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은 총 150편입니다. 시편 하면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하는 내용만으로 대부분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시죠? 아닙니다. 오늘 시편 42편을 탄식 시라고 합니다. 시인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탄식을 쏟아놓는 내용입니다. 시편 150편 중 이런 탄식 시가 무려 70편입니다. 찬양 시가 30편, 감사 시가 15편이고 세 가지가 섞여 있는 시가 35편입니다. 탄식 시가 반이 넘는 셈입니다. 우리 네 인생이 너나 나나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반은 탄식이 있을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동해 앞에 살면서 물 때문에 탄식할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본문에는 시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로 탄식하는 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3절에 보면 그 상황 때문에 눈물이 음식이 될 정도로 슬프다고 합니다. 4절에는 아는 사람들이 자기를 배반해서 마음이 상한 상태라 합니다. 또 5절과 11절은 마음이 낙심하고 불안한 마음이라 합니다. 7절에는 생의 파도와 물결이 자신을 휩쓸었다고 표현합니다. 9절에는 원수의 압제로 슬펐습니다. 10절에는 비방을 받아서 칼이 뼈를 찌르는 아픔이 있다고 합니다. 시어를 보면 시인이 처한 상황이 마치 깜깜한 터널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 1절 앞에 붙은 문구가 무엇입니까?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른 노래"라고 합니다. 본문의 저자는 고라 자손입니다. 마스길은 교훈 시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탄식하는 상황에서도 결국은 그 탄식을 넘어서게 되었고 우리에게 노래가 되어 교훈을 주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라자손은 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하는 레위인 입니다. 찬양전문가들이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찬양전문가들이 많으시죠. 저는 이과라 음악에는 문외한인데 테너를 시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무늬만 테너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본문의 시인 상황은 고립되었고, 남들에게 비난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너의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라고 하며 신앙마저 부정당하는 상황입니다. 시인의 상황과 우리의 현실을 접목하기 위해 에릭 프롬이라는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저서 하나만 소개하겠습니다. 에릭 프롬은 1900년대에서 1980년대 사람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가 “소유냐 존재냐”입니다. 영어로 “To have or to be?”라고 합니다. 책 내용은 인간 삶의 형태를 소유 중심의 삶과 존재 중심의 삶으로 분류합니다. 소유양식보다는 존재 양식의 삶을 추구해야 인간은 행복하다고 주장 합니다. 소유형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로 자기를 규정하지만, 존재형은 소유보다는 존재가 어떤 경험을 하느냐를 중요시합니다. 예를 들면 들에 꽃이 있으면 꺾어서 집에 가져와 화병에 꽂아야 직성이 풀리면 소유형의 삶이고, 그냥 그 꽃 앞에서 향기를 맡고 아름다움을 즐기며 행복해하면 존재형의 삶이라 규정합니다. 성경에서 예를 들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일이 소유적인 삶을 지향한 태도입니다. 율법을 자기가 지켜서, 자기 의를 쌓아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이 소유형이고,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인 신분이 되는 것이 존재형입니다. 예수님의 삶잘 들여다보면 존재형 삶을 사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미디어 사회라고 합니다. 미디어를 과소비하는 시대입니다. 특히 익명성이 보장되니 그 익명성 뒤에 숨어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시대입니다. 악성 댓글 시대입니다. 온라인상에서 왕따당해 고립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그 일로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온라인상에서는 그 사람의 소유만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상대를 왜곡되게 인식할 가능성이 큽니다. 작년 5월의 원주에 사는 17살 고등학교 남학생이 김해에 사는 16살 여학생을 크리스마스 전날 그 여학생 아파트 근처에서 20차례나 칼로 찔러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두 사람은 4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오로지 온라인상에서 문자로만 4년 동안 사귀기만 했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존재는 사실상 많이 왜곡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소한 오해가 생겼고 남학생은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채 크리스마스 선물 준다고 속여서 나오라고 하여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사건은 온라인이 사람을 얼마나 왜곡되게 판단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특히 SNS에는 소유형 인간이 넘쳐납니다. 좋은 집, 외제 차, 명품 가방과 명품 목걸이를 건 모습을 보여 줌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합니다. 샤넬 가방, 반클리프 아펠, 그라프, 나토 목걸이 처음 듣는 명품 이름이 요즈음 뉴스에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명품을 걸친다고 하여 사람이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명품 인간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재가 될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당신의 작품이라고 칭합니다. 사람들은 남의 사진을 보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립니다. 이것으로 인간은 점점 고립되는 시대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은 사람을 더욱 외롭게 만들고 또한 쉽게 낙심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시대에 낙심하지 않고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잘 대처할 수 있는가 알려줍니다.
1.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불안하고 낙심이 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본문의 저자는 하나님을 얼마나 갈급하게 찾는지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에 비유합니다. 사슴이 왜 물을 찾습니까? 새끼들하고 물놀이하려고 찾습니까? 여름휴가 즐기려고 찾습니까? 아닙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에 ‘갈급하다’라는 것은 ‘부르짖다’. ‘헐떡거리며 달린다’는 의미입니다. 중동지방은 영상 50도를 오르내립니다. 아스팔트는 달구어져서 영상 80도까지 오릅니다. 아스팔트에 날달걀만 까 던져도 맛있는 달걀 프라이가 됩니다. 이곳은 4월에서 10월까지 일 년에 7개월이 강이 항상 말라 있습니다. 강릉은 원래 연평균 강수량은 1,445mm입니다. 이 비가 7, 8월에 반이 와야 하는데 한 번도 안 와서 물난리를 겪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연평균 강수량이 500mm밖에 안 된답니다. 이런 지방에서 사슴이 물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 찾지 못하면 죽습니다. 특히 암사슴이 물을 찾지 못하면 새끼도 같이 죽습니다. 사슴은 모성 본능이 강합니다. 먹을 풀이 없으면 일주일을 견뎌도, 물이 없으면 2일밖에 못 삽니다. 물을 찾는 사슴의 간절함이 어떤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사슴이 얼마나 갈급했으면 맹수들이나 사냥꾼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시편 기자는 이런 사슴과 같은 자세로 주를 찾고 하나님을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오봉저수지 바닥 갈라진 화면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그 갈라진 바닥이 얼마나 물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뵐까?” “하나님의 얼굴을 뵐까?” 하는 탄식은 시인이 과거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때를 회상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회복하기를 갈망함에서 오는 탄식입니다. 우리가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 방식 3가지만 상기해봅니다. 첫째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찾는데 여러분은 저자의 직강을 주로 들으십니까? 아니면 배달해주는 말씀을 주로 들으십니까? 배달해주는 말씀은 강단에서 여러 형제님이 전해주는 말씀이나 유튜브에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는 것을 말합니다. 배달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여기에만 의존하는 것도 그렇게 건강하지는 않습니다. 저자의 직강을 제쳐 두고 배달해주는 그것에만 의존해도 안 되겠습니다. 말씀 자체에 설득당할 때 오래 갑니다. 두 번째는 두말하면 잔소리 기도입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만년필 뚜껑을 잃어버렸는데 그 뚜껑 찾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 본 적 있습니다. 그만큼 겸손히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는 자세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본문에 2절에서 예배를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바로 예배와 성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세입니다.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에 부닥치면 말씀이 눈에 안 들어옵니다. 직강이고 뭐고 성경 펼 마음도 안 들기 쉽습니다. 성경을 폈다 해도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오기 쉽습니다. 또 기도는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그저 주여만 외칠 뿐이게 됩니다. 이때 예배와 모임에 참석하고 성도들에게 기도 부탁하는 일 중요합니다. 어려운 상황이 되면 자신을 더 고립시키기 쉬운데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교회가 최후의 보루이고 교회가 최후의 울타리입니다. 주님도 2~3,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반드시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사람을 쓰셔서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상황에 압도당하여 당황하면 안 됩니다. “고객님 많이 당황하셨어요?” 옛날의 개그프로에 이런 멘트도 있었습니다. 하늘의 왕자 독수리가 사자에게 왜 가끔 잡아먹힌다고 합니다. 땅의 왕자 사자가 더 용감해서가 아닙니다. 독수리가 땅에 먹이를 낚아채려고 앉았다 사자가" 어흥~”하고 위협하면 독수리가 막 달려가다가 잡아먹힌다고 합니다. 사자의 소리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기가 나는 새라는 것을 까먹고 뛰어가다 먹힌답니다. 꿩도 마찬가지입니다. 꿩 사냥할 때 사람들이 줄 서서 꿩을 놀라게 하며 몰이하면 꿩은 나는 것을 까먹고 머리만 풀 속에 처박습니다. 그러면 주워 담으면 됩니다. 우리가 당황하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됩니다.
2.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3, 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본문은 시인이 낙심하고 절망하는 이유가 전에 함께 예배드렸었던, 하나님께 함께 기쁨과 감사를 드리며 잘 알았던 사람들의 비난 때문입니다. 요즈음 표현으로는 이들의 악풀 때문에 주야로 눈물을 빵처럼 먹을 정도로 슬프다고 고백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조롱합니까? 남의 신앙까지 들먹이면서 조롱합니다. “네가 그렇게 잘난 척하고 믿던 하나님은 지금 어디 가고 현재 너 모양이 그 모양인가?”“네 꼬락서니가 어떤 꼬락서니인가 한번 봐라!.”하고 비난합니다. 가까운 사람이 배신할 때 그 아픔은 배가 됩니다. “회식 모임에 나오라고 했더니 집회에 간다고 나오지 않더니 야 꼴 좋다.” 하면서 하나님을 욕할 때 정말 속상합니다. 그런데 더 속상한 것은 하나님마저 침묵하고 계신 것 같을 때 더 답답한 마음이 됩니다.
3.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런데 이렇게 시인은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5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본문을 잘 분석해 보면 두 사람이 나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 낙심하는가? 앞에 내와 뒤에 네는 서로 다른 나로 보입니다. 앞에 나를 A라고 하고 뒤에 나를 B로 넣어서 본문을 읽어보면 A인 나가 B인 너에게 어찌하여 낙심하는가 책망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자아가 비정상적인 자아를 타이르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보입니까? 미친 사람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나에게 말을 걸고 타이르는 것을 우리는 자기 성찰이라 합니다. 자아 성찰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제삼자로 객관화하여 자기에게 말을 거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마음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앞으로 갔다가 바로 뒤로 갈 수 있게 하는 게 뭡니까? 엑셀로 가능합니까? 기어의 문제입니다. 기어를 바꾸는 자세 바로 본문의 시인처럼 하는 자세이고 이것을 능동적인 자세라고 합니다. 수동적인 자세는 나를 탄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그대로 두면 자동차 엑셀을 더 세게 밟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끝도 없는 나락으로 끌려갑니다.
미네소타 대학교 심리학과 에릭 클링거 교수가 발표한 논문을 참고합니다. 보통 사람은 하루 동안 무려 4천 가지 정도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40~50%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떠오른답니다. 이를 비자발적 생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나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생각이 떠오른다던가, 불치병이 걸린 상황이 떠오른다던가, 직장에서 퇴출당하는 생각, 음란, 탐욕의 마음, 누구를 해치는 무서운 생각도 듭니다. 30년 전에 창피를 당했던 생각이 불쑥 들어서 지름 심장이 빨리 뛰고 얼굴을 붉히기도 합니다. 과거 사고 났던 생각에 사로잡혀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외출해서 가스레인지 밸브를 잠그고 스위치를 껐는지 안 껐는지 몰라 하루 종일 불안에 떨기도 합니다. 이때는 119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우리 집으로 가는 게 아닌가 놀랍니다. 이것을 강박사고라 합니다. 심한 분은 외국에 가는 비행기 탔다가 취소하고 확인하러 집으로 오기도 합니다. 롬 7장 23절에서는 사도바울은 이런 상황을 “사탄이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아가는 나를 보는 도다!”라고 합니다. 사도바울도 죄로 사로잡혀 가는 자신을 제삼자의 처지에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죄의 법으로 끌려가는 자신을 가만히 두고 있지 않고 타이릅니다.
우리도 제삼자인 내가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을 꾸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이 들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로마서 8장 38, 39절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어!”하고 마음을 다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자세를 자기가 자기 자신에 설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저자는 자신에게 뭐라고 설교합니까?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고 합니다. 이를 NIV 영어성경으로 보면 “Put(두라) your hope(너의 희망을) in God(하나님 안에)”입니다.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랍니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세상 안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자기 자신 안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또 풀의 꽃과 같습니다. 해가 나면 모두 사라집니다. (벧전1:24, 야고보 4:14)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격입니다. (마7:26) 이런 자들은 환란이 닥치면 넘어지고 쓸려 내려갑니다. (마7:27)
성경에는 꿈, 혹은 희망(소망)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합니다.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잠언 29:18) 오스트리아에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독일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을 직접 체험합니다. 여기서 160만 명의 유대인과 정치범이 죽었다합니다.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극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합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 소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은 살아남았습니다. 반면 소망을 포기한 사람들은 심신이 최악의 상태로 진행되어 결국은 죽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는 이 꿈과 관련하여 한 가지 특이한 점을 소개합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죽었을 때는 1944년 성탄절 이후부터 그다음 해 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주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전염병이 돈 것도 아니고 자연사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1944년 말 성탄절 때에 독일 군들이 가석방 시켜주는 제도가 있었고 또 1944년 말에는 전쟁이 끝나서 모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의 전황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끝나리라는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5월 8일에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하며 끝났습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에 항복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이날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이 1944년이 다 지나가도 가석방이나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소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망했고 소망이 없어지자 자연사하는 사람이 급격하게 늘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례를 통하여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웁니다.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소망으로 구원받는다고도 합니다.
본문에서 저자의 하나님께 대한 중요한 자세 한 가지 더 배웁니다. 감정을 하나님께는 있는 그대로 다 숨김없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눈물이 음식이 될 정도로 슬픕니다. 하나님 사람들이 나를 배반해서 마음이 상합니다. 또 5절과 11절은 하나님 제 마음이 낙심하고 불안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원수의 압제로 슬픕니다. 하나님 칼이 뼈를 찌르는 아픔이 있습니다. 왜 저에게 이런 아픔과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하며 하나님께 모든 감정을 숨김없이 다 토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슬픔을 토로하는 마음 깊숙이에는 하나님의 선한 주권을 끝까지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의 하나님이 반드시 나타나서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 탄식 상황에서도 여전히 찬송하겠다고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면서 시를 끝냅니다. 오늘 본문 5절과 11절은 같은 시어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 신뢰, 소망을 잃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저자의 자세를 배워서 어떤 탄식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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