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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기독교정보

성경은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고후12:1~4, 고후4:16~5:1)

by 명주(明珠) 2026. 3. 3.

오늘은 죽음 이라는 주제로 교제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죽어 본 분 안계시죠? 네 저도 60여년 살았는데 죽어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늘은 성경이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를 교제하겠습니다. 우리 말 죽음의 어원이 뭐죠? 죽음은 “죽다.”의 명사형이죠. “죽”자는 순수한 우리말인데요. “기운이 다하다. 완전히 꺼지다, 힘이 빠져 기능을 잃다”와 같이 기능이 정지한 상태를 나타낼 때 “죽”을 썼답니다. 15세기 훈민정음 해례본에도 나온답니다. 죽음은 “생명이 끝나다.”라는 뜻이죠. 의학적인 죽음은 심장과 뇌와 폐의 기능이 멈추는 것을 말합니다.

제럴드 다이아몬드 작가가 쓴 “총균쇠”라는 책 아시죠. 인류 문명을 인종의 우열로 보지 않고 총(군사력). 균 (전염병), 쇠(기술력)과 같이 지리 환경적 요인으로 설명한 책인데요. 왜 하필 균이 들어가냐? 이 균에 대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면역반응을 했냐가 문명의 흥망을 좌지우지 했다고 봅니다. 저희 어머니가 얼마전 폐렴과 요로감염으로 입원했는데 꼭 의사선생님들이 따지는 게 있더라구요? 열이 얼마나 나나, 피에 염증수치, 그 다음에 산소포화도였습니다. 이는 다 우리 몸이 균과 잘 싸울 수 있나 없나를 보는 수치죠. 면역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패혈증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봅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세 가지로 봅니다. 첫째 몸이 죽는 거죠. 둘째는 하나님과 분리되는 건데요. 영적 죽음이구요, 셋째는 영원한 지옥 불 못에 던져지는 죽음입니다.

한국에 어떤 교수가 있었습니다. 제자 중 한 명이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귀국하여 찾아왔데요. 박사학위 제목이 “죽음에 관한”논문 이었답니다. 제자는 자랑스럽게 논문을 선물해 드렸죠. 그런데 이 스승이 논문 몇 장을 넘기다 그냥 조용히 덮어버렸습니다. 제자는 매우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갔는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불행하게도 그 제자가 중병에 걸려 죽어간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스승은 단숨에 문병을 갔습니다. 그 제자가 조심스레 스승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왜 제 논문을 몇 장만 보시고 덮으셨습니까?” 그랬더니 스승이 “사실은 자네 논문이 너무 어려워서 감히 읽을 수가 없었고, 나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박식한 자네는 정작 죽지 않을 것라 생각했네”라고 했답니다. 우리는 죽음학 박사든 석학이든 반드시 한 번은 죽음 앞에 서야하는 운명이죠. 그것도 각자 홀로 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하면 막연한 두려움, 공포, 또 한편으로는 의연함, 숙연함 등등의 감정을 가집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보지 못하죠? 그런데 이걸 물어보고 연구한 사람도 있더라구요. 스위스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구요. 영어로 타나톨로지(Thanatology)라는 죽음학이라는 학문도 만들었습니다.이분은 죽음에 이르는 5단계로 유명하죠.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툭하면 죽겠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배고파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우스워 죽겠다. 추워죽겠다. 더워죽겠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 중 하나가 문상 갈 일이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설날 아침에도 큰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오고 가고 8시간 걸리는 경북 예천까지 문상을 갔다가 왔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 항상 있는 죽음, 나에게도 언젠가는 닥쳐올 죽음이 중요한 문제이지만 생각하기는 싫은 주제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죽음을 직시하고 정리된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화하나 더 하면요? 어떤 마을에 사기꾼이 나타났습니다. 자기는 20년 도 닦은 사람이라했습니다. 지리산에서 5년, 설악산에서 5년, 계룡산에서 8년, 마지막에는 태백산 2년간 도를 닦으며 명산정기를 받고 왔다 합니다. 자기의 특별한 능력은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거예요. 그는 공동묘지 앞에 좌판을 깔고 프랭카드 걸고 사람들에게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돈을 가져와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사람은 살리지 않고 돈만 수십억 챙겨서 떠났답니다. 웬지 아세요? 어느 아주머니가 밤에 이 사람을 찾아오더니 "천 만원 줄테니 우리남편 절대 살리지 마십시오. 살리면 또 저를 또 두드려 패고 못살게 굴 겁니다."라고 했구요. 또 어떤 중년 여성이 오더니 "이천만원 줄 테니 우리 아버지는 절대 살리지 마십시오. 살리면 또 술, 바람, 도박으로 가사를 탕진하고 우리에게 빚 만 떠넘겨 괴롭게 할 겁니다."또 어떤 사람은 막가파 살인자 살리면 절대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알아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갔다 바쳤다고 합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무조건 오래 산다고 대수는 아니겠죠. 장수가 최고의 선은 아닙니다. 보통 90세 100세 까지 사는 건강학 박사들이 주장하는 절대적으로 조심해야 할 두 가지 병이 있는데요. 첫째는 치매구요. 두 번째는 뇌졸중이랍니다. 이거 걸리면 삶의 질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죠. 저희 어머니가 최근에 이 두 가지가 같이 왔습니다. 그래서 저도 치매 가능성이 많은 거죠. 얼마 전에는 아파트 현관 비번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났습니다. 다 생각나는데 첫 자리 번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안나는거예요. 머리가 복잡한 일이 많기는 많았었는데요. 저는 자매한테 전화하면 챙피하니까 서울에 있는 딸에게 전화해서 물어봤습니다. 평소 직장에 있을 때는 전화가 없던 아빠에게 전화를 받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셀프 치매 테스트를 했습니다. 우리 나라 대통령이름은? “이재명” 100에서 1을 빼면 99 아직 치매는 아니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살기는 살되 잘 살아야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 그럼 이번에는 죽어봤던 사람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깨어난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좀 정리 해보겠습니다. 돈 미겔 루이스라는 의사이면서 작가가 있는데요. 그는 “네 가지 약속”이라는 책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1970년대 초 멕시코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외과의사로 일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밤중에 운전을 하다 차가 중앙 분리대를 들이 받으면서 큰 사고가 납니다. 그는 이 사고로 죽었다고 고백합니다. 근데 사고가 난 직후 자신이 운전대를 잡은 채 피흘리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다고합니다. 육체 밖에 있는 나가 죽어있는 자신의 육체를 보았다고 했구요. 이때 그는 갑자기 혼란을 겪었다고 합니다. "죽어있는 저 사람은 도데체 누구고, 그것을 내려다 보는 현재 나는 누구인가?"했습니다. 그 이후에 몸 밖에 있는 나는 다른 세계를 봅니다. 그 세계는 시간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세계구요. 또 온통 빛으로 가득한 세계였습니다. 너무나 평화로웠고 모든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세계였답니다. 그러다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구요. 이 체험 후에 의사생활을 접고 영적 교사로서 이 빛에 대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 수만명의 경험의 공통점을 정리하면 모두 유체이탈경험을 합니다. 육체 안의 나와 육체 밖의 나가 분리되는 경험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깜깜한 터널을 통과하는 경험을 한답니다. 이 경험이 아주 무서운 경험이라고 고백하구요. 바로 그 이후에는 눈부신 빛과 만났다는게 공통점 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경험을 100%다 신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죽음으로 모든게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한 분이 성경에도 있죠? 사도바울입니다.. 성경은 바울이 우리 성도가 죽어야 갈 수 있는 곳을 미리 갔다온 사람이죠. 그 고백이 고린도후서12:1~4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그는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했다고 하죠. 본문은 죽었다가 깨어났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몸 안에 있는 나와 몸 밖에 있는 나로 구분해서 말씀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갔다왔습니다.

사실 바울의 이 경험은 고린도 후서를 쓰기 이미 14년전에 했습니다. 그니까 바울은 14여년을 입 꾹 다물고 가슴속에만 간직해 오다가 지금 부득이하게 얘기를 하는셈이죠. 지금 상황이 아니면 평생 죽을때까지 가지고갈 판이었습니다. 14년전이면 언제냐하면요? 그가 전도여행을 막 떠나기 전 시점입니다. 이때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지 8년된 때구요. 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 여행 동안 8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죠? 하나님은 바울의 이런 특별한 상황을 미리 내다보고 셋째 하늘을 보여주시면서 부활신앙을 갖도록 배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명도 주시지만 그것을 감당할 만한 힘과 믿음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셋째하늘을 보여주심으로 죽음에 의연하게 대처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특별한 계시와 환상을 받으면 자랑하고 싶어서 못견디잖아요. 그리고 이 특권을 이용해서 이득을 챙기려합니다. 새로운 교주가 탄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4년간 입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근데 왜 하필 지금 이 얘기를 하냐? 이때가 3차 전도 여행중인데요. 고린도 교회에 거짓 교사가 나타나서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라고 부인했구요. "사람이 글은 좀 쓰는데 몸이 약하고 말도 더듬는다."라고 하면서 인신공격까지하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이 무시되면 그동한 전한 복음은 말짱 꽝, 도로묵이 될 위기 인것이죠. 일생 전한 복음이 부정당하면 안되니 어쩔수 없이 계시를 받아 갔다왔다는 사실만 간단히 언급합니다. 그것도 자기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돌려서 말합니다.어쨌든 우리는 이 사도바울의 경험을 통하여 죽으면 셋째하늘 곧 낙원으로 직행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연장선상에서 오늘 본문 고린도 후서 4장16에서 5장1절 이어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본문도 다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본문은 2가지를 계속 대조합니다. 겉사람과 속사람, 잠시와 영원한 것, 눈에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장막 집과 영원한 집이죠. 자기는 지금은 보이는 몸 안에 사는데 여기가 현재 임시 거쳐인 장막이라고 합니다. 여기를 거쳐가면 영원한 집에 간다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죽음이란 단어는 단 한번도 쓰지 않습니다. 그냥 "겉사람이 낡아간다. 또 우리의 장막이 무너진다."라고 표현합니다. 장막은 텐트를 말하죠. 텐트는 잠시 여행할때만 필요합니다. 육체는 텐트입니다. 우리가 그래서 임시 거처인 육체에 너무 공을 들이지는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 텐트를 너무 소홀해도 안되겠습니다. 비오고 천둥치는데 텐트에 구멍나 있고 자크 고장 나 있으면 비가 새고 모기 들어오고 합니다. 그러면 여행 망칠수가 있잖아요. 적당히 운동하고 잘드시고 하면서 이땅에 잠시 있는 동안 텐트를 잘 관리해야겠습니다. 저도 요즈음은 달리기하면서 텐트관리를 좀 하려고 합니다.

본문을 참고하면 몸 안에 있는 나, 텐트 안에 있는 나는 하나님이 잠지 지구에서 여행을 하라고 보낸 셈입니다. 우리는 장차 영원한 집에 돌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신앙 생활은 여행하듯이 살아야한다는 비결을 배웁니다. 여행가서 아웅다웅 싸우지 않잖아요? 여행가서 숙제하지 않잖습니까? 여행은 좀 불편해도 즐겁게 참고 견디 잖아요? 왜냐하면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행을 어떻게 해야할 지가 참 중요합니다. 하늘의 영원 집, 부활, 천년왕국,새 하늘 땅 다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이 소망들이 현재 내가 태어나서 생명이 다할때까지 지금 여기 이 시간에 살아가는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사도바울이 겪은 환란에 대해 무엇이라 표현합니까? 본문16절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또 17절에 보면 바울은 환란을 ”잠시 받는 경한 것“이라고 합니다. 환란은 잠시 지나가는 것으로 보았고 또 아주 경한 것, 가볍게 여겼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었는가? 묵상해 봤는데요. 첫째는 사명감입니다. 그는 도저히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강력한 빛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방인에게 생명의 빛을 전하는 이반인의 사도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게 왜 중요한가? 기독교는 세가지 죽음을 말한다고 했는데 두 번째죽음이 하나님과 단절되는 죽음, 세 번째 죽음이 영원한 지옥불못에 던져지는 죽음이라했습니다. 사도의 직분은 바로 복음으로 여기에 던져질 생명을 살리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었던 거고 모든 고난을 무릎쓸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죠. 교회의 첫째 사명도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 가장들이 간 쓸개 다 빼놓고 매일 매일 수십년을 출근할 수있는 것은 가족을 살리겠다는 책임감 때문 아니겠어요. 두 번째 바울을 강하게 한 거는 바로 셋째하 늘에 가 본 경험입니다.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잠시 지나가는 과정으로 봤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명감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만으로 만 바울이 수많은 고난을 견뎠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소망을 말씀하지만 그 미래가 현실을 어떻게 견디게 하느냐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바울이 순간 순간 현실의 어려움을 어떻게 견뎠을까? 마지막 비결을 말씀드리고 정리하겠습니다. 경유 자동차는 경유를 넣고 태우는 에너지로 갑니다. 휘발류차는 휘발류를 넣고 태우는 에너지로 갑니다. 전기 자동차는 밧데리를 넣고 전기 에너지로 갑니다. 성도는 바로 하나님이 흘려 주시는 에너지로 사는 것이죠. 성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 곧 성령님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항상 곁에 서서 도움을 주시는 스승이란 뜻입니다. 성령님은 바울의 일생 곁에 서서 힘을 주셨습니다. 아마도 그는 가장 힘든 순간에는 구약의 삼손의 기도도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기도 자주합니다. 특히 강단에 올라올 때는 꼭 합니다. 삼손이 마지막에 눈이 빠지고 머리카락이 깍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잃어버렸다가 두 손 발이 원수들의 신전 기둥에 묶여서 뭐라고 외칩니까?“하나님 이번 한번만 나를 강하게 해달라고”외치자 하나님이 힘을 주시죠. 사도바울은 매번 그의 삶 속에서 이런 기도를 했고, 주님과 동행했고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로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런 고백이 여러번 나옵니다. 우리도 현실 속에서 내가 매일 가는 일터에서 우리 가정에서 이런 힘으로 살아낼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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