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기독교정보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신4장32-36)

by 명주(明珠) 2026. 1. 15.

올해가 무슨 해 입니까? 말띠 해입니다. 내년은 양띠 해입니다. 그 다음 해는 원숭이 해입니다. 보통 자기 띠 이외에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연이어지는 세 개의 해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양띠 해에 태어났습니다. 제가 살았던 동네는 산이 보통 2 천 미터가 넘는 노추산 자락에 있는 산골에 살아서 3시면 해가 졌습니다. 저는 항상 말띠 형들과 잘 놀았습니다. 이 형들이 국민학교 입학을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집에서 개구쟁이 짖을 많이 하니 형 들 따라 놀러 갔다 오라고 하며 함께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만 형들과 함께 줄서 있다가 입학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확이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어머니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저는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을 말띠 들과 함께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띠와 얽힌 기막힌 사연이 또 있습니다. 저의 출생 신고가 1년이 늦었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비리비리 하게 보였나 봅니다. 또 시골에서는 죽을까봐 1년 있다가 병에 안 걸리고 살아나면 출생 신고를 했습니다. 저는 강원도에서 태어났지만 본적이 경상도 예천 이어서 그곳에 있는 큰아버지가 대신 호적 신고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호적 상으로는 2살 차이가 나는 형들과 항상 경쟁해야 했습니다. 학년 초가 되면 선생님이 호구 조사를 합니다. 그러면 말 띠 다 손들고 나서 양 띠 손들고 설마 2살 어린 친구가 있을까 그 아래는 조사를 하지 않아 저는 자진 신고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친구들이 저를 동생 취급하여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제 때만 학교에 들어갔어도 인생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 정년을 앞두고 생각해 보니 잘된 것도 있습니다. 정년이 1년 연장되었습니다. 1년 더 월급을 탈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본문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예화 하나를 들겠습니다. 한국경제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을 아실 것입니다. 이 책을 쓴 작가가 『바보 빅터』라는 책을 냈습니다. 빅터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수줍음을 많이 타고 말도 느렸습니다.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말을 더듬었기 때문에 늘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선생님 역시 그렇게 여기며 늘 핀잔을 주었습니다. IQ 테스트를 했는데 73이 나왔습니다. 돌고래 IQ가 그 정도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빅터를 ‘돌고래’라고 놀렸습니다. “꾹꾹” 돌고래 소리를 내면서 조롱했습니다. 그러니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있었겠습니까. 빅터는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동네 자동차 정비소에 취업했습니다. 주로 허드렛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빅터의 유일한 장점은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소한 것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오래 보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또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책 읽기를 즐겼습니다. 책을 살 돈이 없어 고물상에서 버려진, 중간중간 페이지가 빠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주워 읽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빅터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이상한 입간판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입간판에는 괴상한 수학 문제 하나만 달랑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 인터넷 주소가 적혀 있었습니다. 빅터는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받아 적었습니다. 그리고 몇 주, 몇 달 동안 씨름한 끝에 그 수학 문제를 풀었습니다. 친구에게 부탁해 그 인터넷 주소로 답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연락한 회사는 ‘애프리’라는 큰 회사였습니다. 이 회사는 숨은 인재를 찾기 위해 전국에 그런 입간판을 세워 두고 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무심히 지나쳤지만, 이 바보 빅터만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빅터는 곧바로 그 회사에 채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빅터는 처음부터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IQ가 173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바보 빅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며 앞의 1을 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이후 빅터는 바보에서 천재가 되었고, 멘사 회원이자 회장이 되었으며, 발명가이자 저술가로, 기업의 자문을 맡으며 잘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시사점은 빅터는 원래 바보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하는 자세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도 원래부터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들이었습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과 이미 부모와 자식의 관계였습니다.

이러한 부모 관계적인 시각으로 보면, 에덴동산에 왜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만드셨는지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낳고 키우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이와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물론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잠깐의 감정일 뿐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가장 큰 불효는 먼저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는 자식을 평생 가슴에 묻고 고통 속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자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생명나무를 만들어 따먹고 영원히 함께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은 부활과도 연결됩니다. 우리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부활시키십니다.

두 번째 불효는 무엇입니까. 바로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뉴스에 부모를 죽이는 천인공노할 사건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악과는 바로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 표지판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의 표식이고, 선악과는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을 대변합니다. 선악과 나무는 가서 껴안고 만지고 부비고, 등치기 운동을 하고, 그 아래에서 낮잠을 자도 됩니다. 가지치기를 해 주어도 됩니다. 단지 먹지만 않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볼 때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제 신명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신명기는 윤00 형제님이 복음 집회에서 부모의 마음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하는 정선에서 어릴 때 집 나간 그 ‘명기’가아닙니다. 신명기(申命記)의 ‘신’ 자는 새롭다는 뜻도 아닙니다. 신명기의 신은 ‘다시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2세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다시 말씀하신 책이 신명기입니다. 이제 본문을 읽겠습니다. 신명기 4장 32~36절입니다.

사람은 매우 똑똑하고 강한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참 어리석고 약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AI, AI 하며 놀랐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인데, 지금은 일상에서 모두 AI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입원했다가 퇴원하시고 재활 치료를 위해 진단서와 관련 서류를 떼 왔는데, 내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모두 영어이고 어려운 의학 용어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 챗GPT에 올렸더니 번역과 요약은 물론, 앞으로의 치료 방향과 강릉에서 재활 치료를 가장 잘하는 병원까지 추천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은 놀랍게 발전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저는 설교원고를 5페이지 정도 씁니다. 이것을 챗GPT에 올리고 너는 대학교수야 교수의 관점에서 설교를 평가해 줘 하고 명령했습니다. 5가지 요소로 평가했습니다. 5점 척도에 내용 5점, 신학의 깊이 5점, 스토리텔링 4점, 청중집중도 3점, 구조 3점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앞을 안보시고 자꾸만 땅으로 시선을 떨 구는 것은 저의 설교 집중도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잘못입니다. 스토리텔링과 구조도 다소 산만했습니다.

이렇게 과학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인간은 참 약합니다. 올해도 해돋이를 보기 위해 인구 30만 명이 몰렸다고 합니다. 제가 30년 전 정선 시골에 살다가 강릉으로 와서 큰맘 먹고 해돋이를 보러 갔던 적이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새벽 4시에 닭이 울기 때문에 해도 4시에 뜨는 줄 알고 새벽 3시 반에 갔습니다. 그런데 해는 7시 15분에 떴습니다. 해돋이는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태양에게 무엇인가를 비는 목적으로 찾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은 이러한 애굽 사람들의 우상 숭배를 타파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본문에 나오는 몇 가지 단어를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시험’은 수학 시험이 아니라,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우상들을 무너뜨린 사건을 ‘시험’이라 부릅니다. 강의 신, 개구리 신, 파리 신, 이 신, 땅의 신, 소의 신, 태양 신을 모두 물리치고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기사’는 운전기사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사건을 말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리고, 반석에서 물이 나온 사건들입니다. ‘강한 손과 편 팔’은 로봇 팔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직접 싸워 주신 능력을 의미합니다. ‘크게 두려운 일’은 이러한 기적들로 인해 이방 나라들이 두려워 떤 사건을 가리킵니다.

우리 성도는 이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강한 손과 편 팔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올 한 해도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 안에서 당당하고 담대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신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우리를 돕지 않으시겠습니까. 설마 믿는 자들을 굶겨 죽이시겠습니까. 까마귀의 입을 통해 엘리야를 먹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까마귀 믿음을 가지고 삶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큰 일을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큰 일 가운데 하나는 기적적인 사건들이고, 또 하나는 시내산에서 직접 음성을 들려주신 사건입니다. 본문 33절과 36절에는 큰 불 가운데서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우상과는 전혀 다른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신 후 모세를 산꼭대기로 부르셨습니다. 휴가를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하시며 말씀을 들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십계명의 의미, 성막 설계, 언약궤, 진설병, 등잔대, 번제단, 제사장 옷, 향단, 제사 제도, 속죄 방식, 피의 역할, 안식일 규례까지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림으로 주셔도 되었을 텐데 말씀으로 주신 이유는, 말씀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인 이유입니다. 우리는 빅터처럼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드려볼까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은 문자로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입니다. 말씀을 문자로 주셨다는 것은 그 안에 깊은 메시지가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을 기계적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말씀의 의미를 빅터처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나 이래 봬도 성경 100번 읽은 사람이야! 나보다 많이 읽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근데 뜻은 잘 몰라~”이러면 곤란합니다. 성경은 하늘의 일을 땅의 언어로 풀어서 설명해 주기 때문에 깊이 묵상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무슨 귀신이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씨나락은 껍질을 안 벗긴 벼 이삭인데, 이것을 쓸데없이 까먹는 소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뱀이 말을 하고, 예수님이 소금쟁이처럼 물 위를 걷고, 떡 몇 개로 몇 만 명을 먹이고, 머리가 열 개 달린 짐승이 나오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느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언어적인 특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성경은 어떤 말로 쓰였습니까. 히브리어입니다. 신약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쓰였습니다. 당시 쓰였던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총 단어 수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히브리어는 약 3만 단어이고, 헬라어는 약 30만 단어였습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언어는 그 시대의 사상을 반영합니다. 그 시대의 주요 사상은 두 가지입니다. 히브리어에 반영된 사상이 헤브라이즘이고, 헬라어에 반영된 사상이 헬레니즘입니다. 헤브라이즘은 한마디로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사상입니다. 헬레니즘은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고 그 답을 구하는 사상입니다. 헤브라이즘은 신의 뜻과 섭리를 추구하고, 헬레니즘은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한 철학, 과학, 수학적 사고를 말합니다. 구약성경으로 쓰인 히브리어의 특징은 한마디로 통전적이라고 합니다. 통전적이라는 말은 부분을 쪼개어 보지 않고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관점입니다. 또 히브리어는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언어입니다. 반면 신약성경으로 쓰인 헬라어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언어입니다. 히브리어는 숲을 보고, 헬라어는 나무를 본다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히브리어는 사랑을 “야다”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헬라어는 사랑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에로스는 남녀 간의 사랑, 필로스는 친구 간의 사랑, 아가페는 신의 사랑, 스트로게는 가족 간의 사랑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는 야다 한 단어로 여러 의미를 표현합니다. 부부가 서로 잘 안다고 할 때도 야다를 쓰고, 목자가 양 떼를 돌볼 때도 야다를 씁니다. 심지어 서로 머리카락을 세고 있을 때도 야다를 씁니다. 서로의 머리카락까지 세는 친밀한 관계는 부부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다는 표현은 그만큼 우리를 친밀하게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부부가 서로의 머리카락을 세지 않고 남의 머리카락 숫자를 알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불륜입니다. “언놈이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왜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특성을 설명드리느냐 하면, 우리는 성경을 히브리적 사고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너무 분석적이고 과학적으로만 보면 문제가 됩니다. 히브리적 사고로 보아야 귀신이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리는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을 헬라적 사고로 보면 어떻게 됩니까. 물은 액체이고, 그 액체가 갈라져 물기둥이 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유체역학의 법칙 위반이고, 중력의 법칙 위반이며, 압력 평형의 법칙 위반이고, 열역학 제2법칙에도 위배되어 바다가 갈라지고 사람이 건너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고는 하나님께서 왜 홍해를 가르셨을까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홍해가 아니라 지구라도 사과처럼 두 쪽 내실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모두 헬라적 사상에 젖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분석적이고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물론 이것이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쓰인 성경을 믿으려 할 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택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히브리어에도 능통했고 헬라어에도 능통했습니다. 히브리적 사상을 헬라어적 사고로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상가 에릭 프롬은 『신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책을 통해 현대인을 비판했습니다. 여기서 신화는 동화로 바꾸어 말해도 됩니다. 기독교 작가 C. S. 루이스도 “신화는 거짓이 아니라 사실보다 더 큰 진실을 담는 그릇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역사의 시작은 신화로 전달됩니다. 길가메시 서사시가 있고, 일리아스가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단군 신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흥분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나라의 흥부와 놀부, 콩쥐 팥쥐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는 순간 이런 감흥을 잃어버립니다. 신화는 인간의 내면과 존재의 진리를 상징적인 언어로 풀어낸 것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인간 내면의 진리와 지혜를 잃었다는 뜻입니다. 현대인은 헬라인처럼 계산과 효율성, 기술과 논리를 앞세운 이성은 발달했지만 시와 은유, 꿈과 같은 상징적 사고는 상실했다고 비판받습니다. 바로 성경이 이러한 신화적 언어, 상징, 비유, 서사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비유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이야기 속으로 초대하시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하시며 지혜를 얻게 하십니다. 창세기 3장을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읽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세기 3장의 이야기를 통해 인류가 왜 불행해졌는지, 죄와 죽음, 그리고 구원의 핵심 진리를 풍성하게 전달합니다. 그래서 성경 교사는 청중을 이러한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설득력을 얻어야 합니다. 뻔하고 진부한 문장만 나열하면 교훈은 많을지 몰라도 설득력은 사라집니다. 서울역 지하철 입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분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분들의 절박한 마음은 이해할 수 있으나, 오히려 설득력이 없기 때문에 부작용만 커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시면 어떤 말씀이 나올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을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에워싸고 밀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우리에게 그림이 아니라 말씀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 예수님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목적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목적이 바로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말씀하십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를 죽이고, 힘들게 하고, 무겁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주신 목적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고 더 풍성히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너희를 더 무겁게 하리라고 만들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여간 올 한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명이 살아나고 성도님들은 더욱 풍성해지는 한 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대부분의 내용은 출애굽기 28, 29장에 나오는 제사장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려면 바로 제사장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는 우리를 뭐라고 합니까?“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라고 선포합니다.
제사장은 고대 근동에서는 최고로 높은 지위, 최상위 계급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인간을 창조하고 나서 제사장 역할을 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창세기 1장 2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본문에서 주요 사명은 만물을 다스리는 자들입니다. 앞에 번성, 충만, 정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니까 만물 위에 군림하라는 뜻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역할의 핵심은 다스리다입니다. 다스리다의 히브리어는 “라다”입니다. 라다의 뜻은 굴림하다가 아닙니다. “돌보다, 살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요한복음 10장 10절과 같은 뜻입니다.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역할입니다. 우리가 세상 만물에 대해 제사장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피조물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다고 합니까? 로마서 8장 22절에는 “피조물이 탄식하고 고통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물들도 잘 다스리고 돌봐야지 버리고 학대하고 유기하면 안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었는데,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뜻입니다. 백 말보다 눈이 더 정확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을 더 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우리 인생에 깊이 개입하십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딱 두 가지로 나눕니다. 귀의 종교, 눈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바로 귀의 종교입니다. 대부분의 모든 종교는 눈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크게 만듭니다. 동양 최대, 세계 최대의 우상을 만들어서 눈에 보기에 벌써 위압감이 들게 합니다.  미얀마에 있는 불상은 116미터입니다. 중국은 88미터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이런 눈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 시대가 영상 시대입니다. 유튜브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합니까? 저도 설교 말씀을 모아 놓은 유튜브 채널이 하나 있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1년이 지났는데 조회수 0회가 많습니다. 요즘 방송에 자주 회자되는 모교를 보십시오. 산 중턱에 얼마나 화려한 궁전을 지었습니까? 그래서 기독교가 귀에서 눈으로 이전하는 것을 타락이라고 봅니다. 다 갈릴리 촌놈들이었던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마가복음 13장 1절에 보면 “오 예수님, 성전에 저 돌을 보십시오. 저 건물 좀 보십시오.” 하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즉시 뭐라고 하십니까?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부서진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70년 후에 다 부서지고 없어졌습니다. 보이는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회복은 눈에서 귀로, 바로 말씀으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올 한 해도 우리가 눈에 현혹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 속에서 생명이 살아나고 더욱 풍성해지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