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비밀(마태복음1장)
1. 족보에 담긴 난해 구절
마태복음1:17“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1명이 모자라다.]
위 본문에서 14대씩 3번이면 42명이어야 한다. 실제 세어보면 1명이 빈 41명이다. 계산 착오인가? 성경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주석가들의 주장을 참고 한다. 첫째 마태복음1장11절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때 여고냐가 한 번 나오고 12절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고 난 후 여고냐가 또 나온다. 포로 전과 후에 여고냐를 분리하여 두 번 넣어 42명이다. 두 번째 견해는 인물의 중요도가 갑인 다윗을 두 번 계산한다. 위 17절에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다시 시작하여 바벨론 포로까지 14대에서 다윗을 두 번 넣어 42명이다. 세 번째는 마리아를 넣어서 42명이 된다는 주장이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였으니 마리아를 육체적 계보자라 한다.
[ 14로 자른 이유?]
왜 꼭 14세대를 한 단위로 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15도 좋고 행운의 수 7을 넣어도 좋은데 14로 끊었다. 학자들의 첫 번째 견해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이다. 단지 쉽게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14 단위로 나누었다. 두 번째는 14대씩 3기로 나누어 한번 더 나누면 7대씩 6세대로 만들고 보자이다. 예수님 탄생이 7세대로 끝나고 7세대의 시작이 된다. 7은 완전수이다. 세 번째는 다윗 이란 이름의 자모수가 14다. 히브리인에게 14는 구원과 해방의 의미가 있고 42는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의 이름이 달라요]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 족보 이름이 다르다. 특히 요셉의 아버지 이름이 마태복음에서는 야곱이고 누가복음에서는 헬리이다. 학자들은 마태복음의 족보는 요셉의 계보이고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의 계보이다. 마태복음 요셉의 친아버지는 야곱이었고, 누가복음의 헬리는 마리아의 아버지이다. 헬리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딸만 둘 두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와 또 다른 딸만 있었다. 율법에는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사위가 아들이 된다.(민27:1-11 36:1-12)
[마태복음 족보에는 남 유다 왕 들의 이름이 왜 없는가?]
남 유다 왕이 20명이다. 마태복음 예수님 족보에는 다 거론하지 않았다. 마태복음1:11절에 등장하는 여고냐라는 왕에게서 단서가 있다. 여고냐는 예레미야22:30절에 그의 악한 행동 때문에 자손 중 다윗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선택된 계보이다. 흠이 있거나 또는 자격 미달의 사람은 과감히 빼버렸다. 자격 기준은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의 이방여인 이름이 올랐다. 믿음 앞에 평등하다.
[마태복음 족보 용어에 담긴 의미]
창세기는 영어로 “Genesis”이다. 게네시스는 마태복음 1장1절 “Generation”과 연결된다. 예수그리스도의 세대는 족보에 나타난다. 창세기는 창조의 기록이 1장밖에 없다. 창세기는 성경을 주신 목적, 사람의 역할과 의무 곧 영어 “Generation” 혹은 “Generator”의 뜻인 생성,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발전은 자유의지의 선택으로 이루어져서 책임이 따른다. 인류의 대표 아담이 자유의지로 어떤 선택을 하였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가 어떻게 generator(생성, 발전)되는 지 기록이다. 이 선택에 의해 가족(Family)이 결정되고 달라진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그리스도의 가족(Family)과 믿음을 통해 거듭난 사람들의 나역(lis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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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유혹 방법
사단은 속성을 좋아합니다. 마태복음4장1~11절까지 사단은 예수님을 3번 유혹합니다. 돌을 순간적으로 변하게하 여 떡을 만들라 요구합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수많은 인파들이 보는 앞으로 뛰어 내려 안전하게 돌위에 앉아 단번에 슈퍼스타로 등극하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잠깐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하나님은 속성으로 화려하게 인류 구원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30살 먹은 메시야 예수님이 마차를 타고 낙하산 타고 내려오듯 지상에 내려와 단번에 인류구원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전지전능한 하나님 다운 역사를 펼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 여인의 몸을 빌어 아무것도 모르는 한 아기로 왔습니다. 30여 년을 자라고 강하여지고 지혜가 자랐습니다. 우리의 희로애락, 빈부귀천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 속에 서서히 구원 역사를 진행하셨습니다.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역사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화려한 것을 선호합니다. 인간의 강력한 리더십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자연스러웠습니다. 공생애 시작을 위해 30년을 기다리고 인내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심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았는데 거두는 역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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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 한 자(마5:5)
온유한 자가 복을 받는다는 의미
마태복음 5장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본문에서 '온유'의 헬라어 '프라우스'는 본래 '길들여진 짐승'을 묘사할 때 사용한다. 사나운 야생마가 주인의 뜻에 복종하여 잘 길들여진 상태를 말한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반론이 없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가 "왜 나만 고통받아야 하냐"라고 하늘에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이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넌 좋겠다 온유한 자여"라는 뜻이다. 온유는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한 태도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남에게 온유를 강요하면 안 된다. 온유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태도이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을 말한다. '땅'은 단순히 우리가 거주하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성경에서 '땅'은 '하나님 통치가 실현되는 곳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지시할 땅'을 약속하시며 하나님의 통치와 늘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환난, 고통, 기근이 있는 이 땅에서 '온유하게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땅의 질서와 원리에 대항하지 않고 초연한 자세도 필요하다. 온유한 자가 '땅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온유'는 세상이 생각하는 나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강한 내면의 힘이다.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온전히 길들여진 온유한 자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그분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다. 우리도 온유한 심령으로 살아가며, 참된 평강과 통치의 복을 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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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이 실현되는 곳(마5:7)
긍휼의 긍(矜) 은"불쌍히 여기다, 자애롭다, 자긍(自矜: 스스로 긍지)에서처럼 ‘마음에 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연민의 감말"입니다ㆍ휼(恤)은 " 걱정하다, 구휼(救恤: 도와줌)에서처럼 돕는 행동 감정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자비의 실천"입니다. 다시말하면 긍(矜)은 “마음으로 느끼는 동정”이고, 휼(恤)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자비”입니다. 긍휼(矜恤)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감정만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긍)으로 실제 도와주는 행동(휼)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라함(רַחַם)” 또는 “헤세드(חֶסֶד)”에 해당하며, 하나님께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긍)
실제로 구원하시는(휼) 자비의 행동을 나타낼 때 쓰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팔복 중 다섯 번째 복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긍휼은 공동체 속에서 펼쳐지는 덕목'입니다.
당시 로마 시대에는 '힘이 정의'였습니다. '힘으로 보복하는 것'을 의로운 행동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의 가치관과는 정반대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긍훌은 세상의 논리와 반대 개념입니다.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인애'(仁愛)"가 "헤세드(חֶסֶד, chesed)로 긍휼과 같은 발음입니다. 뜻은 ‘변함없는 사랑’, ‘언약적 사랑’, ‘인자하심’, ‘자비’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은 변덕스러운 감정이 아니고 '지속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특히 '십자가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십자가는 긍휼의 마음과 행동이 실천된 현장입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희생으로 구원한 우리를 향해 지금도 끊임없이 긍휼을 베푸십니다.
우리 성도도 이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긍휼을 가정과 교회에서 실천 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녀를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만드셨고, 부부는 '최초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일을 성취하십니다.
긍휼은 가정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덮어주고, 교회에서 넘어지는 자를 세워주는 사랑의 실천의 장 이어야 합니다.
긍휼이 있는 곳에 공동체는 부드럽고 따뜻해지며, 하나님 나라의 본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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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자(마5:6)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자신이 날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있음을 갈망하는 상태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목마르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은 결코 물을 찾지 않는다. 자신의 영적 목마름을 깨닫는 것이 곧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시작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고 의롭다 함을 얻었다. 그러나 이 은혜를 끊임없이 망각하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기 쉽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끊임없는 감사와 갈망, 그리고 그 의가 우리 삶 속에서 계속해서 확장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는 한 번의 구원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의 죄성은 날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 한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며 '주리고 목마른' 상태로 살아야 한다.
영적 갈망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배부르게' 채워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신다. 날마다 이 은혜를 갈망하며 진정한 영적 만족을 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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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결한 자(마5:8)
예수님의 팔복 중 여섯 번째 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는 말씀이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단순히 착하고 도덕적인 것을 넘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내면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상태는 우리의 노력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마음이 아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마음이 씻겨져'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져' 있는 상태이다.
청결하다'는 헬라어는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두 마음이 아닌 자', 즉 하나님을 향해 나뉘지 않은 마음을 가진 자이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 걸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마음이다.
예수님의 피로 마음이 깨끗해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면, 그 내면의 순수함이 밖으로 흘러나와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준다.
이런자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는 뜻은 육안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의 뜻과 섭리를 영적으로 '통찰'함을 말한다.
하나님을 본 사례로 모세와 시므온이 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간구하였고, 하나님은 그를 반석 틈에 두고 자신의 등을 보여주신다(출 33:18-23).
모세의 순결한 중심과 하나님만을 구하는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을 뵌” 사건으로 이어졌다.
신약의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린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침내 아기 예수(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신 분)를 안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찬송한다. 시므온의 깨끗한 마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성취되어 직접 예수님을 보는 복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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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양(마17:25)
예수님은 물 위를 잘 걷다가 주변에 이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다 물에 빠져들었던 베드로를 건지신 후 믿음이 적은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변화 산에 올라간 후 산 아래 남았던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이 제자들을 향하여서도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고 하지는 않으십니다.
믿음의 양을 기늠해 주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성전에 들어가실 때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베드로에게 물고기 낚시를 하여 낚은 고기의 입 속에 한 세겔을 가져다 내게 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 성전 세는 속전으로 빈부의 차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동일하게 내는 세금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낚시하러 가기 전에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마17:25)베드로는 타인에게 받고 아들은 세를 면한다고 답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가 20년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줬으니 이제부터 그동안 밀린 월세, 밥값 다 내라는 엽기적인 아버지는 없습니다. 간혹 있기는 합니다.^^
믿음이 적다 크다는 의미는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적을 때는 아들의 처지에서 아버지에 대하여 이웃집 아저씨 정도의 관계로 생각하는 것이죠? 이웃집 아저씨는 아들이 베드로처럼 깊은 바다에 빠져드는데 목숨 걸고 뛰어들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아주 작을 때는 이웃집 아저씨가 아니라 외국 아저씨 정도로 여긴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같이 믿음은 아버지와 아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가를 기준으로 적다 크다를 가늠합니다. 은혜가 되는 것은 믿음의 크기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자녀의 관계는 언제나 유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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