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공교롭게도 3일 전 주일 말씀에 이어서 오늘 수요말씀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나누었던 다윗 이야기를 이어서 해볼까 합니다. 사울 왕이 폐위되자 사무엘은 일생 사울 얼굴 안 본다 그랬죠. 또 매우 오랫동안 슬퍼했다고 했죠? 성경에는 그가 왜 슬퍼했는지 안 나오는데요. 일단 나라 걱정을 많이 했겠죠? 왕이 전심전력해서 나라를 돌봐도 소외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근데 제정신도 아니고 악령이 들려 폭정을 일삼으면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삶은 아주 피폐 해지게 되겠죠. 그리고 주변국도 수시로 쳐들어오겠죠. 왕은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줘야죠. 그러라고 칼을 쥐어 준 것입니다. 근데 그게 자기 백성에게 향하면 안 되는 것이죠. 사무엘은 나라 장래 걱정이 가장 컸던듯합니다. 근데 다행이도 차기 왕으로 소년 다윗을 세우자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라마로 돌아가 선지자 학교를 세우고 후진양성에 매진하죠.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세계사를 봐도 왕이 국정을 파탄에 빠트리고, 총칼을 자기 국민들을 향한 예가 많죠? 제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예를 들면 앞으로 강단에 못설 수도 있죠. 강단에서 정치적 발언하면 안 되죠. 오늘 본문에서 바로 사울 왕이 자기 백성에게 총칼을 겨누는 일을 합니다. 삼상22장18-19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8.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19.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숙적 다윗을 단순히 도와줬다고 제사장 85명을 죽입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구요. 이 제사장들이 모여 사는 성읍이 놉 땅인데요. 여기에 성막과 성소가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가서 남녀와 아이들과 젖먹이와 말 못하는 짐승들까지 모조리 칼로 죽이라 명합니다.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고 아비아달 한 명만 살아납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염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죠. 그리고 직접 창을 겨눈1호 피해자가 누구죠? 바로 소년다윗입니다.
저는 본문을 보면서 도대체 왕권이 뭔데~ 권력이 뭔데~ 저렇게 잔인할 수가 있나? 의문이 들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도진이 같은 아이들까지 다 죽였을까 아니 예요. 정권이 바뀌면 자신과 가족이 생존의 위협을 느껴서 일까요. 그래도 그렇지 무고한 사람들을 씨를 말릴 수 가있나요? 이러고도 어떻게 양심이 견딜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 양심이 견디려면 뭔가 견고한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역시 뒤에는 영적인 세력이 있는 거죠. 검은 세력이 있는 것이죠. 사탄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대적자 역할을 하는 것이죠. 사무엘상16장14절은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하였다"라고 합니다.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인 줄 알았죠.(삼상18:14) 그러니까 더 미운 것 이구요. 또 한 가지는 요16:2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제자들을 출교뿐 아니라 장차 죽이는 데까지 핍박하는 이유가 이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 인거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도 바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죠. 사울도 자기의 왕권을 유지하는 게 하나님을 위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9.11 쌍둥이 빌딩 자살 테러도 바로 알라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군 전쟁도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것 아닙니까? 이 때 200년 동안 100~900 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신의 이름으로 한다면 잔인해도 양심의 가책을 안 받을 명분이 생기는 것이죠.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21세기는 종교 전쟁시대라 하죠? 서로 더 잔인 해 지는 거죠.
다시 다윗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광야에 살던 다윗이 어떻게 사울 왕 음악 치료사 가되었고, 골리앗을 눕히고 어떻게 군 지휘관이 되었고, 어떻게 사울 왕의 사위가 되고, 사울이 2번이나 창을 던지자, 어떻게 아내 미갈의 도움으로 탈출하였고, 다윗이 사무엘에 선지자 학교로 갔고, 사무엘에게서도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자, 요나단에게 사울의 최종 의중을 확인하고 긴긴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는지 이 모든 과정은 여기 계신 성도님들은 다 아실 줄 믿습니다. 또이어서 외국에 망명했는데 골리앗 고향이서서 미친 척 해야 했고,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자 아둘람 지역 석회동굴로 숨었는데, 친척과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 400명이 모여 그 세력을 규합해 10 여년 간의 세월이 더 흐른 후 통일왕국의 왕이 되죠. 다윗 거저 왕이되지 않구요. 10여 년을 쫓기며 왕도를 갖춘 후에 왕위에 오르죠. 오늘 성소 방문은 요나단과 헤어지고 배고프고 거의 죽음 직전이 되자 찾아갑니다.
삼상21장1~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 가장 거룩하다고 여기는 장소가 어디죠? 성소였죠. 왜 거룩하게 여기죠? 성소는 대장균 바이러스 없는 무균실 이어서 그런가요? 아니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류가 있기 때문인 것이죠. 우리도 교회에 딱 들어오면 뭔가 신성한 느낌이 드십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활발히 교류가 이루어지는 곳이니까? 신성하고 거룩하게 느껴지는 거죠. 이 성소의 떡 상에 12개의 떡을 두 줄로 올려두었습니다. 이 떡 한 개에 3kg~4kg이구요, 지름이 30~40cm랍니다. 피자 빅 사이즈만 합니다. 이 떡이면 성인 남자가 40~50일은 먹을 수가 있었죠. 이 떡은 7일 전시한 후에 제사장들만 먹었죠.(레위기24:5-9) 이 떡도 왜 거룩한 거죠. 떡 안에 금가루를 넣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이 매일 조금씩 쥐가 뜯어 먹듯 드셨기 때문인가요? 아니죠. 떡 12개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구요. 떡은 하나님이 항상 이스라엘을 보호해주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이죠.
이 상징에 대 좀 교제하겠습니다. 우리 방안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밖에서 가끔 손거울 크기 빛이 들어오죠. 그 작은 빛을 따라 나가면 무엇을 만나죠? 큰 소나무 사이에 빛의 반사체를 만나겠죠. 그 반사체의 빛을 계속 따라가면 거대한 태양을 만나겠죠. 태양은 태양계의 99.86%를 차지할 만큼 어마무시하게 큽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이런 태양을 지구에 있는 모든 모래알을 합한 개수보다 훨씬 더 많이 만드셨습니다. 정말 크신 하나님이시죠? 아니 크다고 표현할 수 없기도 합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묘사하고, 포착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있는 언어, 사물, 그 어떤 표현을 동원하더라도 이것이 하나님이다 하고 정의할 수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타자성이라고 합니다. 또 거룩성 이라고도 하죠. 신성하다고도 하죠. 우리는 세상에서 이 하나님을 언뜻언뜻 체험하고 발견하게 해 주는 물건들, 장소 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다 거룩 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이죠. 예를 들면 야곱이 광야에서 돌 베게를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나죠. 일어나 한 게 뭡니까? 그 돌 베게를 기념비로 세우죠. 그럼 그 돌이 거룩한 돌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만나게 해주시고 연결되게 하신 겁니다. 그게 성막이고 성소고, 그 안에 물건들인 것이죠. 우리가 매주 만찬 때 먹는 떡 한 조각, 포도주 한 잔은 그것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죠. 근데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뭐죠. 하나님은 그 소소한 방식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러나 우리에게 포착되지 않는 하나님은 그걸 통해 우리와 연결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인 것이죠. 마치 방안에 들어온 작은 빛을 따라 나가면 거대한 태양을 만나듯이 말이죠. 근데 이런 물건들이 우상이 되면 안 됩니다. 그 물건 자체가 효험이 있어서 행운을 가져다 준다하면 미신이 됩니다. 성경책에 흰 실을 칭칭 감고 차에 싣고 다니면 사고 안 난다 이건 미신인거죠. 만찬 떡이 행운을 가져다준다 여기면 안되는 것이죠. 우리에게도 거룩한 장소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죠. 집도 될 수 있고, 자동차도 안도 될 수 있고, 직장도 될 수 있고, 남대 천가도 될 수 있겠죠. 안목 바닷가도 되죠. 우리 예배당도 바로 그런 곳입니다. 영적으로 배고프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뛰어들어 채움을 받는 장소여야겠죠.
다윗이 성소에 들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거짓말을 하죠? “자기가 왕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 나를 수행하는 소년들이 밖에 있다. 굶어 죽게 생겼으니 제사장만 먹는 떡 5개만 달라고 하죠.“ 4~6절을 보면 레위기 율법에 기록한 소년들의 정함을 확인하고 아히멜렉은 떡을 내어주죠. 그리고 8,9절을 보면 골리앗 칼을 달라고 하죠. 이 칼은 국가 보물 1호로 지정되어 있었죠. 이건 뭡니까. 백성들이 칼을 보면서 다윗 정신을 기리고 도움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죠. 이건 사사로이 국민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도록 주면 안 되죠. 우리 조선시대의 왕관 막 안주잖아요. 보물을 손상시키면 3년 이상 징역이구요. 보물을 가져가면 5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합니다. 아히멜렉은 이런 법을 뛰어 넘어서 다윗에게 빵과 칼을 줍니다.
아히멜렉은 법의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시했습니다.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데 어떤 떡이 그들을 살리는 것보다 더 가치롭겠습니까? 칼이 없으면 왕이 위험에 처하는데 유물이 대수겠습니까? 관념적 가치보다 실제 사람의 생명이 살아나는 실제 가치가 더 중요한 것이죠. 의복이 몸보다 더 중요하지 않죠? 옷 때문에 목숨을 죽이면 가치가 전도되었다고 하죠?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12제자들에게 이런 시각을 가졌습니다. 목숨보다 안식일 규례가 더 중요했습니다. 배고파 죽을 것 같아 안식일에 벼이삭을 조금 잘라 먹은 걸로 도끼눈을 뜨고 정죄했죠. 이때 예수님은 바로 이 아히멜렉 사건을 인용하시며 다음과 같이 결론 냅니다. 마가복음2장27절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아히멜렉과 다윗의 가치는 형식·제도·교리보다 생명·사람·사랑이 우선해야 한다는 가치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본질을 놓치고 형식과 규례를 쫓기 쉽죠. 힘든 상황에 처한 성도에게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 주일을 안 지켜서 그래, 헌금이 적어서 그래 이렇게 교리적 잣대로 정죄하기 쉽죠. 사람보다 교회 십자가, 건물, 강단, 직분을 신성 시 할 수도 있죠. 교회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가정은 내팽개치는 것도 가치의 전도가 되는 것이죠.
지금까지는 아히멜렉의 시각으로 본문을 봤는데요. 이번에는 다윗의 시각으로 본문을 한번 보겠습니다. 다윗은 왕이 명령수행 중이라는 거짓말을 하죠. 함께한 소년들이 있었다는 거는 사실입니다. 하여간 반절은 거짓말이죠. 이를 볼 때 우리 다윗에게 절대 열등감 가질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훨씬 더 도덕적, 윤리적으로 높습니다. 다윗 간음죄도 짓구요. 충신 우리아 살인교사도 합니다. 열등감 갖지 마십시오. 그럼 우리가 다윗에게 배울 점이 뭐냐는 것이죠? 성경은 왜 다윗의 거짓말을 자세히 기록하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기쁠 때나, 쫓기며 두려울 때나, 굶주릴 때나, 죄를 지었을 때조차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며 무언가를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민감도 최상의 사람이었습니다. 놉 성소에서 비록 율법에 반하기는 했지만 그 '마른 빵 한 조각'과 '골리앗의 칼'이 나를 살리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알아챈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으니 예수님도 본문을 인용하셨죠.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일과 우리 일생의 삶을 분리하길 잘하죠. 예배당에 가서 기도할 때만 하나님을 떠올리고, 밥을 먹거나 출근해서 일할 때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우리는 교회 밖에 나가면 다 이순신이 되죠. “나의 믿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죠. 하지만 다윗은 종교적인 장소뿐만 아니라 길가, 광야, 굴 속, 심지어 빵 한 조각을 먹는 일상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배우고 다윗의 이런 점에 열등감을 갖어야 합니다. 다윗은 그의 모든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경험을 시편에 기록합니다. 총73편 800절입니다.
다윗은 성소에서 빵으로 배불렀고, 칼로 위험에 대비할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 채움으로 성소문을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교회 문을 어떤 마음으로 들어오셨고, 어떤 마음으로 교회문을 나서렵니까? 성경은 빵도, 칼도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 합니다. 교회문을 나설 때 영적으로 배불러 나갑니까? 아니면 들어올 때보다 더 기분이 더 나빠져서 문을 나서렵니까?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으로 교회 문을 나서렵니까?
도엑이란 사람이 바로 이런 마음으로 성소 문을 나섰습니다. 삼상21: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7.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도엑의 이름 뜻은 “근심하는자, 두려워하는, 불안해하는 자”입니다. 벌써 이름에서 악역의 냄새가 풍기죠. 도엑은 사울의 목자장입니다. 가축관리 맡은 군수대장이구요. 저번 뉴스에 보니까 북한에서 아직까지 숙청되지 않고 건재한 측근이 바로 군수동원총국장이랍니다. 그니까 도엑은 사울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었죠. 도엑은 성소에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거룩함이고 뭐고 상관 안했습니다. 다윗과 아히멜렉이 뭐하나 세심하게 관찰했습니다. 도엑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성소문을 나설 때 정치적인 마음, 출세할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삼상22장9~19절을 보면 도엑은 이런 출세욕과 사울의 신임을 얻으려고 다윗 일을 고발하죠. 근데 사실을 왜곡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비밀임무 수행자라고 거짓말해서 아히멜렉도 속았다는 사실은 숨깁니다. 마치 이히멜렉도 공모자처럼 사건을 부풀립니다. 그의 거짓말로 안 죽어도 될 아히멜렉과 85명의 무고한 제사장이 죽죠. 그것도 도엑 손에 죽습니다. 한술 더 떠 그는 놉 성읍을 초토화 시킵니다. 아히멜렉도 속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엑 어찌 이럴 수 있죠? 이걸로 얻을 그 권력이 뭔데 말이죠? 도엑의 최후는 성경기록에는 없는데요. 다윗은 시52편5절에 이렇게 최후를 예견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유대 전승에는 그가 사울과 함께 길보아 전투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방년 34세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교회문을 나서렵니까? 도엑의 마음입니까? 다윗의 마음입니까? 다윗의 마음으로 나설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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