 일직선적인(Straight Line) 사관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역사를 시작하였으면 하나님이 반드시 끝을 낸다는 사관입니다.
제가 서두에서 17년 매미를 소개해드렸는데요. 기독교사관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에게 주어진 낮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저는 45일만 지나면 50입니다. 저보다 연배가 많은 선배님에게는 주제 넘지만 50이 된다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습니다. 20대, 30대, 40대를 넘어오는 때와는 좀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허무하다, 우울하다. 이런 단어를 갖다 붙일 정도는 아닌데 뭔가 서늘한 바람이 가슴을 쓸고 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니 뭐 해놓은 것도 없고, 앞을 보고 새로운 뭔가를 하자니 또 너무 늦은 것 같았습니다. 이 모든 증세를 합하여 한마디로 싱숭생숭 증세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에 오늘 본문말씀 중 이런 마음에 오늘 본문말씀 중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란 말씀이 다가왔습니다. 밤이 오기 전에 그래도 하나님께서 낮이라는 기회를 주실 때 어떤 모양으로든지 주님의 일을 하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장차 예수님의 심판석(롬14:10, 고후5:10) 앞에 가서“그래도 제가 예수님을 위해서 주의 이름으로 물 한 그릇이라도 섬겼습니다.(마10:42)”는 말할 어떤 꺼리가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밤이 오기 전에 좀 더 힘을 내기를 기도합니다.
제3장 세상의 빛 예수님(9:5~7)
9장5절을 보면 예수님은 소경 앞에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선언합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 이로라 ” 예수님은 자신을 빛으로 소개합니다.(요1:9) 어떻게 빛이 되십니까? 먼저 우리는 소경의 눈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뜨게 했는지를 살펴보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볼까합니다.
6절에서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덕지덕지 바릅니다. 침 성분이 죽은 시신경을 살린다는 의학계의 발표는 없었습니다. 침을 모기 물린데 바르면 가려움이 줄어드는 민간요법이 있는데요. 그것은 침이 알칼리성이라 산성인 벌레의 독을 중화시키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오히려 침 속에는 세균이 많아 상처를 악화 시킬 수 있으니 의사들은 깨끗한 물로 씻으라 합니다. 진흙도 균이 많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침 진흙은 소경의 눈에 오히려 상처를 낼 위험성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해 가지 않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더 이해가지 않는 것은 7절에서 실로암 물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합니다. 지도를 찾아보니 예루살렘성전에서 실로암까지는 5km로 나왔습니다. 10리가 넘는 길을 소경이 우스운 모양을 하고 찾아가기에는 먼 거리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예수님의 이해가지 않는 방법과 명령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습니다. 그러자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소경도 자존심이 있습니다. 요즈음 인권이 많이 신장되어서 범죄자들의 인권까지도 운운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일반상식과도 맞지 않습니다. 만약 소경이 자기의 상식과 자존심을 내세웠다면 실로암으로 발길을 옮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인권위원회에 제소 할 수 도 있었겠죠? 그러나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믿음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발라주신 흙을 물로 떼어 냈습니다. 그랬을 때 그의 평생을 싸고 있던 어두움이 걷혔습니다. 찬란한 태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창세기1장2-3절에 보면 빛이 만들어지기 전의 세상의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혼돈한 세상에 하나님은 최초로 빛을 만듭니다. 그리스어로 무질서한 상태를 카오스라고하고 질서정연한 상태를 코스모스라 합니다. 소경은 눈을 뜸으로 카오스의 세계에서 코스모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그는 처음으로 물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고 사랑스런 부모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소경은 본문 9장25절에 보면 출교 당하는 위험에 처할지라도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을 끝까지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런 그를 예수님은 다시 찾아가셔서 메시아 곧 영혼의 구원자로 그를 만나주십니다.(9:35)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라는 의미는 우리의 영적인 눈을 띄워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모두 영적인 소경입니다. 영적인 소경은 영혼에 환란과 곤고가 끊임없이 있습니다.(롬2:9) 우리 모두는 세상의 빛 예수님을 통해 영적인 눈이 뜨인 자들입니다. 영혼의 그윽한 평화를 맛본 자들 입니다.(눅2:14)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영적인 카오스에서 코스모스의 세계로 옮겨집니다.
베드로후서1:9절은 예수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고 성령의 열매가 없는 자를 또다시 맹인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각성 없이 매너리즘에 빠져 살다보면 영적인 시각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 눈의 시력도 잘 못쓰면 마이너스로 떨어집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시력검사 하는 도중에 손을 들고 질문합니다. 막대기 자체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하냐는 질문입니다. 그림이나 글씨를 가리키는 막대조차 안 보인다면 얼마나 시력이 나쁜 것입니까? 영적인 시각도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제대로 관리 하지 않으면 점점 나빠집니다. 나빠진 시력은 반드시 교정해야합니다. 영적시력교정의 특효약은 성경 말씀입니다. 아무 곳에나 가서 고칠 수 없습니다.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서 고칩니다.
끝으로 우리는 침과 흙을 사용하신 예수님께 배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저 동해바다 1,500m 아래 심층수와 설악산의 대청봉(1,708m)의 진흙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흔히 있는 것을 사용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섬기고자할 때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나의 분량 안에서 가능합니다.(엡4:7)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우리는 중보기도의 침이 있습니다.(골4:2) 예배당 청소의 흙, 설거지의 흙을 이길 수 있습니다. 교회 게시판에는 여러 성도님들의 침과 흙이 발라지기를 기다리는 신청서가 있습니다. 주일학생과 학생회와 청년들과 모친님들을 섬길 참신한 교사를 찾고 있습니다. 또 내년에 봉사할 일꾼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작은 침과 흙들을 합하여 어두움 가운데 있는 영혼들의 영적 눈을 뜨게 하시는데 사용하십니다. 우리 모두 밤이 오기 전까지 주님의 역사를 잘 섬겨서 주님께 잘하였다 충성된 자들로 칭찬받는 성도(눅19:17)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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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향기ㅡ옥합(요12:1-18)
본문에 마리아는 못 말리는 여인입니다. 단벌 신사 예수님의 옷을 버려 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발을 머릿결로 닦으면 또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향유는 인도 수입 산으로 귀족들만 쓸정도로 고가입니다. 본문 여인은 항유를 예수님에게 붓습니다. 지켜 본 제자들은 분개합니다.(마26:8) 또 책망합니다.(막14:5)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보셨죠. 낭비로 보지 않고, 여인의 마음 속 진심을 봅니다. 마리아의 믿음의 행동은 향기가 퍼지듯 만세에 전하도록 하십니다.
요한복음에 항유도유사건을 기록한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26장(6~13절)과 막14장(3~9절)에 도 나옵니다. 4복음서 중 3개는 관점과 기록연대(AD50~60)가 유사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릅니다. 기록년대는 한 참 후인 AD90년대입니다. 저자 요한의 나이 84살입니다. 이때는 다른 11 사도들 대부분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다시 증거 할 상황입니다. 이 필요에 의해 기록한 성경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래서 저자 요한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기록한 대부분의 내용은 생략합니다. 물론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다시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도 반복하여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다시 기록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추가로 증거 할 내용이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마태와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내용이 다른 부분, 요한복음에 추가한 내용만 살펴봅니다.
1. 유월절 엿새 전(요12:1a)
본문1절을 보십시오. 첫째로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구체적인 날을 기록합니다. 이것은 사실성을 더합니다.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하면 모호합니다. 또 유월절을 언급한 것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암시합니다. 향유도유 사건을 예수님은 자신의 장례준비와 연관 지었습니다.
2.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12:1b)
두 번째로 다른 점은 베다니를 소개할 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입니다. 요한복음은 나사로를 부활시킨 동네를 부각시켰습니다.
이 동네는 베다니(Bethany)입니다. 예루살렘 외곽 산기슭에 자리한 작은 마을입니다.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입니다. 시몬이 나병환자였다는 것은 베다니 가까이 당시 사회와 격리되어 살던 환자 촌도 있었습니다. 요즈음은 주변에 인식이 좋지않은 시설이 들어서면 집값 떨어진다고 데모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예배에 참여하면서 순례객들에게 말씀을 전하고자 갈릴리 시골에서 예루살렘까지 올라왔습니다. (요11:55) 144km입니다. 쉬지 않고 걸으면 35시간 걸립니다. 낮에만 걸어서 4일 입니다. 긴 여정이었으면 하루라도 여독을 풀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베다니에 머물렀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 갔다가도 저녁이면 나왔습니다.(막11:19)
베다니에서도 특히 나사로의 집에 자주 머물렀습니다. 이 가정은 베다니에서도 돌봄이 필요했습니다. 나사로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소년가장 노릇을 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특별히 사랑합니다.(요11:3,5) 나사로는 책임은 막중한데 비하여 건강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여동생을 두고 세상을 등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도 찾아가서 썩어 냄새까지났던 그를 마치 잠자는 자를 깨우듯 불러 살려 냈습니다. 기둥 같은 오빠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눈물을 씻겨 주었습니다.(요11:43)
이 일은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고자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공회를 열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너무많아 잡아 죽이지 않으면 로마가 자기 나라를 쳐들어와 땅과 민족을 모두 빼앗아갈 것이라는 결론까지 내립니다.(요11:48)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목숨을 걸고 죽었던 한 영혼을 살린 특별한 장소입니다.
어떤 미국 선교사가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베다니로 지었습니다. 지금은 베다니가 예쁜 딸의 이름으로 까지 쓰일 만큼 아름다운 지명입니다. 유명한 지명입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있는 교회는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 받은 곳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곳입니다.
3.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요12:2)
2절을 보십시오. 세 번째로 언급한 부분은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하였다.” 입니다. 잔치에는 나사로와
시몬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보려고 구름처럼 몰려왔습니다.(요12:9)
본문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교회의 분위기는 어떠해야 합니까? 잔치 집과 같아야 합니다. 마22:2~4“천국은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다”고합니다. 시2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로 시작하는 아주 유명한 시죠? 5절에서“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償을 차려주시고”할 때 상이란 잔치상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19:7절에 보면“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대하여 나옵니다. 잔치 집에서 오만가지 인상을 쓰고 앉아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민폐입니다. 교회에서는 엄숙해야 거룩함을 유지한다고 하면서 입을 꾹 다물고 절대 웃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이 아니라 거북한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마음은 지금 잔치집입니까? 초상집입니까? 늘 잔치 집이길 기도합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 잔치집이 될 수 있습니다.(행13:52)
잔치를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저는 율법주의 입니다.(갈3:12,13) 율법주의는 내 마음에 기준이 많은 것입니다. 이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느라 마음이 시끄럽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잔치집이 아니라 재판정입니다. 은혜라는 단어는 카리스라는 헬라어로 기뻐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 받은 자들로서 항상 기뻐하는 자 이길 기도합니다. 잔치집이길 기도합니다.(살전5:16)
4. 마르다는 일을 하고 (요12:2)
네 번째로 다른 점은 '마르다는 일을 했다.' 입니다. 이 표현은 두 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과 눅10:38-42절입니다. 마르다는 얼마나 일을 많이 했으면 일을 했다고 특별히 표현 했을까요?
눅10:38-42절은 열심히 일하는 마르다와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만 경청하는 마리아가 나옵니다. 우리는 본문을 말씀을 듣는 것만이 선하다는 결론을 내기 쉽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마르다는 억울합니다.
교회 일만이 최고이고 세상 일은 천시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어떤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 한다고 365일 새벽기도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회사에 가서는 매일 졸거나 창고 같은데 숨어서 자거나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출근해 보니 의자가 빠졌습니다. 졸다가 짤렸습니다. 교회에서는 이것을 좋은 간증 사례로 삼았습니다. 과연 좋은 간증일까요?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교회 일한다고 가정을 돌보는 일을 하찮게 여기거나 아예 방치하는 것도 단적인 사례입니다.
유대인들의 구전율법인 미쉬나는 특별한 손님 접대법이 있습니다. 손님은 존경하는 스승이나 선지자를 말합니다. 첫째는 주인이 특별 손님에게 모든 권리를 넘겨 주어야한다. 두 번째로 특별 손님의 말에 청종하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마르다는 접대 율법을 따라 손님 접대를 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동생을 명하여 자기를 도와 주도록 부탁한 것은 주인의 권리를 예수님께 양도하였기 때문입니다.(눅10:40절) 안 그랬으면 마르다는 언니로서 동생에게 직접 부탁했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일행을 좀 더 좋은 음식으로 좀 더 푸짐하게 대접하려는 의욕이 앞섰습니다.
교회에서 한 달에 한번 가정에서 하는 모임이 식사에서 다과로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정책과는 다르게 다과의 범위를 넘어 선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상다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 마르다와 같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자신들을 많은 음식들로 섬길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한 가지 음식만으로도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격려해 주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눅10:41,42절) 그리고 "마리아가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는 말씀은 마르다와 우열을 정한 것이 아니고 마리아가 처한 입장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뜻으로 봅니다.(눅10:42절)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자신들을 많은 음식들로 섬길 필요 없다고 합니다. 한 가지 음식만으로도 족하다고 합니다. 본문은 격려해 주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눅10:41,42절) 그리고 "마리아가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는 말씀은 마르다와 우열을 정한 것이 아니고 마리아가 처한 입장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뜻입니다.(눅10:42절)
일의 가치는 신성합니다. 요한복음 5:17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합니다. 마르다는 소매를 걷고 일하는 여성입니다 형제든 자매든 마르다 같은 분이 없으면 복음역사의 바퀴는 굴러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주와 복음을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겠습니다.
5.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12:3)
3절은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붓는 장면입니다. 본문은 마리아란 구체적인 이름을 밝혔습니다. 부은 향유의 무게를 한근으로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향유를 머리에 부었다고 했는데 본문에는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았다고 합니다. 머리에도 발에도 부었습니다.
나드 향유는 휘발성이 강해 돌로 만든 병에 담아 입구를 봉해 둡니다. 옥합 ajlavbastron(알라바스트론)은 석고로 만든 주둥이가 긴 흰색 단지입니다. 주둥이를 깨트려야만 향수를 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식사하는 문화입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밥상 아래로 기어 들어가는 상상을 하기쉽습니다. 그러나 당시 식사법은 달랐습니다. 로마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식탁을 ㄷ자형으로 배치하고 한 쪽 면은 비워 두어 종들이 음식을 나를 수 있게 합니다. ㄷ자형 식탁은 침대 역할을 합니다. 왼팔은 베게모양에 걸치고 비스듬히 누워 오른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습니다. 이런 자세를 생각하면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었다는 것도 쉽게 이해합니다.(요13:25) 식사 시간은 3시간입니다. 저희 직장에도 이런 식탁문화를 도입하면 어떨까요? 3시간 점심 먹고 2시간 있다가 퇴근입니다.
마리아에게 있어 향유는 가장 소중합니다. 여인에게 머리는 자존심입니다. 사람의 지체 중 가장 냉대 받는 곳이 발 아니겠습니까?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릿결로 씻겼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과 존경의 표현입니다. 본문은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까지 더해서 냄새가 온 방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3천만 원의 헌금을 드리면 흔들고 넘치는 축복을 받아 30억으로 되돌아 올 것을 기대했을까요? Give and Take 식의 신앙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향유를 돈으로 바꾸어 드렸을 것입니다.단순히 자신들의 가정에 대한 호의가 고마워서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랬으면 머릿결로 발까지 씻겨드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과 신앙과 존경을 표현했습니다. 300백 데나리온이면 가난한 노동자 300명의 하루를 먹여 살릴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가난한자 300명이 중요한가? 예수님이 중요한가?를 감히 따질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어 썩어 냄새나는 오빠를 살리는 모습을 봤습니다. 롬4:17절을 보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으로 부르는 분 이라고 소개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창조주로 봤습니다. 기름을 붓는 예식은 왕, 선지자, 제사장을 세울 때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은 나의 왕이요, 구원자임을 행동으로 고백했습니다.
6. 가룟 유다(요12:4,6)
본문4~6절로 넘어갑니다. 끝으로 다른 복음서에는 여인의 행동을 비난한 제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가롯 유다였다고 밝힙니다. 6절에서는 속마음까지 증거합니다. 어떻게 60여년이 지났는데 마리아 속마음까지 기억하여 기록했을까요? 성경은 사람이 쓴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썼습니다.(딤후3:16)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전하고자 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기름 부음을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요1:13)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 어린양으로 대속 죽음을 죽었습니다.(사53장) 부활 승천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은 다시 옵니다. 처음왔을 때는 제자들 마저도 예수님 발 한번 씻겨드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시골의 한 여인으로부터 비공식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정도로 소박했습니다. 겸손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올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주를 뚫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지구를 침공하듯이 옵니다.(살전4:16) 그 때가 되면 내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고민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때 후회하지 말고 마리아와 같이 믿음의 향기를 풍겨서 강릉교회에 오는 구도자들 마다 주님께 기름을 부어드리는 자들로 변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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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롯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의 차이(요13장1~30)
본문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내용과(1-17) 가룟 유다의 배반(18-30)이 나옵니다.
1.유다의 배반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팝니다. 은 30은 120데나리온으로 노동자의 120일치 월급입니다. 은30은 당시 남자 노예 1명의 몸 값입니다. 그래서 율법 보상 규정에 종이 소에 받쳐 죽으면 보상금으로 은30 세겔을 주어야합니다. (출21:32) 당시에는 소가 사람을 많이 받았나 봅니다.
우리 나라 농촌도 소가 재산이었습니다. 경북상주에는 우의총(牛義塚)이라고 의로운 소의 무덤이 있습니다. 호랑이가 소 주인을 물고 가려하자 뿔로 들이받아 주인을 구합니다. 목숨을 건진 주인은 상처가 깊어 20일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주인 잃은 소도 시름시름 앓다가 따라 죽었다는 내용입니다. 의로운 소를 기리기 위해 무덤을 만들어 주었답니다.
소도 의리가 깊은데 제자인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역시 돈에 대한 욕심, 개인의 이익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24:14-16, 막14:10-11, 눅22:3-6에 그렇게 증거합니다.
두 번째는 유다가 예수님에게 느낀 배신감 때문입니다. 자기의 정치적인 욕심을 예수님이 이루어 주지 않자 팔았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왕이되면 한 자리 차지하려는 욕심이 다른 11제자보다 더 컸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만나기전 열심당(熱心黨, Zealot)이라는 비밀단체 회원이었다고 합니다. 시카리당입니다. 시카리는 그리스어로 “단검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이름대로 가슴에 식칼을 숨기고 다녔습니다. 군중들 틈에 있다가 로마에 우호적인 반역자가 있으면 즉결 처분합니다.
유다는 예수님 주위로 군중들이 몰려들면 들수록 언젠가는 세를 결집하여 로마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리라는 기대가 컸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로부터 신앙고백을 받은 후 고난을 받고 죽는다고합니다. 열심당원 입장에서 얼마나 약한 소리입니까?(마16:21)
오늘 본문 말씀도 예수님은 세를 결집하여 로마를 몰아낼 의지가 없음을 압니다. 1절에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한다고 합니다. 3절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간다고 합니다.
당시는 유월절 전날입니다. 이 때는 전국에서 예배 객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듭니다. 200만 명이상입니다. 당시는 강경한 유대인에 비하여 치안을 유지하여야 할 로마군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병력 증강을 로마 황제에게 요청합니다.
「빌라도의 보고서」라는 문서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유다는 이때가 예수님이 능력을 발휘하여 왕이 될 절호의 기회였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만 씻기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로마 군대가 둘러싸면 무력을 사용하여 자기 기대를 채워 줄 줄 알았습니다. 그의 잘못된 판단이 예수님을 배반한 원인이었다는 설입니다. 터무니없는 가설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순순히 체포당합니다. 칼을 휘두른 베드로를 오히려 꾸짖습니다. “칼을 가진 자는 다 칼로 망한다.”(마26:51) 베드로 뿐 아니라 유다에게도 일침을 놓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칼을 버리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유다는 뒤늦은 후회를 해봤자 소용없었습니다. 마27장3~5절은 유다의 최후의 기록입니다. 유다는 은30 세겔을 반납하고자 합니다. 뜻대로 되지 않자 성소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하며 자책하다 목매어 죽습니다.
2.베드로의 배반
이번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어떻게 배반했는지 알아봅니다. 마26:69-75절입니다.(막14:66-72 눅22:54~62, 요18:25~27) 첫 번째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마25:70) 두 번째는 맹세하면서 부인합니다.(마26:72) 마지막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모른다고 합니다.(마26:74) 부인하는 강도가 점점 커집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기막힐 일입니다. 베드로는 수제자요 예수님의 오른 팔입니다. 베드로는 만 천하 사람이 다 알 정도로 얼굴이 알려졌습니다. 외모만 보아도 뱃사람 베드로입니다. 갈릴리 사투리가 그를 숨길 수 없습니다. 100미터 밖에서 거친 억양만 듣고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 아무리 예수님을 모른다고 발뺌해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입니다. 여종도 단번에 베드로가 제자임을 알아봅니다. (마26:69)
베드로는 닭이 울자 예수님을 부인한 일이 마음 아파 통곡합니다. 그 이후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자 물고기 잡으러 낙향합니다. 부활 후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갔을 때는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세번씩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 예수님도 잘 안다고 합니다.
3.예수님의 긍휼은 진실되게 회개한 베드로에게 향함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은 베드로에게로 향합니다. 유다가 아닌 이유는 본문 30절에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나옵니다. 유다는 빛인 예수님을 버리고 밤을 향해갔습니다. 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두운 세상 곧 어두움의 권세를 상징합니다.(눅22:52-53) 밤은 또 타락한 세상을 상징합니다. 유다는 어두움을 더 사랑했습니다.(요3:19) 돈을 그리고 그의 정치적인 야심을 더 사랑합니다.
어두움은 빛인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지 못합니다.(요1:5) 마태복음26장22-25절을 보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판다고 하자 다른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여 나는 아니지요?”하고 되묻습니다. 유다도 되묻습니다. 그런데 호칭이 다릅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합니다. 랍비는 선생님이란 뜻입니다. 유다는 마지막 자리에서까지 예수님을 선생님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마16:16) 사람들 다 떠나도 베드로는 예수님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있다고 하며 떠나지 않았습니다.(요6:68)
베드로 전후서에는 베드로의 말씀 사랑과 예수님 사랑이 어떠한 지 엿볼 수있습니다. (벧전1:24-25, 벧전2:22-25, 벧전3:18-22)
목을 매단 유다를 보면 그는 내 죄는 내가 끝까지 책임지려했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유다의 죄이자 하나님의 품을 떠난 온 인류의 죄입니다. 자칭 왕, 자칭 하나님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베드로 이름 뜻은 반석이고 유다는 하나님 찬양입니다. 유다 예루살렘근처 도시 출신입니다. 베드로는 무시 받던 이방의 갈릴리 출신입니다. 유다 교육 잘 받았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베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4장13절에는 “본래 학문없는 범인이었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복음 역사에 잘난 유다보다 부족할지라도 예수님을 사랑한 베드로를 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돌이켰습니다. 베드로의 훌륭한 점은 예수님이 말씀하면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자기 발을 씻기지 못한다고 우기다가 예수님이 그러면 나와 관계없다고 하자 손과 머리까지 씻겨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면 어부의 상식을 내려놓고 무조건 던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왜 가까이 두었을까요? 배반의 칼을 들이댈 줄 알면서 왜 처음부터 싹을 자르지 않았을까요? 유다가 그렇게 까지 막나갈 줄은 몰랐기 때문일까요?
이질문의 답은 첫째 본문 18절에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한다입니다. 예수님은 즉흥적으로 또 마음 내키는 대로 복음역사를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 속에 섬겼습니다. 유다를 3년 반 동안 끌어안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뜻에 따랐습니다. 같이 있기 싫은 사람하고 3년 반 동안을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가 없는 예수님이 죄있는 세상에 온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은 마귀도 도구로 씁니다. 마귀의 편이었던 유다의 입에서 무슨 증거가 나왔습니까? 마27장3~5절을 보면 유다가 은30세겔을 도로 반납하면서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대적자의 입을 통해 증거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필요하다면 불신자들도 복음역사에 씁니다. 애굽의 바로 왕,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 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섭리는 세상 종말 전까지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최측근들 틈에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끝까지 유다를 몰랐습니다.
오늘날도 가라지는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한국 신흥종교 실태조사 연구집'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자칭 하나님이 20여명 이상, 자칭 메시아가 50여명 이상이 있답니다. 독일의 종교 간행물 Idea는 세계적으로는 1,500명이 있다고 합니다.
유다는 예수님 제자라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고 자고 가르침도 받았습니다. 기적의 현장도 목격합니다. 이런 유다도 넘어졌습니다. 하물며 우리 믿는자는 더욱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4.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
본문1절을 참고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끝까지 사랑은 영어 Endless Love로 끝없는 사랑입니다.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넓은 사랑입니다.
본문21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라고 합니다. 괴롭다는 원어 “타랏소”로 “비통하다. 근심스럽다, 혼란스럽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배반을 미리 알았으면서도 때가 다가 오자 가슴 아파합니다.
본문26절은 예수님은 유다에게 떡 한 조각을 줍니다. 우리 속담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는데 유다가 미워서 떡을 주지는 않았겠죠? 유대인들은 우리 속담과 정반대입니다. 가장 친한 사람에게 떡을 건넵니다. 예수님은 “배신할 사람은 유다 너야!”하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떡만 건넸습니다. 떡을 건네며 끝까지 사랑을 표현합니다. 끝까지 회개할 기회를 줍니다.
끝까지 사랑의 표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깁니다. 발은 식사 전에 종들이 씻겨 주었습니다. 종이 없으면 제자들 혼자 씻거나 서로 씻겨 주면 좋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가 크냐하는 경쟁심으로 서로 팔짱만 끼고 있었습니다. 남자 12명 발 냄새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는 발 냄새 경연대회도 있습니다. 일명 “썩은 운동화 경연대회”입니다. 올해 32회 째인데 13세 소녀가 우승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을 기절시킬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발 냄새도 여기 나갈 수준이었습니다. 식사 도중인데 청국장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종의 역할을 자처 합니다. 유다 차례가 되어 “시간 없다!” 하고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더 정성껏 씻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떠나는 마당에 기억에 남을 만한 유언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처럼 “악법도 법이다.” 하던가. 이순신 장군처럼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하던가. 스피노자처럼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하던가. 최영 장군처럼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던가. 기록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긴 유언은 미국의 프레데리카 쿠크 부인이 9만 5940단어의 유언을 했습니다. 책4권 분량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멋진 유언 안합니다. 묵묵히 발만 씻겼습니다. 제자들도 따라하라 합니다. 발 씻김은 폼 나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의 씻김을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못느끼지만 예수님은 죄의 냄새가 지독함을 압니다.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씻겨줍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기려면 폼 잡고 하지 못합니다. 무릎을 굻어야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염치없어도 베드로처럼 예수님께 매일매일 발을 내미는 자들 되길 기도합니다. 또 겸손히 누군가의 발을 씻겨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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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의 비유ㅡ영적 열매 맺기(요한복음15장 1-8절)
“영어권 음악을 비틀즈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누듯 한국의 대중음악은 조용필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눌 수 있다.”라고 평론가가 조용필 가수를 평합니다. 그는 “KBS, MBC, SBS, M.net 방송사 등 에서 진행되는 가요프로 순위 1위 기록을 함하여 80회 1위를 차지합니다. 노래를 잘하는 비결에 대하여 인터뷰를 했는데 절제에 있답니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 “...청중의 호응에 도취되고, 자기 스스로 노래의 절정에서 흥이 오를 그 순간에도 가수는 자기감정에 빠져들지 말고 그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라고합니다. 노래의 호소력은 감정대로 소리를 지르지 않고 적절하게 절제함에 있습니다. 성경의 강의를 준비할 때도 절제의 미덕 필요합니다. 청중은 인지적 한계입니다. 지식을 늘어놓는다고 다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저도 강의를 준비 할 때 제 마음에 쏙 드는 예화를 찾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크게 감동을 줄 듯 한 에피소드가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용으로 사용하였는데 예화가 튀어서 성경본문을 훼손 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망하라는 말씀을 위해 아리랑을 들려드린 적이 있는데 급하게 녹음을 하다 보니 중간에 목탁소리도 났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 여러분 마음에 아리랑 가락만 남는다면 본문 내용 전달에 실패한 것이죠? 성경강의 준비도 적절한 절제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나에게 감동되는 스토리도 본문 텍스트를 살려주지 못한다면 절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깝더라도 과감히 잘라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떤 장로님이 식사기도를 합니다. 높은 분들이 많이 참석한 자리입니다. 식사기도가 천지창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까지는 좋았습니다.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지나 남북통일로 뻗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세계평화와 인류번영으로까지 갔습니다. 자칫하면 우주선타고 지구 밖을 나 갈 뻔합니다. “에 또~~ 그리고~~ 마지막으로~~~ 끝으로~~~ 이제 최종적으로~~”하면서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식사기도 들은 적있습니다. 정작 음식에 대한 감사는 빠트립니다. 개인기도야 어떻겠습니까? 대표기도는 적절히 절제할 필요 있습니다.
절제는 한자의 마디 절(節), 절제할 제(制) 자를 씁니다. 국어사전에는 “정도에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함.”입니다. 영어로는 Temperance로서 “본성을 자제한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15장 1-8절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포도 알레르기 있으신 분계십니까? 제가 본 적 없습니다. 포도가 그만큼 순한 과일이라고 할 수 있나요? 복숭아 알레르기는 많이 보았습니다. 포도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과 다음으로 좋아하는 과일입니다. 일 년에 10kg 정도 소비합니다. 포도에는 주석산, 사과산, 펙틴이 함유되어 장 활동을 촉진하고 심장질환에 좋습니다.
농부의 역할
본문에서 농부가 하는 일에 주목합니다. 농부는 무엇을 하죠? 쓸모없는 가지를 제거합니다. 제거는 영어로 cut off입니다. 농사용어로는 가지치기, 전정 또는 순지르기라합니다. 가지치기 목적은 튼실한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포도나무는 2년생 가지에서 열매 맺습니다. 포도송이에서 5~7마디를 남겨 두고 가지치기합니다. 포도나무는 성장력이 좋아 넝쿨손이 강하게 뻗어 나갑니다. 그냥두면 양분을 빼앗겨 열매가 작아집니다. 포도 잎이 많으면 당도는 높아져도 포도송이는 작아집니다. 적당한 잎과 줄기를 남겨두고 잘라야 합니다. 포도 한 송이에 12장~15장 잎을 둡니다. 가지치기는 12월에서 2월 하순이나 늦어도 3월 초순에는 마칩니다. 너무 늦으면 진액이 흘러나와 수확이 어렵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우리 인간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포도원을 관리하는 농부고,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고 우리는 그 가지라고 정의합니다. 포도나무 앞에 뭐가 붙죠?참(True)입니다. 거짓 포도나무입니다. 구약 이사야 5장1-4절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어 포도나무로 세웠습니다. 이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를 이루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떤 포도만 맺었습니까? 들 포도입니다. 들 포도는 거칠고 상품가치가 없습다.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은 범죄하고 타락하였습니다. 명품 포도열매를 하나님이 바랐지만 가치 없고 하찮은 열매만 맺었습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
하나님은 예수님을 참포도 나무로 보냅니다. 예수님을 믿은 자들은 예수님께 접붙어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명품포도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우리는 농부이신 하나님의 관리 대상입니다. 예수님께 접붙여진 인생은 축복입니다. 아니면 쓸모없는 가지로 지옥을 밝히는 화목재로 쓰입니다.(요15:6)
포도원 주인이 수천 평 포도밭을 관상용으로 가꾸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이 주는 양분을 잘 받아 최고 명품포도 열매 맺기를 원합니다. 열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갈라디아서5:22-23절에 보면 우리가 내면적으로 맺어야할 9가지 열매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 마지막이 절제입니다.
열매 맺기 위한 방법 운동선수의 비유
두 번째 함께 읽어볼 말씀은 고린도전서 9장24~27절까지입니다. 본문은 운동선수의 비유입니다. 일등하려면 절제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경쟁은 질색이다. 그냥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겠다. 그래서 걷다가 앉아서 쉬다가 물도 먹고 세월아 네월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경주는 참가상은 없습니다. 다 일등 해야 합니다. 스케이트로 말하면 쇼트트랙이 아니고 기록경기입니다. 우리는 각자 은사에 따라 하나님이 정해 놓은 트랙이 있습니다. 그 트랙을 뜁니다. 세월아 네월아 하면 하나님이 등을 떠밀어서라도 달리게 합니다.(갈4:19) 등 떠밀릴 바에야 알아서 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영적인 경주에서는 우리 성도들끼리는 경쟁자가 아닙니다. 함께 손잡고 완주해야할 동료입니다. 필요할 때는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완주했을 때 하나님은 영원히 썩지 않을 상을 줍니다. 하늘의 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딤후4:8, 롬8:18)
열매 맺기 위한 방법: 절제
세 번째 말씀 찾아봅니다. 고린도전서 13장4~7절입니다.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 열매가 사랑인데요. 본문은 사랑의 정의에 대하여 열거합니다. 그런데 8번이나 “아니하며~아니하며~~”란 말씀이 반복됩니다. 할 수 있는데 아니한다는 것이죠? 본문에 참고, 온유하고, 견딘다는 것도 모두 절제의 미덕(美德)이 깔려있습니다. 본성대로 다하는 것, 화나는 데로 다 화내는 것은 사랑이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절제해야겠습니까?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가 “건강한 목회를 꿈꾸는 목회자 멘토링 컨퍼런스”에서 우리나라 3대 종교 가운데 개신교의 신뢰도가 가장 낮다고 지적합니다. -우리나라 문화에 영향을 미친 3대종교는 유교, 불교, 기독교- 그 책임은 교인들에게도 있고 더 큰책임은 목회자들에게 있다는 취지의 강연했습니다. 이 강연의 제목은 “돈·명예·권력·성욕을 절제할 수 없는 사람은 목회하지 마라.” 입니다. 제목이 아주 직선적이죠?
무엇을 절제할 것인가? 에 대한 주제는 이분의 강연 제목에서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돈입니다. 돈에 대한 권면의 말씀은 우리 주일학생들까지도 압니다. 제일 유명한 말씀은 딤전 6:10절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예수님도 마태13:22절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말합니다. 돈 자체는 선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 첫 자리에 두고 추구하는 것 곧 돈을 사랑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돈이라는 가지가 무성하게 뻗어나가는 것을 그냥 두면 안 됩니다. 포도나무의 비유처럼 잘라야(cut off) 합니다.
제논이라는 철학자의 제자 중 돈에 대한 가지를 잘 자르지 못하는 허영심이 많은 자가 있었다합니다. 제논은 제자가 돈 쓰는 것을 절제할 것을 권하자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투로 반박했다 합니다. 제자에게 스승은“그럼 소금이 많은 사람이 소금이 많다고 그것을 요리하는 데 마구 사용해서 되겠느냐!”고 충고했습니다.
권력욕의 절제
두 번째는 명예, 권력욕입니다. ‘국회의원 전원이 하나같이 노리는 것은 대통령이 되려는 것이다. ’라고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 누가 국무총리가 되는가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권력, 명예욕 뒤에는 교만한 마음이 자리합니다. 우리 인류를 범죄 하도록 만든 것이 교만입니다. 요한복음 15장1절에서 인간의 존재의미는 포도나무 가지입니다. 인간은 줄기도 아니고 더군다나 농부는 아닙니다. 그런데 교만하여 농부가 되려한 것이 문제입니다.(창3:5) 농부가 되어서 내 포도원 내가 가꾸겠다고 한 것이 인류불행의 원입니다. 교만한 마음도 우리가 일생 경계해야 할 죄입니다.(잠언16:18, 잠언18:12)
성도덕
세 번째는 성도덕입니다. 성도덕이 무너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간통죄도 없어 졌습니다. 하나님이 지적하는 죄인 동성애 부부를 인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롬1:27)
제가 해외여행을 갔는데 이런 나라를 갔다고 한 번 상상해 봅니다. 어떤 나라에 갔더니 뽀얀 닭백숙 요리 하나를 놓고 온 국민이 침을 흘리고 보고 있었습니다. 보는 수준이 아니라 탐닉하는 수준입니다 이 닭백숙은 TV에서도 나오고, 광고에서도 나오고, 술집에서도 나오고, 인터넷에도 도배를 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첫째는 이 나라 국민이 상당히 굶주림에 지친나라가 아닐까입니다. 지친정도가 아니라 기아에 허덕인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정말 이들이 가나한지를 알아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들 잘 먹고 잘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닭백숙 요리에 그렇게 홀려 있을까요? 뭔가 이상한 것이죠? 그것은 먹는 것에 대한 욕구가 뒤틀려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식욕이 정상이 아닌 것이죠?
이 상상을 성도덕에 적용해봅니다. 성은 생명을 낳고 키우며 또한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善 good)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시대는 이 선(線, line)을 넘었습니다. TV, 인터넷, 광고 등 어디서나 욕망을 부추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닭백숙에 침을 흘리듯 성적인 욕구가 뒤틀린 시대입니다.-C.S 루이스 성도덕 인용- 순결이란 단어는 조선시대 열려 문에나 붙어있는 문구로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싸워야합니다. 운동선수가 트랙을 벗어나면 실격된다는 생각으로 선(線)을 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는 선을 넘지 않도록 경계 울타리를 쳐 줘야합니다.
이외에도 우리가 절제해야할 것들이 많이 있죠? 혀를 제어하라는 말씀이 있죠?(벧전3:10) 야고보서1장26절은 혀를 재갈 물리라고 권면합니다. 그 외에 게임, TV, 영화, 음악, 등등 우리가 자르고(포도나무 비유), 선을 넘지 않고(운동선수의 비유), 하지 말아야 할 것(사랑장 말씀)들이 많습니다.
절제는 우리 의지로는 부족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합니다. 딤후1:7절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절제하는 마음을 주셨다 합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절제하여 명품 포도송이를 맺는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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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 성령님의 역할(요한복음16:1-14)
오늘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성령님은 어떤 분이며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는지 알려줍니다.
본문의 상황
본문의 상황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기 직전입니다. 1차 말씀 대상자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의 기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를 몰아내고 메시아 왕국을 세울 줄 기대했습니다. 일부 제자들은 어머니 살로메를 앞세워 인사 청탁도 했습니다.(마20:20)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대와 반대로 당신을 보내신 분에게 간다하십니다. 그러자 마음에 근심이 들어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지 묻기도 두려워합니다.(16:5)
제자들의 근심의 이유
제자들의 근심을 예수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구체적으로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들의 앞날은 장밋빛 미래가 아닙니다. 실족(失足)할 지경까지 가고(16:1) 또 출교(出教)도 당합니다.(16:2) 당시 출교는 회당에 나오지 못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출교는 사람과의 교류도 안 될 뿐 아니라 경제활동까지 단절합니다. 누구와 함께 음식을 먹는 일도 금합니다.
저는 혈압이 높습니다. 현미채식을 시작했습니다. 모든 단것, 쌀밥, 밀가루 음식, 고기, 생선 다 빼고 현미만 먹습니다. 당연히 직장에서 점심도 현미 도시락으로 따로먹습니다. 일주일 했는데 효과는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 생활에서 왕따 당할 위기입니다. 30일 더해보고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마 제가 당시출교 당했다면 현미 구입을 못하여 혈압조절 불가능했겠죠?
또 당시 출교당한 사람 2미터 이내는 접근 금지입니다. 전염병자도 아닌데 엄격합니다. 심지어 출교당한 사람이 죽으면 애곡도 금지합니다. 출교자의 시체에 돌을 던지도록 규정화했습니다. 제자들은 목숨까지도 빼앗긴다 합니다.(16:2)
이들의 명분이 하나님을 위함입니다.(16:2) 하나님을 위하는 데 무슨 일 인들 못하겠습니까? 영적으로 무지하면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원수 노릇합니다. 사도 바울도 회심 전에는 같은 명분으로 외국 원정까지 가 그리스도인을 색출합니다.
1990년대 소련의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미소 냉전체제가 무너졌습니다. 이데올로기(ideology)의 대립시대가 막을 내지라 종교분쟁이 커집니다. 신을 위하는 명분으로 하는 전쟁은 무정무자비합니다. 시리아 내전도 종교분쟁이 원인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이 핍박을 정다화 함으로 더 무지막지합니다.
미래를 알려주는 예수님의 의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미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일러주심은 예방주사 차원입니다. 제자들이 고난을 잘 견딜 수 있도록 함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면 진리가 자유를 준다 합니다. 제자들의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과 영광으로 가는 과정임을 알 때 기꺼이 고난을 감당할 힘이 생깁니다. 예수님도 장차의 영광을 보며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견디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난 받도록 내버려 둔 채 무책임하게 떠나지 않습니다. 플랜B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십니다.(16:7) 성령님(the Spirit of God, Holy Ghost) 때문에 예수님은 빨리 제자들을 떠나는 편이 낫다합니다.(16:7)
성령님과 역할
성령님은 어떤 분이입니까? 7절을 참고합니다.“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성령님은 보혜사(保惠師)입니다. 보혜사는 절 이름이 아닙니다. 보혜사의 사자는 스승사입니다. “보호하고 은혜를 베푸는 스승”입니다. 영어로는 “the Counselor, the Comforter”입니다. 조언하고 위로하는 분입니다. 보혜사가 할 일은 책망입니다. 책망 뜻은 “깨닫게 한다.”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는다.”입니다. 무엇에 대한 책망인가 하면 8절에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함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어떤 문장이 옳은 문장인지 보려면 문장의 주어와 술어가 내용과 형식면에서 일치하는지 봅니다. 주부가 있는데 술부가 없다면 우문입니다. 본문9-10절은 이런 우문 구조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본문은 십자가 사역의 영적의미를 잘 증거합니다. 9절부터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참고하면, 성령님은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사람들은 불신앙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죄의 개념부터가 잘못되었음을 일깨워 줍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감을 말합니다. 10절은 “의에 대하여라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함이요”입니다. 이 문장은 선문답같습니다. 중간에 많은 말씀이 생략된 듯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의를 내세우며 삽니다. 제 잘난 맛에 삽니다. 자기 의에 흠집이 나면 화내고 상대를 공격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 의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불의하다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나님께로 가심으로 전세가 역전됩니다. 사람들이 불의하고 예수님이 의로움이 증면된 셈입니다. 본문의 뜻은 세상에 의인은 없고 의로운 분은 예수님밖에 없으며 의인이 되는 길은 예수님을 믿음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심판에 대하여
11절을 보면 “심판에 대하여라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의하다 여겨 심판하고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사단도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오히려 세상을 영적으로 지배한 임금, 곧 사단을 심판한 셈입니다. 세상은 복잡한 것 같지만 사단의 지배 아래 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지배 아래 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사단이 인간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무기는 죄와 사망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창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만드시겠다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현재 사단은 이미 심판 받아 머리상한 뱀과 같은 형국임을 성령께서는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우리는 죄와 심판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진리 가운데로
13절을 참고하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진리는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영원성(永遠性)과 보편성(普遍性)입니다. 진리가 10년 후에 강산이 변하듯 변한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또 진리는 대한민국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외국 영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님께서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십니까?
인생의 3가지 본질
우리 인생은 세 가지 본질적인 질문에 답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입니다. 뿌리에 관한 질문이죠? 두 번째는 왜 사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존재(存在)의 이유에 관함입니다. 세 번째는 죽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가입니다. 즉 내세(來世)에 관한 물음입니다. 우리 중 아직도 이 세 가지 문제로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는 분이 계십니까? 인간은 우주의 먼지 하나만도 못해, 그저 던져진 존재야 하며 비관하고 술병을 잡고 사는 분 계십니까? 아니면 우리는 진화의 산물임을 믿으며 죽으면 다 끝이야 그러기에 최대한 즐기면서 살자! 젊어서 놀아야지 늙어지면 못노나니 하며 사는 분 안계시죠?
우리는 이미 성령님의 인도로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을 알고 믿은자입니다.(요14:6) 우리는 하나님이 심히 기뻐한 피조물이고 땅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 천국으로 가는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다.(창1:31, 롬1:5, 벧전1:3)
오스카 쿨만(O, Cullmann)이란 신학자는 예수님의 때에 대하여 이미와 아직의 긴장관계로 설명합니다. 이미(already)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 성령님께서는 아직(yet)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하여 계시해 줍니다. 13절을 보면 그 일은 장래의 일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장래일은 무엇입니까? 부활의 소망(고전15:51)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계21:1)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에 대한 소망입니다.(살전4:16)
성령님은 먼 미래뿐 아니라 개인적인 장래 일도 알려줍니다. 장래의 직업이나 배우자를 놓고 기도할 때 마음에 확신을 주는 방식입니다. 잠언16:9절은 하나님이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14절 성령님께서 하실 일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연극 무대에서 단독 조명을 받고 있는 연기자를 상상해 봅시다. 조명이 성령님이고 무대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드러내고 높입니다. 예수님이 가시고 성령님 오심은 은혜입니다. 성령님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역사합니다. 요엘 2:28절에서는 성령님을 만민에게 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은 이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는 방식은 행13:2, 눅2:26은 계시의 영으로 나옵니다. 요14:16은 교회를 위로합니다.. 딤전4:1절은 미래에 대하여 경고도 합니다. 눅12:12절은 위정자들이나 권세자들 앞에 할말을 생각 나게 합니다. 엡4:30절은 성령님은 근심도 합니다.
성령님에 대한 오해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성령님을 뭔가 신비로운 기운, 신비로운 에너지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기운을 받으러 깊은 산에 들어가 소나무가 뿌리 채 뽑힐 때까지 나무를 끌어안고 무속신앙인처럼 받아야하지 않는가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라는 유령 캐스피 같은 신비한 기운을 받을 목적이라면 방향이 잘못된 듯합니다. 어떤 분은 성령 받으라고 뒤통수를 때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항들은 성경말씀이 조명해주시는 바는 아닙니다. 성령님은 한 인격체로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자아를 잃게 만들어 로봇처럼 우리를 조정하지 않습니다. 성령 받으러 애매한 소나무 뿌리 뽑을 필요 없습니다. 성령을 준다는 유능한 사람을 찾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눈 코 뜰 새 없이 살다보면 내가 과연 성령님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헛갈릴 때가 많습니다. 성령 받은 증명서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없습니다. 성령님은 지정의를 가진 인격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며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령님은 자아를 잃게 만들어 로봇처럼 우리를 조정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에 대한 증거
우리안 성령님 계시다는 증거 2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린도 전서 12장3b절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롬8:15절 말씀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됨 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결론을 낼 시간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제자들이 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순교의 길을 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배트맨, 슈퍼맨 같은 초능력자들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허물도 많고 학벌이 그렇게 높지도 않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행7:55) 또 사도행전에서는 수천 명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설교도 했습니다.(행4:4)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성령님께서 이들을 사로잡으셨기 때문입니다.(엡5:18, 눅4:1 행13:52) 우리도 모두가 좀 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서 늘 성령 충만한 삶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갈5:18)을 살 수 있기를 기도드리며 저의 메시지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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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요17:1-26)
복음서에 예수님이 기도한 사실은 밤이 새도록(눅6:12) 새벽미명(막1:35) 따로 한적한 곳에 서(눅5:15) 기도했습니다. 무엇을 기도했는지는 기록이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내용을 알려줍니다.
요한복음 17장1절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기도는데 눈을 떴습니다. 눈을 떴냐 감았냐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겠죠? 눈을 감는 것은 하나님께만 마음을 집중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응시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눅22:41) 하늘을 응시한 것은 나중에 얻을 영광을 바라보며 기도하기 위함이고(벧전1:11) 땅을 응시한 것은 땅에서 받을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기 위함이라고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땅에서 받을 십자가의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본문 1절에서 “때가 이르렀다는 것”에 때는 십자가의 길을 갈 때 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때는 늘 준비되어 있지만 자신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몇 번에 걸쳐 말씀합니다.(요7:6, 요2:4) 요7:8절은 아직 때가 차지 못했다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때에도 어머니 마리아에게 때가 이르지 못했다고 하면서 청을 거절합니다.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려 촌각을 다툴 때도 예수님은 즉시 가지 않고 이틀을 더 기다렸다가 죽은 후에 갑니다.(요11:6) 사람들이 원하는 때는 늘 시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는 때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구약에 노아의 홍수 사건을 보면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짓고 하나님이 명령한대로 동물들을 암수 쌍쌍이 방주 안에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문을 닫습니다.(창7:9 7:16) 문을 닫자마자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 질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홍수는 7일 후에 시작합니다.(창7:10) 이 7일 168시간이 노아에게는 120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습니다.
성령의 열매중 하나가 오래 참음입니다.(갈5:22) 인내는 그리스도인의 인격 중 중요한 요소입니다.(벧후1:6, 야고보1:4, 히10:36)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1-5절까지 8번이나 반복하는 단어가 아버지입니다. 17장 전체에는 무려 38번이나 반복합니다. 아버지 호칭에 담긴 어감은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사랑스럽게 부르는 “아빠!”뉘앙스 입니다. 저희 아들은 저를 부를 때 아빠 앞에 성을 붙여서 “임아빠!”라고 부릅니다. 아빠란 호칭은하나님과 주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하나님 아버지를 찾고 있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수시로 하나님 아빠를 찾는 성도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계속 1절b절을 보면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합니다. 이 말씀은 4절과5절을 연결하는 말씀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4절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
본문 4절에서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일”은 십자가를 통해 만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본문에 영화롭게 하다는 영어로 “Glorify”입니다. 다른 번역은 “영광스럽게 하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로 여겼습니다. 만민 구원은 예수님이 이땅에 온 목적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쉬운 길, 꽃길이 아닙니다. 고난과 죽음의 길입니다. 어두움 속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흑암 속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마4:16) 예수님은 이 길을 영광의 길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에 누렸던 영광을 회복 시켜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유는 본문22절과 24절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영광을 안겨 주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이루어져야만 우리도 그와 연합하여 영광을 누립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이 누렸던 모든 영광이 약속으로 주어집니다. 이 영광이 얼마나 큰지 사도 바울은 롬8:18절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영광을 바라본 스데반은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구약의 선지자들은 톱으로 켜는 고통도, 용광로에 들어가는 고통도 견뎠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눈이 이 영광을 보지 못한다면 가난한 신자입니다. 예수님 믿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고 형통하기만을 바라는 것이 신앙의 전부라면 곤란합니다. 축구선수가 편안하게 벤치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만 보고 있기만 한다면 불행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부상의 위험도 없고 땀 흘리지도 않아도 되고 시원한 음료수도 마음껏 마시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모든 축구선수는 그걸 원하지는 않습니다. 단 1분 1초라도 나가서 뛰려고 서로 경쟁을 합니다. 축구선수는 필드에 나가서 뛰는 것이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에 있어서는 벤치 전담 맨 같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요한복음17장2,3절 영생을 주심
본문2,3절 참고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 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곧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과 권세에 대하여 주목해보겠습니다. 먼저는 영생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에 대하여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죠? 요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에서는 영생을 멸망과 대조하여 말씀합니다. 요3:16절은 영생을 어떻게 얻느냐에 대한 설명이지 영생이 무엇이냐에 대한 설명은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요3:16절을 모르면 간첩입니다. 너무나 유명하고 복음송도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신앙 출발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출발만 한 것에 머물러 있다는데 있습니다. 어떤 분이 오늘날 성장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신앙의 문제점을 우리는 모두 “요한복음 학교의 3학년 16반”을 평생 다니고 있는 형국이라고 진단합니다. 신앙출발한 지 1년 후에도 “저는 3학년16반의 김 아무개입니다. 출발한지 10년 후에도 요한복음학교 3학년 16반 이 아무개 입니다.”라고 소개합니다. 스릴러 영화 같이 한을 품고 죽은 원혼이 계속 3학년16반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3학년16반은 예수님을 믿어 세례받고 죽었다 깨어나면 천국에서 깨어날 것을 확신하고 있는 상태에만 머물러 있습합니다. 이 신앙을 “불신 지옥! 예수 천당!” 신앙이라고도 합니다. 이 구호 하나로 평생을 삽니다. 3학년16반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1. 영생
영생은 시간적으로 영원히 존속한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영생에는 완전하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꽃에 비유하면 꽃이 만개해서 아름다움이 극치에 달함과 같습니다. 작품으로 말하면 완벽한 작품이어서 더 이상 덧붙이거나 다듬거나 손볼 필요가 없습니다.
롬6:22-23절“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니라”은 거룩함에 이르는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영생을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 제시합니다.
또 본문 은 영생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합니다. 안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만 아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연예인을 알듯이 연예인의 키, 몸무게, 혈액형, 조각 같은 외모만을 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안다는 것은 성격, 속성까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같이 살아가며 아는 것입니다. 하나가됨을 말합니다. 부부관계에 비유하면 둘이 한 몸이되었다는 표현처럼 완전한 연합입니다.
하나 되는 것은 본문 17:21절에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한 통속으로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인격대 인격, 존재와 존재, 속성이 서로 한통속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영생의 의미입니다.
본문 23절과 25,26절에서 “안다”는 말씀이 6번 반복합니다. 신앙은 얼마나 아느냐의 싸움입니다.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2. 권세
2b절을 보면 영생을 주기 위하여 예수님이 받은 것이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권세는 권위, 세력, 힘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권위를 싫어합니다. 권위하면 독재자, 폭군의 이미지를 연상합니다.
택시운전사란 영화가 천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80년입니다. 당시 젊은 세대는 위의 권세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당시 젊은이의 특징이 반항이었습니다.청바지와 통기타 문화가 저항 정신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권세가 정당하지 못한 권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권세가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지만 군림하지 않아 누구나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많이 데려 오자 제자들이 통제를 해야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말리지 말라고 합니다.(눅18:15-16, 막10:16, 막9:36) 예수님의 권세는 겸손함에서 나오는 권세였습니다.
권위의 반대말을 자유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권위에 대한 나쁜 경험을 많습니다. 학교, 가정, 국가 또는 군대에서 권위에 억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권위하면 무조건 배척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교회 내에서 말씀의 권위에 순종해야하는 우리들에게 잘못 작용하면 신앙 성장에 방해 요소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지속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야합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늘 제자리 인 것 같아 절망합니다. 신앙이 거꾸로 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떳떳한 얼굴보다는 이런 통회하는 심정을 받습니다.(시51:17) 우리 모두가 만민을 다스리는 예수님의 권세 아래서 날로 신앙 인격이 성장하길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간절한 기도와 같이 하나 되어 만민을 구원하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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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에게 선한 증거를 하신 예수님(요18:28-38)
빌라도는 어떤 사람인가?
빌라도와 예수님에 관한 내용 본문은 요한복음 18장 28-38절입니다. 빌라도에 대한 기록이 사료에 없습니다. 역사에 남을만한 중요한 인물은 아닙니다. 빌라도는 유대 5번째 총독입니다. AD26~36년까지 10년간 총독이었습니다. 눅13:1절을 보면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의 피를 저희의 재물에 섞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본디오 빌라도란 이름의 뜻은 ‘창을 가진자.’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가 유대인을 많이 죽였습니다. 수천 명입니다. 빌라도는 AD36년경 로마로 송환 명령이 떨어집니다. 송환되는 도중에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도 빌라도는 저주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딤전6:1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셨다.” 오늘 본문에서 어떤 선한 증거를 하셨는지 알아보고 원수에게 향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재판
28절을 참고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유대인들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서 빌라도 총독의 관저로 갔습니다. 새벽3-6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밤새도록 예수님을 재판했고 새벽에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 강합니다. 이방인은 부정한 동물인 개와 돼지 취급합니다. 빌라도 이방인입니다. 본문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는 유대인은 이방인 마당도 더럽다고 밟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혹시 황금 변을 보는 민족 아닌가하는 생각 듭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이렇게 하라고 그들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본문 29절은 빌라도가 고발하는 이유를 묻 30절은 유대인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이 행악자여서 무조건 죽이라합니다. 행악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나쁜 사람이라는 다분히 감정 썩인 표현입니다. 미운마음으로 누군가를 보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밉습니다.
31절에서 유대인들은 법 집행 권이 없습니다. 로마 식민지하에 있었으니까 법 집행 권은 빌라도 총독에게 있습니다. 32절은 모든 상황이 우연이 아니고 이미 예언된 말씀의 성취라 증거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빌라도의 질문
33절부터는 빌라도가 예수님께 궁금한 걸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이 왕이 되어 로마에 대항하겠느냐 안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정치적인 쿠테다의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34절은 예수님께서 이 질문이 개인적인 질문인가 아니면 주변사람을 대신하여 묻는가를 되 묻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35)
예수님의 대답: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런 빌라도에게 증거 합니다. 36절을 참고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내 나라는 예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는 싸워이김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나 예수님 나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보이는 세상 나라가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나라가 있다. 그 보이지 않는 나라가 더 중요하다.’고 하며 빌라도의 영적인 눈이 떠지도록 돕습니다. 히브리서 11장3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나라가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영적인 나라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냐?
37절에서 빌라도는 갑자기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왕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본인은 진리를 증거하러 이 땅에 왔다 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편에 선 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다고 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는 빌라도
과연 빌라도는 진리의 편에 선 자 일까요? 38절을 보십시오. 그는 “진리가 무엇이냐?(What is truth?)”하고 나가 버립니다. 한 마디로 진리가 밥 먹여 주냐? 진리에는 관심 없다는 뉘앙스입니다. 빌라도는 진리에 귀를 닫았습니다.안타깝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라이브 음성을 직접 듣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그 음성을 거부했습니다.
빌라도를 대하는 예수님의 마음
이상 본문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몇 가지 교훈을 나누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빌라도는 사실 원수 같은 사람입니다. 요19장을 보면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가시면류관 씌우고, 폭력을 행사하며 조롱하는 것을 지시하기도 하고 묵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파하신대로 빌라도에게 끝까지 선한 증거를 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제2의 빌라도가 많습니다. “진리가 뭐냐?” “먹는 것이냐?” “관심 없다!”하고 빌라도하고 똑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가 이런 반응을 보여도 계속 초청하기를 기도합니다. 올해는 이런 빌라도들이 교회에 와 회개하고 진리를 영접하는 역사가 많기를 기도합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
두 번째는 예수님이 왕입니다. 빌라도 관저가 헤롯 왕궁이라는 주석도 있습니다. 빌라도 총독의 복장 위엄 있고 화려했습니다. 반대로 그 앞에 선 예수님은 상대적으로 너무 초라했습니다. 얼굴은 군사들에게 조롱당하여 부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겉은 왕 같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빌라도 앞에서 두 번씩이나 자신이 진정한 왕임을 선언했습니다. 이 상황의 겉모습은 마치 거지가 청와대서 자신이 대통령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두 번씩이나 자신이 왕임을 선언합니다. 이사야9:6절은 여수님을 평강의 왕이라합니다. 스가랴9:9은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 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입니다. 빌2:7절은 왕이지만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로 오셨다합니다. 요13:4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섬기는 종의 모습을 잘 보이는 장면입니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깁니다.
종의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
종의 모습, 종의 자세, 우리 성도들도 배워야할 부분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롬1:1)으로 고백하고 일생 종의 수고와 고난을 감당했습니다.
거지를 품은 제임스 브라운 목사
미국에서 제2차 영적 대 각성운동 때 훌륭한 설교자였던 제임스 브라운 목사의 일화입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전 거리를 떠돌던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알코올 의존도가 높아서 젊은 나이에 똥오줌도 못 가릴 정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절망스러워 자살을 결심하고 장소를 물색하던 중 어떤 교회 앞을 지나갑니다. 그는 성도들이 모여서 찬송하는 모습을 보고 쉬었다가 자살하러 가려고 교회 제일 뒷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있었습니다. 거리의 부랑자로 살았으니까 술 냄새에 몸에 악취가 얼마나 컸던지 금방 교회 전체에 퍼졌습니다. 어떤 한 남성 성도가 그의 옆에 앉아서 손을 잡고 예배가 끝날 때까지 같이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들어줍니다. 설교를 막 끝낸 목사님도 강단을 내려와 따뜻하게 안아 줍니다. 이것을 계기로 회심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이때 사람들이 자기 손을 잡아주지 않고 냄세 난다고 피했으면 교회를 뛰쳐나가 자살했을 것이라고 회상합니다.
교회는 예수님과 같이 섬기는 종의 모습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그럴 때 예화와 같이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유대인들의 잘못된 시각
세 번째 저는 유대인들의 시각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들은 율법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온통 잡아 죽일 일밖에 없습니다. 인류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후에는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따집니다. 선과 악을 따집니다. 그래서 물고 뜯고 찢고 죽고 죽이는 역사의 반복입니다. 우리 일상생활도 온통 그 싸움입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세계 속에서는 생명이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법은 용서와 사랑의 법밖에 없습니다. 롬8:2절은 이 법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 합니다. 그 반대는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의 생명의 성령의 법 때문에 살아난 자들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 대했다면 벌써 지옥 불 못을 환하게 밝힐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의 고소와 빌라도의 심문
본문 28-32절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하는 내용이구요. 33-37절까지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내용입니다. 28-32절은 온통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용어들로 가득합니다. 관정(the hall of judgment), 행악자(malefactor), 고발(accusation), 법대로 재판하라, 권한이 있냐? 없냐? 계속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단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33절이하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단 한 단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자신을 하도도 됩니다. 유대인들의 불법에 고소, 맞고소, 항소 해도됩니다. 무죄를 주장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마디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옳고 그름을 따져 묻는 질문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셨다.”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마27:12, 마27:14, 막15:5)
신앙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의 싸움입니다. 마5: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준 목적을 말씀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눈을 상하게 했으면 상대방의 눈만 상하게 해야 합니다. 이를 한 개 부러트렸으면 상대방의 이도 한 개만 부러트려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상대방에게는 양쪽 눈을 다 뺍니다. 눈뿐이겠습니까? 목까지 칩니다. 그러면 그의 후손이 가만있겠습니까? 복수혈전이 이어집니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니 하나님께서 최하한선을 정해주었습니다. 율법은 생명을 보호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정죄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롬13:10)
성경을 1년에 3번 통독한 분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1년에 3번 통독하기가 쉽지 않죠? 말씀을 많이 읽는 일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1년에 성경 1번도 못 읽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야! 성도도 아니야!” 이렇게 나오면 문제입니다. ‘얼마나 먹고 사느라 바빴으면 한 번도 못 읽을까?’ 이렇게 나와야 정상입니다. 신학박사 학위를 딴 사람이 ‘학위 없는 교사는 교사도 아니야!’ 이렇게 나오면 곤란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식사 초대를 해서 사랑테스트를 했답니다. 초청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가장 맛없게 만듭니다. 소금을 한주먹씩 쳐서 소태로 만듭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맛있게 먹으면 사랑이 증명되는 겁니다. 유치한 방법이죠?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하고 있으면 무엇을 먹은들 맛이 없겠습니다. 제가 연애 시절에 어느 식당에서 국밥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먹는 도중에 벌레가 엄지손가락만 한 게 나왔습니다. 얼른 감추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무엇인들 맛이 없었겠습니까? 사랑은 법을 초월합니다. 우리 교회도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교회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요13:34)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립니다.(잠10:12)
진리를 증거하러 오신 예수님
끝으로 예수님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습니다. 성경에는 진리라는 단어가 118번 정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진리 자체이고, 예수님이 한 모든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이 진리입니다. 진리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자 비진리가 드러났습니다. 빛이 오자 어두움이 드러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참이 오자 거짓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죄인 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참된 자아발견입니다. 베드로가 이 예수님 앞에서 죄인 된 자기를 발견하고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했었습니다(눅5:8)
오늘날은 돈 안 되는 것은 모두 비진리라고 여깁니다. 대학의 학과도 순수 자가 붙은 학과는 다 없애는 추세입니다. 인문학, 예술분야, 자연과학 관련학과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오늘날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지키고, 진리를 전파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진리 앞에서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사수하시기 위해 험한 말도 불사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했습니다.(마3:7) 최 측근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도 들러 엎고 채찍을 휘둘러 양과 소를 몰아냈습니다.(요2:25,16) 예수님 안에는 은혜도 충만하시고 또 진리도 충만합니다. (요1:14) 우리도 한 없이 은혜로운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처럼 진리에 대하여는 파수꾼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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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으라 섬기라 자기를 부인하라(요20:24, 마20:20, 요12:20)
오늘은 복음서 말씀에서 세부분 정도 같이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부분은 요한복음20:24-29부터 의심하는 도마를 돕는 사건입니다. 두 번째는 마태복음20:20-24절부터 제자들에게 섬김의 자세를 가르치는 사건입니다. 세 번째는 요한복음12:2020-24절부터 한 알의 밀알의 진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부분을 한 줄 정리하면 ‘믿으라! 섬기라! 죽이라!’ 입니다. 신앙 인격을 갖추기 위한 3종 기본 세트입니다.
저는 강의을 준비하고 나서 걱정하였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오늘 하루 종일 일터에서 힘들게 보냈습다. 그리고 오늘 저녁 이곳에 왔습니다. 위로를 주는 말씀은 하지 못할 망정 ‘죽으라! 하니까’ “정말 어딜가나 죽어라! 죽어라!하는 구나” 하면서 마음이 힘들어 질까 염려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가벼운 마음으로 보면 합니다. 3인칭 관찰자 입장에서 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돕고 계시는가.’하는 시각입니다.
제1장 ‘믿는 자가 되라!’ 입니다. (요20:24-29)
24절을 보십시오.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 후에 두 번째 제자들을 방문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첫 번째로 제자들을 방문하였을 때 도마는 없었습니다. 도마는 쌍둥이란 뜻입니다. 디두모는 도마의 헬라식 이름으로 ‘이중적인’이란 뜻입니다. 요한은 왜 도마를 디두모 곧 이중적이었다란 이름으로 기록했을까요? 요11장을 참고하면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들어 유대마을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곳은 유대인들이 돌로쳐 죽이려고 기다리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하나같이 무서웠습니다. 이때 도마가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 ’하며 충성심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힘없이 죽자 불타는 충성심은 어디가고 모임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두 마음을 품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했습니다. 도마는 두마음으로 어느 바람에 밀려 어디서 방황하고 있을까요? 혹시 예루살렘 홈 플러스의 영화관에서 방황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무릉계곡에서 발담 그고 ‘계속 제자의 길을 갈 것인가 접을 것인가’ 고민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나는 역시 제자 체질이 아니 야’하며 다른 모임을 기웃거렸을까요?
25절을 보십시오. 이런 도마를 제자들이 만납니다. 우리가 부활한 예수님을 보았노라! 고 전합니다. 도마는 무엇이라 합니까? “내가 예수님 손에 못 자국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 내가 내 손가락을 예수님의 못 자국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 내가 내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했습니다. ‘내가! 내가! 내가!’ 하고 세 번씩이나 ‘본인이 뭘 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합니다. 한 마디로 내가 살아서 뛰는 모습입니다.
당시 재판정은 증인 2명만 있으면 사실로 인정 했습니다. 도마는 증인 11명이나 있었는데도 믿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전문용어로 실증주의적 회의주의자라합니다. 실험을 통하여 증명된 것만 믿고 그렇지 않은 것은 믿지 못하는 주의입니다.
예수님은 실증주의적 회의주의자 도마를 어떻게 돕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8일 만에 다시 방문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한번 보고 나서도 여전히 정적들이 두려웠습니다. 이들은 방문을 잠그고 빛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야말로 물샐 틈 없이 막았습니다. 대부분 어부출신이라 막는 것은 자신 있었습니다. 아무리 이들이 막아도 부활의 주님은 벽을 통과하여 들어옵니다. 부활의 몸은 이미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섭니다. 우리도 장차 이런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이패스를 통과하듯 가볍게 벽을 통과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도마가 원하는 대로 상처를 손으로 만져보라합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합니다. 본문을 영어성경 NIV를 참고하면 의심을 멈추고 그 다음 믿으라입니다. 자동차가 교통신호를 보고 멈추듯 우리 마음에 밀려드는 의심을 일단 멈추라합니다. 사단의 주특기는 마음에 의심을 심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부활했을까? 하고 의심할 때 끝에 의문부호가 붙습니다. 의문부호는 낚시 바늘처럼 생겼습니다. 에덴동산을 거닐던 하와는 사단의 말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결국 그 의심의 바늘에서 못벗어나고 선악과를 따 먹는데 까지 끌갑니다. 의심은 믿음을 방해하는 걸림돌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의심이 들 때 일단 멈추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그래야 두 마음이 들지 않고 의심의 물결을 이깁니다.
예수님이 신령한 몸을 만져보라고 한 것은 도마에 대한 배려입니다. 예수님을 만지고 실증해 본 도마의 자세는 어떻게 변합니까? 28절을 보십시오.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그전에 도마는 내가 주인이요. 내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럴 때 의심이 밀려들고 불안하고 두려움으로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도마의 주인은 예수님이오.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펄펄 뛰던 도마 자신은 죽고 그 안에 예수님이 들어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도마의 인생항로를 인도해 주시리 것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고백위에 어떤 말씀을 합니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입니다. 2000년이란 시공을 뛰어 넘어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더 예수님은 복된자라 합니다.
제2장 ‘섬기는 자가 되라! ’입니다.(마20:20~27)
마태복은 20장20절을 보면 그 때에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기 위하여 올라가려고 한 때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번 죽기 위해 간다고 했지만 제자들은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왕이 될 것으로 착각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내각을 구성하면 누가 넘버원이 되고 누가 넘버 투가 되어 요직에 앉을 것인가에 촉각을 세웠습니다. 이런 미묘한 분위기에서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이 여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절하며 공손히 구했습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자신의 아들들을 좌편과 우편에 앉게 해 달라 간청합니다. 좌편 우편은 옛날 식으로는 영의정과 좌의정이요. 지금식으로는 청와대 비서실장, 내각의 국무총리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머니들의 자식 사랑은 특별합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릎인들 못 꿇겠습니다. 10번도 꿇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어머니들의 자식 사랑이 특별합니다. 조금 지나친 어머니들을 헬리콥터 맘이라 합니다. 자식 주위를 빙빙 돌며 모든것을 다 보살펴 준다는 뜻입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은 높이 삽니다. 예수님도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열 제자가 듣고 두 형제에 대하여 화를 내는 수준을 넘어 분개합니다. ‘치사하게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청탁을 하다니 한 번 해보자는 것이냐!’ 했습니다. 12사도 중에는 열심당원 시몬이 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무력으로 로마제국을 몰아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들은 가슴 속에 반달 모양의 칼을 숨겨 무장하고 다녔습니다. 언제든지 봉기하여 조국의 원수들을 처단하기 위함입니다. 시몬은“나를 무시하지 마라! 잘하면 제자의 판을 다시 짤 수 있어!”했을 지도 모릅니다. 착하다고 소문난 바돌로메도 한 마디 했습니다. “보자 보자 하니 보기기인 줄 아나 가만 가만 있자니 가마닌 줄아나?” 이 일 후에 바돌로매도 화내는 자 중에 있느냐는 속담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경쟁하는 마음을 고난의 잔에 관심 갖도록 합니다. 좌우편 자리는 경쟁하여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으니 하나님께 맡기도록합니다.
25을 보십시오. 당시 이방의 집권자 중 가장 권세 있는 사람은 로마황제입니다. 황제는 엄지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죽이고 살렸습니다. 원형경기장에서 엄지를 치켜 세우면 살리고 아래로 내리면 죽음입니다. 제자들은 손가락 하나로 권세를 부리는 자가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어떤 자가 위대한 자라고 말씀합니까? 26절을 보면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어떤 자인지 종을 예를 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종은 자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종님은 없습니다. 이런 종님은 주인에게 미움받고 쫓겨납니다. 종과 같이 낮아져 섬기는 자가 큰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은 당시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 한 후 성령의 역사가 있자 모두 변했습니다. 이들은 주와 복음을 위하여 종과같이 살다가 모두 순교하는데 까지 헌신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상전의 철학으로 무장합니다.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높은 상전이 되고자 경쟁합니다. 오늘날은 인터넷으로 세계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경쟁 지역과 대상은 더 넓고 많아졌습니다. 저의 학창시절에는 벼락치기 시험이 통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어디 시험뿐입니까? 취업전선은 더합니다. 경쟁은 낙오자를 만듭니다. 이로 인해 많은 영혼들이 상처 받습니다. 이들이 어디 가서 위로 받아야겠습니까? 교회입니다. 교회조차 상전의 마음들이 많다면 안되겠죠? 교회가 갈등하느라 바쁘면 이들에게 마음 쓸 여력이없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아야 마땅한 분이지만 종과같이 낮아져 인생들을 섬겼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배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여 상처받은 영혼들이 위로받고 기쁨을 얻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의 복음성가처럼 섬김과 헌신이 기쁨이 되어 열매 맺는 아름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제3장 “자신을 죽이라!” 입니다. (요12:20~24)
본문에 배경은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 이후입니다. 과학계에서 만고불변의 진리가 열역학 제2법칙인 즉 엔트로피증가의 법칙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무질서도 증가의 법칙이라합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죽고 썩어 냄새나는 나사로가 살아난 일은 이 법칙 위배인데 이 일을 가능하게 한 예수님은 법칙을 주관하는 분입니다. 법칙을 만든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창조 능력으로 죽어 썩어가는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이 일이 소문 나자 전국적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습니다. 이들 중 어떤 자들이 있었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 곧 외국인이 있었습니다. 헬라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그리스인과 그 주변 국을 말합니다. 외국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았을 수 있고 통역이 필요할 수 있었습니다. 주석가들은 헬라식 이름을 가진 빌립이 외국어를 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빌립이 살던 벳세다에는 헬라인이 많았다고 합니다.
21, 22절을 보십시오. 헬라인 몇 명이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 뵙기를 청했습니다. 빌립은 자기가 직접 예수님께 안내해도 되는데 안드레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왜 굳이 안드레를 거쳐 예수님에게 갔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두 사람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할 때 입니다. 빌립은 빠른 상황 판단력, 정확한 계산력을 가진 컴퓨터 머리였습니다. 안드레는 반면 인간관계가 좋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먹는 것에 민감하여 남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어떻게 마음을 얻었는지 어린아이의 점심 메뉴인 떡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얻어 예수님에게 내놓기도 했습니다.
빌립이 외국인을 단순하게 예수님께 데리고 가지 못한 이유를 추측해 보변 머리가 복잡한 탓일 수도 있습니다. 외국인을 데려갔다가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 이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으셨다는(마15:24)고 거절하면 어떻하나하는 율법적인 마음도 들었습니다. 반면 안드레는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갑니다. 우리는 안드레형 입니까? 빌립형 입니까? 저는 안드레형이 부럽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이든 은사에 따라 복음역사에 요긴하게 쓰십니다.
이방인들까지 예수님께 오는 상황이되자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여기서 영광이란 예수님의 개인적인 영광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인류 구속역사를 완성하고 얻는 영광입니다. 나사로를 살린 후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자신의 죽음을 밀알에 비유합니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아니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밀 씨의 내부는 배와 배젖이 있습니다. 씨가 싹을 틔우려면 배가 해체되어 배젖에 양분을 공급해야합니다. 싹을 틔울 수 있는 3요소는 적정온도, 산소, 수분입니다. 이 3요소를 갖춘 곳이 땅속입니다. 땅 위에 있으면 바람에 이리 저리 날리다 참새가 주워 먹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로 세상에 왔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에 대하여 갈등하였습니다. 피할수만 있으면 피하려했습니다. 그러나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한 후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막14:36참고하면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한 알의 밀알같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을 통하여 수많은 죄인들이 용서받고 생명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알의 밀알로 사는 방법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고전15:31절에서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 갈2:20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내면적인 목표는 내안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커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교훈으로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갈 수 있길 기도하며 메시지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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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목격자들(요한복음20:1-18)
우리는 TV를 통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을 봅니다.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잃은 제자들과 마리아도 같은 마음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예수님이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사형을 언도한 무리들 앞에 제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제 몸 하나 챙기려고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은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습니다. 바위가 터지고 지진도 났습니다.(마27:51-54) 6시간 흑암도 임합니다.(마27:45) 이날은 인류역사상 가장 슬픈 날입니다. 그러나 슬픔은 3일 만에 끝납니다. 예수님은 부활합니다.
1. 3의 의미
예수님 2일도 4일도 아니고 3일에 부활합니다. 성경에 숫자 3은 완성과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창조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에서 형태가 생기고 내용물이 채워지는 단위가 3일입니다. 예늘들면 첫날 빛 둘째 날 궁창과 하늘이라는 기초가 만들어지고 그위에 3일 째 내용물을 채웁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있었습니다. 예수님 나사로를 살릴 때 소식을 듣고 3일을 더 있다가 갔습니다. 성막도 뜰, 성소, 지성소 3개로 구분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 3번 이겼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요 새인류의 시작입니다.(고후5:17) 이것을 완성하시기 까지는 3일이 필요했고, 3일은 하나님의 완전함을 보여줍니다.
2. 부활 부정설들
부활은 과학적으로 타당한 일이아닙니다. 열역학 제2법칙 위배입니다. 자연계에서는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사람이 죽으면 72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합니다. 부패가 진행되다가 거꾸로 거슬러 생명이 살아나는 사례는 없습니다.
“거꾸로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라고 실험을 통하여 확정한 법칙입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시체가 살아나는 일은 없습니다.
이 법칙을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 요한, 막달라 마리아도 잘 알았습니다. 물리, 화학을 안 배워도 상식적으로 압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같은 상식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썰”이 나옵니다.
첫째 조작설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조작했답니다. 시체를 훔쳐서 숨기고 다시 살아났다고 유언비어를 퍼트렸답니다. 제자들 목숨 걸고 시신을 훔칠만한 대담성도 없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부터 여종 앞에서 제 목숨 부지하려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합니다. 제자들이 조작설을 일으킬까봐 당시 지도자들이 이미 조치를 취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빌라도 총독이 긴급회의를 합니다.(마27:62~66) 그 결과 무덤을 인봉합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군병들에게 돌로 막은 입구를 지키도록 합니다. 이 돌 솥뚜껑만하지 않습 니다. 장정 10명이 매달려야 굴립니다. 무덤 지키는 경비병들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로마 군병입니다. 세계를 정복하는데 앞장섰던 군인들입니다. 제자들이 로마군병들을 제압하고 무덤입구의 돌을 굴리고 예수님의 시신을 훔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시신을 훔쳐 가는데 수건을 벗겨 가지런히 개켜놓고 수의도 가지런히 해놓고 훔쳐가는 착한 도둑님은 없습니다. 부활 조작설은 조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다면 마리아의 소식을 듣고 황급히 무덤으로 달려갈리 만무합니다.
두 번째는 기절설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고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나서 도망쳤다는 설입니다. 기절설도 기절초풍할 정도로 말이 안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습니다. 40일을 금식했습니다. 금식한 분들은 10일 했으면 1년 동안은 몸을 조심하고 보양식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양들을 섬겼습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삽니다. 나중에는 십자가를 질 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졌습니다. 성인 남성이 십자가에서 보통 9시간은 버팁니다. 예수님은 힘이없어 3시간 남짓 버텼습니다. 당시 십자가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다리를 꺾어 일찍 죽도록했는데 예수님은 그럴 필요도 없이 이미 운명합니다. 십자가 달리기 전 채찍을 39대나 맞았습니다.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가 다 나왔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확률 0입니다.
본문을 보면 빈 무덤에 수건이 가지런히 개켜 있었습니다. 세마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기절하셨다 깨신 분이 예의 바르게 누운 자리를 잘 정리하시고 그것도 세마포를 다 벗고 민망한 모습으로 도망을 갈 수 있습니까? 큰 돌은 혼자 어떻게 또 굴리고요? 인봉한 부분은 어떻게 다시 복원해 놓습니까? 로마 군병들은 또 어떻게 제압할 수 있습니까? 기절설을 믿느니 차라리 부활을 믿는 것이 더 빠릅니다.
3. 부활은 구약의 성취
예수님은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이 부활 시켰습니다. 본문 12절은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합니다.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부활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앉은 위치에 주목해 주십시오. 이들이 앉을 곳이 그렇게 없었겠습니까? 무덤 밖 넓은 동산도 있었습니다. 무덤 입구에 서 있어도 됩니다. 그런데 굳이 무덤 안에 예수님 시신을 눕혔던 머리와 발쪽에 앉았습니다.
이 장면은 구약의 말씀을 상기 시킵니다. 출애굽기 25장 10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성막의 지성소 안에 둘 언약궤를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명령합니다. 18-20절을 보면 언약궤를 덮는 덮개 위 양쪽에 천사 두 명이 무릎을 꿇고 서로 마주보며 날개를 편 채 끝을 서로 맞대고 앉는 모형을 만들도록 합니다. 서로 맞댄 천사의 날개 아래가 속죄제단입니다. 그 위에 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짐승의 피를 뿌려 속제제사를 지냅니다. 이곳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천사 둘의 모양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속죄소는 다른 말로 시은 좌라 합니다. 한자로 베풀시(施), 은혜 혜(恩), 앉을 좌(座)자입니다. 은혜를 베푸는 자리란 뜻입니다.
부활현장에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시신을 뉘었던 자리 머리와 발쪽에 앉은 것은 이 장면을 재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정확히 속죄 제사제도가 예표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속죄를 위한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죄를 용서받고 의인이되는 은혜를 입습니다. 천사가 예수님이 누웠던 자리 양쪽에 앉았다는 것은 이곳이 바로 구약의 시은좌와 동일한 은혜의 자리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한 3년 만에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더 길게 살 수 있었습니다. 80 살 이상 살면서 좋은 말씀 많이 해주면 얼마나 효율적입니까? 그러면 제자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짧게 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맞추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 속죄의 자리,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자리로 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단한 번에 영원한 죄 사함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4.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 목격
본문 16,17절을 참고합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부활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자신을 보였습니다. 마리아는 반가운 나머지 예수님을 붙들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붙들지 말라는 섭섭한 말을 합니다.
도마에게는 옆구리에 창 자국과 손에 못 자국을 직접 만져보라고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남녀 차별 대우 합니까? 아니면 마리아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귀신이 들렸다가 놓여서 그렇습니니까?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온전해진 여인입니다. 그 은혜의 표현으로 300데나리온 어치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붙기도 했습니다. 우리 돈으로 4천만 원어치입니다. 설마 액수가 너무 작아서는 아니었겠죠? 억대가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성 평등위원회에 신고야합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보고는 “자신을 붙들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렇게 한 것도 구약시대 말씀을 성취한다는 의미가있습니다. 레위기23장10-14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지켜야할 절기 중 요제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제(搖祭)는 흔들요(搖) 제물제(祭) 자를 써서 제물을 앞뒤로 흔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방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 때 썼습니다. 첫 열매를 드리는 날이 안식일 다음 날입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부활한 안식 후 첫날과 동일합니다. 요제를 드리기 전까지 규칙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곡식의 어떤 열매도 미리 먹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기 전에는 아무도 곡식에 손을 댈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23절에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에 비유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지 못하게 한 것은 요제 때 첫열매와 같이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 하나님께 아직은 완벽하게 드려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마리아에게 “자신을 붙들지 말라.!”는 뜻은 이런 구약배경이 있지 결코 마리아를 섭섭하게 하려고 함이 아닙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는 말씀은 앞으로 마리아가 신앙생활 할 때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붙들고 살지 말라는 영적인 권면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가 단순히 보이는 예수님을 붙들 때 눈에 안보이면 또 슬픔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원수들의 손에 힘없이 죽은 예수님, 그 비참한 모습만 붙들고 살지 말아야합니다. 이제는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마음으로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5. 제자들의 부활신앙
본문의 제자들도 마리아처럼 인간적인 예수님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어떤 예수님입니까? 본문 9,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제자들은 무덤의 정황을 확인했습니다. 아이큐가 한 자리 수가 아닌이상 예수님의 부활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전에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을 충분히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 죽자 집으로 갔습니다. 형제로서의 매너도 꽝입니다. 마리아 자매님을 그냥 무덤에 내버려 두고 갔습니다. 마리아가 계속 울고 있건 말건 갔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말씀을 계속 읽어보면 제자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고도 갈릴리 바다에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물고기를 못 잡아서 한이 맺힌 사람들처럼 갔습니다. 가서도 물고기 많이 잡았습니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예수님을 붙들고 있었으며 왜 부활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 미적지근할까요?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하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 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요즈음 2018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다른 어떤 경기보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경쟁 때문입니다. 방금 읽은 본문도 그 짜릿한 한 판 승부가 나옵니다. 출전선수 이름이 누구입니까? 한 명은 베드로 다른 한 명은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 하는 선수였습니다. 본인은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했지만 우리는 요한인 줄 다 압니다. 처음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요한이 압도적인 거리를 두고 치고 나갔습니다. 젊음이 한몫했습니다. 베드로는 의욕은 넘쳤지만 나이는 못 속였습니다. 형제들은 경쟁심이 많습니다. 겨울이 되면 내복을 입고 사느냐 안 입고 사느냐로도 경쟁 합니다. 내복을 안 입는 것을 젊음과 건강의 비결로 내세웁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내복을 달고 삽니다.
5절을 보면 골인 지점에 먼저 도착한 요한은 무덤 입구에서 망설였습니다. 머리만 들이밀고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몸이 들어가야 골인인데 못 들어갔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뒤에 온 베드로는 요한을 밀치고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뒤처졌던 베드로는 이렇게 해서라도 요한을 눌러보고 싶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께 사랑 고백을 하고 나서 한 마짐ㄱ 질문이 무엇입니다. 요21:20 “주님 요한은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상관 말고 나만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격이 다릅니다. 베드로는 급하고 행동이 앞섭니다. 요한의 성격도 급하긴 했지만 행동은 신중했습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형입니다. 베드로는 돌다리라면 무조건 건너는 형입니다. 그러다 자주 걸려 넘어졌습니다.
제자들이 붙들고 있는 예수님은 자기들의 세상 꿈을 이루어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보좌역인 영의정, 좌의정을 하는 꿈입니다. 그 꿈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자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부활하자 다시 꿈틀댔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로마 정부를 무너트리고 왕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물고기 잡으러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 후 40일이 지나자 이제 하늘로 가야할 마당에 제자들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행1:52절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 “왕이 되실 때가 지금이 아니냐?”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엉뚱한 예수님을 붙들고 있을 때 서로 경쟁하는 구도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경쟁은 사람을 지치고 피곤하게 만듭니다. 얽어매고 자유가 없게 만듭니다.
참 자유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적 할 때 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면 구속할수록 자유롭습니다. 세상 명예, 권세, 물질, 사람 등 눈에 보이는 것들에 매이면 매일수록 자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언제 부활 믿음이 생깁니까? 성령께서 역사한 후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자 성격이 다른 베드로와 요한이 동역합니다. 합심하여 병자도 일으켜 세웁니다. 또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12제가가 함께 1세기 초대교회 복음 사역의 기초를 놓습니다.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붙들고 있습니까? 아직도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은 슬픈 운명의 예수님입니까? 자신의 세상 꿈을 이루어줄 예수님입니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 예수님을 붙들 수 있길 기도합니다. 부활한 예수님 몸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몸이었습니다. 문으로 드나들지 않고 벽을 뚫고 다녔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다가 갑자가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났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였습니다. 우리도 나중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이렇게 신령한 몸으로 변화합니다.(고전15:51) 우리가 늘 부활의 소망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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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의 사랑고백(요한복음21:1-25)
아이들은 데리고 오션 700, 피크아일랜드 같은 실내 물놀이 시설을 가끔 갔습니다. 놀이 기구 중에 큰 물통에 물이 꽉 차면 쏟아지는 기구가 있습니다. 물통이 기울어 물이 쏟아질 때 아이들은 아래서 물벼락을 맞으며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이 기구의 물통이 뒤집혀 텅 비면 또 물이 서서히 차올라서 꽉 차고 임계점이 다다르면 다시 쏟아집니다. 이 장면을 영적인 것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하십니다. 자기 부인하는 과정을 물통의 물을 비우는 과정으로 보면 됩니다. 우리가 비워지면 주님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통에 차지도 않았는데 일을 많이 하면 부작용이 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 지친 분들은 은혜가 찰 때까지 기다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주인공입니다. 베드로는 좌충우돌하면서 자기 부인을 하는 과정을 겪고 거기에 주님이 사랑으로 채우고 사명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는 시각을 비우고 채우는 과정이라는 시각으로 교제해 보겠습니다.
1. 네게 무슨 상관이냐?
1절을 보십시오. 디베랴 호수가 나옵니다. 디베랴는 갈릴리 호수를 다른 말로 디베랴 호수라 합니다. 2절에 보면 갈릴리 가나 사람이라 하여 갈릴리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갈릴리의 지명의 뜻은 “둥글다”입니다. 실제 갈릴리는 남·북으로 80km, 동서 56km입니다. 갈릴리는 쓸모없는 땅, 있으나 마나 한 땅, 이방에 갈릴리라 부르며 당시 유대 사람들이 대놓고 무시하는 땅이었습니다. 예수님 고향 나사렛은 갈릴리에서도 더 무시받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무시받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시작한 복음 역사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라는 증거 아니겠습니다. 진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땅이 있었습니다. 그 바로 위가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위에 갈릴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사마리아와 유대는 수백 년 남북으로 갈라져 원수처럼 지냈습니다. 그런데 왜 갈릴 리가 지역적으로 가까운 사마리아 속하지 않고 유대에 속했을까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BC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의 손을 빌려서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지역적인 편의성을 무시하고 갈릴리를 유대 행정구역에 편입시켜 버립니다. 이때부터 유대 사람들이 갈릴리로 많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 조상들도 갈릴리 나사렛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하에서 갈릴리 땅은 예수님이 나고 자라고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최적의 땅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지도자들이 갈릴리 지역은 무시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유대 땅에서 사역을 시작했다면 복음 역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감옥에 갇혔을 것입니다. 갈릴리는 하나님께서 복음 역사의 전초기지가 되도록 세상 역사를 움직여 가면서 준비한 땅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하나님의 손길을 볼 때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의미가 없을까요?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했고 교회 지체로 부르셨습니다. 그럼 수많은 교회 중에 현재 속한 교회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활동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말로만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끝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교회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성도 간에 서로 섬기고 세워주고 권면하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함께 순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 부분과 연관된 구절을 먼저 살려보겠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21장 20-22절입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사랑 고백이 끝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장면입니다. 한 참 따라가다 돌아보니 사도 요한도 열심히 예수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요한이 최고의 경쟁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인생 챙기기도 바빠야 할 텐데 요한의 인생까지 궁금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뭐죠? “네게 무슨 상관이냐.”입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질문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한 지체로 존중하고 도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인생이 어떻게 되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니고 너는 나만 보고 잘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사람을 보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예수님만 바라보고 갑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자기에게 정해진 트랙을 가면 됩니다. 남의 트랙에 관심은 가지고 응원은 해야겠지만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향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실제 트랙이 있는 운동 경기에서 남의 트랙 밟거나 넘어가면 실격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고 신앙 생활하면 사람에 따라 신앙이 흔들립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은 남의 인생사를 많이 궁금해합니다. 자기 옆집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혼자 밥을 못 먹습니다. 혼 밥 못합니다. 혼자 먹으면 서로 이상하게 봅니다. 그래서 가끔 tv를 보면 2인분을 시키고 다른 한 사람이 곧 올 것처럼 말하면서 혼 밥을 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요한의 인생으로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은 주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요한에게 두신 주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이든 간에 베드로는 그것을 존중하고 힘껏 응원해 주어야 합니다.
2. 양을 치는 자세
본문 2절을 보십시오. 7명의 제자를 소개하는데요. 5명은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입니다. 나머지 2명의 제자는 주석을 보면 안드레, 빌립이랍니다. 7인의 어부가 의기투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3년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베드로 삼세번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예수님 상황이 제일 안 좋을 때 배반했습니다. 보통 사람이 힘들 때는 말 한마디가 위로와 힘이 됩니다. 예수님 체포되어 재판장으로 막 끌려가시는 순간 베드로는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자기 코가 석 자라고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삼세번씩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합니다. 이런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찾아와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오늘 3번 사랑 고백을 받는 장면을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떠나서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강원도 사나이 대 사나이에 일어난 일로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주 낯 간지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짓궂을 정도로 집요하게 3세 번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얼마나 의도적이었냐 하면 베드로가 세 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근심스러운 표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사람을 돕습니다.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그날 밤고기가 단 한 마리도 안 잡힙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결국은 빈 그물, 빈손, 빈 배인 채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마음도 텅텅 비었습니다. 7명의 어부는 평생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고기 있는 포인트 모르겠습니까? 적어도 7명이 한 마리씩은 잡아서 7마리는 잡혀야 정상조업입니다. 한 마리도 못 잡는 상황은 이들의 마음을 비우려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생업에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본문 6절과 11절을 참고하면 그 후 예수님은 이들의 빈 그물을 채워주십니다. 오른편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고, 거대 물고기 153마리가 올라오게 하십니다. 153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153이 당시 물고기 전체 종류로 봅니다. 저는 굳이 153을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만큼 성경이 사실이라는 방증입니다. 당시 제자들이 실제 세어 본 물고기 숫자를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153마리를 잡게 하심으로 제자들의 빈 그물, 빈 배, 빈손을 가득 채워주십니다. 제자들이 3년 전에 어부를 그만두고 예수님 제자로 떠나면서 얼마나 큰소리쳤겠습니까? 가족들에게도 내가 큰 자리 차지해서 떵떵거리며 잘살게 해 주겠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힘없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거지꼴이 돼서 고향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그물질했는데 빈손으로 가족들한테 들어가야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한 심정이겠습니까?
본문 15,16,17절을 참고합니다. 본문은 그 유명한 베드로가 삼세번 사랑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자신 없는 대답을 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신다.” 3번 모두 이런 대답을 합니다. 17절 마지막 대답은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오매”란 말이 더 붙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자신 없는 대답을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펄펄 뛰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는 다른 제자들이 다 주를 버려도 나는 절대 안 버린다.“(마태 26:33)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 잡아가지 말라고 말고의 귀까지 잘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펄펄 뛰던 베드로는 온데간데없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주도권마저도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사랑 고백도 못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의 대답 속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기 부인이 된 베드로를 봅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표현도 원어 적으로는 자기 부인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땅을 살면서 100% 자기 부인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또 자기가 살아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기 부인이 100% 되는 순간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펄펄 뛰었던 베드로 자신이 죽고 빈 가슴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사명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보통 세상에서는 스승이 제자를 그렇게 열심히 도와주었는데 배반하고 도망가면 포기하기 쉽습니다. 부활한 후에도 예수님은 2번이나 제자들을 찾아가서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물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러면 딴사람 찾아보기 쉬웠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젊고 유능한 인재가 많았습니다. 70인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70인 주변에는 120명 제자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12명은 얼마든지 다시 뽑아 사명을 맡길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베드로 한 사람을 포기치 않고 세우십니다. 끝까지 사랑의 손길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찾아가야 할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이었습니까? 빌라도도 한번 찾으러 갈 법합니다. 빌라도도 만나서 “당신 죄도 없는 나를 넘겨?”하고 죄를 물을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 가야바도 있었습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채찍질한 로마 군병들도 한 번쯤은 찾았어야 합니다. 근데 예수님은 첫째도 제자들, 두 번째도 제자들을 찾았습니다. 도마는 개인적으로 옆구리에 손을 넣어 확인까지 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선택한 자들만 철저하게 찾았고 끝까지 돕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섬기는 모습 보면 눈물겹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일단 밤새도록 실패한 제자들의 언 가슴을 녹이려고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십니다. 성냥도 없던 시절에 숯불도 피우십니다. 숯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무를 때서 연기를 참아가며 숯을 만드는 긴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21장 9절을 보십시오.”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 예수님은 그 숯불로 또 생선과 떡 요리까지 해 놓으셨습니다. 7명의 장정이 먹을 음식 몇 접시 가지고 되겠습니까? 한 사람당 3인분을 먹는다고 하면 식수 인원은 21일분은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잡은 생선도 좀 가져오라 하셨고, 즉석 생선 숯불 요리도 하셨습니다. 13절에 보면 ”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손수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하십니다. 생선 뼈도 정성스레 발라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거룩한 몸입니다. 예수님은 그 몸으로 손수 떡과 생선을 가져다 차리고 먹게 하셨습니다. 너무 디테일하게 섬기십니다. 떡과 고기 툭 던져놓고 알아서 손질해 구워 먹으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디테일한 섬김과 질문에 베드로의 언 마음은 이미 다 녹아내렸고 사명을 회복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명을 회복시키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5. “내 어린양을 먹이라.” 16절 “내 양을 치라.” 17절 “내 양을 먹이라.” 16절에 내 양을 치라하셨습니다. “치라”라는 단어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보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허비하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직업이 돼지치기였습니다. 바로 그 돼지 치기 할 때 치라와 같은 단어랍니다. 돼지를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돼지한테 빗자루 던져주고 “너의 집은 네가 알아서 치워!” 하면 되겠습니까? 매일 팔을 걷어붙이고 오물을 치워 줘야 합니다.
제가 8개월 전에 아들 하나를 집으로 들였습니다. 저의 숨겨둔 자식이 아닙니다. 길고양이 출신 고양이 한 마리를 들여왔습니다. 구내염으로 다 죽어가던 고양이 수였는데 이름은 오레오입니다. 구내염은 자가 면역질환으로 입속이 다 헐어서 침도 못 삼킬 정도로 아픈 병입니다. 심하면 음식을 못 먹고 굶어 죽습니다. 구내염은 고양이에게는 최악의 병입니다. 이 고양이가 죽을 그것 같아 데려왔습니다. 처음에 저는 고양이 키우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더 빠져들었습니다. 적극적인 치료를 받아 구내염도 이제는 아주 많이 좋아진 상태입니다. 고양이 치는 일 그냥 밥만 주면 될까요? 안 됩니다. 오줌똥을 하루 두 번 치워줘야 합니다. 털도 구르밍 해야 합니다. 고양이의 사냥본능도 해소해야 해서 사냥놀이도 해야 합니다. 물도 신선한 물로 하루 두 번 갈아 줘야 합니다. 따뜻한 잠자리도 챙겨줘야 합니다. 야행성이어서 새벽에 꼭 놀아달라고 웁니다. 저는 이 고양이를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일방적으로 주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고양이 우리에게 해주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양이는 일방적으로 복을 누립니다. 고양이 한 마리도 치려면 아주 디테일한 섬김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한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유대 회당에 들어가서 폼 잡고 설교만 하고 찬사 받으면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돌보아야 할 양은 베드로의 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자기 아이 보다 남의 아이를 돌 볼 때 더 조심합니다. 그렇게 남의 양 돌보듯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양에게 하듯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양 칠 때 지시하면 양이 말을 듣습니까? 안 듣습니다. 뒤에서 몰면 절대 안 갑니다. 본을 보여야 뒤따라갑니다.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의 양을 치는 자세로 교회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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