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강우석 감독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란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과한 교육열을 꼬집었습니다. 과한 학업경쟁을 비판했습니다. 당시 성적 스트레스로 유명을 달리한 여중생 유서에 있었던 문장을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영화 제목처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닙니다. 행복은 믿음 순입니다.
1. 경쟁이 치열했던 베데스다 연못은 우리 사회 축소판
베데스다 연못가는 우리 사회 축소판입니다. 과한 경쟁 시스템입니다. 1등만이 고침 받았습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름만 은혜로웠습니다. 연못가에 누운 병자들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병자 중 38년간 한 번도 일등 한 적이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병자 사회의 왕 고참입니다. 38년 병자는 자기보다 늘 앞서 가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합니다. 7절을 참고합니다. 예수님은 낫고 쉽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동문서답을 합니다. 나를 못에 넣어줄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다 하며 주위 사람들의 냉정함과 무정함을 토로합니다. 또 자신 앞에는 항상 앞선 사람이 있었다며 실패와 좌절감을 표현합니다.
한국일보에 났던 기사 하나 소개합니다. 일명 죽마고우 4억 보험사기 살인 사건입니다. 대구 금호 강변에 시신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옵니다. 머리와 이마, 등, 가슴 등 21군데 이상 묵직한 둔기로 맞은 처참한 모습입니다. 범인 검거에 36명의 경찰을 투입하여 용의자를 잡았습니다. 범인은 둘도 없는 죽마고우 K입니다. 이들은 중학교 때부터 절친입니다. 또 소문난 우정을 과시합니다. 이들 때문에 부모 친척들 서로 알고 지냈습니다. 둘은 동업하여 인터넷 쇼핑몰도 열었지만 3개월 만에 망합니다. 그래도 우정은 금이 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친구 K가 생명보험 계약서를 내밉니다. 사망 시 수익자는 서로 상대방입니다 설계사는 보통은 가족이 수혜자인데 친구가 수혜자인 보험은 처음이라 합니다. 상해 시 2억 죽으면 4억 보험입니다.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부모까지 책임지는 기 데이~~”하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K의 덫입니다. K는 일정 직업 없이 여기 저기 빌린 돈이 1억 이상입니다. 인터넷 요금도 내지 못해 독촉에 시달렸습니다. 시달리다 보험사기를 죽마고우를 상대로 계획하고 인면수심의 범행을 합니다.
본문 38년 병자도 비슷한 상상 가능합니다. 어느 날 시각 장애우 S씨가 찾아옵니다. “나는 당신의 발이 되어 줄 테니 당신은 나의 눈이 되어 주시오.”하고 우정을 맺습니다. 물이 동한다는 소식에 S씨가 왕고 병자를 등에 업고 서로 도우며 못가에 도착합니다. 이제 어떡하겠습니까? S는 업고 온 친구를 내 팽개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 앞에 우정은 휴지조각처럼 구겨집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은 오랜 만에 갈릴리 시골에서 예루살렘 도시로 상경합니다. 명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첫 발길을 양문 곁 베데스다 못가로 향합니다. 여기저기 신음 소리 천지입니다. 고약한 냄새도 났습니다. 제자들은 불만이 많았으리라 짐작합니다. 시골에서 상경했는데 코엑스도 가보고, 남산 타워도 가보고, 에버랜드에서 T익스프레스도 타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T익스프레스는 2018년 기준 목재 롤로코스터 중 세계에서 제일 높은 56미터에서 직강 한다고 합니다. 떨어졌다 올라가는데 받는 중력가속도는 4.5G로 우주 비행사가 받는 중력과 거의 같다고 합니다. 저는 돈 받고도 무섭고 어지러워 못 탑니다.
2.경쟁에서 가장 소외된 38년 병자를 찾아주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장 소외 된 곳에 가장 상처 깊은 38년 병자를 만나 고칩니다. 그를 안고 집어 던지는 방식으로 고치지 않았습니다. 말씀만으로 고쳤습니다. 병자는 말씀만 듣고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단번에 걸었습니다.
의학적으로 다리에 깁스하고 2주 만 지나고 풀어도 금방 걷지 못하고 재활 치료를 해야 합니다. 심지어 갓 태어난 송아지도 일어나는데 한참 걸립니다. 본문 병자는 바로~ 단번에~ 즉시~ 걸었습니다.(8절) 처음에 포복하다가 그 다음 엉금엉금 기다가 일어서 비틀거리며 걷다가 점진적으로 완벽하게 걷지 않았습니다. 바로 걸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단번에 구원 받습니다.
3.경쟁에서 승리한 자가 아니라 믿는 자를 구원
본문24,25절을 참고합니다. 1등하는 자가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 입니다. 믿는데 돈과 노력 들어가지 않습니다. 듣는데도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세상 만인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길이 열려있습니다. 공평하게 믿음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구원 받을 때 참행복이 찾아옵니다. 경쟁으로 지친 영혼들이 믿음 안에 행복을 얻습니다. 행복은 성적이 아니라 믿음 순입니다.
세상에 있는 고등 종교는 둘로 나눕니다. 이신론과 범신론입니다. 이신론(理神論, deism)은 세상을 만든 초월적인 신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 신은 세상과는 별개입니다.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시, 기적 등이 없다고 보는 종교관입니다. 알라신을 섬기는 이슬람이 대표적입니다. 반대로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은 초월 신을 인정치 않습니다. 세상 만물이 다 신이라 합니다. 나무도 신, 바위도 신, 동물도 신, 하늘, 태양도 신입니다. 옆 사람도 신입니다. 불교 등이 대표적입니다.
본문2,3절에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낫는다.]는 내용은 괄호가 처져 있습니다. 주석은 “민중에 떠도는 전설이다. 또는 병자의 개인적인 신념이다.”라고 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간헐천입니다. 가끔 땅속에서 물이 올라와 부글부글 끊는 다고 합니다. 물에는 피부병에 좋은 유황성분이 다량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분은 본문 3절처럼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도 고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어쨌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민족인데 그 신앙 속에 미신적인 요소가 들어왔습니다.
기독교는 이신론입니까? 범신론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임을 밝힙니다.
교육의 역사와 철학 책에 도제제도가 나옵니다. 도제는 제자를 말합니다. 이 제도는 직업전수를 위해 1:1제자 훈련을 한 제도입니다. 중세 유럽 상인 수공업자들이 시행한 길드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입니다. 도제로 전수 가능한 직업은 기계, 미용, 요리, 배관, 목공, 벽돌 쌓기 등 다양합니다. 스승은 도제를 5-9년 동안 데리고 있습니다. 그 기간에 장인의 비법을 전수합니다. 학교의 직업 교육제도에 바로 이 도제제도가 녹아들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가업의 비밀을 전승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스승, 아들이 도제가 되는 셈이죠. 예수님도 사생애 기간 아버지로부터 목수로서 대패질을 어떻게 하는지, 다림줄을 어떻게 쓰는지, 가구를 어떴게 짜는지, 못 질은 어떻게 하는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전수 받았습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그 집안의 가업 비법이 생기면서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은밀하고 배타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이런 제도를 염두 하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거 하며 정체성을 밝힙니다. “17절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아들도 일한다. 19절은 아버지께서 행하는 것을 아들도 행한다. 21절은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아들도 살린다. 22절은 아버지로부터 심판의 권세도 위임받으셨다. 26절은 아버지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아들도 생명을 준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요즈음 아빠와 아들관계로 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 아버지를 생각하면 주종관계, 상하관계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성경에서 아들의 개념은 이런 관계가 아니고 아버지와 동일한 능력, 동일한 본성을 가졌다는 뜻입니다(발2:6) 도제제도와같이 아버지와 아들과의 끈끈하고,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관계도 생각하면 됩니다.
27절을 참고합니다.“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본문은 예수님을 인자로 표현합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입니다. 이 조건을 만족하는 분만이 우리를 구원할 자격이 있습니다.
4. 고침 받은 병자를 다시 찾은 예수님
당시는 이기적인 사회였습니다. 이타적이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에는 나 이외에 제3자, 타자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다는 개념이 숨어 있습니다. 그 타자를 사랑하고 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 타자에게 주도권을 맡깁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의 문제 때문입니다. 주도권은 당연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어서 세상의 주도권을 잡으려했습니다. 선악과만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은 주도권을 가지게 될 걸로 착각했죠.(창3:5)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의 문제를 세 가지로 지적합니다. 첫째 본문38절입니다. 말씀이 사람들 마음에 거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42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속에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44절입니다. 사람들이 서로의 영광을 취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고침 받고 난 후 38년 병자는 불치병이 나았는데 적어도 고쳐준 분의 이름은 알아야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스파이처럼 몰래 고쳐주지 않았고, 복면을 쓰고 변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조금만 마음을 쓰면 누군지 알았을 것입니다. 병자는 나중에 고친 분이 예수님이란 걸 알고 어떻게 했습니까? 유대인들에게 가서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병자가 안식일 노동금지법으로 고소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일러바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병자는 나았는데 건전한 삶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죄를 즐길 생각이 많았으리라 짐작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다시 한 번 찾아갑니다. 14절을 참고합니다. 그를 만나고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범하지 말라합니다. 인류에게 병이 찾아온 것은 하나님께 범죄한 이후입니다. 인류에게 가장 시급히 해결 해야하는 문제가 죄문제입니다.
5. 믿음의 역사를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
유대인들은 고통 받던 한 영혼이 살아난 역사는 보지 못합니다. 안식일 노동금지법을 어긴 범법 행위만 봤습니다. 안식일을 어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유대인들은 계명을 준 하나님의 진의는 보지못합니다. 형식적으로 수천가지 율법의 세부 규정만 정하여 지켰습니다. 안식일 노동금지관련 기준도 39가지가 있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20미터 이상은 짐을 옮기지 못했고 침을 뱉어땅이 파이면 밭갈이 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라 합니다. 안식일은 안식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기리고 그분께 영광 돌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형식주의에 사로잡혀살았습니다. 율법을 만들고 법을 지켜내는 자신들을 대견하게 여겼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준수로 영적인 지도자와 선생님 대접을 받으며 스스로 영광을 챙겼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했듯이 이들은 마음에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고 자기 영광만 추구합니다. 마음에 참 진리가 없으면 외적인 형식과 율법주의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타락함으로 죄와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질병과 고통이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갈등과 경쟁과 슬픔이 많습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은 참 안식을 주러 왔습니다. 안식일 날에 병으로 고통 받는 자들이 있으면 안식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안식이 무엇인지 보이기 위해 안식일 날에 병자들을 많이 고칩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싫어하고 죽이려고 하는데도 목숨을 걸고 고칩니다.
6.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본문3절을 보십시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3명만 생각해 보십시오. 물에 뛰어 드는데 경쟁력 있습니까? 하나같이 무력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 받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경제시스템, 교육시스템, 정치시스템, 법률 시스템, 과학기술시스템, 4차 산업 시스템으로도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과학기술의 발달은 우리의 삶을 매우 편리하게는 해줄 수 있을지언정 영혼의 구원은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부작용으로 영혼의 자유를 잃게 만듭니다.스마트 폰이 편리함을 제공하는 면도 많지만 우리를 옭아매는 면도 많습니다. 수요 집회 도중에도 진동이 울리면 궁금해서 열어봐야 하지 않습니까? 회의 도중에도 진동이 울리면 사방에서 다 자기 스마트폰 아닌가 하고 만집니다. 스마트폰 진동으로 어깨 안마도 한답니다. 스마트 폰을 깜박하고 회사에 두고 온 날에는 밤새도록 찜찜합니다. 혹시 시장님이 전화하면 어떡하나 대통령이 전화하면 어떡하나 걱정 합니다. 아이들도 부모님 말은 안 들어도 스마트폰 말에는 즉각 반응합니다.
본문에서 병자가 왜 하필 38년 병자일까요? 35년도 괜찮고 40년도 딱 떨어져 괜찮은데 말입니다. 신2:14절을 보면 38년은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광야를 방황한 기간입니다. 38년이 상징하는 의미는 자신의 행위, 자신의 힘,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구원자이십니다. 결론적으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닙니다. 행복은 믿음 순입니다. 오늘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서 행복한 삶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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