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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기독교정보

로마서 말씀 나눔(로마서1장~7장)

by 명주(明珠) 2025. 10. 27.

 

어찌 아니 기쁜가?(로마서1:1)

도입

초등학생들의 장래 꿈 순위를 보면 시대상을 압니다. 2020년 교육부에서 초등학생에게 장래 꿈을 물었습니다. 1위 운동선수, 2위 의사, 3위 교사, 4위 유투버bj, 5위 프로게이머, 6위 경찰관, 7위 요리사, 8위 가수, 9위 웹툰작가, 10위 제과 제빵사입니다. 요즈음 운동선수 잘나갑니다. 은퇴하면 TV로 진출합니다. TV 운동 프로그램이 대세입니다. 축구, 농구, 골프, 탁구, 씨름, 야구다 합니다. 국세청자료에 유투버 상위1%인 27명의 수입이 합하여 181억입니다. 1명당 평균 7억입니다. 프로게이머는 평생 게임만하면서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요리사, 제과 제빵사는 평생 맛있는 것만 먹을 수 있으니 학생들이 써 낼 만합니다. 저희 때는 대통령, 장군이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쓴 저자는 바울이고 본명은 사울입니다. 구약의 사울은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입니다. 초대 왕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건국의 아버지입니다. 사울 이름의 뜻은 큰 자입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개명합니다. 바울 곧 작 은자입니다. 그에게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로마서의 중요성

로마서는 유명한 서신서입니다. 성경을 보석에 비유한다면 로마서는 다이아몬드입니다. 편지 글이라 기보다는 한편의 논문입니다. 로마서가 서신서 중에 첫 번째로 나옵니다. 연대 순이어서 가 아닙니다. 중요도 때문입니다. 먼저 쓰인 바울 서신은 갈라디아 전후서 입니다. 많은 위인들이 로마서로 거듭났습니다. 참회록 저자 어거스틴,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천로역정 저자 존 번연, 감리교 창시지 존 웨슬레가 있습니다.

바울의 겸손

바울 이름은 작은 형제 란 뜻이라고 했는데 에베소서3:8절을 보면 자신을 더 낮춥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 문법적인 오류입니다. 가장 작은데 그보다 더 작은 거는 없습니다. 그만큼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겸손 해 졌습니다. 바울이 사울일 때는 겸손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주 잘나갔던 사람입니다. 당시 가장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입학하려면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전국적으로 일 년에 2-3명밖에 뽑지 않았습니다. 자격조건이 13살 때까지 모세오경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암송해야 합니다. 모세오경 총 몇 절인지 알아보니 5,849개절입니다. 우리는 한 절도 외우기 어렵습니다. 돌아서면 잊어버린다고 하는데 저는 돌아서기도 전에 까먹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젊어서 산헤드린 의원에 오릅니다. 종교적인 열심도 커서 예수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발본색원하는 일을 합니다. 공문 보내고 외국원정 색출작전도 나갔습니다.(행9:2) 스테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찬성표 던졌고 돌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맡아 주기도 합니다.(행7:58) 옷을 맡았다는 의미는 돌 잘 던지라고 대신 들어 준 게 아니고 증인의 개념으로 맡았답니다.

사도바울의 구원과 선교사역

이런 그가 회심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빛 가운데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멉니다. 비늘이 씌워져 3일 동안 못 봅니다.(행9:18) 눈에 비늘이 씌었음은 그의 삶과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말합니다. 우리 ‘저사람 뭔가 씌여서 저런다.’는 표현 씁니다. 바울 도 눈에 뭔가 잘못 씌어서 예수님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그가 사회적으로는 잘나갔는 지 모르지만 마음은 마치 맨발로 가시뭉치를 차는 듯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고 눈에 비늘이 벗겨집니다.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뜹니다. 그리고 개명을 합니다. 사울 이름일로 때는 위로, 꼭대기로, 더 높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자기를 채찍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는 아래로, 밑바닥으로, 더 낮고 낮은 곳을 지향하는 삶으로 바뀝니다. 그런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거듭나자마자 선교역사에 투입되지 않았습니다. 고향 다소에 가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로 초빙하기까지 11년을 은거합니다. 이때 구약성경 연구를 많이 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후 7년 동안 3차례에 걸쳐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제3차 전도여행이 끝나고 예루살렘에 잠시 들렀다 로마에 갔다 땅 끝까지 가 사명을 완성합니다. 그런데 길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먼저 편지를 씁니다. AD58년경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자 로마 시민권도 가졌습니다. 두 문화의 배경을 다 경험해 복음을 전하는데 유리합니다. 바리새인으로 율법아래 고통받는 자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교리를 정립합니다. 헬라 문화에 정통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쓰신 하나님을 통해 한 가지 생각 해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타고난 재능과 배경도 쓰십니다. ‘복음 역사에 재능, 능력, 총명함, 학문적인 수련이 뭐가 필요해’ 이런 태도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모세, 이사야, 다윗, 사도요한 모두 잠재해 있던 재능들이 쓰인 사람들입니다. 이 하나님에게 왈가왈부하면 월권입니다. 하나님은 타고난 천성, 개성 무시하 않습니다. 성경 66권도 저자에 따라 문체가 다릅니다. 작자 미상은 문체로 저자를 추정합니다. 복음역사의 감독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배우입니다. 천성적인 재능을 무가치하고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시험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로마교회의 상태

로마서의 1차 수신자는 로마에 사는 신자입니다. 로마하면 해가지지 않는 제국입니다. 로마시에만 80만살았습니다. 로마는 겉은 화려했지만 영적으로 부패한 도시입니다. 신전이 4개 이상 있었습니다. 윤리와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합니다. 로마시가 크니 교회도 컸을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반대입니다. 미미한 수준입니다. 건물도 없었고 몇 몇 가정교회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여기 출신입니다. 로마서16장에 신자들 이름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누구네 집의 사람들이란 표현은 그 집의 노예입니다. 로마교회는 초대교회 박해 때 흩어진 소수의 무리가 이룬 교회입니다. 자발적으로 생긴 교회입니다. 그러니 교리적으로 약합니다. 로마 신자는 거대한 골리앗 앞에 소년 다윗 같은 형국입니다. 바울이 이런 로마 성도들을 생각할 때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로마서1장11절에 무어라 합니까?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견고하게 하려는 소원이 강합니다. 구원받으면 끝이 아닙니다. 거듭 나자 마자 사단의 공격 대상입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가 노리는 먹이는 막 태어난 새끼들입니다. 따끈따끈한 먹이감으로 봅니다. 영적으로 막 거듭난 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견고케 하는 사역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종 바울

바울이 쓴 첫 소절이 무엇입니까? 1절을 참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입니다. 구약에 기름 부어 세운 3부류는 왕, 선지자, 제사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속에 3개직분을 가진 자 의미가 담겼습니다. 현재 사도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친 상태입니다. 펜을 들었을 때 쓸 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다. 다양한 자기경험, 간증들이 주마등 같이 스쳤습니다. 자랑도 하고 싶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경험 쓰기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 주제는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특정종교에는 특정 인물이 있습니다. 불교에는 석가모니, 이슬람은 마호멧, 유교는 공자입니다. 그런데 사람 자체를 중요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남긴 교훈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의 주제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로마서만 예수와 그리스도 용어가 103번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종, 사도, 택정함을 받은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바울은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정체성이 명확합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리어 왕에 1막4장 대사입니다. “아아!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 있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느냐!” 이 대사는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 왕의 탄식입니다. 우리가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으면 방황합니다. 그리스천으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가져야합니다. 교회에 왔을 때만 정체성이 있고 나가면 사라지면 안됩니다. 어디가든 가져야 합니다. 신앙이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하면 안되겠습니다.

그러면 의미를 알아봅니다. 첫째 종입니다. 종은 노예입니다. 매인 사람입니다. 우리는 매이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TV 프로 “나는 자연인이다.”를 좋아합니다. 이 시청률이 처음엔 폭망 할 줄 알았답니다. 그러나 3퍼센트에서 7퍼센트대로 꾸준히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이 프로를 보며 대리 만족을 합니다.

말다툼하다 이런 말합니다. “너 말이 맞으면 내가 니 아들이다.” 남의 아들 되는 것도 기분 나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를 종, 노예로 대 로마서 첫 문장에 적습니다. 당시는 로마 군대가 정복 전쟁을 하고 돌아올 때 퍼레이드를 합니다. 행렬 맨 뒤에 족쇄 채워서 끌려가는 사람들이 노예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님께 족쇄 채워진 자로 소개합니다.

왜 종으로 소개했냐 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아닐 때 사단의 노예였습니다. 이 때 가시 뭉치를 맨발로 차는 듯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여기서 해방됩니다. 예수님께 매이면 매일수록 세상 속에서는 자유롭습니다. 우리 ‘사랑의 포로, 사랑의 노예’ 란 말 씁니다. 부부사이에서 서로 깊이 사랑하면 서로 노예가 됩니다. 부부가 서로 매이면 매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매이지 않아 자유롭습니다. 다른 사람이 눈에 안 들어옵니다. 서로에게 안 매이니까 한 눈 팝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묶이면 묶일수록 세상에 부, 명예, 권력, 욕심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노예를 좀 더 생각해봅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주인이 노예 시장에서 팔려갈 위기에 있던 우리를 돈 주고 샀습니다. 이 돈을 속전이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팔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 돈을 치르셨죠? 목숨으로 값을 치루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값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상전입니다. 예수님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죽으라면 죽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도로서의 바울

두 번째는 사도입니다. 뜻은 “보내심을 받은 자” 입니다. 사도는 하나님 대리자로서 권위를 받고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입니다. 제자와 또 다른 의미입니다. 마태복음10장2절에 12제자들만을 사도로 칭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12명 뿐 아니라 70명도 있었고 120명도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27권 정할 때 사도가 쓴 서신서 여야 한다는 조건도 들어갔습니다.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했어야 하고 부활, 승천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9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또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 받았습니다. 사도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도 행합니다. 영적인 은사를 나누어 주었고, 교리를 정립했고, 진리 안에 사람들을 견고케 합니다. 교회의 질서도 세우고 감독과 장로들을 지명도 합니다. 우리는 바울을 따라서 예수님의 종으로 자신을 소개해도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면 곤란합니다. 사도의 직무를 받은 사람은 12제자와 바울까지 만 봅니다. 사도의 은사도 1세기 몇몇 성도 정도에서 그친 것으로 봅니다. 바울이 또 서신서 첫 절에 자신을 사도라고 한 것은 로마서 서신이 그만큼 권위가 있다는 반증입니다.

택정함을 입은 바울

세 번째는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다.' 입니다. 택정함의 뜻은 '따로 떼어놓다, 별도로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택정함 받았다는 것은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리새인도 구별된 자란 뜻입니다.

바리새인은 셀프 분리 자입니다. 바리새인은 길갈 때 사람들이 오면 멀리 돌아갔답니다. 죄인들과 스쳐서 자기의 거룩한 옷자락이 더럽혀질까 봐 그랬습니다. 여인이 앞에 오면 눈감고 가다가 전봇대에 부딪혀 이마가 깨졌답니다. 그러면 그 깨진 이마를 자랑스러워했답니다. 택정함을 받았다 하면서 이렇게 자기를 분리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발 딛고 사는 사람들로서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 이러면서 목을 꼿꼿이 세우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이 택정하셨다는 뜻은 우리의 구원도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함이라는 뜻입니다. 언제부터 택정했는지 그 시점을 알면 은혜가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어머니 태에 자신가 생기기 전부터 구별하였다 합니다.(렘1:4) 엡1:4절을 보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합니다. 시편139편16절도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습니다. 우리는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마음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개인적으로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부분이지만 그만큼 우리의 구원은 위대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

끝으로 살펴볼 말씀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구원의 소식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고 복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말 기쁘냐고 묻고 싶습니다. 정말 매일 뛸 듯이 기쁩니까? 항상 기쁩니까? 복음이란 말을 너무 많이 듣고 친숙 해져 이제는 무덤덤하지는 않은 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율법과 대척점에 있는 개념입니다. 율법은 죄를 튀어나오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죄가 있는 곳에 무서운 형벌만이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 하면 늘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 벅찬 표현이 로마서1장16절에 나옵니다.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부끄러워하지 않는 다는 표현이 반어법을 써서 절대적인 감격을 표현한 문구랍니다. 감격스러워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이사야35장6절은 복음을 들은 사람을 “저는 자가 사슴같이 펄쩍 펄쩍 뛴다고”합니다. 눅2:18,20에는 들에 있었던 목자들이 이 복음 소식을 듣고 놀라고 영광 돌리고 찬송했습니다. 지상 최대의 기쁨, 세계 최대의 기쁨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나는 영 기쁘지 않아! 심각 해!”이러면 곤란합니다. 교회는 축제 분위기여야 합니다. 잔치 분위기여야 합니다.

기쁘지 않은 이유를 영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죄의 깊이를 제대로 몰랐을 때입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고, 지금도 얼마나 큰 죄인이고 거기서 건져준 은혜가 얼마나 큰가 절실하지 않으면 기쁨이 반감됩니다. 또 죄 때문에 수 천도, 수만도 되는 지옥 불 못에서, 금광석도 엿가락처럼 녹여 없애는 뜨거움 속에 영원을 보낼 자였는데 구원해 주신 은혜를 묵상해보면 기쁩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 그 자체입니다. 그냥 선언이고 선포입니다. 복음에는 율법적인 요소, 도덕적 윤리적인 행위의 개념 없습니다.우리가 이 복음 자체만으로 기쁨을 회복하고 서로 사랑하며 주님의 일을 넉넉히 감당하는 명주로 교회 성도가 되길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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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르고의 하나님(롬1:2-5)

어떤 분이 로또 복권이 당첨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분이 있었답니다. “하나님 이번 회차에는 꼭 1등에 당첨하게 해주십시오.” 그러기를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10년이 갔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10년째 하나님의 응답이 왔답니다. 그 응답은 “얘야! 로또 복권이나 좀 사 놓고 기도하거라!”였답니다. 사 놓지도 않고 기도만 하니 하나님도 답답하셨던 모양입니다. 10년을 참다가 응답하십니다. 10년 기도한 사람도 대단하지만 10년 참으신 하나님도 대단하십니다. 오늘 제목이 라르고의 하나님입니다. 라르고는 음악에서 가장 느린 템포를 말합니다. 지난 주일에 롬1:1절 한 절로 교제했었고 오늘은 계속 이어서 교제하겠습니다.

 

2절부터 보겠습니다.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단어 하나하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이 복음은 하나님이”란 단어에서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이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머리 좋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세계에서 IQ가 제일 높은 사람이 230이랍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수학자 테렌스 타오란 사람입니다. 복음은 이런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계획하고 하나님이 시작하고 하나님이 완성하셨습니다.

 

두 번째 단어는 복음은 성경에 미리 약속하셨다 합니다. 이를 복음은 역사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천여 년에 걸쳐 하나님이 미리 약속하셨습니다. 학자들은 구약에 예수님에 관한 약속이 332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이 약속이 거의 다 성취가 되었습니다. 요즈음 대통령선거전이 아주 뜨겁습니다. 14명이 후보로 나왔답니다. 대통령 후보 단골손님도 있습니다. 그는 33가지 공약을 들고나왔습니다. 그중 수능시험폐지도 있습니다. 결혼하면 1억, 집을 사면 2억 준다는 공약도 있습니다. 후보들은 상대의 공약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공방을 펼칩니다. 실제 역대 대통령들의 공약 이행률을 검색하니10%~40% 사이입니다. 60~90%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약 이행률은 100%입니다. 민수기23:19절은“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란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는 구약에 332번 반복해서 미리 말씀하신 하나님을 통하여 한 가지 메시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공부할 때 선생님은 중요한 부분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아이들 꾸짖을 때도 입이 아프도록 반복해서 말했음을 주지 시킵니다. 복음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하나님 천여 년을 걸쳐 반복하셨을까요? 얼마나 애탔으면 그러셨을까요? 아직 복음을 영접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그만 애태우고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그의 아들에 관하여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씁니다. 4절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 고합니다. 딸과 아들의 어원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딸은 모계사회에서 어머니 ‘혈통을 따른다’는 데서 ‘따른다-따른다 하다가 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은 혈통을 ‘안 따른다’하여 ‘안따른다. 안따른다-아딸-아달-아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원이 재미있습니다. 우리의 정서에서 아들하면“엉덩이에 뿔 난 아들” “부모 말을 잘 듣지 않는 아들”을 상상을 합니다. 또 아버지 하면 자녀들에게 상처 주는 아버지를 상상하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하면 이해도가 떨어집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하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자신을 하나님 아들로 선언하셨을 때 유대인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유전자 검사해보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신성 모독이라 했습니다.(요10:36) 이것 때문에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 사형언도를 받으십니다.(마26:63-65) 하나님의 아들하면 하나님과 동등한 분, 구원자, 메시아로 유대인들은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아들하면 상속의 개념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 다 물려줍니다. 아버지에게 없는 것은 물려줄 수 없습니다. 없는 것을 물려 준다고 하는 사람을 우리는 사기꾼이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주시는 것 중 제일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우리에게는 없고 하나님에게만 있는 생명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 합니다. 원어로 조에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이 조에의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엔 세상 사람과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진 귀한 자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미리 약속하셨습니까? 선지자들을 통하여입니다. 선지자의 한자는 먼저 선(先) 알지(知) 놈자(者)입니다. 히브리어로 ‘나비’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예언의 말씀을 미리 알려주고 전하도록 특별하게 세운 사람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가감 없이 선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심판의 메시지도 그대로 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미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톱으로 켜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구약에는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가 16명이 있습니다.

 

본문 복음은 어디에 약속했습니까? “성경에”란 표현이 나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기록 한 책입니다. 하나님이 영감을 주신 기록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단어 하나하나에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실수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최종권위는 성경입니다. 링컨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고 설파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성경에 의한, 성경을 위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은 그 누구도 보태거나 뺄 수 없습니다.(계22:19, 마5:18) 성경은 유일무이한 권위를 가집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내용은 우리는 단 하나도 믿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계시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제가 저보다 인생 경험이 많으신 분들 앞에 설 수 있는 이유도 성경의 권위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인생철학 얘기하고 처세술 얘기한다면 설 자격이 없습니다.

 

성경 기억하시면서 본문 2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지금은 구약, 신약이 다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초대 교회 때 승천하신 예수님은 1년 후면 오실 것으로 예상했답니다. 그런데 지금 몇 년이 지났죠? 2022년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되시고 탄생하시기까지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모세도 당시로부터 15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는 400년 동안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은 느려도 너무 느리게 보입니다. 음악에서 가장 느리게가 라르고(Largo)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라르고의 하나님입니다. 라르고 다음은 렌토(Lento) -아디지오(Adagio)-안단테(Adante)-모데라토(Moderato)-알레그로(Allegro)-프레스토(Presto)입니다. 우리 마음은 항상 프레스토인데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라르고처럼 보입니다. 처세술에 보면 “즉시 행동하라!” 원리가 있습니다. 내가 살을 빼겠다 마음 먹었으면 즉시 운동화 신고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즉시 행동에 옮겨야 성공확률이 높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도 즉각 조치 할 수 있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시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 먹자 마자 즉시 문제해결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즉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이 필요하셨고, 예수님이 부활하사 승천 하신지도 어언 2022년이 되었습니다.

교회 밴드에 맥도날드 형제님의 일일 묵상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런 제목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서두르지 않는 하나님, 라르고의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는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100% 이해 못합니다. 그러나 라르고의 하나님을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이 긴긴 기간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의 죄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죄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가 드러내셨습니다. 우리 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고 또 죄인이고 그만큼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 깨닫게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없이 돌아가는 이 세상 이 어떠한지 한번 보이신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 교육, 철학, 능력만으로 만든 세상이 지금 어떠합니까? 과거는 어떠했습니까? 전쟁이 끝임없이 있었습니다. 1,2차 세계대전도 있었고 지금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하니 하지 않느니하며 탱크 수백대가 왔다 갔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세상이 행복해 졌습니까? 영혼의 살림살이가 나아졌습니까? 우리 나라 자살율이 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 아닙니까? 하나님 없는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음을 하나님은 긴긴 역사를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율법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롬3:20“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율법 지킴으로 구원은 불가능함을 이스라엘이라는 샘플을 통하여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며 하나님이 어떤분인지 보여주셨습니다. 바벨탑 사건, 노아의 홍수,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지는 일 등 구약은 하나님의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활동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시고 통제권을 가진 분이심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들입니다.

 

네번째는 지금 2022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예수님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 처럼 보이는 이유는 베드로전서3:9절에 나옵니다.“하나님은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입니다.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고 한 명이라도 더 건져 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라르고의 하나님은 마귀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마귀의 유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결과 세상을 살기 좋게 만들었습니까? 유토피아를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님 안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라르고의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는 인내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드라마에 비유한다면 단막극이 아닙니다. 16부작도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기까지 하나님의 드라마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무섭습니까? 직장 상사가 무섭습니까? 스트레스를 줍니까? 나를 누르는 권력이 두렵습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어떤 악의 세력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 다 사라졌습니다. 하나님 없이 이룩된 어떤 문명도 사라졌습니다. 앗수르, 애굽, 바벨론, 니느웨, 그리스, 해가 지지 않았던 로마도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히틀러도 결국 사라졌습니다. 악은 언젠가는 망합니다. 하나님 만이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 만이 두려워 해야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내 할 수 있습니다.

 

3,4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본문을 간단히 설명드리면 제가 아버지와 아들 설명하며 하나님께 없는 것은 우리에게 물려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려 준다 하면 사기꾼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 없는 것은 인간이 되어보신 경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체휼하시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인성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싱크로율이 100%입니다. 예수님 꼬집어도 안 아픈 몸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았습니다. 다르면 안됩니다. 그런데 다른 점 한 가지 죄가 없으십니다. 본문에 성결의 영이라는 표현이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선포되셨습니다. 부활로 예수님이 구원자, 메시아가 맞음이 입증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죽은 자들이라는 복수형은 바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부활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부활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부활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다는 것은 구약에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실 것이라고 미리 약속하셨고 이 약속의 성취자가 예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긴긴 족보가 있습니다. 읽기도 귀찮은 족보를 왜 넣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본문 마지막 구절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주가 붙습니다. 오래전 제 친구는 주는 그리스도란 의미를 ‘예수님은 뭘 많이 주시는 구나!’ ‘예수님 믿으면 뭘 많이 받겠구나’하고 오해를 하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주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 때는 황제 가이사가 사람들의 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들은 사자 밥이 되거나 화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자 밥이될지언정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주님으로 고백하면 영적인 많은 보화들을 주기도 하십니다.

 

끝으로 5절을 보고 정리하겠습니다.“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본문에 그의 이름을 위하여란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하나님께서 계시의 수단으로 쓰십니다. 성경에 이름 뜻을 알면 그 사람의 인격과 미래 존재 자체를 알게됩니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것은 그분의 명성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불치병을 고침 받으면 그 의사의 이름과 병원 이름을 동네 방네 소문 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명성에 대한 소문을 많이 내야 겠습니다.

 

본문에 믿어 순종케 한다는 표현에서 순종하면 우리가 행위를 많이 해야할 것 같아서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순종(obedience)의 영어 어원은 귀담아 듣다(hear)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다루시는 죄는 불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이 실과 바늘처럼 붙어서 나옵니다. 순종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21장28절부터입니다. 포도원지기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부탁을 합니다. 첫째아들은 가겠다고 입으로만 말해 놓고 가지 않고 PC방에서 하루 종일 게임만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지 않겠다 해 놓고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사람은 누구냐고 묻습니다. 복음을 믿어 순종한다는 것은 둘째아들 같이 회개의 의미가 가미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반역의 깃발을 든 죄인이었음을 깊이 인식하고 회개하고 그 깃발을 내놓고 주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입으로 머리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삶과 인격의 변화가 동반된 것이 진정으로 믿어 순종하는 자들임을 말씀드리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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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Power)(로마서1:6-17절)

로마교회의 시작

우리가 잘 알듯이 1세기 로마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철학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도시와 비교하면 로마교회는 작았습니다. 하층민이 많습니다.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회 부적응자들이라는 오명도 썼습니다. 로마교회는 사도들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어서 신앙의 뿌리가 약해 흔들리기 쉬웠습니다. 사도바울은 직접 로마에 가서 이들을 돕고 싶었는데 길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썼는데 로마서입니다. 바울은 로마라는 거대한 세상 숲에서 성도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복음의 진수를 가르칩니다.

 

 

부르심을 받은 특별한 자들

먼저 6,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6.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방금도 언급했듯이 로마교회는 기죽기 딱 맞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기죽지 마십시오! 주눅들지 마십시오! 자긍심을 가지십시오.!“위로의 말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예수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넌 내꺼야” “내가 찜했어, 아무도 건들지마! 로마 황제도 못 건드려! ”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

또 기죽지 말아야 할 이유는 7절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과분한데 거룩한 자로 세웁니다. 우리 신앙의 ABC는 사랑입니다. 기독교는 사랑 빼면 시체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모든게 다 흔들립니다. 사단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공격합니다. 우리도 세상이 로마제국처럼 커 보일 때가 많습니다. 내 밥줄을 쥐고 있는 권세 앞에 한없이 작아집니다. 그러나 기죽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요 사랑의 대상입니다. 또 영적으로 보면 이름 앞에 성자가 붙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성어거스틴에게만 성자가 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붙습니다.

은혜와 평강을 기원

그다음 로마 성도들은 무엇이 필요합니까? 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평강입니다. 평강의 헬라어는 “에이레네”입니다. 히브리어는 샬롬입니다. 결합하다입니다. ‘둘이 하나로 결합 해서 평강을 이룬다.’입니다. 평강은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우리”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우리 아빠라고 합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친밀감,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고,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화목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 합니다. 요즈음 평강이 없는 시대요 평강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코로나 시대이고, 전쟁, 지역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참 평강을 누리는 자들 되길 기도합니다.

로마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칭찬

8절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로마 성도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8.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사도바울 8절에서 과장법을 씁니다. 당시 1세기 로마 인구수를 땅속에 묻힌 주화 더미로 추측합니다. 400~500만 명입니다. 로마교회 성도 수를 어림잡아 1,000명이라 한다면 인구 대비 비율 0.0002%입니다. 적은 수 신자 믿음이 온 세상에, 동네방네, 전파되었습니다. 요즈음 같이 SNS가 발달한 시대도 아닙니다. TV, 유튜브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적게 보이는 믿음도 크게 보는 시각 배웁니다. 사도바울은 세계의 심장이라 부르는 로마에 믿음을 가진 몇몇 성도가 있다는 사실로 로마 전체를 소망스럽게 봅니다. 우리도 믿음을 귀하게 여기고 크게 평가하는 자세 필요합니다. 교회는 실력과 능력을 크게 보지 않고 내면에 숨은 믿음을 크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늙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고 열국의 아비로 평가합니다. 사라는 열국의 어미로 봤습니다.

틀에 매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

8절은 과장법이 심합니다. 문법도 파괴합니다. 본문은 먼저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개역 한글은 첫째로 번역합니다. 첫째는 했으면 두 번째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집필하다 갑자기 로마 성도 믿음에 감동하여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내용을 써야함을 잊어버렸고 그 상황을 반영했다고 주석서에 나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형식에 매이지 않는 자세 배웁니다.

성령의 역사는 틀에 매이지 않습니다. 처음 대표 기도하는 분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떠합니까? 그분이 몇 마디만 하더라도, 기도의 형식과 내용은 서툴러도 감동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감동하여 설교 시간 지키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밤 늦도록 가르침을 계속하자 유두고라는 청년은 3층에서 졸음을 못이겨 1층으로 떨어져 죽었다가 살아난 일도 있습니다. 우리도 고정된 틀에 갖혀 진리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실천하는 신앙

9절을 보십시오.“9.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본문에서는 “내 심령으로 섬기는 이”란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심령으로는 NIV영어성경은 온 마음으로 섬기는( whole heart)이고 원어는 영으로(Sprit) 섬기는 입니다. 바울은 매사에 마음을 다하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바울은 따로국밥 신앙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것 따로 생활 따로 아니었습니다. 그의 부업은 텐트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도 심령으로 마음을 다해 섬깁니다. 우리 자칫하면 교회신앙 따로 있고. 집 신앙 따로이기 쉽습니다. 직장신앙 따로 있고 사업장 신앙 따로 있기가 쉽습니다.

예화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예화입니다. 몇 천 명이 모이는 교회에 목사님이 설교하려고 단에 섰습니다. 이때 검은 썬글라스를 쓰고 검은 양복 입은 2명 괴한이 소총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여기 예수님을 위해 총을 맞아도 좋다는 분만 남고 나머지는 다 나가십시오.”했답니다. 그랬더니 20명 정도 남고 혼비백산 밖으로 나가더랍니다. 그러자 괴한 두 명은 조용히 앞자리로 가 앉더랍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이제 설교 시작하시죠. 위선자들 밖으로 다 나갔습니다.” 했답니다. 너무 극단적인 예화이지만 위선적인 신앙 가지면 안됩니다.

자신의 뜻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바울

10절에서 14절을 보면 바울은 로마로 여러번 가고자 합니다.(10,13) 로마성도 만나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11)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서론에도 언급했듯이 길이 막혔습니다. 사도바울 기질상 대단한 의지의 사람입니다. 탱크와 같은 추진력과 열정가졌습니다. 길이 막히면 포크레인으로 길을 뚫어서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가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이 환경을 통하여 길을 막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막히면 뚫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다리거나 돌아갈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방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그가 로마에 간 방식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아입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갔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는 자세 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마방문의 이유

그러면 바울이 로마에 가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 관광입니까? 로마 건물 탐방입니까? 황제를 알현하고 정치적인 목적실현을 하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로마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견고케 함입니다. 로마에는 어린 성도가 많았습니다. 말씀을 꼴을 부지런히 먹고 자랄 필요성이 많습니다. 바울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합니다. 열매는 생명의 열매도 되고 성령님의 열매도 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12절입니다.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과 로마성도의 영적 수준차이는 큽니다. 바울 은 교만할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삼층천도 본 사람입니다. 자랑 거리로 삼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성도에게 피차 안위함을 얻겠다고 합니다. 피차란 단어에 주목 합니다. 로마 성도들과 상호교제를 통하여 바울도 마음의 힘과 용기를 얻고자 합니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는 자세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는 다르고 다양합니다. 성도간에 간증을 서로 나누며 안위함을 얻는 자세 필요합니다.

빚진자의 마음

15절을 보십시오. 15.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사도바울은 온 세상 만민에게 빚졌다는 마음 가졌습니다. 빚졌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2가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 빚진 마음이 있으면 갚으려는 생각으로 꽉 찹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빚졌습니다. 예수님의 원수 노릇을 했던 자기를 용서하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습니다. 영원한 생명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진 빚을 세상 만민에게 돌려주려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만나는 누구 든지 복음으로 빚을 갚으려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두 번째는 바울은 빚을 충분히 갚고도 남을 자산이 있었습니다. 빚을 져도 채무 능력이 있어야 갚을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파산합니다. 바울 나누어줄 영적 자산이 많았습니다. 나누어줄 영적 양식이 많았습니다. 그 자산은 복음 자체이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도 됩니다. 지위고하 인종 국경 넘어 세상 만민에게 필요한 것이 복음입니다. 바울은 복음 하나 때문에 빌게이츠보다 더 부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빚 갚고자 열정을 다하는 모습 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

그러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16절을 참고합니다.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유대인 헬라인은 세상 만민들을 대변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다고 선언합니다. 복음은 힘을 중시하는 당시 사회의 시각으로 보면 부끄러울 요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도 부끄러움의 요소입니다. 파리 날리던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시골 나사렛에 가난한 목수 출신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는 십가가에 힘없이 죽으시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고 놀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험난한 세상을 살려면 자기 PR도 하고 약간 교만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뭐라고 하십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있다합니다. 우는 자,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덴에서 설교를 들은 철학자들은 말장난한다고 놀렸습니다. 우리도 간혹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쉽니다. 어떤 분은 교회 올 때 성경을 신문지에 싸서옵니다.

루터의 예화

바울이 복음이 부끄럽지 않는 이유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합니다. 우주와 천지 만물을 창조한 능력입니다. 복음은 관념, 이념, 철학이 아닙니다. 객관적 사실입니다. 이 능력은 2000여년전 이스라엘 땅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까지 힘이 미쳤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17절에 나옵니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기독은 그리스도를 한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구교에서 나온 신교라고 해서 개신교라 하고 영어로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합니다. 프로테트탄트는 저항이란 뜻입니다. 이유는 16세기 독일의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데서 유래합니다. 루터에게 저항의 불꽃을 당겨준 말씀이 오늘 17절 말씀입니다. 루터가 이 말씀을 받게 된 에피소드가 3가지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루터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많습니다. 그래서 신부가 되어 고행을 하고 금식도 하고 자기 육체를 괴롭히면서 구원의 확신과 마음에 평화를 얻고자 했는데 실패합니다. 그러다 로마서를 연구하다 로마서1장17절 말씀에 이르러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두번째는 루터가 교회 일로 로마에 가려고 알프스 산을 넘다가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본문 말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이 마치 천둥처럼 들려왔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기적적으로 병에서 회복합니다.

세 번 째는 그는 고행을 하기 위해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려고 올라간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었습니다. 피를 흘리며 올라 가는 도중에 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그 순간 고행을 중단하고 도중에 내려왔습니다. 그는 이를 계기로 인간은 고행이나 공로로 구원받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굳게 붙듭니다.

죄인인 인간이 스스로 노력으로 또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나타난 하나님의 의인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디. 믿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이라는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줍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모두 만족시켰습니다. 이런 우리는 더 이상 죄책감, 정죄감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끝으로 본문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의 영어 숙어는” from A to B“로 A로부터 B까지란 뜻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한다.”는 뜻입니다.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도 항상 믿음 잃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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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핑계 없음 (로마서1:18-21)

오늘 말씀은 로마서1장의 마지막 14구절입니다. 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구절입니다. 귀를 막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넘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인데 그러면 안 되겠죠? 오늘은 진노의 하나님이 나옵니다. 진노의 진(震)자는 천둥, 벼락 할 때 쓰는 우레 진자입니다. 노(怒)는 성낼 노자입니다. 하나님이 천둥같이 매우 노한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대표적 이단이 영지주의라 합니다. 이들은 보편구원론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화 하나 안 내는 분, 그저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만 있다고 하면서 때가 되면 의인과 악인 모두 보편적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지옥도 당연히 필요 없습니다. 지옥 갈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텅 빌 지옥은 필요 없습니다.

 

오늘 본문 진노의 하나님은 이 주장을 정면으로 공격합니다. 우리도 복음 전할 때 아주 점잖게, 스마트하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축복의 말로만 전하고 싶습니다. 그저 믿으면 행복이 옵니다. 병도 고쳐지고 복 많이 받고 부자도 됩니다. 이렇게만 전하고 싶습니다. 100%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런 복음은 반쪽 복음입니다. 성경 전체에는 진노라는 단어가 231번이 나옵니다. 이중 로마서에만 10번이 나옵니다. 성경은 축복보다는 진노의 하나님 비중이 세 배 많습니다. 세례 요한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전한 첫 메지가 무엇입니까?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첫 설교를 들은 무리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이유도 진노의 하나님 때문입니다. “진로!”가 아니고 진노의 교리 아주 중요합니다.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의 현실

우리는 또 진노의 하나님을 통하여 인류 불행의 원인을 압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498명이라는 민간인 학살 현장도 보았습니다. 임산부들만 있는데 공격을 했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참 이해가 안 갑니다. 오늘날은 과학기술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합니다. 고도로 문명화되었고. 4차 산업 시대입니다. 지구촌이란 말할 정도로 지구 반대편 일도 실시간 아는 시대입니다. 교육도 발달했습니다. 요즈음 대학에서 키우려는 인재상은 창의성 가진 인재, 융·복합 형 인재가 트렌드입니다. 아니 4차 산업 시대 인간이, 창의적인 인간이, 융·복합 적인 인간이 더구나 이성을 가졌다는 인간이 전쟁이 웬 말입니까? 21세기에 동물처럼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웬 말입니까? 또 우리 하루가 멀다고 범죄 뉴스가 나옵니다. 얼마 전에는 가평계곡 살인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불륜 남녀가 보험금을 노리고 전남편을 야밤에 계곡물에 빠져 죽게 만들고 도주합니다. 엄마가 10살, 9살 자녀를 죽인 사건도 있습니다. 이런 전쟁 비극, 또 끝없는 범죄들을 우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진화론으로 설명이 되겠습니까? 최고의 고등동물로 진화한 인간이 왜 이럽니까? 찰스 다원이 앞에 있다면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미스터 다윈 씨? 정말 우리는 좋은 방향으로 진화해 왔고 앞으로 진화해 가고 있습니까?” 거꾸로 가는데 다윈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이런 세상에 대한 답을 줍니다.

진노의 첫째 원인 불경건

18절부터 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세상이 이렇게 된 원인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2가지 입니다.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입니다. 경건하지 않음은 불경건 입니다. 경건의 한자 뜻은 공경할 경(敬) 또 공경할건(虔) 자입니다. 사전적 의미의 경건은 “초월적(超越的)이거나 위대(偉大)한 대상(對象) 앞에서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操心)하는 상태(狀態)”입니다. 초월적이고 위대한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이 없는 걸 경건하지 않음, 곧 불경건의 뜻입니다. 불 경건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는 삶,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불신의 죄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불의입니다. 옳지 않음을 말합니다. 도리에 어긋나는 모든 행동을 말합니다. 도덕적인 죄, 윤리적인 죄 법을 어기는 모든 행동들을 말합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전쟁범죄, 살인죄는 다 불의에 속합니다.

진노의 두번째 원인 불의

이렇게 불 경건하고, 불의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양상은 성경에 잘 나옵니다. 성경에서 최고의 진노는 노아의 홍수입니다. 하나님은 불 경건하고 불의한 세상을 노아와 가족 8명만 남기고 물로 한번 쓸어버렸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도시 멸망 사건도 있습니다. 이 도시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합니다.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합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하늘에서 유황불을 내리는 진노를 합니다. 또 하나님은 택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도 진노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70년을 종살이했습니다. 개인에 대한 진노도 많이 있습니다. 교만했던 느브갓네살 왕은 소처럼 들에서 짐승과 함께 풀을 먹으면서 7년을 사는 진노가 떨어집니다. 신약의 헤롯 왕은 이상한 벌레에 먹히는 진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도 압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처참하게 죽여야만 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섬뜩한 진노를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앞으로 하나님이 불로 태우는 진노가 있으리라 예언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수없이 언급합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자 없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

그러면 하나님 왜 이렇게 진노하십니까? 첫째는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세상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를 모른 척하고 살아간다면 어떡하겠습니다. 하나님도 주인을 몰라보는 불경건에 대하여 진노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하나님은 불경건과 불의의 죄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두움의 세력인 사단과 관계된 모든 것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책임을 물으시고 공의로 심판합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근거 첫째 옳고 그름의 법칙

그럼 이쯤에서 진노의 하나님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았던 유대인들에게나 진노하시면 되지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들까지 심판하면 불공정하지 않은가? 정의, 상식, 공정에 어긋납니다. 또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습니까 하는 질문도 합니다. 이에 대한 답변이 19절에 잘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이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을 알만한 정보를 우리 내면에 심겨 놓으셨다.” 고합니다. 그 정보를 우리는 옳고 그름의 법칙이라 합니다. 양심의 법이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눈만 뜨면 네가 옳으니 내가 오르니 싸웁니다.

오늘 아침에도 한바탕하고 오신 성도님도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옳고 그름의 싸움은 인간만이 합니다. 원숭이 떼를 호랑이 한 마리가 습격했다 합시다. 무리 중 원숭이 한 마리가 동료를 버리고 나무 위로 날름 올라갔다 합시다. 원숭이들이 회의해서 이 원숭이를 나쁜 놈으로 규정하고 추방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전쟁 중에 전우를 버리고 도망간 사람을 어떻게 여깁니까? 이 지구상 어디에서도 그를 칭찬할 사람은 없습니다. 다 비난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선함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기준은 교육으로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교육받지 못한 원시 부족은 잘 도망갔다고 칭찬하겠죠? 그러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옳고 그름의 법, 양심의 법은 하나님이 심어놓은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확실한 근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짓고 “아 시원하다, 상쾌하다.” 할 사람 없습니다. 무엇인가 속에서 쿡쿡 찌르고, 죄책감을 갖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근거 두번째 숭배의식

두 번째로 하나님을 알만한 근거는 절대자를 숭배하려는 감각입니다. 신감각이라 합니다. 인간이 사는 곳은 숭배 의식이 다 있습니다. 저 아마존, 아프리카, 호주 원시 부족에게도 있습니다. 어디 가든 물 떠 놓고 비는 의식합니다. 죄 씻으려고 동물 잡아 피 흘리는 의식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종교 없습니다. 인간만에게만 있습니다. 이런 신의식도 하나님 계신다는 근거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우리 속뿐 아니라 우리 밖에도 하나님을 알만한 근거가 있다고 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한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자연과 우주와 피 조세계를 보면 하나님을 압니다.

미세조정 상수를 통해 본 하나님의 전능성

저는 물리학과 출신이니 관련된 내용으로 하나 소개합니다. 미세조정 우주, 미세조정 상수에 대하여 하나 소개합니다. 욥기38잘32,3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입니다. 하나님이 별의 궤도와 땅의 법칙을 다 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중력을 측정하려면 중력 상수가 필요합니다. 우주 팽창 속도를 알려면 우주상수가 필요합니다. 상수는 철수와 같은 사람 이름이 아닙니다. 불변하는 숫자인데 이 상수들을 하나님이 아주 미세하게 잘 조정하셔서 우주와 생명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이론입니다.

 

얼마나 미세하게 조정하셨나 하면 온 우주의 원자들을 다 모아놓고 그 원자 한 개 고르는 값만큼 미세합니다. 예를 들면 핵 속에는 양성자들이 있습니다. 양성자는 전기적으로 플러스 성질을 띠어서 서로 밀기 때문에 한군데 모여 있을 수 없습니다. 있게 하는 힘을 핵력이라 합니다. 이 핵력이 지구 위에 바늘로 점 하나 찍는 만큼만 변해도 지구뿐 아니라 이 우주가 생기고 유지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정교하게 움직이는 자연과 우주의 질서는 우연히 생기지 않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움직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압니다. 이렇게 우리 내부, 외부 정보를 종합할 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핑계 할 수 없다 합니다. 하나님 없다 여김은 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 태양이 없다 함 같이 어리석습니다.

진노아래에 있는 인간의 모습

감사하지 않음

21절부터는 불경건과 불의한 인간의 모습을 열거합니다. 불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죄입니다.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첫째 불경건의 죄는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감사치도 않음 입니다. 영화롭게 한다는 뜻은 ”아름답게 하다.“”확대하다.“란 의미입니다. 이는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 돌림을 말합니다. 세상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벚꽃은 우리 보라고 피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핍니다. 그런데 오직 인간만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특히 인간은 창조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아름답게 하고 자신의 영광만을 드러내려 합니다.

불경건

두 번째는 감사치 않는 것도 불경건의 죄입니다. 마5장45절을 보면 하나님은 해를 악인이나 선인에게 골고루 비춰 주십니다. 비를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도 골고루 내려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상으로 받는 햇빛, 공기, 물, 비,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거 거저 받으면서 모른 척하면 안 됩니다. 감사해야 할 제목입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오늘부터 햇빛, 공기, 물 유로로 전환해 봅니다. 세무서에서 햇빛 세, 공기 새, 비세 일주일만 받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 실감 날 것입니다.

마음이 어두워지고 어리석게 됨

본문에서 또 사람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생각이 허망해지고, 마음이 어두워지고, 어리석게 됩니다. 그래서 피조물을 숭배합니다. 22절, 23절, 25절, 28절을 참고하면 사람, 새, 짐승, 동물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 섬깁니다. 사람도 섬깁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히틀러 때문에 유대인 600만 명이 학살당합니다. 팬심 즉 연예인을 좋아하는 일도 지나치면 문제입니다. 그래서 연예인이 자살하면 같이 따라 죽습니다. 그 이외에도 뱀, 지네, 파리, 바퀴벌레 신도 있습니다. 외계인도 만들어 섬깁니다. 강신, 이신, 모기 신, 우박 신, 메뚜기 신 등 많습니다. 이게 우둔하게 된 증거입니다.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꿈

25a절에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다는 말씀은 신화를 말합니다. 신들끼리 서로 싸우는 그리스 로마신화 등을 말합니다. 우리도 단군신화가 있습니다. 곰이 마늘 먹고 사람이 되어 우리 조상이 되었다는 신화입니다. 하나님은 영이 십니다. 형상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려는 시도가 신화입니다. 하나님을 신화화 하는 것은 하나님을 내 손으로 주무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불의의 양상

두 번째는 불의의 양상입니다. 24절~32절까지입니다. 온갖 죄의 유형을 열거합니다. 사도 바울이 2000년 전에 진술한 내용인데 오늘날도 매일 TV 뉴스로 직간접적으로 보는 죄들입니다. 1세기나 21세기나 인간의 본성은 변함없습니다. 본문은 21가지 죄인의 유형이 나옵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지옥에 가면 여기 열거된 21가지의 유형의 사람들과 아주 즐겁게 삽니다. 특히 6번째 유형인 연쇄살인범하고 같이 삽니다. 그렇게 하려면 계속 예수님을 거부하면 됩니다.

몇 가지 어려운 표현을 살펴봅니다. 10번째 유형 수군수군하는 자가 있습니다. 여기 가서 수군수군 저기 가서 수군수군, 앞에서 수군수군 뒤에서 수군수군하는 자들입니다. 뜻은 은밀하게 남을 헐뜯는 자를 말합니다. 수군수군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근거 없는 뭐 뭐라 카더라 뉴스도 같은 수군수군 입니다. 요즈음은 인터넷 댓글로 수군수군 많이 합니다. 악성 댓글 폭탄으로 당사자가 목숨을 버리게 만드는 일도 봅니다. 12번째 유형 능욕은(凌辱) 업신여길 능 욕될 욕 자로 남을 업신여기고 욕보이는 자를 말합니다. 19번째 유형 배 약(背約)은 등 배, 맺을 약으로 약속을 등진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배신자입니다.

24a, 27a, 29절은 특히 성도덕이 땅에 떨어짐을 합니다. 요즈음은 동성결혼도 28개국에서 허용하는 시대입니다. 우리 나라도 차별금지법 입법은 시도했으나 아직 통과는 안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32절을 보면 더 나쁜 걸 알고도 일부러 고의로 죄를 짓는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는 하나님이 심어 놓은 양심이 있어서 죄를 지면 벌 받고 죽을 줄 압니다. 그러면서도 합니다. 그리고 죄를 과감하게 짓는 사람들을 잘했다고 박수 칩니다. 또 죄짓는 사람은 남을 끌어들입니다. 죄책감을 나누려는 속셈입니다.

내어버려 두시는 심판

본문에 하나님이 물리력으로 직접 심판하는 진노 외에 다른 진노 방법이 나옵니다. 세 번 반복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24절, 26절, 28절입니다. 28절을입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이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니 하나님도 우리를 마음에 두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같이 됩니다. 세상이 지옥처럼 변합니다.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신다는 부분에서 무책임한 분으로 묘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도 우리를 사랑하시 방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부부간에 서로 사랑한다면 서로의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합니다. 남편이 부인의 머리 색깔, 구두 색깔, 옷 스타일, 사사건건 일거수일투족에 간섭한다고 해보십시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가 나쁜 길로 갈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자유의지를 발휘해 하나님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결과 세상은 많이 망가졌습니다. 서두에 세상이 불행하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 하나님이 내버려 두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품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지 말자

그럼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처음으로 18절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고 있는 대상은“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막는다는 뜻은 의도적으로 밀어내고 눌러버리고 진리를 목 졸라 없앤다는 뜻입니다. 그럼 진노가 쏟아지지 않게 하려면 어찌합니까? 진리를 막지 않으면 됩니다. 진리는 헬라어로 ‘알레떼이아’라고 합니다. 단어의 뜻은 ‘실체, 진짜 원형’이랍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은 구약시대에는 모형으로 예언되었고 신약에는 실체로 오셨습니다. 진리는 실체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으면 됩니다.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서 진리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에서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불경건과 불의에서 구원받아 의롭다 인정받습니다.

끝으로 25b만 참고합니다. 바울은 뜬금없이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뉘앙스는 사도바울이 인간의 불경건함과 불의를 열거하다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문뜩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잠깐 멈춰서서 멀어진 마음을 예수님께로 돌이키고 찬송하고 '아멘' 하는 모습을 반영합니다. 마음이 예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Come Back”합니다.우리 성도님들도 수시로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좀 멀리 갔다는 생각이 들면 사도바울처럼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오시길 기도합니다. 또 아직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시길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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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로마서2:1-29)

배꼽티를 입고 온 청년에 관한 예화

교회에 배꼽티를 입고 오는 젊은 청년 여성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얘기했습니다. “복장을 좀 점잖게 입고 올 수 없나요? " 그러자 "왜? 배꼽티가 어때서요?” “저는 성경말씀대로 합니다. 삼상16:7절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제 중심을 잘 보시도록 항상 깨끗하게 해서 옵니다.”했습니다. 이 예화는 말씀의 진의를 보지 못하고 표피적으로만 이해를 한 극단적인 예입니다.

오늘 본문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내로남불

내로남불 잘 아시죠? 불이 들어가 불교용어는 아닙니다.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의 줄임말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매우 관대하면서 남은 날카롭게 판단한다는 신조어입니다. 오늘날은 판단사회라 할 수 있죠? 특히 요즈음은 익명성을 이용한 인터넷 댓글, 악풀이 난무합니다. 악플로 남에게 상처 주는 예가 많습니다. 인간은 강하게 보이지만 약합니다. 특히 영혼은 금방 만든 순두부 같아서 쉽게 상처받습니다. 2000년대부터 악플 때문에 죽은 연예인 40명이랍니다. 판단의 마음 때문에 국가 간에는 전쟁도 불사합니다. 오늘 말씀은 남을 판단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29절까지깁니다. 판단이란 단어와 이와 유사한 심판, 진노, 분노, 고발, 정죄라는 단어가 13회 나옵니다. 1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러므로란 접속부사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1장하고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장을 4자로 줄이면 이신칭의입니다. 이신득의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입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있죠? 바로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다는 것 자체로 이미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라 여겼습니다. 유대인은 선민의식이 강해 이방인은 다 개와 돼지 취급합니다. 이방인의 집에는 발을 들여 놓으면 더럽혀 질까봐 발 한쪽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판단에 대하여는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유대인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문제

본문 1절은 이들의 문제를 바로 지적합니다.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우리 속담에도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검지 손가락으로 저 나쁜 놈하고 가리키면 손가락 네 개는 자신을 향합니다. 1:4의 비율입니다. 자기에게는 잘못이 네 개나 있으면서 한 개 있는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우를 범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문제를 왜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는가 하면 인류의 불행은 선악을 판단하는 체계 속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부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처럼 선악을 판단하게 된 것이 인류가 타락한 이유입니다. 인류가 불행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판단“은 원어로 ”크리노’라고 읽고 재판정에서 재판관이 죄의 내용과 질, 형량 등을 선고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의 딜레마

유대인들의 문제는 오늘 본문 17-29절에서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17-29절을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부름 받은 민족이고. 율법을 받은 민족으로 특권의식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자기들을 인도자, 빛, 교사, 선생, 하나님 뜻을 아는 자, 선의 분별자로 여겼습니다. 좋은 것은 다 같다 붙입니다. 또 이들은 할례를 대단한 자부심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은 모세로부터 받았고 할례는 그 이전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방인을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라 부르면서 무시합니다. 이런 유대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외식주의입니다. 한식, 중식 할 때 외식이 아니고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다 썩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이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죠? 겉은 깨끗한 척했지만 속은 각종 죄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민족이지만 하나님을 욕먹이는 역할을 합니다.

20절을 보면 주변에서는 다 욕하는데 자칭, 스스로 그렇게 믿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들은 마음으로 도둑질, 간음, 우상숭배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할례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책망합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자부심을 가졌고, 가장 민감한 할례를 부정합니다. 표피에 할례를 표시하는 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마음의 할례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육체의 할례인데, 육체에 할례가 마치 구원의 표로 사용하면 안 된다합니다.

외식, 형식주의 경계

본문에서 몇 가지 메시지를 배웁니다. 첫째 외식, 형식주의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이번 주에 침례가 있습니다. 침례라는 형식에 대단한 효험이 있어서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몸을 담글 바닷물, 강물, 수돗물에 구원을 주는 특별한 성분이 있지도 않습니다. 이미 마음에 일어난 구원, 마음에 일어난 성령님의 역사를 겉으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 속 마음이 중요합니다.

성경쇼핑

두 번째는 저는 성경쇼핑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구약성경을 자세히 보면 유대인들은 특권의식 가지라는 구절이 없습니다. 만민을 품고 섬기라는 구절이 수없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경을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았습니다. 우리도 성경에 좋은 부분만 쇼핑 하기가 쉽습니다. 오늘 로마서2장같이 계속 심판의 말씀만 나오는 부분은 그냥 건너뛰고 싶습니다. 마트에서 시식 코너를 가듯 지나가고 싶은 부분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볼 때 심판에는 귀를 막고 축복 말씀만 골라서 보기가 쉽습니다. 성경쇼핑 조심해야하고 말씀 골고루 먹는 자들 되어야합니다.

당을 짓는 문제

세 번째 당을 짓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8절을 보십시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당을 짓는다의 당자는 무리 당(黨) 자입니다. 주석에는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논쟁에 가담하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당을 지으면 힘이 생기고 그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 들입니다. 바벨탑이 첫 번째 당입니다. 하나님은 당을 더 이상 짓지 못하게 언어를 흩으셨습니다. 신약교회인 고린도 교회도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그리스도파하고 당을 지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여당, 야당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도 끼리끼리 모이기 쉽습니다. 이는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뭉친 예수님 당 하나만 있어야합니다.

특권의식에 빠지지 말아야하는 이유

유대인들과 같이 특권의식에 빠져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2절부터 11절까지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즉흥적이고 엿장수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대로 합니다. 그리고 16절 보면 은밀한 것을 심판합니다. 은밀한 것은 마음 먹은 죄까지도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살인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더라도 살인할 마음만 먹어도 심판합니다.

심판의 형태에 대하여 본문6,9,10절에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개인이 받습니다. 집단으로 받지 않습니다.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단독으로 서서 받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6절을 참고합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보응은 착한 행위는 착한 행위대로, 악한 행위는 악한 행위대로 선과 악으로 되갚는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한 구절이 요한복음5장29절입니다. “선한일을 행한자는 생명이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믿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이나 다 심판을 받습니다.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위한 심판입니다. 신자들은 상을 주기 위한 심판입니다. 이 상은 이땅에서 쌓은 선한 행위의 마일리지가 얼마냐에 따라 차등이 생깁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마일리지가 땅에서 이미 사용된 것은 하늘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사용되었다는 뜻은 나의 믿음의 행위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박수받은 일입니다. 이 행위는 불타 없어집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은밀하게 카운트한 마일리지만 보응 받습니다. 이중 마일리지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은밀한 행위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조차도 모르게하라 합니다. 기도도 남들 모르게 골방 기도를 강조합니다. 우리가 은밀한 마일리지를 많이 쌓는 성도가 되길 기도합니다.

남을 판단한 댓가

남을 판단하고 악을 행하고 죄를 범함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현재로 댓가가 따릅니다. 본문9절을 보면 이런 자들의 영에는 환란과 곤고가 있습니다. 환란은 고통 고초 압박이 있다는 뜻입니다. 타작 마당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콩, 들깨 이런 털 때 도리깨로 세게 때리는 모습 연상하면 됩니다. 이렇게 영에 환란과 곤고가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본문 14,15절에 나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인간의 본성 속에 양심이란 재판관을 하나님이 두셨습니다. 그래서 악한 일을 행하면 양심이 마구 찌르고 괴롭힙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양심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양심은 선천적입니다. 학습되거나 후천적으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회개의 의미

본문 4절을 보십시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본문에 회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성경에 회개라는 단어가 56번 정도 나옵니다. 예수님, 세례요한, 제자들, 베드로, 바울 설교의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 입니다. 회개는 뉘우칠 회(悔) 고칠 개(改)자로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입니다. 성경적으로는 3개지 뜻입니다. 첫째는 라틴어로 repent로 “다시 생각하다.”입니다. 정상적으로 생각했는데 그 자리에서 멈추고 다시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나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경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헬라어로 마음을 바꾸다는 뜻입니다. 어떤 주제를 살펴보면서 마음을 바꾸고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회개는 반드시 행동을 수반합니다.

자동차 운전을 예로 들면 마트를 찾아 가는데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운전자가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을 먼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멈춰 서서 뉴턴해야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합니다. 그러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 운전대를 돌려서 뉴턴하여 E마트 쪽으로 가는 것까지가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면 삶의 방향과 습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삶이 조금씩 바뀌어야 정상입니다.

참고 선을 행한다는 의미

어떻게 바뀌는지는 본문7절과 10절에 나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참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구하는 자는 추구하는으로 번역합니다. 회개하면 추구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세상 영광, 자기 영광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영적인 것, 존귀하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것들을 추구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영생과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다. 마6:33절을 참고하면 회개하면 우선적으로 그의 나라와 의를 추구합니다. 마태복음5장23,24절은 예배보다도 더 우선순위를 두어야함을 말씀합니다. 예배드리기 전에 형제와 불화관계에 있다면 먼저가서 화해 해야합니다. 회개한 자는 형제 사랑을 먼저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문제에서 벗어나는 비결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문제에서 벗어나는가에 대하여 결론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봅니다. 마태복음7장5절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남의 죄를 들여다 보기 전에 먼저해야 할 우선순위를 정해줍니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고 빼라 합니다. 들보는 집 지을 때 지붕을 가로로 떠받치는 큰 나무기둥입니다. 대들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대자를 뺀 것이 들보입니다. 티는 우리가 입는 옷이 아닙니다. 재나 흙 그밖에 온갖 물건의 작은 부스러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남에게서 티처럼 작은 잘못이 보이면 자신에게는 대들보같이 훨씬 큰 죄가 있다고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라는 말씀입니다. 내 속을 먼저 들여다 보고 깨끗하게 하고 나서 남의 티를 보라고합니다. 나에게 들보가 빠지면 남의 티를 빼주려고 하기 보다는 용서하고 덮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예가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는데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꼭 물 안 내리는 사람 있습니다. 남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유아적인 발상 때문인지 꼭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예는 아닙니다. 공중화장실입니다. 이런 경우 먼저 본 사람이 물 내리면 됩니다. 동네방네 소문내면서 안 내린 놈 누구야?하며 비난하고 찾고 발본색원 할 일은 아닙니다. 물 안 내리는 님은 또 나타납니다. 세상어디에도 있습니다. 판단, 비난으로 세상은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비난함으로 사람과의 관계만 나빠집니다. 교회에서 휴지가 나뒹굴고 있으면 먼저 본 사람이 치우면됩니다. 휴지 버린 님 찾아서 비난하고 혼낼 일 아닙니다. 흙먼지가 있으면 본 사람이 걸레로 닦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죄를 심판으로 해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용서라는 방법으로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성숙한다는 것은 점점 내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타인의 죄에 민감하기 보다는 내 죄에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세상 탓, 남 탓 환경 탓 하기 보다는 내 탓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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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의인이 될 수 있는가?(로마서3:1-25)

창조주의 솜씨 DNA

창조과학은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제시합니다. 인간의 유전정보인 DNA만봐도 위대성 확인합니다. 디옥시리보핵산이라는 영어약자가 DNA입니다. DNA집합체를 게놈이라합니다. 발음에 조심해야합니다. 우리 세포 한 개에 들어 있는 DNA정보를 책으로 만들면 1000권이고 일렬로 쌓으면 아파트 13층까지 쌓을 수 있다합니다. 몸 전체에 대해 책으로 만들면 미국 그랜드 캐니언을 40번 메울 수 있는 분량이라 합니다. 인간을 이렇게 형이하학적 관점으로만 볼 수없습니다.

인간은 영과 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희노애락이라는 감정도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예술도 추구합니다. 원숭이가 바이올린 켜면서 음악 즐기는 거 보셨습니까? 젓가락으로 간단히 두드릴수 있는 리듬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인간은 종교심도 있습니다. 원숭이가 물 떠 놓고 비는 거 보셨습니까?

 

 

인간 불행의 원인과 실상

오늘본문은 인간이 불행하게된 실상을 보임과 동시에 원인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를 전가 해 주는 방식을 속전과 화목제물로 증거합니다.

지금부터 인간의 죄인된 모습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늘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하고 싸웁니다. 개인 간에도 싸우고, 집단 간에도 싸우고, 나라와 나라 간에도 싸웁니다. 나라들끼리 연합해서 다국적으로도 싸웁니다. 요즈음 남북관계가 상당히 긴장 상태입니다. 북한에서 미사일 쏘면 우리도 대응해서 쏩니다. 미사일 한 발당 최대 60억이 든답니다. 얼마전에는 드론이 넘어와 긴장했습니다.

이렇게 싸운다는 것은 서로 선한 기준이 있고 각자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함으로 싸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제대로 잘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TV켜고 뉴스를 보면 아름다운 이야기만 나옵니까? 99프로가 좋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대부분 범죄이야기가 나옵니다. 법정다툼에서 졌다고 상대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자살방화를 하고 20대 부인이 40대 남편과 돈 때문에 다투다가 잠든 남편을 칼로 살해하는 뉴스도나옵니다.

세상은 많이 잘못됐습니다. 오늘 본문 9-18절을 보면 세상이 어떻게 불행한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아래 성경 참고 구절 9-12절까지 봅니다. 본문은 우리 모두다 죄 아래 있다고 합니다. 아래는 영향권아래 있습니다. 본문은 아예 우리가 태생이 죄인이라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짓습니다. 깨닫는 자가 없음은 영적인 무지를 말합니다. 세상에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유투브 검색만 해도 노래 잘하는 사람 많습니다. 기네스북을 보면 더 많습니다. 얼마 전에 타개한 송해MC는 최고령(95세) 노래경연 MC 로 기네스북에 올랐답니다. 전문가는 많지만 반대로 영적으로는 무지합니다. 엘리트라고 하는 사람들이 돼지머리 놓고 절합니다. 애기동자 찾아가서 점도 봅니다. 그리고 심지어 뭐라 합니까? 우리의 조상은 원숭이라합니다. 본문에 치우쳤다는 뜻은 길을 벗어났다입니다. 무익하다는 맛이 간 우유란 뜻입니다. 맛 간 우유는 쏟아버려야합니다. 본문은 그만큼 하나님이 보기에 인간은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12절 하반절은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합니다.

죄 아래 있는 자들의 실상

그리고 13-18절 부터는 죄 아래 있는 자들의 실상입니다. 목구멍, 혀, 입술, 입에 독은 사람이 말로 짓는 죄를 말합니다. 혀는 부드럽지만 사람을 죽이는 힘이 있습니다. 죄인의 특성은 입만 뗐다하면 남과 비교하고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입술에 독이 있다는 뜻은 이집트산 코브라를 염두 해 둔 발언입니다. 코브라는 독도 강하지만 독을 쏩니다. 우리도 말로 사람을 쏴서 죽입니다. 총칼보다 말이 더무섭습니다.

포털검색을 하다 남의 말에 상처 안 받는 특이한 방법 있어 소개합니다. 남이 나에게 한 비방 말을 종이에 일일이 쓴 다음 갈기 갈지 찢어 휴지통에 버립니다. 과연 효과 있을까요? 종이에 쓰면서 더열 받지 않을까요?

본문에 발은 피흘리는데 빠르다란 뜻은 폭력적인 수단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것도 아주 빠르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인류는 전쟁을 끊임 없이합니다.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피흘리고 있지 습니다. 시리아 난민 소년이 한 명언입니다. “그냥 전쟁만 뭠춰주세요! 그게 바라는 전부입니다.” 영국시인 줄리안 그렌펠은 “전 전쟁이 좋아요. 전쟁은 커다란 소풍같아요.”라고 전쟁예찬합니다. 우리속담에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은 불구경,싸움구경입니다. 요즈음 폭력이 더 심해집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옛날에는 권투가 인기였습니다. 솜뭉치 큰거끼고 주먹으로만 상대 얼굴과 몸만 때렸습니다. 요즈음 UFC는 얇은 장갑 끼고 온몸 다 써서 기절 할 때까지 때립니다. 심판이 기절 하나 안하나 살피고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16,17절은 죄의 결과를 말합니다. 인간은 파멸과 고생과 평강이 없게 되었습니다. 파멸 속에는 죽음도 포함합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왔습니다.

불행의 원인

그러면 인간이 왜 이렇게 죄를 짓고 불행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가 본문에 나옵니다. 본문에 대조적인 두 단어가 나옵니다. 거짓과 참(4,7절) 선과 악(8절) 의와 불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알려주는 구절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다(4,7)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다.(5,25)

창세기 1장26절을 참고하면 처음에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습니다. 형상은 성품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며 거룩합니다. 우리 인간 속에도 그런 성향을 심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선하게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코드가 심어져있습니다. 우리가 눈만 뜨면 싸우는 이유가 선악의 기준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 우리가 선하게 살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선한 성품을 심어놓았다는 예로 종교의식 봅니다. 세상 어떤 종교도 씻어내는 의식을 합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목욕하고 동물피도 뿌립니다. 하나님은 선을 요구하고 인간은 요구대로 살지못하여 불안하고, 죄책감 갖습니다. 이것을 씻기 위한 의식입니다.

우리가 선하게 살고 싶어도 못사는 이유는 본문11,18,23절에 나옵니다. 11절에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습니다. 18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죄를 함부로 짓습니다. 23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영광만 위해 삽니다. 착한일도 들여다보면 자기만족이고 자기영광을 위함입니다. 다 제 잘난 맛에 삽니다. 이상 세 구절을 종합하면 인간이 하나님 품을 떠났기 때문에 선하게 살고 싶어도 살지못합니다. 그럴 힘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 품을 떠남으로 절대성을 잃었습니다. 사단의 손아래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구원론하면 왜 그렇게 딱딱한 말을 씁니까? 의와 불의, 선과 악, 죄, 율법, 정죄, 심판, 칭의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쉬운 말을 써도 되지 않겠습니까? 법정 용어를 써야만 하는 이유는 왜입니까? 바로 인간의 상태와 하나님의 요구가 의롭느냐 불의 하냐 선하냐 악하냐의 구도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손길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저주받은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 갈 길로 가는 인간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르시고, 손을 내밀고, 끊임없이 찾아줍니다. 손내민 하나가 이스라엘을 택했습니다. 이들에게 율법을 주어 지켜서 의인되게 요구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19,20절에 보면 실패합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은 선행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율법은 마치 죄를 보는 거울 같습니다. 빨리 죄를 깨닫고 두 손 두 발 들고 하나님께 나오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율법을 주었습니다. 율법 앞에 서면 난 작아집니다. 죄없다고 변명불가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입을 막을 수밖에 없다합니다.

지금까지의 진술은 죄인인 인간이 의로워지는데는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의 영적 상황은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상태이고 응급실로 업고 뛰어가야 할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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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희망없습니까? 아닙니다. 21절부터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본문 원어는 이제는 앞에 그러나 가 붙습니다. 영어로 but now입니다. 대전환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캄캄한 터널을 지나 동굴 밖으로 나왔다는 표현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전할 때 즐겨 쓰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뭔가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차별 없이 의롭게 됩니다. 구원받는 다는 것은 의롭게 된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이 의라는 옷을 입혀 주시고 너 의인이야 하고 선언했습니다.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입니다. 본문에 주목할 단어는 나타났다입니다. 만들어졌다. 조작되었다의 반대 말입니다. 나타났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 사건이라는 뜻 입니다. 복음은 철학, 사상, 관념, 이론, 교훈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고 난타 난 사실 형이하학적입니다.

복음은 2000년 전에 예수님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강림이라는 역사적으로 나타난 사실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갑자기 나타난 분이 아니고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수 천년 동안 예언된 분입니다.

속전이 되신 예수님

23절부터는 이 나타난 예수님에 대하여 다른 말로 진술합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본문은 속량이라는 단어를 써서 구원을 설명합니다. 속량은 노예나 죄인을 누가 돈을 대신 내주고 풀어주는 행위이고 이 돈을 속전이라 합니다. 속량은 2가지 의미입니다. 첫째 자유롭게 풀려난다. 행방된다입니다. 두번째 누가 죗값으로 돈을 대신 지불해준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사단과 악령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다 지불한 셈이됩니다.

본문 25절은 우리의 죗값을 지불한 방법이 나옵니다. “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속량의 방법은 그의 피로써 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합니다. 그의 피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해방시키고 죗값을 대신 내주는 행위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사건입니다.

본문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했다에서 간과는 볼 간(看) 지날 과(過)자를 써서 지나가면서 대충 본다입니다. 아예 눈감아버린다는 뜻이고 의역하면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 과거의 죄뿐아니라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습니다. 속량은 구원이 우리 입장에서는 값없이 주어졌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희생시키는 값비싼 댓가를 치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값비싼 댓가에 대한 감사를 늘 해야합니다.

화목제물이되신 예수님

25절에는 예수님의 역할에 대하여 다른 표현이 나옵니다.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입니다. 화목제물은 불태우는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켜주는 제물입니다. 화목이라는 말은 가해자 가 피해 보상으로 피해자의 화가 풀어지고 좋은 관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지만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는 반드시 진노합니다. 성경은 580번이나 이 진노의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진노한다고해서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가볍게 화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속성상 죄와 죄인에 대하여는 그냥 두고 보지 못합니다. 죄는 그 자체도 문제지만 인격이 결부됩니다. 죄는 하나님의 인격에 해를 끼치고 나의 영 혼도 파괴합니다. 또 죄는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까지도 파괴 합니다.

죄는 관계를 파괴함으로 양쪽 편을 만족시킬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 제물로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피 흘려 죽게하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이 화목제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풀렸습니다. 화목제물로 세우셨다에 세웠다는 기념비를 세움 입니다.갈보리에 세워진 십자가는 인류에게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빼놓고 복음과 구원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러나 이제는 But now 나타난 예수님의 속량 때문에 또 세워진 예수님 화목제물 때문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율법과 정죄와 진노의 시대가 끝나고 은혜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BC가 끝나고 AD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유익

1-8절은 몇 가지 논쟁에 대하여 정리합니다. 1,2절로 돌아갑니다. “1.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미리 택한 유대인에게 아무런 혜택이 없다면 유대인이 좋을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은 것 자체가 나음이며 유익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말씀을 맡음은

특권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은 신구약 성경 66권을 말합니다. 성경은 보통 책이 아닙니다. 19세기에 들어와 고등비평이라는 학문이 생기면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려합니다. 성경의 영감, 계시, 무오류성을 훼손하려 합니다. 성경이 훼손되면 우리의 믿음도 흔들립니다.

유대인의 실패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지 않다.

3,4절은 택한 유대인이 실패했으면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가에 대한 답변입니다. 본문에 미쁘다는 신실하다는 순수 우리말입니다. 본문은 다윗의 시를 인용합니다. (시편51:4) 하나님께는 문제가 없고 언제나 의로우심을 마치 하늘 법정에서 재판장이 판결하는 모양으로 연출합니다. 인간은 실패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게 유지해 간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유대인이 넘어져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복음 역사를 이룹니다. 우리 이런 생각하기 쉽습니다. 내가 교회에 없으면 제대로 굴러가는가? 네 굴러갑니다. 하나님은 플랜B, 플랜C, 플랜D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 넘어지자 복음을 이방인에게 넘기고 유대인은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시기심이 생겨 돌아오게 만드십니다.

5-8절을 보고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은 구원받았으니 이제 막살아도 되지 않나?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니까 죄를 통 크게 지으면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을까? 이제부터 맘 놓고 술집으로 달려가자하는 이런 말도 안되는 논리에 대한 답입니다. 본문을 이해 시켜드릴 적당한 예가 없을까 생각하다 손양원 목사의 예를 들겠습니다. 손양원목사는 여수 애양원에서 나병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해인 1948년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때 당시 반란군 공산당원이 예수쟁이란 이유로 그의 두 아들을 총살을 합니다. 손양원 목사는 그런 원수를 용서하고 심지어 양아들로 삼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아들이 친 아들을 죽여서 아버지가 사랑의 원자탄이 되었으니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을 죽여서 악행을 행하면 아버지는 사랑의 원자탄이 아니라 사랑의 수소폭탄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궤변이 본문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말꼬리 잡기식의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바울은 이 논리에 대하여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마무리를 합니다. 악은 선을 생산해 낼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죄를 인정하기 싫고, 죄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고, 하나님께 전가시키려는 억지 주장일 뿐으로 본문을 이해하시면 됩니다. 끝으로 오늘 제목 한번 상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의인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가 의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성도가 모두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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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율법의 관계(로마서3:26-31 로마서4장1~25)

나로호 발사 성공

“ 지구를 떠나거라!”가 있었습니다. 나로호 발사 성공 했습니다. 12년 동안 개발비 2조 원 들었습니다. 우리는 억 단위가 넘어가면 감이 없는데 조 단위면 천문학적인 단위입니다. 왜 이렇게 돈이 많이 들까요? 중력 때문입니다. 지구를 떠나려면 중력을 벗어나야하는데 1초에 11.2km/s이상의 속도로 올라가야 합니다. 지구탈출 속도입니다. 총알이 0.9km/s입니다. 총알보다 나로호가 12배 빨라야 지구를 떠납니다. 우주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지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구를 벗나기 어렵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지구를 벗어나면 매우 위험합니다. 지구에서 안전한 곳은 어디입니까? 교회입니다. 장소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성도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예수님

간음한 여인을 살려준 예수님 사건 아시죠?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이 사건의 유머 버전입니다. 예수님이 군중들을 향해 외치셨죠?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양심의 가책을 받은 군중들은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합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예수님 발 앞으로 돌이 하나 뚝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한숨 한번 쉬시고 하늘을 보며 “아버지 하나님 제발 제일에 방해 좀 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답니다. “내가 바로 죄가 없는 자니라~~”

하나님은 죄 없으신 절대 선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죄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고 심판합니다. 여기서 아무도 빠져나올 자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는 의를 전가 받아야 가능합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1장16, 17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곡언법으로 소개합니다. 곡언법은 이중부정을 말하는데 히브리어 강조법입니다.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옵니다.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도 곡언법입니다. 로마서1:16절은 “복음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곡언법으로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복음을 선포 한 후 지금까지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십자가의 의미

오늘 본문 26절부터는 하나님 편에서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가 설명합니다. 본문 26절 참고합니다. “26. 곧 이때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감상적으로만 보기 쉽습니다. “얼마나 아프셨나~~~”하며 마음 아파하는 데서 끝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 편에서 보아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의롭다는 것은 한 점 흠이 없다. 항상 올바르다. 공의롭다.’라는 뜻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자기모순이 없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저희 아들이 6살 때쯤 E마트를 사랑한다는 말을 가끔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좋아하는 거 다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장난감 코너를 갔는데 로봇으로 된 티라노사우루스 공용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여기에 딱 꽂혔습니다. 남자아이들이 보통 공룡을 좋아하다 로봇으로 옮겨갑니다. 그런데 공룡으로 된 로봇이니 얼마나 갖고 싶었겠습니까? 가격을 보니 사줄 마음이 1도 안 생길 정도로 비쌌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못 사주고 한참 후에 사준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아빠 엄마 말 잘 들면 한 달 후에 사주겠다 약속했는지 아니면 생일을 핑계로 사줬는지 기억은 정확히 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말을 아무리 잘 들어도 며칠을 가겠습니까? 하루 이틀 하다가 맙니다. 아버지들은 아이들이 약속을 어겨도 모르는 척하고 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자기모순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그냥 눈감고 넘기지 못합니다. 독생자를 죽이심으로 대신 죗값을 받아 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속성상 이런 방식으로 의로움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 자기도 의로우시며”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자랑할 데가 없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구원은 의롭다고 함을 얻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구원은 나의 행위와 무관합니다. 오로지 믿음의 법으로만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자랑하지 못합니다. 본문의 법은 원리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래도 내가 뭔가 좀 잘나서 구원받지 않았나? ‘단 0.000몇 % 라도 남보다 나은 구석이 있지 않았나?’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내가 선택한 공로가 있지 않나?’란 생각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수단이요, 통로일 뿐입니다. 내 믿음은 아무런 실체가 없습니다. 100% 예수님의 공로의 효과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을 선물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그 선물에 리본 하나 단일 없습니다. 거져 받았을 뿐입니다. 선물 자체를 자랑해야지 선물 받은 나를 자랑하면 안 됩니다.

다윗과 아브라함을 예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원리 설명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을 다 할애하여 믿음의 법으로 구원받은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유대인이 가장 존경하는 2명입니다. 한국인은 누구죠? 1위는 이순신 2위가 세종대왕입니다. CEO들이 존경하는 인물 하면 바뀝니다. 1위는 광개토 대왕 2위가 이순신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의 법으로 의롭게 되었고, 다윗도 한 일 없이 죄가 사해졌음을 그의 시편을 인용하며 소개합니다. 롬4:4에서 8절을 읽어봅니다. 일하는 자는 월급을 당연히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덜 받았다며 불만을 품습니다. 요즈음은 자고 일어나면 기름 값이 뜁니다. 2천 원 선이 무너지고 벌써 2천100선도 넘었습니다. 이렇게 물가는 오르는데, 월급은 제자리라고 불만 많습니다. 본문은 구원을 일에 비유하여 일한 것이 없는데 월급 받은 거와 같다합니다. 결국 구원은 자랑할 수 없습니다. 다윗도 왕이었지만 치명적인 죄를 짓습니다. 밧세바와 그의 남편이자 충신인 우리야에게 간음죄, 탐욕 죄, 절도죄, 살인 교사죄, 직권남용죄를 짓습니다. 다윗은 이 죄에 대해 아무것도 일한 것이 없는데 불법이 사해졌고 죄가 가리어졌고 죄를 아예 인정치도 않으신 은혜에 관하여 시를 씁니다.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말씀에서 교훈을 생각해봅니다. 자랑은 남에게 드러내어 뽐낸다는 뜻입니다. 어원은 ‘수백 배로 말한다.’라는 뜻에서 왔습니다. 자랑은 엄청나게 부풀려 말하는 것이 어원입니다. 자랑은 유치원생도 합니다. 제주도 유치원생이 3명 나란히 앉아서 자랑했답니다. 자랑거리는 잠수 시간입니다. 첫째 아이가 “우리 엄마는 요즈음 수영 배우는데 잠수를 30초 나 한다.” 두 번째 아이는 “우리 할머니는 해녀인데 3분이나 잠수한다.” 했답니다. 이걸 듣고 있던 3번째 아이는 “우리 삼촌은 작년에 바다에 들어갔는데 아직도 안나오셨어!”하고 자랑하더랍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다들 자랑하는 맛에 산다고들 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자랑의 대가들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바울은 자랑치 말라고 권면합니다. 성경은 구원뿐 아니라 모든 삶에서 자랑하지 말라는 교훈을 반복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도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

계속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고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본문은 그러므로란 접속사로 시작하여 최종결론으로 믿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18세기 산데미니안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구원은 입으로만, 말로만 하면 된다.’ 주장합니다. ‘머리로만, 지적인 동의만 있으면 된다.’ 합니다. 오랫동안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기도하고 걱정하고 권면하여 분위기에 못 이겨서 구원을 시인합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구원을 시인했답니다. 주변 사람들은 매우 반가워하며 칭찬 해 주었지만 본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믿음은 입으로만은 안 되고 전인격적인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 완전히 설득당해서 믿어져야 합니다. 믿음에는 ‘나를 맡긴다. 의탁한다.’라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그러면 로마서 4장으로 다시 넘어가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알아봅니다. 아브라함 75세에 신앙 출발합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일할 나이를 지났습니다. 실제 아브라함은 많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BC2000년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바울처럼 선교역사의 주인공 역할도 못 합니다. 주변국에 전도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전도는커녕 먹을 것이 없자 잠시 이민을 갔다가 아내를 여동생으로 속여서 주변국에 욕만 먹이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2번씩이나 속입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주일 예배, 수요예배, 교회학교 교사 봉사, 교회차 운전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일독도 안했습니다.

이렇게 한 일이 없는데 왜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을 받습니까? 첫째 그는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한번 약속하셨으면 반드시 지키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주셨습니까? 롬4:13절참고합니다. 본문에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한 언약’은 길게 보면 예수님에 대한 약속입니다. 아브라함 아들 이삭 하나 바라보고 신앙 출발 했지만 나중에는 자기의 씨를 통해 탄생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요 8장 5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합니다. 역대 대통령의 공약 이행률은 13~40%로랍니다. 국회의원은 약간 높아서 46.8%랍니다. 인터넷에 혹시 결혼 전후 남성 공약 이행률 없나 찾아보았는데, 없었습니다. 우리 부모 세대 들은 서로 속았다고 합니다. 남성들은 결혼 전에는 하늘의 별도 따다 준다 해놓고 결혼하면 겨울에 딸기 한 팩도 사다 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미래를 모릅니다. 미래의 상황과 조건을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공약을 남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래를 다 아십니다. 우리 인생 전체를 한눈에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약 이행률은 100%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두 번째 아브라함은 알고도 믿었습니다 롬4:19절을 참고합니다. 그는 자기 몸이 죽은 것과 같음을 알고도 믿었습니다. 사라의 태도 이미 닫혔다는 것을 알고도 믿었습니다. 과학적으로 북가능함을 알고도 믿었습니다. 믿음은 내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알고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아는 나에게서 눈을 돌려 하나님을 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습니다. “그래 나는 죄인 인 줄 알아! 앞으로 또 죄를 질 줄도 알아! 나는 약한 줄도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롬4:17절입니다. “기록된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죽은 자를 살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창조주입니다. 생명을 주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킨 권능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고향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뭇 별을 보여 주며 자손이 이와 같다는 황당한 말씀도 믿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는 하나님 때문에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행동도 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를 업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로 지른 줄타기 명수 예화

믿음의 본질을 말할 때는 꼭 나이아가라 폭포 줄타기 명수의 예를 많이 듭니다. 요즈음은 리더십 특강에도 이 예를 많이 씁니다. 나이야가라가 아니고 나이아가라입니다. 나이트클럽 이름 ‘나이야가라’도 있습니다. 그 나이가 아닙니다. 1824년 프랑스의 곡예사 찰스 블론딘이란 외줄 타기의 명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로지르는 로프를 설치합니다. 높이 48m 길이 548m랍니다. 전세계에서 구름처럼 인파가 몰렸습니다. 그는 능숙하게 몇 번 나이아가라를 왔다 갔다 합니다. 그리고 군중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번에는 한 사람을 업고 건너겠습니다. 이걸 믿으십니까?” 사람들은 “물론입니다. 믿습니다.” 하며 환호합니다. 그는 이번엔 제안합니다. 그럼 업힐 사람 나오십시오. 군중들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 졌습니다.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먼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한참 정적이 흐른 후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나왔습니다. 해리콜코드라는 그의 매니저입니다. 블론딘은 그를 업고 무사히 건넜습니다.

본 예화에서 정말 믿고 신뢰한 사람은 매니저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업히는 행위와 같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예수님과 같은 운명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운명 공동체가 되면 서서히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믿은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 업혀 있습니다. 이를 믿고 의심치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복음에 설득당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업고 천국 문 안으로 들어갈 것을 믿습니다.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심

29,30절을 보십시오.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하나님 당연히 온 세상 만민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유대민족만의 전통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도 예수님을 통한 길밖에 없습니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피흘려 죽어 준 신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희석시키는 이단이 많은데 배격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내가 하나님이다.’ 하는 사람이 20명 있고 ‘내가 재림예수다.라’고 하는 사람이 50명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은 그래서 신의 나라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인데 죽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본문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 말씀합니다. 서로 대척점에 있지 않고 서로 세워준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법이 많습니다. 헌법, 민법, 소송법 등등 다양합니다. 본문에 특별히 율법이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제정한 법이므로 율법이라 합니다. 법이 왜 필요합니까? 사회 질서, 안녕을 유지하려면 필요합니다. 교통법을 예로 들면 교통법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통사고 온 종일 납니다. 온 종일 길거리에서 멱살 잡고 싸울 것입니다. 국가에도 법이 없으면 약육강식의 세계로 변합니다. 그야말로 범죄도시2와 같이 변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도 인간의 행복과 평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정한 법은 계속 뜯어고칩니다. 지난 국회 통계를 보니 발의 한 법은 6014건이고 통과한 법이 1366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완벽합니다. 법에는 법을 정한 사람, 또는 제정 집단의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법에는 목적이 1조로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에도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대표적 성품은 사랑입니다. 율법에는 사랑의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율법의 액기스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완벽히 지키면 의인이 됩니다.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됩니다. 율법을 지키라함은 유대인처럼 지킴이 아닙니다. 유대인은 율법의 겉모습만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율법 지킴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했으면 겉으로 행동으로 살인 하지 않아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미운 마음 자체가 없어야 제대로 지키는 거라 합니다. 행동으로 간음 하지 않아야 율법을 지킴이 아니라 마음에 음욕까지도 품지 않아야 제대로 지킨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율법을 100% 지킬 자가 없음을 지적합니다. 본문에서 율법을 주신 목적, 율법의 정신을 살펴보니 율법은 당연히 폐기되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율법을 세운다는 의미

본문에서 율법을 세운다는 의미를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본문은 구원받으면 내가 갑자기 변해서 율법을 완벽히 지키게 되어서 세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운다는 뜻은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나 대신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율법의 일점일획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율법의 정신까지도 완전히 구현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순종하여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다 이루었다.”가 있습니다. 이 뜻은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세우셨다.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굳게 세우신 예수님의 공로에 감사를 드리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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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로마서5:1-11)

동해안 해수욕장에서 겪은 일

얼마 전 해수욕장으로 물놀이를 갔습니다. 제가 교회 물개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물개답게 바닷속에 들어가 조개를 잡았습니다. 조개가 무조건 모래를 파헤친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모래 속에 해초가 꼿꼿이 박혀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밑을 파면 조개가 있습니다. 조개가 해초를 먹는가 봅니다. 해초도 모래에 뿌리를 박을 수 없으니까 조개 위에 붙어서 자랍니다. 서로 공생관계 일 수 있습니다. 한 냄비 정도 분량 잡았습니다. 조개 그냥 끓이면 안 됩니다. 옛날에 반 양동이 정도 잡았는데 바로 끓였더니 모래가 반 정도 나와서 다 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하루 정도 해감을 해야 합니다. 짠물에 담가두는데 쇠못이나 칼을 넣으면 더 잘 이물질을 뱉어냅니다. 잡은 조개를 하루 해감하고 아침에 끓여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가족들도 먹으라고 두었는데 점심때까지 아무도 안 먹었습니다. 그래서 점심때도 저 혼자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부터 신호가 오기 시작합니다. 어떤 신호인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화장실 들락날락하는 거는 좋다 이겁니다. 온몸이 춥고 떨리고 오한이 2일 동안 계속되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코로나인 줄 알고 계속 자가키트 해도 한 줄만 나왔습니다. 병원에 가니까 장염이라고 합니다. 오전에 입원해서 항생제, 진통제, 수액주사 맞고 오후가 되어서야 통증이 가라앉았습니다. 아마도 조개탕을 끓여서 먹기는 했지만, 균이나 바이러스가 죽지 않아서 온몸에 염증을 일으켰나 봅니다. 혼자 조개탕을 먹은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성도님들도 장염 조심하기를 바랍니다.

보통 의에 대하여 관심이 없음

오늘은 의롭게 된 결과가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실 의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현실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파트 거래량이 작년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답니다. 이런 거에 관심이 더 있습니다. 우리 50대들은 정치, 경제에 관심 있습니다. 청년들은 취업, 결혼에 관심 많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기어코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할까요? 우리를 그렇게 기를 쓰시고 구원을 주려고 할까요? 1절을 보십시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그 해답은 본문 화평에 있습니다. 제가 좀 전에 장염이 걸려 고생했다 했습니다. 그래서 온몸에 열나고 식은땀이 나고 설사를 하고 오한과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장염의 증상입니다. 원인이 아닙니다. 원인은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있었습니다. 원인을 제거했기 때문에 증상이 완화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적용해보면 로마서 1장 29절에 인류를 불행하게 하는 죄들을 나열합니다. 우상숭배, 정욕, 욕심, 불경건, 불의, 추,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악독 등입니다. 이런 보이는 죄들은 사실 진짜 죄가 아닙니다. 증상에 불과합니다. 진짜 죄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이로 인해 화평의 관계가 깨지고 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를 원죄라고 합니다. 원죄 때문에 세상에는 각종 죄의 증상들이 나타났습니다. 질병과 죽음도 왔습니다. 죽은 후에는 영원한 지옥 불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실에서도 벌 받을 두려움과 염려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 장염의 세균을 제거하는 일이 우선이듯이 우리를 의롭게 하여 하나님과 화평관계로 만드는 일이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구원론에 대하여 복습이 되셨습니까?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유익이 무엇입니까? 쌀이 나오고 밥이 나오지는 않잖아요? 그 유익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입니다. 본문은 제안이나 명령이 아닙니다. 이는 화평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했을 뿐인데 화평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맘껏 누리라는 겁니다. “이 모든 화평을 누려~~ !”라는 개그 콘서트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벼락 부자가 된 부부가 마음 편하게 호사를 누리려 하지만 과거에 가난했을 때의 습관이 몸에 배어서 잘 누리지 못하는 걸 개그 소재로 삼았었습니다.

우리가 화평을 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저는 집중하여 묵상해 보았습니다. 제가 대학 때 자취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가난한 선후배 몇명과 생활 했습니다. 늘 배고픈 시절입니다. 동네에 예식장이 있었습니다. 요즈음은 식권을 나눠줘서 관계자 아니면 식당에 못 들어갑니다.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짜 음식을 몇 번 먹은 적 있습니다. 제가 주도 한 것은 아니고 과감한 후배 한 명이 있어 따라갔습니다. 주의사항은 넥타이를 반드시 메야 하고 신랑 이름 정도는 외워야 합니다. 지금 그러면 유튜브에 영상이 올라가서 공분을 삽니다. 그런데 당시 차려진 음식을 먹는 것이 당당했겠습니까? 들킬까 봐 머리를 푹 숙였고 어깨도 한없이 움츠러들었습니다. 옆 사람과 말도 걸지 못합니다. 너무 빨리 먹어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보면 이미 천국 백성이 되었고 천국 잔치에 초대된 형국입니다. 그래서 화평을 맘껏 누려야지 남의 밥 몰래먹듯 한없이 움츠린 신앙 생활하면 안 됩니다.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첫째 이유 구원의 확신이 없음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첫째 이유는 우리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 양심에 계속 송사를 합니다. “너 구원받은 거 맞아? 현재 너 꼬락서니를 봐라! 하루가 멀다고 죄에 넘어지고 나는 지난날 너의 과거에 지은 죄를 다 알고 있다.” 하면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자꾸만 흔듭니다. 그러면 마음이 왠지 불안해지죠. 우리가 이신칭의 교리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자세 필요합니다.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두번째 이유 작은 죄들

두 번째는 작은 죄들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을 참고하면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무심코 허용하는 작은 죄들이 마음의 평화를 앗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와 싸우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무 엄격한 분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 못 해 화평을 못 누리지못합니다.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야겠습니다.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세번째 이유 부활 신앙이 흔들릴 때

세 번째는 부활 신앙이 흔들릴 때입니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 하반 절은 무엇이라 합니까?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 “그의 살아나심으로”의 다른 표현은 “그의 생명으로”라는 뜻입니다. ‘생명’은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말합니다. 부활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을 이미 가졌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얼씬도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신칭의의 결과

2절로 넘어갑니다.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구원이 주는 유익, 이신칭의의 결과에 대하여 계속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서 있다.“란 표현은 설악산에 울산바위처럼 꿈쩍도 안 하고 단단히 믿음으로 서 있는 형국을 말합니다. 그리고 제가 예식장에 도둑 식사하러 가 있듯이 머리 숙이고, 죄인 모양으로 주변 눈치 보며, 어깨 움츠리지 말고 꼿꼿이 서 있다는 뜻도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들어간다는 표현은 왕실 용어입니다. 왜 왕실 용어를 썼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왕궁 밖을 헤매던 신세였는데 이제는 신분이 바뀌어서 왕궁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구원받아서 이제는 하나님이 주는 혜택인 은혜 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원래 인간의 본질이 흙입니다 흙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이 주는 은혜 안에 살게 되었었던 존재인데 죄로 인해 은혜를 잃어버렸다가 되찾았습니다. 은혜의 반대는 율법이죠? 율법 아래 살다 은혜 아래 있게 된 다윗은 시편 23편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그 가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이신칭의의 3번째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라고 합니다. 즐거워한다는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영광을 바란다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흙으로 한 땀 한 땀 빚어서 만든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를 만든 이유는 당신이 영광 받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소경 거지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멋진 예술 작품을 보면 예술가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자식이 잘되면 누가 영광을 받습니까? 그 부모가 영광을 받습니다. 피아노 세계 콩쿠르에서 1등 해보십시오. 뉘 집 아들인가 부모를 찾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지 않으면 세상 영광에 매입니다. 세상 영광에 매이면 또 세상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참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또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두 번째 의미는 장차 우리에게 주실 영광을 바라본다는 뜻도 됩니다. 롬8:18절에서는 이 영광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 말씀하죠?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상에서 구원이 주는 유익 3가지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화평 케되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장차 말할 수 없는 영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 영화 예화

다음은 3~5절까지 봅니다. 영화 한 편만 소개합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입니다. 2012년에 개봉한 영화가 있습니다. 이병헌 배우가 주인공인데 일인이역을 합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일본군을 피해 도망을 갑니다. 선조를 대신해 광해군이 왕실을 돌봅니다. 광해군은 서자 출신이어서 끊임없이 정적으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느낍니다. 그래서 신하 허균에게 왕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을 데려오도록 합니다. 그가 바로 저잣거리에서 놀던 광대입니다. 그에게 잠시 왕의 역할을 맡깁니다. 그런데 진짜 광해군이 병에 걸려 쓰려지게 되면서 광대가 왕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해프닝을 영화로 그렸습니다. 광대가 갑자기 왕의 신분이 되자 몸이 광대 시절의 때를 잊지 못합니다. 광대춤을 추고, 수라상을 받고 게걸스럽게 접시를 비우기도 합니다. 수라상에서 남는 음식을 아랫사람들이 먹는데 지켜보던 사람들이 황당해하기도 합니다. 볼일을 보고 나면 과정을 다 지켜보고 있다가 경축드린다고 하는데 처음엔 적응을 잘못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익숙해집니다. “또 선정을 베푼 결과 진짜 광해군이 깨어나서 죽이라고 명령하지만 그를 따르던 신하들에 의해 죽을 위기에서 목숨을 건지고 왕궁을 떠난다.”가 줄거리입니다. 우리도 신분이 왕으로 바뀌었는데 옛 습성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이걸 옛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점점 닮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걸 신학 용어로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의 과정

본문3-5절까지는 성화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3-4절을 참고합니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본문은 4개의 추상명사를 씁니다. 환난, 인내, 연단, 소망입니다. 이 4개의 추상명사가 서로 연쇄작용을 일으키면서 우리의 신앙 인격을 만들어 줍니다. 환난은 도리깨로 콩이나 들깨 터는 일에서 나왔습니다. 말린 콩 대공을 마당에 펼쳐놓고 탁탁 때리면 쭉정이가 벌어지면서 콩이 튀어나옵니다. 털리는 과정이 환난의 뜻입니다. 환난은 괴로운 과정입니다.

믿음의 연단

연단이란 단어는 대장장이가 쇠를 만들 때 달궜다가 망치로 두드렸다가를 반복하면서 점점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과 같습니다. 금광석을 도가니에 녹이면 불순물이 날아가고 100% 순도의 황금이 나오는 장면을 연상하면 됩니다. 우리는 환난을 통하여 옛사람이라는 불순물이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 본문의 논증입니다. 세상으로 향했던 소망이 떨어져 나가고 영원한 하늘을 향한 순수한 소망이 생깁니다. 저는 감히 환난 중에 성도님에게 “즐거워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장염 환난에 걸려보니 즐겁기는커녕 이를 악물고 언제 끝나나 하며 괴로워합니다.

환란의 이유

환난을 하나님은 ”너 혼자 감당해! 나 몰라라 하십니까?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능히 환난을 견디고 이기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다’라는 것은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내적 확신을 주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함을 어떻게 압니까? 고전 12:3에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항 이 증거라 합니다. 또 롬 8장 15절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나옵니다. 굳이 말씀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성령님이 계신다는 증거 많습니다. 저의 경우는 갑자기 성경 구절이 마음에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저절로 찬송 흘러나올 때도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싶어질 때도 있고 죄를 함부로 짓지도 못합니다. 교회에 가고 싶고 성도님들과 교제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언뜻언뜻 소망이 하늘나라를 향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님은 추상명사를 좋아합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과 사랑에 관여합니다. 성령님은 마음에 사랑을 부어줍니다. 이 사랑은 쇠심줄보다 강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5절에서“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9절“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환희에 찬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

끊을 수 없는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에 대하여 오늘 본문6-11절까지 길게 소개합니다. “6-11절까지 한번 보십시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한 개를 찾으면 무엇일까요? 더욱입니다. 9, 10절입니다. 더욱은 부사로 본문과 같은 형태가 성경에 자주 쓰입니다. 더욱 앞쪽에 일이 너무 크기 때문에 더욱 뒤쪽 일은 아주 경하다는 의미입니다. 돈으로 비유를 한다면 내가 1,000억을 주었는데 10만 원을 못 주겠느냐는 겁니다. 1,000억을 준 일을 본문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로 표현합니다. 6,8,10절에 세 번 나옵니다. 다른 표현으로 그의 피로 말미암아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셨는데 죽어 줄 만한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죽어 줄만 한 명분이 단 1도 없는 자들을 위해 죽었다고 합니다. 어떤 자들입니까? 첫째는 연약할 때입니다. (6) 이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였다고 하고 있고(6) 죄인 되었을 때(8)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원수 노릇까지 한(10)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합니다.

본문 7절에 의인과 선인을 비교합니다. 의인은 올바른 사람을 말하고 선인은 올바른데 거기에 한술 더 떠서 타인에게 사랑과 덕까지 베푸는 사람을 말합니다. 의인보다 선인이 더 나은 사람입니다. 선인을 위해 죽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예를 들면 2001년 일본 유학생 김수현 씨라고 있습니다. 열차 선로에 취객을 구하려 뛰어들었다 유명을 달리한 사람입니다. 의인 김수현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의인도 아니었고 선인은 더더군다나 아니었습니다. 죄인이었고 심지어 원수였다고 합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대신 예수님이 죽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희생시키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합니다. 확증하다는 “행동으로 증명하다.”뜻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증명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아들까지 희생시킨 일이 너무 커서 오히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은 경한 일이라는 논증입니다. 아들까지 희생시키셨는데 우리에게 주신 소망을 반드시 이루지 않으시겠습니까? 본문에서는 이 뜻을 곡언법을 써서 소망이 부끄럽지 않다고 표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성도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환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하더라도 십자가로 사랑을 확증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환난과 연단을 인내로 슬기롭게 이기기는 강릉 명주로 교회 성도가 다 되길 기도하면서 제 말씀은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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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로마서5:12-21)

믿지 않는 남편 일화

믿지 않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도 집회에 아내의 반협박에 못 이겨 끌려 나왔습니다. 마침 주제 말씀이 창세기 3장입니다. 창세기 3장은 1절부터 뱀이 말을 합니다. 남편은 황당해 합니다. 남편은“성경이 진리라 그러더니 단군신화 수준이 아니야?” 또 “뱀이 말하는 거나 곰이 마늘 100일 먹고 사람 되는 거와 뭐가 달라?” 생각합니다. 급기야 아담 부부가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저주 받고 에덴 동산을 쫓겨납니다. 불만이 많은 불신자 남편은 “아니 그 선악과는 왜 그리 성급하게 따먹어서 화를 자초해! 가을에 땅에 떨어지면 주워 먹으면 될 거 아니야?”라고 했답니다. 선악과는 과연 1년이면 익어 떨어지는 과일이었을까요? 아니면 계속 붙어 있는 과일이었을까요? 궁금하기는 합니다. 우리도 복음을 처음 들을 때 가장 당황스러운 부분이 창세기 3장입니다. 그다음은 예수님 죽음입니다. 2,000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장소도 한국에서 8,000km나 떨어진 지구 반대편 이스라엘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입니다. 여기서 30대 유대인 청년의 비참한 죽음이 나와 관련이 있다는 말씀은 이해 불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두 가지 당황스러움에 대한 답변을 줍니다. 답변교리는 한 사람의 원리입니다. 현재 인구는 79억7천만입니다. 지구상 언어는 7,139입니다. 민족은 약3,000민족 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민족을 두 계열로 분류합니다. 아담과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는 어떤 계열에 속하였느냐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계열입니까?

 

12절부터 봅니다.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 때문에 죄가 문 열고 들어왔습니다. 죄의 삯, 죄의 결과로 사망이 왔습니다. 본문은 죄를 의인화 합니다. 죄를 인격을 가진 실체로 소개합니다. 이유는 죄는 사단이라는 존재의 유혹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들어왔다는 표현은 “침공했다. 집어삼켰다.”는 뜻입니다.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 듯이 죄가 휩쓸었다는 표현입니다. 죄와 사망이 인류를 휩쓸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이 다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사망을 피해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본문은 한 사람의 죄에 기원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짓게 됐다고 말합니다. 이를 신학 용어로 원죄라고 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면 얼마나 깨끗하고 천진난만합니까? 눈망울을 보십시오. 빠지면 우리가 정화될 듯합니다. 아이들을 죄인으로 부르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런 상상 한번 해봅니다. 깨끗해 보이는 아기들을 세상과 차단한 별도의 공간에 모아 키우면 이들이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죄의 인자를 가집니다. 커가면서 죄는 튀어 나옵니다.

파리대왕 일화

파리 대왕이라는 영화를 소개합니다. 세상 때가 덜 묻은 청소년 12명이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불시착 합니다. 처음엔 서로 서로 도와가며 구조요청 계획도 세우고 잘 생활합니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무인도는 지옥으로 변합니다. 두 진영으로 나누어서 싸우고 살인까지 합니다. 영화는 인간이 결코 선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죄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 인간은 고등동물로 진화해왔다. 조금 문제가 있는 거는 아직 진화가 덜 되서 그렇다. 더 진화하면 괜찮아 진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경험으로 알듯이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나빠 집니다. 범죄율도 증가하고 악해집니다.

죽음의 원인

본문은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인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자연의 순환 과정으로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죄와 죽음은 인류의 대표자인 한 사람의 죄에서 기원했다 합니다. 본문은 10구절에 걸쳐 한사람이란 단어를 12번 언급합니다. 그 한 사람의 이름은 14절 하반절에 나옵니다.“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아담입니다. 본문은 아담을 특이하게 소개하죠? 오실 자의 모형입니다. 모형은 원형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담의 원형은 예수님입니다. 모형은 표적, 예표를 말합니다. 표적은 표지판의 기능을 말합니다. 표지판이 기리키는 장소로 가면 실체가 나옵니다. 아담이라는 표적이 가리키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는 인류의 대표로 원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당연이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멀고 먼 미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연대책임을 지고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사건 현장에 없었다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음에도 똑같이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입니다. 우리 속담과 반대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교리입니다. 서양의 인과율 법칙에도 맞지 않습니다.

원죄, 대표성의 교리

본문 14절에는 원죄 교리, 대표성의 원리, 연대책임의 원리가 다 담겨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1-10절까지 참고합니다.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는 부분에 주목하십시오. 본문은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 후 멜기세덕이라는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사건입니다. 멜기세댁은 오실 예수님을 예표 합니다. 레위는 제사장 지파입니다. 이 레위는 아브라함의 몇 대 후손입니까? 3대입니다. 앞으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야 하고 그다음에 야곱이고 야곱의 12아들 중 셋째가 레위입니다. 본문은 3대 지나 태어날 레위가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칠 때 같이 바쳤다고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시공을 초월해서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리에 있다는 표현은 아브라함의 씨로 태어날 모든 자식들을 말합니다. 이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아담이 범죄 할 때 우리도 이미 그 허리에 있었다는 셈이 됩니다. 아담이 범죄 할 때 우리도 함께 범죄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와 인류의 마지막을 한눈에, 한도면 위에 놓고 보십니다. 인류는 아담으로 인해 원죄를 안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왜 이 교리가 중요한가 하면 예수님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 할 때 우리가 그의 허리에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도 함께 못박힌 것으로 취급합니다. 부활할 때 함께 부활한 셈이 됩니다. 2,000년이라는 시간과 8,000km라는 거리와 인종, 국경을 초월하여 예수님 한 분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는 교리입니다. 한 사람의 교리는 중요합니다. 창세기 3장 아담 사건이 신화이면 원형인 예수님도 신화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교리가 성립되지 않으면 예수님 한 분이 영 단번에 우리의 죄를 사하신 교리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형인 아담과 원형인 예수님

15절부터는 모형인 아담과 원형인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15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아담으로 기인한 것은 범죄, 심판, 정죄입니다. 예수님으로 기인한 것은 은사, 은혜, 선물, 칭의입니다. 이 넷의 공통점은 값없이입니다. 모두 무상으로줍니다. 공짜 좋아하면 머리가 빠진다는 속담 있습니다. 여담으로 이 속담의 유래를 찾아봤습니다. 바리깡이라는 머리를 깍는 기계가 처음 나왔을 때 이발소 가지 않고 공짜로 깎았습니다. 바리깡으로 많은 사람의 머리를 깎으면 위생이 엉망입니다. 공짜로 깎은 사람이 두피전염병에 걸려서 머리가 빠지는 일이 많은데서 그런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짜입니다. 공짜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의 의로 똘똘 뭉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는 세리와 죄인들은 용서하셨지만 이들은 혹독하게 비난합니다. 구원은 내가 죄인임을 하나님 앞에 인정할 때 주어집니다. 버티면 안 됩니다. 우리 추석 때 선물 많이 주고 받습니다. 선물 대신 현금 박치기를 하기도 합니다. 선물을 받을 때 감사하다는 마음 많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게 다 빚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언젠가는 되갚아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부담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과 용서와 영원한 생명과 하늘의 소망, 기업, 자녀로서의 특권은 우리가 감히 되갚지 못합니다. 되갚을 엄두도 못낼 만큼 큰 선물입니다. 되갚으려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내 목숨을 내놓아야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선물이 넘쳤다는 표현 앞에는 Super란 말이 붙습니다. 우리에게 넘치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17절로갑니다.

신자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본문은 아담 안에서 사망의 왕 노릇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안에서 왕 노릇을 비교합니다. 우리에게 사망, 죽음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시신을 대단히 무서워합니다. 무섭다는 사실은 사망이 왕 노릇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흙을 재료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생명이 떠나간 시신은 흙덩이에 불과합니다. 왜 흙을 무서워합니까?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주 받은 세상은 자원에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경쟁합니다. 경쟁은 타인을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경쟁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게 합니다.

의식과 무의식

심리학에서 인간 정신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눕니다. 인간의 의식은 빙산에 일각에 비유합니다. 대부분 우리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무의식은 상상한 일과 실제 행동한 일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을 미워하는 마음만 가져도 무의식은 정말 그를 해친 행동을 한 듯한 죄책감듭니다. 예수님도 이런 원리를 말합니다. 음욕을 품기만 해도 이미 간음했다합니다. 형제를 미워만 해도 마음에 살인했다합니다. 특히 아기들은 무의식에 더 많이 지배받습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 어려운 나이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자주 미움의 대상이됩니다. 우유를 빨리 안줄 때, 기저귀 빨리 안 갈아줄 때 그렇습니다. 아이가 무의식 중에 갖는 미움은 엄마한테 정말 위해를 가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위해를 한 만큼 죄책감도 갖습니다. 이런 무의식의 감정이 어려서 마음에 쌓이고 싸여 우리는 모든 타인의 죽음에 대하여 죄책감을 갖습니다. 가까운 사람 특히 부모가 돌아 가시면 더 많습니다. 이 죄책감은 죽은 자가 자기를 해 할지도 모른다는 인과응보의 감정도 생깁니다. 그래서 죽은 혼령이 구천을 떠돌다가 자기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습니다. 이것이 시체를 보고 무섭고 공포스럽게 느끼는 원인 입니다. 우리의 장례문화에 새끼줄을 두르고, 거친 베옷을 입고, 슬프게 곡을 하고, 검은 옷을 입고, 베일을 뒤집어 쓰는 행동은 모두 자기에게 미리 벌을 가해서 죽은 혼령이 자기에게 해를 가하는 일을 차단 하려는 심리에서 나온 문화입니다. 나는 이만큼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니까 죽은 자가 나에게 더 이상 위해를 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군대 장례식에서 하늘을 향해 총이나 대포를 쏘는 의식도 하늘에 혼령을 향해 쏘아서 위해를 못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구천을 떠도는 귀신은 없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보면 죽어서 구천을 떠도는 귀신, 혼령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을 지칭할 때 영, 혼, 육으로 분명하게 구분하여서 표현합니다. 우리 한글 성경은 분명하게 구분하여 주지 못해 약간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이중에 혼은 처녀귀신, 총각귀신, 몽달 귀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몸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 숨 쉬며 움직이게 된 상태의 모든 사람을 지칭하여 혼이라고 합니다. 창2:7절에 생령도 원어는 산 혼입니다. 고린도전서 15:45에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에서 생령도 혼입니다. 창46:27절에 야곱이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 곳센 땅으로 이주한 사람이 70명이었는데 이 70명을 70혼이 들어 갔다고 표현합니다.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숨을 쉬고 활동하는 사람을 보통 지칭할 때 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이 들어와서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하게 된 상태를 영이 살았다고 표현합니다. 만약 귀신을 봤다면 모두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사림이 죽으면 천사의 수종을 받아 천국으로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불 꽃같은 눈을 피해 구천을 떠도는 원귀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게 된 지금 우리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합니다. 우리 육체의 생명은 이제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제시한 우리 수명은 시편 90:10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합니다. 70, 80이 꼭 숫자적인 연수는 아닙니다. 요즈음은 70이면 청춘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이 땅에서 허락하신 수명은 다하게 하신다는 믿음 가져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셔서 해야 할 일은 마치게 합니다. 하나님 손해 보실 분이 아니십니다. 짐엘리엇 형제님같이 20대에 순교 사명을 받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 주신다는 강한 믿음 가져야 합니다. 배만 조금 아파도 죽을 것 같은 두려움, 사망이 쏘는 독은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의 죽음은 예수님은 잠으로 보십니다. 잠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성도는 한잠 자고 나면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과 기쁨을 누립니다. 성도의 죽음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관문이 아닙니다. 천국과 하나님의 품으로 가는 관문입니다. 끝으로 가져야 할 태도는 예수님이 오늘 밤에라도 오시면 공중으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죽음의 맛을 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망입니다.

신자의 영적인 신분

본문은 생명이 왕 노릇한다가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을 왕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신분은 왕입니다. 마태복음 25장34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한 나라를 상속받는 다고 증거합니다. 또 고린도전서 6장2절은 보좌에서 세상과 천사까지도 판단하는 입장에 선다고 합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볼품없어 보일지라도 현재 왕인 신분을 상기해야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왕 노릇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과연 왕 노릇 제대로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위에 군림하고, 지시하고, 찍어 누르고,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란 전제가 붙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이 왕 노릇이 아닙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왕 노릇하는 자들만 있기 때문에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중심에는 어린양 예수님이 계십니다. 어린양은 희생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이런 왕 노릇하는 분만 있다면 우리는 현재 이곳 교회에서 작은 천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성도의 왕 노릇 달라야 한다는 것 강조하면서 넘어가겠습니다.

18,19절은 아담의 불순종과 예수님의 순종을 비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순종이라는 값비싼 대가로 주어졌습니다. 히5:9절은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도 순종하심으로 가셔서 우리에게 의를 전가해 주었습니다.

율법의 역할과 기능

계속20절을 보십시오.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본문은 율법의 역할과 기능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13절도 연관구절입니다.“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본문은 율법 때문에 율법이 있기 전의 애매한 죄들이 율법 이후에는 분명해졌다는 뜻입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죄의 지식이 증가했다고 보셔도 됩니다. 예를 들면 코로나19 PCR 검사를 많이 하면 확진자가 늘어나는 원리와 같습니다. 이 뜻이 율법이 들어옴으로 범죄가 더해졌다는 의미입니다. 20절 하반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뜻은 율법의 기능으로 나의 죄들을 현미경처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자세히 보이는 만큼 하나님께 용서받은 은혜가 더욱 커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말년에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죄의 왕노릇, 은혜의 왕노릇

21절은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죄의 왕 노릇과 은혜의 왕 노릇을 비교합니다. 은혜의 왕 노릇인데 이 은혜는 영생에 이르게 하여 준다고 결론 맺습니다. 보통 우리는 은혜 받았다고 하면 말씀을 듣고 감동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만을 말합니다. 그런데 꼭 그것만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많습니다. 햇빛, 공기, 물 하나님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지구라는 거대한 공 위에서 우리가 오늘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중력이라는 이름으로 꽉 붙잡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공기도 없는 우주 밖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여기에 죄 사함의 은혜, 자녀로서 특별히 돌보시는 은혜, 생명 보자기에 꼭 싸서 보호해 주시는 은혜, 헤아려보면 헤아릴 수 없는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본문은 은혜가 영생이라는 기차역으로 도달하게 해준다고 합니다. 영생하면 현실적으로 많이 와 닿지 않는다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요한복음 17:3절이 영생에 대하여 잘 설명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알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본문의 생명은 영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영적인 생명이 살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명확히 알게 된 상태입니다. 알게 된 만큼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교제는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영생을 가졌나 안 가졌나 절대 의심하지 않으시기바랍니다.오늘 이렇게 여러분께서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행동 자체가 영생을 가졌다는 증거임을 말씀드리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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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다?(로마서6:1-11)

“이탈리아의 수도에 혼자 종일 서 있다.”를 간단히 세자로 줄이면 무엇입니까? “로마서”입니다. 앞자리만 따서 “이혼서” 하면 유머 지수가 적은 분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도둑을 맞은 책 제목은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11년 전 기준 60억 부가 팔렸습니다. 호텔, 여관, 도서관, 군대 내무반까지 어디 가나 성경이 있으니 도둑도 많이 맞습니다.

성경은 1,800페이지입니다. 1페이지를 2분만 에 읽을 때 60시간이면 독파합니다. 성경을 시작하는 구절 창세기 1장 1절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고, 마지막 구절은 요한계시록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예수님으로 끝납니다.

 

 

구원에서 성령님의 역할

우리는 예수님을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됩니다. 2000여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 현재도 일어나게 역사하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 라고 합니다. 우리는 인과율의 법칙 속에 살아갑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불을 안 땠는데 연기나는 교리입니다. 이신칭의 교리는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보통 종교는 수행 과정을 거친 자력 구원입니다. 자기 노력 없이 믿음으로 받는 구원 교리는 실감 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신칭의 교리가 마음에 와 닿도록 잘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죄는 사해집니다. 과거에 진 죄, 현재의 죄, 미래에 질 죄까지 사해집니다. 미래의 죄까지도 미리 용서받았다면 이제는 죄와 싸우며 힘들게 신앙생활 할 필요없다는 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즐길만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후에 죄를 즐긴다는 것은 새옷 입고 흙탕물에 구르겠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의미

로마서 5장 20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란 말씀이 있습니다. 수학적인 방법으로 사선 그래프로 설명 해 봅니다. 죄와 은혜의 비례관계 그래프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X축, 은혜를 Y축이라 할 때 죄가 커지면 은혜도 비례하여 커진다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죄를 과감하게 많이 지을수록 은혜가 커지니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 의미는 다릅니다. X축은 죄의 크기가 아니고 죄에 대한 민감도 여야 합니다. 죄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 예수님 용서의 은혜가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에 은혜가 넘친다는 뜻입니다. 그전에는 거짓말을 해도 양심에 가책이 없었는데 지금은 작은 거짓말도 크게 찔리고 찔린만큼 예수님 용서의 은혜는 커집니다. 사도 바울도 말년에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고백한 것은 죄를 많이 지어서가 아니라 작은 죄도 민감했기 때문입니다.(딤전1:15)

바울 당시는 영지주의자들이 유사한 주장을 했습니다. 영지주의는 지식을 숭상하는 산학체계입니다. 이들은 영과 육을 분리해서 보았습니다. 육은 더러운 것이니 영혼만 잘 보존하여 구원받으면 끝이라고 여겼습니다. 육체는 썩어질 것이니 죄를 맘대로 지어도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영지주의의 열매가 쾌락주의입니다. 도덕, 윤리 폐기론입니다.

쾌락의 반대파가 금욕주의입니다. 육체는 가만두면 안 되고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주장하며 금식과 고행을 강조합니다. 무릎으로 기어 계단을 오르며 고행 합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했으니 하루 더해서 41일 굶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나친 쾌락주의 지나친 금욕주의 모두 비성경적입니다.

본문은 죄를 함부로 지으려는 자들에 대한 권면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는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입니다. 2절에는 한 번 더 강조해서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죽었다는 말씀을 14번 반복합니다.

죄짓는 일이 즐거운가?

 

우리는 죽음의 교리를 전개하기에 앞서 한번 자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죄가 그렇게 좋냐?입니다. 죄에 거함이 피가 되고 살이 됩니까?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줍니까? 아니죠? 어두움에서 나와서 빛으로 옮겨왔는데 왜 자꾸 어두움에 거하겠습니까? 이해를 돕기 위해 저의 어릴 때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제가 어릴 때 한 개구쟁이 했다고 합니다. 누가 사탕 먹는 모습을 보면 그 사탕 입속에 들어간 것도 빼앗아서 내 입에 넣어줄 때까지 생떼를 멈추지 않을 정도였다 합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새 옷을 입혀서 밖에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새 옷은 어디 가고 진흙투성이를 하고 들어왔답니다. 마치 산사태 속에 금방 빼낸 아이처럼 해 왔다 합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동네 아저씨들이 “잘한다. 잘한다. 참 잘한다.”라고 하면서 저에게 흙탕물에 뒹굴도록 부추겼다 합니다. 박수받으니까 좋아하며 흙탕물에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매우 속상하게 했답니다. 죄에 계속 거함은 흙탕물에 계속 뒹굴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 마음도 아프게 합니다. 로마서2:9절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환난과 곤고 속으로 자꾸 들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우리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법에서도 피의자가 죽으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립니다. 소송할 이유도 없고 형을 받을 대상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죽은 분이 진 빚도 자식들이 반대하면 연계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바위를 올려 놓은 들 올라가 뛰어 본들 꿈쩍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우리의 상태가 이러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면 죄가 생각이 나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들여다 보면 아닙니다. 죄의 세력이 여전히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하여 죄가 없는 완전한 육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기 전까지 우리는 죄질 경향 가운데 살아 갑니다. 죽은 나란 옛 사람, 옛 자아가 죽었습니다.

죄와 싸우라

그래서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하는 형국입니다. 본문은 이 싸움의 비결을 알려줍니다. 첫채는 외로이 혼자 고군 분투하는 싸움이 아니라는 인식 입니다. 본문에 함께란 표현이 10번, 합하여란 말이 3번 (3,4) 예수님과 함께란 말이 4번(4,6,8) 예수님과 연합되었다가 2번(5) 그리고 11절에 색다르게 “예수님과 같이”란 표현으로 나옵니다. 우리는 믿는 순간 예수님과 강하게 연합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그렇게 만듭니다. 가까이 함께하며 죄와 싸워 이길 힘을 공급해 줍니다.

죄와 싸우는 비결: 예수님과 연합

예수님과 신자의 연합 잊지 않도록 핵력을 예로듭니다. 핵력은 원자핵 속에 중성자와 양성자를 묶어주는 강한 힘입니다. 중력의 10의 40승 배입니다. 그래서 이 힘을 이용한 원자폭탄의 위력 큽니다. 핵력이 없다면 세상의 물질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핵력보다 더 강한 힘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 형국을 가장 실감 나게 표현한 성경이 로마서 8장38-39절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절대 끊을 수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죄와 싸우는 비결 두번째는 본문 3,4,6절에 나옵니다. 본문에 세례라는 예식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났음을 공표하는 의식이며 예수님이 직접 행하라고 명령 했습니다. 또 생명은 성경은 세가지를 말합니다. 헬라어로 프쉬케, 비오스, 조에 셋 입니다. 프쉬케는 생물학적, 의학적 목숨입니다. 비오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목숨입니다. 조에는 우리에게는 없고 하나님에게만 있는 영원한 생명, 죽음이 없는 완전한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조예 곧 영원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 결혼한 자매님들 생명을 잉태하면 입덧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입덧은 지금까지 익숙한 것을 끊어내는 현상입니다. 아기 중심으로 체질이 변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본래 체질과 다르게 먹고 싶은 것이 생깁니다. 기혼 형제들은 이 입덧 때문에 덫에 걸려 평생 잔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한겨울에 딸기를 못사다 줘서 덫에 걸립니다. 우리도 거듭나 새생명 가운데 있으면 죄에 대한 거부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행하다는 영어성경으로 걷다(walk)로 나옵니다. 새생명 가운데 행하는 삶은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삶입니다. 혼자 외로이 걷는 삶이 아닙니다. 어디 예수님뿐입니까? 교회 지체가 되어 명주로교회 동역자들도 함께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홍해를 나온 백성이 광야에 첫 번째 만나는 일이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걸을 때 꼭 필요한 일이 서로 뭉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맹수나 원수들의 공격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빌2:2) 우리 교회 성도님들도 물먹은 눈덩이가 뭉쳐지듯 잘뭉쳐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와 예수님과의 연합은 예수님이 행한 일들을 공유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었으면 우리 옛사람도 함께 죽었고, 장사 되었으면 함께 장사 되었고,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고 부활했으면 우리도 부활했습니다.(5,8,9)

이제는 새생명 가운데 행하는 삶이되었습니다.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걷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믿는자의 삶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십자가에 이미 못박힌 옛사람

본문 6절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걸려 있는 나는 옛사람입니다. 옛사람과 동의어로 죄의 몸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죄의 몸은 죄에 완전한 지배 아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를 져도 갈등이없고 자연스러웠을 때입니다. 이 죄의 몸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죽음의 뜻은 “끝장났다. 멸했다. 폐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종에서 벗어난 자유의 몸이되었습니다.

1948년 세계 교회 협의회 총회를 합니다. 회의장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단상 앞에 큰 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의 관인지 궁금해합니다. 오지에서 힘들게 선교하다 소천한 선교사의 관일까? 아니면 더 유명한 사람일까 했습니다. 사회자는 누구인지 말하지않고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관을 들여다보며 조의를 표하라 합니다. 관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답니다. 관속에는 대형 거울이 있었고 그 거울에는 자신의 얼굴이 비쳐졌습니다. 자신의 장례 절차를 치르게 한 셈입니다. 그날은 의견 충돌 없이 만장일치로 모든 안건이 통과되었다고 합니다.

이 예화를 통하여 죄와 싸우는 비법은 십자가에 나의 옛사람, 죄의 몸이 죽어 걸려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확인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십자가로부터 이길 능력을 공급해 줍니다.(고전1:18)

죄와 싸우는 비결: 여기라

죄와 싸우는 세번째 비결은 11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 비결은 여기라는 단어 뜻에 있습니다. 먼저 본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표현은 로마서에만 33번 나오고 신약 전체 180번 나옵니다. 예수님 안은 공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관계적인 개념이요. 통치의 개념입니다.

“여기라”는 단어는 강한 명령입니다. 로마서 1-5장까지는 명령 표현이 없습니다. 6장에 와서 비로소 권면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첫 단어가 여기라입니다. 여기라는 헬라어로 “로기조마이” 영어로 “count, consider”로 그렇게 간주하라, 그렇게 계산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나의 옛사람, 죄의 몸이 십자가에 죽었다. 예수님 과 연합하여 이제 그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 안에 있습니다. 여기라는 이 사실에 대한 김정적인 느낌이 없어도 여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새사람이 되었음을 강력하게 여기라입니다. 이것이 6장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한 죄와 이기는 마지막 방법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 죄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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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아래에서의 삶(로마서6:1-14)

침팬지 실험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에서 실험을 합니다. 동물실험입니다. 침팬지가 수화로 자기 의사 표현을 얼마나 할 수 있는가 하는 실험입니다. 15년산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쳤습니다. 침팬지 수명은 30~40년 잘하면 50년까지도 삽니다. 그리고 아이큐는 70 정도입니다. 여기 계신 분 중 아이큐가 70 이하인 분은 없으시죠? 연구진의 각고의 노력 끝에 140개 정도 단어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기초적인 의사 표현은 수화로 할 수 있었습니다. 침팬지가 수화로 한 첫 표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밥 줘! 바나나 줘!”였겠습니까? 아닙니다. 첫마디가 “나를 좀 놔줘!”입니다. “Let me out!"입니다. 침팬지에게도 자유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도 ‘죄에서 벗어났다. 사망이 다시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라고 표현합니다.

 

 

 

모태신앙은 억울하다

모태신앙의 성도 자녀들은 억울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나와 죄를 많이 즐기지 못했다는 원망을 할 수 있다 합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저의 어릴 때 경험을 예로 들었습니다. 제가 6살 때쯤입니다. 이때 저도 한 개구쟁이 했답니다. 어머니가 하루는 새 옷을 사서 입혀 밖에 보냈는데 거지꼴이 돼서 들어왔답니다. 알고 보니 동네 아저씨들이 저를 칭찬하면서 흙탕물에 굴러보라고 했답니다. 저는 정말 잘하는지 짓인 줄 알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많이 속상해했다고 합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마치 새 옷 입고 흙탕물에 구른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부러워할 필요 없고 오히려 감사 해야 한다 했었습니다.

연합의 의미

오늘 본문은 한번 다루었기 때문에 한 문장 한 문장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1-11절까지는 반복되는 세 가지 단어만 살펴봅니다. 첫 번째 단어는 예수님과 함께, 합하여, 연합입니다. 10번 나옵니다. (합하여란 말이 3번 3,4절 예수님과 함께란 말이 4번 4,6,8절 예수님과 연합되었다가 2번 5절 )두 번째는 죽었다 입니다. 내가 죽었다, 죽은 사람을 예사람, 옛 자아라고도 하는데요. 죽었다는 무려 16번 나옵니다.(2, 3, 4절 3번 장사 포함, 5, 6, 7, 8 9절3번 사망포함, 10절2번, 11절) 세 번째는 “알아라, 여기라” 입니다. 3번 나옵니다. (3,6,9절)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연합해서 죽고 새사람이 된 사실을 알고 그렇게 여기라는 것이 본문 핵심입니다. 이 죽음의 교리는 느낌의 영역, 경험의 영역이 아닙니다. 느낌, 경험이 없어도 알라입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인식하라입니다. 본문 11절에 여기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하거나 생각한다.”가 사전적 의미입니다. 느낌이 안 와도 객관적인 사실이니까 그렇게 여겨라입니다.

내가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는 순간, 우리 몸이 가시적으로 변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변화 산상에 예수님처럼 눈부시게 변하거나, 카멜레온처럼 피부가 바뀌거나 아니면 가슴에 구원이라고 지워지지 않는 글자를 새겨주시거나 하면 좋겠죠? 아니면 구원 증명서를 돌판에 새겨주시면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니죠?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쪽에서 구원받은 것을 확실히 하도록 행하라고 하신 의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기를 원하시지, 형식적인 것을 행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형식적인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로 책망도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형식적으로 반드시 행하라고 명하신 2가지 의식이 있습니다. 침례와 만찬입니다. 그래서 우리 명주로 교회는 침례와 만찬을 예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모입니다.

침례(세례)의 뜻

침례의 뜻은 오늘 본문 3, 4절에 나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본문의 세례는 침례로 번역해야 정확한 표현입니다. 침례의 의미는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처럼 나도 같이 못 박혀 죽었고 장사 될 때 같이 장사 되었다가 부활과 함께 나도 부활해서 나는 이제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의식입니다.

침례는 성경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신앙 고백적 요소가 있습니다. 침례를 구약에 3가지 사건과 연관 지어서 설명해 드려봅니다. 먼저 롬4:11절입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신칭의를 할례와 비교를 합니다. 인간 편에서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밖으로 보이는 행위라는 측면에서 할례와 침례는 유사합니다. 할례는 우리 신체 포피 일부를 잘라 내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신체의 극히 일부를 자르지만 결국 다 잘라 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소산물의 10분이 1을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제도가 있습니다. 드리는 1은 가장 귀한 것을 드립니다. 그 많은 것 중 가장 귀한 것 하나를 드린다는 뜻은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상징입니다. 일부가 전체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할례는 표피 일부를 자른다는 것도 나의 모든 것을 다 자른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으로 적용하면 이제부터 나는 나의 힘, 나의 의지는 다 잘라 내고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뜻만으로 살겠다는 신앙 고백적입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과 침례

다음은 고전10:1-2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스라엘이 홍해가 갈려져서 건넌 간 사건과 침례를 비교합니다. 홍해는 폭이 10km, 깊이 1,200m의 바다가 갈라져 200만 명이 마른 땅 같이 건너가고 뒤따라오던 바로왕의 군대는 몰살한 기적적인 일입니다. 현재 홍해 밑바닥에서 바로 군사 것으로 보이는 전차 바퀴가 발견된다고 합니다. 침례를 홍해를 건너간 사건에 비유하는 것의 영적인 의미는 침례 받은 사람은 홍해를 이미 건넜기 때문에 사단이 더 이상 건들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넌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 곳이 어디입니까? 호텔인가요? 아니면 오아시스인가요?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내 맘대로 행동할 수 있습니까? 내 맘대로 행동했다가는 들짐승에게 잡아 먹히거나 목말라 죽거나 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혀주셔야 살 수 있는 곳입니다. 내 힘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셔야 먹을 수 있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해주셔야 마실 수 있고,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이 있어야 길을 갈 수 있는 곳입니다. 홍해를 건넌 후 광야의 삶도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노아의 방주와 침례

끝으로 침례를 노아의 방주에 비유합니다. 벧전3:20-21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침례를 노아의 홍수 사건과 비교하는 것은 노아가 홍수 속에서 건져 방주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우리도 죄와 사망의 바다에서 건져져 예수님이라는 방주 속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내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는 구조가아닙니다. 방향키가 있고 노나 모터보트를 달려있지 않습니다. 노래처럼 이리저리 흔들흔들 하나님이 인도하는 데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할례, 홍해 사건, 노아의 방주, 세 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내 맘대로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침례는 이제 나는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신앙 고백의 의미가 강합니다. 말씀대로 살겠다는 다짐이요, 공표가 침례 받는 행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침례 이후 신앙 실천

바울은 12절부터 내 맘대로 살지 않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여기서부터는 몸 교리입니다. 본문은 너희와 몸의 관계를 말합니다. 본문의 너희는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인 너를 말합니다.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가 생긴 것을 말합니다. 이 새사람이 된 너희가 아직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죽을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죄를 짓고, 죄에 시달리고, 그것 때문에 내가 구원받은 사람 맞나 안 맞나 의심하게 만드는 원인이 바로 내가 아직 죽을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사단과 죄는 우리 죽을 몸에 역사합니다. 빌3:21을 참고하면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본문은 현재 우리는 죽을 몸을 낮은 몸으로 표현합니다. 그 몸이 나중에는 영광스럽게 변한다고 증거합니다. 미래에는 그렇게 되지만 아직 현재적으로는 죽을 몸, 낮은 몸속에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죄가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는 죄를 아예 안 짓는다는 의미 아닙니다. 이런 이단이 있습니다. 자기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 한 개도 안 짓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구원 못 받았다고 말하면서 우리 교회로 가자고 합니다. 그러면 구원받게 해준다고 유혹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의 죄의 지배는 소금에 배추가 절여지듯이 내가 아예 죄에 푹 절여져서 아무 갈등 없이 죄 가운데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소가 코뚜레에 끼워져서 끌려다니듯이 죄에게 완전 지배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죄가 아예 생각나지 않게 할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눌러앉아 있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삶을 적극 살아야 합니다.

죄질 경향성에 대하여

우리가 새사람이 되었지만, 아직 죽을 몸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달리 표현하면 죄질 성향, 죄질 가능성, 경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쉽게 저의 팔꿈치와 손끝을 예로 들겠습니다. 현재 제가 서 있는 가운데를 두진 영으로 나누고 왼쪽을 죄의 진영, 오늘 쪽을 의의 진영으로 가정합니다. 현재 우리의 상태는 의의 진영에 팔꿈치가 있고 손끝까지는 죄의 진영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죄의 동네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힘들게 노력을 안 해도 죄는 저절로 짓게 됩니다. 몸을 그냥 내버려 두면 노력 안 하고도 자연스럽게 죄를 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기울어진 손을 바로 세우고 있으려면 반드시 힘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의 말씀은 바로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독려하기 위해 하신 말씀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라

그 힘과 의지가 필요하다는 말씀이 12절 하반 절입니다.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욕(邪慾)은 한자로 어긋날 사에 욕심 욕자 입니다. 바르지 못하고 잘못된 욕망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몸 자체를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몸은 그 자체로 선한 것입니다. 영지주의자처럼 몸은 아예 나쁜 것으로 천시하여 죄를 막 지으면 안 됩니다. 몸은 그릇과 같아서 무엇을 담느냐에 다라 달라집니다. 내가 죄를 담으면 죄의 몸이 되고 거룩을 담으면 거룩한 몸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을 만드실 때 기본적인 욕구들을 주었습니다. 욕구들 자체는 육체의 생명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고 그것 자체로는 선합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욕구가 있습니까? 심리학에서는 매슬로우라는 학자가 우리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눕니다. 첫 단계가 생리적욕구로 식욕, 성욕, 수면욕, 배설, 활동을 말합니다. 그다음은 안전의 욕구, 애정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로 나눕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본적인 욕구들은 그 자체로 선합니다. 배고프면 밥 먹는 거는 기본적인 욕구들입니다. 그 이상 사욕이 문제입니다. 사단은 사욕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욕구가 과하면 욕심입니다. 그래서 로마서1장26절은 이를 부끄러운 욕심으로 표현합니다. 음욕, 탐욕, 능욕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몸이 과하게 요구하는 사욕에 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은 바로 우리 몸에 유혹한다는 것 알아야겠습니다.

지체를 의의 무기로 드리라

그리고 13절부터는 더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합니다. 13절 읽겠습니다.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쓰지 말고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드리라고 합니다. 지체는 우리 몸의 일부들이고 몸은 전체를 말합니다. 눈,코, 입, 손, 발, 생각, 상상 등등 유형, 무형의 지체를 말합니다. 이런 지체를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하나님께 적극 드리라고 고합니다. 본문에 지체를 무기에 비유함에 영적인 의미는 세상은 전쟁터라는 것입니다. 총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고,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입니다. 한눈팔면 큰일 납니다. 우리는 이 전쟁터에 군사로 부르심 받았다고 다른 성경은 표현합니다. 그런데 군사인데 늘 야전병원에 누워있거나 고문관 역할을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함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고 말씀대로 사는 삶입니다.

은혜 아래에서의 삶

끝으로 14절을 참고합니다.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 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본문은 우리가 지체를 병기로 드린 결과에 대한 진술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려 노력하면 죄가 주장하지 못한다는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아래란 것은 영역, 영향력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법 아래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와 닿게 해주는 예화가 없을까 찾아보다가 사형수의 예화를 들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형법상 사형 구형할 수 있는 죄가 있습니다. 내란죄, 외환죄입니다. 외환죄는 외화반출 같은 돈과 관련된 죄가 아닙니다. 외국과 합작해서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죄입니다. 그 외에 역적죄, 간첩죄, 폭발물사용죄, 현주건조물방화치사죄가 있습니다. 용어가 어렵습니다. 현주건조물방화시사죄는 불을 놔서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죄입니다. 그다음 살인죄, 존속살해죄, 강간살인죄, 강도살인죄 등이 있습니다. 형사소송법상 사형집행은 사형판결로부터 6개월 이내에 해야 합니다. 법무부 장관의 명이 떨어지면 5일 안에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사형제도가 있지만 97년 12월 이후로는 중단되었습니다.

사형수의 고백

사형수들 수기를 보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들은 해가 뜨면 ‘아! 오늘 죽었구나’ 하다가, 해가 지면 ‘아! 오늘은 살았구나’ 한답니다. 이러면서 1년 365일을 매일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한답니다. 거의 하루살이의 삶입니다. 율법 아래 삶이 바로 이런 사형수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너무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얼마나 엄격하냐 하면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만 품어도 살인죄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죄로 간주합니다. 이런 죄는 현행범으로 그 자리에서 돌로 쳐서 죽이는 즉결심판을 해도 괜찮다고 합니다. 이런 사형수가 오늘, 내일 죽을까 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이유 불문하고, 과거는 묻지 않고 무조건 사면해주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사형수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어안이 벙벙한 사형수는 감옥을 걸어나 올 때 아무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이 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죄와 사망과 사단의 지배 아래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된 상태가 바로 은혜 아래 있음입니다. 사형수들이 사형집행 날짜가 가까이 오면 가까이 올수록 어떤 꿈을 제일 많이 꾸는지 아십니까? 죄짓기 바로 전으로 돌아가는 꿈을 제일 많이 꾼답니다.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그리고 돌아갈 수 있으면 하는 꿈을 꾼답니다. 그만큼 죄진 걸 절절히 후회합니다. 그만큼 사망이 두렵고 무섭습니다. 우리도 죄인인 채로 죽는다면 영원한 감옥, 고통의 감옥인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입니다 거기서 벗어나 은혜 아래로 오게 된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게 되었다는 다른 표현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해 가는 삶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힌 인생이 된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목적하신 지점까지 인도해 가실 줄 믿습니다. 노아의 방주 속의 삶이 과연 평안하기만 할 삶이었을까요? 동물이 35만 종입니다. 암수는 70만 종입니다. 이들을 먹이고 배설물 치우고 누가 했을까요? 노아와 노아 가족들이 방주 속에서 만만치 않은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어서 넉넉히 감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우리도 이 은혜 안에서 고난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되길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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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의 과정(로마서6:11-14/롬7:21-24, 롬8:13, 히12:4)

오늘 말씀은 성화의 과정을 공부하겠습니다. 부젱속으로는 살죄(殺罪)입니다. 살죄는 살인이 아닙니다. 죄를 죽이란 뜻입니다. 제목이 좀 살벌하죠? 우리가 살인은 절대 하면 안 되지만 살죄(殺罪)는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교계에 속담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설교는 3달 이상하지 마라!”입니다. 교인들 부담되어 다 떠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듣기좋은 설교 99%, 죄는1%만 한답니다. 죄는 칭의와 성화 교리의 핵심입니다.

제1장 구원받은 신자의 상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린아이가 막대 사탕을 물고 있는데 강제로 빼면 어떻게 합니까? 서럽게 울겠죠? 다시 사탕을 넣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습니다. 우리 아이 키우며 이런 장난 한 번씩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구원도 이런 식으로 줬다 빼앗았다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속성상 안 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기뻐야 정상입니다. 범사에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내면이 잔치 분위기여야 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렇지 않죠? 매일 천국인 신자는없습니다. 구원간증 할 때는 구원받은 확신들다가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렇지않습니다.

롬7:21-24절을 참고합니다. 21절에서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에서 ‘함께 있다.’라는 뜻은 ‘근접해 있다, 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죄를 질 성향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절대적인 지배에서는 벗어났지만 죄의 상대적인 지배는 계속됩니다.

예를 들면 어느 나라에 내전이 일어났다 가정합니다. 반군과 정부군이 싸웁니다. 반군을 게릴라 군이라합니다. 게릴라군은 불법 군입니다. 게릴라 군이 산악지역에서 계속 불법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내부 사람들의 동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우리의 상태가 게릴라 군이 마음 한 구석에 주둔하고 있다고 여기십시오. 이 세력은 정부를 완전히 뒤집어 엎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게릴라들이 활동을 많이 하게 허용하면 괴롭습니다. 게릴라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주면 안됩니다. 내면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게릴라 소탕 작전이 살죄입니다. 게릴라 군을 몰아내고 거룩하게 되어 가는 과정이 성화(聖化)입니다. 일생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은 평생 계속하여야합니다.

구원 받은 신자의 정체성이 이렇기 때문에 사도바울 도 본문 24절에서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한탄합니다. “곤고하다.” 란 말은 전쟁터에서 나온 말입니다. 패잔 병처럼 상처입고 배고프고 기댈 곳도 없는 상황을 곤고하다고 말합니다.

사망의 몸이란 표현은 고대에 살인범을 잡으면 같이 꽁꽁 묶어두었다고 합니다. 시체와 얼굴을 맞대고 같이 묶어놓으면 섞어가는 시체와 함께 있는 것이죠.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탄식은 이런 상황을 염두 해 둔 말씀입니다. 얼마나 냄새나는 시체를 몸에서 떼어내고 싶겠습니까?

떼어내려는 작업을 히12:4절은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롬8:13절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합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함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받지 못한 것 같고 생명력이 없고, 매사에 짜증나고, 어둡고 우울하다면 죄의 세력이 득세하기 때문입니다.

제2장 죄의 실체

죄는 원어 하마르티아로 빗나가다란 뜻입니다. 죄는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빗나간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않고 자기의 주관대로 사는 불신앙도 죄입니다. 마음으로 진 죄부터 도덕적, 윤리적, 법적인 죄도 포함합니다.

죄는 크게 마음으로 짓는 죄와 행동으로 옮기는 죄로 분류합니다. 예수님은 마음만 먹어도 이미 죄라고 합니다.“음란한 마음만 먹어도 이미 간음했다.(마5:28) 형제에 대해 악감정만 품어도 이미 살인했다. ”고 합니다.(마5:22) 마음으로 짓는 죄나 행동으로 옮기는 죄나 다 거기서 거기라면 행동으로 죄를 맘대로 지어도 됩니까? 아닙니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손상된 영혼을 회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마음으로 진 죄는 진실 되게 회개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면 회복이 됩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긴 죄는 오래갑니다. 예로 살인죄를 지었다면 뼈를 깎는 영혼의 고통으로부터 회복되기까지 오래 걸립니다. 일생 걸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교도소에 가서 형법을 어긴 책임도 져야합니다.

다윗 왕을 보십시오. 그는 부하들 전쟁터로 내보내고 왕궁 옥상을 거닐다 한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을 흘끗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삼하11:1) 왕의 직권을 남용하여 간음죄에 이어 충신인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어 죽도록 방조합니다.(삼하11:14) 다윗 왕은 행동으로 옮긴 죄를 진 후 뼈를 깎는 아픔과 후유증이 있었습니다. 후유증 일생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라가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난 원인도 그의 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죄가 행동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야합니다. 이것이 죄와 싸우는 아주 초보적인 단계입니다.

 

죄는 사단이 우리를 공격하는 무기입니다. 그래서 끈질깁니다. 이 끈질긴 죄에 대한 예를 주일 아침이라 노골적으로 드릴 수 없어서 컴퓨터 게임을 빗대어 보겠습니다. 게임에 중독된 것을 벗어나고자 맹세합니다. “내가 이제 죽어도 컴퓨터 게임은 안한다. 컴퓨터 게임을 하면 내가 성을 바꾸겠다. 게임하면 손에 장을 지진다. 심지어 손목을 자르겠다. 맹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컴퓨터 앞에 슬그머니 앉는 자신을 볼 때. 슬그머니 로그인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두드리는 자신을 볼 때, 이번 한번만 딱하고 절대 안한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하고 자기 합리화하는 자신을 볼 때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죄가 행동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야합니다. 이것이 죄와 싸우는 기초 단계입니다. 죄는 사단이 우리를 공격하는 무기입니다. 그래서 끈질깁니다.

죄를 계속 짓게 하는 사단의 목적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죄에 빠지게하여 하나님을 괴롭게 하려합니다. 죄에 마음 아파하는 하나님의 예는 성경에 많습니다.(엡4:30, 이사야7:13 말2:17 요11;35 히5:7) 엡4:30절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도 근심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는 지 십자가만 생각해도 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했으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대신 죽게 했겠습니까? 아들의 목숨 값으로 우리 죄를 사했습니다. “겨우 하나님 마음 아프게 하는 정도였어?” 할지 모릅니다.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다는데 별로 충격이 없다면 자신을 한번 돌아봐야합니다. 죄는 매우 즐거울 것이라는 환상도 심습니다. 그런데 죄른 짓고 난 후 즐거움은 커녕 죄책만 안겨줍니다. 마음에 허탈감, 공허함, 두려움 등이 밀려옵니다. 죄는 우리의 사고 기능을 점령합니다. 특정 죄를 계속 상상하게 만들다 환경만 주어지면 행동합니다.

제3장 죄의 지배 아래 사람의 특징

죄의 세력에 지배 받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감각 합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다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다른 특징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는 ‘어휴 다행이다. 저 분도 나와 똑같은 죄에 빠지는 구나!”하며 안도감 갖습니다. 시편119:136은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하고 고백합니다. 남의 죄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아파 하실까 걱정하는 자세 필요합니다.

죄의 세력이 지배하면 신자의 기본 생활에 소홀합니다. 성경 읽기, 기도, 교회 출석 등을 소홀히합니다. 성경을 펼치기가 부담됩니다. 교회 문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제4장 죄와 싸우는 동기

우리는 상기를 통하여 죄와 적극적으로 싸워야할 당위성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싸우기 전에 싸우는 마음의 의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의도가 내 자신에게 있으면 안 됩니다. 예를들면 이런 것이죠? 내가 아무도 몰래 짓는 죄가 있는데 “이게 들통 나면 무슨 견(犬)망신인가?” “체면이 말이 아닐텐데... ... ”“내가 이 망신당하기 전에 죄를 그만 두겠다.”하고 죄를 그만 두는 것입니다. 이러면 한계가 있는 것이죠.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또는 망신살이 뻗칠까봐 죄를 멀리하는 것은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 내 안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제5장 죄에 대한 승리의 비결

롬6:11-14절을 참고합니다. 본문은 우리가 누구에게 순종하는가의 중요성을 말씀합니다. 죄도 우리의 순종을 먹고 자라고 은혜도 우리의 순종을 먹고 자랍니다. 중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순종하려는 의지조차 없는 사람을 악하다(wickedness) 반대로 싸울 의지는 있는데 힘이 부족한 사람을 연약(weakness)하다고합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하나님은 힘을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태를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일회적이지 않고 일생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죄를 이기는 방법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히12:3) 눅23:34-35절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고 비웃고 조롱하는 군병들, 백성들, 관리들을 향해 무슨 말씀을 합니까? “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여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이 한 마디 하려고 이땅에 왔습니다. 그렇게 용서하고 갔습니다. 십자가의 용서의 은혜는 흘러 넘쳐 오늘 우리에게까지 왔습니다. 용서의 은혜를 생각하면 죄는 힘을 잃습니다.

제6장 환경정비와 조성의 중요성

죄를 이기는데 실천요소는 환경정리와 조성입니다. 고혈압을 고치려면 병의 원인을 파악하고 생활 습관을 고쳐야합니다. 의사들은 혈관에 안 좋은 술, 담배도 끊으라합니다. 짠 음식, 매운 음식, 기름진 음식을 피해야 합니다.

죄와 싸우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죄에 쉽게 빠지도록 하는 환경을 정리해야 합니다. 죄를 지을 환경은 적극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이 죄에 쉽게 빠지게 한다면 갖다 버리라고 까지 말합니다. 청소년 범죄의 70%가 모방범죄라고 합니다. 스마트폰 압수하면 우리 아이들 반란 일으키겠죠?^.^ 회사가 매일 술 접대를 강요하고 양심에 반하여 회개 장부를 조작하는 일을 시킨다면 “계속 다닐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려해보라고 합니다. 소설, 영화 등등도 죄에 쉽게 빠지는 요소로 작용한다면 정리해야겠죠?

 

환경정비도 중요하지만 은혜를 받을 만한 환경조성도 중요합니다.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장소는 무조건 참석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 빠지지 않는 것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라이브를 좋아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라이브로 역사하십니다. 말씀 듣는 장소는 적극 참여하여 현장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제7장 왜 하나님은 죄를 허용하는가

롬5:20절을 참고합니다. 본문에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했다는 말씀은 율법 전에 우리는 양심으로 죄를 판단했고 이때는 죄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율법을 줌으로 불명확한 죄들이 겉으로 드러 났다는 의미입니다. 양심으로 판단할 때는 우상숭배가 죄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십계명에 불법임을 명시함으로 죄로 드러납니다. 범죄가 명확해 질수록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도 커집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죄를 허용하시는 단서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깨닫게 하는 도구로 씁니다.

복어 독을 비유로 듭니다. 복어 독을 먹으면 30분 이내에 입술, 혀끝, 손끝이 마비됩니다. 그러다 4-5시간이면 목숨을 잃습니다. 민간요법으로 이 독이든 복어 알을 소량씩 먹으면 면역력이 생기고 피를 맑게 해 주는데 효과가 있답니다. 독이지만 잘 쓰면 약이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통하여서도 우리를 성숙시키는 도구로 씁니다.

 

이상을 통하여 우리가 살죄(殺罪) 곧 죄를 죽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하는 사단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늘 승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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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자의 4가지 특징(로마서6:11-23, 롬7장,롬8:1))

믿음에 관한 예화

예화입니다. 믿는 사람이 등산을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청년회에서도 소금강 갔었죠? 소금강에는 낭떠러지가 많습니다. 십자소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무섭습니다. 이 믿는 사람이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나뭇가지를 잡아서 구사일생 나무에 매달립니다. 한 손을 놓고 119에 전화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살려주세요! 그 위에 아무도 없어요!” 절규 반 기도 반 목청껏 외칩니다. 얼마 가지 않아 거룩한 음성이 들려왔답니다.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내가 살려주마. 그런데 조건이 있다. 날 믿고 그 두 손을 놔라!”입니다.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두 손 손 놨다가 뼈도 못 추리고 국물도 없이 떨어져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답니다. “그 위에 다른 분 없어요?” “하나님 말고 다른 분 없어요?”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두 손을 놓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종의 영적인 의미

롬6:15-23절에서는 종이란 용어가 9번 나옵니다. 학교 종 아니고 노예 사람 종입니다. 6장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믿는 자를 “하나님의 종, 순종의 종, 의의 종”으로 표현합니다. 반대는 죄의 종입니다. 종들은 열매를 맺습니다. 죄의 종은 사망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죽음을 3가지 종류 나눕니다. 첫째는 늙어 죽는 육체의 죽음입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죽음은 영원한 죽음으로 마지막 날 영원히 타는 지옥 불 못에 떨어지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종, 의의 종, 순종의 종이 맺는 열매는 영생입니다. 영생은 영존하는 생명(Everlasting life)을 말합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3가지 죽음은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죽더라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성령님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천국행 티켓을 이미 얻었습니다.

믿는 자에게 자연 스럽게 나타나는 특징

오늘 제목이 믿는 자의 4가지 특성입니다. 믿는 자는 이런 행위를 해야 하는 당위성을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자는 자연스럽게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는 견해에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내가 결단해서 믿습니다. 그러나 믿은 후에 알게 된 것이 이 믿음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즉흥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계획하시고 주었습니다. 창조주께서 특별히 주신 보통 믿음이 아니라면, 차이가 나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도 다르고 다른 종교인들하고도 다른 차이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착함의 차이일까요? 도덕적, 윤리적으로 우리가 불신자보다 월등히 나은가요? 같이 탁구를 하는 어떤 분이 교회와 담쌓은 경험을 얘기해주었는데 이렇습니다. 수십 년 전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하고 축구를 했답니다. 본인이 극적인 골을 넣었답니다. 그런데 골을 넣은 걸 축하는 못 해줄망정 자기들끼리 자신에게 뭐라고 하더랍니다. 그분은 교인들의 이런 편협한 모습이 평생 상처가 되어 나는 교회는 안 간다는 결심을 했답니다. 이런 예를 보면 우리가 단순히 착하다는 기준으로 믿는 자 와 큰 차별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믿음이라면 불교, 힌두교, 토테미즘, 애니미즘을 등을 숭배하는 타 종교인과 무엇이 다른가요? 오늘은 그 차이에 관해서 소개 합니다.

첫째 특징 자기부인

오늘 본문 롬6:18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종, 의의 종, 순종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단어에서 첫 번째가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종은 자기가 부인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특성 첫 번째는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은 부부 사이에 “여보~ 자기” 할 때 그 자기가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려는 욕구와 판단을 거절하는 자가 자기를 부인하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종이 자기를 부인해야 함을 예수님께서 비유한 장면이 눅17장7-10절에 무익한 종의 비유입니다. 종이 온종일 땡볕에서 일합니다. 중동지방은 얼마나 덥습니까? 그는 밭일하거나 또는 양 똥 치우느라 녹초가 되어 집으로 옵니다. 그런데 주인은 종에게 물 마시고 쉬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배고프니까 저녁 밥 차려 달라 하고 그 밥 다 먹을 때까지 수종 들라고 합니다. 하라는 걸 다 했는데 칭찬은커녕 당연히 할 일을 했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바로 이런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한 다른 말씀도 있습니다. 마16:24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입니다. 본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위대한 사명을 지고 쫓으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원어 상은 그것이 아니고 자기 부인과 같은 의미랍니다. 십자가를 지고 지속해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뜻이랍니다. 정리하면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사람이라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자여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 보자 하는 운동이 아니라 말씀이 떨어지면 자기 부인이 되는 자입니다. 우리 마음속 깊이 말씀 앞에서 이런 작은 움직임이 있는지 잘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롬6:17절을 보십시오. 본문은 우리를 순종의 종이라고 합니다. 순종의 종은 순종할 대상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종이 사사건건 주인에게 대들고, 말 안 들으면 쫓겨나거나 이웃집에 팔아버립니다. 실제 미국 노예시장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병이든 아프리카 추장의 아들이 시장에 나왔답니다. 그를 한 악덕 노예상이 사서 가려고 하는 순간에 다른 노예상이 나타나서 그를 값의 3배를 더 주고 되샀다고 합니다. 노예 처지에서는 이상합니다. “이것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 목숨을 바쳐야 하는 험악한 일을 시키려나?” 의심합니다. 그래서 그는 마차에 실려 가면서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욕도 했답니다. 그 주인은 이 모든 행패를 꾹 참고 자기 집까지 마차에 태워 갑니다. 그리고 놀라운 말을 합니다. “이제부터 너는 자유다. 내가 너를 3배로 산 것은 네가 그 집에 팔려 가면 한 달도 못되어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널 살리려고 3배의값을 주고 샀다. 그러니 이제 너의 길을 가라.” 하고 풀어줬답니다. 추장 아들이 나갔겠습니까? 그가 밖에 나가 봤자 검은 피부는 바꿀 수 없으니 금방 백인에게 잡혀 노예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은 강건너 불 보듯 뻔합니다. 이 노예는 나가지 않고 평생 자발적으로 주인을 섬겼답니다.

 

두번째 특징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

믿는 자의 두 번째 특성은 하나님의 선한 주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이 만사형통일 때는 당연히 아멘 이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고난과 고통으로 인도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주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 내 부르짖음에 침묵으로 응답하실 때 이 주권 인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처음에는 반발심을 갖더라도 결국에는 그 주권을 선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할 때도 내 입맛대로 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남성들은 특히 캡틴 신드롬이란 게 있습니다. 캡틴 신드롬 학술 용어 아닙니다. 제가 잊어버리지 말라고 지어낸 용어입니다. 학생들 학교에서 답지에 썼다가는 낭패를 봅니다. 캡틴 신드롬은 내가 선장이 되려는 마음입니다. 내가 대장이 되려는 마음입니다.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낫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용미사두입니다. 한국 국회 의원 수가 299명이랍니다. 그런데 모두 다 하나같이 최종 목표는 대통령이랍니다. 대통령은 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바로 내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모두 있습니다.

 

 

예수님 측근 열두 제자들도 캡틴 신드롬 있었습니다. 11명 모두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형님은 수제자 감이 아니야! 수제자는 나여야 하지. 베드로 해엥님은 너무 가벼워. 사람이 자고로 듬직해야지 항상 호들갑이 심해!” 이런 마음으로 제자들은 누가 큰지 항상 경쟁합니다. 이런 제자들도 나중에는 달라집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초대교회 역사를 잘 섬겼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자의 가시라고 표현하는 고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께 없애달라고 3번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고 자기가 계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교만해 지지 않도록 주신 가시로 여깁니다. 믿는 자의 특성 2번째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한 주권을 인정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결혼 제도에 비유한 율법에서 해방된 사람의 특징

로마서 7장1-4절까지는 믿는 자가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결혼제도에 비유합니다. 바울은 결혼한 적이없고 평생 주와 복음을 위해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결혼에 대해 비유를 할 수 있었죠? 본문을 페미니즘, 여권신장운동, 여성 인권 탄압금지에 인용하라고 비유한 거는 아니겠죠? 바울은 성경이 말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염두 해 두고 비유를 합니다. 원래 부부관계는 평등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가운데에 있었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코뼈로 만들었으면 머리 꼭대기에 앉았을 것이고 발가락뼈로 만들었으면 항상 밟혔을 것입니다. 이런 동등한 관계가 창3장16을 보면 죄를 짓게 되면서 깨집니다. 남편이 아내를 다스리는 관계로 변합니다. 동등한 관계에서 다스림의 관계, 지배관계, 권력 아래의 관계로 떨어집니다. 본문의 믿는 자가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바로 이런 율법의 지배, 영향력, 권력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비유합니다.

두 번째는 법적인 관계에서 벗어났음을 강조합니다. 결혼도 계약관계입니다. 혼인 서약을 하고 성혼 선언을 하면 이의 있냐고 묻습니다. 남편이 살아있는데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법을 어기게 됩니다. 이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려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함을 본문은 강조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폭력과 폭압의 율법 남편에게서 벗어난 자임을 본문은 강조합니다. 유대 사회의 결혼제도는 남성에게 유리합니다. 여성은 이혼 청구권이 없었습니다. 당시 이혼 사유를 찾아보니 황당한 사유도 있었습니다. 결혼한 랍비가 부인보다 더 이쁜 여인을 만나면 이혼해도 된다 이런 조항도 있었습니다. 믿는자는 남편이 죽음으로 부당한 관계에서 벗어난 것처럼 율법의 부당함에서도 벗어났습니다.

본문 5절에서 13절까지는 율법과 죄의 독특한 관계를 소개합니다. 바울은 율법 자체는 선하다고 합니다.(롬7:12) 율법 없으면 당시 사회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짐승의 세계와 같이 됩니다. 짐승은 힘이 곧 정의입니다. 짐승들에게 살인죄, 간음죄는 없습니다. 율법의 선한 기능 때문에 율법 폐기론,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는 것은 이단 사상입니다. 물론 구약의 제사제도와 같은 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덕법, 시민법 등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율법이 죄를 늘어나게 만든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은 죄를 보는 거울과 같기 때문입니다. 거울을 보기 전에 죄인 줄 몰랐는데 거울을 보니까 죄인 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죄의 종류도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믿는 자들은 죄에 대하여 민감해집니다. 신앙 초기에는 내 죄가 바위로 보이다가 조금 지나면 자갈로 보입니다. 좀 더 지나면 모래로 보이다가 더 지나면 먼지처럼 보입니다.

율법이 죄를 더하게 만드는 이유

본문7,8절을 보십시오. “율법에 탐하지 말라,”란 조항이 있습니다. 이 조항이 우리에게 탐심을 더 불러일으킨다고 합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하면 도둑질하고 싶은 마음이 더 생깁니다. 옛날에 어머니가 조청을 담아서 선반에 올려놓곤 합니다. 고추장 담을 때 필요했었습니다. 어머니가 올려놓고 아무 말 하지 않으면 될 텐데 그거 먹으면 절대 안 되란 말을 했기 때문에 기어코 먹게 되는 이치입니다.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면 기어코 하는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아담 부부에게 선악과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어코 따먹습니다. 이 이치는 먹지 말라고 말씀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죄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 내가 왕이 되어 내가 인생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어기면서 그 율법을 정한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하면 오기가 생겨서 더합니다. 율법을 깨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은 죄를 더 짓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롬7:6절을 보십시오. “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그것으로 아니 할지니라” 본문은 옛사람이 아니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으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은 성령님을 통한 새 생명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율법 조문에 매이는 사람은 옛사람을 말합니다. 신동엽이라는 분이 쓴시 “껍데기는 가라!”란 시가 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하고 시작하는 시입니다. 율법의 알맹이는 도외시하고 율법의 껍데기 형식만 지키지 말라가 본문의 권면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오래 하다 보면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이 생깁니다. 이 묵은 것은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공로가 쌓이고, 신앙 경력이 쌓이고, 신앙의 마일리지가 늘어나면 그 마일리지가 남을 판단합니다.이런 사람 옆에 가면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판단과 정죄 받을 것 같아 위축됩니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는 공중에 12대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인공지능 시스템이 도입되었습니다. 공 안에도 센서가 있고 12대의 카메라가 선수들의 관절을 29개로 나누어 추적하면서 오프사이드 반칙을 잡아냅니다. 공을 차는 순간에 공격수가 상대 수비수보다 팔 한쪽 빨리 들어가도 단 20초 만에 잡아낸다고 합니다. 이런 시스템이 공정성을 더해주기는 하지만 선수들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AI 앞에 서는 축구 선수와 남을 잘 판단하는 사람 앞에 선 우리와 비슷한 처지가 아닌가 하여 비교해 보았습니다. 저 사람은 저래서 문제야, 이 사람은 이래서 문제야 지적하면서 본인도 신앙의 기쁨을 잃어가기 쉽습니다. 우리 모두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로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마음에 쌓여 있는 율법 조문의 묵은 것들은 과감히 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세번째 특징 영적인 열매

믿는 자의 3번째 특성은 롬 7장 4절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본문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에게 간다는 것은 “시집간다, 결혼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믿는 사람과 예수님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표현합니다. (요3:29. 계21:9. 21:2) 본문은 예수님의 신부가 된 목적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합니다. 그 열매 중 가장 큰 열매가 구원의 열매입니다. 영생의 열매입니다. 이 구원의 열매를 얻은 기쁨을 가장 잘 표현한 분이 베드로 사도입니다. 베드로전서1장8-9절입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본문에서 믿는 자의 3번째 특징은 구원 그 자체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영원, 영생을 소유한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구원 이외에 플러스알파가 없어도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구원은 기본이고 그 외에 많은 알파 즉 수많은 복들이 있어야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믿음의 사람은 영원을 소유한 기쁨이 너무 커서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3:17-18)라고 구원의 기쁨을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네번째 특징 믿는 자의 이중적인 상태 또는 태도

끝으로 믿는 사람의 4번째 특징은 롬7:14-25절까지 말씀입니다. 믿는 자의 이중상태를 소개합니다. 바울만의 독특한 시각입니다. 이 시각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마음을 매우 편안하게 합니다. 24절은 바울의 탄식이 나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본문의 곤고는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말합니다. 이 고백은 바울이 회심한 이후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갈등하는 이유가 17, 20절에 죄가 내 속에 거하기 때문이고, 18절과 21에는 육신에 악이 함께 있기 때문이고, 22.23, 25절은 내 육신 속의 죄의 법이 나를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 속 사람과 겉 사람과의 갈등, 옛 자아와 새 자아와의 갈등,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의 갈등, 마음의 법과 육신의 법과 갈등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 고백합니다.

이런 곤고한 상태를 예수님도 말합니다. 마태복음5: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마태복음 5장3-10절은 아주 이상한 복, 아주 낯선 복이 나옵니다. 팔복을 해석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을 기울여 애통해하면 그 결과로 위로를 받게 된다고 해석하기를 잘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애통한 상태에 놓이게 된 자 또는 애통한 상태로 이끌린 자가 복이 있는 자인데 그 복이 위로받는 상태로 놓이게 한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팔복을 운동하자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 모두 가난 합시다. 애통합시다. 박해받읍시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라고 하면 상당히 어색합니다. 애통해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위로를 받는 상태가 된다는 설명입니다. 본문에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가 바로 애통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위로라는 복이 따라서 오는데 그 위로는 누가 줍니까?

오늘 본문7장25절과 8장1절에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 그리스도가 위로를 주십니다. 오늘 롬6:19 하반 절을 보면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합니다. 또 성경에는 수많은 요구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와 수요집회를 빠지지 않는다면 일 년에 총 108번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10년 신앙 생활하면 1,080가지의 권면을 받습니다. 다 실천했다면 우리는 벌써 거룩해져서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안 됩니다. 어느새 죄의 본성이 튀어 나옵니다. 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잘 안되는 나를 이상하게 보지 말아야 합니다. 갈등하는 나가 정상입니다. 구원받지 못해서 그런가 의심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갈등만 하고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늘 누구에게로 가야합니까? 예수님께로 가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늘로 피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이 안 계셨으면 어떡할 뻔했을까? 예수님 없었으면 큰일 날뻔했다. 나는 예수님의 은혜 없이는 단 1분도 살 수 없는 자입니다.”하고 고백하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 이유가 본문 롬8: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위대한 선언입니다. 이것은 어떤 싸이클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정죄가 없고 예수 밖에 있을 땐 정죄가 있고 왔다 갔다. 오르락내리락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믿는 자는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정죄는 이미 2000년 전에 끝났습니다. 본문 7장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란 문장은 문맥의 흐름으로는 들어가 있을 자리가 전혀 아닌데 들어가 있는 문구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으로 인한 감사를 주체할 수 없어서 갑자기 튀어나온 탄식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믿는 자의 4가지 특성을 정리합니다. 첫째는 자기 부인하는 자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선한 주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세 번째는 구원만으로 만족하는 자입니다. 네 번째는 갈등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갈등만 하면 안 되고 자기가 어디에 있음을 확인 해야 합니까? 예수님 안입니다. 마지막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갈등하고 좌절하지만 결국 그래서 '' 나는 예수님이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없었으면 큰일 날뻔한 자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예수님 안에 있는 나를 확인하고 위로 받는 자 이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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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가지 영적 교훈(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죄를 대하는 신자의 태도, 하나님은 아빠이시다.)

본문:롬6:13/마태19:16~22/롬7:21~25/마5:21-22/롬8:14-15/출13:2/마25:24,25

2001년까지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 회장 겸 최고경영자를 역임하고 2020년 사망한 잭 웰치(Jack Welch)는 경영의 귀재, 20세기 최고의 CEO로 불렸습니다. 그가 사람을 쓰는 3가지 관점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보스의 뜻을 모르는데 열심히만 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보스의 뜻을 알고 그만큼만 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보스의 뜻을 알고 창의성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보스는 물론 일의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을 탈락이고 두 번째 유형은 평균입니다. 세 번째 유형이 그가 가장 선호하는 사원입니다. 사장에게 다른 창의적인 안을 제시하여 사장이 질문하게 만드는 형입니다. 교회는 경영이 아니니 우리는 첫 번째 유형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열심히만 하면 열심히 한 만큼 손해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3가지 교훈을 나누겠습니다.

교회에서 사람이 모이면 힘이 생깁니다. 교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떤 힘을 가지게 되면 내놓지 않고 지키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계에서 한 때 논쟁거리가 되었던 문제가 교회 세습입니다. 교회 권력도 권력이라고 그 힘을 아들에게 세습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절대적인 힘, 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첫째 예가 바벨탑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뭉쳐서 탑을 쌓아 하늘까지 올라가서 우리 이름 내자 하니 언어를 나눠서 흩어버리십니다. 사사들을 보면 다 일회성으로 끝났습니다. 왕처럼 자식에게 승계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사사들은 하나같이 못난 사람들을 하나님이 세웠습니다. 기드온은 겁쟁이였습니다. 입다는 기생 아들 출신으로 조폭 두목 출신입니다(사11:3) 바락은 드보라의 치맛자락을 잡고 전쟁에 나가기 무서워하던 자였습니다. 삼손은 말해 뭐 합니까? 바람둥이였습니다. 하나님은 힘없는 이들을 일으켜 힘을 주시고 이스라엘을 구한 후에는 그 힘이 계승되지 않게 했습니다. 또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은 어떤 날입니까? 움켜쥐었던 땅을 다 돌려주는 날입니다. 힘이 제로 베이스가 되는 날입니다. 또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왕으로서 당연한 일을 한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노를 하셨습니다. 인구를 세어 힘을 과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전쟁하며 얻은 말의 힘의 힘줄을 끊어버리게 했습니다.(여호수아11:6) 병거는 불태우게 했습니다. 획득한 말과 병거를 잘 활용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인간 왕도 처음에는 세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들이 획득한 힘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 하도록 하신 것을 역사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

로마서16장1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16:13b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라는 부분에 주목해 주십시오. 본문에서 의는 곧 선이고 곧 옳음입니다. 그리고 무기는 뭡니까? 무기는 힘, 파워를 상징합니다. 제가 서두에 하나님이 구약에는 힘을 갖는 것을 차단하셨다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힘을 자기를 위해 쓰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자기만 옳다. 자기가 최고의 선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무리가 모이면 어떻게 되죠? 싸움만 일어납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런 무리가 뭉쳐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뉜 예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를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잘한다고 손뼉 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개독교라고 하면서 욕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자신들을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라 여기는 동시에 자신들이 최고로 옳으며,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즈음 교회는 세력, 힘이 막강해졌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다 한국에 있습니다. 여의도에 있는 모 교회는 2023년 기준 58만 명입니다. 강릉시 인구의 두 배가 넘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교회가 정치까지 좌지우지합니다. 2024년에 우리나라 인구 대비 3대 종교 신도 수를 보니 기독교가 제일 많습니다. 20%가 기독교입니다. 다음은 불교 17% 가톨릭이 11%로 나타났습니다. 무신론자가 51%입니다. 그런데 최근 10년 통계를 보니 기독교의 신도 수만 10년 전 대비 -6%대로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반면에 불교는 약간 늘거나 현상 유지하고 있고, 가톨릭은 계속 증가세에 있다고 합니다. 이 상황을 야구에 비교하면 가톨릭은 연타석 홈런을 치고 있고, 불교는 안타를 치고 있는데, 기독교는 계속 병살타만 치고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자신들이 예수님과 가장 가깝다. 우리가 최고의 선의 길을 가고 있다.”라고 여기는데, 왜 정작 주변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는 거죠? 우리가 “최고로 옳다. 최고의 선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게 거부감을 줍니다. 또 교회가 얻은 막강한 힘으로 생명을 살리는 데 쓰지 않는데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자신들을 최고로 여기는 시대와 세계를 집어삼키는 힘이 충돌하는 시점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땅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여겼습니까? 선민의식, 선민사상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세계에서 우리가 최고로 옳다. 최고의 선민이다.”라고 여기며 살았잖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을 개와 돼지로 취급했습니다. 이방인의 마당도 더럽다고 밟지 않았습니다. 한편 당시 힘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제국이 뭐죠? 로마제국입니다. 당시는 팍스로마라고 하여 세계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그 막강한 힘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황제 숭배를 강조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다 네로 때 더욱 극심하게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들이 최고라고 여기는 세력과 세계최강의 힘이 충돌하는 시기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대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는 힘과 권력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와 섬김으로 이룩되는 나라임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또 다니엘서 7장23~24절과 요한계시록 13:7~8절을 참고하면 말세에도 로마와 같이 전 세계가 하나의 정치, 경제체제 곧 하나님의 힘, 세계 통합정부와 같이 하나로 통합될 때 재림하신다는 예언이 있습니다.

사실 가장 선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최고의 힘을 가지셨습니다. 우주를 창조하고 통치하는 능력과 힘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예수님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고, 그 가진 힘을 어디에 썼는지를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6~22절 부자 청년과의 대화입니다. 16,1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당신이 선하다고 말씀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선한 이는 단 한 분 하나님이 시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선하시다는 생각 자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반면 부자 청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자기는 계명을 다 지켜서 “나보다 선한 사람 있으면 나와봐~”라는 자세였습니다. 그리고 청년은 어려서부터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는 모르지만, 부라는 막강한 힘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 힘을 뭐한데 쓰라고 하십니까? “너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을 생명을 살리고, 남을 이롭게 하는데 일에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그 가지신 힘을 어디에 썼습니까? 자신을 위해 조금도 쓰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생명을 살리는 일에만 사용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배웁니다. 우선 내가 최고로 선하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선하면 얼마나 선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다 도토리 키재기 죄인들입니다. 내가 옳다는 그 생각이 누군가를 판단하고 생명을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선한 분은 오직 한 분으로 여겨야 합니다. “애통해하는 자는 복이 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권면이 모도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서는 애통해하는 마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야 얄밉지 않은 싸가지 있는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2. 죄에 대한 신자의 태도

본문은 로마서7장21~25절까지 입니다. 23,24,25절만 읽겠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본문 유명한 말씀이죠. 죄에 대한 사도바울 개인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이 때 바울이 신앙 생활한 지 23년 차였습니다. 그의 나이는 50살 정도로 추정합니다. 이때쯤 되면 어떤 죄의 유혹에도 의연해야 할 때 아닙니까? 그런데 여전히 갈등하고 있습니다. 24절에는 정말 긴 탄식을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한편으로 위로를 얻습니다. 아니 신앙의 맹장, 사도바울도 죄 앞에 탄식할 수밖에 없는데 그와 비교하여 우리는 신앙의 피라미 아닙니까? 두 번째는 본문이 말씀하는 핵심은 죄의 무서움, 죄의 현실성입니다. 죄는 우리가 내 의지로 맞대 항 하여 대적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는 말씀이 마태복음 5장 21~22절에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살인죄에 대하여 예수님이 새롭게 정의하십니다. 행위로 살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형제에 대해 마음으로 “라가”라 하는 자도 살인이라고 합니다. 라가는 “멍청한 놈, 쓸모없는 놈, 텅 빈 놈”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마음만 먹어도 살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행동으로 나온 것도 아닌데, 생각만 했는데 무슨 살인이야?”라고 하며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생각에서부터 원천 차단하라고 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5장 27, 28절은 간음에 대해 정의하십니다.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 앞에서도 “에이 뭐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았는데, 마음으로 품기만 했는데 무슨 간음이야! 너무하잖아?”라고 하며 가볍게 여기면 결국 죄에 끌려갑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몸과 영, 영과 몸 계속 반복되어 나옵니다. 본문은 영지주의자들처럼 “몸은 악하고 영은 선하니까 몸은 함부로 놀려도 된다.”라고 나오면 곤란합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장인정신으로 한 땀 한 땀 빚어서 만드신 몸입니다. 몸 자체는 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순위는 따져볼 수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 앞에 금궤, 난초, 고양이, 노숙자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금궤-난초-고양이-노숙자입니다. 중요한 순서를 말해보십시오. 당연히 노숙자-고양이-난초-금궤 순일 것입니다. 요즈음은 금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습니다. 한 돈에 80만 원갑니다. 그러니까 금궤가 최고입니다. 이 판단은 돈의 가치 기준으로 중요도를 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가치 기준으로 중요도를 정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노숙자가 1번입니다. 2번이 동물인 고양이입니다. 3번도 식물인 난초로 생명이 있습니다. 마지막 금덩어리입니다. 바로, 이 순서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중요도 순서를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창조 질서가 무너지는 겁니다. 내 마음 첫 자리에 가장 중요한 하나님 대신에 다른 걸 두는 게 우상숭배입니다. 그 자리에 돈, 권력, 금덩이 등등이 대치되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런 창조 질서가 뒤집히면 뒤집히는 거지 그게 무슨 대수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 질서가 무너지면 인간의 내면에는 불안과 허무와 좌절이 따라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 때 마지막 날 가장 중요한 사람이 만드셨습니다. 창조 순서를 거슬러 가면 동물, 식물, 무생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2절을 만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고?” 혼돈, 공허, 흑암이 나옵니다. 사람이 창조 질서가 어그러지면 혼돈, 공허, 흑암 속에 살게 됩니다. 모든 것을 가진 회장, 인기 연예인이 생명을 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그토록 추구했던 것이 채워지면 만족하고 행복이 지속될 것 같았지만 여전히 불안, 허무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를 전문용어로 실존적 허무라고 합니다. 인간 존재 자체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회의를 말합니다. 우리 마음에 절대적인 하나님이 첫 자리에 있어야 불안하지 않고 공허하지 않게 됩니다. 보다 덜 중요한 것이 가장 중요한 걸 삼키거나 대체되면 실존적 허무에 빠집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몸과 영 덜 중요한 게 뭡니까? 몸입니다. 우리는 몸의 가치가 영의 가치를 삼키게 놔두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죄에 대한 신자의 태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리스 신화를 소개합니다. 사이렌이라는 신이 있습니다. 119 벨소리도 사이렌인데 그리스 신화에서 따 왔습니다. 사이렌은 상체는 여인이고 하체는 새의 형체를 가진 신입니다. 사이렌은 노래로 사람을 유혹하는 악신입니다. 배가 항해 하다 사이렌이 있는 섬 근처를 지날 때 사이렌이 노래로 유혹하면 사람들이 그 소리에 이끌려 바다로 뛰어내리거나 배가 돌에 부딪혀서 죽게 만듭니다. 오디세이가 트로이 전쟁 후 귀가하다 이 싸이렌 섬을 지날 때 그와 맞서려고 선언들 귀를 다 밀랍으로 막아서 소리를 못 듣게 했습니다. 자신은 돛대에 몸을 꽁꽁 묶어서 섬을 고통스럽게 통과했다고 합니다. 사이렌을 이기는 소리가 있습니다. 오피러스입니다. 기아차 중 2003년~2011년경 대형 세단 오피러스가 있는데 같은 이름입니다. 오피러스는 하프 음악의 달인이었습니다. 그가 연주하면 인간은 물론, 동물, 나무, 바위, 강물까지 감동의 도가니였다고 합니다. 그는 그 아름다운 연주로 지하 세계에 가서 죽은 아내도 되찾아올 정도였습니다. 오피러스의 연주를 들으면 사이렌 신의 죽음의 유혹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죄에 대해 한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오디세이처럼 귀를 막고, 몸을 돛대에 묶고 대항하는 태도 보다는 다른 아름다운 소리에 이끌리는 방법이 좋습니다. 로마서 6장에서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또 8장에서 계속되는 것은 생명의 성령님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고 성령께 이끌릴 때 죄는 얼씬도 못 합니다.

3. 하나님은 아빠이시다.

로마서 8장 14~15“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므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품을 떠나버린 셈입니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이 당신의 품을 떠난 장자를 찾는 내용이 많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색동옷을 입힙니다. 사랑했던 라헬의 자녀여서 그런가요? 색동옷은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으로 장자가 받는 권위와 축복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요셉 자녀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둘 다 12지파에 들어갑니다. 장자는 동생들보다 복을 2배로 받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절하는 꿈은 하나님이 막내에게 장자 권의 축복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는 영감을 몇 배로 요구합니까? 두 배로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영적 장자로 택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430년 이스라엘 종살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나가게 하라는 말을 바로 왕이 듣지 않자 10 재앙을 내리는데 마지막 재앙이 장자가 다 죽는 재앙입니다. 그러자 눈도 꿈 적않던 바로가 이스라엘을 내보냅니다. 장자를 살려 나왔는데 출13 장 2절에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맏이들, 장자는 하나님이 다 내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뜻은 장자가 하나님 가족이 되면 그 가족 모두 다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 구원받은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영적인 장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장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영적인 장자가 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라고 합니까? “아버님, 아바마마”가 아니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장자로서 아빠하고 여행을 떠나는 겁니다. 우리 어릴 때 학교 갔다 집에 와서 부모가 없으면 왠지 슬프고 기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부모하고 같이 여행을 가지 않았습니까? 중학교 올라가면서부터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요? 부모가 이제는 아빠가 아니고 엄위한 아버님의 입장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이 뭔가 요구하는 게 많고, 규칙이 많고, 잔소리가 많아서 부담스러워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이 잘못하면 벌주시는 엄위한 하나님으로 여기기 때문에 힘듭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엄위하신 분으로 여긴 사람을 책망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4~25절에 보면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1달란트 받은 자가 돈을 땅에 묻은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굳은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공동 번역은 하나님을 “무서운 분” “하나님을 엄위한 분”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평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가장 욕을 많이 한 무리가 누구죠? 죄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다고 십자가에 못 막아 죽인 무리입니다. 자신들은 정작 하나님의 이름도 감히 부르지 못하여 아도나이라고 에둘러 불렀습니다. 그들은 613개 율법 조문을 2천여 개로 세부 조항을 만들어 지키면서 안 지키면 벌 받을 것같이 여긴 사람들입니다.

구약에 십계명은 이정표의 의미로 준겁니다. 또한 구약의 제사는 원어로 “코르반”이라고 읽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다, 접근하다 ”입니다. 제사는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역효과가 났습니다. 혹시 여기 계신 분 중에 모임 한 번 빠지면 하나님이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분 계십니까? 이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반응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종에서 자유자로 만들어 놨더니 또 아빠라고 부르면서 가까이 오라고 만들어 놨더니 우리가 자꾸 엄위한 분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빠하고 함께하는 여행이 신나야 합니다. 그 집에서 주인공은 자녀들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합니다. 하나님 아빠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우리는 예수님과 공동상속자란 표현이 있습니다. 공동상속자는 영어로 “joint-heirs”입니다. 예수님과 묶여서 상속받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족할지라도 예수님과 묶여 있으므로 상속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빠를 만나러 천국에 빨리 가보고, 싶어야 합니다. 반대로 황금으로 치장한 맨션에 살려고 가고 싶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 모두 아바마마와의 여행이 아니라 하나님 아빠와 신앙여행을 잘하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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