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앞에 심정을 토로한 한나(삼상1:1-28)
제1장 한나의 고통(삼상1:1~9)
하나님은 일부일처제만 허용했습니다. 아담에게 하와 한 사람만 창조합니다. 본문 1,2 절에서 제사장은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어겼습니다. 엘가나는 브닌나를 집안에 또 들입니다. 본문을 보면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했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열 아들 보다 낫지 않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면 입장 바꾸어 생각해 봅니다. 한나 입장에서는 남편에 대한 배신감이 들었습니다. 남편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브닌나를 들여서 갈등의 원인을 제공할 이유는 없습니다. 한나는 말은 안하지만 상처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로마 군병의 채찍보다 더 아프신 일은 사랑을 주었던 제자들의 배반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3절은 당시 대제사장은 엘리이고 아들은 홉니와 비느하스였다고 알려줍니다. 본문은 이들의 이름을 거론함으로 당시 시대가 얼마나 어두웠는가를 소개합니다. 엘리는 정통성 있는 가문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대제사장까지 올라갔음은 정치적인 수완과 처세술이 뛰어났음을 봅니다. 요즈음 로비 리스트가 세간에 화제입니다. 아마 엘리 제사장도 로비라면 한 수 했을 지도 모릅니다. 엘리는 자식들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스하스는 성막에서 하나님께 드릴 고기의 좋은 부분을 갈고리로 미리 건져 먹었습니다. 또 성막을 섬기는 여인과 부정한 일을 자행합니다.
이런 시대를 사무엘상3장1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 표현합니다. 삼상 3장3절은 이런 시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린 사무엘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등불 역할을 할 사무엘을 낳고 키운 한나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 4절참고하면 당시 히브리 모든 남자는 1년에 최소 3번 성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엘가나는 순번에 따른 의무 봉사 기간도 있었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 바친 화목제물은 서로 나누어 먹었습니다. 화해의 제물의 의미를 살린 조치입니다. 엘가나는 이때받은 소의 가슴과 뒷다리 살을 별도의 장소에서 먹었습니다. 엘가나는 한나의 몫으로 브닌나에 2배를 줍니다. 소고기 맛있는 부위는 채끝살, 안창살입니다. 한나에게 안창살을 주었을지 모르죠. 그러나 한나가 고기를 배로 받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적수가 있는 한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불가능합니다.
본문 6절을 참고 하면 그의 적수는 브닌나입니다. 한나를 심히 격분케하고 괴롭힙니다. 7절동일한 말을 반복합니다. 본문 적수는 NIV영어 성경은 Rival입니다. 라이벌의 우리말 뉘앙스는 대등한 입장의 두 사람을 말하는데 한나는 아마도 일방적으로 당했습니다. 어떻게 고통 받았을 까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한나가 브닌나 보다는 연장자였겠죠. 브닌나는 이를 무시합니다. 군대에서는 하극상이라고 하죠? 브닌나는 집안 허드렛일을 한나에게 떠 넘겼을 것 같습니다. 말끝마다 “애도 없는 주제에... ...” 무시 했을 듯합니다. 가사노동에 지쳐 한나가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붙일라치면 “애도 없는 것이 누워서 편안하게 잠잘 시간이 어디 있냐고” 구박했을 지도 모릅니다. “나 같으면 벌써 집나갔다.”하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했을지 모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것도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괴롭히다 보면 탄력이 붙어서 통제하기 힘들어집니다.
오늘날 왕따가 사회문제입니다. 이것도 작은 무시가 세력이 붙어 점점 커지고 강도가 세어진 결과입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 한 여 순경이 왕따 문제로 자살 하려는 여학생을 발견합니다. 여학생은 마포 대교에서 우산을 쓰고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앉아 있었습니다. 여순경은 그 여고생의 손을 잡아주고 대화해 주자 마음을 고쳐먹고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다 합니다. 그 여순경은 관심과 따듯한 말 한마디로 어린 목숨을 살릴 수 있다 했습니다.
본문7절을 보면 브닌나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한나는 눈물로 시간을 보냅니다. 식욕마저도 잃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자녀가 있으면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습니다.(신 7:13 , 14 ; 시 107:13) 자식이 없음은 하나님의 징계 또는 저주로 보았습니다. (창 20:18).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한나의 태를 막았다합니다. (5,6절) 한나의 괴로움을 노력해서 해결되는 일이면 덜 서러웠습니다. 태가 닫힌 일은 노력해서 될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주변의 시선도 괴로움을 더하게 했습니다.
여기까지 한나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입니다. 여기서 메시지를 끝내면 비극 이지만 반전이 있습니다. 이 반전 때문에 이스라엘의 꺼져가는 등불이 다시 켜집니다.
제2장 여호와 앞에 심정을 토로한 한나(삼상1:10~28)
반전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됩니까? 10,11절을 참고합니다.한나는 자신의 태를 닫으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한나의 기도는 구체적입니다. 아들을 주시면 다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서원은 하나님과 약속하는 행위입니다. 삭도는 머리를 깎는 칼입니다.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겠다는 것은 나실인(Nazirite)에 대한 규정입니다.(민수기 6:2절) 하나님께 드렸다는 의미로 머리를 깍지 않는 이유는 자신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고전 11:3-10>하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나실인으로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기도 자세는 두 손을 하늘로 올리거나 일어서서 큰소리를 냈답니다. 한나는 어떤 자세로 기도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기도는 간절했고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는 마음의 아픔을 하나님께 다 털어 놓습니다. 한나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으면 나중에는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 엘리는 한나의 마음을 먼저 알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나를 책망합니다. (13,14절) 엘리 제사장은 포도주를 끊으라 합니다. 한나가 낮술에 취하지 않았나 오해합니다. 안 그래도 서러운데 이런 오해까지 받아야하다니! 보통 여인 같았으면 “그래 나취했다. 취한 여인 맛좀 보실래요?”하며 이판사판으로 나오기 쉽죠.
그러나 한나는 어떻게 오해를 풉니까? 한나는 엘리 제사장에 대한 예의를 끝까지 지킵니다.(15,16절) 엘리 제사장을 “내 주여”하고 높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상세하게 알립니다. 한나의 진심을 알게 된 엘리는 “평안히 가도록 했고” 한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시도록 빌어줍니다.
한나의 태도는 이제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한나의 마음에 슬픔이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고통의 그림자가 아침 안개 걷히듯 걷힙니다. 입맛도 돌아왔겠죠. 그의 얼굴에는 근심의 빛이 없습니다. 브닌나의 어떠한 구박도 이 한나의 얼굴빛을 어둡게 만들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막11장24절에서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고 말씀합니다. 한나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서원한 후에도 계속 울면서 보냈다면 그것은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한나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들을 이미 받은 줄로 알고 슬픔을 극복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한나를 축복하고 아들을 주었습니다.(19) 한나는 이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습니다.(20) 사무엘이라는 뜻은 “내가 여호와께 구하였더니” 하나님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에게 받았으니 한나는 서원을 지킵니다.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성막에 두고 오는 일이 쉬웠겠습니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민수기30:8절을 참고하면 당시 한나가 하나님께 서약한 것을 남편 엘가나가 허락하지 않으면 합법적으로 무효가 되는 길도 있었습니다. 서원은 하나님과 한나 사이에 은밀하게 체결한 서원입니다. 문서로 남기고 도장 찍고 복사하고 사인하고 코팅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한나는 서원을 무를 핑계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핑계거리로 엘리 대제사장과 그 아들들의 타락상을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열악한 양육 환경을 부각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한나는 남편 엘가나까지 설득합니다. 그리고 모든 예를 갖추어 사무엘을 드렸습니다. (삼상1:23~25) 형편이 그리 넉넉지도 않았을 텐데 수소 세 마리를 잡습니다. 소 세 마리 중 한 마리는 사무엘을 위함입니다. 한나는 서원을 공식화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27~28) 이렇게 드려진 사무엘은 하나님의 등불로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은 후에 아들 셋을 한나에게 더 주십니다. 그리고 예쁜 공주님도 두 명이나 더 주십습니다.(삼상 2:21) 브닌나보다 자녀가 하나 더 많은 듯합니다 . 한나와 브닌나의 라이벌 대결은 완벽한 한나의 승리로 끝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마음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한나를 보았습니다. 한나는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모든 현실의 슬픔을 극복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혹시 브닌나가 있습니까? 우리가 브닌나 자체에 너무 절망하지 않고 브닌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강릉교회가 제2의 한나 제2의 사무엘들을 많이 키워낼 수 있길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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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왕의 변명(삼상13장)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는 나이 별로 무엇에 이끌리는가에 대하여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10세에는 과자입니다. 20세는 연인입니다. 20세는 결혼 적령기이다 보니까 이성에 많이 끌립니다. 30세에는 쾌락, 40세는 야심, 50세에는 탐욕에 움직인다고 합니다.
본문 사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 구하다.”입니다. 사울은 이름의 뜻과는 반대로 여호와께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사울처럼 되지 말자는 뜻에서 본문을 공부합니다.
1.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2년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왕이 될 때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년에.” 이년이란 단어를 주목해 주십시오. 사울은 백성들이 그토록 바랐던 초대 왕에 오릅니다. 몇 살 입니까? 40세입니다. 40이면 루소는 야심에 끌립니다. 사울이 왕에 오르고 2년이 흘렀습니다. 인생의 고비는 성공 후에 옵니다. 사울은 2년 동안은 잘했습니다. 그 후에 삼천포로 빠집니다.
사울 가문은 왕족 가문이 아닙니다. 미약한 베냐민 지파입니다. 베냐민 지파 내에서는 유력했습니다.(삼상9:1) 그러나 사울은 스스로 지파도 가문도 작고 미약하다고 여겼습니다.(삼상9:21) 자존감이 없었습니다.
자존감 없는 가문 이야기가 나왔으니 저의 족보 이야기를 잠깐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큰 아버지는 처음으로 족보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습니다. 놀란 것은 저도 사울같이 남에게 내세울만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시조가 임춘(林椿)이었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했습니다. 검색도 안 될 줄 알았는데 나왔습니다. 임춘은 고려 중기 무신 정권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인이었습니다. 호는 서하(西河)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내용이 이러 하였습니다. “임춘은 극도로 빈곤한 처지에서 다른 문인들과 더불어 모임을 결성하여 술과 시로 사회적 울분을 달랬다.”고했습니다. 또 “과거 시험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시골로 내려가 실의와 곤궁 속에서 방황하다가 요절했다.”로 나왔습니다. 술, 시, 요절,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으로 '국순전', '공방전' 등이 있었습니다.
사울 왕도 이스라엘 지파 중 뼈대 있는 가문이 아닙니다. 사울이 제비뽑기를 통해 왕으로 등극했을 때 짐 보따리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을 보면 소심한 사람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런데 사울 왕에게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면서 새사람으로 변합니다.(삼상10:6) 사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른 쪽 눈을 다 빼버리겠다고 모욕한 나하스 장군을 군사 33만을 일으켜 물리칩니다. (삼상11:2, 8, 11) 이 사건을 통해 사울은 공식 왕으로 인정받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등극한 후 2년은 잘 지냈습니다. 어떤 특권을 누렸을까요? 우리나라 대통령에 비유해봅니다. 대통령에게는 헤어디자이너,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경호인력, 주치의를 둡니다. 전용요리사는 한식, 일식, 중식, 양식이 다 따로 있습니다. 전용차, 전용기차, 전용헬기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전용차는 미사일을 맞아도 끄떡없습니다. 대통령의 권한은 조약체결비준권, 국민투표부의권, 계엄선포권, 긴급처분명령권, 행정부지휘권, 국군통수권, 공무원임명권, 사면권이 등등이 있습니다. 대통령 월급 한 달에 2,000만원 연봉 2억3,251만원 입니다. 임기가 끝나도 죽을 때까지 연금 1천만 원 이상을 받습니다. 만40세 이상 대통령 후보 신청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보면 사울 왕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직권을 남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3천명의 군대를 조직합니다. 그리고 2천명은 왕 직속 부대로 편성합니다. 천여 명 가량은 아들 요나단에게 편성합니다. 남은 자들은 장막으로 보내 예비군으로 둡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요나단을 시켜서 적국인 블레셋의 변방 수비대를 칩니다. 그리고 수비대장을 죽입니다. 이것이 화를 자초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3절 산상수훈에서 첫 번째 덕목을 무엇이라 하십니까?“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하셨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는 마음이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자 부해졌습니다. 영적인 역사도 뭔가를 성취한 후에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자세는 좋습니다. 섬긴 이후 영적으로 느슨해지면 사단에게 공격할 틈을 줍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우리들을 위하여 어떤 권면을 합니까? 빌립보서 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가 늘 심령이 가난한 자세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뒷일은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를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직권남용한 사울 왕의 변명
사무엘이 제사를 드린 일로 사울 왕을 문책하자 무엇이라고 변명합니까? 12절을 참고합니다. 변명은 간단명료합니다. “부득이하여” 입니다. 부득이하다는 것은 자기편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본문에서 사울 왕이 처한 상황은 풍전등화(風前燈火), 백척간두(百尺竿頭)입니다. 풍전등화는 바람 앞의 등불이고, 백척간두는 30미터의 장대 꼭대기에 서 있는 형국입니다. 극도로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당시 전력을 비교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무기가 없었습니다. 칼 두 자루 밖에 없었습니다. 사울과 아들 요나단에게만 한 자루씩 있었습니다.(삼상13:22) 나머지 군사들은 무기라고 해봤자 농기구 밖에 없었습니다. (삼상13:19-20) 쇠스랑, 낫, 도끼, 곡괭이, 소를 몰 때 쓰는 막대기 등이 전부입니다. 반면에 블레셋은 어떠합니까? 본문5절을 보십시오. 병거가 3만입니다 마병이 6천입니다 군인 수는 너무 많아 통계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해변의 모래와 같았습니다. 이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사울은 자기의 처지를 모르고 블레셋의 수비대를 요나단에게 명하여 먼저 공격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생쥐가 잠자는 사자의 콧 털을 뽑은 셈입니다. 블레셋은 화가 나서 이스라엘을 치려고 사방을 에워쌌습니다. 그러자 군인들과 백성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삼상13:6) 남은 자는 겨우 600명밖에 없었습니다.(삼상13:15)
사울은 제사라도 지내서 위기 상황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7일을 기다려도 사무엘이 오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기다리다 못해 자신이 직접 제사를 집도합니다. 사울은 부득이한 처지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블레셋의 말과 병거가 이스라엘을 초토화 시킬 것이라여깁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삼상14장을 보면 블레셋이 쳐들어오지 않는 틈을 타서 요나단과 그를 따르는 병기든 소년이 선제 기습 공격을 합니다. 이를 계기로 오히려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둡니다.
우리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합니다. 사단은 항상 상황을 부득이하게 보이게 합니다. 부득이하게 보이는 현상은 사탄이 두려움과 근심을 심어서 상황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계략에 속지 말아야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부득이하게 보이는 상황에 말려들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열왕기하6장13-17절을 보면 아람군대가 말과 병거를 동원해 엘리사와 제자를 잡으려고 성읍을 둘러싸고 대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사의 제자는 두려워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적에게 뼈도 추리지 못하고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 엘리사는 기도한 후 제자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었습니다. 제자는 하나님이 불 말과 불 병거들을 온 산에 가득 채우고 마치 군대에서 5분 대기조처럼 있는 놀라운 모습을 봅니다.
사도행전7장55절을 보면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평온합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났습니다. 무엇을 보았기 때문입니까? 하늘의 하나님의 영광과 옆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감히 감당 못할 많은 말씀으로 보호한다고 말합니다. 생명싸개에 싸서 보호합니다.(삼상25:29) 수호천사를 세워서 지키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단10:20, 에스겔28:14) 우리가 부득이한 상황에 말려들지 말고 상황을 넘어서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3. 사람들의 영성
영성(靈性, Spirituality)뜻은 위키백과 사전을 참고하면“신성(神性)의 영역(divine realm)과 연결 또는 합일되는 경험”입니다. 영성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나오는 경험을 말합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아무런 교제 없이 하루를 산다면 영성이 없습니다. 울 왕도 영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오면 사울이 2년 동안 누렸던 왕으로서의 특권은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목숨도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다급한 상황에 처해서야 사울은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요청합니다. 사울이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제사를 드리자마자 사무엘은 마치 기다렸다는 제사장소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준비된 탄핵 메시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핵심내용은 본문 14절입니다. 참고합니다. 사울 대신에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다른 지도자를 세우시겠다는 내용입니다. 그가 다윗입니다.
사울과 다윗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누가 더 멋있는 사람입니까? 사울이 더 멋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외모에 대하여는 두 사람 다 멋있고 준수하다고 나옵니다. 이들이 진 죄의 질과 양을 따진다면 오히려 다윗이 더 큽니다. 사울왕은 길보아 산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죽을 때에 자기 한 목숨 부지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자결을 하지만 비굴하지는 않았습니다.(삼상31:4)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가드 왕 아기스로부터 한 목숨 부지하려고 미친 척을 합니다. 대문짝을 긁적거리며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연기를 합니다.(삼상21:13)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통해 역사를 이룹니다.
사울은 하나님과 마음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반면 다윗은 통하는 사람입니다 (행13:22) 마음이 하나님과 합한 사람입니다. 사울은 왕이 된 후 하나님의 마음과 아무 관계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울왕은 그냥 사울왕의 길을 갔을 뿐입니다. 사울의 세상적인 삶이 제사 사건을 통해서 표면으로 드러났습니다. 제사 그 자체가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 보기 전에 이미 사울의 삶이 영적인 삶이 아니었습니다. 영성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사무엘을 통해 굳이 7일을 늦게 도착하도록 하셨을 까요? 하나님은 그 7일 동안 사울의 영성이 없는 삶을 겉으로 드러냈습니다.
4.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
사울은 2년 만에 심판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심판의 메시지를 듣자마자 당장 왕의 자리에서 하야하여야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울은 38년 동안 계속해서 왕위를 유지합니다. 이 유지 기간에 다윗왕국의 기틀을 만련 할 만큼 영토를 확장하는데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위한 심판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징계, 심판은 회개 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담은 몇 년을 살았습니까? 930년을 더 살았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태어날 때부터 악한 사람들을 심판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몇 년이 걸렸습니까? 120년이 걸렸습니다. 창세기 15: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모리 족속을 심판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몇 년이 걸렸습니까? 760년이 걸립니다. 디모데전서2: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늘 먼저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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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에 사로잡힌 사울 왕
악령에 사로잡혔던 사울 왕을 예로듭니다. 삼상16:14절에서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삼상18:10,11절“그 이튿날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 서 두 번 피하였더라.”라고 합니다
본문 10절에서 그 이튿 날 일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이후 인기가 하늘을 찔러 여인들에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칭송이 있었던 날입니다. 사울왕은 시기심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두 번이나 던집니다.
악령이 사울에게 임하자 번뇌했다 합니다. 번뇌는 마음이 시달리고 괴롭다는 뜻입니다. 백팔번뇌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악령이 사울을 지배하자 정신없이 떠들어 댔다고도 합니다. 정신없이 라는 말씀에 주목해 주십시오. 사단은 정신을 없게하고 자신을 잃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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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골리앗(사무엘상17장1-49절)
제가 오늘 수요집회에 거의 정각 8시에 도착했습니다. 미리 와서 기도로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일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교회로 출발하려고 일찍 나왔는데 아파트 1층 주차장에 주차한 제 차 뒤를 가로막는 주차를 누가 해놨습니다. 아직 8시도 안 되었습니다. 주차브레이크 내리고 중립인가하여 밀어 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핸드폰 전등 켜고 전화번호를 알아 차주에게 전화했는데 꺼져있습니다. 4번이나 반복해서 전화했는데도 여전히 꺼져있습니다. 아파트 방송실에 부탁할까 하다 다시 집으로 올라가서 저희 자매 차로 바꾸어 교회로 오느라 지각할 뻔했습니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차 키를 교회 사무실 앞에 흘리고 와서 한 형제가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상황 앞에서 분노가 목구멍 9부 능선까지 올라왔는데 참았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 제목이 분노와 평정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제 제목을 미리 아시고 더 실감 나게 말씀을 전하도록 이런 상황을 연출해 주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문의 다윗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믿음으로 평정심을 유지했고 일을 그르치지 않았습니다. 평정심은 평안한 마음 고요한 마음입니다. 평평할 평(平) 고요할 정(靜)자를 씁니다. 분노는 성낼 노(忿) 성낼 분(怒)자를 씁니다.
학자들은 우리 사회를 분노 사회라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듭니다. 음주 단속에 불만을 품고 차에 휘발유를 붓고 파출소로 돌진한 사람 있었습니다. 10대가 호기심에 외제 차를 쳐다만 봤는데 20대 운전자가 자기를 째려봤다면서 시비가 붙어서 칼부림 난적 있습니다. 주차 시비도 많지만, 아파트 층간소음 참지 못해 망치 들고 올라가고, 칼 들고 올라간 예도 많습니다. 길 가다 아무나 때리는 묻지마 폭행도 많습니다. 끔찍한 분노범죄도 잦습니다.
요즈음 코로나 19로 거리 두기가 장기화하니까 고립으로 인한 분노가 더 쌓입니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 조사에 의하면 한국 사람의 분노 도가 독일보다 6배 높습니다. 국민의 반이 분노감정을 느낀답니다. “마스크 좀 써달라!”는 요구에 시비가 붙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평정심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성경은 분노의 원인을 하나님과 불화 관계로 봅니다. 에베소서 2:14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고”라고 말합니다. 평정심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평화 관계가 회복될 때 지속 가능 합니다.
1.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삼상17;1-11)
본문 1절에서 11절입니다. 양진영으로 군대가 대치하고 있습니다. 분노에 찬 거인 한 명이 이스라엘 군을 위협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40일 동안 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한 명 나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1:1로 대결하여 지는 쪽을 종 삼겠답니다. 본문 3, 4절을 참고합니다. 본문 2절 “전열을 벌이다.”는 군대가 횡대로 늘어서 대치 중이란 뜻입니다.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었습니다. 골짜기에 상수리나무가 많았나 봅니다. 엘라는 상수리 나무란 뜻입니다. 상수리는 참나무과입니다. 골짜기 넓이가 400m입니다. 골짜기 양쪽으로 있는 산 높이는 50m입니다.
이 대치 상황은 영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 축소판입니다. 세상이 복잡하게 보이지만 성경은 두 진영밖에 없다고 봅니다. 예를들면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 마음의 할례 받은 자와 무할례 자, 양과 염소, 알곡과 가라지,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 의인과 죄인, 하나님 편과사탄 편입니다.
본문 5~7절에는 골리앗을 길게 소개합니다. 골리앗 이름은 방랑자란 뜻입니다. 키 2m 95cm, 갑옷 무게 57kg, 창 날만 6.8kg입니다. 골리앗은 항상 앞에 방패든 자를 대동합니다.
본문 8절을 보면 대표 장수 1:1 대결을 요구했는데 1:1은 인도주의적으로 보입니다. 문헌에는1:1은 미신에서 나왔다합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1:1로 싸워 이긴 쪽은 반드시 이기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과학적 근거가없는 미신은 우리주위에도 많습니다. 예를들면 ' 빨간색으로 이름 쓰면 죽는다. ' 중국이 빨간색을 좋아합니다. 진시황제가 빨간색을 자기만 독차지하고 싶어 빨간색으로 이름 쓰는 자는 잡아다 죽인 데서 유래했습니다. '축구 골대 맞추면 진다. 미역국 먹으면 시험에 미끄러진다. 모서리에 앉지 마라. 문지방을 밟지 마라. 밤에 손톱 깎으면 귀신이 쫓아다닌다. 밤에 휘파람 불면 뱀 나온다. 애인에게 신발 선물하면 도망간다. 아홉수는 안 좋다. 내 뒤 담화하면 귀가 간지럽다. 돼지꿈은 행운이 온다. 이사는 손 없는 날 간다. ' 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습니다.
4절에서 골리앗의 출신지 가드는 역사적 유래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11장22절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 하나님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명하며 호흡이 있는 자는 남기지 말고 다 진멸하라 합니다.(신20:16)
하나님의 전쟁은 영적전쟁으로 우상을 몰아내고 심판을 대행합니다. 여호수아는 세개의 도시는 완전히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그중 하나가 가드입니다. 삼하21:16-22절을 보면 골리앗 동생들이 4명 있습니다. 가사는 또 사사 삼손의 눈을 뽑는데 일조한 들릴라의 고향입니다. 삼손 시대 때도 이스라엘은 국가가 몰락할 위기에 처합니다.
아스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간 도시입니다. 이때는 이스라엘군 3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2. 이스라엘 진영의 다윗 소년(삼상17:12-30)
본문 12-40절입니다. 다윗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본인이 원했거나 의도한 바는 없습니다. 아버지 심부름 왔다 골리앗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스라엘군이 모욕당하는 것을 하나님이 모욕당하는 것으로 느꼈습니다. 본인이 그 치욕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어린 다윗 기특합니다. 그런데 이 다윗에게 대노하는 사람이 있의니 큰형 엘리압입니다. 엘리압 이름 뜻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입니다. 다윗은 “사랑 받는자.”입니다. 28절을 보면 “네가 어째서 여기 있냐? 치던 양들은 어디에다가 내팽개치고 왔느냐? 이 교만하고 완악한 동생아!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구나. 전쟁이 애들 장난인 줄 알아?” 호통칩니다. 완악은 입에 담기조차 악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먼 거리를 왔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엘라 골짜기까지는 24km입니다. 형들 먹을 음식을 싸 왔습니다. 당시는 정규군대가 없었고 필요할 때마다 군사를 모집합니다. 군량미도 집에서 자체 조달합니다. 다윗이 가지고 온 음식량이 많고 무거웠습니다. 고생하며 먼 길 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진심은 외면당하고 욕만 실컷 먹고 있습니다. 이러면 이판사판 공사판이다고하며 막 나가기 쉽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합니다. “형이 뭔데! 형이 내 맘을 그렇게 잘 알아! 형은 그렇게 잘났어?” 하기 쉽습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 밭은 자였습니다. 왕입니다. 위에 형들 7명이 기름 붓는 장면을 보았을 것입니다.(삼상16:11-13) 왕궁 출입도 이미 하고 있습니다. 특권의식 내세울 수도 있었습니다. “형 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야! 왕이야! 왕! ” 하며 반발하기 쉽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나는 말 한마디 물어본 것뿐인데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 야단이십니까?” 최대한 말꼬리를 낮춥니다. 평정심을 잃지 않습니다. 눈 치켜뜨고 말했다면 형제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30절을 보면 다윗이 이 말을 하며 돌아섰습니다. 다윗은 분노를 잘 다스렸고 평정심을 유지합니다.
3. 사울의 허락(삼상16:31-39)
33절을 보면 두 번째 자존심 상하게 하는 일이 나옵니다. 사울 왕의 설득입니다. 사울은 이 싸움은 소년과 용사의 싸움에 불과하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다. 고래와 새우의 싸움이니 포기하란 의도로 말합니다.
사울 왕은 더운밥 찬밥 가릴 때가 아닙니다. 다윗이 나가겠다면 용기백배 해줘야 할 처지입니다. 그런데 태클을 겁니다. 이때도 다윗은 평정심을 잃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합니다. 35~37절을 보면 광야 경험을 말합니다.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합니다. 다윗의 단호한 말에 사울도 더 만류 못하고 허락합니다.
사울 왕이 자기의 군복과 놋 투구와 칼을 줍니다. 다윗 몇 발자국 걸어보니 자기 스타일이 아니어서 벗어버립니다. 자기만의 스타일 대로 목동 막대기와 물매만 가지고 나갑니다.
물매 훌륭한 무기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이란 영화 참고합니다. 감자 만한 돌을 6-8번 돌리다 던지면 초속 35m/s로 날아갑니다. 45구경 권총 총알을 받아내는 만큼의 충격량입니다. 문제는 정확성입니다. 다윗은 이를 위해 광야에서 수없이 물 매질을 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 받고(삼상16:13절). 처음 한 일이 수금을 타서 사울 왕의 악령을 내쫓는 일이었습니다. 수금은 9-10줄로 된 현악기이고 기타보다 맑고 부드러운 소리가 납니다. 수금 연주로 악령을 쫓은 걸 보면 음악에는 힘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후로 찬송가도 만들고 악기 제조도 했습니다.
한나라의 왕이 악령에 들리자 나라 상황이 어려워집니다. 지도자들이 평정심을 잃으면 분별력이 흐려집니다. 평정심을 잃어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면 핵무기 사용승인을 하여 인류를 불행으로 떨어지게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윗은 궁중 악사요 호위무사로 활동했고(삼상16:21) 왕궁 심부름도했습니다. 특권의식 가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집에 오면 평소와 똑같았습니다. 양을 돌 보러 광야로 갔습니다. 아버지 심부름도 합니다. 왕궁 출입하면 양치기 친구들 불러놓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양 치는 일은 가장 천한 일입니다. 현재 다윗이 돌보는 양도 장차 자기 몫은 없었습니다. 위로 형이 7명입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재산분배가 큰형이 배로 가져갑니다. 나머지 순서대로 7명에게 나누다 보면 8번째인 다윗에게는 없습니다. 자기 양도 아닌데 목숨 걸고 돌보고 지킵니다. 사자의 입에 들어간 양까지 포기치 않고 빼앗아 왔습니다. 참 목자의 모습 엿봅니다.
다윗은 7번째에게 한 번쯤 불만 표출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저 기름 부은 자예요. 제가 언제까지 양 똥을 치워야 하나요? 이제 잔심부름 만은 7번째 형 시키세요.” 크러나 다윗은 한결같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아버지 심부름 갈 때도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양지키는 자들에게 양을 부탁하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삼상17:20) 전쟁터에 서도 형들 만날 때 짐을 짐 지키는 자들에게 맡기는 것 잊지 않았습니다.(삼상17:22)
4.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삼상17:40-47)
본문41에서 49절까지입니다. 다윗이 승리하는 장면입니다. 막대기를 들고 나오는 다윗을 본 골리앗은 나를 개로 여기느냐며 저주하고 찢어 죽이겠다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 보고 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개는 가장 싫어하고 금기로 여겼습니다 (왕상21:23, 왕하9:36) 골리앗 스스로 개의식 가졌 습니다.
정신의학 신문에 사람이 분노를 일으키는 것 중 하나가 “낮은 자존감”이랍니다. 자존감이 낮으면 사소한 일에도 분노합니다.
45절을 참고합니다. 본문의 “만군의 여호와”는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보호자”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요새요 방패란 뜻입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 믿고 담대합니다. 다윗은 관념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실제 체험한 신앙입니다.
5. 다윗의 승리(삼상17:48-49)
49절에 보면 돌 한 개로 골리앗 이마에 정확히 맞춥니다. 1타1 즉사시켰습니다. 항상 그랬었습니다. 광야에서 급소가 아닌 사자의 엉덩이를 맞추면 역공을 당했을 것입니다. 또 다윗이 골리앗 앞에 평정심을 잃었다면 백발백중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절체절명위기에 양치기 목동을 등장시킵니다. 다윗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전쟁 비전문가입니다. 전쟁 초보입니다. 전쟁을 칼과 창이 아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씁니다. (고전1:28) 우리도 이 하나님 안에서 만은 조금 못나도, 학벌이 조금 부족해도, 언변이 조금 안 좋아도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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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칼을 막은 여인(아비가일)(사무엘상 25장1-38)
" 본문 25장은 다른 모습입니다.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부하 400명과 함께 칼을 뽑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날 뻔합니다. 이때 이 분노의 칼을 막는 여인이 있었으니 아비가일입니다."
본문의 시대는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 받고 8년 된 해입니다. 다윗의 나이는 23세입니다. 시기는 BC1018년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도망 다니던 때 일입니다. 본문 24장에는 동굴 사건을 기록합니다. 엔게디 광야 들 염소 바위길 옆에 있었던 일익니다. 사울은 한두 명도 아니고 3,000명 군사를 동원해 다윗을 쫓습니다. 다윗은 잘못 한 일이 없습니다. 사울은 질투심, 시기심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사위입니다. 다윗은 골리앗도 물리쳤습니다. 사울의 군사로 천부장으로 공도 세웠습니다. 수금 연주로 악령도 쫓아주었습니다. 사울은 은혜도 모르고 다윗을 10년을 쫓아다닙니다. 사울은 들 염소 바위 쪽 동굴에 사울이 볼일을 보려고 혼자 숨어듭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처럼 안에 다윗 일행이 숨어있었습니다. 다윗은 분노의 칼을 빼 들고 사울의 목을 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못 칩니다. 옷자락만 살짝 벱니다. 다윗은 사울도 하나님이 세웠으니 하나님이 심판하시도록 맡깁니다. 이 사실을 안 사울이 감동합니다. 큰소리 높여 울면서 말하는데 삼성 24장 20절을 참고하면 다윗을 차기 왕으로 인정합니다. 다윗은 24장의 기록을 보면 사울도 감동하게 할 정도로 왕도가 있었고, 품위를 지켰습니다. 분노를 참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본문 25장은 다른 모습입니다.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부하 400명과 함께 칼을 뽑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날 뻔합니다. 이때 이 분노의 칼을 막는 여인이 있었으니 아비가일입니다.
1. 사무엘의 죽음(삼상25:1)
1절을 보십시오. 본문은 사무엘의 부고 소식부터 시작합니다. 사무엘은 향년 83세로 죽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최후의 사사이며 최초 선지자고 제사장입니다. 삼중 직을 감당합니다. 사무엘은 가장 어두운 때에 세움. 받았습니다. 당시는 정치적, 영적으로 어두웠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이 등불처럼 사무엘을 쓰십니다. (삼상7:5-16)
사무엘은 어두움을 밝히는 역할 다하고 죽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전체가 슬픔에 잠겼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에 이렇게 온 백성이 슬퍼한 예는 크게 없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죽음이 있고 평가가 있습니다. 죽은 뒤 평가가 “거참 잘됐네~~” “그렇게 악하게 굴더니 속 시원하네!” 하는 평가가 나오면 곤란합니다. 사무엘 4살 때부터 성전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고 사명을 마친 사무엘의 마지막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안타까워합니다.
다윗에게 사무엘은 인생의 멘토입니다. 영적인 아버지입니다. 사울에게 자기를 지켜줄 마지막 바람막이입니다. 이제는 사라졌습니다. 사무엘 죽음 후 다윗은 힘들어했습니다. 본문에 다윗은 남쪽 끝 바란 광야로 갑니다. 예루살렘에서 184km입니다.
2.마온 사람 나발(삼상25:2-11)
본문 2, 3절을 보십시오. 나발 부부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이들이 사는 동네 마온이고 갈멜부근 성읍입니다. (수15:55) 완만한 산, 언덕이 많아 목축하기에 적합한 땅입니다. 나발은 부자였습니다. 갈멜 지역 재계 1순위였습니다. 양 삼천 마리 염소 천 마리 합하여 4,000 마리를 가진 부자입니다. 4,000 마리 현 시세로 56억 나옵니다.
3절에 나발 이름 뜻은 “어리석다.”입니다. 나발은“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사람” 나옵니다. 17절을 보면 하인까지도 나발은“불량한 사람”이라 합니다. 25절에 보면 그의 부인도 “불량한 사람, 미련한 사람 이라 하면서 정말 그 이름답게 사는 남편”으로 혹평합니다. 그리고 36절을 보면 부인이 사지에서 돌아왔는데 나발은 아무것도 모르고 큰잔치를 벌리고 만취해서 곤드레만드레”하는 모습 봅니다.
반면 아비가일 이름 뜻은 “아버지의 기쁨,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그녀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웠다.” 소개합니다. 17절을 보면 일이 터지자 하인이 나발에게 안 가고 아비가일에게 가서“당신은 어떻게 할지를 알아 생각하실지니”라 창 고하면 생각이 깊은 여인입니다. 가정 문제 해결사 노릇도 했습니다. 33절을 보면 다윗이 여인을 평가하기를“하나님이 보낸 여인이며 그녀의 지혜로움을 칭찬합니다.” 아비가일은 나발이 죽자 왕후의 자리에까지 갑니다.
본문 4~9절까지는 다윗이 나발에 음식을 요청하는 대목입니다. 다윗은 현재 600명의 군사를 거느린 수장입니다. 광야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지도자의 최대의 리더십은 먹을거리 해결입니다. 목축업자들의 최대 축제는 양털 깎을 때입니다. 8절에는 이날을 좋은 날로 소개합니다. 영어로는 Festive time입니다. 주인은 음식을 장만하고 잔치를 베풀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당시는 국제법도 없으니 목축하는 사람들은 항상 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마온 광야 남쪽 베두인족 속 또 거친 아랍 족속들이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베두인 부족은 험난한 사막 생활에 잘 적응하며, 뛰어난 전투력을 가진 강인한 부족입니다. 이들은 평생 목욕 2번 합니다. 태어났을 때 한번 결혼할 때 한 번입니다. 나머지는 다 모래 목욕합니다. 다윗은 이들로부터 나발이 안전하게 목축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3. 나발의 집을 멸할 결심(삼상25:12-17)
본문 15,16절에 보면 다윗이 담 역할을 해주었다 합니다. 나발은 사람도 안 다치고 가축도 털끝 하나 잃어버리지 않았다 기록합니다. 다윗 이렇게까지 했으면 말 안 해도 알아서 섬겼어야 도리입니다. 음식 많이 했으면 초대하여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다윗 나발에게 음식 요구할 권리 있었습니다. 다윗은 당연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소년 10명을 보냈습니다. 10은 완전수, 만수로서 최고의 예의와 존경심을 상징합니다. 6절 상 반절 사는 자란 뜻은 원어로 “나의 형제여!”란 표현이랍니다. 나발을 형제로까지 불렀습니다. 6절에 평강을 3번이나 빕니다. 3번씩 평강을 빈 것은 구약성경에서 최초랍니다. 평강을 사람뿐 아니라 집에도 빌었고 말 못 하는 가축에게까지 빌었습니다. 인사말에 간절함과 진심과 진정성이 묻어납니다. 심지어 8절을 보면 “네 종과 네 아들 다윗”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다윗은 연장자인 나발을 아버지로까지 높이고 자기를 아들로 부하들은 종으로까지 낮추었습니다.
나발은 이런 다윗의 요청을 어떻게 거절합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주기 아까우면 에둘러서 “요즈음 경기가 하도 불경기여서! 구제역 때문에 올해도 마이너스다.”하며 상대가 마음 상하지 않게 거절하면 됩니다. 거절의 기술도 있습니다. 천하가 다 알고 있는 다윗에게 “다윗은 도대체 누구고 이새의 아들은 또 누구냐?”하고 무시합니다. 다윗을 사울에게서 탈출한 종이라 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알지도 못하는 근본 없는 놈들에게 음식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다윗 1년 먹을거리 요구하지도 않았고 한 끼 정도였습니다. 나발은 말끝마다 내가, 내 떡과 내 물, 내가 잡은 고기, 일인칭 소유격을 썼습니다. 말속에 오만함이 묻어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모욕당한 10명의 소년이 이 모든 말을 다윗에게 전합니다. 다윗은 13절에 조용히 “칼을 차라 올라가자!”합니다. 요란하게 화내지 않고 냉정하면 더 무섭습니다. 다윗 목축업자 나발 하나 처단하려고 군사의 2/3를 동원합니다.
22절에 보면 “나발에게 속한 모든 남자 아침까지 한 명도 안 남기겠다.”라고 다짐합니다. 남자의 원어 뉘앙스는 "벽에다, 오줌싸는 놈들"이라는 거친 표현입니다. 다윗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줍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습니다. 율법에 보면 자기가 직접 원수 갚는 것을 금합니다. (신32:35, 롬12:19,20) 다윗은 율법도 안보였습니다. 법은 멀고 칼은 가까웠습니다. 다윗 “나발과 그 일파들 내 씨를 말려 버리겠다.” 하는 자세였습니다.
본문 14절부터는 장면이 바뀝니다. 17절까지 나발의 하인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네가 몰살당할 상황을 미리 알고 대처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나발에게 가봤자 일만 더 커질 테니까 안주인인 아비가일에게 달려갑니다. 정확한 현실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걸 보면 지혜로운 종입니다. 나발 인복은 있습니다. 아비가일뿐 아니라 훌륭한 하인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메시지 하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발이 재물은 남부럽지 않게 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 잃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최측근 하인도 나발편이 아닙니다. 심지어 아내인 아비가일도 아닙니다. 재물 얻고 사람 잃었습니다. 예수님 이런 말씀 하시죠.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16:9) 거라사 광인 한사람 살리려고 돼지 2000마리 희생시키십니다. 우리 가끔 인격 갖추지 못한 CEO들 방송에서 욕먹는 일 봅니다. 그래서 제품 불매운동도 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놓치면 곤란합니다.
4.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행동(삼상25:18-31)
18~31절까지는 장장 13절에 걸쳐서 아비가일의 활약상이 나옵니다. 일단 분노한 400의 군사를 멈춰 세워야 합니다. 세울 유일한 방법은 먹는 것입니다. [웰컴투 동막골]이란 영화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동막골은 전쟁과 상관없는 아주 평화로운 마을입니다. 그래서 북한군 장교가 촌장에게 비결을 묻습니다. “거~~ 기니까니 고함 한번 지르지 않고 부락민들은 휘어잡을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 뭐요?” 머리 쉬고 수염 긴 촌장이 먼 산을 지긋이 바라보며 “멀 마이 맥여야지 뭐?~” “네에??” 장교는 대답을 듣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아비가일 스케일 크게 맥일 음식 준비합니다. 음식도 떡 한 가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6가지로 다채롭게 준비합니다. 떡 백 덩이, 포도주 2포대, 맛있게 요리한 양 5마리분, 볶은 곡식 다섯 세아, 건포도 백송이, 무화과 뭉치로 이백을 나귀에 실어 보냈습니다. 마른 음식 위주로 야전 군인들이 먹기 좋게 배려합니다. 금방 먹고 원기 회복을 할 수 있게 도왔습니다. 음식 밟고 넘어갈 군인 없을 것입니다. 아비가일 일단 멈추어 세우는 데 성공합니다. 뒤이어 아비가일이 나귀 타고 등장합니다. (19-20)
23~31절까지는 그야말로 아비가일의 지혜와 스케일이 얼마나 큰지 나옵니다. 그녀는 먼저 엎드렸습니다. 얼굴까지 땅에 댔습니다. (23.24) 본문에 34번이나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단어 “내주, 여종”입니다. 문장의 흐름을 해칠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상대의 분노 잠재우는 첫째 무기는 겸손이었습니다.
첫마디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라!” 합니다. 분노 잠재우는 두 번째 무기 남 탓하지 않고 내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요즈음 내 탓의 반대말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 합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약자랍니다.
아비가일 분노의 화살을 자기에게 돌리도록 합니다. 자기가 10명의 소년이 어려운 걸음 했을 때 잘 챙겨야 했는데 못 챙겼다 합니다.
25절을 보면 남편 나발은 그야말로 이름값을 하며 살아온 사람이라 합니다. 그러니 “상종할 필요 없다. 상종해봐야 똑같은 사람 된다.” 합니다.
26절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합니다. 신앙적인 조언도 합니다. 분노로 하나님을 잃어버렸었는데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조언합니다.
28절에는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든든한 왕국을 반드시 세우시리란 확신을 줍니다. 다윗의 잃어버린 정체성과 비전을 새롭게 일깨워 줍니다. 사무엘이 돌아와서 조언하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당시 양을 칠 때 낮엔 방목하다 밤엔 우리에 가두었습니다. 가둘 때 한 마리 두 마리 세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몇천 마리를 세어야 하는데, 세다가“내가 몇 마리까지 셌더라. 786이야 876이야 하겠죠?” 당시 목자들은 보자기를 갖다 놓고 양 한 마리 들어갈 때마다 돌 한 개씩 넣어서 세고 잘 싸두었습니다. 돌 한 개가 양 한 마리 목숨입니다. 당시 귀중한 물건은 보자기에 싸서 두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이 하나님이 생명 싸게에 싸서 다윗을 보호해 준다고 하자 마음에 와닿았으리라 짐작합니다. 원수는 물매 돌을 던지듯 하나님이 던져버린다고 합니다. 다윗 물매의 달인 아닙니까? 아비가일 400명의 군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고 비유를 통해 설득합니다.
이런 지혜 어디서 나왔을까요? 본문에 보면 아비가일의 말속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말이 9번이나 나옵니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다고 했는데 평소 아비가일은 하나님 경외하는 여인입니다
5. 다윗의 용서(삼상25:32-35)
32~35절은 다윗이 분노의 칼을 칼집에 꽂는 대목입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자신의 범죄를 막아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400명 군사 앞에서 뽑았던 칼 다시 칼집에 넣는 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왕의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 깨끗이 칼집에 꽂습니다. 여인의 조언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돌이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한 여인을 통해 말합니다. 하나님 결코 침묵하는 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 순간 만나는 사람을 통하여, 벌어지는 사건을 통하여, 자연을 통하여서도 끊임없이 말씀합니다.
36절~38절은 나발의 최후입니다. 나발은 취했던 술에서 깨어 자초지종을 듣습니다. 듣자 충격으로 낙담하여 돌같이 됩니다. 낙담은 너무 놀라서 간 이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나발은 쓰러진 지 10일 후에 숨을 거둡니다. 38절은 말씀대로 하나님이 심판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사는 사회는 온통 갈등구조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 범죄한 인류의 비극입니다. 예를 들면 여당 야당 늘 싸웁니다. 노사 갈등합니다. 종교갈등, 민족끼리 갈등, 영토분쟁, 지역갈등, 세대갈등, 현재는 미얀마는 군부와 시민의 갈등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살다보면 분노할 일 많습니다. 사울, 나발 같은 분노유발자들 많이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은 이러하여도 분노의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자들 되길 기도합니다. 심판하실 하나님께 맡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오히려 분노의 칼을 막을 수 있는 제2의 아비가일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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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사울과 요나단의 최후(사무엘하1:1-27)
줄 하면 고무 줄, 맛 집 앞에서는 짭봉 줄, 톱을 가는 연장도 줄이라합니다. 사건이 줄줄이 일어난다 할 때 줄도 줄입니다. “인생은 줄이다.” 줄을 잘서야 성공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줄을 잡았는데 삭은 줄이면 망합니다. 회사에서 줄 잘 못 서면 책상 빠집니다. 오늘 제목의 줄은 무형의 줄입니다. 줄 잘서야 한다 할 때 줄의 사전적 의미는 회사, 정치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붙어서 친분을 맺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사울의 죽음 소식을 들은 다윗
오늘 본문 1절은 사울 왕이 죽었다고 기록하며 다윗 왕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사울 왕의 시대가 저물고 다윗 왕국이 열렸음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1~16절에 걸쳐 사울 왕의 죽음 소식을 전하는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후반부는 사울왕의 죽음 소식을 듣고 애가를 짓는 다윗왕이 나옵니다. 본문의 청년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줄에 너무 연연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기회만을 쫓아 살았습니다.
성경에 이름 석자만 올라도 영광입니다. 물론 선한 일로 올라야겠죠. 예수님의 12제자 중에도 이름만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야고보의 아들 유다입니다.(눅6:14,15)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 이름의 뜻은 “사랑하는 자”입니다. 요나단의 뜻은 “하나님이 주신다”입니다. 사울은 “희망”입니다. 본문의 청년은 이름이 없습니다. 그저 “한 사람” “청년” “아말렉 사람” “외국인의 아들”로만 불립니다.
왜 성경은 청년의 이름을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까요? 청년의 행적을 따라가 봅니다. 청년이 사울의 최후의 소식을 다윗에게 전했기 때문에 사울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찾아봅니다. 사울의 최후는 삼상31장에 있습니다. 길보아 산이 사울 왕 최후 전투 장소입니다. 길보아 산 해발 497m로 석회암 산입니다. 산에는 전차와 말이 가지 못하고 보병만 갑니다. 활 쏘는 자만 사울을 추격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최후
삼상31:3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이들이 쏜 활에 맞아 중상을 입습니다. 삼상31:4절을 보면 사울은 무기든 자에게 죽여 달라합니다. 이유는 이방인에게 모욕당하기 싫어서입니다. 무기든 자가 죽이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자기의 칼을 뽑아 위에 엎드려집니다. 사울은 한 목숨 부지하고자 애걸하지 않습니다. 장수다운 최후를 맞이합니다.
삼상31:6절을 보면 3명 장수 요나단, 이스위, 말기수아도 전사합니다. 아들들도 위기상황에서 도망가지 않고 아버지를 끝까지 보필하다 같이 전사합니다.
본문 삼하1장으로 돌아옵니다. 삼하1:1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시글락에 있습니다. 당시 사울 왕이 전국을 다스렸고 다윗은 망명 중입니다. 추종세력은 사울에 비하여 미미합니다.
추종자는 역대상12장에 나옵니다. 갓 지파의 천부장, 백부장, 므낫세 군대 천부장들이 함께합니다. 반면 사울은 군대만 이십삼만 명입니다.(삼상15:4) 길보아 산 전쟁터에서 시글락까지 130km입니다. 마라톤 코스 42.195km의 3배입니다. 청년은 사울 서거 소식을 안고 먼 길을 달려옵니다.
청년은 사실대로 전하지 않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청년의 모습은“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합니다. 극단적인 슬픔을 표현할 때 이렇게 합니다. 청년은 고생한 듯 보이려고 합니다. 옷을 더 많이 찢었거나 또 진흙탕에서 막 나온 듯 꾸몄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다윗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립니다. 과장된 몸 짓으로 절을 한 듯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청년은 위기 상황에서 용감하게 탈출한 듯 말합니다. 앞 장 삼상31장을 보면 왕과 아들들이 죽습니다. 보통 전쟁에서 왕과 왕자는 생포합니다. 죽었다는 것은 전멸했다는 뜻입니다. 블레셋이 왕까지 죽는데 일개 사병이 장열하게 싸우다 도망 나오도록 놔뒀겠습니까? 청년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계속4,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상황을 자세하게 캐묻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 청년은 우연히(by chance) 길보아 산에 갔다합니다. 전쟁 중인데 우연히 가는 것 또한 모순입니다.
사실을 숨기는 청년의 보고
청년은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있었다합니다. 삼상 31장에서는 실제 창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청년은 상황을 점점 극대화합니다. 또 본문에 청년은 “병거와 기병이 급히 따라갔다.”고 합니다. 31장에서는 실제 길보아산으로 사울이 피신하여 전차와 말은 못 가고 활 쏘는 병사만 갔다 합니다. 그런데 청년은 따라 붙었다고 합니다.
7절부터10절까지는 삼상31장과 더 이상 비교 할 필요가 없습니다. 7절부터는 그야말로 청년의 소설입니다. 사울이 “자기를 부르자 내가 여기 있다 대답했고 죽여 달라 해서 죽이고 왕관과 팔 고리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31장에서 사울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최소한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청년은 사울이 고통에 못 이겨 죽여 달라 했다 하며 비하하는 발언을 합니다. 10절을 보면 자신이 직접 손으로 죽였다고 합니다. 자기의 영웅적인 행동을 부각시킵니다.
청년의 거짓 말이 화가되어 부메랑처럼 되돌아 와 자신에게 비수로 꽂힐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인생 한치 앞을 모른다는 속담이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청년은 또 왕관을 챙겼다 했는데 이도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전쟁에 왕관(the crown) 쓰고 싸우는 왕 없습니다. 나 죽여 달라고 선전하는 셈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됩니다. 10여년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걸 보면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삼상18:11, 삼상19:1, 삼상19:9,10 20:1) 이랬던 사울의 사망 소식은 다윗에게 10년 체증 한꺼번에 내려가는 소식입니다. 청년은 다윗이 개가를 부르고 축배를 들 줄 알았습니다. 자신은 1등 개국공신으로 추대 받을 줄 알았습니다. 청년은 그동안 잡는 줄마다 삭은 줄이었는데 이번만은 확실한 줄을 잡은 줄로 알았습니다. 다윗은 축배는 커녕 의외의 반응입니다.
다윗의 슬픔
11절 보십시오. 다윗은 극심한 슬픔을 표현합니다. 12절을 보면 저녁때까지 슬퍼합니다. 울며 식음도 전폐합니다. 백성들도 다 같이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청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청운의 꿈을 안고 130km를 달려왔습니다. 아마도 꿈이 한꺼번에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청년은 외국인의 아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외국인이요 나그네와 같은 민족이었기 때문에 외국인 정책에 매우 관대합니다. 자국민과 같은 대우를 해줬습니다(겔47:22) 객들에게 십일조로 드려진 것들도 분배 했습니다.(신14:29) 종교 개종 시 율법의 보호도 받았습니다.(출2:48,49; 레 16:29) 법 소송 시 하나님께 직접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레24:22) 한 가지 다른 점은 이스라엘인과 같이 땅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청년은 땅에 대한 불리한 조건을 만회하려고 다윗에게 사건을 부풀렸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원수 같은 사울이지만 그의 옷자락만 살짝 베고도 마음 아파했던 사람입니다.(삼상24:4) 사울의 옷자락을 하나님의 옷자락 베듯이 두려워했습니다.(삼상26:23 24:6) 다윗은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했고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입니다(잠언19:23) 다윗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라는 줄을 확실히 붙잡고 산 사람입니다.
처음에 청년에 대하여 상상력을 발휘해 봅니다. 청년은 아말렉에 살았습니다. 자기 나라에서는 희망이 없다 여겼고 이스라엘 드림을 이루고자 귀화합니다. 처음 이스라엘의 떠오르는 샛별은 사울 왕입니다. 청년은 용병으로 자원하며 사울 왕에게 줄을 섰습니다. 사울이 그의 인생을 빛나게 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왕이 된 지 2년 만에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리는 월권행위를 합니다. (삼상13:9) 이 일로 하나님께 버림 받습니다.(삼상15:11) 마지막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르다 길보아 산에서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사울 뒤에 확실한 줄을 선 줄로 여겼던 그 줄은 금방 사그라들었고 결국 청년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습니다. 청년의 다음 줄은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에게 확실하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전쟁영웅처럼 꾸밉니다. 소설도 썼습니다. 그러나 너무 빗나갔습니다. 거짓말이 인생의 올가미가 됩니다.(잠언19:9)
아말렉 청년의 최후
14,15절을 보십시오. 아말렉 청년은 최후를 맞습니다. 죄목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죄입니다. 본문에 치다를 현대인의 성경은 단숨에 칼로 쳐서 죽였다로 번역합니다. 청년은 너무 얄팍한 처세술을 썼습니다.
성적을 잘 받으려면 출제자가 낸 문제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합니다. 회사에서 인정받으려면 회사가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열심히 하면 할수록 손해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고 열심을 내도 문제입니다. 예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고 열심을 내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우를 범합니다.(눅24:20)
세상에는 영원하고 튼튼한 줄은 없습니다. 언젠가는 실망시킵니다. 신자는 확실한 줄 하나만 잡아야합니다. 하나님이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말씀의 줄입니다.(벧전1:25) 사울왕은 처음엔 하나님을 잘 잡았다 금방 놓쳤습니다.(삼상13:9)
다윗과 요나단은 달랐습니다. 두 사람을 든든히 묶어 준 줄은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삼상20:42절을 참고합니다.“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두 사람이 헤어지는 장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서로 맹세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힘들 때마다 비밀리에 만나서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도록 돕습니다.(삼상23:16) 다윗은 통일왕국을 이룩한 후 이 언약을 잊지 않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자기와 같은 상에서 먹게합니다. 자기와 동등한 대접을 합니다.
16절은 아말렉 청년이 죽은 이유입니다.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간다.”합니다. 피는 형벌을 의미합니다. 머리는 인격과 육체를 대변합니다.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 간다는 뜻은 “피 흘린 책임이 바로 그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사자 숙어로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는 뜻입니다.
16절 후반 절을 보면 아말렉 청년의 입이 “그 자신에게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였다.”고 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청년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수 있습니다. 실제는 죽이지도 않았는데 그의 말 때문에 죽습니다.
말이 중요합니다. 말에 얽힌 말 많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밤 말은 쥐가 듣고 낮 말은 새가 듣는다. 말꼬리 잡고 늘어진다.내가 말을 말아야지. 말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성경은 말을 조심해야 되고 말을 잘해야한다고 권면합니다.(야고보3:6) 말로 사람을 죽이고 살립니다. 예수님이 마12장 36,37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청년은 자신이 뱉은 말 때문에 죽습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말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는 말이 곧 영이고 생명이라 합니다.(요6:6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요1:14) 사탄의 유혹도 말 걸기로 시작합니다.(창3:1) 많은 비극이 말 때문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말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잘 먹어야 합니다. 말씀이 진리입니다. 말씀 앞에 자신을 바로 세울 때 우리는 남을 살려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살과 피가 되는 참된 말을합니다. 또 우리가 보이는 사람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살 때 늘 진실 된 말도 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에 대한 다윗의 애가
17-18절에는 계속 다윗의 슬픔을 기록합니다. 조상이란 단어는 “비탄에 빠져 소리 내어 울다.”란 뜻입니다. 19-27절까지는 다윗의 시입니다. 제목은 활의 노래입니다. 김훈 이라는 소설가가 쓴 [칼의 노래]란 책이 있습니다. 명장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1인칭화법으로 쓴 소설입니다. 마찬가지로 활은 요나단을 염두 해 둔 노래라는 뜻입니다. 요나단은 활의 명수입니다.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살려준 일도 요나단의 화살 때문입니다(삼상20:41) 요나단이 죽은 원인도 활로 죽었습니다.(삼상31장) 다윗의 활 노래는 야살의 책에 기록하여 대대로 남겼습니다. 야살은 의로운 자입니다. 야살의 책은 의로운 자의 책이란 뜻으로 후대에 남기는 고문서입니다.
활의 노래 내용은 두 사람을 영웅시 합니다. 19,20절은 어려운 표현이 없습니다. 21절로 넘어갑니다. 슬플 때는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씁니다. 이들이 죽은 길보아 산도 황폐하게 되어 말 못하는 산이지만 죽음을 슬퍼해달라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21절 하반 절에 사울의 방패가 기름부음을 받지 아니함같이 됨이라의 뜻은 이렇습니다. 옛날에는 방패에 기름을 칠합니다. 상대의 칼을 막으면 잘 미끄러지도록 합니다. 미끄러지지 않으면 충격량을 자신이 고스란히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제 죽어서 방패에 기름을 바를 필요가 없어졌다는 아쉬운 표현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사울로 인해 이스라엘 딸들이 붉은 옷으로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로 채웠다합니다. 이는 사울이 정복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안녕과 번영을 누렸을 때를 회상합니다. 사울은 초대 왕으로서 12부족 체제에서 왕국체제의 기틀을 놓는데 큰 공헌을 했음을 칭송합니다.
다윗의 마음 속 본심이 26절에 나옵니다. “내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요나단을 내 형이라 부릅니다. 친근한 표현입니다. 기이하다는 “경이롭다” “불가사의하다”는 뜻입니다.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다는 표현은 경이로운 사랑의 더 경이로운 사랑, 사랑의 최상급, 사랑 중에 사랑, 사랑의 최고의 극치라는 말입니다.(삼상 18:1).
요나단과 다윗의 나이 차이는 30살입니다. 요나단이 많습니다. 이들은 나이를 뛰어 넘는 우정을 과시합니다. 영어 숙어에도 절친한 친구를 표현 할 때 “David and Jonathan” 이란 단어를 씁니다. 요나단과 다윗은 서로 사랑할 이유가 전혀 없는 관계입니다. 특히 요나단 쪽에서는 그렇습니다. 다윗만 없으면 자신이 왕 위를 물려받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정치적인 이권을 넘어 다윗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되 자기 생명같이 사랑합니다.(삼상2:17) 요나단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다윗이 10년 도망자 신세에서도 비뚤어지지 않은 것은 요나단의 사랑 때문입니다. 다윗 왕국의 새 역사는 바로 요나단의 사랑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졌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말세에는 사랑이 식어집니다.(마태24:12 딤후3:3 무정) 태양이 식어지면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사랑이 문제 해결사입니다. 내 안에 사랑 결핍을 채울 진정한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요3:16) 예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질 때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은 바로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제대로 알 때 또 십자가의 사랑 안에 있을 때 진정한 사랑도 가능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아말렉 청년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무명한 자들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는 비록 무명한 자이나 하늘나라 생명책에는 이름이 선명하게 기록된 유명한 자들입니다. 호세아 11:4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의 줄로 백성들을 이끌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로마서 8:39절은 이 사랑의 줄 세상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줄로 묶어서 끌고 가는 자들입니다. 확실한 줄을 잡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삭은 줄, 삭아가는 줄 너무 많이 잡으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의 줄 하나 잡고 늘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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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은 어디에(사무엘하7:1-7)
1. 다윗왕의 성전 건축 계획
본문 주인공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BC1010년에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40년간 통치합니다. 다윗은 헤브론에 거주하며 7년 6개월간 지파 사이의 내부 전쟁을 끝 낸 후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삼하6:14) 그 후 다윗은 성전건축을 계획합니다.(삼하7:13, 23:5) 하나님도 그의 뜻을 받아들였을까요?
1절에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한 때에 " 라고 합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입성 후에 백향목 궁에서 살았습니다. 이 궁은 다윗이 자신을 위하여 짓지 않았습니다. 이방 왕인 두로의 히람이 백향목과 석수와 목수를 보내 지어 주었습니다. 히람 왕은 평생 다윗을 사랑했습니다.(열상5:1) 그는 나중에 솔로몬을 도와 성전 건축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왕을 성전 건축 역사에 주요 인물로 씁니다. 하나님은 편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한 민족만의 하나님도 아니요 세상만민의 하나님입니다.
백향목 궁에 사는 다윗의 마음은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궤가 장막의 휘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거할 성전을 짓고자 합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의 뜻을 나단 선지자에게 말합니다.(2절).
3절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나단의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조언은 정확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도록 함은 성급했습니다. 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펴야합니다. 그런데 누구라도 나단의 입장에서는 같은 조언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다는데 반대 할 이유가 없습니다.
2. 성전 건축에 대한 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이 매우 급합니다. 밤에 즉시 나단에게 임합니다. 5절은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 역대상 17:4절을 참고하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반대의 뜻을 밝힙니다.
그 이유는 6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고정된 건물에 거하지 않았습니다. 장막과 성막 안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움직였습니다.(삼하7:6) 하나님은 하늘을 보좌 삼고 땅을 발등 상 삼는 분입니다.(행7:49) 무소부재 하고 전지전능 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건물 안에 갇혀 있을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그렇지만 백성들을 위하여는 성전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는 수시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성막(tent)이 필요했고 이제는 약속의 땅에 정착했으므로 성전(templ)이 필요합니다.
인구도 늘어났으며 세계 각처에서 몰려든 백성들이 제사도 드려야 합니다. 또 성전은 백성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를 통하여 소통하는 공간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공간입니다. 하나님과 평강관계가 이루어질 때 이웃과도 평화를 유지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은 평화의 상징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전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솔로몬의 손으로 짓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솔로몬은 평화란 뜻입니다.(열상8:17-19)
반면에 다윗은 정복전쟁을 하느라 많은 피를 흘린 인물입니다.(열상5:3)
3. 성전건축에 필요한 재료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는 돌, 목재, 금, 놋, 철, 직물 등의 다양한 재료가 쓰입니다. (열상6:1-10) 그중 백향목이라는 나무에 대하여 자세히 소개합니다. 백향목은 우리나라 소나무처럼 지천에 널려있는 나무가 아닙니다. 백향목(柏香木)은 이름 그대로 향기가 나는 나무입니다. 수명이 3,000년을 갑니다. 묘목으로 자라는데 만도 40년이 걸릴 정도로 더디게 자랍니다. 백향목은 해발 1,700미터의 고산 지대에만 자랍니다. 키가 다 크면 40미터이고 지름은 3미터까지 큽니다. 백향목은 곧게 뻗는 상록수입니다. 향기가 있고 진이 많아 방부제 역할도 합니다. 백향목으로 집을 지으면 벌레도 없고 반영구적으로 사용하는 고급 건축 재료입니다. 백향목은 광도 낼 수 있어 선박, 악기, 조각 작품, 관의 재로로 씁니다. 백향목은 예루살렘에 없었습니다. 레바논 고산 지대에만 있었습니다.(열상5:6) 오늘 날은 백향목이 희귀하여 1,200그루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레바논 국기 가운데 그림이 백향목 입니다.
레바논 고산 지대에서 예루살렘까지 옮겨 오는 거리가 약500km입니다. 당시는 전기톱도 트럭도 없었습니다. 사람의 인력으로 벌목하고 옮겼습니다. 나무가 단단하여 자르는데도 어려웠습니다. 산에서 직선 코스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지중해 바다를 이용합니다. 1,700미터 고산 지대에서 나무를 옮겨 레바논의 두로 항에서 뗏목에 실어서 이스라엘 욥바 항으로 옮겼습니다. 욥바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열상5:9) 예루살렘 평지가 아니고 해발 약800미터 고지에 있습니다. 끌고 올라 가야합니다.
성전 건축에 동원된 사람 18 만 3 천 3 백 명입니다.(열상5:13-16). 성전과 왕 궁터는 모리아 산의 정상을 깍아 만들었습니다. 이 터 준비하는데 만도 3년이 걸렸습니다. 역군3 만, 짐꾼이 7만 명, 돌을 다듬는 사람이 8만 명입니다. 돌은 성전을 짓는 곳에서 다듬었으면 편할 텐데 채취 현장에서 직접 다듬어 옮겼습니다.(열상5:17-18) 이 돌들은 지하 굴을 파고 채석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지하에 깊이200미터, 폭40미터로 축구장 크기만 한 채석 동굴이 남아있습니다. 시드기야의 동굴 또는 솔로몬의 채석장이라고 합니다. 석공들도 목숨 걸고 일했습니다. 돌의 크기는 3미터나 4미터 되는 정사각형의 돌입니다. 현장에서 다듬은 돌을 성전을 짓는 곳에 옮겨왔기 때문에 건설 현장에는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열상6:7) 이 작업은 몇 배로 백성들의 노동력이 들어갔습니다.
공사에 쓰인 은과 금만 오늘 날 현금으로 환산하면 수십조 원이 나옵니다. 이 재원 모두 백성들의 세금입니다. 성전 건축에 7년의 기간이 걸립니다.
솔로몬 왕은 성전 건축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전보다 4배 큰 자기의 왕궁도 13년에 걸쳐 짓습니다.(열상7:1) 아내의 딸을 위한 궁전도 짓습니다. 솔로몬은 40년의 재임 기간 가운데 거의 25년여 기간을 건축에 쏟아 붙습니다.
4. 성전 건축의 결과와 영향
성전 건축을 마치자 하나님은 눈과 마음을 항상 성전에 둔다고 합니다.(열상9:3)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법도와 계명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하면 가차 없이 성전을 던져버리겠다고 합니다. 성전을 무너뜨려 온 세상에 비웃음 거리가 되게 한다고 합니다.(열상9:6-8) 실제로 하나님은 성전을 여러 번 무너뜨렸습니다.
솔로몬 건축 역사 이후에 이스라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갑니까? 솔로몬이 죽고 나자 백성들은 솔로몬 다음 왕인 르호보암 왕에게 이런 요구를 합니다. “솔로몬 왕이 너무나 무거운 고역과 멍에를 메게 했는데 이제부터는 좀 가볍게 해 달라.”고 합니다.(열상12:4)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부터 솔로몬까지 30여년 이상을 건축에 노동력을 제공합니다. 청춘을 다 보낸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요구 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을 이은 르호보암 왕은 백성들의 요구를 묵살합니다. 오히려 자기는 한 술 더 떠서 전갈 채찍으로 압제하겠다고 합니다. (열상12:11,14) 그러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반기를 들고 나라를 세운 것이 북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분열합니다. 분열왕국의 영적인 원인은 백성들의 우상숭배이지만 외적인 원인은 무리한 성전과 궁 건축 역사입니다.
저는 청년 시절 복음을 영접하고 나서 무조건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생각 했습니다. 저는 이사야 선지자나 된 양 이사야서6장8절 말씀을 잡았습니다. 선교지는 우상의 나라 일본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어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도우죠 요로시꾸 오넹아이 시마스” 저는 수줍음이 많은 시골 출신입니다. 영어로 샤이맨(shy man)입니다. 그래서 선교지에서 누구에게라도 복음을 전하려면 샤이(shy)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웃통 벗고 맨발로 시내를 돌며“자의식을 극복하자!”하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보면 참 가상스럽고 기특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지금 중년을 넘긴 저는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샤이(shy)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일본에서 젊음을 불태우는 것은 저만의 기특한 생각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자질과 그릇도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넘치는 의욕의 불을 끄고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줄 믿습니다. 제가 앞으로도 나의 생각으로 불타기보다는 주님의 말씀에 더욱 침잠하여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분별하고 순종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백성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현재 다윗 왕국은 지파간의 통일 만 이룬 상태였습니다. 앞으로는 주변국가들 아람과 모압과 암몬,블레셋,아말렉,에돔 비롯하여 유브라데 강 유역까지 피비린 내 나는 정복전쟁이 남아 있었습니다.(삼하8장, 10장)전쟁과 성전 건축을 위한 공사를 동시에 한다면 백성들의 삶은 더 어려워질 것이 뻔했습니다. 다윗의 성전 건축은 선한 생각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고전3:16, 요1서4:16) 이제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 없이 하나님께 나아 가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요4:21)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틀 또는 관념으로 규정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내면에 참 믿음이 없을 때 겉을 화려하게 꾸미는 성향이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건물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만듭니다. 우상도 사람들이 위압감을 느끼도록 크게 만듭니다. 성경에는 외식하는 자들의 대표로 바리새인을 듭니다. 이들은 율법으로 자신을 치장했습니다. 613개조의 율법을 만들고 거기에 또 세부 조항을 만들어 지켰습니다.주님은 이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습니다. (마23:27)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믿는 자와 함께하시고 낮은 곳으로 먼저 찾아오시는 역동적인 분이십니다.다윗의 손을 통한 성전 건축은 참으로 기특한 생각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모든 생각들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늘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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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히도벨과 후새의 전략으로 배우는 설교의 기술(사무엘하17장1~29)
세계역사에서 아버지를 몰아낸 아들의 반란 사건
오늘은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아버지를 몰아낸 몰상식한 사건이 배경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나 세계역사에 아들이 아버지를 몰아낸 사건을 찾아봤는데 3건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는 아예 없었습니다. 조선시대는 유교의 영향으로 충효를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에 한 건 있었습니다. 고려를 건국하자마자 태조 왕건이 첫째 아들 왕국을 두고 셋째 왕무를 차기 왕으로 세우려 합니다. 그러자 첫째 왕국이 들고일어났는데 실패합니다. 외국은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늙은 아버지 왕을 몰아낸 일이 있었는 데 성공합니다. 영국에 헨리 2세 때 아들이 프랑스 왕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실패합니다.. 세상 역사 기록에도 많지 않은 일이 이스라엘 건국 초기에 일어났습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킨 배경 설명
압살롬이 왜 반역했는지는 성도님들 모두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압살롬은 여동생 다말을 욕보인 사건 때문에 2년을 기회를 엿보다 당사자였던 이복형 암논을 죽입니다. 그래서 왕궁에서 추방당합니다. 2년 후에 요압의 중재로 사면복권 됩니다. 왕궁에 입성했음에도 아버지 다윗은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이에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고 헤브론으로 가 스스로 왕이 된 후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옵니다. 이에 다윗은 왕궁을 버리고 도망을 합니다. 오늘 본문 시점은 야반도주(夜半逃走)한 다윗 일행이 요단강 가에 머무른 상태입니다. 압살롬 진영과 다윗 진영은 1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압살롬의 병력은 성경에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2만 명은 넘었다고 봅니다. 다윗은 최대 1,000~ 2,000명입니다. 두 진영이 맞붙으면 게임이 안 되는 병력 차이입니다.. 다윗이 왕궁을 떠날 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반대로 제사장 2명을 남겨 둡니다.(삼하 15:25–26) 다윗은 언약궤를 충분히 이용할 법도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남겨진 사람은 다윗 친구이자 책사인 후새입니다.
아히도벨과 후새의 전략
본문은 압살롬이 무혈입성하고 나서 최초의 국무회의를 하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안건은 “다윗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였습니다. 압살롬의 책사인 아히도벨과 다윗의 첩자 후새가 안을 제시합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 편이고, 후새는 다윗 편 기억하시면서 본문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아히도벨은 안은 삼하 17장 1~3절입니다. 후새의 전략은요 삼하 17장 8~13절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를 알아봅니다. 일단 말한 분량이 다릅니다. 아히도벨은 3개 절로 깔끔한데 후새는 6개 절로 장황합니다. 단어 수도 아히도벨은 227자인데 후새는 551자입니다. 문장을 분석해 보니 아히도벨은 비유법 하나도 없습니다. 후새는 6개나 있습니다. 비유법 3 개 과장법이 3개 입니다. 아히도벨은 나에게 정예병사 12,000 명만 주면 당장 다윗을 추격해서 목을 가져오겠다고 합니다. 다윗만 죽이면 백성들은 저절로 압살롬에게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다윗을 “쳐 죽인다.”는 거친 표현을 씁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책사였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을 배반하고 반역에 가담했고 쳐 죽여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악감정을 가졌는지는 나중에 언급하겠습니다. 아히도벨의 제안은 군더더기 하나 없습니다. 성공 확률 100%의 제안입니다. 반면 후새는 완전히 아히도벨과 정반대 의견입니다. 한 마디로 선조치 후 공격이었습니다. “지금 가면 다 죽는다. 일단 전국적으로 동원령을 내려 병사를 더 모으자. 그리고 압살롬 당신이 최전방에 서서 개선장군처럼 앞장서서 나가야 한다.”하며 압살롬을 추켜 세워 허영심을 자극합니다. 후새는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6개의 비유법을 씁니다. 표현을 다시 한번 봅니다.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같이 격분했다.”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바다의 모래알 같이 모으자” “아침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덮치자.”.” 그리고 마지막이 제일 압권입니다. “만약 다윗이 성에 숨으면 그 성 전체를 밧줄로 꽁꽁 묶어서 끌어내려서 가루로 만들어 강을 메워 돌 하나 보이지 않게 하자!”라고 했습니다. 이게 가능이나 합니까? 성을 어떻게 밧줄로 꽁꽁 묶습니까? 크레인도 없는 시대였습니다. 또 어떻게 집 채만 한 성벽을 밀가루처럼 부술 수 있겠습니까?
아히도벨과 후새의 전략에 대한 반응
이런 두 사람의 제안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아히도벨은 압살롬과 장로들만 옳게 여겼습니다.(삼하 17:4). 후새 의견을 듣고는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옳게 여겼다고 평했습니다.(14) 후새의 의견은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킬 정도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후새의 설득력을 통해 배우는 점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두 사람의 의견을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후새의 설득력을 배울 수 있습니다. 형제님들이 강단에 서는 목적은 청중을 설득을 하기 위해 섭니다. 성경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상대를 설득을 해야 합니다.. 본문을 누군가를 설득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하이도벨과 후새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아히도벨은 남성형 설명을 했고 후새는 여성형 설명을 했습니다. 남성들은 여성에 비해 대체적으로 드라이합니다. 유머에 경상도 남성들이 퇴근하면 딱 세 마디 한다고 합니다. ''아는! 밥 묵자! 자자!'' 좀 시간이 남으면 한 마디 더합니다. “리모컨!!” 남성들은 아내와 말로 싸우면 100% 패합니다. 그래서 설명을 듣기도 전에 말을 중단시키며 “요점이 뭐야!” 또는”“그래서~ 결론은~~”라고 하거나 “팩트가 뭐야! 팩트만 말해!”라고 잘합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다릅니다. 어떤 사건을 남에게 전달할 때 어떻게 합니까? 팩트만 말합니까? 아닙니다. 그날 날씨, 분위기, 그 사람의 표정, 그 집 벽지의 색깔, 조명 등 주변 정황부터 시작하여 그림을 그려 주듯이 말을 합니다. 후새는 이렇게 설득을 한 것입니다. 사람 마음에 그림을 그려 주듯이 하면 설득력이 커집니다.
두 번째는 뇌 구조에 따라 아히도벨은 좌뇌를 자극했고, 후새는 우뇌를 자극했습니다. 좌뇌는 지성을 담당하고 우뇌는 감성을 담당합니다. 아히도벨은 지성에 호소했고 후새는 감성에 호소합니다. 한 마디로 가슴으로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아히도벨의 말은 이성적이고 논리성이었지만 설득력은 없었습니다. 후새는 마치 눈으로 보고 느끼게 해 주었고 마음으로 따르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대단히 이성적인 것 같지만 감정에 따라 많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감정을 한번 상하게 하면 좀처럼 회복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부딪히는 일이 될 수 있으면 없게 우리의 감정을 잘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남을 설득하려면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 주어야 합니다. 아히도벨은 어떻습니까? 자기중심적인 입장에서 만 말합니다. “나에게 병사를 달라. 내가 다윗을 치겠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어투도 자기중심적이고 권위적이었으리라 추측합니다. 후새는 듣는 사람 중심으로 말을 했습니다. “왕께서는~~ 왕도 아시거니와~~ 당신께로~~ 끝에 가서는 우리가~~”라고 말하며 주어를 내가 아니라 우리를 넣어서 말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 뒤에는 온 이스라엘이 버티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의사소통의 기본은 공감입니다. 상대의 감정을 잘 파악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전달할 때 공감할 수 있습니다. 권위적이고 강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렵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의 공유
제가 10여 년 전에 두일초등학교에서 여름캠프 때 진화론 특강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제가 의욕이 앞서서 PPT 50장을 준비했습니다. 전공자도 어려운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론, 일반 상대론도 넣었습니다. 잘 준비했다고 생각하고 시작을 했는데 5장을 넘어가기 전에 성도님들 반이 졸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가장 믿었던 장로님이 제일 먼저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45장은 무성영화를 보듯이 빠르게 슬라이드를 넘기면서 황급히 끝낸 적이 있습니다. 강당 환경이 30도가 넘는 한 여름이었고 첫날밤을 보낸 성도님들은 교제하느라 잠도 설쳤을 것이고 결정적으로 점식 식사를 막 끝낸 시간대였습니다. 강의 상황과 강의를 듣는 대상의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고 지식만 나열하고 설득하려고 하지 않은 저의 실패담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강단에 세우신 지가 벌써 10년이 넘어갑니다. 오늘이 139번째 말씀 교제입니다. 저의 일 천한 노하우지만 공유를 해 보겠습니다. 저의 방법이 결코 정답은 아닙니다.
저는 강단에 설 때 원고를 준비합니다. 원고를 안 보고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게 최종 목표입니다. 그런데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원고를 작성할 때는 입으로 중얼중얼하면서 구어체로 작성합니다. 옆에 자녀를 앉혀 놓고 말해주듯이 작성을 합니다. 그리고 큰소리로 한번 원고를 읽어보면서 리허설을 합니다. 머리로 써놓은 원고와 말로 읽을 때는 또 다릅니다. 문어체는 말로 할 때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구어체로 고칩니다.
가장 어려운 거는 욕심을 버리는 일입니다. 준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원고 장수가 늘어납니다. 내용도 복잡해집니다. 듣는 청중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인지능력은 20분까지가 최고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점점 하향곡선을 그리다 30~40분이면 바닥을 칩니다. 40분이 넘어가면 잘 머리에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그것이 쉽지 않아 생각한 것이 원고의 매수를 철저히 제한합니다. 그래서 주일 말씀은 A4지 5장, 수요집회 말씀은 A4지 4장으로 합니다. 단 한 글자도 다음 장으로 넘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글씨 크기 10포인트, 줄간격 160%, 좌우여백 30미리, 상하 15로 정하고 단 한 줄도 다음장으로 넘기지 않습니다. 주제에 불필요한 부분은 계속 버립니다.
강의 목소의 톤은 솔이 가장 좋습니다. 너무 낮으면 듣는 사람 졸게 만듭니다.
강단에 올라오기 전에는 탄산음료는 절대 마시지 않습니다. 중간에 “커억~ 커억~”하면서 계속 트름이 올라 옵니다.
강당에 올라오기 전에 거울을 항상 봅니다. 복장을 최대한 단정히 하고 이빨에 고춧가루 끼었나 살펴봅니다. 여러분이 제 고춧가루 보느라 말씀이 잘 안 들어오는 것을 방지합니다.
강단에서 시선 처리도 좌우 가운데 골고루 보려고 노력합니다. 가장 중요한 거는 본문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주시는 몇 가지 교훈들은 잘 전달해야 합니다. 내용을 구성할 때는 3가지 요소를 저는 고려합니다. 첫째 정보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강의를 듣고 “새롭게 배우는 게 있네~”라고 느끼면 지적호기심을 자극하게 됩니다. 나도 알고 상대도 알고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내용을 강단에서 또 전하면 서로 불편합니다. 두 번째 내용에 감동이 있으면 좋습니다. 감동을 주기 위해 예화, 경험, 고전, 역사적 사건 등을 동원합니다. 이게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입니다. 세 번째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재미를 위해 유머를 곁들이면 좋습니다. 유머는 말씀 내용을 살려 주는 내용이 좋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정보, 감동, 재미 3요소입니다.
내용에 정보력을 넣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합니다. 주석은 당연히 참고합니다. 필요하면 성경구절의 영어의 의미, 원어의 의미도 살펴봅니다. 그리고 본문으로 다른 사람은 어떻게 설교했는지도 들어 봅니다. 요즈음은 AI 검색이 가능해서 좋습니다. ChatGPT로 질문하면 1억에서 2억 개의 쿼리를 참조해서 알려준답니다. “창세기 1장으로 10페이지 분량의 설교문을 PPT로 그림을 많이 넣어서 만들어줘~”라고 명령하면 아주 훌륭한 자료를 만들어 줍니다. 노래도 작곡해 주는 오픈 AI도 있으니 성도님들도 잘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몇 가지 추천합니다. Chat GPT, Image Creator, LilysAI, Gamma, Suno, Perplexity, WRIRN(뤼튼), ADOT(에이닷)입니다.
후새의 소식을 요단강 가에 진 친 다윗에게 전달하는 과정
삼하 17장 15~22절은 첩자 후새가 현재 요단 강가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다윗에게 궁에서 결정한 1급 기밀이 전달되는 급박한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본문은 여러 번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제가 후새처럼 마음에 그림이 그려지듯이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람 이름이 나오면 상당히 헛갈리니까 사람 이름은 생략합니다. 다윗왕이 왕국을 떠날 때 대제사장 2명은 연락책으로 남겨 둡니다. 대제사장에게는 각각 한명씩 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성 안에 있으면 압살롬에게 잡혀서 몰살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벽 밖에 남동쪽 50미터 지점 우물 곁에 어물쩍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성안 출입이 자유로운 여종에게 시켜서 후새와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여인들이 물동이를 지고 다니는 모습이 너무 흔해서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후새는 이 여종에게 “다윗 일행이 오늘 밤 요단강을 건너지 않으면 압살롬의 마음이 변해 몰살될 수 있으니 빨리 건너라.”는 정보를 전달합니다. 우물에서 전달받은 제사장 2명은 나이가 많으니 아들 2명을 보냅니다. 그런데 압살롬편의 한 청년이 이를 알게 되면서 이 상황을 압살롬에게 알립니다. 압살롬은 즉시 체포조를 파견합니다. 제사장의 두 아들은 쫓기는 신세입니다. 이들은 도망가다 바후림의 한집 우물에 숨습니다. 우물은 큰 우물이 아니고 우기 때 물을 받았다가 쓰는 작은 우물이었습니다. 안에는 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추격조가 이 집에 들이닥칩니다. 집 여주인이 다윗 편입니다. 2명이 있는 우물의 덮개를 덥고 그 위에 곡식을 널어서 위장합니다. 그리고 추격조에게는 2명의 아들은 시내를 이미 건너갔다고 거짓말을 하고 구해줍니다. 우물에서 나온 아들들이 1급 정보를 다윗에게 전달합니다. 이에 다윗일행은 밤새도록 요단강을 건너 안전한 장소로 이동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주위의 모든 손들이 다윗을 돕고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아히도벨의 최후
17장 23절은 아히도벨이 목매어 죽습니다. 아히도벨은 머리가 비상하고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는 압살롬 정권과 자신의 미래를 미리 내다봅니다. 후새의 계략을 선택한 압살롬은 반드시 실패하고 자신은 숙청 대상 1호가 될게 뻔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립니다. 아히도벨이 왜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갔을까요?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친할아버지입니다. 다윗은 아히도벨에게는 손녀 가정을 파탄 내고 손녀사위였던 우리아를 죽게 만든 살인교사범입니다. 원수를 갑으로려고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했고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자살은 안됩니다. 우리의 생명도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긴 사명을 다 완수하기까지는 우리를 안 데려가신다는 의연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압살롬의 최후
17장 25,26절은 압살롬이 군대장관을 아마사로 세우고 전쟁에 참전하는 내용입니다. 참여 결과는 사무엘하18장 7절에 나옵니다. 압살롬 군대는 대패합니다. 전투가 있었던 마하나임 숲은 지대가 험하여 압살롬의 병사가 칼에 죽은 것보다 사고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압살롬은 도망가다 자기가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머리 칼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리게 됩니다. 요압이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자 청년 10명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쳐서 죽입니다. 압살롬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압살롬의 쿠데타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된 지 2주나 최대한 한 달이 못되어 그의 모든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삼하 18장 9,14,15) 압살롬은 이스라엘 최고의 미남이었습니다. 특히 머리칼이 최고여서 한번 깎으면 200세겔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2.3kg 나갔다고 합니다. 압살롬은 결국 그의 잘난 머리카락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을 돕는 손길들(소비, 마길, 바르실래)
그다음은 다윗의 마지막을 보겠습니다. 사무엘하 17장 27~28절 보십시오. 주변 사람들이 다윗에게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공급합니다. 하나님은 비록 다윗이 왕궁을 떠났지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본문에는 도와준 세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소비, 마길, 바르실래입니다. 이 세 사람은 다윗과 아무 연관이 없는 사람들인데 인도적으로 도와준 게 아닙니다. 소비는 다윗 덕분에 권력을 얻은 자였습니다. 마길은 삼하 10장에 10 요나단의 자손을 보호함으로써 다윗에게 신뢰를 얻었던 사람입니다. 삼하 9장 4,5 절에 보면 바실래는 길르앗 사람으로 매우 부유한 장로였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전에 다윗이 망명 생활을 할 때 길르앗을 적으로부터 보호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다윗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인간관계교훈을 배웁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이 원수 졌던 사람인데 복수의 화살이 끝까지 다윗을 향했었습니다. 반대로 다윗이 조금이라도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들은 모두 다윗이 극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한결같이 도와줍니다. 우리도 원수를 만들면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특히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 주면 그게 상대에게 큰 도움이 되고 반드시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옵니다..
명령하시는 하나님
끝으로 삼하 17장 14절을 보고 정리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셨음이라”의 옛날 개역한글은 여호와께서 작정하셨다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여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다윗을 섬세하게 도와주십니다.. 중간에 일어난 사건 중 하나라도 삐끗했으면 다윗은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한 여인이 우물 안에 있던 2명을 곡식만 안 덮어 줬어도 다윗은 끝장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은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보이지 않는 손길로 함께하시고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우리는 상황이 좋든 좋지 않든 이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겠습니다.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주어는 내가 아니라 바로 이 명령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이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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